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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천주교는 자생적으로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시대적 배경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된 18세기 말엽의 조선사회는, 양반사회의 모순이 중첩되어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이 그치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민중의 생활이 도탄에 빠져, 새로운 사회질서를 찾던 변혁기의 왕조사회였다.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유교적 전통(성리학)은 현실의 여러 모순을 극복하기에는 힘이 부족하였다.
그러던 중 중국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사상과 문물들은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이 완고한 현실의 타파를 위한 새로운 운동(실학)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한편 이러한 문명의 흐름을 타고 서구의 그리스도교 사상도 들어오게 되었는데, 당시 중국에 보내진 외교사절단을 통하여 {천주실의}, {칠극} 등의 천주교 교리서가 들어와 실학파들과 남인계 소장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지게 되었다.
학문적 호기심으로 연구되던 천주학은 천진암과 주어사의 연구모임인 '강학회'를 통해 신앙적 실천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마침내 이벽, 정약용, 권철신, 권일신 등은 천주교에 대한 지식의 폭을 넓히고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이승훈을 북경에 보내게 되었다.
2. 교회의 창립(1784년)
1784년,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많은 교리서와 성서 그리고 성물을 가지고 귀국한 후 뒤이어 이벽 등이 영세 입교하였고, 서울의 명례방에서 정기적인 종교집회를 마련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면서 한국교회가 탄생되었다.
지금까지 단 한 사람의 전교신부조차 찾아온 일이 없었던 아시아의 한 왕국에 복음을 심기 위해 하느님은 기적적으로 한국교회를 창설하신 것이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 민족 스스로의 깨우침으로 천주교 교리를 받아들여 신앙의 싹을 틔웠고, 평신도가 주축이 되어 오랜 박해의 기간 동안 신앙을 증거하고 키워 온 자랑스런 전통을 가지게 되었다.
참고로, 가끔 이탈리아 예수회 학자들은 이런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의 천주교회사는 500년이 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일단,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 세스페데스(스페인 예수회 신부) 수사가 조선에서 군종신부로서 선교활동을 했던 것에서 조선에 이미 천주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또, 세스페데스 신부에 의해 일본에서 이미 세례를 받았던 조선인(임진왜란 전에 끌려갔던 포로, 도공 등)들이 임진왜란 후에 조선에 남아서 세례를 받고, 또 세스페데스가 조선인들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이 왜란 후에 세례촌을 이루며 살았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확실한 역사적 사료나 근거가 남아 있지 않지만 일단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계속 강조합니다. 즉, 한국천주교회는 예수회에 의해 창립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사실, 이것은 예수회가 자신들의 회의 역사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주장하는 가설입니다. 여기에 한국 예수회원들은 이 예수회의 의견에 동조합니다. 게다가 수많은 서구의 예수회원들의 주장으로 유럽 역사학 계열은 한국이 예수회에 의해 선교되었다고 대부분 인정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사학자들은 당연히 교회가 자생적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이승훈의 세례부터가 진정한 천주교의 시작이라는 것이지요.
또, 광해군 때에도 천주교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들도 제시되고 있습니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천주학 서적도 여러 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하지만, 이것은 대부분 중국에서 들여 온 것으로, 당시 조선 사회와는 상관이 없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조선 천주교회 창설시대의 시련>
* 조상 제사 문제와 신해 교난(신해교난)(1) 최초의 수난과 임시준 성직제도(임시준 성직제도)이 벽은 수십 인의 동지들과 더불어 1784년 겨울부터 김범우의 집에 모여 주일 행사를 거행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조선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기적을 보이게 되었으나, 이 신설 교회는 그후 몇달도 못가서 정조 9년 을사(을사, 1785) 3월에 관헌에게 발각되어 그곳에 모였던 신자들은 잡히고, 교회 서적· 성화 등은 압수되어 형조에 넘겨졌다. 그래서 이후 억지로나마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한불 수호조약이 비준된 1887년에 이르기까지의 1백 3년동안 공적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그러나 이때 형조 판서이던 김화진은 잡혀 온 신자들이 이름난 양반 집의 자제들 로서 잘못하여 입교하게 된 것으로 여기고, 그들을 타일러 내보내고, 다만 그 집을 교회로 삼았던 김범우만을 잡아 가두게 하였다. 이에 권일신이 그의 아들 상명과 이윤하(이○光의8대손이며, 권일신의 매부) · 이총억· 정 섭 등 5인을 거느리고, 형조로 달려가 그와 함께 다스려 줄 것과 예수성상 등의 반환을 요청하니, 형조 판서는 그들이 또한 이름난 집안의 사람임을 알고, 크게 놀래어 꾸짖고 성상등을 내주었다. 그리고 형조에서는 김범우를 엄히 문초하고 옥에 가두었다가 그해 가을에 밀양 단장으로 귀양 보냈는데, 그는 그곳에 가서 수주일 후, 태형에서 입은 상처로 객사하게 되었으니, 그는 조선 천주교 사상 첫번째의 순교자이었다. 이 때, 형조에서 양반 출신의 신자들에 대하여 관대한 태도를 보이게 된 것은 때마침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가 탕평책을 써서 인재를 등용하고, 히 남인 출신의 채제공을 예주 판서· 병조 판서 등으로 삼아 그 일파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채제공은 그뒤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정조 17년(1783)에는 영의정에까지 올라 정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게 되었으므로 그의 재직 시절에는 천주교 박해가 크게 일어나지 않았었다. 이 것은 채제공이 정조의 아버지이며 조의 아들로서 영조 8년(1762)에 계모 정순 왕후의 책동으로 피살된 사도 세자를 동정함으로써 10년 뒤에 분파된 남인 중의 시파(시파)에 속하여, 정순 왕후 일파의 벽파(벽파)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정조 시대에 있어서 천주교회가 창설되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한편 정조가 그를 동정하던 남인 시파의 인재를 감싸준 데 말이암은 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 천주교회는 비록 형조 금리의 적발로 한 때 해산되고, 성균관 유생 이용서 등 이동문을 유림에 돌려 이의 철저한 제거책을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힘으로 되살아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승훈도 그의 동생이던 이치운의 반대에 못이기어 한때 마음이 흔들렸으나, 1786년 봄부터는 다시 교회운동을 일으켜, 북경 교회를 본따 권일신이 주교가 되는 한편, 이승훈, 정약전, 최창현, 내포의 이존창, 전주의 유항검 등 10여 명의 신부(신부)가 되는 가성직제(가성직제)를 들고,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고 세례를 주며, 고죄(고죄)를 듣고 견진 성사(견진성사)를 베풀며 미사를 지냈다.(2) 조상 제사 문제와 신해 교난이러한 가성직제를 몇해 동안 시행하는 사이에 권일신 등은 교회 서적을 다시 검토하여 본 결과 1788년에 이르러 의문이 생겨 이를 중지하고 북경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10월에 떠나는 동지사 이성원 일행을 따라 윤유일로 하여금 밀서를 가지고 북경에 들어가, 이를 북경 주교 구베아(Gouvea)에게 전달 하고 조선 교회의 사정을 자세히 알리게 하였다. 북경주교는 이 편지를 받고 크게 감탄하는 한편, 곧 가정직제의 불가함과 세례 이외의 어떠한 성사도 집행할 수 없음을 적은 답서를 만들어 주니, 윤유일 바오로는 이것을 가지고 이듬해 3월에 서울로 돌아와 이를 이승훈· 권일신에게 넘겨주었다. 이에 권일신 등은 북경 주교의 지도에 따라 이제까지 집행해 오던 성무를 중지하고 곧 그해 5월에 떠나는 사은사 황인점 일행을 따라, 다시 윤유일 로 하여금 밀서를 가지고 북경에 들어가게 하였다. 이 밀서에는 신부의 파견을 간청하는 외에 조선에 있어서의 조상 제사 등에 관한 문제도 문의하였다.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받고, 북경 주교가 다시 감탄하는 한편 멀지 않아 한 신부를 보내줄 터이니 모든 준비를 갖출 것과 조상 제사의 미신 행위는 금지한다는 뜻을 적은 답서를 만들어 주니, 윤유일들은 이것을 가지고 그해(1790) 10월에 서울로 돌아왔다. 이 답서를 받은 조선교회는 신부를 맞게 될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에 즐거워하였으나, 한편 조상 제사를 미신이라고 단정하여 결코 행하지 말도록 하라는 주교의 교시로 많은 신자들이 용기를 잃고 반대자들 에게 좋은 구실을 주게 되었다. 그 결과 이듬해 신해년(1791) 겨울에는 마침내 전라도 진산에서 정약용 의 외종(외종)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하는 신해 교난을 겪게 되었다. 윤지충은 의학에 정통한 윤 경의 아들로 진산에서 태어나 1783년 봄에 소과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이듬해에는 서울로 올라와 대과를 치루기 위해 글을 닦고 있었는데, 때마침 김범우의 집에서《천주실의》.《칠극》 등을 얻어 보고, 내종형 정약전의 가르침에 따라 1787년에 세례를 받고 굳게 신앙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북경 주교의 명령에 따라 조상의 제사를 폐지하고, 그 신주를 불태워 재를 뒤뜰 안에 묻었을 뿐더러, 1791년 5월에 그의 어머니 권씨가 별세하자 그 외종 권상연과 더불어 모든 예절을 갖추어 8월에 장례를 치렀으나, 오직 그의 신주를 만들지 않고 제사도 드리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장례에 참석했던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로부터 불효 자식 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고 반대자들의 고발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소문을 듣고, 서울에 살던 승정원 가주서(승정원가주서) 홍낙안은 그해 10월에 장문(장문)의 고발장을 좌의정 채제공에게 올려 윤지충을 처벌하여 줄 것을 진언하는 한편, 진산 군수 신사원에게는 그의 집을 수색하여 그들을 체포하도록 요청하였 는데, 홍낙안은 이제 앞서 1787년과 이듬해에도 천주교를 몹시 반대하는 글을 임금에게 올려 이를 근절하려는 운동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짐작한 윤지충은 한때 광주 고모대그로 피신하였 으나, 그의 숙부가 대신 잡혔다는 소문을 듣고, 곧 귀향하여 권상연과 함께 10월 26일 진산 군수에게 자수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그곳에서 문초를 받고, 30일에는 전라 감사 정민시가 있는 전주로 옮겨져 또한 신문을 받고, 임금의 윤허를 얻어 그해 11월 13일(양력 12월 8일)에 그곳 형장에서 목을 잘렸다. 이 진산 사건이 알려지자 반대파의 유생들은 11월부터 한 달 동안에 걸쳐 30여 통의 글을 임금에게 올려, 천주교를 엄치 다스릴 것을 청원하였다. 그 결과 11월 3일에는 권일신과 평택 현감 이승훈이 잡혀, 이승훈은 벼슬을 빼앗기고, 권일신은 그달 16일 충청도 예산으로 귀양가던 도중 형벌에서 받은 몸의 상처로 죽었다. 이승훈은 가성직제를 그만두게 된 1789년에 평택 현감으로 부임하였다가 해임되었는데, 그뒤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건이 발각된 1795년 7월에 이르러 예산으로 유배되었다. 이 밖에 진산 사건을 계기로 하여 그해 11월에는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우던 이존창도 잡혔다가 천주교를 요술이라고 공격함으로써 석방되고, 충청도 홍주 지방에서 친척 친지 30여 명을 입교케 했던 원 시장(원시장)도 잡혀 온갖 악형을 받다가 1792년 12월에 옥사하였다. 이렇듯이 신해 교난은 위정자들로 하여금 비로소 양반 계급의 신자들에 까지 박해의 손을 뻗게 함에 좋은 구실을 얻게 하였는데, 이것은 이후 근 1백년 동안을 두고 거듭되는 박해의 표면적 이유로 되었다. 그것은 천주교 신자들이 4대조까지의 신주를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주자가례(주자가례)》의 가르침을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이 벽. 이승훈. 권일신 등의 조선 천주교회 창설(3) 최초의 영세자 이 승훈천진암· 주어사 강학회에 참석한 이승훈은 이미 그의 마음속에 천주님의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 있었다. 그는 그 무렵 서울 서소문 밖의 반석방 (반석방, 현재 중림동)에 살고 있었는데, 시문이 뛰어나 1780년 가을 소과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의 문집이 전하지 않아 그 시문의 전모를 알기는 어려우나 여기저기 산견되는 바를 보면, 범수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이헌경은 그의 시를 평하여 “그가 이미 이루어 놓은 시를 보면 정슬 청형(정승 청형)함이 상나라의 주돈이나 주나라의 옥찬이 아니랴?”하고 평가하였다. 이처럼 시문에 뛰어난 그는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에 참석한 뒤로 서학의 책들을 읽으며 이 벽과 함께 천주교 신봉 운동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러는 사이에 여러 가지 의문점이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천주교 교리와 재래 습속과의 불일치, 천주교 사회와 구사회(구사회)의 모순 등을 느끼게 된 점이었다. 이러한 의문점을 해명하기 위하여 교리 연구원을 북경에 보내기로 하였 는데, 그에 뽑힌 사람이 27세의 청년 이승훈이었다. 이것은 때마침 그의 부친 이동욱(이동욱)이 1783년 10월에 동지사 겸 사은사 황인점의 서장관 (서장관)이 되어 서울을 떠나 북경으로 가게 되었으므로 그를 따라가게 함으로써 감시인의 눈을 피하고자 함에서 취하여진 방책이었다. 이리하여 이승훈은 출발에 앞서 교리를 공부하고, 이 벽으로부터 주어진 사명의 중대함과 북경 천주당의 성직자를 찾아가 그 지도를 받을 것과 주요한 서적들을 얻어 올 것 등의 부탁을 받고, 동지사 일행 수백 명 중에 끼어 그 해 10월 14일에 서울을 떠나 12월 21일 북경에 도착하였다. 동지사 일행이 북경에 40여 일 동안 머물게 되니, 이 사이에 이승훈은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맡아보던 북천주당(북천주당)을 자주 찾아가서 필답 (필답)으로 교리를 배우고, 영신상의 모든 준비를 갖추게 되자 귀국에 앞서 그곳에서 귀국에 앞서 그곳에서 이듬해 양력 2월에 예수회 프랑스 신부 라몽(Louis de Grammont)으로부터 조선 교회의 주춧돌이 된다는 뜻에서 베드로(Peter, 바위)라는 교명을 얻고 세례를 받았다.(4) 조선 교회 창설
조선인 선비로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참된 신자가 된 이승훈은 수십 권의 서적과 성화(성화) · 성물(성물,묵주) 등을 얻어가지고, 동지사 일행을 따라 1784년 3월 24일 서울로 돌아와 신앙 생활을 전개하는 한편, 서적·성물 등을 이 벽에게 넘겨주었다.이에 이 벽은 곧 고요한 곳에 숨어서 그 서적들을 자세히 읽고 연구함으로써 천주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어 복음 전파에 나섰다. 그러므로 이승훈은 이 벽에게 요한 세자(세자)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주고, 그해 11월에는 양근으로 권철신 형제를 찾아가 권일신에게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주었는데, 이 세 사람은 조선교회 창설의 주동 인물이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정약전 3형제를 비롯한 양반 계급으로부터 학식이 높은 중국어 역관(역관), 김범우, 최인길 들과 같은 중인계급(중인계급)과 충청도 내표(내포, 아산)지방의 이존창(이존창)과 전라도 전주의 양반 유항검 등도 입교시켜 이미 수십 명의 영세 신자(영세신자)를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벽· 이승훈· 정약전 3형제 권일신 형제등은 1784년 갑진 겨울 어느날, 서울 남부 명례동(현 명동)에 있던 역관 김범우 도마스의 집 대청 마루에 모여 이 벽을 지도자로 삼아, 주일(주일) 행사를 지냄으로써 조선교회를 창설하게 되었다. 이때 이 벽은 머리에 책건(책건)을 쓰고 벽(벽)을 등지고 앉아 설교하고, 그 앞에 이승훈 · 정약전 형제, 권일신 등이 모두 제자(제자)라 일컫고 시좌(시좌)하였는데, 이 예법이 유교의 사제례(사제례)보다 더욱 엄하 였다. 이들이 날을 정하여 거듭 이러한 주일 의식을 드리니, 몇 달 사이에 신자가 수십 인이 되었다. 이외같이 밖으로부터 성직자가 입국하여 전교함이 없이 오로지 남인(남인) 선비들의 교리 연구의 결과로 자발적으로 천주교회를 세우게 된 일은 세계 전교사상(전교사상) 우리 민족만이 가진 바로 크나 큰 자랑인 것이다. 이때부터 교회 창설자들은 참되고 올바른 종교를 이 나라에 세우는 한편, 온갖 미신 행위를 물리치며, 서로 ‘교우(교우)’라고 불러 그 당시의 엄격한 계급 제도와 일부다처제(일부다처제) 를 타파하는 일을 일으키며, 기도문 등을 오로지 국문으로 만들어 쓰는 한글 전용 운동을 시작하며, 서양 문화 를 받아들여 문호 개방(문호개방) 운동을 일으키는 등으로 이 나라를 근대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다.
조선 선비들의 천주교 연구(5)이 익(이익)과 그 문인들의 천주교 연구
이 수광이 일으킨 실학 운동 가운데 특히 천주교 연구 운동이 그뒤 1백여 년을 지나 한강 유역인 광주 땅에 숨어 살았던 남인 학자 이익(이익, 1681~1763)과 그 문인들 사이에서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 익은 당파 싸움이 가장 격렬했던 숙종 8년(1682)에 대사헌 이 하진의 아들로 태어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광주 성호에 숨어살면서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몸을 바쳐, 실학에 관한 <성호새설>을 비롯하여 많은 시문(시문)을 지었다. 그는 특히 마테오 릿치 신부의 <천주실의>, 아담 샬 신부의 <주제군징>, 이탈리아 사람인 판도자(Pantoja)의 <칠극>을 애독하고, 이들에 대한 발문 등을 쓰며, 제자들과 토론하였다. 그는 <천주실의>의 발문에서,그 학(학)은 오로지 천주를 존숭하고 있다. 천주는 곧 유가(유가)의 상재(상재)인데 그를 공경하고 섬기며 두려워하고 신앙함은 불교의 석가(석가)와 같다. ..그러나 그가 축건의 교를 배척하는 바는 오히려 다 같이 환망(환망)에 돌아감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라 평하고, 다시 <칠극>의 논평에서는,칠극은 서양의 판도자가 지은 바로서 곧 우리 유가의 극기설이다. ..일곱 가지 가운데 다시 절목이 많아서 조관이 차례지어 있고 비유가 간결하며, 그 속에는 우리 유가에서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데가 있으니, 이는 자기 욕망을 이기고 예(예)로 돌아가는 일을 돕는 공(공)이 있을 것이다.
라 기술하여 천주교의 공(공)을 인정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익은 제자 안정복(1712~1791)과 천주교에 대한 토론도 갖었었다. 안 정복도 광주 땅 덕곡에 숨어 살면서 이 익에게 글을 배운 실학자로서 <동사강목>. <광주지> 등의 많은 책을 지어 내고, 만년에는 영조의 부름을 받고, 세손(정조)의 스승이 되어, 정조 때에도 같은 벼슬을 살았다. 그는 1757년 46세 때에 마테오 릿치 신부의 <변학유독>을 읽고 이 익에게 "스승님께서도 이 책을 읽으셨습니까"라고 물었다 하니, 그들 사이에 천주교가 거듭 토론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기술하기를 "명경 석유(명경석유)로서 천주교 책을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하였으니, 1760년경에는 선비들 사이에 천학(천학) 또는 서학(서학) 이라고 부르던 천주교 서적이 크게 읽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안 정복은 그의 사위이던 직암 권일신들이 천주교를 믿는 운동을 일으켜, 조상들의 신주를 불살라버림을 보고 이것이 장차 당쟁의 불씨로 될 것을 두려워하여 <천학교>. ,천학문답>을 저술하여 그들을 개심(개심)케 하고자 꾀하였다. 더우기 그는 1784년에 사위의 형인 권철신에게 글을 보내어 다음과 같이 경고한 일이 있었다.이제 또 듣건대 서토의 학을 그대로 면치 못하여 떠들어대니 모든 젊은이들의 창도하는 바가 과연 무엇 때문에 그러한 것인가요... 또 듣건대 모모배(모모배, 이가환, 정약종, 이승훈, 이벽)가 서로 결약하여 신학의 설을 고습하고 어지럽게 말한다 하니, 이 모두 그대의 절실한 친구들이며 문도로다.이 무렵 성호의 제자들은 천주교를 서양에서 들어온 학문이라하여 '서학' 또는 천주님을 믿는 학문이라 하여 '천학,' 서양에서 들어온 새로운 학문 이라 하여 신학'(신학)'이라고 불렀다.(6) 홍 유한(홍유한, 1726~1785)의 천주교 신봉
성호 이 익의 제자들 중에는 천주교를 신앙하는 이들과 천주교를 신앙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안정복. 윤동규(1693~1773), 신후담(1702~1762)등 주로 나이가 많은 제자들은 서학의 서적들을 깊이 탐독하면서도 평생동안 믿어온 유교의 학문을 하루 아침에 버릴 수가 없어 천주교를 비판하고 믿지 않았다. 특히 신 후담은 서양 필방제(Franciscus Sambiasi) 신부가 지은 <영언리작>을 읽고 영혼불멸설과 서양 기독교 철학의 이론을 부인하는 <서학변>을 지었다. 이에 비하여 권철신, 홍유한 등 젊은 제자들은 서학 서적들을 읽고 새로운 진리에 심취한 나머지 이를 남몰래 신앙하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홍유한은 홀로 남몰래 신앙 생활을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홍유한은 인조 때 대사성(대사성)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낸 홍이상(홍이상) 의 후손으로, 본관은 풍산이며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홍중명 은 유명한 효자로서 나라에서 정려문을 세워주어, 그의 집 대문 앞에는 홍살문이 세워졌다. 이러한 집안에서 태어난 홍 유한은 16세 때부터 성호 이 익의 문하에 가서 글을 읽으며 정상기, 윤동규, 신후담, 안정복, 권철신 등 당대의 쟁쟁한 실학자들과 교유하는 한편, 성호의 조카 이용휴, 이병휴, 증손자 이삼환들과 사귀었다. 그러나, 홍유한은 태어나면서부터 오능(오능)이라는 불치의 독질에 걸려, 몸이 천성적으로 허약하고 마음은 비단처럼 고왔다. 그가 32세 되던 1757년 에 그의 아버지 홍창보(홍창보)가 돌아가시자, 그는 스승의 권고에 따라 몸을 휴양하기 위하여 서울의 집을 팔고 충남 에산군 여촌(여촌)으로 이사를 갔다. 마음이 착한 홍유한은 마침내 <천주실의>, <칠극>, 직방외기<직방외기)>등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고 1770년부터는 이러한 복음서만을 읽으며 홀로 남몰래 천주교를 신앙하기 시작하였다. 거기서 18년을 산 홍유한은 50세가 되던 1775년에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천주교를 신앙하기 위하여 소백산 밑에 있는 구고리(구고리: 현재 경북 영주군 단산면)로 옮겨가 살면서 신앙 생활을 실천하였다. 그는 천주교의 축일이 7일마다 있음을 알고,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힘든 일을 하지 않고,묵상 수덕(묵상수덕)에 힘쓰며 맛있는 음식을 들지않았다. 욕망을 사악(사악)이라고 보아, 이것을 억제하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도중 에서 불쌍한 사람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그 사람을 대신 태워 끌고 가며, 매전 (매전)이 수해(수해)를 볼 때에는 그 값을 돌려 주었다 한다. 그는 권철신과 매우 친하여 이러한 신앙 생활을 10여 년 동안 하는 사이에 권철신의 서한을 40여 통이나 받고, 1785년 정월에는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영세를 받지 못하였으나 천주님으로부터 '화세(화세)"를 받은 듯하다.
* 동양에 처음으로 천주교를 전파한 사람은? *
동양에 천주교를 처음으로 전파한 성직자들은 인류애의 사상과 개척정신에 불타고 있던 예수회 신부들이었는데, 한국에 처음 전해진 것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수차 명나라에 사신으로 왕래한 이수광(李光)이 M.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 《중우론(重友論)》 등을 그의 저서《지봉유설(芝峰類說)》에 소개한 데서 비롯된다.
한편, 이수광과 같은 시대의 허균(許筠)도 베이징[北京]에서 천주교의 12가지 기도문인 《십이단(十二端)》을 가지고 귀국하였는데, 그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다.
조선 건국 초부터 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을 써온 결과 공리공론(空理空論)의 당쟁만을 일삼는 주자학(朱子學)이 성행하였고, 이같은 풍조에 싫증을 느낀 일부 학자층에서는 현실적인 학문, 즉 실학(實學)을 내세우게 되었으니 이수광은 바로 그 선구적 인물이었다.
실학은 필연적으로 천주교를 믿는 서학(西學)과 결부되어 그로부터 100년이 경과한 1700년대의 실학자 이익(李瀷)은 그의 문인 안정복(安鼎福) 등과 더불어 천주교를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특히 M.리치의 《천주실의》, 아담 샬[湯若望]의 《주제군징(主制群徵)》, 이탈리아 신부 판도자의 《칠극(七克)》 등을 애독하고 이들에 대한 발문(跋文)을 쓰기도 하였다.
이익과 안정복 사이에 검토된 천주교는 마침내 이들 문인에 의해 이것을 믿는 신봉운동(信奉運動)으로 발전하였으니, 그 주동자는 권철신(權哲身) ·일신(日身) 형제와 정약전(丁若銓) ·약종(若鍾) ·약용(若鏞)의 3형제 등이었다.
이들은 교리연구회를 열어 권철신 지도하에 수도생활을 시작하였고 권철신의 매부 이벽(李檗)도 참가하였다. 또한 정약전의 매부 이승훈(李承薰)도 참가하여 그는 교리연구차 베이징으로 건너가 1784년 2월, 귀국에 앞서 예수회 신부 그라몽[梁棟材]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領洗)자가 되었다.
그는 귀국 후 이벽 ·권철신 형제에게 대세(代洗)를 주었는데, 이들은 후에 조선교회 창설의 주동 인물이 되었다.
이리하여 정약전 3형제, 중국어 역관 김범우(金範禹) ·최인길(崔仁吉), 상인(常人) 출신의 이단원(李端源) 등 수십 명에게 대세를 주어 84년 겨울, 역관 김범우 집 대청에서 주일미사를 드리고 최초의 조선천주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한국의 천주교는 박해가 계속되는 형극(荊棘)의 길을 걸어야 했으며, 그러한 박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 때까지 계속되었다.
먼저 85년에는 전해 겨울에 창설한 조선천주교회가 형조 금리(禁吏)에게 발각되어 서적 ·성화가 압수되고 김범우가 귀양을 가게된다. 86년에 재건하였으나 91년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고발로 이른바 ‘진산사건(珍山事件)’이 터져 정약용의 외종(外從)인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처형당하였다. 95년 교회가 창설된 지 11년 만에 처음으로 성직자를 모시게 되었는데, 그가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이다.
주신부의 내한으로 교세가 확장되어 4,000명의 신도수를 헤아리게 되었으나 그의 밀입국을 밀고한 자가 있어, 주신부를 피신시키고 신부로 가장하였던 지황(池璜) ·윤유일(尹有一)은 포도청에서 타살 ·순교당하였다.
그 후 주신부는 6년간을 숨어서 전교에 힘썼으나,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총회장 최창현(崔昌顯)이 투옥되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써서 교인을 모조리 잡아들이라는 임금의 교서가 전국에 내려지자, 포졸들을 전국에 풀어 이단원을 비롯하여 이가환(李家煥) ·현감 이승훈, 승지 정약용, 홍낙민(洪樂民) ·권철신 ·정약종, 여회장(女會長)인 강완숙(姜完淑)과 그 가족을 잡아냈으며, 이어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다. 이때 희생된 교인수는 300명이 넘었으며, 나중에 자수한 주문모 신부도 한강 새남터에서 효수(梟首)되니, 이때부터 외국인 성직자를 새남터 형장에서 처형하는 선례가 되었다.
이리하여 천주교는 다시 지하로 잠복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36년간이나 목자(牧者) 없이 지내다가 강원도로 피신하였던 신대보(申大甫)와 그의 고종사촌인 이여진(李如眞) 등의 노력으로 재건되었는데, 이여진은 수차 베이징에 가서 조선 교회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이렇게 재건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무렵인 11년, 조선 국왕은 다시 전국에 명령하여 천주교도를 잡아들이게 하여 이른바 ‘지방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충청도를 비롯하여 경상도 ·강원도 등에서 수백 명이 잡혀 사형 또는 귀양을 갔으며, 일부는 석방되었다. 그러나 지방에서 박해가 일고 있을 때, 서울에서는 교회재건운동을 일으킨 청년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신유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의 둘째 아들 하상(夏祥) 바오로이다.
정하상은 16년부터 거의 해마다 베이징을 왕래하면서 신부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전교에도 힘썼다. 그러는 사이에도 27년 또다시 박해가 전라도 지방에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90여 명이 체포되었으나 다행히 순교자는 10여 명에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되었다. 31년 9월 9일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는 두 가지 교서를 발표하였으니, 그 하나는 조선교회를 베이징교구로부터 분리, 독립된 교구로 승격시킨다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브뤼기에르(한국성 蘇) 신부를 조선교구 초대 주교에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교회 창설 후 47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소신부가 조선 입국의 길을 찾다가 35년 뇌일혈로 급서하자 프랑스의 모방[羅伯多祿] 신부가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입국에 성공하였고, 뒤이어 샤스탕[鄭牙各伯] 신부가 입국하여 전교에 힘썼다.
이때 나신부는 외방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토착인 성직자 양성에 착안하고 최양업(崔良業), 최(崔)프란치스코, 김대건(金大建) 등 세 소년을 마카오로 보내 로마 인류복음화성성[傳敎聖省] 동양경리부에서 학문을 닦게 하였으니 이들은 조선시대에 해외로 보내진 최초의 유학생이었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서양학문을 배운 선구자들이었다.
37년, 로마 교황청은 중국 쓰촨성[四川省]에서 전교 중이던 앵베르[范世亨] 신부를 조선교구의 제2대 주교로 임명하여 그가 이듬해 정월 무사히 입국함으로써 조선교구 창설 7년 만에 비로소 주인을 만나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권세를 잡고 있던 김조순(金祖淳)은 천주교에 대하여 관대하였으므로, 그들 세 신부는 열심히 전교하여 2,000명 가까운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전국의 교우수가 9,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김조순이 죽고 풍양조씨(豊壤趙氏)가 세력을 잡자 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 118명이 체포되고, 그 중에서 정하상 ·유진길(劉進吉)을 비롯한 69명이 순교하였으며, 이때 외국인 신부 범주교 ·정신부 ·나신부 등도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가장 큰 일을 이룩한 순교자는 정하상이었다.
그는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잡힐 것을 예상하고 <상재상서(上宰相書)>의 글을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에게 올렸다. 이 글에서 천주교가 조금도 그릇된 교가 아님을 역사적으로 변호하고 주자학의 허례허식을 논박하였는데, 이 글은 87년 홍콩에서 책자로 간행되어 중국 전교에도 사용되었다.
한편, 마카오로 유학하였던 김대건은 44년 부제(副祭)가 되고 이듬해 조선교구 제3대 주교로 임명된 페레올[高] 주교의 집전으로 상하이[上海]에서 신품성사(神品聖事)를 받고 신부가 되었다.
같은 해 그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安敦伊] 신부와 함께 어렵게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700여 명에게 성사를 주었고 교우의 수는 갑자기 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페레올 신부의 명령으로, 앞서 함께 유학을 떠났던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李] 신부를 맞이하러 연평도에 갔다가 체포되어 ‘병오(丙午)박해’가 일어났다. 김대건 신부는 새남터에서 순교하고 현석문(玄錫文) 이하 20여 명이 잡혀 그 중 9명이 순교하였다.
로마 교황청은 1925년 한국 순교자 79명을 시복(諡福)하였다. 철종(哲宗)시대에 이르러 천주교는 보호받아 교세를 크게 떨쳤으며 베르뇌[張敬一] 신부를 비롯한 10여 명의 신부가 내한하고 최양업도 신부가 되어 귀국하였는데, 그는 전국의 3,70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철종이 죽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대원군이 집정하자, 다시 병인(丙寅)박해를 일으켜 1871년까지 근 1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후 외국 함선의 내침으로 박해를 거듭 겪어오다가 86년 한 ·프랑스 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가까스로 전교의 자유를 획득하였다.
그리하여 용산신학교의 개설, 성 바오로수녀회의 진출, 성서 활판소를 개설하였고, 98년에는 명동 대성당의 축성식을 올렸다. 1900년 전국에는 프랑스 성직자 40명, 한국인 신부 12명, 41곳의 성당과 4만 2000명의 신자가 있어 그 교세가 제주도에까지 퍼졌는데, 1901년 제주도에서 다시 한 번 박해를 겪어 700여 명의 교인이 희생을 당하였다.
이같이 계속되는 박해 속에서도 가톨릭교회는 발전을 거듭하여 일제강점기 말기인 41년에는 9개 교구와 169명의 외국인 신부, 139명의 한국인 신부, 18만 명의 신자로 증가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8일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압박이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일어 사용이 강요되고 일본식 이름으로의 창씨개명 ·신사참배 등을 강요하는 한편, 각 교구의 외국인 성직자를 가두었다가 미국인 성직자는 본국으로 추방하고 기타 성직자들은 행동을 감시하였다.
42년 서울 교구의 라리보 신부가 그 직책을 노기남(盧基南) 신부에게 넘기고 은퇴하자, 노신부는 교황청 지시에 따라 평양과 춘천교구장도 겸임하였다. 같은 해 12월 노신부는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주교 임명장을 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주교가 되었고, 43년에는 홍용호(洪龍浩) 신부가 평양교구장이 되어 이듬해 성성식(成聖式)을 가졌다. 한편 일제는 대구와 광주교구에 일본인 신부를 임명하고 각 성당들을 병사(兵舍)로 사용하는가 하면,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한국인 신부들을 구속하는 등 온갖 횡포를 자행하다가 8 ·15광복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국토가 양단되고, 북한 지역은 공산집단에 의해 종교 자체가 말살되면서 이 지역 천주교는 또다시 큰 박해를 받았다. 각 교구의 주교를 비롯하여 신부 ·수사(修士) ·수녀가 모조리 체포되고, 수많은 교인이 수난을 당하는 한편, 성당 ·수도원 ·신학교 ·병원 등의 시설은 모두 몰수하여 그들의 기관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수난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50년 6월 25일 남침을 자행한 북한군은 미처 피난가지 못한 남한 지역의 성직자 ·수도자를 납치하여 갔으며, 성당 ·학교 등은 파괴되고 많은 평신도가 희생당함으로써 한국 천주교 사상 마지막으로 여겨지는 박해를 겪어야만 했다.
6·25전쟁 후 북한지역의 천주교회는 거의 그 명맥을 잃었고 교인들도 자신이 교인임을 표면에 내세우지 못하는 비참한 환경에 처하였다.
반대로 남한지역의 천주교회는 54년, 6개 교구에 교우수 18만 9000명에 불과하던 것이 94년 12월 현재 15개 교구에 교인수 334만 명이라는 큰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한국 천주교회 통계」(2007)에 따르면, 2007년 12월 31일 현재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는 4,873,447명으로 총인구 50,034,357명(주민등록상 인구수 : 통계청 자료)의 9.7%를 차지하고 전년도에 비해서 2.2% 성장하였다. 천주교 신자수는 최근 10년 동안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성직자도 대주교 2명(한국인), 주교 18명(한국인 16, 외국인 2), 한국인 신부 2,072명, 외국인 신부 210명, 수사(修士) 한국인 496명, 외국인 21명, 수녀 한국인 6,632명, 외국인 212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이들이 운영하고 있는 문화 ·복지사업도 유치원 230, 초등학교 6, 중학교 26, 고등학교 36, 대학 10, 대신학교 6, 기타 특수학교 19곳에 이르고 있으며, 그 밖에 병원 ·의원 36곳, 종합복지기관 270곳 등을 운영하고 있다.
1969년에는 서울대교구의 대주교 김수환(金壽煥)스테파노 추기경(樞機卿)으로 임명되었다.
68년에는 100년 전 병인박해에서 순교한 근 1만 명의 교우 중에서 24위에게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서 시복(諡福)함으로써 한국의 복자위(福者位)는 모두 103위가 되었는데, 83년 9월 로마 교황청은 이들 복자를 다시 성인(聖人)으로 승품시켰고, 84년 5월6일 로마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서울 여의도에서 이들 복자위 성인 시성식을 집전하였다. 이어 88년에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44차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