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용을 금지함(2023.5)
13세기 軍事都市 合浦 스토리텔링
이종수(전, 중앙대)
□ 집필목적, 필요성
○ 지금까지 800 여년 역사에 묻혀 있었던 합포(合浦)는 고려시대 후기 거대한 군사도시였음. 따라서 합포 스토리텔링 발굴과 그 투어 루트개발을 통한 지역경제, 상권 활성화 및 문화적 다양성의 접목 필요성이 제기됨.
○ 13세기 경상도 合浦(馬山浦)의 강점은 天惠의 浦口, 일본과 근접, 조창과 물산의 집결지, 조운기반시설 완비 등임.
○ 고려는 원나라의 압력으로 東征에 참전해 막대한 손실을 입음. 일본 정벌에 소요된 함선·군량을 모두 부담함으로써 경제적 피폐를 더하게 됨. 또 많은 인원이 함선제조에 동원되고, 정벌군·소공·水夫 등으로 징발됨으로써 사회적 피폐가 가중됨.
○ 고려 후기 군사도시 합포의 장소마케팅은 역사적 장소와 인물, 장소나 인물에 얽힌 지역음식 등이 어우러진 스토리텔링 마케팅이 효과적임.
○ 마산 합포는 13세기 東征과 倭寇防禦 前哨基地로서 중대한 구심처였던 곳임. 혈기왕성한 세계 최강 원제국 군사들과 고려의 군사문화가 오늘날 酒黨 복국천국 스토리텔링 소재와 스토리가 됨. 戰爭이 남긴 飮食인 소주, 복어, 육포 등과 어우러진 軍事都市 ‘酒黨天國’ 합포를 중심으로 스토리텔링 마케팅이 요청됨. 개성, 창원(합포), 안동, 진도, 탐라, 일본 등을 오가며 남겨진 전쟁 스토리텔링임.
○ 이 글은 13세기 팍스 몽골리카와 동진, 고려와 합포, 탐라, 그리고 일본 동정관계에서의 합포 주둔 환경과 합포 특성 노정을 통한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특히 1274년 1차 일본 원정과 1281년 2차 일본원정의 동정기지 합포(1274〜1281) 장소음식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접근함.
○ 1260년대 쿠빌라이(元帝國 世祖, 忽必烈)는 지역에 출장기관으로 행중서성(行中書省:약칭 行省) 설치, 고려 정동행성은 개성에 위치.
〇 정동행성은 독자적인 관서건물에서 元의 사신을 영접하고 조서(詔書)를 奉承하였으며, 원에 賀聖節使, 賀正使를 파견. 정동행성은 합포현에 위치. 1280년의 합포 정동행성은 월영대 북쪽이었음.
○ 1274년 1차 동정 시 麗蒙 연합군 4만여 명과 전함 900척이, 2차 東征 시도 비슷한 규모의 병력과 함선이 합포에서 만들어지고, 出兵함. 합포는 일본정벌기간(1274〜1281) 동안 군사도시의 모습을 갖추고, 군수업체가 생겨남. 또 각지의 군량이 집산되어 시장이 융성하게 됨. 당시 합포에는 조선소와 주둔군 숙소, 주막, 군영이 빼곡하게 들어차 수많은 군사들이 들끓던 번창한 항구였음.
〇 몽고군의 모든 숙영, 숙소는 이동식 게르에서 해결함.
○ 합포는 개성, 안동, 금주(김해), 진도, 탐라를 수렴하고 아우르는 여몽연합군 구심체 역할을 띤 군사도시였음.
□ 기 : 1,2차 東征(1274∼1281)
□ 장면 1. 大都의 쿠빌라이(大元 황제)
○ 1271 원제국 성립, 대도(베이징) ; 1273 삼별초 토벌 명령, 쿠빌라이는 고려 공물의 양을 줄이는 대신 1,2차 東征 협력을 종용 ; 남송과 일본의 통상관계와 연합을 통해 元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동정 실행 ; 1279년 남송 멸망 ; 1281년 2차 동정 때 남송군 10만여 명 일본 해역 水沒
○ 합포의 삼별초 기습
- 배중손은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 한때 그들은 전주, 나주를 함락하고 부산포까지 진출하는 등 남해 일대를 삼별초가 지배. 원종은 원나라와 연합군을 구성해 삼별초 진압군을 출전.
- 1273.4.28일, 여몽 연합군 1만여 명이 탐라에 상륙, 김방경과 흔도 등은 함덕 서우봉오름 앞바다에서 삼별초 토벌, 평정함.
○ 세조가 홍다구를 총관, 동정부원수에 임명. 홍다구는 충청지역 뱃사공, 선원들이 기일에 맞추어 오지 못했다고 부부사(部夫使) 대장군 최면(최면)을 杖刑에 처함.
○ 1차 東征(1274)
○ 일본이 원의 요구에 불응하자 원나라는 합포(合浦: 마산)에다 정동행성(征東行城)을 두고, 10월 일본 정벌에 홀돈(忽敦)을 도원수(都元帥), 홍다구(洪茶丘)를 우부원수(右副元首), 유복형(劉復亨)을 좌부원수(左副元首)로 하고, 고려는 김방경(金方慶, 당 62세)을 도독사(都督使), 박지량과 김흔(차남)은 지병마사, 임개를 부사로 삼았으며, 김선(金侁,장남)을 좌군사(左軍使)로 위득유를 지병마사로 손세정을 부사로 삼고, 김문비(金文庇)를 우군사(右軍使)로, 나유와 박보를 지병마사, 반부를 부사로 한 이른바 삼익군(三翼軍)을 편성함.
○ 충렬왕은 1274년 4월 합포에 거둥하여 몽고·중국·고려의 군사를 크게 사열. 5월에 모든 군사가 합포에서 900척 분선 일본 동정 출발함. 대마도, 이키도, 하카다만 공격
○ 10일 간 대기전과 귀환
- 병력은 몽고군과 한인병이 2만 5천 명, 함선이 9백 척. 이 가운데 고려의 병력은 육군 8,000명, 수군 6,700명이었으나 艦船과 軍糧은 모두 고려의 부담임.
○ 원정군은 이틀 후 쓰시마섬[對馬島]에 상륙. 이곳에서 약 열흘 동안 머무르며 섬을 완전히 장악한 원정군은 다음 목표인 잇키섬[一岐島]을 점령하는 데까지 성공. 이 접전에서 일본군 1천여 명이 사망함.
○ 김방경의 장자 좌군사 김선 익사함(『고려사』권28, 「세가」28 충렬왕 즉위년 11월 을해). 기해일에 일본을 정벌하러 갔던 군대가 합포(合浦)에 돌아옴.
○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장일(張鎰, 1207~1276)을 파견하여 위로함.
□ 장면 2. 충렬왕과 제국공주
○ 1274년 충렬왕 즉위.
○ 1275년(충렬왕 원년) 음력 9월 30일 사판궁(沙坂宮)에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훗날의 충선왕임.
○ 1276년(충렬왕 2년) 음력 5월에는 충렬왕과 공주가 흥왕사에 행차. 그런데 공주가 흥왕사에 있는 금탑을 궁내로 뺏어오고, 그 금탑의 장식은 공주를 따라 고려로 들어왔던 시종 홀라대(忽刺歹), 삼가(三哥)가 훔쳐감. 얼마 후 충렬왕과 공주가 다시 흥왕사에 행차하였는데, 흥왕사의 중들이 금탑을 돌려달라고 애걸하였지만 공주는 이를 거부.
○ 1297년(충렬왕 23년) 공주는 수강궁 향각에 있으면서 시종에게 활짝 핀 작약을 하나 꺾어오라고 시켰다. 그리고는 이 작약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고 흐느끼더니, 얼마 후인 음력 5월 9일 발병, 음력 5월 21일 현성사에서 39세를 일기로 사망.
□ 장면 3. 안향
○ 3별초의 난이 일어났을 때 안향은 적들에게 붙잡혀 강화도에 갖혔는 꾀를 꾸며 빠져 나옴. 왕(원종)이 그의 행동을 옳게 여겨 그에게 상을 주고 1272년 감찰어사로 활약함.
〇 1276년, 안향은 합포진변소에 동원되어 노역에 복무하던 초공과 수수들은 틈틈이 스스로 농사지어 식량 마련. ‘자경이식’(自耕而食).
○ 1277년(충렬왕 3년, 당 34세) 부지밀직사사로 합포에 나가서 방수(防戍)함. 1277년 9월에 일본정벌 후의 전쟁대비를 위해 합포에 병마지휘영(兵馬指揮營)을 설치, 전함의 제조와 군량의 비축을 위해 장정을 징발
〇 원의 병력이 이동할 때마다 군량, 우마료, 사신미, 종자 등의 부담과 둔전경략사(군수기지사령부)설치에 다른 고려민의 부담이 격심함.
□ 장면 4. 김방경
○ 1271년 김방경은 교체된 원나라 원수 흔도와의 연합작전으로 진도를 공격해 배중손을 죽이고 삼별초를 진압. 삼별초의 남은 세력은 김통정을 중심으로 제주도로 이주해 또다시 진지를 구축함.
- 1273년 행영중군병마원수로 임명되어 원나라 장수 흔도, 홍다구 등과 함께 제주도를 공격, 평정. 4년간 지속된 삼별초의 난 종결.
○ 쿠빌라이는 김방경에게 고려인들이 좋아하는 쌀밥과 생선국을 하사함.
○ 1964년 일본의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는 여몽연합군의 1,2차 일본원정을 소설 <풍도(風濤)>에서 몽골제국에 의해 정벌에 나선 고려의 비애와 압제와 고난 아래에서도 고려왕실과 백성을 보호한 김방경의 고뇌를 잘 포착, 그 고뇌를 통해 고려 민중의 고난과 저항을 그려내고 그러한 고려 민중의 대몽 항쟁이 몽골의 일본 침략을 저지했다는 입장을 피력.
□ 장면 5. 합포, 칠포 복어잡이 어부 피납
○ 1280년 합포, 칠포 복어잡이 어부 2인이 왜국에 납치됨. 일본 당국이 전쟁준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첩보 입수목적의 납치였음(『고려사』29, 충렬왕 6년(1280)).
- 복어를 ‘서시유(西施乳)’라고 함. 성종 24년(1493년) 4월, 경상도 관찰사 이계남이 보고. 웅천(진해) 사는 공약명 등 24명이 굴과 생미역을 먹고 사망. 관찰사는 해물 채취를 전면 금지하겠다고 보고함.
- 서긍(徐兢)이 고려에 와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젓갈은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상용하던 음식이다”라는 내용이 나옴. 젓갈의 종류가 이미 150여 가지로 담수어, 해수어는 물론, 홍합, 전복, 복어, 조개류 등의 패류와 새우류, 게류 등의 갑각류까지 이용하여 젓갈을 만들었음.
○ 2차 東征(1281)
○ 원나라는 이미 1277년부터 정벌에 소요되는 병마를 사육하기 위해 탐라에 목마장을 설치함. 쿠빌라이는 1280년 개경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일본 정벌 준비에 박차를 가함.
○ 1281년 5월, 쿠빌라이는 아랄한을 행성 우승상, 한족 출신의 대장 범문호를 행성 우승에 임명하고 대규모 일본정벌군 발진. 이때 고려는 김방경, 박구, 김주정 등을 대장으로 삼고 병선 9백 척, 안내인과 뱃사공 1만 5천 명, 군사 1만 명, 군량 11만 석을 동원함.
○ 충렬왕은 안동에 행궁을 설치해 30여 일을 머물음. 당시 <고려사>에는 충렬왕의 안동권역으로의 행차가 야단스럽게 이루어졌다는 걸 상세히 기록함.
○ 1281.7.16. 기묘일, 합포에서 출발한 별장 김홍주(金洪柱)가 행궁에 도착해 동정군이 패하였으며 원사 김방경이 합포로 돌아왔다고 보고함.
○ 윤 8월 갑오일에 김방경 등이 행궁에 와서 왕을 뵈었음. 2차 동정 철수 시 김방경은 모든 배에 지시하여 말과 갑옷을 버리게 하고, 패선의 군졸 1천여 명을 싣고 돌아옴.
○ 일본에서는 1차 원정을 막아낸 방어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쇼니 츠네스케[少貳經資]를 책임자로 해서 고려 공격을 위해 전함과 무사들을 준비함. 하카다만 연안에 방어시설을 쌓는 등 몽골의 재차 침입에 대한 방비에 전념하게 됨.
○ 대마도 코모다해안 신사에는 1,2차 여몽연합군 희생 전사자를 모심. 東征軍들을 ‘원구(元寇)’로 표기. 몽골군은 ‘모쿠리’, 고려군은 ‘고쿠리’ 신조어 등장.
○ 일본군이 해변에 흙으로 옹벽을 쌓고 저항하는 통에 나아가 싸우지 않고 선상에서 대치만 하다가 태풍과 전염병으로 큰 손해를 입고 돌아옴.
□ 承 (대마도, 이키도 정복)
○ 연합군은 먼저 쓰시마(對馬島)를 정벌한 뒤 이키도(壹岐島)를 쳐서 그 성을 함락.
- 북큐슈(北九州)의 다자이부(太宰府)를 공략하기 위해 히젠(肥前)의 마쓰우라(松浦)를 짓밟고, 하카타만(博多灣)에 도착해 하카타·하코사키(箱崎)·이마쓰(今津) 등지에 상륙함.
○ 일본군은 군세를 규합해 연합군에 대전했으나 공성(攻城)과 야전(野戰)에 능숙하고 화기를 사용하는 연합군의 적수가 되지 못함.
○ 홍다구는 “살아있는 모든 것을 없애라”고 명령함.
○ 김방경은 1차원정과 동일하게 하카다에 상륙한 동로군은 진지를 쌓고 교두보를 확보함.
□ 장면 6. 음식문화 융합
〇 진도홍주 배경에 대하여는 항몽삼별초군 입도 때로 봄. 널리 알려진 것은 조선 시대이며 이 시대에는 진도홍주를 지초주(芝草酒)라 함.
○ 온 세계를 휩쓸었던 몽고군이 동정전초기지로 삼은 곳이 안동과 개성. 몽고병들은 추위를 막고 전투력을 상승시키는 자극제로서 아락주를 가죽 술병에 담아 허리에 차고 다니며 수시로 마심.
〇 탐라총관부 아랑주는 몽골인이 제주에 정착하면서 전래된 술임.
○ 지방에 따라 특색 있는 맛을 내는 소주는 육회를 안주 삼아 따끈한 밥주발 뚜껑으로 마셔야 제맛이 난다는 안동 소주, 배와 생강즙을 곁들인 전주의 이강고, 남도 대나무 고지에서 나는 죽력고, 관서 명주인 감홍로, 귀양 선비의 한을 풀어 주었다는 진도 홍로 등 다양함.
□ 轉 : 新風, 疫病
○ 2차 동정은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과 마침 태풍, 역병이 돌아 연합군은 많은 함선과 병사를 잃었으며, 좌군사 김선(장남)이 물에 빠져 죽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고 합포로 돌아옴.
○ 당시 고려인인 홍다구와 의견 충돌이 잦아, 군사작전의 실패도 한 요인임.
○ 첫째, 서쪽에서 불어닥친 두 차례의 거대한 폭풍은, 일본인들이 말하는 이른바 가미카제[神風]에 의해 차단되고 동시에 대륙과 바다에 걸쳐 대제국을 세우려던 쿠빌라이의 꿈도 실패로 돌아감.
○ 세조 쿠빌라이는 영특한 군왕. 그에게 일본 원정은 3가지 목적 첫째는 굴복치 않은 일본을 정복함으로써 세계 정복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 둘째는 일본 원정을 통해 고려의 국력과 군사력을 소모시켜 고려의 원나라 저항 의식과 능력을 저하시키는 것임. 마지막은 가장 실질적인 목적으로 무려 10만 명에 달하는 패망한 남송 군대의 소모전으로 세조에게 남송 정복 후 남아 있는 10만 명의 군사력은 위협적인 존재. 그들의 반란이 두려워 이들을 원정군에 포함시켜 목적을 달성함.
○ 몽골의 일본원정은 1274년과 1281년 각각 1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단행되었지만, 그 준비와 사후처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10여 년의 기간이 소모됨.
○ 여원 병사 역병으로 3000여명 사망. 결국 원정군은 8월 중순 모두 합포로 철수함.
□ 장면 7. 합포 병영, 석두창
○ 석두창의 정확한 현 위치에 대해서는 조선 전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합포가 창원부 관아 서쪽 10리, 마산포(馬山浦)가 창원부 관아 서쪽 15리에 위치해 있다고 기록됨.
□ 장면 8. 몽고정
〇 몽고정은 고려시대 말 1281년에 원나라의 세조가 2차례의 일본 정벌에 실패한 뒤, 같은 해 10월에 지금 마산시 정수장 일대의 환주산(環珠山)에 군사를 배치하고, 진(鎭)을 설치함. 몽고정은 이곳에 주둔한 군사들에게 마실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우물로 추정됨.
□ 장면 9. 복국문화
○ 중국의 유명한 '적벽부(赤壁賦)'를 읊은 시인 소동파(蘇東坡)는 "복어의 맛은 가히 목숨과도 바꿀만한 가치가 있다"라고 극찬. 소동파가 극찬한 맛 복어는 그 맛이 뛰어나 아주 오래전부터 먹었던 물고기임. 석기시대의 유물인 패총에서도 복어 뼈가 발견되고, 약 2200년 전에도 복어의 기록이 남아 있음.
- 복어는 그물에 걸려 올라오면 이빨을 빠득빠득 갈며 성을 내고 배를 잔뜩 부풀리기 때문에 진어 또는 기포어로도 불림. 복어는 이빨만 위험한 것이 아니라 알과 간장, 혈액에는 ‘테트로도톡신’이란 맹독이 있어 1mg만 먹어도 죽음에 이르기 때문에 청산가리보다도 무서운 독으로 알려져 있음.
○ 복어를 조선시대 하돈(河豚)이라고 함.『임원경제지』를 보면, 복어가 가장 맛있는 곳이 한강임. 강에서 치어들이 바다로 갔다가 올라오는데,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이 가장 맛있음. 복어 먹는 철에는 서울 전체가 복어를 찾았음. 한강 중에서 노량진 앞이 복어가 가장 많이 잡히고 맛이 좋았음.
- 유득공도 ‘마포강의 고기잡이’에 대한 ‘三湖打魚(삼호타어)’라는 긴 詩를 남김. 여기서 삼호는 마포를 뜻하며, 서호, 서강이라고 함. 이 詩의 한 구절은 “복어는 화가 나서 못 견딘 듯이, 배가 잔뜩 제강 마냥 불룩하구나. 잡는 족족 쑥대에 꿰어 매달고, 잠시나마 구경거리 삼아 놓았다.”
○ 복어의 서식지로 유명한 마산만은 낙동강물이 섞이고 해안선이 복잡해 복이 서식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춤. 이렇게 잡힌 복은 복어 집하장이 있는 마산 어시장으로 향하고, 복국 재료를 싸게 구할 수 있는 덕에 복어거리 역시 어시장 안팎으로 조성됨.
○ 마산은 삼국시대 '골포'에서부터 1000년이 기간 포구기능 수행. 마산 위판장과 운명을 같이해온 곳이 복국골목. 수협 위판장에서 오동동 아구찜골목으로 이어지는 해안대로 변에 40~50집이 집중. 예전 이곳 복집은 24시간 영업
□ 장면 10. 소주도(燒酒徒) 김진
〇 안동이나 개성, 마산(합포), 제주도에서 소주 제조법이 발달한 것은 원의 한반도 진출과 밀접한 관련.
○ 문헌상에 보이는 안동소주의 기록은 고려사 가운데 무장(武將) 김진(金鎭)이란 사람이 부임지(赴任地)인 경북 북부지방(안동으로 추정됨)에서 소주(燒酒) 먹기를 즐겨하여 소주도(燒酒徒)라는 별명을 얻었음. 高麗史 列傳에 기록됨.
- 때마침 合浦에 왜적이 들어와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하자 병사들이 "소주도를 시켜 칠 일이지 우리야..." 하고 방과하는 바람에 소주도들이 앞서서 달아남.
□ 結
○ 1294년 황제 사망 후 홍복원 2자 홍군상이 원제국 정승(宰相)에게 “동정 중지” 건의, 수용되어 동정 중지됨.
○ 여원연합군의 두 차례 일본원정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군사적 역할과 기능은 상당 기간 지속. 또 출정에서 돌아온 부상 군인들의 후속 처리, 전함의 건조 등에 동원된 인력과 물자의 전환, 군량의 대량 유통 등으로 지역의 생산 기반과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이전과 많이 달라짐.
○ 800 여년이 지나 지금 남은 것은 역사와 문화뿐임. 음식문화적 영향으로 창원, 합포, 몽고정, 둔전의 아락주, 몽고 소주, 몽고 공탕 등임. 강화도의 가릿국갈비, 개성소주, 한양 설렁탕, 안동소주, 진도 홍주, 탐라 고소리술과 빙떡 등임.
○ 2018년 현재 몽골은 300 만명으로 형체만 남은 몽골 국민 알벡도르지 전 대통령은 제주도 귀화함. 2017년 현재 한국 ODA 수원국 6위임.
○ 합포 해변은 ‘복국’천국임. 2014년부터 금년까지 매년 연말 쯤이면 창원 친구들과 합포해변 걸으며 가슴이 설레임. 고려시대 몽골군과 고려, 조선시대 조운선 사공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음.
○ 참복, 졸복 등 등 합포 해변 복국을 모두 섭렵. 도연명과 히데요시가 격찬한 음식이 복국임. 술과 복국의 환상적인 조합을 느낌. 합포를 상징할 수 있는 지역 토속주를 더하면 환상이 실제가 될 것임.
□ 현지답사 투어 루트(例示)
○ 오동동 복어거리가 유명해진 건 1970년대 초반,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마산수출자유지역을 방문하며 복어거리의 한 식당에서 식사를 한 이후임.
○ 마산어시장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에 있는 전국 최대 규모의 수산물 어시장. 마산어시장은 복어 집하장으로 참복이 낮은 가격으로 경매되어 전국 일식집으로 보내졌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마산 복어요리는 복지리, 복매운탕, 복튀김, 복회 등의 메뉴로 개발되고 전수되어 전국의 유명 음식으로 자리 잡음.
○ 처음에 밤새껏 마신 주당들의 쓰린 위를 달래주는 복국으로 출발했던 마산의 복요리는 10여 년 전부터 다양. 입소문을 타고 손님들이 몰려들자 복불고기, 복껍데기무침, 복튀김, 복수육, 복초밥 등 새로운 메뉴를 개발. 복어의 참맛을 즐기려면 매운탕보다는 맑은 국이 제격. 가다랑어 육수를 써서 달짝지근한 일본식 복지리보다 복어 머리를 넣고 푹 고아낸 국물에 콩나물, 미나리, 마늘 등을 듬뿍 넣고 끓인 우리식 복국이 훨씬 시원함.
○ 장소 마케팅은 역사적 장소와 인물, 장소나 인물에 얽힌 토착 음식 등이 어우러진 스토리텔링 마케팅이 효과적임. 2018년 현재 진해바다 70리길(3구간 합포 승전길, 경상남도) 등이 조성됨.
○ 김방경, 삼별초, 고려시대 후기를 반추할 수 있는 사회적 참여 프로그램을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제안함.
□ 합포 문화투어 프로그램
○ 합포성 -> 몽고정 -> 석두창 -> 합포 해변 복국 -> 문화원 -> 기타 상황에 맞게 프로그램을 연결함.
< 참고문헌 >
『고려사』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원조비사』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탐구당, 1994)
-----------, 『한국사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탐구당, 1993)
김광철, 「고려 시대 합포 지역 사회」『한국 중세사 연구』17, 한국중세사학회, 2004.
문경호, 『고려시대 조운제도 연구』 (혜안, 2014)
서 긍, 『고려도경』1123.
이 영, 「고려 말의 왜구와 마산」『한국 중세사 연구』 17, 2004.
이종수, 「13세기 안동소주 스토리텔링 마케팅」『서석사회과학논총』조선대, 2013.
이종수, 「대원제국의 탐라지배와 문화적 영향」『인문학연구』제21집, 동덕여대 인문학연구 소, 2013 : 1-31.
(재)한국해양재단, 『한국해양사 : 고려시대』: 601-6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