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산행 일정 : 7월 14일 21시 30분 출발, 7월 15일 1시 18분 사치재 도착, 등반시작 7월 15일 17시 7분 육십령 도착
3. 종주자 명단 : 최현찬(경주교도소), 권종훈(경주월성중학교), 정해전(경주경찰서), 손승락(경주월성중학교), 김정훈(경주월성중학교), 최광명(북성건파출소)
4. 운전자 : 권오훈, 손정락
5. 차량 제공 : 우성열, 권오훈
6. 도움 주신 분들 : 장기식, 김칠원, 김형락, 권오훈
장마철이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다녀온 3구간 산행이었습니다. 원래는 7월 7일∼8일 산행을 해야하는데 산행부대장의 출장으로 인해 일주일 연기가 되어서 결국 7월 14일∼15일 산행을 하다보니 너무 긴 휴식으로 인해 다소 힘이 들었으며, 아침까지 비가 내려서 산행을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많이 했습니다.
토요일 아침 8시경 천둥과 벼락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걱정이 되어 산행부대장께 전화를 해서 낙뢰의 위험이 있다고 하니, 농담삼아 평소에 죄를 많이 지었느냐며, 그렇지 않다면 강행을 하자고 한다. 벌써부터 나태해지기 시작하면 앞으로 조그만 어려움이나 힘이 들어도 가기 싫어하게 될지도 모르니 무리가 되더라도 예정대로 실시하고 만약 산행을 할 수 없다면 가서 돌아오자고 했다.
앞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항상 처음 계획할 때의 마음 가짐을 가지고 산행을 하다보면 완주의 영광스런 그날이 오리라 믿으며...
토요일이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와서 간단히 식사를 한 후 오후2시에는 경주에 계시는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의 모임인 경주향토역사연구회 답사가 있는 날이며, 마침 장기읍성 답사안내 및 설명을 하기로 되어 있어서 집합 장소에 나가니 나쁜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벌써 많은 회원들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안에서 간단히 설명을 하고 나니, 버스는 벌써 장기에 도착했다. 먼저 장기면사무소 앞마당에 있는 대원군때 세운 장기 척화비를 설명하고, 근민당을 살펴본 후 1km정도 걸어 올라서 산딸기 밭을 지나 장기읍성에 도착했다.
먼저 동문과 동문 옹성 그리고 옹성위에 놓여있는 배일대에 대해 설명을 한 후 주위를 둘러보고, 연못터와 향교를 지나 장기 읍성의 서문일대에 복원공사를 해 놓은 곳에 이르러 다시 설명을 하고, 내려오면서 북문도 잠시 들러 구경을 한 후 불망비가 있는 곳을 끝으로 답사 일정을 마치고 양포해변에 도착하여 회와 소주로 회포를 풀다보니 예정 시간보다 많이 지연되었다.
산행 출발 시간이 20시 30분인데 경주에 도착하니 벌써 20시 30분이 되었다. 산행부대장의 차를 타고 집으로 서둘러 와서 짐을 꾸린후 회장님 가게로 가니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차량 한대에 모두가 탈 수가 없었다. 결국 두대가 가기로 하고 1시간이 늦어진 21시 30분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가다가 가스도 넣고 이리저리 하다보니 경산휴게소에 도착 시간이 22시 30분이었다. 우동 한그릇씩을 먹은 후 23시에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아침까지도 폭우가 쏟아졌는데도 불구하고, 낮에는 땡볕이 내리쬐었고, 저녁부터 다시 80mm이상의 비가 더 내린다고 해서 많은 걱정을 했지만, 거창을 지나면서부터는 밤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서 산행하기에는 좋은 날씨였다. 마음이 놓이는 순간이었다.
지리산 휴게소에 도착하니 15일 1시 2분이었다. 간단히 산행 준비를 마친후 사치재에서 1시 18분에 제3구간 산행이 시작되었다.
능선에 올라서니 1시 32분이었으며, 여기까지는 소나무 숲길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산불이 난 지역이라 잡목숲을 뚫고 나가야 했다.
지리산 휴게소 뒷봉우리에 도착하니 1시 48분, 세상은 고요한 침묵속에 빠져들어 있었지만 휴게소의 휘황찬란한 가로등 불빛만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하늘에는 하현달이 구름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계속해서 우리를 뒤따라 오고 있었다.
잡목들의 나뭇잎에는 아직도 빗물이 붙어 있어서 가지들이 길쪽으로 휘늘어져 길을 찾기가 어려운데다, 고사목들이 길을 가로질러 쓰러져 있어서 산돌이들의 발길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새맥이재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었으며 선두에서 길을 헤쳐 나가다 보니 벌써 옷은 물론이고 신발에도 물이 들어와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질퍽거리고 얼굴에는 온통 거미줄 투성이가 되었다.
새맥이재에서 소나무 숲지대를 지나 백두대간 길은 약간 급경사로 진행하다가 사리봉 정상을 왼쪽으로 슬쩍 비껴서며 헬기장에 도착하게 된다. 헬기장에는 3시 1분에 통과하였으며 이후부터는 철쭉과 싸리나무들이 걸음을 성가시게 하였다.
돌무더기가 잔뜩 쌓인 아막산성터를 3시 50분에 지났으며, 아막산성은 사리봉과 봉화산 사이에 있으며 성이 있는 일대는 백제에서는 아막성, 신라에서는 모산성으로 불리던 곳으로 백제와 신라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다.
현재 파악되는 성의 규모는 둘레 632.8m에 북쪽에 수구와 북문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 둘레에서는 기와조각과 백제 토기편들이 나왔다. 현재 북문지와 수구가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동쪽에는 직경 1.5m의 원형 석축으로 된 우물터가 있으며 전북지방 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아막산성터에서 복성이재까지는 계속되는 내리막으로 길이 미끄러워 뒤따라오는 일행들이 수 없이 넘어져 아마 해발이 다소 낮아지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잠을 자던 이름모를 산새가 산돌이들의 발자욱 소리와 후레쉬 불빛에 놀라 갑자기 날아가면서 나의 왼쪽 어깨부근에 부딪친 후 풀숲에 떨어지기도 했다. 또한 철쭉과 잡목, 산딸기 나무가 많아서 팔과 다리를 할퀴는 걷기에 불편한 구간이오니, 여름에 산행하시는 분은 반드시 긴옷을 입고 가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복성이재는 흥부마을로 알려진 성리쪽으로 내려가는 길(아영면)은 포장이 되어 있으며, 남원시 아영면과 장수군 번암면의 경계가 되는 곳이다.
남원에는 일찍부터 흥부전의 주인공인 흥부가 실존인물이라는 이야기들이 있어 왔다. 그 가운데서도 동면 성산리와 아영면 성리가 흥부와 관련된 마을이라고들 하는데 내용인즉 성산마을은 흥부가 출생한 곳이며, 성리마을은 흥부가 놀부에게 쫓겨나 유랑 끝에 정착하여 복을 누리고 살던 곳이라 한다. 성산리는 남원과 함양을 잇는 팔령치 아래쪽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고대소설 흥부전과 판소리 흥부가에 "전라도는 운봉이요, 경상도는 함양이라. 운봉, 함양 두 얼품에 흥부가 사는지라..."라는 대목이 운봉과 함양 사이에 있는 성산리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성산리에는 흥부와 관련된 지명이 많은데 연비봉, 화초장 바위, 흥부네 텃밭, 연하다리 등이 있으며, 성산리에 전해오는 박첨지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흥부전과 비슷하다.
박첨지는 부자이면서도 인색했을 뿐만 아니라 재물을 믿고 소작인들과 이웃을 혹독하게 괴롭혔다고 한다. 심지어 하나 밖에 없는 동생 흥부를 내쫓는 것은 물론 다시 찾아왔을 때도 매만 때리고 내쫓았다고 한다. 이후 함양 땅에서 민란이 일어나 박첨지가 죽임을 당하였는데도 마을 사람들은 박첨지의 시체마저도 거두어 주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새 부자가 된 아우가 형의 참변 소식을 듣고 찾아와 동네 사람들에게 돈과 제답을 주며 해마다 형의 제사를 지내 달라고 부탁하여, 성산마을에서 박첨지 제사를 지내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아영면 성리에는 흥부전에서 놀부가 흥부가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흥부를 찾아가는 대목 중에 나오는 고향 근처 한 곳인 복덕이라는 지명과 같은 복덕촌(복성)이 있다고 한다.
성리에도 흥부전을 연상시키는 인물로 춘보라는 사람의 얘기가 전해오는데, 가난 끝에 부자가 되었다든지, 선덕을 베풀었다고 하는 인생역정이 흥부를 떠올리게 한다. 성산마을처럼 화초장 바위, 허기재 등 흥부전의 내용과 관련된 땅 이름도 많이 남아 있다.
흥부전은 이와 같은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이 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주민들은 각각 매년 삼월 삼짇날 박첨지 제사를 지내고, 정월 보름날 춘보망제를 지내는데 흥부의 고향과 흥부가 복을 누리고 살았다는 곳이라는 명분으로 관광자원화를 서두르고 있다.
사리봉을 넘어서면서 보이기 시작하던 철쭉나무들이 왼쪽 목장집 위 소나무숲을 지나자 엄청난 군락을 이루고 있다. 목장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가축은 보이지 않고 썰렁한 목장 왼쪽에 철조망 울타리가 처져 있고 산허리를 잘라 만든 임도가 보인다.
목장 뒷 봉우리를 오르다 보니 갑자기 후레쉬 불빛이 희미해 진다. 예비 밧데리가 있지만 더 이상 교체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잠시 후 치재에 도착했다. 다시 꼬부랑재를 향해 가다보니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지만 오늘도 일출은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태양 주위를 구름이 너무 많이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다리재 왼쪽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있으며 주위가 온통 억새밭이어서 겨울에는 산불 위험이 높을 것 같다. 사람 키와 비슷한 억새들이 자라고 있으며 큰 나무가 없는 것이 이상하지만 여기도 역시 산불로 인해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
우리 인간들의 잘못된 실수로 인해 자연은 긴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원상회복이 된다고 하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우리 모두가 많은 관심과 노력으로 산불을 예방하고 방지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불은 사람들이 내고, 그 흉한 모습을 우리 사람들이 보기 싫어하니 이 얼마나 기막히고 이율배반적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6시 10분에 919.8m의 봉화산 정상에 도착하니 주위 전망이 좋아서 백운산과 지리산 천왕봉 및 지금까지 걸어온 마루금이 한눈에 들어온다.
봉화산에서 지리산쪽으로 보면 산불감시초소가 있으며, 그 오른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마을이 구상리이며 9명의 재상이 난 동네라 해서 그런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봉화산은 남원군 아영면과 장수군 번암면에 걸쳐 있으며 억새와 철쭉이 유명한 산이다. 이국적인 풍광을 자랑하는 인근의 바래봉 철쭉의 유명세에 눌려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가 최근 지역 산악인들의 홍보로 점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기념촬영을 하고 서서 물을 한잔씩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서쪽 하늘에 먹구름이 끼이면서 소나기가 내릴 것만 같다.
봉화산을 출발하여 억새길을 걷다보면 마루금을 따라 경상남도와 전라북도 경계가 이루어지며 굴곡이 별로 없는 능선을 한참 따라 가니 묘지 두기가 있고 시계는 6시 3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신갈나무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참을 더 가다 이름모를 봉우리에 오르니 산행대장님이 배고픔을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다면서 아침식사를 여기서 하자고 한다. 이때 시간이 7시 28분이었다. 1시 18분에 출발해서 6시간 10분 동안 걸어 오면서 처음으로 마음 편하게 볼기짝과 땅덩어리가 키스를 하는 순간이었다.
가져간 도시락을 맛있게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벌써 38분이라는 긴 시간이 흘러가고 8시 6분에 또 다시 고행의 길을 시작한다.
배는 부르고 몸은 나른해지면서 이때부터는 잠이 오기 시작했다. 약 20여분간을 졸다시피 하면서 비몽사몽간에 걸어가야만 했다. 아마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다리가 움직여 주었기 때문에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저절로 걸어간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백두대간이 무엇이길래(?) 그 무엇을 위해서 새벽부터 잠도 못자가면서 처자식을 내버려두면서까지 이 고생을 해야만 한단 말인가. 아마 한번쯤은 지금 여기를 가고 있는 모두가 회의감(?)을 느끼면서 걷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종주를 마치고 돌아가면 비록 육체는 고달프고 피곤하지만, 마음만은 또다시 다음 구간에 대한 설레임과 기대감으로 가득하며, 기다려지는 것은 왜 일까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우리를 진정한 산돌이로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광대치와 월경산을 거쳐 중재로 내려오는 길에서 권오훈 부회장과 연락이 되어 최광명 회원이 다소 지친 상태라 중재에서 하산하려 하니 육십령으로 가지 말고 중재로 오도록 하고는, 내려오는데 3구간 산행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간 종주자 한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 전국에 걸쳐 많은 비가 내린다 해서 모두가 산행을 포기했기 때문인것 같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듯이, 처음보는 사람이지만 이 산중에서 잠깐의 만남이 그렇게 반가울수가...
40대 중반경의 여성분이며, 부산에서 어제와서 무령고개에서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 천왕봉을 향해 가고 있었다. 모두가 대단하다는 말 뿐이다. 여러명이 가도 힘겨운데, 우리도 혼자서 저렇게 단독종주를 할 수 있을까...
잠시 후 650m의 중재 임도가 나왔다. 이때 시간이 9시 15분이었다. 만나기로 한 권오훈, 손정락 회원은 아직 보이질 않고 연락도 되지 않는다.
지도상에는 중재에서 식수를 구할 수 있다고 하기에 주위를 찾아보니, 대간길에서 오른쪽으로 약 5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배추와 무를 심어 놓은 밭 중앙에 물이 흘러내려 여기서 식수를 보충하고 잠시 쉬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권오훈, 손정락 회원은 중재까지 차가 올라 올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종주대가 고생한다며, 우리가 도착하면 끓여 줄려고 라면과 물을 준비해 왔지만 만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경주일요산악회만의 끈끈한 정이 아니겠습니까.
시간이 소중하다 보니,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고 해서 다시 출발을 했다. 최광명 회원은 정해전 산행대장님이 좀전에 본 여성분은 혼자서도 가는데 여기서 포기해서야 되겠느냐니까 우리를 따라 나선다. 아마 일행들 모두에게 그 여성분이 신선한 자극이 된 것 같다.
다시 임도를 가로질러 올라서니, 약간의 공터와 커다란 정자나무가 있으며 여기를 통과하는데 새끼독사 한마리가 길가에 있었다.
산죽터널과 급경사 오르막을 지나 약간 더 올라가면 오른쪽에 밭과 창고가 보인다. 이때 손운락 사무국장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침 5시경 산행대장님과 통화를 한 후에도, 걱정이 되어서 수시로 통화를 했는데, 지금은 중재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분 회원님들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어떻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10시경 박일환 총무와 이상명 편집부장 한테서도 전화가 왔다. 지금 서울에는 엄청난 양의 비가 내려 물난리가 났다며 종주대가 걱정이 되어서 한 전화였다. 서울은 37년만에 가장 짧은 시간에 300mm가 넘는 비가 내림으로써 수십명의 희생자와 곳곳이 침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 날씨는 아직까지는 맑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산행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으며, 산속에서도 이런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바로 문명의 혜택 덕분이 아니겠는가.
중고개재에서 백운산 정상까지는 숨이 턱에 닿을 정도의 급경사 길로써 지금까지 걸어온 중에서 가장 힘드는 코스 중에 한 곳인 것 같으며 중간에 경치가 좋은 전망대 바위가 있다.
중고개재에서 백운산 정상까지는 숨이 턱에 닿을 정도의 급경사 길로써 지금까지 걸어온 중에서 가장 힘드는 코스 중에 한 곳인 것 같으며 중간에 경치가 좋은 전망대 바위가 있다.
11시 18분에 1,278.6m의 백운산에 도착했다. 바로 앞에는 헬기장이 있으며 정상에는 화강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백운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전국에는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흰 구름산"이라는 이름 값을 제대로 하는 산이 바로 함양의 백운산이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시원한 조망도 으뜸이라 할 수 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남쪽의 하늘금을 그은 지리산의 파노라마는 그리움의 경지를 넘어 연민이라 할 수 있으며, 북쪽으로는 덕유산의 넉넉하고 태평스러운 자태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산이 바로 백운산이다.
특히 산 기슭에 있는 묵계암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절 마당에 무덤이 있는 곳이며, 최고의 명당터 중에 한 곳이라 한다. 그리고 선원인 상련대는 통일신라시대 때 고운 최치원 선생이 수도하던 곳으로 관음보살은 "그대가 있는 곳이 연꽃"이라는 말을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한다. 그 뒤로 고운선생의 도력은 상승의 경지에 이르렀고 그 후 도를 완성하여 선인이 되었다 하며, 상련대에서 바라보는 백운산은 완연한 학의 모습이라 한다.
정상 근처에 도달할 때부터 최현찬 산행부대장이 다리가 불편하다면서 그러더니 정상에 도착하자 다리가 굳어져 더 이상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마침 가지고 다니던 침으로 허벅지와 종아리를 10여군데 찔러서 피를 내고 나니 상태가 다소 좋아져 한참을 쉰 후 기념 촬영을 하고 11시 34분에 출발하여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얼마가지 않아 산죽길이 나오면서 산돌이들의 갈길을 자주 방해하고 있었으며 한참을 가다보니 싸리나무 군락이 나오고 그 곳을 지나면 1066m봉 정상이 나온다.
우리가 어릴 때 여름이면 산에 가서 소에게 풀을 먹이면서 시간 있을때 마다 빗자루를 만들기 위해 이산 저산 돌아 다니면서 꺾어 오던 그 싸리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자식들에게는 교육용 회초리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조정래씨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읽어보면 빨치산들이 밥을 지어 먹을 때 연기가 나지 않고, 마르지 않아도 잘 타며, 탈때는 향기로운 냄새를 발산하는 보라색 또는 홍자색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싸리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영취산에는 12시 38분에 도착하였으며, 1,075.6m의 높이로 정상 서쪽으로는 금남호남정맥 줄기가 갈라져 무령고개를 지나 장안산으로 이어져 나간다.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온 능선 왼쪽의 물은 섬진강으로, 영취산을 지나면서 왼쪽은 금강으로, 오른쪽은 낙동강으로 흘러들며 계속해서 경상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걷게 된다.
영취산 북쪽의 전북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주촌마을은 논개의 고향이다. 논개는 진주목의 관기로 임진왜란 중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이긴 왜군이 촉석루에서 자축연을 벌일 때 왜장을 남강가로 유인하여 끌어안고 강물에 빠져 순절한 의기이다.
구전돼 오던 논개의 순국 사실이 문자화된 것은 1620년 무렵 유몽인의 <어유야담>에서부터이며, 그녀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논개의 충성심은 이미 의심할 바 없었는데도 일부 보수적인 사대부들은 편견을 내세워 임진왜란 중의 충신, 효자, 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논개를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진주사람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려 그녀의 의로운 혼을 위로하며 국가적인 추모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결국 의기 논개가 공식적인 호칭이 된 때는경종 1년(1721) 경상우병사 최진한이 논개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여 그의 순국 사실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 이후이다.
그후 영조 16년(1740) 경상우병사 남덕하의 노력으로 논개의 혼을 기리는 의기사가 의암 부근에 처음 세워지고 매년 논개 추모제가 성대히 치러지게 되었다.
주촌마을에는 논개의 생가가 복원돼 있으며, 장수읍 두산리에 의암사라는 논개사당과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가 세워져 있고 장수사람들은 논개를 장수삼절의 한 사람으로 꼽으면서 그녀가 이 고장 인물임을 자랑스러워 한다.
논개의 일생을 살펴보면, 열네살 나던 해인 1587년 아버지 주달문이 죽자 천하 건달인 숙부가 토호인 김풍헌에게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 사실을 안 논개 모녀가 외가인 안의의 봉정마을로 피신하였는데 김풍헌이 당시 장수현감인 최경회에게 이를 알려 심문을 받게 하였다.
논개 모녀로부터 전말을 들은 최경회는 이들을 무죄로 인정하고 관아에 머물며 병약한 최씨 부인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논개의 재색에 감탄한 현감 부인이 최경회에게 논개를 소실로 맞이 할 것을 권유한 뒤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렇게 해서 논개가 18세 되던 해인 1591년 최경회와 부부의 인연을 맺고 무장현감으로 부임하는 최경회를 따라 장수를 떠났다.
최경회가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여 진주성싸움에 참가하게 되자 논개도 진주로 가게 되었다. 진주성이 함락당하자 장수지역 의병들은 남강하류를 수색해 창원 지수목에서 최경회와 왜장을 껴안은 채로 죽은 논개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들은 부부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 주씨 문중과 장사지낼 것을 상의했지만 왜적의 보복이 두려운 주씨 문중은 이를 거절했다. 또 기생이기 때문에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이들은 백두대간 동쪽의 삼남대로변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잡아 장사지내고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의병의 후손들에 의해 설화처럼 전해져 내려오던 이 묘는 1975년 세상에 알려졌다. 순절한 후 382년만의 일이다. 최근 사적지로 지정되어 묘역이 대대적으로 정화되었다.
영취산에서 간단히 민생고를 해결하고는 휴식을 취하였다. 대간을 타면서 먹는 시간과 사진촬영 시간을 제외하고는 별도로 휴식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휴식을 취하면서 앞으로의 일정을 논의 하다보니 피로하고 지친 회원이 있으니 오늘 산행을 여기서 마치자 한다. 특히 산행대장님은 아직도 4시간을 더 가는 것은 무리라면서 걱정을 많이 하시지만, 여기서 그만두게 되면 다음 산행 일정에 차질이 많이 생기게 된다. 때문에 결국 강행하기로 하자 산행대장님은 많이 망설이신다.
우리는 반 공갈 협박조로 산행기에 산행대장님이 중도 포기했다는 내용을 기록하겠다하니 어렵게 동행을 결심하셨다. 그러시면서 시원한 막걸리나 한잔 했으면 더 이상 바랄것이 없다고...
덕운봉을 오른쪽 옆으로 두고 바라보며 주릉길을 걷노라면 짤막한 암릉길이 나오고, 977.1m봉까지 오는 중간중간에 키가 크고 우거진 산죽길이 여러번 나타나지만 고맙게도 누군가의 배려로 인해 많은 산돌이들이 쉽게 산행을 할 수 있도록 정비해 놓았다.
977.1m봉과 송전탑사이를 지나면서 새끼독사를 또 보았다. 이곳을 지나 송전탑을 바라보며 걷는데 대전∼진주간 고속도로 공사를 하고 있었으며, 특히 대간길 밑으로 터널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15시경부터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송전탑을 지나면서 폭우로 변했다. 깃대봉을 향해 올라가는데 대간길은 억새풀밭이 자주 나타나 걷는데 고통이 따랐다.
특히 억새풀밭과 잡목숲을 지날때는 비명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약간만 스쳐도 앗 따가워... 쓰리고, 따가우면서 무척 아팠으며 물에 빠진 생쥐꼴이었다.
그것은 사치재에서 시작하여 여기까지 오면서 무수한 잡목과 철쭉, 그리고 억새밭, 산죽길, 가시덤불을 지나오면서 양팔과 양다리, 얼굴 등에는 영광스러운 상처(?)투성이로 변했다.
깃대봉은 3시 53분에 도착하였으며, 1,014.8m 정상에 비는 계속 내리지만 잠시 기념촬영을 하고, 육십령과 남덕유산의 전망을 조망했다. 깃대봉에는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 측량표는 국민 모두의 재산으로 파손시에는 측량법에 따라 처벌한다는 경고문이 기록되어 있었다.
대간길은 깃대봉 정상에서 200m쯤 북진한 뒤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데 계곡으로 내려가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한참을 더 내려오면 능선이 이어짐을 알 수 있으며, 능선을 내려오다 보면 오른쪽 옆에는 작은 샘이 하나 있다.
여기서부터 육십령까지는 다소 지루한 느낌이 들며 높직한 전망대바위를 지나 10여분만 내려오면 육십령 도로를 만난다. 깃대봉에서 육십령은 바로 앞에 보이면서도 1시간 가까이 걸려서야 도착하니 권오훈, 손정락 회원이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이한다. 하산 완료 시간은 17시 7분 이었다.
1시 18분에 사치재를 출발하여 17시 7분에 육십령에 도착하니 15시간 49분이라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화적때 피해 넘던 육십령은 영남 선비들의 본 고장 함양과 전라도의 오지인 장수를 이어주는 고개는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에 있는 육십령이다. 육십령은 그 굽이만큼이나 수많은 사연들을 품고 있다.
이 고개 이름을 육십령이라 하는데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첫번째는 안의 감영에서 고개까지가 육십리이고, 장수 감영에서도 육십리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
두번째는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육십개의 고개를 넘어야 겨우 닿을 수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세번째는 산적의 화를 피해 육십명이 모였다는 이야기다. 옛날에 육십령 고개에는 산적들이 많아서 함부로 넘나들지 못했는데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산아래 주막에서 며칠씩 묵어가면서 육십명의 장정들이 모일때까지 기다렸다가 죽창과 몽둥이로 무장하고 떼를 지어 넘어야 했다는 것이다.
근처에는 당시 장정들이 모인 주막이 있던 곳이라는 장군동이 있고, 산적들을 피해서 살다가 이룬 마을인 피적래란 마을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런 곳이었기에 육십령에는 그 산굽이만큼이나 수많은 전설이 전한다.
그 중 산적에 얽힌 슬픈 이야기 한 토막은 경상도 총각이 전라도에 사는 규수에게 장가를 들었다.
장가를 와서 처가에 머물기를 어느듯 일년, 꿈 같은 세월이 흘러가자 신랑은 본가 형편도 궁금하기도 하고 이제는 신부를 데리고 갈 때가 되었기에 우선 혼자 본가에 다녀오기로 했다. 하지만 신랑은 육십령을 넘다가 산적들에게 붙잡혀 물건을 다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고 말았다.
한편 전라도 신부는 남편이 죽은 줄도 모르고 돌아오기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남편은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올 줄 몰랐다. 실성한 사람처럼 매일 동구밖에 나가 기다리던 신부는 마침내 쓰러져 죽어 망부석이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한다.
그리고 육십령휴게소는 수주 변영로 선생이 지은 논개시비가 있다.
"거룩한 분노(憤怒)는 종교(宗敎)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情熱)은 사랑보다도 강(强)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魂)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라고 그 의열(義烈)을 노래했던 논개(論介)...
변영만, 변영태, 변영로 삼형제는 하나같이 이 땅의 기재(奇才)로 이름이 높았던 이들이다. 세간에서는 당, 송 팔대가인 소순, 소식, 소철 형제에 비겨 이들 형제를 '한국의 3소(蘇)'로 부르기도 했다.
수주 변영로는 지금도 나이 지긋한 세대라면 '천하제일의 술꾼'으로 기억하는 민족시인이며, 그의 음주 편력기 <명정(酩酊) 사십년>을 보면, 백주대낮에 오상순, 염상섭, 이관구 등 당대의 문사들과 서울 성균관 뒤 잔디밭에서 술을 퍼마시다 소나기가 쏟아지자 전라의 몸으로 소 한마리씩을 잡아타고 대로를 활보하는 기행도 서슴지 않았던 분이다.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으며 육십령고개 동쪽 50m지점에 있는 육십령 식당에 와서 주인할머니(백두대간이 무었인지는 몰라도 백두대간 타는 사람들은 보면 안다고 하신다)와 종주대원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씻어려고 등산화와 양말을 벗으니 15시간 가까이 물에 젖어 있었던 발은 살아있는 사람의 발이라고는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산행대장님이 산행 중 그렇게 드시고 싶어하던 시원한 막걸리와 두부을 안주 삼아 기분좋게 한잔했다. 같이 고생한 사람들끼리만 느끼고 통하는 부분들이 술잔을 주고 받으면서 정겨움으로 다가왔다.
육십령 식당에는 각 산악회 종주대 표시리본을 한곳에 모아 걸어둔 곳이 있는데 우리도 여기에 두개를 걸어두고 사진을 찍고는 식당을 나왔다.
지금까지 짧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무엇하나 내세울 것 없이 무능한 인간으로 스스로 생각하며 살아왔던 삶이, 이제야 나 스스로를 존경하고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여러가지로 무척 힘든 산행이었지만 정말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준 산행이며, 그래도 내 조국의 한 품안에서, 내 조국, 내 민족, 내 강산을 그리워 하며, 앞으로 계속 북으로 북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하니 지금도 그 고생보다는 설레는 마음과 그리움이 더욱 앞서는 것은 왜 일까요?
기나긴 산행시간 동안 별 사고없이 무사히 종주를 끝내주신 종주대원과 운전을 해 주신 두분 회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2구간 마치고 영양보충을 시켜주신 김형락 회원관리 이사님을 비롯한 걱정과 염려의 전화를 해 주신 여러회원님께도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백두대간을 함께 완주하실려던 서영배 회원님은 몸이 불편해서 동참하지 못한 점 아쉽게 생각합니다. 하루빨리 완쾌하셔서 함께 산행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