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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학개 2:1-9 주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 (우선순위)
I. 서론: 축복 (하루에 한 번 자녀를 축복하라)
수년전 미국 신문에 , 어느 조그만 개인 소유 비행장에 십대 아들을 데리고 간 아버지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우덥 지근한 여름날 오후, 그들 부자는 비행장에서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이자 노련한 스턴트맨인 조종사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2인승 비행기에 올라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비행기가 이륙했고, 그 베테랑 조종사는 수년 간 쌓아 온 곡예비행을 시작했습니다. 급강하를 한 후 비행기가 다시 하늘로 솟구쳐 오를 때였습니다. 비행기는 갑자기 속력을 잃었고, 뭔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듯 중심을 잡지 못했습니다. 잠시 후 비행기는 추락하여 활주로 근처에서 폭발했습니다. 그 현장을 본 그 아들은 폭발한 비행기로 뛰어가서 아버지의 친구를 가까스로 끌어냈습니다. 그는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다음 소년은 급히 아버지를 끌어냈으나 아버지는 살아날 가망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십여 분이 지나서야 가까운 마을엣 요란스럽게 구급차가 달려왔습니다. 아들이 애를 태우며 기다리는 동안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몇 분 동안 아버지의 의식이 깨어났습니다. 그 몇 분 동안 아버지가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버지는 아들을 축복하였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병원을 불과 몇 마일 앞에 두고 죽었지만 그 날 아버지의 축복의 말과 행동은 아들의 삶 속에서 일생 동안 함께 하였습니다.
II. 이 전의 영광
A. 새로운 시작
수련회의 마지막 날 설교를 준비하면서, 어떤 말씀이 좋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의 본문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고, 이제 며칠 후에는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시점에, 축복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필요하겠다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이 한 해 동안에 품었던 소망을 다 이루셨습니까? 그리고 며칠 있으면 맞이할 2005년도의 새 소망을 마음속에 품고 계십니까? 내년에는 어떤 비전을 갖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다가오는 2005년도를 어떻게 살겠다고 결단하고 계십니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연말이 되고 새해를 맞이해도 별 감흥이 없습니다. 새해에 어떤 소망을 갖는 것은 어렸을 때의 추억으로만 남아있지, 새해가 되어도 전혀 새롭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혹시 그렇다면, ‘내가 늙었구나.’ ‘하나님 앞에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하면 정확할 것입니다. (잠 24:14)은 소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지혜가 있는 자는 소망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소망이 끊어지지 않는 자는 지혜가 있는 자입니다. 여기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들이 지혜가 있는 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마음속에 소망과 꿈이 있는 지혜 있는 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주여, 하룻밤도 꿈 없이 잠들지 말고, 하루아침도 꿈 없이 깨지 말게 하소서’가 올해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길 바랍니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삶은 우리가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에 대한 합계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절실하게 희망해 왔는가의 합계이다.” 올해 한 해의 합계는 어떻습니까? 내년 한 한의 합계는 어떠하길 바라십니까? 한 해를 마감하고 또 다시 한 해를 시작하면서 하나님 안에서의 비전과 소망으로 각자의 삶을 만들어 가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길 소망합니다.
B. 성전의 영광: 과거의 영광 (학 2:3, 9)
오늘의 말씀은 저 자신에 대한 새로운 한 해의 소망임과 동시에, 여기에 있는 모든 지체들의 소망이 되었으면 하는 말씀입니다. (학 2:9)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여기서 이 전은 예루살렘 성전을 말합니다. 즉 예루살렘 성전의 이전 영광보다 이후의 영광이 더 크다는 말씀입니다. 학개가 활동했던 시기는 솔로몬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이고, 그 성전이 다시 지어지기 바로 전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의 이전 영광이란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말하고, 나중 영광이란 이 후에 지어질 성전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솔로몬 성전의 영광보다 이후에 지어질 성전의 영광이 더 크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지금의 교회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개가 새로운 성전 건축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에 많은 목사님들이 이 말씀을 교회 건축할 때만 즐겨 사용하는데, 학개서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 건축용 말씀이 아닙니다. 구약의 성전이란 지금의 교회당, 교회의 건물로 이해하는 것은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고전 3:16-17)은 성전과 연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몸과 삶이 성전처럼 거룩해야 함을 언급합니다. 또한 (엡 2:21)은 성전과 연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즉 모퉁이 돌이신 예수님에 의해 연결된 공동체가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성전 재건과 연관된 학개서의 말씀을 지금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 말씀은 교회당을 재건축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앙, 그리고 신앙 공동체를 재건하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는 말씀을 현재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이해한다면, 우리 자신과 공동체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전에도 컸지만, 이 후에는 더 클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얼마나 축복된 말씀입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복된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약속되길 소망합니다. 우리 각자와 공동체에게 2004년도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이 있는데, 2005년도에는 더 큰 영광이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얻는 영광도 대단합니다. 약 2년 전에 노 대통령이 승리했을 때의 그 기쁨은 단지 그 자신의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영광은 노 대통령과 그 가족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큰 영광이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영광이 오래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적으로는 큰 영광이었지만, 세상의 영광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세상의 영광은 꽃과 같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뽐낼 때가 있지만, 곧 시드는 것이 세상의 영광입니다. 그렇지만 그 영광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 영광을 얻고 싶은 욕심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시들지 않습니다. 세상이 주는 영광은 있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합니다. (시 104:31)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이런 여호와의 영광이 지금도 임하지만, 내년에는 더 큰 여호와의 영광이 우리 각자에게, 그리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게 임하길 소망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하심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은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 유다 백성들은 그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학 2:3)은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모습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이 없지 아니하냐.” 학개 시대의 백성들 가운데 이전 성전의 영광을 본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전 성전이란 솔로몬 성전을 말합니다. 솔로몬 성전은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되던 주전 587년에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학개를 통하여 말씀이 선포되었던 때는 약 주전 520년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파괴된 지 67년 정도가 지났던 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솔로몬 성전이 있었던 자리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모두 경험했던 사람들은 최소한 70세가 넘은 노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 솔로몬 성전을 보았던 사람들, 그들에게 솔로몬 성전에 대한 기억은 대단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은 7년 동안이나 걸린 걸작이었습니다. 이러한 건축에 동원된 사람만도 최소한 18만 명이 되었습니다. (왕상 5:13-15)를 보면 이렇게 말한다. “이에 솔로몬 왕이 온 이스라엘에서 역군을 불러일으키니 그 역군의 수가 3만이라. 솔로몬이 저희들을 한 달에 일만 인씩 번갈아 레바논으로 보내매 저희들이 한 달은 레바논(백향목)에 있고 두 달은 집에 있으며 아도니람은 감독이 되었고 솔로몬에게 또 담군(짐을 운반하는 사람)이 7만 인이요 산에서 돌을 뜨는 자가 8만 인이며.” 이렇게 많은 인원이 7년 동안이나 만든 건물이니 얼마나 웅장했겠습니까? 성전의 모습에 대하여 왕상 6-7장에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부분만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솔로몬이 정금으로 외소(성소) 안에 입히고 내소(지성소) 앞에 금사슬로 건너지르고 내소를 금으로 입히고 온 전을 금으로 입히기를 마치고 내소에 속한 단의 전부를 금으로 입혔더라”(왕상 6:21-22). 이스라엘의 최고의 건축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솔로몬의 성전이었습니다. 금으로 지성소와 성소를 입혔고 그 시대에 최고급 자재인 백향목으로 그 안의 기구들을 꾸몄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의 영광은 단지 외부적인 건축물의 아름다움만은 아니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바로 하나님의 처소였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시는 곳이었습니다. 즉 성전은 영광의 하나님이 거하는 영광의 장소였습니다. (왕상 8:10-11)은 성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바로 성전은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 계신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의 모습에 대하여는 시편 24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물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7-10절). 영광의 하나님이 계시기에 솔로몬의 성전은 영광의 장소였고, 그 영광의 성전은 값비싼 보석과 금은으로 장식된 웅장한 건축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건축물은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 마치 그 곳은 더 이상 영광의 하나님도 계시지 않는 곳처럼 보였습니다. 영광은 사라졌습니다. 보잘것없는 성전, 폐허가 된 성전, 그것이 바로 학개 시대의 성전의 모습이었습니다.
혹시 우리의 삶 가운데 폐허가 된 성전과 같은 것은 있지 않습니까? 과거에는 영광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보잘 것 없이 되어 버린 것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아직은 탱탱하니까 그런 것을 못 느끼겠지만, 저는 때때로 아침에 거울을 볼 때마다 폐허가 된 성전의 모습을 늙어가는 제 자신의 얼굴에서 발견하곤 합니다. (잠 16:31)은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위로를 삼고 살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폐허가 된 성전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여러분이 고등학생 때에나 대학생이 된 후, 아니면 올해 초에 꿈꾸었던 비전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그런 비전이 폐허가 된 성전은 아닐까요? 혹시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가졌던 비전, 예수님께 헌신하겠다고 다짐하면서 마음에 품었던 꿈, 혹시 그런 꿈이 지금은 폐허가 된 성전이 되지는 않았습니까? 정말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자신의 삶을 복음을 위해서, 잃어버린 영혼을 위하여 살겠다고 다짐했고, 그것이 그 때에는 그 무엇보다도 영광스런 것이었는데, 지금은 그 열정이 다 식어버렸고, 그 꿈이 좌절된 폐허가 된 성전이 되지는 않았습니까? 혹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그렇지는 않습니까? 이전에는 하루라도 볼 수 없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그 관계에 영광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루라도 보기만 하면 마음이 상하는 그런 관계가 있지는 않습니까?(결혼하면 이해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관계가 폐허가 된 성전이 아닐까요? 혹시 지금 우리의 모습이 그러한 폐허가 된 성전으로 인해 실망과 좌절 가운데 있지는 않습니까? 과거에는 큰 영광으로 생각했었는데, 특히 어떤 것들은 그 영광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믿었던 것들인데, 지금은 사라져 버린 그런 영광이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은 없더라도 우리는 나중에 우리의 인생 가운데 폐허가 된 영광을 분명히 경험할 것입니다.
C. 지속될 영광: 비전
과거의 영광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과거에 했었던 사랑 고백은 잊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품었던 꿈과 비전이 때로는 잊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했었던 결단도 무너졌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창 32:24) 이하를 보면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하다가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가는 노정 가운데 야곱은 ‘홀로’였습니다. 그 가운데 야곱과 하나님이 씨름을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샅바를 먼저 잡았습니까? 하나님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샅바를 잡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의 샅바를 잡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샅바를 놓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며 살아가는 과정에 자신이 혼자라고 느끼는 경우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샅바를 잡고 우리에게 싸움을 걸어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마침표가 없습니다. 단지 쉼표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의 삶이 끝이라고 느낄지 모르지만, 그것은 마침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것은 단지 쉼표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큰 영광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가 끝이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침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쉼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큰 영광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이 우리의 약속되길 소망합니다. 우리의 미래에 여호와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이 임하길 소망합니다.
III. 더 큰 하나님의 영광
A. 자기의 소위를 살피라 (학 1:5-7).
그러면 이러한 더 큰 여호와의 영광이 누구에게 임하게 될까요? 어떻게 임하게 될까요? 학개는 더 큰 여호와의 영광을 위해 필요한 것에 대하여 본문과 본문의 전후 문맥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학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의 소위를 살펴보라고 말씀합니다. (학 1:5)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북한 쥐에 대한 하나의 유머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북한은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북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곳에서 사는 쥐도 굶주리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쥐들에게도 통행의 자유가 제한되고 있기에 먹을 것을 구하기가 무척 어렵다고 합니다. 굶주림에 힘들어하던 어떤 똘똘한 쥐가 꾀를 내었습니다. 자신은 통행의 제한이 있는데, 자유롭게 통행하는 새를 보면서, 미스터 쥐가 미스 새에게 쥐꼬리를 흔들었습니다. 꼬리의 힘으로 그 둘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랑의 절정에 올랐을 때, 이 쥐는 자신의 히든카드를 끄집어냈습니다. “미스 새. 너는 아무 데나 날아다닐 수 있지? 쥐들이 갖고 있는 정보에 따르면 이모 당원집에 식량이 많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을 가져올 수 있어?” 문제없다고 하고 새가 날아가 그 집에서 많은 양식을 갖고 사랑하는 미스터 쥐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그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오랫동안 굶주리던 그 쥐가 자기 애인 새가 날아다 준 음식을 바라보자마자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자기, 우리 쥐도 새도 모르게 다 먹어 치우자!”
이 이야기는 하나의 유머이지만, 물질의 풍요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는 우리 현대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여기에 계신 분들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풍요롭게 살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그러한 풍요함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선 자신의 모습을 막는 이유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풍요함만이 자신의 모습을 막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고난과 삶의 버거움이 자신의 모습을 보질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즉 어떤 사람에게는 풍요가 그 사람의 시각을 그 풍요로 고정시켜 자신의 모습을 보질 못하게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삶의 버거움이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에게는 풍요가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에게로 시선을 집중시켜 그 분 앞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끔 만들고, 어떤 사람은 고난이 하나님께만 의지하게 만들어 그 분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끔 합니다. 중요한 것은 풍요와 고난이라는 외적인 상황 자체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가, 아니며 오히려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에게는 삶의 버거움이 하나님 앞에선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남유다가 주전 587년 바벨론에 멸망한 이후, 남유다의 지도자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음성을 듣고 해방의 소망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마침내 주전 539년 바벨론은 페르시아에게 멸망되고, 그 다음해인 538년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땅인 가나안으로 귀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돌아가기만 하면 저절로 유대가 다시 과거의 영광을 회복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과거의 예루살렘 성전이 쉽게 재건되고,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벨론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지만,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총독이었던 세스바살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으나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고, 결국 성전 건축을 중도에 그치게 되었습니다(스 5:16 참조).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의 중심을 다시 세운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약속의 땅에 돌아왔음에도, 그 땅 안에서도 다툼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귀환한 유대인들과 본토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 사이에 주도권 싸움이 있었고, 유대인들과 주위에 있던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도 여러 가지 다툼이 계속되었습니다. 게다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왔지만, 그 땅에서의 삶은 매우 궁핍했습니다. 농사를 지었지만 흉년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학 1:10-11)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한재를 불러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
이러한 유다 백성들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만 되면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오해를 합니다. 마치 바벨론에서 약속의 땅에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 풀리리라고 기대했었던 귀환민들처럼 말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인만 되면 구체적인 삶의 문제나, 사람 사이의 문제가 별로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사람 사이에 많은 문제들이 생기고, 때로는 자존심 싸움을 하곤 합니다. 마치 귀환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살던 다른 유대인들과, 그리고 사마리아인들과 주도권 싸움을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하던 일이나 사업이 더 잘 되리라고 기대하고, 경제적으로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보다 상황이 더욱 악화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치 귀환민들이 약속의 땅에서 바벨론에서보다 더욱 빈곤과 배고픔으로 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주변의 환경이 자신에게 적합하게 움직여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믿음 생활을 잘 함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상황이 더욱 열악해지곤 합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당하다 보면 믿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처음 경험하고 감격하고 평생 예수님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 우선적으로 살겠다는 결심은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비그리스도인들과 다를 것 없이 그들과 똑 같은 방법으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말합니다. "지금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 때가 아니니 나 자신을 위하여 먼저 살고, 그래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그 후에 하나님 중심으로 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모습이 귀환한 백성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이 모습에 대하여 (학 1:2)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이 말씀이 선포된 때는 "다리오 왕 이년 유 월 곧 그 달 초하루"(1절)였습니다. 그 때는 주전 520년입니다. 즉 포로민들이 귀환하기 시작하여 약 18년이 지났던 때였습니다. 포로민들은 처음 귀환하면서 성전을 지으려고 하였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자, '지금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 자신들의 때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삶에만 집중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아니다'라는 것에 근거하여 자신들만을 위하여 사는 것을 정당화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 학개는 귀환한 백성들이 먼저 자신들의 모습을 보라고 권면합니다. (학 1:5, 7)을 보면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고 말씀합니다. 미래에 더 큰 영광이 임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데 있어서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지난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반성해야할 것은 반성하고, 회개해야할 것은 회개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학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라고 말씀하면서, (학 1:6)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버거운 것은 그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많이 뿌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은 것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귀환한 백성들의 문제는 그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땅에서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서 일했습니다.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정착하기 위해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 127:1). 아무리 우리 인간이 집을 세우려고 최선을 다한다 할지라도, 우리 인간이 성을 지키기 위해서 깨어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그 모든 것이 소용이 없습니다.
B. 우선순위: 먼저 그의 나라와 의 (학 1:8-9)
구체적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게 살았던 모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학 1:8-9)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 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전을 짓는데 우선하지 않고 자신의 집을 짓는 일에 빨랐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자신의 집을 지었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자신의 집을 짓는 것이 하나님의 전을 짓는 것보다 우선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의 문제는 우선순위의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우선순위의 바뀜으로 인해 그들이 수고해도 얻지 못했다고 말씀합니다. “차선은 최선의 적이다”라는 서양의 속담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집을 짓는 것이 차선인데, 그것을 최선으로 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플로리다 주 에버글레이드에 한 비행기가 추락했습니다. 그 비행기는 그 유명한 401편이었는데 휴일을 맞아 여행객을 가득 태우고 뉴욕에서 마이애미로 가고 있었습니다. 마이애미 공항에 착륙하기 위해 다가가는데 착륙기어의 작동 여부를 알려 주는 전광판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착륙 기어가 펴지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전광판 전구에 이상이 생긴 것인지를 점검하는 동안 항공기는 거대한 곡선을 그리며 에버글레이드 늪지대 위를 선회하고 있었습니다. 조종사는 드디어 전구에 이상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전구를 갈아 끼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구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옆에 있던 조종사까지 전광판에 달라붙었습니다. 그렇게 전구와 씨름하는 사이 항공기는 고도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종사들은 그 전구에 신경을 쓰느라 고도가 낮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항공기는 늪 속에 곤두박질쳤고, 이 사고는 수십 명의 인명 피해를 냈습니다.
전광판에 있는 전구를 바꾸는 것이 필요 없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중요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점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비행기를 바로 조종하는 것이었고, 그 비행기를 비행장에 안전하게 착륙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조종사들이 비행 경험이 많은 숙련된 조종사들이었지만, 그 순간의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지 못함으로 결국 비행기는 승객과 함께 추락했던 것입니다. 마치 귀환한 유대 백성들이 우선순위를 잘못 세움으로 그들의 삶이 피폐해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전구를 바꾸는 것은 조종사에게 우선의 일이 아니라 차선의 일이었습니다. 차선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차선은 우선되지 말아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우선해야할 것을 우선하고, 나중해야 할 것을 나중 하는 것이 지혜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집을 짓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전을 짓는 것보다 그것이 빠른 것이었습니다.
혹시 우리도 귀환한 백성들과 같지는 않습니까? 전구를 바꾸는 것에 집중하여 운전대를 놓아버렸던 그 조종사 같지는 않습니까? 우리도 귀환한 백성들처럼 자기 집을 짓는 것에 우선이지는 않습니까? 그 시대에 귀환한 백성들에게는 유다의 자기 집이나 땅이 없었습니다. 70년 정도의 포로 생활을 지내면서 그 이전에 있었던 땅이나 집은 모두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그렇기에 귀환한 백성들에게 있어서 자기 집을 짓는 것은 긴급하고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당연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당연한 것,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눈에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집을 짓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집을 짓는 것이란 어쩌면 좋은 직장을 위하여 시간과 힘을 투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당연히 하는 것이고, 여러분도 당연히 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좋은 직장을 위해서, 자신이 원하는 학과에 들어가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일을 뒤에 놓고 그 일을 우선으로 잡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긴 그 사명을 뒤로 하고, 우리의 집만을 위하여 집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단이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순서를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순서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순위를 바꾸는 것입니다. 말씀은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말씀의 순서를 바꾸거나 그 내용 가운데 약간을 생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단이 인간을 공격하는 가장 첫 번째 사건은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유혹하는 것입니다. (창 3:1)에서 뱀은 이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랴.“ 여기서 뱀이 한 말은 모두 하나님께서 이전에 아담에게 하신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창 2:16-17)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히브리 원어를 보면 뱀이 한 유혹에 사용된 단어는 모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셨던 지시 가운데 있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뱀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서 단어의 순서를 바꾼다든지, 또는 몇 단어를 빼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공격하지 않고, 단지 그 말씀의 순서를 바꾸어 공격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사단이 예수님을 공격했던 방식도 비슷합니다. 사단이 예수님께 한 가장 먼저의 시험은 이와 같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40일 동안 금식한 예수님에게 떡은 생존을 위하여 정말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온전한 인간이며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에게 40일 동안의 주림이란 정말 참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음식을 욕심이 별로 없고, 굶는 것을 잘하는 편이지만, 하루 이상을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 요사이는 몸이 음식을 요구해서 그런지, 음식이 들어가야 할 시간에서 2-3시간만 지나도 몸이 자신을 학대하지 말라고 강하게 저에게 말합니다. 정말 견디기 힘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40일이나 금식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에게 떡은 어쩌면 가장 필요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필요한 것, 중요한 것에 대한 사단의 시험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 예수님께서는 떡이 살아가는 데 필요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떡도 필요하지만, 그것으로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떡도 살아가는데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씀하셨습니다.
(마 6:33)은 우선순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성전을 짓는 일보다 자신의 집을 짓는 일에 빨랐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보다 자신의 일상생활이 더욱 우선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떡을 구하는데 우선되었다는 것입니다. 떡을 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떡을 위하여 삶을 투자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인간으로 당연히 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순서가 있습니다. 떡도 구해야 하지만 먼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집을 집는 것도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하고 우선되는 것은 신앙을 세우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을 먼저 세우면 하나님께서 나머지는 책임져 주십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더해 주십니다. (학 2:8)은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금과 은을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그 분의 마음에 합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을 적절한 때에 다 채워 주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아이가 없어서 눈물로 기도하다가 사무엘을 낳게 된 한나는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삼상 2:6-8). 한나의 기도를 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의 서론이라고 합니다. 즉 한나의 기도는 이스라엘의 왕정 역사에 대한 서론입니다. 왕이 다스리던 시대의 역사에 대하여 성서가 언급하기를, 이 역사는 왕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성전인 우리의 몸, 성전인 우리의 공동체, 성전인 우리의 신앙을 먼저 바로 세우면, 하나님께서 그 외의 다른 것들은 다 책임져 주십니다. 자신의 집을 짓는 것보다 신앙을 세우는 것에 우선하면, 하나님께서 이전보다 더 큰 영광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니다.
C.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학 2:4)
성전을 재건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신앙을 세울 수 있을까요? (학 2:4)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나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스룹바벨은 그 시대의 총독, 즉 정치적인 지도자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시대의 제사장, 곧 종교적인 지도자였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3번이나 반복하여 강조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데 흔들림 없이 꾸준히 열심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함에 있어서 주위의 반대가 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어려움과 장애가 있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관계없이 열심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얍복 강가에서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떠날 시간이 되었는데도 야곱은 그 샅바를 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환도뼈를 쳐서 그 뼈가 위골되었지만 야곱은 그 샅바를 놓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참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야곱과 같은 끈기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쳐서 발가락 하나만 위골되어도 샅바를 놓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끈기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끈기와 꾸준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세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초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세우겠다고, 더 큰 신앙을 위해 정진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마음이 약해지고, 때로는 이러한 믿음의 성장에 방해가 되는 환경과 사건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흔들림 없이 굳세게 하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굳세게 하라는 것입니다. 환경이 바뀌면 신앙을 세우는 일에 열심히 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목표로 하는 학과에 들어가면 그 때 신앙을 세우는 일에 열심 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면 그 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부터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신앙을 재건하는 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못하면 나중에도 못함.)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어떤 서원을 하셨습니까? 혹시 아직 하나님 앞에서 이 한 해를 어떻게 살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신 분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시길 바랍니다. 여러 가지 약속을 할 수 있지만, 특히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약속했으면 좋겠습니다. 각자의 삶 가운데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길 소망했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의 가족 가운데, 그리고 우리의 신앙 공동체 가운데 임하기 위해서는 신앙을 재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믿음을 그 무엇보다 우선으로 생각하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것을 흔들림 없이 굳세게 밀고 나가시길 바랍니다. 이를 위해 굳세게 일하시길 바랍니다. 때때로 어려움과 장애를 만날 수 있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학 2:4 후반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 처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믿음을 더욱 세우는 그 일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위대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님이 말년에 여러 가지 병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어떤 교우가 목사님을 방문했습니다. “목사님 많이 아프시죠?” 그때 스펄전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예 너무너무 아픕니다. 그러나 이 고통보다 주님은 내게 더 가까이 계신답니다. 이것이 나의 위로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2005년도에도 여러 아픔을 만날 것입니다. 그 때 스펄전 목사님처럼 아픔 가운데 더 가까이 계신 예수님을 만나길 소망합니다. 다윗이 시편 23편 4절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고 고백했던 그 고백이, 우리의 삶 가운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경험하는 순간에 우리의 마음에서도 되새겨지는 우리의 고백되길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