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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헌김공신도비 | 거창신씨묘역 | 문화류씨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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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헌 김공신도비
지정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9호 (1984. 11. 3)
시대 : 조선조 영조 19년(서기 1743년)
위치 : 방이동 88-4 (올림픽공원 내)
규모 : 비석 1기 (총고 4.06m, 신고 2.74m, 폭 1.0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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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공원 몽촌토성내에 위치한 이 비의 주인공은 청품 김씨로 이름은 구(構)로써 박세채의 문하생으로 조선후기(1649-1704)의 문신이다. 숙종 8년(1682)춘당대 문과에 장원급제 하였다. 전적과 육조의 낭관을 거쳐 양사의 청직을 두루 거치면서 스승의 탕평성을 따라 노론, 소론 사이의 조정에 힘썼다. 이어 황해, 충청, 전라, 평안 4도의 관찰사를 두루 역임하고, 1697년 강화유수가 됨에 따라 흉년으로 모든 역사가 중단됨에도 불구하고 내전의 뜻을 받아 장령전을 건립했다가 이광좌등의 탄핵을 받았다. 이어 판결사로 있으면서 노산군의 북위론에 동조, 이를 실현시킨후 형조판서를 거쳐 1703년(숙종 29년) 우의정까지 올랐다. 이 비의 글은 영의정 이의현이 짓고, 글씨는 청백리 서명균이 썼으며, 두전은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의 픽적으로 미술적으로 수법이 뛰어나서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고성의 백천교중창비와 선산의 김수신도비가 남아있다. 시호는 충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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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신씨묘역
지정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78호 (1991. 12. 24)
위치 : 송파구 오금동 51 (오금공원내)
면적 : 576m2
규모 : 비석 1기 (총고 4.06m, 신고 2.74m, 폭 1.0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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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신씨의 시조는 원래 중국 송나라 개봉부인으로 지사라는 벼슬에 있었는데 송나라와 고려의 외교관계를 재개설하기 위해 사절단으로 고려의 수도 개성에 왔다가 귀화하여 고려인이 됨으로써 거창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 묘역은 약 500년전에 안치된 쌍분묘소로 세조 원년(1456년)사헌부장령을 거쳐 동지중추부사(종2품)를 지낸 신선경과 정부인 한씨의 쌍분묘소 및 묘비로 그 웅대함과 연꽃 무늬의 비갓으로 된 비석은 묘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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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류씨묘역
지정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79호 (1991. 12. 24)
위치 : 송파구 오금동 51 (오금공원내)
면적 : 1,198m2
규모 : 분묘 4, 상석 3, 촛대석 5, 문무관석 4, 신도비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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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시 백사 이항복과 함께 임진왜란 3등 공신으로 선조대왕을 보필한 문양군 류희림공 및 문원군 류복룡공, 공조참의 류인호공의 묘소로서 류희림은 복룡의 아들로 조선중기의 문신이다. 류희림은 명종 15년(1560), 성균관 유생으로서 1,000여명의 유생을 대표하여 다시 일어나고 있는 불교를 비판하고, 선.교 양종을 폐지하자는 내용의 상소를 하였다. 156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문한관이 되었다. 이어서 검열, 정언, 지평, 사헌부장광령, 집의를 역임하였다. 1581년 형조참판으로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나 가지고 간 방물이 부족하여 좌직되었다. 그 뒤 재기용되어 한직에 머물러 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첨지중추부사로서 왕을 호종하여 좌승지로 발탁되었다. 1593년 종지중추부사, 1594년 예조참판, 1597년 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 죽은 뒤인 1604년 호성공신 3등에 봉하여지고 문양군에 추봉되었다.
* 출처 : 송파문화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