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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푸른미리내 시동인 원문보기 글쓴이: 별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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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시인과 영양군 (상편) |
지조가 사라지고 있다. 지조를 지키다가는 시대의 낙오자가 된다고 야단이다.
이런 판에 초지일관 지조를 지키며 살다가 떠나간 이의 삶의 궤적을 찾아 나서는 일은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일인지 모른다. 국제화는 급기야 변질과 변절조차 용인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세상사가 답답하고 한심하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따라가느라 도통 제정신이 아니다. 변화로 얻어진 물질의 풍성함이 사람들을 사뭇 행복하게 만드는 듯 보이지만 지조를 잃은 이들이 평안을 얻기는 힘들 것이다.
어쩌면 이런 현실이기에 지조를 끝까지 지키며 떠나간 이가 그립고 귀하다. 지조있는 선비처럼 살다가 떠나간
문인들의 상징인 조지훈시인의 고향 경북 영양군을 찾아 새벽길 떠난다. 서울과 수도권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전 6시를 넘지 않아야 안심이다. 자칫 멈칫거리다가는 낭패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중부고속도로를 달린다.
조지훈시인의 고향인 영양군 일월면에 있는 주실마을을 찾고 싶었던 것은 오래전이다.
늘 가슴속에 은밀하게 숨겨놓은 옛 사랑의 추억을 더듬거리듯이 간혹 그의 시 ‘완화삼’을 읊조리며 때가 되면 홀연히 떠나겠다고 속으로 별러 온지 어언 10년이 넘었다.
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조지훈시인의 시 ‘완화삼’ 전문
조지훈 시인(1920~1968), 이 이름을 듣는 순간 중년의 사람들은 그의 시 ‘승무’와 ‘완화삼’을 연상한다.
‘완화삼’은 조지훈 시인이 박목월시인을 위해서 쓴 시다. 답례로 박목월 시인이 조지훈시인을 위해 쓴 시가 그 유명한 ‘나그네’다.
꽃피고 구름 흘러가는 물길 칠백 리가 아니라 늦겨울의 삭풍을 가르며 중앙고속도로를 달려 소백산맥을 넘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소백산맥을 넘은 것이 아니라 죽령터널 속을 달려서 지나친다.
충북 단양군과 경북 풍기군의 큰 고갯길 죽령은 이제 역사속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아직 국내 도로 터널로는 가장 긴 죽령터널(4.6km)을 빠져 나가면 신기한 듯 시야가 확 트인다.
경상북도 풍기 땅이다.
옛사람들은 지역의 경계를 이렇듯 큰 산맥과 강을 경계로 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본보기가 바로 이런 곳이다. 소백산맥이 휘돌아 가는 모습이 차창을 통해서 보인다.
조지훈 시인의 생가 ‘주실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두 길이다.
한 곳은 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를 나와 영덕방향으로 계속 달리다가 진보를 거쳐 영양읍으로 진입하는 방법이다. 다른 한 곳은 풍기나 영주IC에서 봉화를 경유하여 청량산을 휘돌아 31번 국도를 이용하여 도달하는 방법이다. 이 두 방법 중 어느 것이 옳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비슷한 시간이 걸리며 장단점이 있다.
영양군이 아직도 교통이 수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안동에서 영양까지 가는 국도가 2차선이 증명한다. 안동댐과 임하댐의 담수를 보면서 가는 풍광이 좋지만 2차선 국도는 늘 추월차량들의 돌출행동들이 불안하기 그지없다. 청록파 시인이기도 한 박목월시인을 위해서 쓴 시 ‘완화삼’의 싯구가 다시 생각난다. “차운산 바위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길은 칠백리” 서울에서 340KM를 달려왔다. 칠백리가 아니라 족히 800리가 넘는다.
영양군청이 있는 영양읍은 산들에 에워 쌓인 분지형태에 다소곳이 숨어 있는 도시다. 오롯한 읍 길을 승용차로 몇 번 오고 가면 금세 왔던 길을 또 오게 될 정도로 작은 소읍이 영양읍이다. ‘영양군민회관’은 사뭇 위용을 자랑하듯 읍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웅장하게 서 있다.
영양군민회관내에 있는 영양문화원의 이정인 사무국장에게 조지훈 시인에 관해 묻는다. 그러나 그는 “조지훈시인에 관해서는 고려대학교 민족문제연구소에 자료가 많습니다. 이곳에서는 자료도 별로 없거니와 잘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분이 고맙게 제공한 ’영양문화‘에도 조지훈시인에 관한 자료가 보이지 않는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영양군은 삼국시대 때는 줄 곧 고구려 땅이었다. 신라초(고운), 신라말(영양),고려초에 영해부에 속했다가 1179년 영양현이 된다. 조선 초인 1413년 다시 영해부로 되었다가1683년에 영양현으로 복현되고 갑오경장 직후에 영양군이 된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는다. 산채정식을 잘한다고 하는 ‘삼양식당’을 들어선다.
다리를 절고 있는 주인 할머니는 이미 40년 넘게 식당을 운영한 분인데 식당에는 점심식사 전이라 찾는 이가 없다. 주방을 들여다보니 너저분하고 안내한 방은 온기가 없고 차다. 그러나 산채정식은 일품이었다.
하지만 손님을 초대하기는 식당분위기가 너무 칙칙하다. 문학기행을 다니다 보면 그 고장에서 가장 맛나고 좋은 분위기의 음식점을 묻곤 한다.
맛과 분위기가 가장 좋은 곳을 찾는 것은 먼 길을 떠나온 사람들의 한결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영양군에는 이런 곳이 없다. 향후에 영양군이 문향의 고향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음식점이 꼭 생겨야 한다. 먹는 일도 기행중에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급히 일월면 주곡마을을 향해 떠난다. 음식점의 분위기와 맛도 그 고장의 자랑이기 때문이다.
차량의 이동이 한적한 도로(지방도918번)을 약 10분쯤 달리면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에 닿는다.
동리에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돋는가 싶었는데 역시 그랬다. 마을의 숲이 마을을 보호하고 있었고 숲속에
조지훈의 시비가 정갈하게 서서 반긴다.
주실마을 숲속에 있는 조지훈 시인의 시비를 읽는다. 주변의 풍경은 한 폭의 수묵화다.
주실마을 숲속에 있는 조지훈 시인의 시비
1982년 시비건립당시 약 500명의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석을 하였다는 시비는 한눈에 보아도 품위 있고 멋이 있다. 최근에 자연석을 마구잡이로 깎아서 성의 없이 난립되고 있는 시비를 보다가 이 시비를 보니 마음이 푸근해 지고 피곤이 가신다.
25년 전에 이 시비를 시인의 생가 마을 앞에 세울 줄 알았던 사람들의 안목에 고개가 숙여진다.
그런데 시비에는 특이하게도 조지훈의 대표시가 아닌 ‘빛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세로 행으로 새겨져 있다.
느티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이 숲은 마을을 수호하듯 800리 길을 달려온 나그네를 위해 바람 한 점 없게 만든다.
바람도 없고 하늘은 높고 푸르른 날 드디어 조지훈 시인의 고향마을에 왔다.
숲을 나와 이내 ‘주실마을’로 들어선다. 마을은 고색창연한 기와집 일색이다.
조지훈선생의 생가인 ‘호은종택’은 문이 굳게 닫혀있다. 답사 날에 하필 열쇠를 가지고 있는 집 관리자 조동길씨는 서울에 가셨단다. 담 너머로 기웃거리면서 무심하게 사진 촬영만 한다.
주실마을 경로당에 들러 협조를 부탁해도 ‘호은종택’의 문은 열수가 없다.
조지훈시인 생가 호은종택
한양조씨 주실마을의 작은종택인 옥천종택을 관리하시는 조석걸(72)씨에게도 호은종택의 열쇠를 맡기지 않았다.
아직 개관을 하지 않고 있지만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임시로 문을 열고 있는 조지훈문학관을 찾는다. 개관을 앞두고 있는 ‘지훈문학관’은 얼핏 보기에도 근사하다. 영양군에서 30억원을 들여 지은 문학관으로 이 지역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될 듯 보인다.
조지훈시인의 고향마을에 문학관을 지은 것에 감동을 받아 피곤이 확 풀린다. 영양군 문화관광과 양희씨가 전담 직원으로 파견되어 근무중이다. “지훈선생님 문학관을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더” 그녀는 매우 친절하게 문학관을 설명해 준다. 따듯한 차 대접을 받는다.
청록집(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의 영인본을 선물로 필자에게 주면서 문학관을 안내한다.
조지훈 선생의 고향인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 생가인근의 대지 약 850평에 건평 약160평규모로 30억원을 들여 완공하고, 곧 개관을 앞두고 있다.
전시실 4개와 시청각실 그리고 청록파 시절 활동 등을 연대순으로 정리해 놓고 육필원고를 깔끔하게 전시하고 있다. 한옥으로 ㅁ자 형태의 전시공간이 특이하다.
양희씨의 전화로 영양군청의 임정평 계장이 문학관으로 직접 필자를 찾아와서 반긴다.
임정평 계장은 영양문인협회 홍보실장이라는 명함을 건넨다. 그는 ‘영양의 자연풍경’의 시화엽서를 내게 선물로 주며 영양 설명을 자세히 한다.
“영양은 문향의 고향이라 예” “좀 오지가 흠인데 이곳 주실마을은 전통한옥이 잘 보존되어 있어 예”
“그러나 이문열소설가 고향인 ‘두들마을’이 더 볼만 하지 예”
임계장은 금년 5월18일 ‘2007년 지훈 예술제’를 개최한다면서 꼭 다시 한 번 방문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공무원들이 변하고 있다. 특히 지방자치제 이후 문화관광과의 공무원들의 친절은 때론 감동을 주기도 한다.
임계장도 근무를 하다말고 전화를 받고 급히 달려온 것이다. 군청에서 지훈문학관까지는 승용차로 10분 이상 걸리는 길이다. 고맙고 감사하다.
조지훈 문학관
주실마을 탐방을 나선다. 봄빛이 완연하다.
이 마을은 현재 60가구에 약 200명의 주민이 산다.
조지훈 생가는 동네 중심부의 맨 앞집이다. 대문 오른쪽에 호은종택(壺隱宗宅)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조지훈 시인은 이 종택에서 태어났다. 호은(壺隱)은 주실 조씨(趙氏)들의 시조이며, 1629년(인조7년)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이의 호다. 호은 조전(趙佺)의 둘째 아들 조정형(趙廷珩)이 건축하였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죽음과 더불어 가문이 멸문을 당할 때 그의 후손들은 전국의 각지로 피신을 했다.
이 후손중의 한 사람인 호은공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호은(壺隱)이란 “호리병을 가지고 은둔 한다‘라는 뜻인데
아마도 사화(士禍)에 살아남기를 갈구하는 특이한 호다.
옥천종택을 관리하는 조석걸(72세)씨가 370년을 내려온 집안의 가훈을 이야기를 한다.
“우리집안은 삼불차(三不借)를 했어
첫째는 재불차(財不借), 재물을 빌리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인불차 (人不借), 즉 사람을 빌리지 않지,
세 번째는 문불차(文不借)야, 글을 빌리지 않는 것이야”
370년간 이 전통이 그대로 지켜온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이 마을에서만 박사가 14명이 배출되었다. 박사도 보통 흔한 박사가 아니라 대부분 한국 인문학의 대들보 같은 이들이다.
예를 들면 조동일(국문학) 조동걸(역사학) 조동원(금석학)박사이며 조지훈(동탁)시인과 서로 지척에서 태어났다.
주실 마을
주실 마을 호은종택의 문전옥답 논 50마지기(약 1만평)는 370년 호은공 때부터 지금까지 장자에게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조선후기를 거쳐 일제식민지와 이승만 정권에 있었던 토지분배에서도 용케 살아남아 오늘까지 종가집의 토지로 살아남아 있다.
나는 호은종택 앞 논둑길을 걸으면서 조지훈 시인을 생각했다.
바람도 없고 하늘은 높고 푸르다. 가슴이 울렁일 정도로 설렌다.
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지만, 청록집에 수록된 조지훈의 시 ‘낙화’를 낭송하면서 산 밑 ‘지훈시공원’으로 향한다.
지훈 시공원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낙 화 -
‘주실마을’은 축복의 마을이다. 조상을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을 다시 실감한다.
산골짜기의 지형지물을 그대로 활용하여 조성한 ‘지훈시공원’에는 약 20여개의 시비가 건립되어있다. 자연석을 깎아 만든 이 시비들에는 주옥같은 지훈시가 새겨져 있어 이 시를 읽고 음미하다 보면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이 공원을 탐방하다보면 동네사람들과 일박을 하면서 늙은 마을의 역사와 인물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마을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고택이 즐비하다.
대표시중의 하나인 ‘역사앞에서’를 읽으니 조지훈시인의 지조가 느껴진다. 조지훈시인(1920~1968)은 6세부터 9세까지 조부 조인석으로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한다.
선비적인 가풍의 영향으로 이 마을에 있는 ‘월록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혜화전문을 졸업하였지만 그의 학문은 거의 독학이다.
주실마을 지훈시공원에 있는 ‘역사앞에서’ 시비
1939년도에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1940년 ‘봉황수(鳳凰愁)’로 문장지에 정지용시인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등단한다.
그는 역사와 민족, 민속적인 주제를 가지고 지조있는 정서를 노래한 시풍으로 선비적인 시인이 되었다.
박두진(1916~1998), 박목월(1916~1978)과 함께 1946년 동인시집인 청록집(靑鹿集)을 발행하였다.
이 동인 시집 한권의 위력은 대단했다. 오죽하면 이들을 청록파라 하지 않는가.
조지훈시인의 첫 시집은 풀잎단장(1952)이다. 이어 시의원리(1953),조지훈시집(1956)을 발행하면서 왕성한 저작 활동을 한다.
이승만의 자유당정권의 부정부패에 환멸을 느낀 조지훈시인은 시집 ‘역사앞에(1959)’와 ‘지조론’을1960년 3월호
’새벽지‘에 게재하면서 독재정권에 대항한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며 한국민족운동사, 신라가요연구논고, 한국문화사서설 등의 저서가 있지만 그는 역시 시인이다. 일제하에 친일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문인중의 한분이며 특히18세의 나이에 한용운시인을 찾아가 독대한 일화는 유명하다.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서에서 심한 신문을 받고 오대산 월정사에 숨어살면서 일제 말에 글로 친일하지 않았다.
조지훈 시인의 인생을 더듬거리면서 주실마을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옥천고택을 탐방한다.
옥천종택은 호은공의 증손자인 한양조씨(趙氏)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 1658~1737)의 종택(宗宅)이다.
조덕린은 숙종 17년(1671)에 문과에 급제하고 교리(校理)와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지만 노론을 자극하는 글을 써서 제주도 유배중 강진에서 세상을 떠난다.
옥천종택
‘주실마을’에는 우물이 단 하나밖에 없다. 370년 동안 옥천종택 오른쪽 담장 밑에 있는 우물을 이용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는지 궁금하여 옥천종택에 살고 계시는 조석걸씨에게 묻는다.
“주실마을은 풍수지리학적으로 배 모양의 땅입니더,
우물을 파거나 지하수를 파면 배에 구멍이 뚫려 배가 침몰 한다고 했어”
더 무엇을 물을 수 있겠는가? 풍수지리에 누구도 이유를 달지 못하고 수백 년 불편을 감수한 한양조씨 집성촌 마을에 고개가 숙여진다.
대문 오른쪽에 있는 창주정사의 돌계단을 오른다.
창주정사는 임산서당이라고 하는데 전망이 좋고 옥천 조덕린 선생을 기리기 위해서 지은 집이다.
만곡정사는 주실 입구 왼쪽 개울가에 있다. 멀리서 보면 한 폭의 그림이다.
글 | 김경식 (시인)
조지훈과 영양군 (하)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를 위해 그의 제자들이 세운 집이다.
이런 집을 짓고 살고 싶은 마음이 나그네를 자극한다.
이 집의 현판은 정조 때 영의정이었던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썼다.
그의 호는 만곡(晩谷)이며 주실마을에서 가까운 청량산에서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만곡정사
영조대왕 앞에서 강의를 하였을 정도로 학문이 높았다. 저서로 ‘만곡문집’이 있다.
개울가를 기웃거리면서 다시 주실마을을 바라본다. 이제 월록서당을 찾아 나서야 한다.
다시 호은종택과 조지훈문학관을 지나 매방산 아래 월록서당을 찾는다.
이쯤에서 조지훈의 가계도를 이야기해야 한다. 조지훈시인의 부친 조헌영(1899~1988)은 일본 중앙대 출신의 유명한 한학자다. 그는 본래 영문학도였는데 친구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허준의 동의보감을 독학하며 의술을 익힌다.
광복후 초대국회의원을 지냈으며 6,25때 납북되었다. 조지훈의 조부 조인석(1879~1950)은 호은종택내에
영진의숙이라는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고 ‘초경독본’이라는 책을 저술한 근대 교육자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6,25때 공산당의 회유와 협박에 시달리다 자결하였다는 것이 동리사람들의 이야기다.
조지훈시인의 증조부 조승기(1836~1913)는 일제의 명성왕후 시해 사건후 의병이 되어 의병대장이 된 분이다.
결국 조지훈의 지조론은 우연하게 스스로 터특한 이론이 아니다.
조상대대로의 선비정신과 지조적인 혈통을 중시하는 것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몸소 실천하지 않으면 문중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
조지훈시인의 지조론을 뒤적이며 한 구절을 찾아 읽으며 월록서당을 찾아간다.
월록서당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는 따를 수 없다.”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을 생각하니 화가 나면서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러나 매봉산자락에 봄빛이 완연한 것을 대하니 가슴 설렌다. 역시 사람은 자연으로 돌아 가야 한다
유년의 조지훈시인이 지조의 사상을 익히기 까지 공부했을 ‘월록서당’은 산 밑에 오롯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른 봄볕이 고가에 조명을 만들어 아름다운 운치를 자아나게 하고 있다.
주실마을에서 만든 소책자에 나온 역사학자 조동걸 교수의 월록서당에 관한 설명서를 읽는다.
“1765년에 한양 조씨, 양성 정씨, 함양 오씨가 협력하여 일월산 기슭을 업고 낙동강 원류인 장군천을 끌어 안은 곳인
주실 동구에 세운 서당이다. 조선후기 실학의 학풍과 더불어 교육의 대중화을 위한 서당 건립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주실에는 월록서당이 건립되어 이 곳이 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건물은 겹집이며 팔작집으로 지었다. 내부 중앙은 강당이고 양편에 넓은 방이 꾸며져 있는데 좌편방에는 ‘조성제’
우편에는 ‘극복제’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월록서당을 나와 마을 앞 큰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조석걸씨를 다시 찾아가서
마을앞에 있는 문필봉에 대해 물었다. 호은 종택을 등지고 바라보면 가장 잘 보인다는 문필봉은 저녁햇살 때문에
분별하기가 어렵다. 조석걸씨는 이 마을에 학문의 대가들이 많이 태어난 것을 문필봉 때문이라고 전한다.
오일도 시인 생가
이제 주곡마을 떠나야 한다. 오일도 시인의 생가마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영양읍을 지나 아름답고 환상적인 길가의 감천마을에 있는 오일도 생가는 필자가 생각했던 집보다 규모가 크고
고색창연하다.
총 44칸이라고 하는데 오일도 시인의 후손이 직접 생활을 하면서 살고 있는 고가지만 사람이 살고 있어 생기가 있다.
역시 집에는 사람이 살아야 한다.
이 집은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애국시인인 일도(一島) 오희병(吳熙秉, 1901~1946)이 태어나고 자란 집이다.
그의 조부인 오시동(吳時東)이 고종(高宗) 1년(1864)에 세운집이니 약 150년이 된 집이다.
동네 어귀에서 만난 권순필(76세)씨에게 오일도 시인을 물으니 잘 안다고 하신다.
“오일도씨를 직접 보았지예” “나 이 동네에서 태어나서 이 동네로 시집을 갔어요”
감천마을은 주실마을 처럼 예사로운 동네가 아니었다. 동리 입구에 연못도 있고 정자도 만들어 놓았으며
작은 연못 남쪽 둑에 늙은 소나무들이 마을을 지키고 서 있다.
이 마을은 주로 낙안오씨 집성촌이다.
동네 앞으로는 큰 개울이 흐르고 산새가 수려한 감천마을에 오일도시인이 태어난 것은
우연히 아닌 듯 보인다.
오일도(吳一島 1901~1946)시인의 본명은 희병(熙秉)이다.
본관은 낙안(樂安)이며 호는 일도(一島)다.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나와 일본의 립교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조선문단(1925)에 ‘한가람 백사장’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다.시전문지 ‘시원’을 창간하여 5호까지 출간하였다.
그는 김광섭시인 이헌구 등과 벗하였다. 특히 조지훈이 첫 상경해인 1936년 지훈의 나이 17세 때 오일도 시인이
경영하는 ‘시원사’에 머무른 인연이 있다.
결국 오일도 시인은 조지훈시인에게도 영향을 끼친 분이다. 대표시로 ‘저녁놀’ ‘노변의 애가’, ‘눈이여! 어서 내려다오’가 있다.
오일도 시인의 시속에는 서정적 그리움인 민족의 얼과 정과 한이 담겨있다.
국도변이면서 감천마을 입구 개울을 내려다보면서 서 있는 그의 시비를 쉽게 찾았다.
시비에는 세로 행으로 그의 대표시 ‘저녁놀’이 새겨져 있다. 역시 애잔하며 민족적인 비애가 담겨있다.
오일도 시인의 시 ‘저녁놀’을 읽는다.
저녁놀
오 일 도
작은 방안에 장미를 피우려다
장미는 못 피우고
저녁놀 타고 나는 간다
모가지 앞은 잊어버려라
하늘 저 편으로
둥둥 떠가는
저녁 놀!
이 우주에
저보담 더 아름다운 것이
또 무엇이라!
저녁놀 타고
나는 간다
붉은 꽃밭 속으로
붉은 꿈나라로
영양군 사람들에게 갈 만한 곳을 물으면 대부분 ‘선바위’라고 한다.
그 만큼 경관이 뛰어나다는 증거다. 일월산에서 발원한 변변천은 영양을 휘돌아 이곳에서 청계천과 만나는 데 이곳이 남이포다. 이 여울 앞에 거대한 절벽바위가 촛대처럼 서 있는데 이곳을 ‘선바위’라 한다. 진보쪽으로 향하는 31번 국도변에 넓고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다. 이 선바위 공원 내에는 ‘분재수석야생화전시관’과 ‘영양고추홍보관’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선바위 석문교
선바위 건너편을 휘감아 가면 나타나는 서석지는 조선 광해군 때 정영방(1577~1650))선생이 조성한 조선 연못의
대표적인 정원이다. 이 정원은 “자연과 인간합일사상”을 토대로 만들었다.
그러나 영양의 역사가 유구하고 아득하다고 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봉감모전5층석탑’(국보제187호)을 찾아가야 한다.
‘입압’에서 진보방향으로 31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가다보면 우측으로 산해로 빠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조금 가다보면 왼쪽으로 ‘봉감모전5층석탑’의 안내판이 보이고 경운기길 같은 1차선 길을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작은 마을이 보인다.
이 마을을 조금 지나면 ‘봉감모전5층석탑’이 의연하게 서 있다. 1500년 동안 그렇게 서 있다.
남자현 지사 생가
이곳을 나와 31번 국도를 타고 안동방면으로 내려가다 좌회전하면 석보면사무소 방향이이다.
영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옥 마을인 ‘두들마을’로 가는 길이다.
길이 한적하다. 잠시 승용차를 몰다가 보니 이내 이 지방도(911번) 우측에 여성독립운동가인 남자현(1872~1934))지사의 생가가 있다.
여사는 3.1운동에 적극 참가하였으며 농촌의 개발과 계몽에 헌신한다. 만주로 가서 일본 육군대장 무등신의를 폭삭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고 5개월간 갖은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당한다.
하얼빈 감옥으로 옮겨지자. 왜놈의 음식 차입을 거절하고 말하기를 “원수 도적을 토살하지 못하고 도리어 적에게 잡혔으니 다만 죽음이 있을 뿐이라”하였다고 한다.
두들마을
남자현지사의 일대기를 읽다보니 가슴이 아파온다. 나라를 찾기 위해 그녀는 단식투쟁 15일 만에 거의 죽은 몸이 되어 병보석으로 출감한다. 이 후 잔인한 고문으로 인해 사경을 헤맸다. 여사는 하얼빈시내에 있던 조선여관에서 운명을 달리했다.
남자현지사의 일대기를 읽다보니 가슴이 아파온다. 나라를 찾기 위해 이런 분들의 목숨을 건 투쟁이 없었다고 한다면, 우리민족은 중국과 저 일제에 의해서 진작 역사의 뒤안길로 사자지고 없을 것이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기 직전에 두들마을에 도착하였다. 골목을 서성거리다가 이병태(72세)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
재령이씨 석보종친회장이기도 한 이 분은 정년퇴직을 하고 현재 안동장씨음식예절관및 여러채의 고택을 관리하고 계신분이다. 이 분으로부터 마을의 유례를 듣는데 어둠이 내렸다.
이병태씨는 친히 필자를 이집 저집으로 안내하면 설명을 해 주신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 광제원이 있었던 곳으로 석계 이시명선생과 그의 후손 재령이씨들의 집성촌이다.
석계고택, 석천서당 등 전통가옥 30여 채가 운집해 있다.
궁중요리서(음식디미방)를 저술한 정부인 안동장씨유적비, 소설가 이문열의 고향집 뒤에 세운 광산문학연구소 등이 있다.
산골마을 치고 이렇게 호사스런 마을도 또 있는가 해서 이병태씨에게 물었다.
“이곳에 땅을 사서 집을 지을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이곳에는 집을 내 놓는 사람도 없거니와 다른 성씨에게는 매도를 아니 합니더”
아직도 이곳은 문중이 다스리는 별천지다.
완전히 어둠이 내려버린 두들마을의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다. 오랜만에 보는 별세상이다.
먼 길을 달려왔고 아득한 역사를 가진 마을들을 어둠속에 지나치면서 나는 묻는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언 대지가 풀리는 초봄의 밤길,
그리움이 묻어나도록 아름다운 마음씨와 지조를 가지고 살던 사람들이 나고 자라고 떠나간 마을에 밤이 깊어지고 있다.
글 | 김경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