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습니다. 잘 다듬으면 좋은 글이 되겠군요.
중간 중간 묘사도 뛰어나고 상상력이 훌륭합니다.
하지만 고국원왕이 소열제라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또 하수가 황하라는 것도 나는 결코 동의하지 않습니다.
또 관미성은 사방이 절벽이고 바다로 둘러쌓여 있는데 그곳은 경기만 일대의 강화도나 오두산성 정도면 몰라도 황하일대에서는 전혀 찾을 수 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만주벌판과 황하일대는 상당히 먼 거리인데 그곳을 매가 응시했다고 장면을 전환하는 것은 무리가 있군요.
아직 완성이 되지 않은 글이니 열심히 써보시기 바랍니다.
--------------------- [원본 메세지] ---------------------
광개토대왕 시대를 배경으로 쓰고 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상황을 번갈아 가면서 진행해 가고 있는데
고구려가 더 많습니다. 지금은 백제에 변란이 일어나 진사왕이 죽고
아신왕이 등극하는 장면을 쓰고 있습니다.
392년 관미성 전투를 발단으로 삼고 전개해 가고 있습니다.
저는 광개토대왕 때에 난하가 요하였다고 쓰고 있구요,
대륙백제에 관한 것도 다루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 때에 기록이 미미한데요, 인물들도 거의 없고
그래서 거의 대부분을 허구로 만들어 냈습니다.
중요 관직은 국상-의후사 등등으로 되어 있고요,
군사제도도 확실한 것을 모릅니다..
군사들의 종류(?)와 무기도 잘 모르겠습니다..
많은 도움 주세요..
-------제가 쓴 소설입니다----------
天下英雄
1
서기 392년(永樂 太王 2년).
끝없이 펼쳐진 만주벌판이 해질 무렵에 아름다운 노을에 젖어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그곳. 그 광활한 영토가 그것을 보는 이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만주벌판에서 한 매가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 먹이라도 눈에 포착되어 있다는 듯. 천천히 날개를 피면서 다리를 땅에서 땠다. 순식간에 황금빛의 하늘에 날아올랐다. 매가 날개 질을 하고 있자니 그 날개 질 소리가 조용하던 만주벌판의 사위를 깨뜨렸다. 매가 아주 요란하게 날개 질을 하며 차츰차츰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날아갔다. 이윽고 눈에 보이지 않게 됐다. 다시 사위가 조용해졌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 강도가 세어지게 되었다. 살랑 바람에 이끌려 아름답게 출렁거리던 꽃이 꺾여졌다.
'팍팍..!'
보이지 않던 매가 아까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에 바르게 정착했다. 부리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매가 무섭게 눈을 부라리며 긴 허공의 만주벌판을 쳐다보았다.
노을이 어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때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매가 갑자기 하늘 높이 움직였다. 어둠 속에 빛이라고 찾아 볼 수 없는 그곳에 한 무리의 불들이 발견됐다. 선비족이라 생각됐다. 허나 오랑캐치고는 옷차림이 깔끔했다. 게다가 제대로 지휘하는 장수도 있었고, 황금빛의 갑옷을 입은 왕 같은 사람도 백마(白馬)를 타고 있었다. 아무래도 본국으로 향하는 선비족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그 무리는 대규모의 군사였다. 족히 5만 정도는 되리라 생각됐다. 그런 대군(大軍)이 만주벌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왕으로 보이는 자의 왼쪽에는 뿔이 달린 투구에 고구려(高句麗) 식 갑옷을 입은 장수가 망나니 칼처럼 생긴 큰칼을 허리에 차고 갈색 말을 타고 있었고, 또 그의 옆에는 고구려 식 갑옷에 도(刀)를 차고 있는 장수들이 있었다. 왕 오른쪽에는 고구려 식 갑옷과 검을 차고 있는 장수들이 5명 정도가 줄줄이 있었다. 그들은 그 군의 우두머리로 보였다. 군을 지휘하며 빠르게, 빠르게 만주벌판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 뒤의 기마병들은 흑마(黑馬)를 타고 우두머리들을 쫓아가고 있었고, 그 뒤에는 보병들이 뛰어가고 있었다. 보병들은 매우 힘들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군령을 따라야 하는 법. 한 명의 도주자가 있지 않았다.
"폐하. 관미성(關彌城)이 지척이옵니다. 이제 군사들에게 휴식을 명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왕의 오른쪽에 있던 장수가 왕에게 물었다.
"그래야겠지. 이제껏 우리는 백제의 10성을 함락시킨 후에 단 한번도 쉰 적이 없지 않소?"
"예, 폐하."
"관미성이 지척이라면 하수(河水, 황하의 옛말)도 지척이 아니오?"
"그렇사옵니다. 폐하."
"하수 가에 이르러 마실 물도 얻을 겸, 그곳에서 잠시 쉬도록 하십시다."
"예, 폐하."
그가 말꼬비를 다시 잡으면서 대답했다. 그 군에 다시 한번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말발굽 소리가 온 만주벌판을 흔들기 시작했다.
백제(百濟) 관미성 근처에서 살기만이 감돌기 시작했다. 관미성은 절벽과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불빛하나 관미성을 비추지 않았다. 분명히 역습이 있으리라. 저 멀리서 늑대가 우는소리가 들렸다. 백제군들이 숨을 죽이며 고구려 군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보였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입김만이 그들의 존재를 확인 시켜줄 수가 있었다.
한 장수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전군은 성을 재점검하라!"
그의 명령으로 인하여 관미성이 환하게 밝혀지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끓는 기름과 바위, 그리고 통나무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성벽에서 고구려 군을 쓰러뜨릴 생각인 것 같았다.
"성밖에 장애물을 준비하고 참호를 점검하라!"
다시 한번 명령이 떨어졌다. 병사들이 성문 바로 밖에 나무로 만든 장애물을 설치하고 참호 주위를 순회하기 시작했다.
"서둘러라! 이미 석현성에서 연락이 온지 오래이니라! 고구려 군이 지금쯤이면 하수에 도착했을 것이니라!"
장수가 군사들을 재촉했다. 재촉하면 재촉할수록 병사들의 움직임은 매우 다급하게 보였다.
병사들이 정비에 몰두했을 무렵, 저 멀리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전령인 듯한 자가 눈에 뜨였다. 숨을 헐레벌떡이며 성문을 향하여 달려갔다.
"무엇이냐?"
장수가 성문 위에서 물었다.
"고, 고구려 군이 지금 하수 가에 진을 치고 있사옵니다."
"무엇이? 정녕 고구려 군이 맞더냐?"
"예, 장군!"
그의 연락을 받은 장수의 표정을 갈수록 심각해져 보였다.
"전 군사들은 성을 사수하라!"
밖으로 나갔던 백제군들이 관미성 안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돌아와서는 아까 취했던 자세로 빠른 속도 안에 정렬했다.
"이런 짐승 같은 고구려 놈들 같으니라고! 고구려 놈들에게 이 성을 절대로 뺏기지 아니할 것이야!"
그 장수가 단단히 벼르기 시작했다. 정말로 막을 자신이 있을지.. 그를 바라보는 군사들의 표정에는 기운이 없어 보였다.
다음날이 되었다. 고구려 진영에는 살벌한 기운만이 감돌고 있었다. 어디선가 장수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장 큰 영채가 주목됐다. 역시 그곳에서 장수들의 목소리 크게 들렸다. 유독 그곳만 경계가 심한 걸로도 보아 그곳이 중요한 영채라 생각할 수 있었다. 장수들과 왕이 한 탁자에 모여 앉아 작전 회의 같은 것을 하였다. 회의라고 하기에는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폐하. 관미성은 유독 다른 성에 비하여 자연적인 경계가 험준하고, 지금껏 다른 나라의 수중에 떨어진 적이 없는 백제의 천혜의 요새 중에서도 요새이옵니다. 관미성을 점령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교도(矯導)이라 불리는 장수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짐도 그러한 바를 생각해 본적이 없는 것이 아니오. 허나 지금껏 우리가 점령하지 못한 성이 없소. 관미성이 비록 험준하기로 소니, 우리의 공격을 당해내겠소이까?"
"하오나 폐하.."
"무조건 작전을 이루기보다는 먼저 저들의 힘의 세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오. 아시겠소이까?"
"예, 폐하."
"일단 군을 재정비한 다음에 그 다음 백제군의 힘을 알아보는 것이 좋다 사료되옵니다."
장숙구(張肅具)라 불리 우는 장수가 영락 태왕에게 말했다.
"장군의 말이 맞소. 짐의 생각이 바로 그것이오. 전 장군들은 군을 모두 재정비하도록 하시오!"
"예, 폐하."
말을 마치고 장군들이 각각 자신의 투구를 들고 영채 밖으로 나가 기강이 약간 해이해져 있던 군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장작 4만의 군사를 재정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각 장군들의 속해 있던 부장들이 말을 타고 군사들이 머물고 있던 그 널따란 만주벌판을 달리며 각지로 흩어져 있던 군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행동이 느리다! 행동을 빨리 하라!"
부장들이 군사들을 재촉했다. 군사들 중 대다수는 그런 부장들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듯 했다. 마치 자신이 뭐 장군이라도 되듯 하냐 듯이 말이었다. 하지만 군령은 따라야 하는 법. 상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둘러 하수 가로 모여라!"
아무래도 하수 가에서 뭔가 선언식 비슷한 것을 하고 전쟁을 하려는 것 같았다. 마치 벌떼 같은 군사들이 모두 누런 황토 색깔의 하수 가로 모이기 시작했다.
하수 가의 커다란 영채 앞에 단상이 세워져 있고, 그곳에 영락 태왕이 그 장엄함 덩치를 내세우며 서 있었다. 자신 앞에 장작 4만이라는 대군이 다 모인 것을 보자 흐뭇한지 그가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장엄한 대 고구려의 군사들이여..!"
그의 말에 온 군사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 덕택으로 마이크도 잡지 않은 채 마이크를 잡은 효과 같이 온 군에게 전달되기가 쉬워졌다.
"짐의 조부(祖父)이신 소열제(昭列帝)께서는 저 잔인한 백제군의 화살에 맞혀 전사하셨느니라. 짐이 어찌 조부의 원한을 잊을 수 있겠는가? 선대왕께서도 조부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 여러 모로 노력하셨다가 승하하신 것이니라. 이제 때가 온 것이니라! 가라! 대 고구려의 군사들이여! 가서 장렬하게 전사하신 소열제의 원수를 갚고, 저 악독하고 잔인한 백제를 절단 내라!"
"와!!"
군사들의 사기가 갑자기 높아진 듯 했다. 자신들이 바로 소열제의 혼(魂)이 되는 듯 백제에 대하여 가슴 깊이 사무치는 원한이 있는 듯 해 보였다. 바로 자신이 들고 있던 창이며 칼이며 모든지 위로 치켜세우며 열광하고 있었다.
"전군은 북쪽으로 전진하라!"
교도가 영락 태왕 앞에 나서며 손수 말을 타고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관미성이 지척(咫尺)이다! 전군은 계속 전진하라!"
이어서 북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방침이라 생각됐다. 군사들은 계속 '우우' 소리를 내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마치 배고픈 사자가 우는 듯. 아니면 북방의 호랑이인 고구려가 일어나는 소리 같았다.
끝없이 펼쳐진 만주벌판을 달리기 시작했다. 계속 이어져 있는 벌판. 마치 그곳을 차지했던 고조선(古朝鮮)의 피가 군사들에게 끓고 있는지 몰랐다.
"폐하, 군사들이 열광하고 있사옵니다. 사기가 매우 높사옵니다."
교도가 영락 태왕에게 말했다.
"그렇소이다. 마치 우는 호랑이 같소이다."
"그렇사옵니다. 매우 경이로운 현상이옵니다."
"이것은 단순히 백제군의 힘을 알아보기 위한 전쟁이오. 많은 희생을 시키지마도록 하오."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교도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을 계속 몰기 시작했다. 드디어 관미성의 장엄한 광경이 그들의 눈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영락 태왕의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오, 역시 백제가 자랑 할 만 하도다. 저렁 장엄하고도 자연적인 경계가 심한 성은 난생 처음이로구나. 과연 자랑 할 만 하도다...!
군사들의 눈도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장엄한 성을 볼수록 그 옛날 고조선의 피가 끓는 듯 했다. 장숙구의 격려에 힘입어 군사들이 더욱 빠르게 전진했다.
2
"고구려 군이 온다! 전군은 전투 태세를 갖추어라!"
관미성에서 나는 소동이었다. 저번에 보았던 장수가 군사들을 또 다시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서 어서!"
매우 다급한 상황인 것 같았다. 원래 성질이 급한 성질이라 생각됐다만 상황을 봐서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칼을 뽑으며 군사들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서 움직이지 않으면 지금 군령에 따라 모조리 죽일 것이니라!"
그의 협박 아닌 협박을 통해 간신히 성의 정비를 끝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군사들을 다독거려서 성을 제대로 지킬 수 있으나 매우 염려됐다. 하지만 그는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참호(塹壕) 주위에 군사들을 세워놓고 군사들 앞에 장애물을 설치해 전진해 오는 고구려 군을 막으려는 그 장수의 생각이었다.
"어디 한번 쳐들어 와라! 이 잔인한 고구려 놈들아!!"
장수의 얼굴에는 으스대는 표정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구려 군은 계속 전진 중이었다. 한 관미성에서 5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멈춰 섰다. 멈추는가 싶더니 그대로 관미성을 향하여 빠르게 전진했다.
"와!"
군사들의 목소리가 매우 크게 들렸다.
대낮인데도 관미성 근처의 숲을 지나는 곳에는 마치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군사들은 매우 심하게 경계하며 그곳을 무사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드디어 성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매우 경계가 심한 것 같았다. 일단 멈춰 섰다. 주위를 살피고는 그곳을 향하여 뛰어가기 시작했다.
"공격하라!"
관미성을 향하여 돌진해 가는 소리가 온 땅을 울리기 시작했다.
"쏴라!"
백제 측에서 화살을 마구잡이로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 결과 많은 고구려 군이 땅에 처박혀서 죽음을 맞이했다. 고구려 진영에서도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공격하라!"
앞서간 기마병들과 보병들은 장애물 뒤에 서 있는 백제군을 단 몇 칼로 쓰러뜨리고 장애물을 치우고 있었다. 하지만 참호 때문에 접근이 어려웠다. 하지만 고구려 군은 커다란 나무 판자를 성문과 일직선으로 참호 사이에 걸쳐놓았다. 그래서 성문으로의 접근이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모자랐다. 다시 흙을 날라 참호를 메우기 시작했다. 허나 고구려 군의 그러한 행동을 백제군이 내버려두지 않았다. 참호 사이에 걸쳐놓았던 나무 판자를 향하여 기름을 붓고 불화살을 쏘아 태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참호를 메우는 고구려 군을 향하여 통나무와 돌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참호를 메우던 대다수의 고구려 군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참호가 메워졌다 생각됐다. 고구려 군은 사다리를 가지고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백제군은 성벽을 올라오는 고구려 군을 장창으로 찔렀다. 하지만 고구려 군은 여러 방향으로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백제군은 고구려 군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어느 정도 전쟁에 흥이 올랐다 생각됐다. 하지만 고구려 군의 중심에서는 군사들을 다시 불러 보아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는 백제군들은 매우 즐겁게 웃기 시작했다.
"와!"
특히 그 장수는 더욱 더 자만하며 웃고 있었다.
"하하. 제까짓 고구려 놈들이 어찌 이 관미성을 뚫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의 얼굴에는 자만심이 넘쳐 보였다. 다시 군사들의 표정이 근심스럽게 느껴졌다.
고구려 군은 잽싸게 퇴각하고 있었다. 그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태왕과 장수들만 옷차림이 비교적 깨끗했을 뿐. 군사들의 옷차림은 말이 아니었다. 모두들 헤지고 갈기갈기 찢겨진 옷을 입고 있었고, 온 몸이 상처투성이인 그런 몰골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모습을 보는 군의 우두머리들의 얼굴에는 착잡함. 그 자체였다. 아니 울상을 짓고 있는 표정이었다. 영락 태왕의 얼굴도 약간 그런 인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백제의 힘을 알아보기 위하여 이 전쟁을 감행했던 것이었다. 애초부터 무리하게 나갈 생각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래서 영락 태왕의 얼굴에는 진정함과 동시에 착잡함이 떠올라 있었다. 별 다른 일없이 그들이 치고 있던 진영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백제군은 지금 독이 올라 있소이다.."
태왕이 말을 끌기 시작했다.
"이제 백제군의 힘을 파악했소. 짐은 장군들의 생각을 듣고 싶소."
뜻밖의 질문이었다. 아니 그런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시기가 가까웠던 점이 새로웠다.
"어찌 들 대답이 없는 게요?"
그가 다그치며 물었다. 하지만 다른 장수들의 입을 열릴 줄 몰랐다. 침묵을 깨고 조양이 입을 열었다.
"폐하, 저들의 독은 지금 올라 있사옵니다. 허나 저것은 일시적으로 이루어질 것이옵니다."
"그대가 그걸 어찌 안단 말이오?"
정색을 하며 묻기 시작했다. 나라와 관계된 일을 모두 알고 있어야될 태왕이 그걸 모르다니.. 참으로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 조양에게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백제는 지금 내분으로 인하여 큰 고통을 겪고 있사옵니다. 첩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백제의 현재 왕은 모든 권력을 조카인 아신에게 빼앗겼다 하옵니다. 이러니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을 것이옵고, 그러면 관미성에서는 왕의 결재를 받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되옵니다. 저들이 지금 독이 올라있다 하나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옵고, 얼마 못 가 사기가 떨어질 것이옵니다."
"경의 말이 옳도다. 짐의 생각도 조양 장군의 생각과 같소. 백제는 지금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고 있소이다. 지금의 백제의 왕이 조카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날마다 유흥에 젖어 산다 들었소. 이러하면 관미성에서는 식량과 무기 조달을 제대로 받지 못할 것이오. 그 결과 장기전에서 밀릴 것이오. 하지만 장기전이라 한들 겨우 한달 정도면 관미성은 무너질 것이라 생각되오. 경들의 생각은 어떻소?"
영락 태왕의 진술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의 뛰어난 생각에 다른 장수들은 놀란 듯 입을 벌리고 있었고, 환희에 찬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랬다. 백제는 지금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백제가 고구려에게 대륙의 전초기지였던 석현성과 그 주위의 10개의 성을 쉽게 빼앗긴 원인이 바로 정치적인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백제의 제 16대 왕인 진사왕은 자신의 형인 15대 왕 침류왕의 치적을 계속 이어가지 못하고, 날마다 진사왕은 술과 여자들에 싸여 지내곤 했다. 아니면 사냥을 나가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신하들이 타락해지기 시작하고 그 결과 더욱 심각한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고구려의 침공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점을 영락 태왕이 잘 꿰뚫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으로 장기전 아닌 장기전에 쉽게 백제군이 무너지리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즉시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우선 4만의 군사를 7부대로 나누어 각 부대마다 뛰어난 명장을 우두머리로 삼고, 자신은 후방에서 군을 지원하도록 했다. 그리고 7부대를 관미성을 포위하도록 했다. 4만의 군사들이 앞다투어 관미성 주위를 겹겹이 포위하기 시작했다. 장관이었다. 4만의 벌떼같은 군사들이 장엄한 관미성을 포위하는 그 광경은 실로 자연 속에서 개미 떼들이 한 통나무를 에워싸고 있는 듯 했다.
반면에, 관미성에서는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고구려 군에게는 충분한 식량과 물이 있을 것이고 그들이 관미성을 포위한다면 반드시 식량과 물이 부족하게 될 것이었다. 다행히 물은 우물이 있어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식량은 참으로 커다란 문제였다. 관미성에서는 미쳐 식량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도 영락 태왕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실로 놀라운 그의 수완이었다.
1부대에는 교도가 수장을 맡았다. 교도는 본디 성격이 거칠었지만, 태왕 앞에서는 충신과 다름없는 장군이었다. 그는 그의 가족들에게도 그의 사상을 심어 줄 정도로 충성심이 강했다. 그는 도를 기가 막히게 다루었다. 웬만해선 그의 공격을 막을 자가 없었다. 영락 태왕과도 견줄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신하가 임금과 칼싸움을 해볼 리가 없지만..) 2부대에는 장숙구가 맡았다. 장숙구는 검(劍)을 잘 다루는 장수로써 그 역시 충성심이 매우 강했다. 영락 태왕이 위험할 때면 늘 그를 보호했고, 죽을 때도 왕궁을 바라보며 죽었다. 3부대는 장숙군이라는 장수가 맡았다. 장숙구의 동생으로써 철퇴를 다루던 장수였다. 철퇴로 많은 적군들의 머리를 뻐갰고, 후에는 반역의 무리들을 단번에 진압하기도 했다. 4부대는 조양 장수가 맡았다. 여느 장수와 다름없는 무기를 지녔으며, 다른 장수와 다름없는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5부대는 순시루가 맡았다. 6부대는 돌바우, 7부대는 거도루가 맡았다. 영락 태왕은 후방에서 그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군 정렬이 끝난 듯 했다. 군 정렬이 끝났지만, 여전히 공격을 하지 않고 있었다. 밤에 공격할 것으로 생각됐다.
몇 시간이 흘렀다. 사방이 금새 어두컴컴해지기 시작했다. 점점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관미성의 백제군들은 크게 긴장하고 있었다. 밤이 되면 고구려 군의 공격이 이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구려 군은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는데도 불구하고 공격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의아하게 여긴 백제군들은 더욱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관미성과 고구려 진영에는 어둠만이 감돌고 있었다.
시간이 또 흘러서 자정이 되었다. 양쪽의 군사들은 피곤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확..'
고구려 진영에서 커다란 횃불이 피어올랐다. 삽시간에 어둠을 없애 나갔다. 관미성에서도 고구려에 이어 대낮 같은 불길이 피어올랐다. 그들 덕택으로 주위는 아주 환하게 비춰지기 시작했다. 영락 태왕이 커다란 활을 들고 관미성을 바라보며 나섰다. 그러더니 옆에 있던 군사에게 불화살을 받았다. 그가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렸다.
'휙..'
커다란 소리를 내며 불화살이 하늘 높이 올려졌다. 그것을 신호로 고구려 진영에서 불화살이 관미성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관미성이 불 더미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응하여 백제군도 연거푸 불화살과 포를 날렸다. 고구려 군의 불화살 세례를 받은 백제군 중에 화살을 가슴 깊이 박혀 성벽 밖으로 떨어져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온 군사들도 있었다.
화살 공격이 어느 정도 무르익었다. 교도가 칼을 빼며 앞으로 나왔다. 그러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군사들의 공격을 명령했다.
"전군, 공격하라!"
거대한 함성과 함께 고구려의 기병과 보병이 관미성을 향하여 달려가기 시작했다. 보병들의 한 무리에는 끝이 뾰족한 통나무를 들고 가고 있었다. 백제군도 이에 질세라 성문을 열고 대다수의 기병과 보병들이 나와 고구려 군을 맞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전쟁터로 변했다. 뾰족한 통나무를 들고 가던 군사들은 이미 참호에 빠져 목숨을 잃은 후였다. 교도와 어느 장수가 맞서기 시작했다. 둘 다 눈초리가 예사롭지만은 않았다. 서로를 견제하며 한바퀴 씩 돌기 시작했다. 교도가 칼을 자기의 턱을 향하여 대었다. 백제 장수는 칼을 뽑은 채, 칼끝을 교도를 향하여 내밀고 있었다. 서로를 견제하며 시간을 벌이던 교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놈 이름이 무엇이냐?"
거칠게 물었다. 날카로운 눈초리로 교도를 쳐다보던 백제 장수도 입을 열었다.
"맹부라고 하느니라."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의 이름이 웃긴지 교도의 눈가에 웃음이 번져 나갔다.
"네 이름 하나가 참으로 걸작이로구나. 내 이름은 교도이니라."
"너의 이름도 참으로 걸작이로구나."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말을 몰고 교도 근처로 나아가 자신의 칼을 교도의 칼에 대었다. 교도가 맹부의 칼과 자신의 칼이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거칠게 때었다. 싸우자는 의미였다.
"쨍!"하는 소리가 들렸다. 불꽃이 튀었다. 다시금 칼을 밀어 붙였다. 이번에도 커다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역시 양국의 출전 장수라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칼을 때고 다시금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맞붙었다. 아까 와는 달리 연속적으로 칼을 붙였다, 땠다 하였다. 그들의 칼싸움도 흥이 오르기 시작했다. 교도가 무슨 생각인지 칼을 때고 한 걸음 물러섰다.
"왜? 벌써 자신이 없어졌느냐?"
맹부가 비꼬듯이 말했다. 하지만 교도는 그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맹부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맞붙었다. 다시금 연속적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다시 불이 붙어 올랐다. 교도가 슬쩍 자리를 피하며 맹부의 등을 칼등으로 찍어 내렸다.
"윽!"
짧은 신음 소리를 내며 맹부가 말에서 떨어졌다. 땅에 떨어진 그를 교도가 칼을 겨누며 웃었다.
"흐흐흐.. 너는 나의 적수가 되지 못하구나. 내가 이번에는 네 목숨을 살려주지만 다음 번에는 어림도 없다!"
이런 말을 남기고 교도는 다시 진영 쪽으로 달려갔다.
"백제의 장수가 고꾸라졌다! 우리 고구려의 승리다!"
교도가 이런 말을 연거푸 외쳤다. 이에 사기가 오른 고구려 군사들이 백제군을 더욱 많이 베기 시작했다. 교도의 이런 모습을 맹부가 넋이 나간 듯 쳐다보고만 있었다.
두 번째 전쟁은 고구려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하지만 고구려 군은 포위망을 풀지 않았다.
"낮에도 전투를 계속 하도록 하라."
영락 태왕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의 근엄한 명령에 아무 장수들도 대꾸할 수가 없었다. 낮에는 화살 공격만이 유일한 공격이었다. 그만큼 밤에 싸운 피로가 풀리지 않았던 것이었다. 궁병들만 피곤에 젖어 있었다. 연거푸 화살만 쏘아 대는 일은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다가 관미성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구려 군보다 관미성의 백제군과 백성들이 더욱 지쳐갔다. 여러 날이 지나도 고구려 군이 물러가지 않자, 관미성에서는 동요가 일어나가 시작했다. 물은 우물 덕택에 넉넉했지만,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우물도 믿을 수가 없었다. 여러 날 동안 가물면, 우물이 말라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물면 하수의 물을 떠다 해야 했다. 이런 사실 때문에 관미성 주민들은 더욱 불안에 떨었다. 비가 오지 않는 겨울철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고구려 군이 포위를 한지 10여일 만에 우물이 마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정말로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식량이 부족했을 때 일어났던 동요보다 더욱 심각한 동요였다. 또한 백제 조정에서의 무관심도 관미성 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안에서는 물과 식량이 부족하고, 밖에서는 고구려 군의 공격이 계속되고.. 백성들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충성은 뭐고 아무 것도 없는 채, 무차별하게 백제군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맹부가 그 사실을 알고 진압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성난 백성들이 닥치는 대로 군사들을 죽이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버린 맹부는 민중의 옷차림으로 꾸민 뒤, 밤이 되자 성벽을 타고 도주했다. 이제 남은 건 군사들과 백성들뿐이었다. 백성들은 군사들을 거의 다 죽인 뒤 성문을 열어 고구려 군을 환영했다. 자신들이 이렇게 된 것이 고구려 군사들 때문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고구려 군을 맞아 들였다. 그 결과,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위엄을 자랑하던 백제의 요새 관미성이 20여일 만에 무너졌다. 영락 태왕은 이러한 민심을 알고 백성들을 죽이지 말고 살려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영락 태왕의 방책은 민심을 휘어잡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관미성 전투를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 본기, 광개토대왕 원년기사』
가을 7월,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10개의 성을 점령하였다.
겨울 10월, 백제의 관미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 성은 사면이 절벽이고, 바다로 감싸여 있었다. 왕이 일곱 방면으로 군사를 나누어 공격한 지 20일 만에 함락시켰다.
『백제 본기, 진사왕 8년 기사』
가을 7,월 고구려 왕 담덕(談德, 광개토대왕의 실명)이 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석현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용병에 능통하다는 말을 듣고 대항하기를 회피하였다.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을 빼앗겼다.
필자는 한수(漢水)를 하수(河水, 황하의 옛말)로 보고 광개토대왕이 점령한 백제 북쪽 땅을 하수의 하류로 설정했다. 한수는 본디 하수, 즉 황하를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3
"영락 태왕 만세!"
동황성의 백성들의 환호 소리가 대륙을 뒤엎을 만큼 울리고 있었다. 다름 아닌 백제가 자랑하던 요새, 관미성을 점령하고 돌아온 영락 태왕이 백마를 타고 자랑스럽게 승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태왕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도 백성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궁성으로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궁성밖에는 국상(國相)을 비롯하여 문무백관과 왕후가 밖에 나와 있었다. 그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영락 태왕이 백마에서 내려 자랑스럽게 그들 앞에 나아갔다. 그러면서 흡족한 웃음 띄웠다.
"얼마나 노고가 크시옵니까?"
영락 태왕과는 사사로이 처남매부 지간으로 지내던 국상이었다.
"다 나라를 위한 일인데 어찌 노고 크리라 하겠소?"
자나깨나 나라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 태왕이었다.
"소신들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사옵니다. 하오나 폐하께서는.."
"경들이 어찌 한 것이 없겠소? 경들이 한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외다."
"황공하옵니다."
신료들과의 짧은 대화를 끝내고 그를 자랑스럽게 쳐다보던 왕후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신료들이 슬슬 그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심려가 크셨겠소? 왕후."
영락 태왕이 왕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니옵니다. 폐하. 소첩이 어찌.."
말을 맺지 못하며, 눈에 눈물이 괴이기 시작했다.
"이제 짐이 돌아 왔으니 걱정 할 것 없소..."
영웅의 눈에서도 눈물이 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눈물을 닦고 다른 신료들과 장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 이제 들어가십시다. 바깥바람이 차오."
말을 마치고 여러 신료들과 함께 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왕후의 얼굴은 그저 자랑스러움만이 넘치고 있었다.
태왕이 피곤한지 국정 논의도 없이 신료들이 퇴궐하기 시작했다. 신료들이 퇴궐한 것을 본 태왕은 문밖에 서있는 내관을 향하여 말했다.
"짐이 왕후전으로 갈 것이니, 채비를 하여라!"
내관의 대답이 들려왔다. 이내 채비가 끝났다.
왕후전에서는 왕후와 궁녀의 대화만이 들릴 뿐이었다.
"폐하께서 무사하셨다.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
또 눈물을 짓기 시작했다.
"……."
그 모습을 바라보던 궁녀도 눈물을 짓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련한 마음씨 때문인지도 몰랐다. 눈물짓는 소리가 서서히 작아질 무렵, 밖에서 궁녀의 소리가 들렸다.
"마마, 폐하께서 드셨사옵니다."
이 말을 듣고 의아해 하며 옷가지를 단정히 하며 태왕을 맞이했다.
"어인 일이시옵니까?"
이렇게 말하며 태왕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에 이곳에 오는구려.."
태왕이 말을 맺고, 자꾸만 옆에 서있던 궁녀를 향하여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눈치 빠른 궁녀가 밖으로 나갔다.
"짐이.. 전쟁터에서 왕후만을 바라보며 싸웠소."
왕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소첩도 폐하만을 위하여 열심히 불공을 드렸사옵니다.."
태왕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왕후의 말이 이어졌다.
"폐하께서 혹시나 전쟁터에서 소첩을 잊으실까 염려도 했사옵니다."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어찌 왕후를 잊겠소? 과인은 죽어서라도 왕후를 잊지 않을 것이오."
"망극하옵니다."
태왕이 왕후를 허리를 잡으며 끌어안았다. 진한 포옹이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그 자세를 취하고 있더니, 태왕이 얼굴을 때고 자신의 입술을 왕후의 입술에 대었다. 왕후를 향한 태왕의 사랑이 입술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순간이었다. 계속해서 그 자세만을 취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왕후전의 그 밝던 불이 단숨에 꺼져 버렸다.
다음날은 조회가 열렸다. 조당으로 신료들이 하나 둘씩 모이고 있었다.
"태왕 폐하 납시오!"
내관의 가느다란 소리와 함께 영락 태왕이 옥좌에 앉았다. 그리더니 자리에 앉은 신료들을 죽 둘러보기 시작했다.
"모두들 들으라."
지난날과 달리 그의 목소리에는 무게와 위엄이 넘치고 있었다.
"예, 폐하."
신료들이 머리 숙여 아련했다.
"짐이 하늘의 뜻에 따라 저 불구대천의 원수 백제의 변방을 공격하여 무너뜨렸느니라. 억울하게 붕어 하신 소열제의 손(孫)으로써 어찌하여 그 조부(祖父)의 원수를 갚지 않겠는가. 짐은 계속하여 소열제의 원수를 갚겠노라. 대소 신료들은 이러한 짐의 생각에 맞추어 일을 행해야 할 것이니라."
"예, 폐하."
"우선, 세금을 내느라 고생한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을 도모해야 할 것이니라. 우리는 지난 소열제 이후로 국양왕(國壤王, 9대왕 고국천왕의 연호)대에 실시한 진대법이 실시되지 않고 있소이다. 진대법을 다시 새로이 마련하여 저 굶주리고, 지친 백성들을 위로하도록 하오."
"예, 폐하."
"내일, 아니 오늘부터 진대법을 적용토록 하시오. 국상 아시겠소?"
"소신이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마땅히 폐하의 영을 따르겠나이다."
"알겠소. 다른 신료들은 들으라."
"예, 폐하."
"짐은 며칠 후에 전국을 순회할 것이니라. 경들도 순회 준비를 하라."
"예, 폐하."
이 말을 마치고 영락 태왕이 옥좌에서 일어나 앞으로 향했다. 그의 뒤로 신료들이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조당을 나온 후로, 태왕은 내전으로 들어가고, 신료들은 뿔뿔이 흩어져 퇴궐하고 있었다.
4
관미성을 비롯한 여러 개의 성이 고구려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사실로 인하여 백제의 여론은 심하게 들끓기 시작했다. 특히 유흥을 일삼고 있던 진사왕에게 많은 비난이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유흥과 사치를 일삼았기 때문에 국고가 텅 빈 연유로, 군사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특히 젊은 장군들 층과 신진 관료들의 비난이 계속하여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늙은 중신들은 진사왕의 책임이 아닌, 젊은 장군들의 책임이라 반문했다. 이러한 극심한 상황 가운데 아신 태자는 어느 쪽에 따라야 할지 고민이었다. 물론 그도 젊은 층에 속했다. 하지만 사사로이 진사왕은 아신 태자의 숙부였다. 그 옛날 침류왕이 죽자, 어린 아신 태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진사왕이 대신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후의 아신 태자의 보복이 두려워 진사왕의 심복들은 은근히 아신 태자를 살해하려 했으나, 번번이 진사왕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진사왕은 아버지를 잃은 불쌍한 어린 조카를 잘 보살펴 주었다. 아신 태자도 숙부의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현재는 방탕에 빠진 일명 폐인이 되어 가고 있었으나 아신 태자는 한번도 그를 잊은 적이 없었다. 태자의 직책조차 거두지 않았다. 그에게는 자녀가 있었으나, 자신은 아신 태자 대신 대리정치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아신에게서 태자의 직책을 거두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인자하고도 친절한 모습은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것이었다. 침류왕이 이룩했던 치적을 이어가기엔 너무 무리였던 것이었다. 침류왕과 진사왕은 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으나, 성격은 하늘과 땅 차이로 달랐다. 우선 침류왕은 성격이 온화하고, 몸도 약해 어려서부터 질병을 앓아 왔고, 진사왕은 그와 반대로 성격이 거칠었고(하지만 혈육 관계에서는 매우 인자했다), 몸도 매우 강성해 무예 중심의 삶을 살아온 그였다. 그에게는 맞지 않는 그런 정치였던 것이었다. 그는 한자리에 오래 앉기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안되어 방탕한 삶을 살았던 것이었다. 그는 갈수록 포악해지기 시작했다. 술을 먹으면 사람이 솔직해 진다는 말처럼, 진사왕은 술을 마심으로써 거친 그의 성격을 솔직하게 세상에 드러냈던 것이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신하는 약하면 유배요, 강하면 죽음이었다. 여태까지 죽음에 이른 신하들은 없었지만, 유배를 간 신하들은 매우 많았다. 그래서 신하들의 반감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원로 대신들은 그의 폭정이 곧 그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진사왕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던 젊은 층의 신료들에 대해 강하게 반박했던 것이었다.
아신은 그러한 상황 가운데 마치 두 여인을 두고 갈등하는 심정과 같았다. 그가 답답한 맘에 술자리를 펴서 술을 마셨다. 두어 잔 마시더니, 잔을 탁자에 세게 내려 놓았다. 그 때, 바깥에서 내관의 소리가 들려왔다.
"태자 마마. 폐하께오서 마마를 찾으시옵니다."
"나를? 무슨 연유로? 알겠다. 채비를 하거라!"
이윽고 채비가 끝났다. 채비가 끝나자, 의관을 정중히 한 채 내전으로 향해 걸었다. 약간 불안한 어조를 띄우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들자 내관이 진사왕에게 물어 그를 들여보냈다.
"어인 일이시옵니까?"
탁자에 마련된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진사왕 주위에는 술병이 널려 있었다. 술 냄새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내가 너를 부른 이유는.."
말을 늘인 채 다시 한번 술을 마셨다.
"내가 너를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가 또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탁자에 머리를 박았다. 이를 본 아신이 놀라 진사왕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폐하!"
하지만 진사왕은 팔을 내저었다.
"음…, 아니 아신이 아니냐? 여기 어인 일로?"
"폐하. 폐하께오서 부르시지 않으셨사옵니까?"
"내가 언제 그랬느냐? 밤중이로구나. 어서 처소로 가보거라…."
아신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동시에 안타까움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폐하."
진사왕이 괴로운 듯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무, 물러가라고 하지 않았느냐?"
"폐하! 정신 차리시옵소서!
진사왕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러자 아신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진사왕을 부축했다.
"게 밖에 내관 있느냐? 어서 폐하를 뫼시어라!"
호통을 쳐서 내관을 불렀다. 내전 내관으로 보이는 자가 달려왔다.
"가서 전의를 부르겠사옵니다."
"어서 부르라!"
신경질적으로 명령했다. 그 같은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폐하! 정신 차리시옵소서!"
아신이 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이윽고 전의가 달려왔다. 여러 차례의 진맥 끝에 전의가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음주 하셨기 때문이 일어난 병이옵니다. 간장이 많이 상하셨사옵니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냐?"
"폐하께오서 음주를 하시지 않도록 하소서. 신이 탕약을 대령하겠사옵니다."
"어찌 폐하께서 이 지경이 되셨단 말인가..?"
그가 한탄하듯이 말했다.
"신이 곧 탕약을 대령하겠사옵니다."
"그리 하라."
무겁게 말했다. 진사왕은 자리에 누운 채, 괴로운 얼굴로 수침에 들어 있었다.
다음 날에 진사왕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신이 내전으로 달려와 진사왕을 만나려 했다. 진사왕의 허락이 떨어지고 아신은 내전으로 들어갔다.
"폐하. 얼마나 노고가 크셨사옵니까?"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말했다.
"덕분에…."
이렇게 말하며 비웃듯이 웃었다. 이러한 진사왕의 행동에 아신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진사왕이 술을 들이켜 마셨다.
"폐하."
아신이 부르는 소리에 진사왕이 그를 강하게 째려보기 시작했다.
"감히 짐을 책망하려 드는 것이냐?"
진사왕의 눈에 광기가 도사리기 시작했다. 아니 진사왕은 이미 미쳐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아아..! 우리 백제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신이 속으로 절규했다. 무예가 출중하고 덩치가 컸던 진사왕은 오늘따라 힘이 없는 늙은이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아신의 생각이 여기까지에 미칠 무렵, 진사왕은 술을 연거푸 들이마시고 있었다. 전의가 술을 마시면 아니 된다고 일렀을 것이 분명했지만 진사왕은 그 말을 무시하고 있었다. 아신은 어제 전의와 은밀히 만나서 대화한 것을 회상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또 어디가 편찮으신 것이 아니더냐?"
전의의 눈치가 이상한 것 같아 아신이 전의를 불러 자신의 처소로 되돌아갔을 무렵이었다. 전의는 계속해서 아신의 눈치만을 살피며 안절부절못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 대답이 없는 게야!"
비로소 전의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폐, 폐하께오서는…."
이번에는 말을 늘인다.
"말하라!"
"폐하께서는 지금 간장이 매우 상하셨사옵니다. 이대로 더욱 음주를 하시면, 경기를 일으키시거나, 정신을 잃고 광기를 부리실 것이옵니다."
"광기? 네가 감히 광기라 하였느냐? 네놈이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이로구나!"
아신은 그 말을 듣고 매우 화를 내었다. 감히 천하디 천한 전의 주제에 왕을 능멸하려 들다니. 참으로 화를 낼만도 했다.
그래…! 그때 그 전의의 말을 들어야 했어! 이를 어쩐단 말인가?? 아아. 우리 백제의 운명은 이것으로 끝이란 말인가?
옛일을 생각하면서 절규하고, 또 절규했다. 하지만 절규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신은 진사왕의 모습을 더 이상 보지 못하고 내전을 빠져 나왔다. 해가 서산에 지고 있었다.
진사왕의 광기는 계속됐다. 술을 마시고 연거푸 마시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술만 마시고 있었다. 그의 몸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지만, 그의 정신은 미쳤던 터라 정신에게 하소연하는 몸의 한탄을 무시한 채 술을 마시도록 명령하고 있었다. 술을 마시다 술이 떨어지면 내관을 옆에 있던 칼로 베기 일쑤였고, 술을 엎질렀을 경우에는 손목을 단숨에 짤라 버리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내전에서는 하루도 피비린내가 가실 때가 없었다. 내전의 내관과 궁녀들조차도 그를 보기 싫어했다. 결국에 왕이 미쳤다는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성 안에 쫙 퍼졌다. 게다가 이와는 전혀 같지 않는 헛소문도 돌고 있었다. 백제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이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특히 진사왕만 바라보고 살던 원로 대신들의 걱정이 더 컸다. 저러다 진사왕이 죽으면 자신들의 운명은 어찌 될지 아무도 장담을 못하기 때문이었다. 우선 신진세력들의 공격이 이어지리라 생각했다. 평소에 진사왕을 싫어하던 신진세력들이 진사왕이 승하한 다음, 자신들을 몰아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원로 대신들의 예상대로 신진세력들은 이때가 기회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원로대신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병부의 군사들을 모으고, 군사 훈련을 핑계로 지방 세력들의 사병(私兵)들을 한성으로 모았다. 이리하여 약 1만에 이르는 군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원로 대신들은 이 동태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좌평 호지만은 이 동태를 수상히 여겨 자신들의 심복을 궁궐과 신진세력들의 집 곳곳에 풀어놓아, 정보를 입수하도록 했다. 그 결과 신진세력들의 음모가 남 모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이 모든 것은 원로 대신들의 승리로 끝날 것 같았다. 호지는 그 길로 궁궐로 향했다. 궁궐로 들어가 곧장 진사왕한테 달려갔다. 하지만 진사왕은 그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호지는 간곡히 진사왕에게 말했다.
"폐하. 역모이옵니다. 군사 훈련을 핑계로 마음대로 조정의 군사들을 움직인 그 행동 하나만으로도 큰 반역죄이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폐하."
호지는 신진세력들의 행동이 큰 반역이라고 진사왕에게 일일이 설명했다. 하지만 진사왕은 냉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군사 훈련이라 하지 않소? 이 나라의 최고 벼슬이라는 상좌평인 경이 어찌 하여 의심이 크단 말이오?"
술을 마시면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폐하,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소신이 상세히 살펴본 결과 군사훈련은 겉으로만 행했던 것이옵니다. 폐하. 신의 말을 들어주시옵소서."
고개까지 숙이며 간절히 말했지만, 진사왕은 술만 연거푸 마시며 그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어찌하여 경은 이 짐을 괴롭게 한단 말이오? 물러가오!"
"폐하!"
"경의 말대로 그들이 반역을 일으킨다면 무슨 명분으로 짐을 몰아내며, 누구를 옥좌에 세운단 말이오?"
"……."
"물러가오."
호지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그곳을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때 진사왕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내일 구원으로 사냥을 떠날 계획이오. 아신 태자와 원로 대신들을 모두 불러오시구려."
"예, 폐하."
내전을 나서는 호지의 얼굴은 그리 탐탁치 못했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었으면 매우 좋으련만…, 정보가 부족했던 것이었다. 정보가 많았더라면 신진세력들은 모두 쫓겨날 것이었을 터인데…
밤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다음날은 진사왕의 말대로 사냥을 떠날 채비로 분주했다. 워낙 많은 인원이 가는 지라 준비하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아신과 원로대신들을 불렀건만, 이상하게도 신진세력들을 불러오지 않았다.
사냥 준비가 다 끝나자 구원으로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날씨가 꽤 맑았다. 북서쪽에서 약간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따뜻했다. 진사왕과 아신은 말을 몰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오는 구나. 겨울인데도 날씨가 따뜻하구나."
진사왕의 정신은 온전해 보였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날씨가 따뜻하옵니다."
"그 동안 너무 무관심하게 살았느니라.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니라. 정치가 어찌 그리 힘이 들던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아신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침류왕께서 내게 너무 많은 짐을 맡기신 것 같구나…. 짐이 어찌 그런 성군의 치적을 이어받겠느냐."
"……."
"그래도 네가 있어서 나의 마음은 매우 편하구나. 너마저 없었으면 짐이 어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고."
"과찬이시옵니다. 폐하."
"사사로이는 너의 숙부이니라. 어찌 조카를 사랑하지 않겠느냐?"
"……."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어느덧 구원에 도착한 듯 보였다. 넓은 평원이 그들이 구원에 도착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넓은 평원의 끝에는 시원해 보이는 숲이 널려 있었다. 마치 한 여름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올 정도로 푸른 소나무들이 그들을 향해 살랑 살랑 젓기 시작했다. 이런 좋은 풍경을 놔두고, 일행은 말을 몰아 또 다른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행궁으로 가는 것 같았다. 행궁은 구원의 평원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흙먼지가 거센 겨울 바람에 밀려 날아가기 시작했다.
행궁 근처에 도착한 일행 중에서 진사왕과 아신이 행궁 안으로 들어가고, 하인들은 짐을 풀고 있었다. 짐은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이곳에 오니, 짐의 맘이 확 트이는 구나."
진사왕이 의자에 앉으며, 가벼이 말했다.
"신도 그러하옵니다, 폐하."
아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사왕이 팔을 내저으며 짜증내듯이 말했다.
"폐하라..! 이곳에 와서도 폐하라는 소리를 한단 말이더냐? 이곳에서는 그냥 편히 숙부라 부르거라."
"신이 어찌……."
"나의 부탁이니라. 아신아."
간절한 진사왕의 모습이 아신에게 비춰졌다. 측은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알겠사옵니다. 숙부."
아신의 말을 들은 진사왕의 얼굴에 만족함이 넘쳤다. 오랜만에 그의 원래 생활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오래 머물고자 생각 중이다. 도읍지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구나."
"하오나, 나랏일을 돌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랏일…, 나랏일이라…"
창을 통해 보이는 먼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나랏일에 관심이 없다. 나랏일은 도대체가 왜 이리 복잡한지 모르겠다."
"하오나…."
"너의 아버지이신 침류왕께서 일찍 승하하신 이유를 알겠다. 나랏일은 엄청나게 복잡하니까 그렇게 유명을 달리하신 것이니라."
진사왕의 잔잔한 목소리가 행궁에 울려 퍼졌다. 아신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어릴 적의 포근한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아버지, 침류왕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지도 몰랐다.
變亂
1
캄캄한 밤이었다. 백제의 도읍지 한성 안에 줄줄이 이어졌던 고래등같은 기와집 중에 하나만이 유일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유독 그 기와집만이 다른 기와집에 비하여 작아 보였으나, 한성의 마지막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기와집에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목소리들이었다. 무언가가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집 주위에는 살기가 감돌았다.
"지금 왕이 구원으로 사냥을 하러 떠났소. 이미 정치에 환멸을 느낀 왕이 일찍 이곳으로 돌아올 리가 없소. 그러니 왕이 구원에 있는 동안 일을 다 끝내놓아야 하오. 내 말 아시겠소?"
아신의 외삼촌인, 진무 장군의 목소리였다. 그의 우편에 앉은 자는 장군 계황과 천우였다.
"알겠소. 지금 모아진 군사는 몇이나 되오?"
"족히 1만은 넘소이다."
"1만이라…."
계황이 말을 길게 늘였다..
"5천은 이곳에 남아, 이곳을 지키고 나머지 5천은 구원으로 향하는 것이 좋겠소."
"소장의 생각도 같소이다. 헌데 다음 보위는 누구로 정하셨소이까?"
천우가 물었다. 아마도 이 일의 주동자는 진무 같았다.
"지금 왕실의 최고 어른이 누구요? 아신 태자밖에 아니 계시오."
"허나 그분은 왕의 조카가 아니오? 순순히 보위를 받으시겠소이까?"
"일단 일을 크게 벌여놓으면 태자께서도 어쩌지 못하실 것이외다."
"그렇다면…?"
"군사를 이끌고 곧장 구원으로 가야 하오."
"신료들의 움직임은 어떻소?"
"상좌평 호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지만, 호지는 지금 왕과 함께 구원에 있소이다. 우리가 군사를 이끌고 치면 호지도 어쩔 수 없을 것이외다. 상좌평 호지 외에 벼슬자리의 위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원로 신료들의 움직임을 없소."
"좋소. 살생부(殺生簿)를 작성하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진무와 계황, 천우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타고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