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6일 대전 국립묘지에서,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친일군인 김창룡·친일언론인 서춘 묘 이장촉구 집회와 '안티조선' 대전 출정식
6월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동족상잔의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달이다. 반세기하고도 4년 전 이 달에 우리는 북에 대하여 남과 미국이 그 리고 참전 16개국과 전쟁을 했고 그 이듬해 겨울 중국이 북에 가세함으로써 국제 전쟁으로 확산되어 대전 후 前代未聞의 인명의 살상과 재산의 파괴를 가져 왔었다.
또 이 달은 5.18 광주항쟁에 이어 6월 항쟁이 열화가 되어 민주화의 초석을 더 한층 굳건히 세우고자 뜨거운 6월 태양의 열기로 달아오른 대지 위를 항쟁의 메아리가 전국적으로 울려 퍼졌던 해이다.
항쟁, 六月抗爭, 1987년 6월, 그 해 전두환 정권은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고, 통일민주당의 창당을 방해하는 등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억압하고 장기집권을 획책하였다. 한편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은폐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함을 계기로 재야와 통일민주당은 연대하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였다.
6월 10일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개최하여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같은 날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전두환 정권의 간선제 호헌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15일까지 명동성당농성투쟁, 18일 최루탄추방대회, 26일 민주헌법쟁취대행진에 이르기까지 20여 일간 전국적으로 500여 만 명이 참가하여 4·13호헌조치 철폐, 직선제개헌 쟁취, 독재정권 타도 등 반독재민주화를 요구하였다.
이렇게 되자 전두환정권은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직선제개헌과 평화적 정부이양, 대통령선거법 개정, 김대중의 사면복권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29선언을 발표하였다.
6월항쟁은 전두환정권의 권위주의적 권력유지를 민주세력과 시민의 역량으로 저지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그러나 직선제 이외에는 이렇다 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현충일 날 민족 문제 연구소 대전 지부와 '안티조선'은 친일군인 김창룡·친일언론인 서춘 묘 이장촉구 집회와 '안티조선' 대전 출정식을 갖는다.
백범 암살 배후 김창룡 묘 이전을 주장한지 3년째지만 주무부처인 국방부는 여전히 묵묵부답인 가운데 아래와 같이 이 행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 때 : 2004년 6월 6일(일) 오전 8시 30분 ∼ 12시 □ 곳 : 대전 국립묘지(현충원) 정문 앞(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왕복 셔틀버스 이용) □ 주최 :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 참여단체 :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대전충남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인물과사상 독자모임, 조선일보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시민모임, 생활정치네트워크 국민의 힘, 노사모, 대전물총(조선일보 바로보기 대전시민 모임), 독도수호대 등
<사전 선전홍보 활동> - 8시 30분∼9시 - 친일군인 김창룡·친일 언론인 서춘 묘 이장촉구 서명운동 - 유인물과 선전물 배포 - 피케팅
<1부> 김창룡·서춘 묘 이장촉구 대회 - 오전 9시∼10시 - 사회 : 우희창 민언련 사무국장 - 인사말 : 여인철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 - 격려사 : 정효순 (통일운동가) - 김창룡과 서춘의 친일반민족행위 소개와 묘 이장의 당위성 보고 - 결의문 낭독
<2부> 안티 조선 출정식 - 오전 10시∼10시 30분 - 사회 : 우희창 대전충남 민언련 사무국장 - 인사말 : 김성훈 대전충남 민언련 언론개혁실천단장 - 격려사 : 김동민 전북 민언련 대표, 오한흥 옥천신문 사장 외 - 결의문 낭독
<3부> 선전홍보 활동와 현충원 항의방문 - 오전 10시 30분∼12시 묘 이장촉구 서명운동 - 문의 : 여인철 대전지부장(011-403-2871 ymogyang@hanmail.net) http://www.mnd.go.kr:8088/html/main.html → 묘소, 위패 찾기 → [김창룡] → 사이버 참배 → [추모의 글 남기기]에 묘 이장 글 남기기 http://www.mnd.go.kr:8088/html/main.html → 묘소, 위패 찾기 → [서춘] → 사이버 참배 → [추모의 글 남기기]에 묘 이장 글 남기기
민족문제 연구소가 펴낸 <친일파 99인 제2권에 실린 서춘의 친일 행적>을 참고하여 서춘을 소개하면
서춘(徐椿, 창씨명 大川慈種 또는 大川豊注, 1894∼1944)의 이력은 매일신보 주필로 맹활약한 친일언론의 기수로서 1996년 정부로 부터 공식적으로 독립유공자 예우가 박탈되었으나 여전히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1917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시부터 독립운동에 참여 ·1919년 2월 2.8 독립선언서 발표 참가 ·1927년 동아일보 입사. 경제부장 지냄 ·1932년 조선일보 편집국장, 주필 겸 경제부장 ·1937년 매일신보 주필, 방송선전협의회 강사 ·1938년 목요회 회원, 임전보국단 평의원, 국민총력조선연맹위원 ·1940년 친일잡지 [태양] 창간 ·1963년 2.8 독립선언 위원자격으로 대통령 표창 ·1989년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 ·1996년 정부는 그의 친일행위를 이유로 김희선 박연서 장응진 정광조 등에 대한 독립유공자 예우를 박탈함 ·현재 서춘 만이 유일하게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음
그는 2·8 독립선언 대표에서 친일파로 전락자로 {독립유공자공훈록}에 의하면, 서춘은 2|8 동경유학생 독립선언의 실행위원 11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받은 이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3|1 독립운동선언에 참여했던 민족대표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대표적인 인물로 최남선*, 최린*, 박희도* 등을 들 수 있듯이, 서춘은 이광수와 함께 2|8 독립선언 위원 가운데 친일파로 변절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서춘은 1917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당시부터 일제로부터 일급의 요주의 인물로 지목될 정도로 조선유학생학우회에 소속되어 각종 조선유학생 집회나 웅변회를 통해 조선독립운동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활동을 하였다. 이러던 중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받아 1919년 2월 최팔용, 김도연, 이광수*, 김철수, 백관수, 윤창석, 이종근, 송계백, 최근우, 김상덕 등과 함께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2|8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2|8 독립선언은 3·1 운동을 촉진하는 계기로 작용했으나, 일본정부 및 제국의회에 대해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여 민족자결의 기회를 줄 것을 청원하는 타협적인 노선을 표방한 것이었다. 서춘은 이 독립선언으로 9개월 금고형을 받았다.
형기를 마친 후 그는 도쿄제대 철학부를 거쳐 교토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27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서 경제부장을 지냈다. 이 시기에 {동아일보} {동광} {비판} {신동아} {별건곤} {혜성} 등의 지면에 주로 금해금(金解禁), 공황, 미가(米價)폭락 등의 경제관련 시사문제를 다루는 글을 발표하여 경제평론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또한 그는 동아일보 본사와 지국 그리고 각 사회단체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 주로 경제, 교양, 상식분야의 단골강사로 초빙되어 왕성한 계몽활동을 하기도 했다. 1932년에는 조선일보사로 옮겨 편집국장, 주필 겸 경제부장을 지냈다.
그의 경제평론은 초기에는 일제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경향이 엿보였으나 이후 대부분 현상적인 경제실정을 해설하거나 근대경제학적인 입장에서 미시적인 분석을 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교토대 재학 시절 가와카미(河上肇)로부터 배웠다고 하나 그의 경제평론은 정치경제학적인 분위기보다 근대경제학적인 분석 틀에 훨씬 가깝다. 이는 지식인들의 사상적 분화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던 1930년대 초에 일제에 대해 일정한 타협적 논조를 견지하는 동아, 조선 양 신문에 몸담고 있었던 그의 사상적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동아·조선일보는 1937년 일제의 중국침략을 계기로 그나마 명분상 내걸었던 민족언론지로서의 역할을 공식적으로 부정하고 전시체제에 적극 협력하는 친일언론으로 탈바꿈했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의 1937년 8월 2일자 사설 <총후(銃後)의 임무-조선군사후원연맹의 목적>에서는 "조선 역시 제국신민으로써 응분의 의무와 성의를 다하고저 시국대책을 강구|실시하고 있는 중 조선군사후원연맹은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라고 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적극적인 후원과 지지를 표명하였다.
서춘의 조선경제에 대한 관점 역시 1937년 이후 일제의 경제정책을 적극적으로 미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조선은 한일합병을 통해 산업적 발달의 기초를 다지고 만주침략을 계기로 호경기를 맞이하였으며, 전시 통제경제 기간은 비약적인 공업발흥 시기라고 일제의 경제정책을 적극 찬양·옹호하는 관변 경제평론가로 변신한 것이다([전시체제 하의 조선경제], {四海公論} 41호, 1938.9, [전시하의 조선상공업의 진로], {사해공론} 42호, 1938.10).
그의 경제평론은 모두 전쟁으로 인한 물자부족, 물가등귀로 조선 민중이 굶주림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한 채 이러한 물가등귀 현상의 특징, 원인과 재정정책의 추이를 분석할 뿐 그 물가등귀 저지의 근본대책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방관하는 자기 한계를 드러낸 것들이다([물가의 전도-등귀경향을 취할 것이다], {조광} 3권 3호, 1937.3). 이후 그가 "현 정세 하에서 허용된 가장 유효한 물가등귀 저지책"으로 드는 것은 국민의 소비절약과 저축장려, 가격통제로 이는 일제의 경제통제정책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이다.
"현대전(現代戰)에 있어서의 교전국간의 경제전이라는 것은 환언하면 협력전이다. 협력! 이것은 정신의 힘이다. 정부가 국민정신총동원 주간을 설치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이 총후(銃後)인 용사다. 국민총력이 있고서야 총후가 공고하다. 가치있는 대용품을 발명, 발견하는 자 또는 대용품 사용주의를 철저히 실행하는 자 이들은 그 개인의 사경제로 보아 칭찬할 만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위국봉사(爲國奉仕)가 되는 것이다"라는 노골적인 전시경제체제 옹호의 글은 그가 조선 민중을 통제경제의 희생양으로 삼고 있음을 분명하게 나타낸다([물가대책의 강화], {사해공론} 4권 6호, 1938. 6, [대용품시대], {사해공론} 4권 7호, 1938. 7).
1930년대 말, 1940년대 초에 그는 단순한 경제평론가라기보다 실로 총력전의 일환인 경제전에 복무하는 일본제국의 '충실한 전사'였다고 할 것이다.
1930년대 후반 종래 민족주의자로 자처하던 이들이 민족주의란 허울을 벗어 던지고 친일파로 내놓고 행세하게 되는 시기에 이르면, 서춘 역시 이미 {매일신보}의 논조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조선일보}를 떠나 아예 총독부 기관지이자 황민화 정책의 선전기관인 {매일신보}의 주필로 옮겨 앉는다.
{매일신보}는 1937년 이후 {매일신보}(每日新報)로 제호를 바꾸면서 그 경영도 주식회사로 고쳤는데, 주식의 과반수는 총독부가 가지고 나머지는 친일자본가에게 분양하였다. 자본의 출처가 그러한 만큼 인사 임명도 총독부에서 좌지우지했다. 전시체제 이후 {매일신보}에서는 교화사업차, 근로보국단위문대 등을 전국 각지에 파견하여 내선일체, 전쟁협력 고취에 광분했다. 따라서 {매일신보}주필이란 일제의 식민지정책을 찬양하고 지지하는 일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는 골수 친일파만이 되는 자리였다.
그가 친일파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1937년 일제의 중국침략을 전후하여 내선일체론자들로 구성한 방송선전협의회에서 강사로 일하면서부터였다. 이후 1938년경에는 내선일체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후원하기 위해 군관민(軍官民) 각 방면의 유력자가 모여 결성한 목요회의 회원이 되었다({금일의 조선문제강좌} 4, {조선사상계 개관} 53∼54면). 이외에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중앙선전부선전문화위원회 위원(참사), 임전보국단의 평의원 등 당시 웬만한 친일단체에는 거의 관여하였다.
이와 더불어 그는 대표적인 친일잡지인 {동양지광} {녹기} {총동원} {춘추} {조광} {대동아} 등에 일제의 지원병제도와 내선일체를 지지하는 글을 발표해 일제의 식민정책을 충실하게 대변하였다. {매일신보}에 실린 많은 친일사설 역시 대부분 그가 쓴 것이었다. 나아가 1940년 1월에는 <조선문화사>란 출판사를 직접 설립하여 친일 잡지 {태양}을 창간하기도 하였다. 당시는 조선총독부에서 신문지 용지 절감, 물자절약이란 명분 하에 동아·조선일보와 기타 잡지를 모두 폐간시키는 등 '일도일지(一道一紙)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언론통폐합을 단행하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언론통제 속에서도 그가 잡지를 발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친일언론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의 친일언론은 강압과 회유에 의한 마지못한 친일의 수준을 넘어 소신과 논리로 무장한 것이었다. 그는 국가의 국민에 대한 선전의 근본 목적은 국민교화와 국민정신의 작흥(作興)이라 하고 독일의 선전성에서 그 모범을 구하였다. '국가에 불리한 언론은 언론이 아니고 독약이다'라는 정신 하에 소극적으로는 불온사상 및 악종(惡種) 언론을 취체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는 국책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철저히 하는 주지(主旨)하에 국내·외에 대선전을 한다는 것이 즉 현대국가의 최대임무의 하나#(~국가와 선전^, {조광} 24호, 1937.10)라고 하는 그의 주장은 근대자본주의사회에서 언론이 갖는 본래의 역할인 비판성을 도외시하고 오히려 국가에 의한 언론통제를 정당화하는 파시즘적 언론관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가 일본군국주의를 대변하는 하수인을 자처하고 이를 충실하게 수행했음은 일본어 잡지 {태양}의 창간목표를 "신동아건설 및 내선일체의 구현에 관한 신이론 체제의 창설 확립, 건전한 사상의 양성, 개인 위인의 배출 조성, 시비 선악의 준별" 등으로 정하고 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창간사], {태양},창간호, 1940.1)
그가 얼마나 일본 천황제와 국가주의에 오염된 철저한 골수 친일파이며 전쟁협력자였가는 다음의 글에서 잘 나타난다.
"반도청년 제군, 제군에게는 지금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내선일체, 이는 제군에게 있어서는 절호의 기회이다. 제국의 비상시, 이는 제군에게 대해서는 다시없는 기회이다. … 이는 제군에게 대해 더 없는 광영이지 않으면 안된다. 아울러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되는 일이 간단한 것 같으나 간단하지 않다. 여기에는 중대한 의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1. 대군(大君)을 위해 태어나 2. 대군을 위해 일하고 3. 대군을 위해 죽자는 정신을 지니지 않은 자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일본의 대화혼(大和魂)으로부터 말한다면 대군을 위해 죽는 일은 신하된 자의 본분임과 동시에 죽는 그 사람에게 대해서도 더 없는 행복이다.([반도청년이여 분기하라], {총동원} ,1권 5호, 1939년 10월)
"소화 18년 5월 13일! 징병제실시를 앞두고 일사봉공의 열의에 불타는 반도 1천 500만 민중은 이날 또 다시 광대무변한 성은에 감읍하여 마지않을 감격과 광영에 우뢰같은 환성을 폭발시키었다. 해군특별지원병제 실시의 발표가 그것이다. 이것은 실로 징병제 실시와 아울러 반도 민중의 완전한 황민화를 가납하옵신 것이니 대동아전쟁 하 총후 반도의 다시 없는 영예이요, 비길 데 없는 만족이라 하겠다. 삼가 우러러 동방을 요배하고 황공하온 일시동인의 성지에 봉답하려면 순국의 결의를 더욱 해야할 것이라는 것을 반도 청년은 깊이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성은에 감읍] {춘추} 4권 6호, 1943년 6월)
이와 같이 그는 일본제국주의와 천황제의 사수를 위한 지원병제와 징병제 실시를 일본 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실시하는 것은 더 없는 광영이며 신하된 자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며 전쟁협력에 열광적이었다. {매일신보}에 나타나는 수많은 군대지원 권유 강연, 시국강좌와 글을 통해서도 이러한 그의 친일행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밖에도 그는 일본 본토를 본따 각 경찰서 관할구역별로 학도병 지원을 권유하기 위해 조직한 경성익찬위원회 산하 종로익찬위원회의 호별방문대로서 조선학생에게 제국군대 지원을 직접 권유하였다. 또한 1943년 11월 14일 조선문인보국회와 재경 잡지사 공동주최로 YMCA에서 열린 출진학도격려대회에 연사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아무도 따라올 자 없는 그의 알기 쉽고 평이한 변설과 필설'을 민족의 독립과 동포를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제국주의를 위해 친일파로서 십분 발휘한 셈이다.
이와 같은 수많은 반민족 친일행위를 자행하였기에 해방 직전에 죽은 것이 오히려 그로서는 다행이었다. 만약 해방 이후에도 살았다면 그는 당연히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되어야할 민족반역자인 것이다.
金昌龍은 1920-16?∼1956까지 산 자로 함경남도 영흥(永興) 출생하여 1941년 일본 헌병대 군속으로 근무하였고 51년 육군특무대장이 되었다. 특무대장 재직중 공산당 색출과 군내 적색분자 제거에 공헌이 컸는데, 56년 허태영(許泰榮)의 하수인에게 암살당했다.
체포된 허태영은 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김창룡이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동료들을 중상, 대통령의 환심을 독점하면서 고위 군장성들을 이간하여 군의 단결을 해쳤으므로 제거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은 확대되어 배후 관련자로 강문봉(姜文奉) 중장 등이 체포되었다.
김창룡(金昌龍 1916~1956)의 약력
1940 일본 관동군 헌병대 입대, 반일 세력 색출 1947 조선경비대 소위, 군의 좌익 세력 소탕 1948 남로당 소탕 1951 육군 특무부대장으로 동해안 반란 사건 뉴델리 밀담설 등 사건 조작 1956 암살됨 그의 어린 시절은 일차 대전의 종결과 3.1운동 이후에 일제가 행한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교활한 수단으로 한층 고도화한 식민정치를 펴던 시기로 우리의 혼마저 빼버리는 세뇌정책을 편 시기였다.
4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5세 때 영흥으로 나와 영흥공립농잠(農蠶)실습학교에서 2년 과정을 마친 김창룡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편창(片倉)제사공장에서 직공 생활을 했고 2년만에 만주 장춘역(長春驛) 직원으로 추천 이어 북중국 일본 헌병 부대의 군속(軍屬)으로 들어갔다.
1940년 초 장춘에 있는 관동군 헌병 교습소르 거쳐 25의 나이로 헌병이 되었다. 그의 활동은 조선과 중국의 항일 조직에 대한 색출 작업이었다. 그는 일본군에 편입하여 남경(南京), 무창(武昌), 한구(漢口), 영수(永修)를 거쳐 안의(安義)에 배속되었고, 그의 임무는 국경 지대의 소위 '간첩-공작원'을 잡는 것이었다.
1941년 4월 김창룡은 상해(上海)에서 특파된 흥안북성(興安北省)일대의 공작책임자 왕근례(王近禮)에 접근하여 왕근례의 신임을 얻기 위해 일곱 차례나 유치장 신세를 질 정도였다.
은 특수공작부대 특수공작원으로서 소련에서 파견된 공작원 등 50여 명을 체포하고, 무전기 9대를 압수하는 '대성과'를 올렸다
일본 헌병이 되고 나서 2년간 만주에서 50여 건의 항일조직을 적발하여 검거한 공로로 헌병 오장(국군의 하사급)으로 특진했다. 소련이 마침내 1945년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며 만주 전선에 개입 참전, 미국의 원폭투하 등으로 일본의 패망은 시간 문제였다.
만주 통화(通化)에서 소련군의 진주가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김창룡 소속의 헌병 부대도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김창룡은 소련국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사복을 입고 귀국하였다.
김창룡이 관동군(일제는 대륙 침략의 영구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하여 국내 本州, 九州, 四國州, 北海島州 외에 중국 북부 요동반도를 '關東州'라고 명명하여 일본의 한 주로 편입하고 주력군인 관동군을 배치했다) 시절 헌병정보원으로 데리고 있던 김윤원은 김창룡이 소만 국경에서 일본군 특무대원으로서 소련 공작원을 잡는 일을 해왔다고 고발하였고, 김창룡은 친일 반동분자로 철원 보안서(保安署)에 수감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 해 11월 15일, 김창룡은 최고전범군인으로서 함흥의 전범재판소로 이송시키던 화물차에서 뛰어내려 탈출하였으나 다시 보안대에 잡히게 되었고 탈주범인 것이 밝혀지지는 않은 상태에서 전범자로 규정되어 다음해 4월 영흥에서 정평으로 옮겨져 정평고등재판에서 4월 11일 다시 한 번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46년 4월 김창룡은 취조실에서 졸고 있던 소련군을 의자로 내려치고 또다시 탈출하여 결국 남천(南川), 금곡(金谷)을 거쳐 송악산을 넘어 월남했다.
미소의 분할 점령이 고착화되고, 남북의 대치 상태가 강화되어가면서 친일을 했던 사람들, 특히 경찰, 관료, 군인 등의 친일파들은 처벌을 피해 다수 월남했다.
서울에는 1946년 5월 초순에 도착했으나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김창룡은 거의 걸인과 같은 상태로 지냈다 그러나 어느 날 만군 시절의 친구인 박기병(朴基炳, 당시 경비대 사령부 부관) 소위를 만나 김창룡은 박기병과 장래 문제에 대해 의논하면서 "공산당 잡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나섰다.
김창룡은 "북한에 쳐들어가 복수할 수 있는"군대를 선택하고 박기병이 원용덕(元容德) 장군에게 말해서 김창룡은 당시 모집중인 부산의 제5연대(연대장-백선엽)에 입대했다.
1946년 말 경비사관학교 2기생 모집이 있을 때 그는 이에 응시하려 했다. 당시 경비사관학교 지원에는 연대의 추천이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연대 부관(인사 담당)이었던 학병 출신의 백남권(白南權) 소위는 김창룡이 일본군 헌병 출신이기 때문에 장교가 되서는 안 된다 하여 추천을 해주지 않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그는 부대를 이탈, 서울로 올라와 박기영 소위를 찾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이리 203연대로 전출된 상태였다. 김창룡은 다시 이리로 내려갔다. 당시 제3연대장은 김백일(金白一) 소령, 행정장교는 김종오(金鐘五) 대위였다. 제3연대에 다시 입대한 김창룡은 연대 정보과에 배치되었다.
당시 연대 정보과장은 오일균 대위였다. 그런데 당시 군 내부에는 좌파 세력이 상당히 강했고, 김창룡이 오일균 대위를 의심하기 시작해 김창룡과 오일균은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오일균 대위는 육사로 옮겼갔고, 김창룡은 자신의 활약상을 서서히 보여 주기 시작한다.
그가 정보과에서 일제하 헌병 시절에 체득했던 능력을 한껏 발휘할 기회를 맞았던 것이다. 그는 내무반, 식당, 훈련장 등 어디서나 누가 좌익이고 누가 우익인가를 가려내는데 온갖 신경을 곤두세웠다.
제3연대에서 정보하사관으로 근무하던 그는 경비사관학교 3기생 모집 추천을 받아 응시, 합격하였다. 3기생으로 입학한 김창룡은 1947년 1월 13일 입교하여 95일간의 과정을 받고 4월 19일 임관되었다. 그런데 경비사관학교 3기 출신들 중에는 좌우 대결을 역사 속에서 나중에 서로 총부리를 겨루는 운명을 맞기도 했다. 즉 1948년 10월 여수ㆍ순천 사건에서 폭동을 주도한 김지회(金智會). 홍순석(洪淳錫), 두 중위가 3기생이었고, 이들을 토벌, 진압한 일선 중대장도 대부분 3기생이었던 것이다.
사실 좌익 세력에 대한 김창룡의 반감은 그가 생존해왔던 과정에서 경험적으로 체득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좌익에 생리적인 반감을 지닌 그에게 있어 개인적인 사감과 좌익에 대한 반감을 별로 구분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김창룡의 성격을 파악해 볼 수 있다.
역시 일군(日軍) 하사관 출신이었던 김도영이 당시 이리 제3연대 소대장으로 있었다. 김도영은 김창룡이 야간순찰 후 보고하라는 명령을 위반하자 김창룡을 꾸짖고 지휘봉으로 몇 차례 때리게 되었다.
그후 김창룡은 육사 3기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입대하여 만군 시절의 경험 덕에 정보계에서 차츰 두각을 나타냈다. 3년 후인 1949년, 4ㆍ3제주민중항쟁 사건 토벌 당시 206연대 1대대장으로 출전했던 김도영을 적과 내통하고 토벌 작전을 소홀히 했다는 혐의로 김창룡은 6개월간 특무대에 구금하고 수사를 벌였다. 그러나 김도영은 무혐의로 밝혀져 군에 복귀했다.
그 후 한국전쟁중 김도영은 부산 제2훈련소 부소장으로 있고, 김창룡은 부산지구 합수본부장을 지내게 되어 두 사람은 부산에서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이때 "당신 왜 저쪽(북)으로 안 가고 여기 있느냐"는 김창룡의 비꼬는 말에 화가 난 김도영이 권총을 빼들고 대드는 소동이 한바탕 벌어졌다.
종전 직후인 1954년에도 김창룡은 김도영을 논산 제1훈련소장으로 있을 때 야당 증진의원인 신익희의 사주를 받아 훈련소 장병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혐의로 다시 얽어 넣었다. 4개원간이나 구속수사를 했으나 김도영은 결국 또다시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장성 진급 예정자였던 김도영은 이 사건으로 진급에서 좌절해야 했고, 무혐의로 풀려 나온 후에도 김창룡이 죽을 때까지 근 2년간 보직없이 군생활을 하는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이처럼 김창룡은 정보계에서 활동하면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권력을 개인적 차원의 감정에서, 그것도 수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남용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복수심을 불태우며 공산당에 대해 그처럼 광적으로 집착했던 것도 해방 직후 북한에서 공산 세력에게 붙들려 일제하 행적으로 인해 호되게 고초를 당했던 앙갚음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는 어떤 이념적 지향보다 자신의 복수심 때문에 군 내의 공산당 색출에 뛰어들었고, 정보 업무를 담당하는 군인으로서의 자기 업무에 대한 어떤 공적인 윤리 의식도 없이 공사를 구분하지 않고 권력을 사용했던 것이다.
공산당 색출에 대한 김창룡의 집착은 점차 병적으로 변해갔다. 북한에서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로부터 두 번이나 고발을 당해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아무도 믿지 않았고, 그는 모든 일을 자신이 직접 처리했다. 한 글에서는 그의 이러한 집착에 대해 "공산당과 연관이 있다고만 하면 부모 형제, 백년지기 할 것 없이 즉각 체포ㆍ구속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그의 이와 같은 생활은 붉은 고추만 보아도 즉각 처넣고 싶고, 여성들의 붉은 치마만 보아도 온 신경을 곤두세워 공산당과 연관시켜 볼 정도로 되게 하였다. 붉은빛에 대한 노이로제 기미라고 할까"라고 쓰고 있을 정도다.
1948년 여수ㆍ순천 사건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시행된 숙군 작업에 앞서, 서울 태릉에 주둔했던 제1연대는 자체적으로 좌익들을 색출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 작업에 발탁된 사람이 바로 김창룡이었다. 연대장이었던 이성가(李成佳) 소령은 김창룡을 연대 정보주임 보좌관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정보소대를 편성케 하여 연대 내의 사상사찰을 전담시켰다.
생존과 권력 추구를 위해 항상 그가 해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김창룡은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는 일제하에서 경찰관이나 헌병을 지낸 경험자들을 특채하여 정보소대를 구성했고 이들을 통하여 연대 내 좌익 색출에 매진했다. 이 정보소대 요원들이 나중에 창설되는 육군 특무대의 주축을 이루었다.
그러나 한때 김창룡의 전력에 대한 시비가 있기도 했다. 김창룡이 한참 군내 사찰 활동을 하던 중 송호성(宋虎聲) 경비대 사령관이 법무처장 김완룡(金完龍) 대위를 불러 김창룡을 조사하여 파면시킬 것을 명령했다. 동시에 김창룡에 대한 항의서도 제출되었다. 내용은 김창룡은 해방될 때까지 일본군 헌병 앞잡이로서 만주의 우리 동포들에게 혹독한 박해를 자행한 민족 반역자이데 그런 자가 어떻게 신생 조국의 국군 창설에 등용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김완룡 대위는 제1연대로 가서 이성가 연대장과 이정석(李貞錫) 정보주임에게 문제의 항의서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군 내의 공산당을 잡아내는 데는 김창룡이 꼭 필요한 사람이니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서 일을 하게 하라고 간청했다. 마침 그때 김창룡은 당시 군 내에서 의심을 받던 이병위, 김종석(金鐘碩), 최남근(崔楠根), 김지회, 오일균 등의 좌익 장교들의 뒤를 밟고 있었다.
결국 김창룡은 조사 과정에서 조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풀려났다. "이런 과도기"에는 "그런 경험자"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과도기에서 살아 남았던 그는 그 과도기의 활동을 기반으로 영원한 권력을 추구하려 했다.
여수ㆍ순천 사건 이후 몰아닥친 숙군 과정에서 김창룡은 맹활약하였다. 남북 분단이 김창룡의 생존을 보장해 준데 이어 여수ㆍ순천 사건의 동족잔상은 다시 한 번 김창룡의 출세를 보장해 준 것이다. 여수ㆍ순천 사건 직후, 이응준 육군 참모총장은 신상철 헌병사령관과 육군 총사령부 정보국장 백선엽 중령을 불러 경찰이 파악한 군내 좌익들에 관한 자료를 넘겨주었다.
이 자료는 당시 치안국장이던 김태선(金泰善)이 이승만을 통해 넘겨준 것이었다. 거기에는 일제부터 좌익혐의자로 지목 받았던 사람들 중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군복을 입은 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기록되어 있었다 한다. 이 문서는 정보국 산하 방첩대(CIC)에 넘겨졌고 그 동안 수집된 자체 정보와 함께 전군적인 숙군의 기초 자료로 사용되었다.
김창룡은 정부 수립 후 방첩부대(CIC)의 전신인 정보국 특별조사과(SIS) 김안일(金安一) 소령과 함께 숙군 작업을 담당했다. 순국 선풍이 불면서 당시 명동에 있었던 육군본부 별관(구 증권거래소)에 전군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2층에 헌병사령부, 3층에는 정보국이 있어 육군본부 별관이 "숙군 사령부"가 된 셈이었기 때문이다. 혐의자 체포는 헌병 사령부가 맡고, 조사는 정보국 특별조사과에서 맡았다.
정보국 요원들은 1948년 10월 여수ㆍ순천 사건으로 전투 정보 및 방첩의 중요성이 부각되자 마침 임관하던 육사 8기생들 중 성적이 우수한 30명이 선발되어 정보국에서 미군 교관들에 의해 정보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투정보과와 방첩대(CIC)의 창설 과정이었다.
당시 김창룡은 여수ㆍ순천 지구에 내려가 반란군, 토벌군 등 3천여명을 조사하여 150명을 남로당계로 가려 처벌했다. 그 공로로 김창룡은 대위로 진급했고 70일 만인 1948년 11월 5일 소령으로 특진했다.
그때까지 제1연대 숙군 책임자였던 김창룡은 그후부터는 전군에 대한 숙군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당시 숙군 과정에는 정인택(鄭麟澤), 이희영(李熙永), 장복성(張福成), 노엽(盧葉), 이진용(李珍瑢), 이한진(李漢晉), 이각봉(李珏鳳), 박평래(朴平來), 김안수등이 참여했는데, 이 중에는 경찰 정보 계통에서 일하다 군의 요청에 따라 정보국에 전속돼 숙군 후에 군인으로 복무한 이들도 많았다. 또한 숙군의 방대한 업무에 인력이 부족하게 되자 정보국은 앞서 지적했듯이 당시 막 임관한 육사 8기생들을 대거 영입시켰는데, 강신탁(姜信卓), 고제훈(高濟勳), 김영민(金永旼), 김종필(金鍾泌), 김진구(金振九), 김진성(金珍星), 김홍원(金洪元), 나공성(羅公成), 서정순(徐廷淳), 이병희(李秉禧), 이영근(李永根), 이희성(李熺性), 전재덕(全在德), 전창희(全昌熙), 정순갑(靜淳甲), 최명재(崔明載), 최영택(崔英澤), 표대현(表大鉉), 석정선(石正善), 최정국(崔正國)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그 뒤에도 "청정회(淸情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관계를 지속시켰다.
군에 대한 조사는 1949년 봄에 일단락 되었다. 영등포 특별중대 창고를 개조한 구치소에는 수백 명의 좌익혐의 장병들이 가득했다. 한편으로 전남 지역을 비롯한 지방 각지에서도 각 부대별로 좌익혐의자들이 검거되었다. 한편 숙군의 와중에서 1949년 5월 초 국군 2개 대대의 월북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이응준(李應俊) 참모총장이 물러나고 채병덕(蔡秉德) 장군이 그 후임으로 인선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1949년 7월에 막을 내린 대숙군의 결과 총 4,749명의 장병이 처벌되었다. 이는 당시 군 병력의 5%에 해당하는 막대한 숫자였다.
그러나 군 내부에서 진행된 숙군에는 많은 무리가 따랐다. 당시 헌병사령관이었던 신상철은 숙군 과정이 무리했음을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당시 가장 중용한 것은 시급히 숙군을 끝마쳐야 한다는 점이었다. 결국 명백한 물증이 없었던 만큼 자백이 증거의 대부분이었다. 반대로 "누가 누가 보장하면 빼준다"는 것이 하나의 원칙처럼 돼 있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다"고 보증해 풀려난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군대좌익 조직의 비밀 명단이 입수된 뒤에 암호를 풀어 해당자를 잡아오는 식으로 진행됐는데, 동명이인으로 엉뚱한 사람이 걸려 들어오는 예도 있었다. 또 한 명을 잡으면 "아는 놈 이름을 대라"고 때려가며 조사를 했는데 급한 김에 마구 불다보니 엉뚱한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다.
한편 국방부 발행의 《한국전쟁사》1에서도 "조사 방법이 증거주의가 아니고, 신문하여 자백하지 않으면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문의 결과 동기생이나 또는 술친구들의 자백에 말려 끌려 들어간 무고한 장병들이 고생을 해야 하는 실례가 있었다" "사형을 당한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는 마당에서도 애국가를 부르는가 하면, 대한민국 만세,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부르고 총살을 당했다"고 언급함으로써 숙군 과정에 무리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렇듯 문제가 있었던 숙군 과정에서 김창룡이 보인 병적인 행동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건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김창룡은 당시 창립 준비중인 공군을 40명이나 체포했는데 이는 당시 공군의 거의 전원을 의미했다. 이와 관련하여 박원석 주위(1965년 공군 참모총장)의 경우, 박 중위를 잘 알던 김정렬(金貞烈) 대령이 나서 그 검거 경위를 묻게 되었다.
김정렬 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김창룡은 박 중위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없으나 앞으로 접촉할 가망성이 있는 것 같아서 우선 잡아둔 것이라고 대답했다 한다. 백선엽 회고록 《실록 지리산》에 쓰여진 또 하나의 사건 또한 당시 김창룡의 다소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한번은 김창룡이 잡아들인 수백 명의 영등포 특별부대 장병들이 재판에 회부됐다 . 사건을 담당한 이운기(李雲起) 법무관은 이들의 진술서가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아 이상하다고 내게 문의해 왔다. 알아보니 김창룡이 부평을 순찰하는데 술집에서 인민군 노래가 울려 퍼져 즉각 술집을 포위해 잡아들이고 보니 특별부대 장병들이었다.
중대장인지가 무조건 한 곡씩 노래를 하라고 시켰는데 한 병사가 노래를 못한다고 극구 사양하면서 "아는 노래는 월남하기 전 이북에서 배운 노래밖에 없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하라"고 해 생긴 소란이었다. 김창룡은 이들을 잡아들여 "친한 놈 이름을 대라"고 족쳤는데 그래서 수백 명이 검거됐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책임질 테니 무조건 무죄로 상신하라"고 했는데 이 일로 이운기 법무관은 김창룡으로부터 "너도 빨갱이다. 꼭 잡아넣겠다"는 위협을 받았고 나와도 몇 달간 신경전을 폈다.
이 시절 무리한 조사로 인해 세간에 이야깃거리가 되었던 사건도 발생했었다. 1949년 9월 하순, 동대문 일대의 권력가인 고희두(高羲斗, 당시 47세)가 방첩대에서 고문 치사된 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으로 취조자 도진희(都晉熙)는 9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복역 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석방되었고, 방척대장인 김창룡은 전속 명령을 받았다. 당시 방첩대는 빨갱이를 조작하는 곳이라는 일반의 혹평을 받고 있었을 정도였다.
이 문제를 계기로 항의와 변명이 오가는 사이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반공은 더욱 강고(强固)해졌고, 나아가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의 이름으로 자신의 독재를 강화시켰다. 전쟁의 발발과 이를 통한 이승만 독재의 강화는 김창룡의 활동 여지를 보다 넓혔고 이에 그는 다시 한 번 물을 만난 듯했다. 그러나 그의 남용된 권력 행사는 점차 곳곳에서 적을 만들기 시작했다.
1956년 1월 30일 아침, 김창룡 육군 특무부대장은 출근길에 괴한들로부터 세 발의 권총 저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이 사건은 건국이래 당시까지 최대의 군기 사건으로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동안 김창룡은 반공을 앞세운 이승만의 총애를 받으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왔었다. 때로는 그의 권력이 육군 참모총장의 권력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육군 특무부대장으로서 고급 장교들이나 장성들의 비행을 조사했던 그는 군 내부의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김창룡에 대한 반대파들은 수차 그의 제거를 논의했으나 그는 이 대통령의 신임 때문에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건 한 달 만인 2월 23일 특무부대에 의해 범인들이 체포되었다. 권총을 쏜 행동대들과 배후지령자로 지목된 서울지구 병사구 사령관 허태영(許泰榮) 대령 등 7명이 체포되었다. 놀랍게도 허 대령과 공범 모두가 특무부대 출신이었고 하수인 2인도 특무부대 문관이었다.
그런데 허 대령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지자 부인이 구명탄원서를 제출하면서 이 사건의 배후로 제2군사령관 강문봉(姜文奉) 중장, 전 헌병사령관 공국진(孔國鎭) 준장 등이 지목되었다. 본인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추가 구속이 되면서 세인들의 놀라움은 더욱 커졌다. 이제 사건은 개인의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라 최고위급 장성들까지 관련된 조직적인 범행으로 확산되는 듯했다.
이 일로 인해 삼성장군(三星將軍, 중장의 이칭)이 군법회의를 받는 사태가 발생했다. 강문봉 중장은 공판에서 "김창룡은 군대 내에 있어서 육군의 발전을 저해하는 암적 존재였으므로 제거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그러나 허 대령에게 범행을 지시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군내에서 강문봉은 명석하고 강직한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또한 허태영 대령은 김창룡을 제거한 동기와 목적에 대해 그가 상관과 동료를 모략하여 자기 영달을 꾀하였고, 수많은 사건을 조작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육사 졸업식에서의 대통령 암살 음모 사건도 대통령의 환심을 사려 한 조작극이었으며, 고위 장성들의 비행을 조사하여 군을 이간시키고 단결을 저해했으며, 군 통수 계통을 문란케 하여 군 발전을 저해했으므로 군의 장래를 위해 그를 제거했다고 주장했다.
무려 54회 공판에 연 소요시간 2천 2백 56시간을 기록할 정도로 세간의 이목을 모았던 이 재판은 1957년 3월 19일 강문봉 피고인에 대해 사형을 구형하는 등 전원에게 유죄를 구형하였다. 4월 17일 확정 판결에서 허태영, 송용고, 신초식 등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강문봉 중장은 무기징역으로 확정되었다. 이후 허태영을 비롯한 3인에게는 사형이 집행되었고 강문봉은 4ㆍ19혁명 후 석방, 복권되었다.
김창룡이 월남한 이후 군인이 되려 했던 과정에서 그의 전력이 문제가 되어 조사가 실시된 적이 있었다. 김창룡은 조사 과정에서 경비대에 들어온 동기를 묻자 "일본 군대에서 배운 좋은 점을 가지고 조국의 군대를 위하여 몸을 바치고자 들어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일본 군대에서 배운 좋은 점을' '조국의 군대를 위하여'. 그가 일본 군대에서 배운 좋은 점은 민족이 어떠한 상황이건 개인으로서 살아 남는 것이었고, 그가 조국의 군대를 위해 한 것은 자신의 권력을 다지기 위해 무모한 희생자들을 양산한 것이다.
다시 조사관이 그런 희생 정신을 언제부터 가졌는가에 대해 물었다. 그는 "일제 때는 배운 것이 없어 어떻게 살아보려고 한 것이 헌병으로 들어가게 됐는데, 해방이 되고서야 비로소 나라를 알게 되고 자신을 알게 됐습니다. 따라서 저에게 기회를 주시면 과거의 잘못을 거울삼아 죄를 씻고 충성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배운 것이 없어 들어갔던 일제 헌병 생활에서 그는 생존과 권력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배웠다. 해방 직후 그가 깨달은 것은 나라와 민족의 비극 위에서 자신의 생존과 권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김창룡, 그는 일제 하에서는 제사 공장의 일개 직공에서 헌병까지, 해방 후에는 소위에서 중장까지 올라갔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주로 정보 계통에 종사하면서 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초대한의 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었다. 한 치의 반성도 없었던 그의 이러한 집념은 어느 날 아침 한 번의 총격으로 끝났다. 역사가 부여한 형벌인가? (이상 김혜진씨 자료 참고)
위와 같은 인물들이 '반민특위'가 미군정과 이승만의 비호아래 하루아침에 친미로 둔갑한 친일파들에 의하여 격파 당한 후 이 땅의 관료, 군사, 경찰, 사법, 언론계로 깊숙이 침투 장악하고 살공(殺共)하였다. 이들이 미국의 재교육 훈련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민주화와 자주화와 평화통일에 대하여 반작용으로 작동한 것이 아니었던가?
6월을 맞이하여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문제를 법 제정으로 완결하고 그 날들의 함성을 오늘에 되살려 민주와 자주와 평화통일과 민생복지 문제를 수행하는데 옷깃을 여며야 할 것이다.
이 일을 하는데 여야가 따로 있고 보수와 진보가 따로 있겠나, 이는 민족이 우리 모두에게 준 至上命令이다. 과거를 용서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우리 모두 대전 집회에 참여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