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현대의 고승. 1915년 음력 2월 25일 충남 부여군 군수리 파평 윤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노천은 법호(法號)이고 법명이 월하(月下)이다. 속명(俗名)은 희중(喜重). 조선말 통도사에 주석했던 성해(聖海)스님의 사법제자(嗣法弟子) 구하(九河,1872-1965)스님의 법을 이었다.
어릴 때 집 근처의 고란사 스님들을 보면서 출가를 결심하였다. 이때 속가의 부모님이 설득했지만 결국 18세인 1933년 강원도 유점사에서 성환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득도한 후, 1940년 통도사에서 구하스님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고 법을 이었다. 오대산 한암스님 회상에서 안거를 성만하셨다. 1944년 4월 철원 심원사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1950년도부터 30여년간 통도사에 전계대화상으로 후학 양성에 힘쓰셨다.
이(理)와 사(事)를 두루 겸비한 스님은 1954년 효봉 청담 인곡 경산 스님과 함께 사찰정화 수습대책위원회에 참가해 불교정화운동에 앞장섰다. 1955년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이 되었고, 1956년 통도사 주지를 하시면서 사찰내 폐습을 일소하고 강원과 선원을 복원했다. 또한, 상하이 임시정부에 많은 독립운동자금을 대는 큰 자금줄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58년 조계종 총무부장 권한대행, 1958년 조계종 감찰원장, 1960년 중앙종회 의장직을 수행했다. 1970년부터는 통도사 조실로 통도사 보광전 염화실에 주석하며 통도사를 위해 일생을 바치게 된다. 1975년 동국학원 재단이사장, 1979년 조계종 총무원장, 1980년 종정 직무대행 등을 역임했으며 1984년에는 영축총림 방장으로 추대됐다.
1994년 종단 개혁때는 조계종 개혁회의 의장을 역임했으며 1994년에는 조계종 제9대 종정으로 취임했다. 1998년 종단사태 이후 2001년에 다시 영축총림 방장을 재추대 되어 영축총림 수장으로, 종단의 어른으로 자리하였다.
스님은 50여년 가까이 통도사 보광선원을 떠나지 않고 조실로 머물면서 눈푸른 납자들을 지도해왔다. 함께 수행하며 늘 수좌들을 자상하게 지도했던 스님은 졸음에 겨워하는 납자들을 야단치거나 죽비로 때리는 대신 “졸음이 올 때는 일어나 경행(輕行)하라”고 이르며 자비롭게 대해왔다. 언제나 문을 열어놓은 채 지위고하와 노소를 막론하고 방문자들을 맞았고, 대중운력에 빠지지 않고 손수 자신의 빨래까지 하는 수행자의 청규(淸規)를 지켜왔다. 詩(시) · 書畵(서화)에도 능했던 스님은 옛 조사스님들의 선시 전통을 이으면서도, 간단 명료한 언어와 선기 넘치는 선시를 지어왔다. 스님의 선시는 1998년 문도들에 의해 《월하대종사 상당법어집》으로 묶여진 바 있다.
월하스님은 자신의 가풍에 대해 “안으로 구하는 것이 없고, 밖으로도 구하는 것이 없는 것 자체”라고 말하였다. 대중교화에도 남다른 애정을 지녀, 1920년대 중반부터 통도사에서는 대중법회를 개설하여 한 달간 전국 고승들의 법문을 들려주는 화엄산림이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데, 이러한 교화사업이 안정되게 이루어지고 있는 데는 방장스님의 원력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이후 늘 통도사를 지키는 어른으로서 사격을 일으키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1994년에는 종단개혁의 깃발이 오른 뒤 종정의 자리에 올라 종단어른으로 역할을 하였으며, 1998년 종단사태 이후 2001년에 다시 영축총림 방장으로 재추대되어 영축총림 수장으로 후진양성에 필력을 다하였다.
통도사가 오늘날 불지종가(佛之宗家) 총림(叢林)에 걸맞은 가람의 위용(偉容)을 갖출 수 있었던 것도 스님의 힘이 컸다. 특히 1992년엔 정신대 할머니들을 위한 나눔의 집 건립기금으로 아무도 모르게 1억5000만원을 희사하기도 했다. 상좌들이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언론에 알렸다가 오히려 호된 꾸중을 들었다는 일화는 스님의 기품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월하스님이 2003년 12월 4일 오전 9시 15분께 세수 89세, 법랍 71세로 통도사 정변전에서 아래의 열반송을 남기고 열반하셨다.
一物脫根塵(일물탈근진) 한 물건이 이 육신을 벗어나니 頭頭顯法身(두두현법신) 두두물물이 법신을 나투네 莫論去與住(막논거여주) 가고 머뭄을 논하지 말라 處處盡吾家(처처진오가) 곳곳이 나의 집이니라. | |
|
|
|
|
경봉 정석(鏡峰靖錫 1892-1982) 스님은 근현대의 고승으로서 광주 김씨이며, 속명은 용국(鏞國), 호는 경봉(鏡峰), 시호는 원광(圓光)이다. 경상남도 밀양출신으로 아버지는 영규(榮奎)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이다. 7세 때 밀양의 한학자 강달수(姜達壽)에게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15세 되던 해 모친상을 겪고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16세때 양산 통도사의 성해(聖海) 선사를 찾아가 출가했다.
1908년 3월 통도사에서 설립한 명신학교(明新學校)에 입학하였으며, 그해 9월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청호(淸湖) 스님을 계사(戒師)로 사미계를 받았다. 1912년 4월 해담(海曇) 스님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은 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경연구에 몰두하였다.
강원을 졸업 후, 하루는 경을 보다가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본디 반 푼 어치의 이익도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는 경구를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고 참선공부를 하기 위해 내원사(內院寺)의 혜월(慧月) 스님을 찾아 법을 물었으나 마음속의 의문을 해결할 수 없었다. 이에 해인사 퇴설당(堆雪堂)으로 가서 정진한 뒤, 금강산 마하연(摩訶衍)ㆍ석왕사(釋王寺) 등 이름난 선원을 찾아다니면서 공부하였다. 이때 김천 직지사에서 만난 만봉(萬峰) 스님과의 선담(禪談)에 힘입어 ‘자기를 운전하는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주인’을 찾을 것을 결심하고, 통도사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겨 3개월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면서 정진을 계속하였다.
1927년에 통도사 화엄산림법회(華嚴山林法會)에서 법주(法主) 겸 설주(說主)를 맡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던 중, 4일 만에 천지간에 오롯한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물(一物)에 얽힌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점검하고 다시 화두를 들어 정진하다가 1927년 11월 20일 새벽에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그날 새벽 두시 반 경 바람도 없는 데 촛불이 흔들리는 소리를 내며 춤추는 것을 보는 순간 의문 덩어리가 일순간에 녹아내린 것이다. 뜨겁게 타오르던 불길 같은 마음이 식어버리자 이렇게 게송을 읊었다.
我是訪吾物物頭(아시방오물물두) 내가 나를 바깥 것에서 찾았는데 目前卽見主人樓(목전즉견주인루)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도다 呵呵逢着無疑惑(가가봉착무의혹) 하하 이제 만나야 할 의혹 없으니 優鉢花光法界流(우발화광법계류) 우담발라 꽃빛이 온 누리에 흐르는구나.
이후, 한암, 제산, 용성, 전강 스님등과 교류하면서 친분을 두터이 한다. 1932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장에 취임한 뒤부터 5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중생교화의 선구적 소임을 다하였다. 1935년 통도사 주지, 1941년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 지금의 선학원) 이사장을 거쳐 1949년 4월에 다시 통도사 주지에 재임되다. 1953년 극락호국선원(極樂護國禪院) 조실(祖室)에 추대되어 입적하던 날까지 이곳에서 설법과 선문답으로 법을 구하러 찾아오는 불자들을 지도하였고, 동화사(桐華寺)ㆍ내원사(內院寺) 등 여러 선원의 조실도 겸임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언제나 온화함과 자상함을 잃지 않았고,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꾸밈없는 활달한 경지에서 소요자재하였으므로 항상 열려진 문호에는 구도자들이 가득하였다.
1967년 서울탑골공원에 '만해선사기념비'를 세우고 '경봉장학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한시와 묵필에도 뛰어났으며 선지식으로는 드물게도 70여년 동안 계속 日記를 남기기도 하였고, 지금 흔히 쓰는 해우소(解憂所)라는 말도 경봉스님이 지은 것이다.
82세부터는 매월 첫째 일요일에 극락암에서 정기법회를 열었다. 90세의 노령에도 시자의 부축을 받으며 법좌에 올라 설법하였는데, 매 회마다 1천여 명 이상의 대중들이 참여하였다. 또한 가람수호에도 힘을 기울여 통도사의 삼성반월교(三星半月橋)와 장엄석등(莊嚴石燈) 18좌(座)를 세웠고, 극락암 조사당의 탱화조성 및 추모봉행, 특별정진처인 아란야(阿蘭惹)의 창건, 극락암 정법보각(正法寶閣) 신축 및 무량수각(無量壽閣)의 중창 등을 주관하였다. 이밖에도 경봉장학회를 설립하였으며, 탑골공원 안에 만해선사기념비 건립도 추진하였다. 또 18세 때부터 85세까지 67년 동안 매일의 중요한 일을 기록한 일지를 남겼는데, 이 일지에는 당시의 사회상과 한국불교 최근세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1982년 7월 17일(음 5월27일)에 문도들을 모아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문빗장을 만져 보거라”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열반에 드시니 세수 91세, 법납 75세 였다. 저서로는 법어집인 『법해(法海)』,『속법해(續法海)』와 시조집인 『원광한화(圓光閒話)』, 유묵집인 『선문묵일점(禪門墨一點)』, 서간집인 『화중연화소식(火中蓮花消息)』 등이 있다.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