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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박7일 홀아비^^ 생활 체험기-
어제와 같은 오늘이 없고 오늘과 똑같은 내일을 기대 할 수 없듯이
인생은 아니 우리의 삶은 항상 새로운 사건의 연속인 듯하다.
지난 수요일(12월 9일) 12시 30분경 장모님의 위독함을 연락 받고
아내와 나는 부랴부랴 서둘러서 오후 1시25분에 대천에서 열차를 타고
약 3시간 후, 동대구역에 오후 4시 30분경 도착했다.
대구 인근에 사는 다른 분들에 비하여 병원에 제일 늦게 도착한 아내와 나는
먼저 도착한 분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장모님을 뵙기 위하여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하지만 당시 장모님의 상태는 의사의 말처럼 그 날을 넘기시기에 힘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부족했던 막내딸 내외에게 마지막 효도할 여유를 주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의 우려를 뒤로하고 그날을 무사히 넘기신 장모님은
다음날도 그리고 또 그 다음날도 아니 이글을 쓰는 지금까지 건재하시다.
대구에 도착하여 그 후 6일 동안 장모님의 병상을 지킨 나는(물론 병원에서 24시간
있으면서 장모님의 병간호를 했다는 말은 아니다. 친구들도 3차례나 만나고,
밤에는 큰 처남 집에 머물면서 평소 내가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술의 양을
그 기간 동안 마신듯 하다)
15일 서울에서의 치과 예약도 있고 또 대천에서 처리해야 할 일도 있어서
아내를 대구에 남겨두고 15일 아침 대구를 떠나 서울을 경유하여 그날 오후에
대천에 도착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아내와 떨어져 있어야 될 것 같은
예감에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먼저 E마트로 가서 이것저것 식료품을 샀는데
그 품목은 다음과 같다.
양념소고기 1,5Kg, 삼겹살 1근, 꽁치통조림 2개, 두부 2모, 잘 익은 김치 2Kg,
모둠야채, 계란 10개, 조개젓과 명란젓, 귤3Kg, 등등.
15일 저녁
아파트 문에 들어섰을 때,
창밖에서는 어둠이 안개 빛깔에서 엷은 먹물 빛깔로 바뀌고 있었고
코끝에 다가오는 냉기와 함께 썰렁한 분위기만이 나를 반겼다.
평소 집에 있을 때는 몸무게 조절을 위하여 저녁을 먹지 않기 때문에
보일러를 켠 후, 그 날 저녁도 녹차 한잔과 귤 몇 개로 저녁을 대신하고는
메일을 확인했고 또 약간의 독서 후,
저녁 10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넓은 침대에 혼자 누우니 피곤한 몸의 상태와는 달리 이런저런 생각이
잠을 가로막았다.
작년 1월, 아들 홍민이의 제대 기념으로 베트남에 갔을 때, 난방장치가 없던 호텔에서
아내하고는 달리 침대에서 서로의 온기를 나누기에 인색할 수밖에 없는 홍민이와 나는
같은 침대를 사용한 덕분에 냉기를 이기지 못하여 다음 날 감기에 걸렸고,
그 덕분에 모처럼 함께했던 가족여행의 분위기를 망쳤던 일이 생각났고,
그날도 썰렁한 침대에 혼자 들어가면서 감기에 걸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를 했다.
16일
평소처럼 새벽 5시에 일어나서 기도와 성경읽기를 마치고는
어둠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7시경에 혼자서 집을 나와서 산에 올랐다.
아내와 함께 산책할 때와 비교하여 조금 빨리 집에 돌아온 나는
밥을 하며 소고기를 볶고, 어제 사온 반찬과 김을 접시에 담는 등
혼자서 먹을 아침상을 조금 화려하게(?) 준비했다.
물론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하는 밥이었고, 혼자서 처음 해보는 상차림이었다.
(차려놓은 밥상을 보면서 흐뭇한 마음이 들었고, 아내 없이 혼자서 얼마든지
불편하지 않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식사 후 한시간정도 차와 음악 그리고 공장에서의 겨울철 준비를 하였고
점심은 나의 홀아비 됨을 애석하게 생각해주는 사람들과 외식,
오후에는 첨부와 같은 생활 계획표를 짜고는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 온 듯 착각을 하면서 흐뭇한 마음으로 둘째 날을 보냈다.
17일
오늘의 아침식사는 삼겹살 7점에 두부 반모를 부치고 야채를 씻어서 준비했고
어제 넉넉하게 해놓은 밥을 먹었다.
나 혼자 있는 것을 걱정하면서 안부를 묻는 홍민이의 전화에
아침에 준비한 메뉴를 말했더니 아버지는 어머니 안 계시는 동안 살찌겠다는
홍민이의 조크에 오랜만에 큰소리로 웃었다.
국을 먹고 싶었지만 아직 국을 끊이는 것은 자신이 없어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 혼자의 힘으로 이 정도의 밥상을 준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그 이외의 시간은 어제 세운 계획표를 충실하게 지키며 보냈고
점심식사는 외식, 저녁은 간단하게 차와 과일로----.
18일
어제 저녁부터 조금씩 내리던 눈이 밤 동안에
주위를 제법 하얗게 수놓았다.
아침 산행을 준비하며 등산화의 끈을 묵는데, 갑자기
주위 사람들이 우리 부부에게 ‘잉꼬부부’, ‘실과 바늘’ 이라고 한 말들이 생각났다.
아마도 항상 함께하던 아내의 동행 없이 3일째 혼자 산행을 나서면서
조금 어설프게 느껴지는 스스로의 모습과
특히 지난해 나와 함께 눈길을 산책하면서 좋아했던 아내가 생각나서 그런 듯하다.
오늘의 아침식사는 묵은 김치에 꽁치통조림을 넣고 끓여서 찌개를 만들어 보았지만
맛이 없어서 조금밖에 못 먹었다.
점심약속을 하지 않은 이날은 집밖의 설경을 감상하면서
집에서 라면을 끓이고 조금 남은 밥을 넣어서 먹었다.
하지만 혼자서 하는 생활이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서 좋다는 마음이
갑자기 서글프다는 생각과 외로운 마음으로
조금씩 자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19일
계란 부침 2개를 제외하고는, 이제 두 번 씩 차례를 맞이하는 두부부침, 소고기 볶음,
김, 젓갈을 아침으로 먹었다.
점심식사는 과거 30년간 경찰군악대를 지휘했다는 분의 별장에 초청을 받았다.
지붕에 눈으로 장식되어 그 아름다움을 더한 그 별장에서 식사를 하고 음악을 듣고
얘기를 나누었다.
초대를 해준 그분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내와 함께하지 못함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저녁에는 아들 홍민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한 시간 넘게 통화를 했는데
그와 같은 오랜 시간 통화는 지금까지 없던 일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아내의 빈자리에 대한 허전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일
얼마든지 혼자 있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조금씩 그 꼬리를 감추기 시작했다.
겨우 아침 한 끼를 지어서 먹는 것도 조금씩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맛도 처음 같지 않음이 느껴졌는데,
나의 이런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
장모님의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월요일에 온다는 말에
인터넷을 통하여 아내의 기차표를 예매했고,
아내에게 시간과 좌석을 연락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내일을 기다렸다.
주일 예배 후 점심약속이 되어있는 오늘, 아침식사는 대충 간단히 먹고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식사를 한 번에 먹는 기분으로 점심식사를 많이 했더니
저녁에는 속이 거북하고 좋지 않아 소화제를 먹었다.
21일
평소보다 30분쯤 일찍 일어나서 항상 하던 일들을 조금 빨리 끝내고는
여느 때와는 달리 아침식사를 먼저하고 산행을 했다.
산행 후, 나는 집안 청소를 간단하게 했고 모처럼 집에 돌아 온 아내가
서글픈 마음이 들지 않도록 하기위하여 정리 정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내를 지난번처럼 온양온천역에서 마중하기 위하여 9시 20분 대천역발
서울행 새마을호를 타고 아내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나는 근처에서
온천욕을 한 후에 점심으로 기차 안에서 아내와 같이 먹을 김밥을 비롯하여
이것저것을 준비했다. 온양역에서 아내를 기다리며 뇌리에 스쳐간 생각은
연애 감정은 젊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는데 열정이 빠져있다는 사실이었다.
나이 듦으로 변하는 이런저런 모습들이 발견되면서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대천에 도착하여 10여 일 동안 병간호 하면서 병실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털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서
먼저 푸른 파도 넘실대는 대천해수욕장을 경유하여 집으로 왔다.
결국 아내가 오늘 집에 도착함으로 인하여
짧았던 6박7일의 홀아비 생활 체험은 막을 내렸다.
홀아비 경험담 쓰기를 마치고 보니
내주위에는 의외로 오랜 기간 아내와 떨어져서 생활하는 남편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 나와 가까운 친구들 중에는 고등학교 때부터 자취를 하면서
일찍이 홀아비 아닌 홀아비의 경험을 한 친구들이 여럿 있다.
그래서 그동안 나는 적어도 이 문제에서 만은 호강하며 살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아내 없이 며칠 동안 지낸 것으로
이와 같은 글의 소재삼아 글을 쓰기에는
그 소재가 매우 빈약한 것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로서는 새로운 경험이었기에
졸문이지만 써보았다.
장모님과 연관된 단상
결혼 초에 아내와 장모님의 대화중에서 내가 평생 잊지 못할 내용의
대화가 있다.
그것은 아내가 우리 집에 다니러 오신 친정 엄마와의 대화인데
“엄마! 미안해요. 나는 결혼을 하면 결혼 전보다 엄마에게 더 많은 용돈을
드리고 모든 면에서 엄마에게 더 잘 할 줄 알았는데 시집형편이 여의치 못해서
잘 해드리지 못해서 미안해요.” 당시 많은 짐을 어깨에 지고 가야만 했던 상황에서
나는 모녀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엿듣고는 가슴이 시리도록 아팠고,
그 후, 평생의 숙제로 생각하고는 마음으로나 물질적으로 잘하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노환으로 중환자실에서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장모님의 얼굴을 보면서
나의 부족함을 느꼈다.
나이와 더불어
금년 들어서 내 신상에 색다른 조금 변화가 찾아왔다.
그것은 내가 차(茶)의 깊은 맛을 조금씩 음미하기 시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고,
또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음악의 아름다운 선율이 내 몸으로 스며들고 있는 듯
착각을 할 정도로 환상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 또한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사건 중에 하나가 아닐까?
그리고 이 또한 나이 듦의 표시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 보인다.
또한 최근의 일이다.
지난번 치과치료를 받으러 치과에 가 던 중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인데,
소녀 같은 애기엄마가 애기를 등에 업고 자신의 사정을 알리기 위하여
예쁜 글씨로 써서 나누어 준 구걸하는 쪽지를 읽고,
앞으로 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까 상상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오천원을 주었더니 거스름돈을 드릴까요? 라는 말과
애처러운 모습에 감정이 더욱 북 받혀서 체면도 없이 지하철 안에서 엉엉 울며
하나님께 그 모자(?)를 위하여 기도한 적이 있었다.
나이와 더불어 감성의 발달로 인한 변화인지,
아니면 심신이 나약해져가는 모습의 결과인지-----.
그러나 그럴듯한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가끔 아내에게 지나칠 정도로 화를 내서
아내에게 절망적인 기분을 느끼게 할 때도 있다.
물론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그 빈도는 훨씬 적어지고 있지만,
“제 버릇 남에게 못준다고 했던가?” 아직은 예측불허이다.
“나는 내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며
정의롭기도 하고 비겁하기도 하며
이기적이기도 하고 이타적이기도 하고
그런 얼룩덜룩하고 울퉁불퉁한 존재이지만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나의 모습이 오히려
존엄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 김형경의 ‘사람풍경’중에서
그 후
아내의 식사준비를 더 적극적으로 돕게 되었다.
이전과는 달리 아내도 별로 거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드린다.
2009년 12월 21 저녁 박 비 호
-6박7일 홀아비^^ 생활 체험기-
어제와 같은 오늘이 없고 오늘과 똑같은 내일을 기대 할 수 없듯이
인생은 아니 우리의 삶은 항상 새로운 사건의 연속인 듯하다.
지난 수요일(12월 9일) 12시 30분경 장모님의 위독함을 연락 받고
아내와 나는 부랴부랴 서둘러서 오후 1시25분에 대천에서 열차를 타고
약 3시간 후, 동대구역에 오후 4시 30분경 도착했다.
대구 인근에 사는 다른 분들에 비하여 병원에 제일 늦게 도착한 아내와 나는
먼저 도착한 분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장모님을 뵙기 위하여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하지만 당시 장모님의 상태는 의사의 말처럼 그 날을 넘기시기에 힘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부족했던 막내딸 내외에게 마지막 효도할 여유를 주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의 우려를 뒤로하고 그날을 무사히 넘기신 장모님은
다음날도 그리고 또 그 다음날도 아니 이글을 쓰는 지금까지 건재하시다.
대구에 도착하여 그 후 6일 동안 장모님의 병상을 지킨 나는(물론 병원에서 24시간
있으면서 장모님의 병간호를 했다는 말은 아니다. 친구들도 3차례나 만나고,
밤에는 큰 처남 집에 머물면서 평소 내가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술의 양을
그 기간 동안 마신듯 하다)
15일 서울에서의 치과 예약도 있고 또 대천에서 처리해야 할 일도 있어서
아내를 대구에 남겨두고 15일 아침 대구를 떠나 서울을 경유하여 그날 오후에
대천에 도착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아내와 떨어져 있어야 될 것 같은
예감에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먼저 E마트로 가서 이것저것 식료품을 샀는데
그 품목은 다음과 같다.
양념소고기 1,5Kg, 삼겹살 1근, 꽁치통조림 2개, 두부 2모, 잘 익은 김치 2Kg,
모둠야채, 계란 10개, 조개젓과 명란젓, 귤3Kg, 등등.
15일 저녁
아파트 문에 들어섰을 때,
창밖에서는 어둠이 안개 빛깔에서 엷은 먹물 빛깔로 바뀌고 있었고
코끝에 다가오는 냉기와 함께 썰렁한 분위기만이 나를 반겼다.
평소 집에 있을 때는 몸무게 조절을 위하여 저녁을 먹지 않기 때문에
보일러를 켠 후, 그 날 저녁도 녹차 한잔과 귤 몇 개로 저녁을 대신하고는
메일을 확인했고 또 약간의 독서 후,
저녁 10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넓은 침대에 혼자 누우니 피곤한 몸의 상태와는 달리 이런저런 생각이
잠을 가로막았다.
작년 1월, 아들 홍민이의 제대 기념으로 베트남에 갔을 때, 난방장치가 없던 호텔에서
아내하고는 달리 침대에서 서로의 온기를 나누기에 인색할 수밖에 없는 홍민이와 나는
같은 침대를 사용한 덕분에 냉기를 이기지 못하여 다음 날 감기에 걸렸고,
그 덕분에 모처럼 함께했던 가족여행의 분위기를 망쳤던 일이 생각났고,
그날도 썰렁한 침대에 혼자 들어가면서 감기에 걸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를 했다.
16일
평소처럼 새벽 5시에 일어나서 기도와 성경읽기를 마치고는
어둠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7시경에 혼자서 집을 나와서 산에 올랐다.
아내와 함께 산책할 때와 비교하여 조금 빨리 집에 돌아온 나는
밥을 하며 소고기를 볶고, 어제 사온 반찬과 김을 접시에 담는 등
혼자서 먹을 아침상을 조금 화려하게(?) 준비했다.
물론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하는 밥이었고, 혼자서 처음 해보는 상차림이었다.
(차려놓은 밥상을 보면서 흐뭇한 마음이 들었고, 아내 없이 혼자서 얼마든지
불편하지 않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식사 후 한시간정도 차와 음악 그리고 공장에서의 겨울철 준비를 하였고
점심은 나의 홀아비 됨을 애석하게 생각해주는 사람들과 외식,
오후에는 첨부와 같은 생활 계획표를 짜고는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 온 듯 착각을 하면서 흐뭇한 마음으로 둘째 날을 보냈다.
17일
오늘의 아침식사는 삼겹살 7점에 두부 반모를 부치고 야채를 씻어서 준비했고
어제 넉넉하게 해놓은 밥을 먹었다.
나 혼자 있는 것을 걱정하면서 안부를 묻는 홍민이의 전화에
아침에 준비한 메뉴를 말했더니 아버지는 어머니 안 계시는 동안 살찌겠다는
홍민이의 조크에 오랜만에 큰소리로 웃었다.
국을 먹고 싶었지만 아직 국을 끊이는 것은 자신이 없어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 혼자의 힘으로 이 정도의 밥상을 준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그 이외의 시간은 어제 세운 계획표를 충실하게 지키며 보냈고
점심식사는 외식, 저녁은 간단하게 차와 과일로----.
18일
어제 저녁부터 조금씩 내리던 눈이 밤 동안에
주위를 제법 하얗게 수놓았다.
아침 산행을 준비하며 등산화의 끈을 묵는데, 갑자기
주위 사람들이 우리 부부에게 ‘잉꼬부부’, ‘실과 바늘’ 이라고 한 말들이 생각났다.
아마도 항상 함께하던 아내의 동행 없이 3일째 혼자 산행을 나서면서
조금 어설프게 느껴지는 스스로의 모습과
특히 지난해 나와 함께 눈길을 산책하면서 좋아했던 아내가 생각나서 그런 듯하다.
오늘의 아침식사는 묵은 김치에 꽁치통조림을 넣고 끓여서 찌개를 만들어 보았지만
맛이 없어서 조금밖에 못 먹었다.
점심약속을 하지 않은 이날은 집밖의 설경을 감상하면서
집에서 라면을 끓이고 조금 남은 밥을 넣어서 먹었다.
하지만 혼자서 하는 생활이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서 좋다는 마음이
갑자기 서글프다는 생각과 외로운 마음으로
조금씩 자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19일
계란 부침 2개를 제외하고는, 이제 두 번 씩 차례를 맞이하는 두부부침, 소고기 볶음,
김, 젓갈을 아침으로 먹었다.
점심식사는 과거 30년간 경찰군악대를 지휘했다는 분의 별장에 초청을 받았다.
지붕에 눈으로 장식되어 그 아름다움을 더한 그 별장에서 식사를 하고 음악을 듣고
얘기를 나누었다.
초대를 해준 그분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내와 함께하지 못함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저녁에는 아들 홍민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한 시간 넘게 통화를 했는데
그와 같은 오랜 시간 통화는 지금까지 없던 일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아내의 빈자리에 대한 허전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일
얼마든지 혼자 있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조금씩 그 꼬리를 감추기 시작했다.
겨우 아침 한 끼를 지어서 먹는 것도 조금씩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맛도 처음 같지 않음이 느껴졌는데,
나의 이런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
장모님의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월요일에 온다는 말에
인터넷을 통하여 아내의 기차표를 예매했고,
아내에게 시간과 좌석을 연락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내일을 기다렸다.
주일 예배 후 점심약속이 되어있는 오늘, 아침식사는 대충 간단히 먹고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식사를 한 번에 먹는 기분으로 점심식사를 많이 했더니
저녁에는 속이 거북하고 좋지 않아 소화제를 먹었다.
21일
평소보다 30분쯤 일찍 일어나서 항상 하던 일들을 조금 빨리 끝내고는
여느 때와는 달리 아침식사를 먼저하고 산행을 했다.
산행 후, 나는 집안 청소를 간단하게 했고 모처럼 집에 돌아 온 아내가
서글픈 마음이 들지 않도록 하기위하여 정리 정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내를 지난번처럼 온양온천역에서 마중하기 위하여 9시 20분 대천역발
서울행 새마을호를 타고 아내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나는 근처에서
온천욕을 한 후에 점심으로 기차 안에서 아내와 같이 먹을 김밥을 비롯하여
이것저것을 준비했다. 온양역에서 아내를 기다리며 뇌리에 스쳐간 생각은
연애 감정은 젊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는데 열정이 빠져있다는 사실이었다.
나이 듦으로 변하는 이런저런 모습들이 발견되면서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대천에 도착하여 10여 일 동안 병간호 하면서 병실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털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서
먼저 푸른 파도 넘실대는 대천해수욕장을 경유하여 집으로 왔다.
결국 아내가 오늘 집에 도착함으로 인하여
짧았던 6박7일의 홀아비 생활 체험은 막을 내렸다.
홀아비 경험담 쓰기를 마치고 보니
내주위에는 의외로 오랜 기간 아내와 떨어져서 생활하는 남편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 나와 가까운 친구들 중에는 고등학교 때부터 자취를 하면서
일찍이 홀아비 아닌 홀아비의 경험을 한 친구들이 여럿 있다.
그래서 그동안 나는 적어도 이 문제에서 만은 호강하며 살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아내 없이 며칠 동안 지낸 것으로
이와 같은 글의 소재삼아 글을 쓰기에는
그 소재가 매우 빈약한 것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로서는 새로운 경험이었기에
졸문이지만 써보았다.
장모님과 연관된 단상
결혼 초에 아내와 장모님의 대화중에서 내가 평생 잊지 못할 내용의
대화가 있다.
그것은 아내가 우리 집에 다니러 오신 친정 엄마와의 대화인데
“엄마! 미안해요. 나는 결혼을 하면 결혼 전보다 엄마에게 더 많은 용돈을
드리고 모든 면에서 엄마에게 더 잘 할 줄 알았는데 시집형편이 여의치 못해서
잘 해드리지 못해서 미안해요.” 당시 많은 짐을 어깨에 지고 가야만 했던 상황에서
나는 모녀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엿듣고는 가슴이 시리도록 아팠고,
그 후, 평생의 숙제로 생각하고는 마음으로나 물질적으로 잘하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노환으로 중환자실에서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장모님의 얼굴을 보면서
나의 부족함을 느꼈다.
나이와 더불어
금년 들어서 내 신상에 색다른 조금 변화가 찾아왔다.
그것은 내가 차(茶)의 깊은 맛을 조금씩 음미하기 시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고,
또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음악의 아름다운 선율이 내 몸으로 스며들고 있는 듯
착각을 할 정도로 환상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 또한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사건 중에 하나가 아닐까?
그리고 이 또한 나이 듦의 표시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 보인다.
또한 최근의 일이다.
지난번 치과치료를 받으러 치과에 가 던 중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인데,
소녀 같은 애기엄마가 애기를 등에 업고 자신의 사정을 알리기 위하여
예쁜 글씨로 써서 나누어 준 구걸하는 쪽지를 읽고,
앞으로 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까 상상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오천원을 주었더니 거스름돈을 드릴까요? 라는 말과
애처러운 모습에 감정이 더욱 북 받혀서 체면도 없이 지하철 안에서 엉엉 울며
하나님께 그 모자(?)를 위하여 기도한 적이 있었다.
나이와 더불어 감성의 발달로 인한 변화인지,
아니면 심신이 나약해져가는 모습의 결과인지-----.
그러나 그럴듯한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가끔 아내에게 지나칠 정도로 화를 내서
아내에게 절망적인 기분을 느끼게 할 때도 있다.
물론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그 빈도는 훨씬 적어지고 있지만,
“제 버릇 남에게 못준다고 했던가?” 아직은 예측불허이다.
“나는 내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며
정의롭기도 하고 비겁하기도 하며
이기적이기도 하고 이타적이기도 하고
그런 얼룩덜룩하고 울퉁불퉁한 존재이지만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나의 모습이 오히려
존엄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 김형경의 ‘사람풍경’중에서
그 후
아내의 식사준비를 더 적극적으로 돕게 되었다.
이전과는 달리 아내도 별로 거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드린다.
2009년 12월 21 저녁 박 비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