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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한국 | 북한 | ||
관계수립 | 修交日 :1962-10-16 | 修交日 : | ||
공관개설 | 駐 사우디 아라비아 | 駐 韓 | 駐 사우디 아라비아 | 駐 북한 |
상주:1973.7.9 | 상주:1975.4.21 | |||
공관장 | 강광원(2003-06-24) | 살레 만수르 알라지(1998-09-24) | ||
겸임국 | 바레인,예멘 | |||
주요협정체결 | -경제 및 기술협력협정(74.1) -문화협정(75.7) -항공협정(84.1) -감천항 개발차관협정(84.10) -항공운수·소득면제협정(90.2) -걸프戰 관련 한국군 의료지원단 활동에 관한 지위 협 정(91.1) -교육교류약정(97.4) -투자보장협정(02.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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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남북한 통상 | 通商 (2003) - 수출: 92억6,783만불(원유,석유화학제품) - 수입: 14억907만불(섬유,철강,선박,철재,자동차) |
通商 (2001) - 수출: - 수입: | ||
남북한의 주요진출 | -KOTRA,KOICA(한국국제협력단) -대우,쌍룡,삼성물산 등 10개 상사 -대우,동아,삼환,현대,대림 등 14개 건설업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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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민수 | 僑 民 : 7名 滯留者 : 1082名 |
僑 民 : 0名 滯留者 : 0名 |
Ⅰ. 개관
광대한 아라비아반도의 5분의 4를 차지하는 왕국. 동쪽으로는 페르시아만, 서쪽으로는 홍해, 북쪽으로는 요르단, 이라크, 쿠웨이트 등 7개국과 국경을 접하며, 홍해를 사이에 두고 이집트·수단과 마주 본다. 국토의 태반이 사막. 이슬람의 발상지로 아랍 국가들 중에서 가장 이슬람의 색채가 짙어 일상생활의 지주가 되고 있다. 근래들어 석유 자원을 배경으로 공업·토목과 관개농업의 개발 및 교육·보육시설의 충실화에 주력하여 옛날의 영국세력을 일소했다. 독립국으로서 국력은 아랍제일이다.
Ⅱ. 약사
아라비아 반도의 남부지역은 유사이래로 고도의 문명을 영위하고 있었으며, 6세기 중반까지 유목생활이 지배적이었다. 622년의 헤지라(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기득권층의 박해를 피해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사건) 이전에는 메카를 중심으로 하는 원격통상이 성행하고 있었다. 헤지라가 이루어진 서력 622년 7월 16일을 기원으로 하여 이슬람력인 헤지라력이 성립되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무함마드는 630년 출생지인 메카를 정복하고 이슬람의 성지로 삼았다. 661년 움마위야조 성립 후, 반도는 분할되어 군웅할거의 상태가 16세기에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하에 들어가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18세기 중엽 중앙부 네지드 지방의 호족이었던 사우드가가 원시 이슬람 교의의 부활을 주장한 와하브파 운동에 협력하여 오스만 지배를 배척하고 왕조를 수립했다. 19세기 초 이집트군에 의해 정복되었으나, 1902년 사우드가의 압둘 아지즈 2세(이븐 사우드王)가 리야드를 탈환하여 24년 메카, 26년 서부 헤자즈를 병합하고, 27년 영국과의 협정을 통해서 독립을 획득하여 32년 통일 사우디아라비아왕국이 성립되었다. 38년 동부에 위치한 다란 근교에서 유전이 발견되어 석유 이권을 기반으로 국내개발을 진행시켰다.
53년 11월 초대 압둘 아지즈 국왕이 서거한 후 황태자 사우드가 2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처음에는 영미의 중동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아랍 국가들과 보조를 같이 했으나, 수에즈 전쟁 무렵부터 미국에 접근하여 이집트와의 관계가 악화됐다. 58년 사우드왕의 동생 파이잘이 수상에 취임하여 이집트와의 관계 조정을 위해 노력했으나 62년의 예멘 동란에서 예멘왕의 망명정권을 지원했기 때문에 이집트와 단교했다.
64년 3월 사우드왕이 퇴위하고 파이잘 황태자가 3대 국왕으로 즉위하여 각료회의를 창설하고 국가 기본법을 제정하여 근대국가의 기초를 닦았다. 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선 이집트를 지지하여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영·미에 석유금수조치로 대항했다. 정전 후 아랍·이슬람 세계와 국제사회에서 안정된 지위를 확립하고 내정면에서도 석유 수입에 의한 경제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73년 제4차 중동전쟁에서도 석유 전략으로 국제적 발언권을 크게 강화시켰다.
75년 3월 파이잘 국왕이 무사이드 왕자에 의해 암살되어 칼리드 황태자가 4대 국왕으로 즉위하여 친서방·반공과 친아랍노선을 표방했다. 79년 11월 20일 소수부족을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과격파분자가 성지 메카의 하람 대사원을 습격하여 순례자를 인질로 잡고 2주간 사원을 점거했다. 81년 파하드 황태자가 중동평화에 관한 8개 항목의 제안을 공표하여 아랍·이스라엘 분쟁의 해결은 보지 못했으나 조정역으로서의 위신을 높였다. 그러나, 칼리드 국왕은 82년 6월에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왕족의회는 파하드 황태자를 제5대 국왕으로 선출하였고 2005년 8월 1일 사망했다. 현재 국왕은 압둘라 압둘아지즈이며 제2 부수상 겸 국가경비대 사령관이며 황태자는 술탄 이븐 압둘아지즈이다.
▼ 메카순례사건 … 87년 7월 31일 순례기간 중의 성지 메카에서 수천명의 이란인 순례단이 반미데모를 벌이며 경찰들과 충돌하여 402명이 사망하고, 669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으로 이란은 88년 5얼에 단교하여 91년 3월에 복교를 이룰 때까지 3년간 순례를 보이콧하였으나 91년 6월에 순례가 재개되어 이란인 11만 5000명이 참가했다. 90년 7월에 메카의 보행자용 터널에서 순례자가 테러를 기도하여 1426명이 사망하였다. 또한, 91년 6월에는 순례를 마치고 나이지리아로 돌아가던 내이션에어 소속의 DC 8여객기가 제다공항을 이륙한 직후 추락하여 승무원과 승객 261명 전원이 사망했다. 97년에는 메카 근교에서 순례자 텐트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343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극이 계속되자 메카, 메디나의 2대 성지의 관리를 담당하고 있던 사우디아라비아는 순례 중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 각국에 대해서 무슬림 1000명당 순례자를 1명으로 하는 순례자할당제를 실시했다.
▼ 걸프위기·전쟁 … 90년 8월 이라크에 의한 쿠웨이트 침공시 파하드 정권은 미군을 주체로 하는 다국적군이 국내에 진주하는 것을 처음으로 승인했다. 이를 통해 미국에 안전보장을 의존하지 않으려는 국민감정에 대한 배려로 미군의 국내 주둔을 원칙적으로 피해왔으나 이라크군이 남하 위성사진을 보면서 국왕은 종래 노선의 전환을 꾀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성지 메카, 메디나에 이르기까지 미군의 발길이 닿아 이에 대한 무슬림들의 반감을 얻게 되어 이 후 국내에서 벌어지는 온갖 반미 시위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 정치개혁을 위한 요구서 … 걸프전쟁 후, 서구형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기운이 강해지는 한편으로, 이슬람으로의 회귀를 호소하는 보수파의 소리도 강해졌다. 종교인 등의 보수파는 91년 2월과 5월, 와교와 국방정책에도 정교일치를 택하는 것과 이슬람화를 요구하는 요구서를 국왕에게 제출했다. 실업가와 지식인 등의 진보파는 민주화 촉진을 지향하는 요구서를 제출했다.
▼ 자문평의회 발족 … 파하드 국왕은 92년 3월 의회에 준하는 [슈우라 자문평의회] 설치방침과 헌법에 준하는 국가기본법의 제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개혁의 칙령을 발표했다. 이어서 9월에는 쥬베일 법무장관을 평의회 의장에 임명하고, 평의회는 93년 8월 20일의 칙령으로 발족했다. 국왕은 평의회의 발족 후, 걸프지역에는 민주주의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표명하여 이는 현제체의 대폭적인 변경과는 무관한 것이라며 개혁요구에 못을 박았다.
▼ 비판이 강해지는 보수파 … 92년 8월, 이슬람 보수파의 청년 집단이 빈부의 차와 지도부의 오직 등, 국정에 대해 심하게 비판하며 서구와의 단절 등을 요구하는 요구서를 국왕에게 제출한 사실이 발각됐다. 이에 정부는 9월에 요구서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국왕은 11월, 요구서에 명확한 반대의사를 나타내면서 [성직자 최고평의회]의 멤버를 대폭적으로 교체했다. 국왕은 종교계에 대해 종교와 관계가 없는 분야에 끼어들지 말라고 경고했다.
▼ 반미 테러 … 95년 11월 리야드의 국가경비대 훈련시설에서 미정보기관원 4명을 포함한 미국인 6명이 차량폭파사고로 숨졌다. 사우디 당국은 체포된 용의자 4명을 미국측에 통보하기 전에 처형했기 때문에 미국은 이에 항의했다. 이듬해인 96년 6월에는 다란에 있는 미공군기지의 주택시설에서 폭탄을 실은 트럭이 폭발하여 미국인 19명이 사망하고 약 400명이 부상을 입었다. 미국은 이란이 이에 관려했다고 지적했다. 미사법부는 99년 10월, 97년 3월에 카나다 당국에 구속되어 6월 범죄자 인도조치로 미국에 입국한 용의자인 사우디의 쉬아파 무슬림 하니 사에그를 강제 송환하는 것으로 미당국의 조사는 사실상 실패했다.
Ⅲ. 지형·기후
【지 형】 서부는 헤자즈 산맥이 홍해와 나란히 뻗어 남쪽에선 해발 3000m에 달한다. 이 산맥의 서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비교적 강우량이 많은 티하마 지방이 있다. 동부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오아시스가 있는 광대한 사막을 거쳐 페르시아만으로 이어진다. 북부는 네지드 고원·광막한 네푸드 사막·다하나 사막이 이어지고, 남부는 룹앨할리 사막으로 이어진다. 동쪽의 페르시아만 연안인 하사 지방은 해안의 평탄한 사막에서 차츰 반사막지대로 된다.
【기 후】 내륙은 대체로 고온다습한 대륙성기후이나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다. 헤자즈 지방의 해안지대도 비교적 고온다습하고, 남서부 아시르 지방은 푸른 지역이 가장 많다. 중부 네지드 지방은 가장 대륙적이어서 최고기온이 55℃까지 오른다. 동부는 고온다습하고, 봄에서 여름에 걸쳐 칼라스 바람이라 불리우는 모래바람이 심하게 분다.
Ⅳ. 정치
파하드 국왕을 필두로 스데이리 7형제가 국방장관, 내무장관, 리야드주지사 등 주요 직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파이살 전국왕의 자식인 사우드 외무장관과 술탄 국방항공장관의 자식 칼리드(걸프전쟁 시의 육군사령관)와 반달 주미대사 등 제3세대의 대두가 눈에 띈다. 5000명 정도로 추정되는 왕족으로 이루어진 왕제국가의 유지가 기본이다. 파하드 국왕은 전체의 의사를 중시하고 귀중한 정책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걸프지역에서의 주도권 유지도 중요과자이다. 건강불안을 안고 있는 파하드 국왕에 대신해서 압둘라 황태자가 실권을 장악하여 차기 국왕의 지위를 확실시 하고 있다. 왕실 내에는 국왕과 반달 주미대사 등이 친 서구노선의 진보·온건파로, 압둘라 황태자 등은 역내를 중시하며 민족적 색채가 농후한 이슬람 보수파로 알려져 있다. 차기 황태자에는 술탄 국방항공장관이나 살만 리야드 주지사가 유력하다.
【정치개혁】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군주제를 개혁하자는 것이 오랜기간 동안의 현안이다. 걸프전쟁 이후에 국민들 사이에 정치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새로운 기운이 성행하고 있으며, 미국의 민주화요구 압력도 강화되고 있다. 91년 4월 15일 파하드 국왕은 자문회의의 창설을 검토하는 보고서를 완성된 각의에 제출할 것을 명했다.
▼ 2개의 요구서 … 91년 4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2개의 요구서가 국왕에게 제출되었다. 그중 1개는 종교가, 대학교수, 재판관이 중심이 된 이슬람보수파에서 제출한 것으로 그 내용은 ①[신의 법률](이슬람법)에 모순되는 외교정책 간에 거리를 둘 것 ②부를 공정하게 분배할 것 ③이슬람법에 맞는 법령으로 고칠 것의 세가지 내용으로 정교일치의 이슬람적인 민주화를 요구한 것이다. 또 1개의 요구서는 유력한 실업가와 지식인이 중심이된 진보파에서 제출한 것으로 정교분리와 서구형의 민주화를 요구했다.
▼ 정치개혁의 칙령 … 국왕은 92년 3월 1일에 정치개혁에 관계된 칙령을 발표했다. 내용은 ①국가기본법의 제정 ②'마즐리스 알슈라'라는 자문평의회(정원 60명)의 설치 ③지방행정법의 개혁 등 3가지가 중심이 되고 있다. ①의 내용은 사우드왕가의 군림, 통치를 명문화한 것이다. 왕실인사결정은 국왕의 권한이며, 국왕은 초대왕인 압둘 아지즈의 자손으로 한정한다. 또한, 사우디는 이슬람국가이다. ②의 내용은 자문평의회를 국왕이 勅選하며, 자문평의회와 각료회의 간에 의견대립이 발생하면 국왕이 최종판단한다. 자문평의회의 해산 후에는 개각권도 국왕에게 위임한다. ③의 내용은 주지사의 임명·사면권을 왕족이 점유하고 있는 내무장관의 관할하에 둔다.
▼ 이슬람적 민주화 … 파하드 국왕은 92년 3월 28일 쿠웨이트지에 대한 견해를 표명했다. ①이슬람법 자체가 사회적·경제적 공정성, 정치·사법제도를 포함한 헌법을 만든다. ②세계에 널리퍼진 일반적인 민주제도는 중동에 적합하지 않다. 9월 17일, 국왕은 자문평의회 의장에 쥬베일 법무장관을 임명했다. 같은 달 20일의 왕실의회에서 국왕은 이슬람법에 기초한 법개정을 추진하여 [기본법안 위원회]에 대해서 기존의 법률을 통합, 개정하는 새로운 [기본법]을 작성하는 작업을 일주 후인 27일에 시작할 것을 지시했다.
【순례에 대한 경고】 92년의 순례월은 6월 2일이었다. 국왕은 6월 1일, 사우디를 방문한 전세계의 순례자에게 이슬람교의 윤리를 지킬 것을 요구했다. 순례 중에는 이란의 라후산자니 대통령과 파하드 국왕이 이슬람을 믿는 동지로써의 대립을 피하자는 데에 합의해서 88년에는 양국간에 계속된 순례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화해가 성립되었다. 92년의 순례자는 국외에서 110만명, 사우디 국내에서 100만명이 참가했다.
【국왕 중병설】 92년 5월 하순, 빈에서 개최된 석유수출국기구(OPEC)총회에 나젤 석유장관이 차석으로 나와 파하드 국왕이 중병이라는 억측이 나돌았다. 사우디 정보부는 이를 부인했지만, 국왕의 건강은 좋지않은 것으로 보인다. 94년 6월 1일 사우디 왕실은 파하드 국왕이 전날에 담석제거수술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수술 후의 경과는 양호하다고 말했다. 국왕은 73세나 되는 고령이기 때문에 심심치 않게 건강불안설이 나왔었다.
【인권침해를 비판】 국제앰네스티는 94년 5월 10일, 사우디가 91년의 걸프전쟁 중, 이라크에서 사우디로 피난온 피난민 수백명을 부당하게 구속하고 고문을 가하기도 했었다고 발표했다. 또한 그들 중 일부는 사망했다고 말했다. 걸프위기·전쟁을 통해 사우디로 피해온 피난민은 3만 2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순례로 또 사망】 성지 메카로의 순례기간 중인 94년 5월 23일, 악마를 상징하는 탑으로 향해 돌을 던지는 의식에 순례자가 죽으면서 넘어져 다른 순례자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약 270명이 사망했다. 이 사고를 포함해서 이 해의 순례에서는 심장병 등의 병도 포함되어 총 829명이 사망했다. 94년의 총 순례자수는 약 250만명을 상회한다. 메카에서는 90년에도 보행자용 터널 내에서의 테러로 인한 사고가 발생하여 1426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 이란은 데모 중지 … 항상 해왔던 반미데모를 예정했던 이란 순례단은 94년 5월 17일, 사우디 치안당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데모를 하기 직전에 중지했다. 이란 순례단장을 매년 맡고 있던 레이샤하리師는 메카에서 메디나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당했다.
【외교관 망명】 사우디 유엔대표부의 모하메드 키레위 1등 서기관이 6월 14일, 사우디 정부가 이스라엘 등으로 테러활동을 계속하는 이슬람원리주의조직 하마스의 과격파 그룹에 자금 등을 제공하고 있다라는 서면을 미당국에 제출하고 미국으로의 망명을 신청했다. 서기관의 변호사는 8월 25일, 미국으로의 망명이 인정되었다라고 발표했지만 미, 사우디 양국 정부에 의한 공식발표는 아니었다. 7월 4일에는 미국 휴스턴 주재의 아하메드 자하라니 부영사가 영국으로 정치망명을 신청했던 사실이 판명되었다. 부영사는 망명이유로서 자신이 썼던 사우디 정치에 관계된 책으로 인해 협박을 받고 있으며, 또한 사우디 정권의 인권침해에 대항하게 되었다는 점을 들었다.
【원리주의파를 탄압】 사우디 치안당국은 94년 9월, 리야드 북서쪽으로 400km 떨어진 브라이타 등에 있는 이슬람원리주의 성직자 등을 체포했다. 런던이 거점인 사우디 반체제조직 [인권방위위원회](CDLR)에 의하면 체포된 자는 1000명을 넘는다고 한다. 내무성은 같은 달 26일, 국가의 분열과 혼란을 꾀한다는 용의로 약 110명을 구속한다고 발표했다. 체포된 사람들은 성직자인 살만 아와다師와 사팔 하와리師 등이다. 39세인 아와다師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인기가 높아 알제리와 예멘의 원리주의조직에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10월 16, 내무성은 9월의 체포자는 157명이 넘으나 그중 130명에 한해서는 국왕의 방침에 따라 석방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반체제 원리주의운동의 지도자 등 27명은 계속 구속하여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 부호의 국적을 박탈 … 사우디 정부는 94년 4월 7일, 상인이며 국내유수의 일족인 라덴가의 일원인 오사마 빈 라덴의 국적을 박탈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수단의 원리주의조직인 민족이슬람전선(NIF)을 포함한 각국의 이슬람원리운동을 지원, 원조해오고 있으며 알-까에다라는 조직을 조직,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원리주의파를 탄압】 2000년 6월 4일 연로한 왕족으로 이루어진 왕실평의회를 설치하고 의장에 압둘라 황태자가 취임했다. 포스트 파하드 체제를 의식하는 것으로 황태자에 속한 라쉬드 가문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해지게 된 것 이외에도 왕실정치에 개방도가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 파하드 국왕가 같은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스데이리 7형제로부터는 부의장이 된 술탄 국방항공장관과 살만 리야드 주지사의 2명이 들어가 스데이리 형제로의 권력집중을 피하려는 색채를 명확시했다. 또 13인은 압둘 아지즈 초대국왕의 손자나 사우드 일족의 분가에서 선출되어 세대교체의 움직임도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테러 발생】 왕정체제의 위협이 되는 테러에 치안당국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1994년에 사우디 국적을 박탈한 국제적인 테러 배후조종자 오사마 빈 라덴은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원리주의세력인 탈레반의 손님으로 잘랄라바드 근교에 머물렀다. 98년 8월의 미대사관 동시폭파사건에서 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밝혀셨다. 수도 리야드 중심부에서 2000년 11월 17일 차에 숨겨놓은 폭탄이 폭발하여 타고 있던 영국인 남성이 사망하고 그의 처는 중상을 입었다. 리야드에서 같은 달 22일에는 두 번째 차량폭탄테러가 발생하여 영국인 남성 2명과 여성 1명이 부상을 입었다. 당국은 12월 이 두 사건으로 미국인 용의자들을 체포했지만, 상세한 것은 불명이다. 또한 같은 달 15일에는 동부 유전지대인 알-호바르에서 차에 장착한 폭탄이 폭발하여 영국인 남성이 중상을 입었다. 당국은 외국군의 사우디 주둔에 반대하는 과격파와의 관계를 조사하고 있다. 젯다발 런던행 사우디아라비아 항공기가 10월 14일 이집트 상공에서 납치되어 바그다드의 사담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범인은 왕정제 폐지와 지도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사우디 반체제인사 2명이었다. 이라크는 기체와 승객을 무사귀환시켰다.
【종교 대립】 예멘 국경의 나즈란주에서 2000년 4월 23일 쉬아파계 이스마일파 교도인 야므인의 시위대가 경찰대와 충돌하여 40명이 사망했다. 사우디는 교의에 엄격한 와하브파가 다수파로 이스마일파의 종교행사를 놓고 주민과 당국의 대립이 발생하고 있다.
【관광 부흥】 석유의존 경제에서 탈피하기 위해 관광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고등관광기구를 2000년 4월에 설치했다. 관광부도 신설되었다. 홍해 연안에서의 다이빙이나 유적관광 등을 발전시켜 외국인 관광객의 주목을 끌고자 한다. 사우디에는 순례비자(핫지, 우므라 등)와 상용비자 밖에 없지만, 관광객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 항공을 아용하는 방문비자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비자수속 자체가 어려운 것이 장애물이 되고 있다.
Ⅴ. 정치조직
【원 수】 국왕. 사우드가의 남자에 의한 세습제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며, 각료평의회(내각)을 임명한다. 존칭은 86년에 [폐하]에서 [2대 성지(메카와 메디나)의 수호자]로 바뀌었다.
▼ 슈우라 자문평의회 … 93년 8월의 칙령으로 발족했다. 국왕에 대한 조언기관으로써의 기능을 가진다. 의장 1명과 멤버 60명은 4년마다 국왕이 임명한다. 멤버는 대학교수 등 민간인 주체로 인원은 97년 7월에 성인남성 60명에서 80명으로 확대되었다. 내각과 의견이 대립할 때에는 국왕이 조정한다. 의장은 무함마드 빈 주바이르.
▼ 성직자 최고평의회 … 고위성직자 18명으로 구성. 왕위계승을 포함하여 국가의 중요정책 논의시 이슬람법(샤리아)에 위배되지 않는가를 판단한다. 걸프위기의 미군주둔에서는 주둔을 추인하는 파트와(敎令)를 냈다.
▼ 스데이리 7 … 사우드가의 최고로 유력한 족벌. 스데이리가의 장녀로 초대 압둘 아지즈 국왕의 처 중 1명이었던 핫산 왕비가 낳은 파하드 현 국왕과 술탄 제2 부수상 겸 국방항공장관 등 7명의 남자(왕자)를 가리킨다. 그 외에 나라의 의사결정에 관계된 기관으로써 왕실의 수뇌부 몇 명으로 이루어져 지도부의 의견조정을 꾀하는 [국가평의회](비상시 설치), 사우드가의 고참 왕자 수십명으로 구성된 [장로왕족평의회], 주요한 씨족으로 이루어진 [씨족 회의] 등이 있다.
【내 각】 자문평의회. 입법권을 가진다. 국왕이 수상을 겸임한다. 새로운 법은 다수결로 결정하지만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다.
【사 법】 헌법은 이슬람법(샤리아)을 기준으로 국왕이 통치한다. 정당의 결성은 금지되어 있다. 사법관련기관의 최고는 최고사법평의회(11명)로 법무장관으로부터 부탁받은 사법문제와 사형 등 중요한 판결의 정당성을 심사한다. 고등 재판소, 지방 재판소, 간단 재판소에 해당하는 재판소가 있다.
【지방행정】 각 부족이 사는 촌을 지구 평의회가 지배한다. 행정구는 네지드(수도 리야드 부근), 헤쟈즈, 아실, 동부지구(알하사)의 4개로 구분되며, 여기에는 13개의 행정주가 있다. 주지사는 역시 왕족이다.
【반체제조직】 인권방위위원회(CDLR). 런던을 활동거점으로 하는 반체제원리주의조직이다. 정부의 친구미노선에 비판적인 이슬람 보수파의 학자와 변호사를 발기인으로하여 93년 5월에 결성되었다. 정부는 CDLR을 비합법화하여 발기인 등을 공직에서 추방시켰다.
Ⅵ. 외교
아랍 국가들 중에서도 온건파. 친서구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특히 걸프전쟁 후에는 미국과의 관계를 최고로 중시했다. 국제사회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이슬람의 성지문제에 있어서는 주도권을 장악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반이스라엘의 입장을 주도한다. 걸프협력회의(GCC)의 소속 국가들 간의 협력을 중시한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최고로 발언권이 강한 멤버이기도 하다. 이슬람국가회의기구(OIC)에서의 발언권도 크다.
【對미관계】 부시 미대통령은 92년 9월 11일, F-15 전투기 72기의 매각을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클린턴은 대통령 선거 당선후인 11월 10일, 파하드 국왕과의 전화회담에서 걸프지역 평화유지를 위한 안전보장에 미국이 도와줄 것임을 약속했다. 특히 [적대적군사국(이란, 이라크 등)]에는 양국이 협력할 방침이라는 데에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크리스토퍼 국방장관이 94년 4월 27일에 리야드를 방문하여 중동평화 등에 대해 파하드 국왕 등과 회담했다. 10월 이라크군의 쿠웨이트 국경집결에서는 미군에 사우디 국내의 기지사용을 승인했다. 10월, 페리 국방장관이 방문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10월 29일, 중동 6개국 방문의 마지막에 사우디를 방문, 파하드 국왕과 회담했다. 공동성명에서는 對이라크 제재의 해제·완화는 시기상으로 이르다는 견해에 일치하여 이라크의 석유금수해제에 대한 움직임을 비판했다.
새로 취임한 압둘라 국왕은 민족주의적인 의향이 정책이 강하게 반영되는 경향이 있어 앞으로는 온건한 대미노선에 돌발변수가 생겨날 가능성도 있다.
동부유전지대인 다란에서 96년에 일어난 미군사시설 폭파테러에서는 미국으로부터 파견된 중장정보국(CIA) 요원은 사우디측의 협력에도 불구하고 조사는 불발로 끝났다. 이교도인 미군 주둔에 대한 사우디인들의 반반은 뿌리가 깊어 미군기지는 사막의 오지로 이전했다. 걸프전쟁 후 [이라크의 위협]으로부터의 방위가 미군주둔의 근거였지만, 압둘라 황태자가 국왕에 즉위한다면 대미관계에 변화가 생겨 미군철수를 검토할 가능성도 있다.
【對중동관계】 걸프협력회의(GCC)의 핵심국. 걸프위기 이후 시리아, 이집트와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다.
▼ 對이라크관계 … 걸프전쟁에서 시리아, 이집트, GCC소속국은 반이라크 포위망을 결성했다. 전쟁 중에는 다국적군에 가세하여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군에 대한 군사작전에 참가했다. 92년 2월 하순, 이라크의 반체제 이슬람 쉬아파조직 [이라크·이슬람 혁명최고평의회]의 하킴 의장이 사우디를 방문했을 때, 파하드 국왕은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타도계획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임을 약속했다. 사우디와 GCC는 8월 하순에 북위 32도 이남의 이라크 남부상공에서의 비행금지구역 설정을 지지했다.
이라크군 비행기가 2000년 10월 4일 이라크 남부의 [비행금지공역]을 넘어 사우디 영공을 침범했다. 이라크의 이번 움직임은 제재 10년으로 미국의 이라크 포위망이 붕괴과정에 있던 중 요동을 쳤던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 영공의 침범은 걸프전 이후 처음이었다.
▼ 對PLO관계 … 걸프전쟁 중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이라크를 지지함으로써 관계가 악화되었으나, 91년 9월 24일 다마스커스에서 카도우미 PLO정부국장과 사우드 외무부장관이 회담하여 관계회복에 합의했다. 그러나 92년 11월 상순 사우디정부는 아라파트 PLO의장의 사우디 방문을 거부했다. 압둘라 황태자는 [PLO와의 원만한 관계회복에는 다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걸프전쟁 이후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사우디는 93년 10월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촉진시키기 위해 1억달러 지불을 표명했다. 아라파트 PLO의장이 94년 1월 24일, 걸프위기 후 처음으로 리야드를 방문, 파하드 국왕과 회담했다. 국왕은 팔레스타인 잠정자치합의를 전면적으로 지원한다는 뜻을 표명, 의장은 사우디와의 관계수복에 성공했다. 같은 해 6월에는 자치구 등의 부흥개발에 대해 3000만달러를 지불하는 것에 세계은행과 합의했다. 아라파트 의장은 7월 9일에도 제다를 방문하여 파하드 국왕과 회담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아라파트 수장이 2000년 7월 30일 젯다를 방문하고 파하드 국왕, 압둘라 황태자와 회담을 가졌다. 황태자는 "예루살렘에 대한 아랍의 완전한 관리가 회복되지 않으면 중동에 평화는 없다."며 팔레스타인지지를 표명했다.
▼ 對요르단관계 … 걸프전쟁에서 요르단이 친이라크, 사우디가 반이라크의 입장에 놓이게 되면서 관계가 냉각화되었다. 그러나 걸프전쟁 후 이라크 지지에서 돌아선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도 3월 8일 사우디를 방문하여 메카 등을 순례했지만 파하드 국왕과의 회담은 실현되지 않았다.
▼ 對카타르분쟁 … 70년대 전반기에 국경지대였던 홀 알위데이드 지구의 영유권을 놓고 다투기 시작하면서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92년 9월 30일 카타르와의 사이에서 계속 분쟁 중이었던 국경지대의 호프스 주둔지(카타르군)에서 양국군이 충돌하였다. 이 사건으로 카타르 병사와 이집트 병사가 각각 1명씩 사망하고 카타르 병사 1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로써 카타르는 65년에 체결된 사우디와의 국경협정의 효력을 무효화하기로 결정했다. 사우디는 같은 날 주둔지(호프스 주둔지)를 점령했다. 양국은 12월 20일 1년이내에 국경을 확정하기로 합의를 봄으로써 관계가 회복되었다.
▼ 對예멘관계 … 92년 4월 19일 예멘의 사나에 있는 사우디 대사관 내에 무장괴한이 침입해서 대사 2명을 인질로 잡고, 인질을 풀어주는 대가로 100만달러를 요구했다. 그 다음날인 20일 예멘 치안부대가 침입한 남자를 생포하고 인질 2명을 구출했다. 사우디·예멘 간에는 1934년의 타이프 협정에는 사우디 영토인 국경지대의 아시르 지방의 영유권문제가 남아있었다. 60년 간의 협정기한이 끝나는 94년에 협정갱신이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예멘과는 아직도 국경산유지대의 채굴권을 놓고 대립중에 있다. 외교력에 의해서 94년 12월 7일, 국경지대에서 양국군이 교전하여 예멘군 병사 3명이 사망했다. 같은 해 6월, 사우디의 아브하에서 개최된 GCC 외무장관회의는 예멘 내전에서 유엔정전결의에 따르지 않는 측에는 [적절한 행동]을 취했다는 성명을 발표, 군사공세를 강화했던 옛 북예멘을 슬며시 비난했다. 사우디는 옛 남예멘을 군사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이란과 옛 북예멘으로부터 비판받았다.
▼ 對이스라엘관계 … 92년 1월, 전미 유태인 의회의 시그만 등 9명이 유태인으로써는 처음으로 사우디를 방문하여 사우디 외무부장관과 중동평화의 과정에 대해서 협의했다. 5월에는 사우디의 이슬람 고위 성직자가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사우디는 다른 아랍국과는 달리 이스라엘과의 교역에 있어서 외국기업을 받아들였던 일종의 경제제재인 [아랍·보이콧]를 계속해왔다. 그러나, GCC는 94년 9월 31일에 對이스라엘 경제제재(아랍 보이콧)을 부분해제하여, GCC 가맹 6개국이 이스라엘과 상업관계를 가진 외국기업과 관계를 맺는 것을 인정했다. 가맹국에 의한 이스라엘기업과의 직접 접촉금지는 아직도 유효하다. 그러나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10월말 개최된 중동·북아프리카 경제 서미트에서 이스라엘의 민간인 집단이 사우디의 실업가 등과 상담하여 합작기업설립 가능성 등에 대해 협의했다. 양국의 민간 집단이 공적인 자리에서 접촉하는 것은 처음이다.
▼ 순례로 인한 이란과의 대립 … 94년 5월의 메카 순례를 놓고 이란은 약 12만명의 순례단을 보낼 것이라는 의향을 표명했다. 사우디는 역으로 이란에서의 받아들일 순례단을 6만명 전후로 낮췄다. 걸프전쟁 후인 91년 3월에 관계수복을 이룬 양국은 완전수복을 위한 수뇌급 요인의 상호방문이 매년 의제에 오르고 있지만 94년에도 실현되지 않았다.
대이란 정책의 결정은 압둘라 황태자가 한손에 장악하고 있다. 테헤란에서 97년에 열린 OIC 수뇌회담에 압둘라 황태자가 참가했었기 때문에 관계개선에 움직임이 있었다. 하타미 이란 대통령은 99년 5월 사우디를 방문하고 파하드 국왕 등과 회담을 가졌다. 이란혁명으로부터 21년간의 냉각기가 계속되어 한때는 사우디가 [(이슬람 원리주의)혁명의 수출]로서 이란을 강하게 비난하고 대립했던 양국 관계가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란의 샤므하니 국방군수상은 2000년 4월 24일 사우디를 방문하고 술탄 국방항공장관과 회견을 가졌다. 이란 국방장관의 방문은 혁명 후 처음이었다. 이와 함께 사우디와 이란의 국경확정 교섭이 2000년 6월 합의에 이르렀다. 사우디 외무장관이 10월 7일 테헤란에서 하타미 대통령과 회담했다.
▼ 아랍 미니서미트 … 파하드 국왕은 12월 28일, 카이로를 방문한 무바라크 이집트대통령, 아사드 시리아대통령과 3자 회담을 가졌다. 상세한 내용은 밝혀지진 않았지만, 3국의 수뇌는 29일, 중동평화교섭에서 시리아의 입장을 지지, 이라크에 대한 유엔결의를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對구소련관계】 사우드 외무장관은 92년 2월 20일에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국가인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루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을 차례로 방문하여 외교관계수립과 대사관의 상호개설에 합의했다. 파하드 국왕은 5월 19일, 러시아에 있는 이슬람국가에 사는 무슬림 1만 3000명분의 항공운임을 국왕 자비로 부담하여 메카순례에 초대하겠다고 발표했다. 중앙아시아국가들에 대한 초대는 이번이 3번째다. 러시아 내의 이슬람국가에 대해서 이란, 터키와 영향력 확대를 위해서 다투어 왔었다.
94년 11월 20일, 체르노므이진 러시아수상이 방문, 양국간의 경제협력협정에 조인했다. 양국은 또, 러시아제 병기의 수출을 촉진하기 위한 전시회를 리야드에서 개최, 매각대금을 러시아의 對사우디 채무를 갚는데 충당하기로 합의했다. 사우디는 91년, 舊소련에 7억 5000만달러를 융자했지만 94년 중에 갚을 기한이 오자 1억달러에 대해서는 96년에 갚기로 연기하는데 합의했다.
Ⅶ. 경제
약 500억달러의 전비를 필요로 했던 걸프전쟁과 석유가격의 저하로 인해 재정난이 악화되어 91년에는 국제은행단으로부터 45억달러를 빌린 것을 처음으로 총 97억달러의 내외자금을 조달했다. 중앙은행으로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통화청(SAMA)의 재외자산은 81년에 1280억달러였지만, 92년 말에는 약 720달러로 감소했다.
【재 정】 예산은 역년으로 2001년도는 세입 1570억리얄, 세출 1850억리얄이다. 유가의 급속한 하락으로 인한 적자폭을 줄이는 것이 과제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중앙통화청(SAMA, 샤이야리 장관)이 금융, 통화정책 전반과 국가수입의 관리운영을 담당한다. 석유최고평의회(의장은 파하드 국왕)이 석유정책의 결정기관으로 왕실 구성원과 각료로 구성되어 있다. 정부는 재정적자를 개선하기 위한 5개년 계획을 책정했다. 계획은 민영화의 촉진, 석유의존형 경제에서의 탈피, 보조금의 삭감 등을 주로 하고 있다.
▼ 내외자금조달 … 걸프전쟁 중 약 500억달러 이상의 거액이 전쟁비용으로 소모된 나머지 재정부족을 겪게 되어 석유산업관련의 증산계획을 세우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91년 5월 국제은행에서 45억달러를 차관으로 들여오고, 민간은행에서 정부의 자금조달을 위해서 25억달러를 차관으로 들여왔다. SAMA의 대외자산보유액은 92년 말 당시 720억달러로 추정된다.
【외국투자법 개정】 외국으로부터의 투자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정부는 2000년 4월 외국투자법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기 시작했다. 외국으로부터의 프로젝트 투자를 100% 가능(기존 최고 50%)하게 하고, 이에 따라 법인세의 세율을 낯주는 한편, 외국인의 토지 등 자산의 100% 소유(기존에는 사우디 스폰서의 동의를 얻어야만 했다.)를 인정했다. 이러한 조치가 생기기까지 다른 걸프협력회의(GCC) 5개국을 제외한 외국자본의 프로젝트에 대해 제한하는 조항은 없었지만, 합작의 사우디 자본 비율을 높이지 않으면 세율이 극단적으로 높아지는 등 외국자본의 사실상 100% 참여를 제한해오고 있었다. 탈석유와 산업의 다각화를 진행하는 정부정책의 일환으로 보여진다. 이와 더불어 실업률이 높은 자국민들의 취업률을 높이기 위한 SAUDIZATION 정책도 강하게 추진해오고 있으나 성과는 미미하다.
【경 제】 얀부, 쥬베일의 2대 시설을 중심으로하는 동부유전지대의 원유, 천연가스 개발이 주력으로 석유관련기업이 국내 총생산(GDP)의 75%를 차지한다. 국영 아람코사(종업원 4만 6천명)은 다란에 본부를 두고 있다. 원유의 확인매장량은 세계의 25%에 해당하는 2600억배럴이다. OPEC의 생산할당량은 일간 800만배럴로 OPEC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공급량을 억제하는 데 있어서 이란이나 알제리는 가격 중시파인데 비해서 사우디는 증산파이다. 사우디는 1배럴당 22~28달러에서 안정된 유가의 유지를 목적으로 한다. OPEC은 2000년 7월 1일부터 일당 70만 8천배럴의 증산을 실시하였지만, 원유가격이 갑자기 높은 수준에 올랐기 때문에 10월 일당 50만배럴의 추가증산을 결정했다. 주요수출국은 일본, 미국, 프랑스, 이태리, 한국이며, 수입국은 미국, 일본, 영국, 도이치, 이태리, 프랑스, 한국이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 항공 및 사우디 텔레콤 등의 국영기업들의 민영화를 검토 중에 있다. 농업은 소맥 등이 있다.
▼ 100만배럴 체제 … 사우디는 94년 11월, 일간 1000만배럴 체제를 가능케 하는 유정의 재개와 정유시설 등의 증설공사를 완료했다. 이것에 의해 90년의 걸프위기로 인한 긴급사태에서의 증산은 가능하게 되었지만, 생산능력을 낮추던 OPEC내의 할당 교섭을 유리하게 진행시키기 위한 방침이라는 것도 가능하다. 총공사비는 150억달러가 들었다.
【교 통】 국영 사우디 항공이 국내외로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으며, 리야드, 젯다, 다란 등 25개의 지역공항이 있다. 그리고 국내외 주요도시를 운행하는 SAPTCO 버스도 운행되고 있다.
Ⅷ. 사회·문화
고유가시대의 전성기를 통해 베이붐세대를 겪으면서 청소년층이 급증하여 국민의 과반수가 20세 이하(그중 52%가 여성)이다. 유학을 경험한 젊은 테크노크라트의 불만을 흡수하는 것이 관건이다. 순례기에는 성지 메카에 전세계에서 수백만명의 순례객들이 방문하여 카바신전에서 신전을 7번 도는 의식을 행한다. 복고주의의 와하브파의 교리에 의해 술은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마약 등 중죄인은 이슬람의 휴일인 금요일에 지역의 큰 광장(칼라스 광장이라 불린다...)에서 공개 단두형에 처한다.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목요일과 금요일이 휴일이다. 그 외에 이들 피뜨르(라마단이 끝났음을 알리는 축제)와 이들 아드하(핫지 후 희생제)가 연간 공식휴일이다.
【교육 및 의료】 사우디 최초의 교육부 장관출신인 파하드 국왕의 교육 진흥책으로 인해 고등교육까지 전액국가부담이며, 400만명이 취학했다. 대학교는 킹 사우드대, 리야드대, 석유공업대(다란) 등 7개교. 성인 식자율은 62년의 2.5%에서 95년에는 62.5%로 개선되었다. 사우디인과 외국인 정주자의 의료는 국영병원에 한해 무상이지만, 받을 수 있는 진료혜택에 차별이 있다. 우리나라의 상당수 의사나 간호사들이 이곳에 진출하기도 한다.
【매스컴】 신문은 알-리야드(14만부), 알-발라드, 오카즈, 알와딴(이상 아랍어), 사우디가젯트, 리야드 데일리(이상 영자지) 등. 통신사는 국영 사우디통신(SPA). 국영 라디오, 텔레비젼(아랍어)과 민영의 아람고 라디오·텔레비젼(영어)이 있다.
Ⅸ. 군사
지원제이며 총병력은 12만 6500명(방공군 4000명 포함)이다. 정규군은 국왕과 국방장관 직속이다. 국가경비대 10만명은 압둘라 황태자 직속이고, 그 외에 특별치안부대도 있다. 걸프전쟁 후 주로 미국에서의 무기구입으로 장비 증강 중에 있다. 국방비는 2000년 187억달러로 전년비 4억달러가 증가했다. 이는 세출의 약 40%를 차지한다..
【육 군】 7만 5천명. 기갑여단 3개, 기계화여단 5개, 왕실경비대(연대편성) 1개, 항공 여단 1개 등. M1A2 전차 315대, M60전차 450대, 장갑방력수송차 1900대(M113 등), 장갑보병전투차 970대, AH64 공격 헬리콥터 12기 등을 갖추고 있다.
【해 군】 1만 5천명(해병대 3천명 포함). 리야드를 본부로 서부함대와 동부함대가 있다. 장비는 프리게이트함 8척, 미사일정 9척, 어전정 3척 등이다. 해병대는 1보병연대(2대대)가 있다.
【공 군】 3만 6천명. 전투기는 F-15C가 70기, F-15D가 24기, F15S 72기, 토네이도 전투폭격기 24기 등 비행중대 3. 그 외에 RF 5 정찰기 10기로 이루어진 1개 비행중대 와, AWACS(E3A) 5기 등이 있다.
【외국부대】 GCC의 합동군 [반도의 방패]가 1개 보병여단 7000명이다. 미국은 페트리어트 저격 미사일의 부대를 시작으로 F15전투기 부대 등 5720명이 주둔한다. 영국은 토네이도 전투기 6기 등 200명, 프랑스는 미라지 2000전투기 5기 등 170명이 주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