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훈식
희망과 설레임을 안고 2002학년도를 새롭게 시작했다. 봄방학 전에 미리 받아두었던 우리 반 학생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하는 것으로 새학기 준비를 시작했다. 학생들 이름을 기억하는 일, 새롭게 개편된 새 교과서를 공부하는 교과연구, 담임하게 될 반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기획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일은 봄방학 중에 주어진 교사들의 숙제이다. 개학 전날밤엔 새로 만날 학생들의 모르는 얼굴들을 상상하면서 잠을 설쳤다.
첫 2학년 과학 과학교과시간, 낯선 얼굴들엔 새로 만난 교사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으로 인한 긴장감이 스며있었다. 교사소개를 하고 교과서의 구성을 설명하면서 지구의 역사 부분에서 한 학생의 진지한 교과 외 질문을 받았다.
그 질문이 앞으로 1년간 진화론적인 시각으로 가득 채워진 과학교과서를 가르쳐야 되는 크리스천 교사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 아니었을까?
'지구의 나이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들이 많은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 중에서는 45억 년의 나이를 말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성경학자들은 1만년 이내라는 의견을 내기도 합니다.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지구의 역사를 알려주는 흔적들은 여러 지역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흥미로운 자료 중 하나가 지층에 숨겨있는 화석입니다. 교과 차례에 맞춰 자세히 배우도록 합시다'
대단원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끝나자마자 한 학생이 번쩍 손을 들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지구의 나이 중 어떤 걸 믿으세요?'
'믿는다는 것은 믿음 곧 신앙을 말하는 것으로 들리는데, 개인적인 신앙을 말하는 것이니?'
'예'
'개인적인 신앙을 말하자면 나는 크리스천으로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단다. 또한 과학이란 학문분야는 아직도 불완전하며 찾아야 될 진리가 너무 많아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단다. 질문에 답이 됐니?'
그 학생의 눈에서 나는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동지를 만났다는 기쁨을 읽을 수 있었다.
이제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다. 또한 지극히 비신앙적인 관점으로 쓰여진 과학과목을 가르치는 과학교사의 일이 시작된 것이다. 몇 년 동안 중학교 3학년 담임만을 맡아서 이제는 어느 정도 어떤 부분에서 어떤 신앙적인 설명을 덧붙여 해줘야 한다는 작전(?)이 짜여져 있다.
특히 유전과 진화를 다루는 Ⅲ단원은 최고의 격전이 벌어지는 곳이다. 멘델의 유전법칙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정교한 유전정보 전달과정을 설명하면서 신났었는데 바로 이어지는 진화단원에서는 모든 생물체가 단세포 생물에서 시작하여 진화과정을 통하여 지금과 같은 다양한 종들로 변화됐다고 단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내용들을 전해야 한다.
중학교 3학년 과학교과서 Ⅲ단원의 '진화' 부분은 먼저 진화의 증거들을 나열하고 있다. '(가) 화석상의 증거'로는 시조새와 말의 크기와 어금니 앞발가락의 변화를 예로 들고 있으며, '(나) 해부학상의 증거'로는 상동기관과 상사기관을 예로 들고 있다. '(다) 발생상의 증거'로 척추동물의 발생초기의 모습이 유사한 것으로 보아 한 조상에서 진화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단원 첫 부분에 진화의 증거들을 제시함으로써 진화가 생물의 다양성을 가져온 당연한 원인이라고 주지시키기 때문에 어떤 학생들도 이것은 옳지 않다고 반대의견을 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그런 의견을 내는 것은 바보나 할 짓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설사 모태신앙으로 하나님의 창조역사에 대해 태중에서부터 들어왔던 학생들도 너무 명확한 진화의 증거들 앞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창조의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있는 것으로 한정시킬 수밖에 없게 된다. 계속 나오는 진화의 원인들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이론들 즉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다윈의 자연선택설, 돌연변이설, 격리설 등은 진화를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크리스천 교사인 나는 이 단원이 가장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이단을 가르칠 때면 정해진 시간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가르치게 된다. 먼저 멘델의 유전법칙을 가르칠 때면 유전법칙 속에 들어있는 정교함과 정확성, 안정성이 조상을 닮은 자손들을 계속 생산하게 된다는 연속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에 그랬던 것처럼 과거의 생명체들이 현재 모습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즉 초기 창조자에 의한 창조물에서 현재까지의 연속적인 유전을 강조한다.
진화단원을 가르칠 때면 진화의 증거들로 내세운 것들이 얼마나 오류가 많은 부정확한 예들인지 그 반대의 예들을 들어서 설명해 준다. 이쯤 되면 신앙을 갖고있는 학생들은 깊은 시름에서 벗어난 듯한 표정을 짓고 반대로 나름대로 진화론을 진리로 받아들였던 학생들은 교사에게 적의를 나타내곤 한다.
이 때 나는 그들과의 싸움은 가급적 피한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지식의 양면에서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저들과의 일방적인 싸움은 교사가 한쪽 의견을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줌으로써 창조자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만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최소한의 교사로써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렇게 끝을 맺는다.
'제가 굳이 교과서에 나와있지도 않은 여러 가지 예들을 들어 설명하는 이유는 교과서에서 제시하는 내용들은 아직 진리로 밝혀지지 않은 한쪽 의견들만 설명하고 있어서 아직까지 판단력이 약한 여러분들이 편견을 갖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물의 다양성, 더 나아가 생명의 근원을 설명하는 이론들은 아직까지 어느 쪽이 옳다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조론이든 오랜 시간과 우연에 의해 생명체가 만들어졌다는 진화론이든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의견을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선생님이 원하는 것은 이 부분은 아직까지 과학적으로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개인적인 신앙의 문제에 가깝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상반된 두 가지 이론들을 설명했을 뿐입니다. 어느 쪽을 믿든 그것은 여러분 자유입니다.'
아마도 이런 교실풍경이 올해도 여러 차례 반복될 것이다. 가장 과학적이어야 하는 과학교과서에서 과학적이지 못한 부분이 남아있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