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히 신뢰성 있는 근거자료에 의한 논증으로 뒷받침되고 있음을 본다. 전선 3척의 피해도 2척은 웅포해전에서 안전사고로 좌초된 것이고 1척은 노량해전에서 명나라 수군사령관에게 빌려준 배였다.
저자는 본서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50여권의 이순신 관련 자료를 섭렵했지만, 최석남 장군이 1992년에 상·하권으로 펴낸 이 저서가 가장 합리성과 객관성을 갖춘 연구결과란 것을 알고, 여기에서 많은 통계수치를 인용하였다. 그는 직업군인 출신으로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노병일 뿐만 아니라 현역근무 시절부터 이순신 연구에 몰두하였던 바, 이 책 외에도 조선수군에 관한 2권의 책을 먼저 펴낸 바 있다.
특히 그는 단순히 한 두가지 사료를 그대로 동의 반복적으로 재탕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공간적 표현인 문화와 시간적 표현인 역사를 씨줄과 날줄로 서로 엮어 나름대로의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향과 논리를 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순신의 해전을 논함에 있어서 고대병법과 병학을 현대전략·전술과 접목·연계시켜 시·공간적 의미 상관성을 도출하고, 오늘날 통용되는 군사용어를 사용하여 논의를 전개함으로써 보편적인 용납성을 도모하고 있다.
한 예를 들면, 당시 거북선의 평균속력을 시속 10km정도로 본 것은 항해거리와 시간, 수로조건과 기상, 노 젓는 요원의 수, 돛 설치 여부 등 제반 여건을 고려하여 산출한 결과임은 물론, 고증자료에 의해 실물구조와 크기로 복원된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의 거북선과도 비교해서 얻은 수치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전과보고에 있어서도 모든 가용사료를 총동원 분석하여 피아의 작전환경과 전술적 임무 그리고 동원된 세력을 근거로 취사 선택한 최적의 수치를 산술적으로 계산 제시한 것으로서 신뢰성이 높다고 본다.
불행히도 당시에 이순신 함대와 통합작전을 편 이억기 함대 및 원균함대의 전과가 별도로 분리 산출되어 있지 않으며, 특히 이순신의 장계나 난중일기에는 피해가 상술되어 있으나, 다른 보조적 역할을 한 두 함대의 피해보고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결국 조·일 7년전쟁 기간중 동원·투입된 일본군의 함정은 2천여 척이 될 것인 바, 그 절반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병력은 1차 침공때 30만 6천여명과 2차 침공때의 14만 1천여명을 합하면 연인원 44만 7천여명인데, 지상전투에서 전사한 자와 기타 아사·동사한 자는 물론 이순신이 해전에서 수장시킨 12만 6천여명을 합산하면 일본 스스로가 밝힌 바 있듯이 참전병력의 절반을 7년전쟁에서 잃었다는 통계와 합치한다고 하겠다. 이순신은 단 3척의 함정손실과 1천여명의 전사상자를 내면서 7년간 근 1천척의 함선을 격침시키고, 12만 6천여명을 수장시킨 이러한 경이적인 전과는 세계전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전무후무한 압도적이고 일방적인 완승(landslide)인 것이다.
일본의 제1차 침공시 초전에 도주·전멸한 원균의 함대와 박홍의 함대가 입은 피해, 제2차 침공시 원균 통합함대의 괴멸시 입은 피해에 대한 정확한 보고가 남아있지 않아, 일본이 오히려 적반하장격으로 자기들의 일방적 승리였다고 과대평가 하겠지만, 도요도미가 「조선수군과는 싸우지 말고 도망치라」는 엄명을 내릴 정도로 이순신 함대는 무적함대(invincible fleet)였던 것이 사실이다.
원균은 그 당시에 이순신처럼 일기를 써서 역사적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나, 전투상보격인 장계는 조정에 올렸을 것인데 그것이 보존되어 있지 않으니 안타깝다. 별로 자랑스러운 기록이 못되어 이를 의도적으로 누군가가 없애버린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순신이 거둔 대승전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많은 일본의 문헌이나, 많지는 않지만 중국이나 서양문헌에서도 대동소이한 승전기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1차 침공시의 옥포해전, 당항포해전, 한산도해전, 부산포해전, 웅포해전, 진해해전은 물론 2차 침공시의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을 통틀어 8대해전을 개관할 때, 이순신이 지휘한 함대세력은 항상 적보다 수적으로 열세하였다. 피아 전력을 비교할 때 한 마디로 중과부적인 상황이었다. 운이 좋으면 비길지 몰라도 이기기에는 힘겨운 상대였던 것이다.
육전이나 해전에서 공자(攻者)는 방자(防者)보다 3배 이상의 세력이 돼야 정상적인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공자 3배수(攻者三倍數)란 전술학의 기본원칙이다. 이는 방자가 준비된 장소와 시간에서 전술적 이점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에 공자보다 유리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순신은 어떻게 이렇게 불리한 상황하에서 매번 선제공격을 하여 상승불패(常勝不敗)의 신화를 이룩했던가? 아약적강(我弱敵强)의 상황하에서 적을 이기는 이소격중(以少擊衆)의 전법은 현대전략·전술이나 고대병법·병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소수정예(少數精銳), 국부우세(局部優勢), 각개격파(各個擊破) 그리고 기습(奇襲)의 4가지이다. 이 4가지 비결은 100% 그대로 활용한 것이 이순신이 써먹은 일부당경 족구천부(一夫當逕 足懼千夫)의 승전비법 이었다. 이순신은 8대 해전에서 모두 이 비법을 사용하였으며, 특히 이의 표본적인 전역(戰役)이 바로 명량(울돌목)해전이었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이말이 실감난다.
명량해전에서 피아세력은 1:10으로 이순신 함대가 절대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기적같이 13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적 함대를 맞아 31척의 주력함을 수장시킴으로써 대세가 기울어지자, 나머지 대다수 함정은 심한 피해를 입고 반신불수가 된 채 도망치고 만 것이다.
이때 이순신은 전사자 36명을 냈을 뿐 1척의 함선 손실도 입지 않았다. 옛날 삼국지나 가공적인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해전 결과였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순신은 소수정예, 국부우세, 각개격파 그리고 기습의 4대 비법을 노량해전에서 대담하게 잘 적용한 것이다. 이에 앞서 이순신을 모함·투옥시키고 3도 수군통제사 자리를 가로 챈 원균은 똑같은 성능의 더 많은 거북선과 판옥선으로 칠천량 해전에서 적과 대결했으나 미리 도망친 12척을 제외하고는 함대를 전멸시키고 말았으며, 자신은 육상으로 상륙·도망치다 일본군에게 살해되었던 것이다.
이 작전중 경상우수사 배설이 비겁하게도 12척을 거느리고 미리 도망친 판옥선 12척과 수리한 1척이 복직한 이순신의 명량해전시 총 가용함선 세력이었다. 명량(울돌목)은 폭이 120∼200m 정도인 좁은 길목으로서 하루 4번씩 시속 10km이상 되는 빠른 조류가 동·서로 순류 및 역류를 반복하는 특수한 협수로이다. 전술적으로 지극히 중요한 애로지점(choke point)을 이순신은 지난날 인근 고을의 현감과 군수 재직중 세밀하게 관찰·연구해 두었던 것이다. 이곳 바다 목은 좁고 물살은 세고 빨라 조수의 우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 정도라서 울돌목이란 지명이 지어졌던 것이다. 지금은 그 위로 진도 대교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울돌목이 인공적으로 굴착 확장되었기 때문에 당시와 같은 조류의 변화를 실감할 수 없게 되었다.
명량해전 당시는 이순신은 백의종군중 갑자기 복직발령을 받고 3도 수군통제사로 부임한지 1개월도 못되는 취약기간이었으나, 일본함대가 울돌목을 1597년 9월 15일 서쪽으로 흐르는 순류를 타고 통과할 것이란 정보를 입수하고는 가용함선 13척을 이끌고 그 전날 밤에 몰래 울돌목 뒷머리의 우수영에 진입하여 진을 쳤다.
오전 7시경에 동으로 흐르던 조류가 거꾸로 흘러 10시경, 최대 유속으로 흐르게 되는 바 그때 적의 대함대가 출현할 것이며, 4시간 후인 오후 2시경엔 다시 조류가 동으로 역류하기 시작하며 5시쯤 절정에 달할 것이란 것을 계산하고 있었다.
10시가 조금 지나자 적 함대가 울돌목으로 접근한다는 신호를 받고 이순신 함대는 역류를 무릅쓰고 적 함대 지근거리까지 접근하여 양쪽 대안에 나눠 진을 쳤다. 적함은 4∼5척밖에 한꺼번에 통과 못하는 바 이순신 함대는 함포사격과 거북선의 충격행동으로 국부우세 속에 나타나는 적함을 순차적으로 각개격파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역류로 배가 떠내려가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약 4시간동안 사력을 다해 접전하여 적선 20여척을 격파하고서 적의 대세를 꺾어 놓았다.
오후 2시경 드디어 기다리던 조류의 역류가 시작됨에 일제히 총공세를 펴 강한 조류에 떠내려가는 적을 추격하면서 넓은 해역으로 유인하였다. 그리하여 10여척을 더 격침시킴에 나머지 100척 미만의 함대는 심한 타격을 입고 울돌목의 저지선을 유턴하여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오후 4시쯤에 급조류를 타고 계속 압박·추격함으로써 적함은 10여척을 제외하고는 만신창이가 되어 도주했으니 주력은 거의 괴멸된 상태였다.
이 작전기간중 이순신 함대는 세력이 너무도 미약하여 민간어선 100여척을 동원하여 의병선(疑兵船)으로 역할을 하도록 후방 안전해역에다 대기시켰다 미행토록 함으로써 적에게 예비·증원세력이 포진하고 있다는 것을 시위하여 심리적인 위압을 안겨주었다. 날이 저물어가자 하루종일 격전을 치룬 이순신 함대는 차후 전투를 위해 전력을 재정비 강화해야 함으로 일단 추격을 멈추고 모기지로 되돌아갔다.
명량해전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의미있는 대역사(大役事)였다. 이미 전라도를 휩쓸고 난 다음 충청도로 북상하던 중인 일본육군에게 제동이 가해진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수륙병진 공격으로 서울에서 합류하려고, 다수의 상륙군과 엄청난 양의 보급품을 탑재한 대함대가 명량해협을 통해 서진중에 기습공격을 당했으니 그 피해는 대단하였다.
이 승전소식을 접한 선조는 재침한 일본군이 직산에서 계속 북상하여 한강을 건너올 것을 우려한 나머지 또 다시 명나라로 피난 갈 채비를 하고 있던 중, 너무도 감격하여 얄밉지만 이순신에게 정2품의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시키려는 조정의 건의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량대첩은 소수의 세력으로 대군을 격파한 이소격중(以少擊衆)의 표본적 승전으로서 이순신의 천시(天時), 지리(地理), 인화(人和)를 바탕으로 한 만전지계(萬全之計)의 리더십이 거둔 인과응보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일부당경·족구천부의 표본적 사례 창출이었다.(박선식, 「조선대장부 이순신」참고)
이때 파견된 명나라군대 경리(經理) 양호(楊鎬)는 선조에게 이순신의 공을 칭송하면서 은자(銀子)와 비단의 상을 내렸으며, 기적적인 그의 전공에 탄복한 명나라의 다른 장수들 15명이 덩달아 보낸 축하선물이 70점이나 되었다.
그러나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이순신에게 앙심을 품고 충청도로 진격하던 중 부대로 하여금 이순신의 본가인 아산으로 쳐들어가게 하여 21세인 장성한 아들 면( )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명량해전은 이순신의 일부당경·족구천부의 전법으로 거둔 동서고금의 자랑스러운 승전기록이다. 이는 오로지 그의 탁월한 전쟁 지도력과 창조적 리더십이 이룩한 인간승리였던 것이다.
이순신이 평소에 승전결의를 다짐하면서 벽에 꽂아두었던 두 자루의 환도(還刀)에는 다음과 같이 자필로 쓴 그의 군인정신이 각각 새겨져 있다.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들이 떠는 도다
(三尺誓天 山河動色)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과 강을 물들이도다
(一揮蕩 血染山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