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15:1-8)
교회가 얼마만큼 중요한가. 예수 이름을 모신 각 개개인의 교회도 중요하다. 믿는 자들이 지체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의 모습을 이루어 거룩한 신부로서 예수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교회가 아주 중요하다. 원수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몸부림을 친다. 너무나 심각한 것은 가장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쓰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에 대해 모르다 보니 원수의 조정에 의해서 사용됨으로 더러운 자로 사용 받고 있다.
교회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강한 열정 때문에 시간, 물질, 육체를 다 드렸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과 뭔가 다르게 생각되면 교회를 살려야 된다는 의협심이 강하기에 원수가 이것을 사용하여 교회를 쓰러뜨리는데 있어 이들을 사용하고 있다. 목회자와 지도자들이 왜 싸우느냐 교회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자기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로 싸우는 것이다. 그중에는 자기의 자존심과 명예를 위해서 하는 사람도 있지만 가르키는 이유는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해서 알지 못하여 뛰다가 죽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건지기 위해 가르킨다.
자기 명예와 권력을 위해서 싸우다가 망한 사람은 불쌍하지 않지만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는데 알지 못하여 망하는 사람은 너무나 불쌍하기에 가르치는 것이다. 왜 이 교육을 하는가?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해서 몸을 돌보지 않고 뛰는 사람들이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팀 목회는 너무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데 여기서 자신의 명예,권력,지식을 고집하면 이루어질 수가 없다. 멈추라고 할 때 멈출 수 없는 것은 멈추면 모든 것이 끝날 것 같기 때문이다. 또 멈출 수 없는 것은 내가 이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어떻게 몸바쳐 왔는데 너무나 억울해서 놓지를 못한다. 그러면 다친다. 내 전 인생을 바친 작품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멈추라고 하시면 멈추어야 한다. 왜 교회 주인은 하나님 이시요,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더 사랑하시니까 오로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를 위해서 했다할지라도 멈추라고 할 때 멈추지 않으면 내가 상처를 고스란히 받는다.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교회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모습은 교회는 열매를 많이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곳이다.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을 위해 포도나무와 가지로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모습을 통하여 알아야 될 것은 예수께서 열매를 많이 맺는 교회모습이 포도나무와 가지이기에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포도나무는 예수, 가지는 교회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각자가 포도나무로 예수님께 붙어 있는 줄 안다. 하나님-예수님-열두사도 각 가지가 포도나무에만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가지에 가지가 붙어 있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제일 끝에서 열린다. 하나님-예수-열두사도- 안수 받은 목회자 - 가지-가지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교회라는 것은 선지자와 사도들 터 위라고 했습니다. 목회자를 부르셨고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에 그 교회를 목회자가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목회자를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목회자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하면 목회자의 동역자가 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요 목회자의 동역자가 되어야만 하나님의 일을 할수 있다.
신령한 집으로 비유를 하는 것은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접붙힘 되는 역할을 하기위해 포도나무와 가지는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위해서 교회를 3가지로 비유를 하는 것은 훈련을 받아야 접붙힘이 되고 이때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이때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목회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를 못하면 목회자가 하는 모든 것들이 이해가 안된다. 목회자가 순종을 배우게 하려고 명령하는데 이해가 안 되어 자기 지식을 말하면 하나가 될 수 없다. 이 사람은 그 목회자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제사가 우선이다 보니까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는 행위였지만 결국은 목회자를 대적하는 행위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먼저 알아야 되고 신앙생활은 교회를 통해서 하고 영생에 들어가는데 교회를 통해서 보존되기 때문에 교회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목회자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딤후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많은 사람들이 목회자를 많이 알고 안수 많이 받고 대접 많이 하고 많은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 복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로지 양육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접붙힘 된 상태에서만 된다. 담임목회자 외에 다른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 횟 갈리게 된다. 왜 목회철학이 다르기 때문이다. 목회자 마다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모양이 다르다. 그래서 다른 목사님 말씀을 자주 듣다 보면 다른 교회 목사님의 작품을 자기교회 목사님에게 적용을 요구하게 된다. 사람 심리가 자기 것보다 남의 것이 더 좋아 보이고 커 보이고 잘되게 보인다. 그러면 자기 소속된 목사님의 철학을 인정하기보다 다른 목회자 철학을 인정한다. 비교가 되고 그러면 교회 접붙힘 될 수가 없다. 접붙힘이 안되면 그 영혼은 말라가게 되어 있다.
제대로 접붙힘 되려면 소속된 목회자로부터 양육을 받고 영양분은 빨아먹어야 한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 온도, 비, 바람, 햇빛, 공기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밑에서 올라오는 진액이 흘러야 한다. 진액이 흐르지 않고 단지 온도, 햇빛 등만 있으면 말라죽는데 더 빠르다.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목회자가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진액을 공급을 받아서 바로 옆가지에게 그 가지는 또 가지에게 공급을 해 주어야 한다. 자기 가지에서 진액이 끊기지 않도록 자기지식, 경험 등을 꺾어야 된다.
아래로부터 오는 것은 하나님의 뜻, 생명, 복, 사랑 등이 생명의 성령을 통해서 계속 흐르도록 해야 한다. 생명의 성령은 명령에 순종하는 자를 통해서만 일하시고 사용하시고 그 진액이 공급 될 수 있다. 목숨 걸고 붙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성령으로부터 오는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서 명령이 왔을 때 움직이는 순종에 의해서 보호받고 양육 받는 것이다. 말씀은 햇빛,공기 역할밖에 못한다.
엡5:29-30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만물에게 은혜를 베푸신다(악인과 선인에게). 아들하나님은 예수이름을 영접 하는 자 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성령하나님은 지체로 접붙힘 된 자에게만 은혜를 베푸신다(보호, 양육). 지체로 접붙힘 되지 않아도 예수 믿으면 예수이름으로 기도하면 약속하셨기에 응답은 하신다. 그러나 보호와 양육은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쓰시기 위해 인간을 만드셨기에 지체들을 보호, 양육하신다. 교회에서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요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열매를 많이 맺기 위해서는 붙어 있으면 된다. 내가 열매 맺기 위해 돌아다니면 안된다. 많은 자들이 교회 어떤 위치에서 어떤 일을 해야 될지 모르고 자기 방법대로 열심을 내어 하나님을 사랑하다 보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가 나오게 된다. 교회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가 있고 법칙이 있는데 예수님-목회자-가지(성도) 가지들이 목회자의 동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목회자의 철학을 알고 이해를 해야 한다. 목회자가 온전해서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하나 뿐이다. 그러기에 목회자도 온전치 못하기에 훈련받는 과정이 있다. 목회자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목회자 보다 평신도가 더 먼저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윗직분자가 되는 이유 누구보다 더 성장했기 때문인데 좀더 죄를 먼저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좀 더 빠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의 소굴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내가 깨끗하게 살아도 죄의 때가 묻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만큼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 쳤는가만 보고 상을 주시지 죄의 경중을 따라 준다면 우리는 상 받을 자가 아무도 없다. 그러기에 죄를 안 지으려고 몸부림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의의도구로 하나님께 더 드려질 것인가 몸부림치다 보면 죄는 멀어지게 되어 있다. 왜 의로 사용 받는 공간이 많을수록 죄가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없어진다.
윗직분자가 된 것은 똑똑해서가 아니라 0.1초라도 먼저 죄임을 깨닫고 회개 하는 자다. 목회자가 평신도보다 여러 부분으로 부족해 보인 면도 있는데 왜 윗직분자로 쓰시는가? 누구보다도 먼저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무릎 꿇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하나님 사랑하는 죄 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교회를 세울까, 영혼들을 잘 양육할까 하는 것들을 위해 고민하신다. 그러면 이왕이면 우리가 돕는 자가 되어야지 방해 하는 자가 되면 안된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목회자를 도와야 된다고 하니까 목회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가 있다. 목회자는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불쌍히 여김 받아야 한다. 똑같은 대접을 하더라도 목사님이 힘드시겠구나 하면서 대접하면 복을 받지만 불쌍해서 대접하면 드리고도 복이 되지 못하고 저주가 될 수 있다.
목회자가 하나님 보다 사람을 눈꼽 만큼이라도 의지, 사랑, 기대면 훈련 속에 들어가는 외로움이 있다. 원수가 되게 해서 하나님이 쫓아내 버리신다. 그래서 목회자는 오로지 하나님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대화하자, 일 좀 해결해 주세요 하면서 해결사로 보기에 목회자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존재가 된다. 목사님이 비상대기조로 있는 경우가 많다.
목회자를 돕는 가장 좋은 것은 기도이다.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 받도록 사람에게 불쌍히 여김 받으면 비참하고 초라하다. 목회자가 머리기능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부족해 보여도 목회자를 통해서 일하신다. 그러나 옆에 있는 자는 미련해 보이고 잘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이렇게 하는 것보다 저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고 하나님은 목회자를 통해서 일하시기에 오직 기도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질서를 알면 내 자리만 지키면 된다. 동역자는 목회자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어 주시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마다 목회자가 내 말을 들어주어야 되고 내 일을 도와주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목회자는 성도들 떨어져 나갈까봐 또 잔인하게 하지 못하고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직분은 사람들을 품는 것이다. 상담의 첫 번째 조건은 들어주는 것이다. 목회자가 하나님과 늘 가까이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리들의 직분 감당이다. 목회자가 성도들과 대화 나누는 시간보다 하나님과 대화 하는 시간이 많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래서 목회자는 늘 외롭다. 목회자도 처음에는 하나님 뜻대로 한다고 시작하는데 사람인지라 사람과 대화 하고 싶고 누가 대접한다 하면 거기 먼저 가고 하다 보니까 세월이 조금 지나면 사람과 관계가 인정으로 맺어진다. 인정으로 맺어지면 왜 문제인가?
처음에는 목회자 명령에 무조건 순종했는데 인정으로 관계가 맺어지면 명령을 명령으로 받지 못하고 자기 사정을 먼저 말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이 진행이 되지 않을뿐더러 자기 영혼에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지 못한다. 순종해야 생명이 공급되는데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작업을 하신다. 이때 전쟁이 온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영혼에게 유익이 안 되니까 하나님께서 전쟁을 허락하신다. 교회는 반드시 영적전쟁이 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적전쟁은 하나님은 일하시지 않고 오로지 원수만 역사한다. 사람들이 보기에 이성적으로 볼 때 교회가 쓰러지고 넘어질 위기의 상황이 반드시 온다.
영적전쟁이 오는 이유는 첫 번째 목회자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명령을 듣기 위한 시간보다 사람과의 대화하는 시간이 더 많을 때 목회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하나님의 일을 진행해야 하는데 사람들의 말을 듣고 진행할 때 영적전쟁이 온다. 두 번째는 영혼들이 목회자의 명령을 명령으로 받지 않고 순종이 안 될 때 전쟁이 온다. 목적은 열매를 많이 맺는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해서다. 포도나무가 열매 맺기 위해서 과정이 있는데 가지치기, 눈없애기, 알솎기, 등등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가 보기에는 아까워도 잘라 버려야 되는 것들이 많다. 반드시 잎도 필요한데 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떨어져 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런 포도나무가 우리교회요 우리라고 생각해 보세요. 가지가 우리요 열매가 우리인데 교회에도 반드시 잎사귀 역할 하는 자가 있는데 이런 자는 열매 맺을 때면 자기 역할하고 떠나는 자들이 있다. 영양분을 제대로 된 열매로 몰아주기 위해서는 좀 부족한 열매를 자른다.
이 포도나무 비유를 보면 교회에서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것인데 얼마나 심각합니까? 이런 작업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다가 당하면 뭔가 저주받은 것 같고 교회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진다. 알고 당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때가 되었구나 하고 감사 할 수 있고 또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는 경각심을 갖을 수 있고 자기를 관리 할 수 있다. 열매 맺기 위해서는 많은 과정이 있지만 하나님은 오직 많은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하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열매를 많이 맺는 자가 되기 위해서 몸부림쳐야 한다. 예수님이 팔리는 것은 약속 된대로 팔려야 하는데 왜 하필이면 가룟 유다이냐 한 것처럼 어차피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지는데 이왕이면 선한도구로 사용받자. 교회가 성장 되는 데는 악한자로 선한자로 사용 받는 부류가 나오는데 내가 굳이 악한자로 사용 받을 필요가 있겠는가? 이왕이면 선한자로 사용 받아 복 받는 자가 되자. 열매맺는 데 많은 과정이 있지만 가장 충격적인 때는 가지치기 때다. 한 가지가 잘라 나갈 때 전 지체가 아픔을 느끼고 교회가 아픔을 느끼게 된다. 영적전쟁이라고 할 때는 가지치기 할 때이다. 가지치기는 많은 열매 맺게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쓰시기 위해 사람을 만드셨다. 하나님을 뜻을 알고 미리 준비한자는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하실 때 선한자로 사용 받고 복을 받는다.
히6:7-8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이 땅에 사는 동안 복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엉겅퀴만 내는 존재가 되어 마지막 때 불사름이 된다.
요17:3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의 생각을 알지 모르면 소경이 인도 하는 대로 가서 멸망으로 간다.
신앙생활의 성공은 영생이다. 중간에 아무리 화려했어도 영생에 들어가지 못하면 실패자다. 신앙생활은 이겨서 영생에 들어가야 한다. 열매를 많이 맺게 하기 위해서 영적전쟁을 하나님이 허락하신다. 각 사람에게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테스트가 온다.
행20:29-31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세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각자가 성장하는 과정 가운데 이리가 오는데 사람의 모습으로 누구에게나 온다. 이때 말씀을 가르킨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 그러면 그때 생각나면 살수 있다. 이 전쟁 때는 하나님이 절대 일하시지 않고 원수가 역사하는데 이때 하나님은 누가 살아 남는가 쳐다보기만 하신다. 겸손한 자가 살아남는다. 그래서 겸손의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교만하면 다 죽는다.
이때는 납작 엎드려 기도만 해야 한다. 이때는 이말 들으면 이것이 옳은 것 같고 저것이 옳은 것 같아 분별이 잘 안된다. 여기서 원수가 노리는 목적은 목회자를 넘어뜨리기 위한 것이다. 직분자의 사명은 몸으로써 목회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서 보호하는 것이다. 몸으로 보호하려고 하면 베드로처럼 사탄아 물러가라 하는 말을 듣는다. 목회자가 오로지 하나님의 명령만 받도록 도와주세요 하고 기도만 해야 한다. 영적전쟁의 원수의 목적은 목회자를 쓰러뜨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목회자가 사람들의 만남을 끊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때 두 부류가 나타나는데 한 부류는 목회자의 허물과 단점을 들춰내어 말하고 다니고 또 억울하게 누명까지 씌우는 사람이다. 전쟁이 나기 전까지는 내가 똑똑하고 잘 나서 그런 줄 알았는데 전쟁 때 보니까 누워도, 앉아도, 가만히 있어도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허물이 된 것을 보고 깨달은 것은 그동안은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허물과 단점을 덮어주어서 은혜로 여기까지 올수 있었구나 하고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 때는 하나님께서 덮어주시지 않으신다. 영적전쟁 목적은 목회자가 무릎 꿇게 하기 위함이기에 억울하게 누명 씌워야 무릎 꿇는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셨기에 아무리 목회자가 잘 보여도 이쁘게 보여 지지 않고 허물만 보이는 때다. 또 목회자 귀에 모든 말이 들려지게 만드신다. 그래서 무릎 꿇게 하신다. 모든 환경이 원수가 역사하도록 이어진다.
두 번째 부류는 오직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는 자다.
세 번째 부류는 교회와 목회자를 변호하는 사람들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목회자가 성장할 때 함께 성장하고 복을 받는다. 허물을 말하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께 버림받게 된다. 변호하는 사람은 교회와 목회자를 변호하러 갔다가 부정적인 말을 많이 듣고 거기에 더러워져서 오히려 시험에 들고 결국은 살아남을 자가 별로 없다. 간신히 살아남으면 온 몸에 상처가 많이 남고 회복하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런 사람은 교회와 목회자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웃사와 같은 존재이다. 설교가 명령으로 오기 위해서는 그 권위를 인정하고 신뢰 할 때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교회 살릴려고 움직이지 말자. 움직이면 죽는다. 여기서 한사람이라도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 6.25이야기 하면 지금 시대의 사람은 이해를 하지 못한다.
영적전쟁이 왔을 때 이기게 하기 위해서 미리 가르쳐야 된다. 이 전쟁을 치루어 본 자는 눈물로 훈계한다. 하나님 뜻대로 하려고 하는 모든 교회는 반드시 영적전쟁이 있다. 평상시 자기 지식, 경험보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 겸손한 자들은 이때 살아남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는 자는 거의 죽는다. 그래서 목회자가 성도들을 훈련시킨다. 교만끼가 보이면 일부러 낮추신다. 평상시에 이런 훈련을 하지 않으면 전쟁 때 다 죽는다. 그래서 평상시 좀 아픔이 있어도 교만이 올라오면 밟아주어야 목회자나 영혼도 아픔이 덜 하다.
교만이 올라올 때 목회자가 못 밟아주는 이유는 아파 할까봐. 위에서 명령을 했는데 명령이 내려가지 않는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이요 이때 반드시 잘라주어야 한다. 능력이 안되서 명령이 안되면 어떻게 해서든지 도와주어야 하지만 교만 때문에 명령이 안 되면 수술을 해야 한다. 곪았을때 그 부분만 자르는 것이 쉽지 곪아 터져가지고 퍼지면 대 수술을 해야 하는 큰 고통이 따른다. 많은 지도자들이 아파할 까봐 그렇게 하지 못하므로 대수술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많은 영혼들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영적 분별력이 있도록 기도를 많이 해 주어야 한다.
교회는 훈련을 통하여 겸손한자를 만드는 곳이기 때문에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자들은 잘 못된 것이 아니기에 기다려 주고 도와주어야 되지만 교만한 자는 잘라 주어야 한다. 교만하지 않도록 밟아 주자. 나의 주인은 목사님이 아니고 성령이시다. 내가 밟히는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이요 괜히 밟는 것이 아니라 복 주시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신8:16-17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하나님은 나를 낮추시고 시험하는 이유는 복 주시기 위함이요 그럼 왜 낮추셔서 복을 주시는가? 바로 내가 했다고 말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직분 감당 시 하나님께서 은사와 능력을 주신다. 그런데 내가 똑똑해서 지혜가 있어서 그런다고 착각한다. 이것이 교만이다. 이때 잘 못하는 직분을 주어서 교만하지 않게 한다.
나이 드신 분들이 먹을 것 숨기는 것, 사람만 보면 말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힘은 없고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도 나이 먹을 때가 있다.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누구를 통해서 고난이 온 것은 하나님께서 겸손하게 낮추시게 하기 위해서다. 이런 자만 영전전쟁 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나를 따라오는 자에게 훈계하고 가르칠 수 있다. 민방위 훈련하는 것과 같다. 윗직분자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는 자는 영적전쟁시 살아남는다. 사도바울이 훈계했던 것처럼
원수가 노리는 것은 가지에서 잘라져 나가게 하는 것이다. 이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 다른 교회로 가면 접붙힘이 되는데 두 세배 힘들고 또 원수가 열매 맺지 못하게 하기 위해 떨어져 나가에 했는데 저 교회 갔다고 해서 원수가 붙게 내버려 두겠는가? 반드시 어디를 가든지 통과해야 되는 부분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느라고 붙지 못하여 열매가 없다. 과연 이런 자가 영생에 들어가겠는가? 문 밖에 쫓겨나는 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든지 거기서 하나님이 나를 쓰시고 있는가 가 중요하기에 늘 점검해야 한다.
원수의 목적은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어떤 환경이라도 교회에 붙어 있어야 한다. 붙을 때가 되면 원수는 어떤 환경을 통해서라고 떨어져 나가게 환경을 조성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복주셨다고 생각하지 원수가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게 한다고 생각하지를 못한다. 어떤 환경이 와도 나는 다 잃어버려도 교회와 함께 움직이겠습니다. 하고 결심하면 잠시는 힘들겠지만 때가 되면 더 좋은 환경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절대로 환경을 따라 움직이지 말고 교회를 따라 움직이면 산다. 신앙생활은 교회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평상시 교회 옮기면 그렇게 표시가 안 나지만 전쟁 때 만큼은 움직이면 안된다. 전쟁을 이기고 움직이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고 움직이면 미혹의 영이 붙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어렵게 된다. 전쟁 때 살아남으려면 납작 엎드려야 한다. 이때는 목회자를 비롯하여 모두가 납작 엎드려 기도해야 한다. 교회 살려야 된다고 절대 움직이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