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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자연 속으로 떠난 겨울 여행
♣ 자기를 찾아 나서는 여행길
항상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올지라도 집이라는 일상을 떠나 길 위에 서고 싶었니다. 하루하루 생활이 때로는 자신을
구속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쉬이 떠나지 못했다. 일상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나에게는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이번에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길을 나서기로 했다. 나를 구속하고 있는 것들을 떠나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어느 것도 새롭게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풍경과 삶의 모습들을 보고 그곳에 담겨 있는 역사와 인간들을 만나고 와서, 자신의 삶의 의미들을 더욱
분명히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길을 떠나고자 한 것이다.
♣ 겨울 기차여행의 맛
겨울이니까 기차 여행을 하기로 했다. 원래 내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전거 여행이다. 자기 힘으로 힘껏 페달을 밝으면서
새로운 풍경을 열어나가고 또 지치면 쉬고 그렇게 그 지역을 꼼꼼히 살펴보고 또 생각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그러나 겨울에
자전거 여행은 참으로 위험하다. 자동차들이 쐥쐥 달리는 도로를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는 겁나는 일이다. 모든 고속도로에 자전거가 달릴
수 있는 길이 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그래서 자전거 여행을 날 따뜻한 봄이나 여름으로 미루어두고 기차여행을 하기로 했다.
기차여행은 무엇보다 안전하기도 하고 여유있게 주위의 풍경들을 감상할 수 있다. 차창밖으로 숨가쁘게 바뀌는 풍경들은 여행객을
지루하지 않게 한다. 끊임없이 바뀌면서도 비슷비슷한 우리네 살림살이들 그리고 산과 강의 모습이 정겹기만 한다. 그리고 같이 기차를
타는 사람들과 여행의 여유로 인해서 쉬이 친해질 수 있다. 조금만 용기를 내서 옆에 앉은 사람과도 이야기를 나누어 보라. 쉽게 만나기
어려웠던 사람도 만날 수 있고, 그 사람이 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얘기를 나누어 볼 수 있다. 얘기를 하면서 먹을 거라도 나누어
먹는다면 금방 친해져 버린다. 서로의 행선지가 달라 누가 먼저 내린다 할지라도 언제 다시 만나리라는 약속은 없지만 그 시간만큼은
사람에 대해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어 좋은 시간이다. 기차여행을 한다면 먼저 주위 사람에게 말을 걸어서 어떤 얘기라도 나누어 보라.
때로는 쉬이 나눌 수 없는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있어 여행은 더욱 풍요로워 질 것이다.
♣ 역사와 문화의 숨결이 살아 있는 여행지
가보고 싶은 곳은 많지만 나는 강원도 산간 마을로 가보고 싶었다. 눈 덮인 산속에 잠시라도 갇혀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오직 자연의 진실하고만 마주하고 싶었다. 눈덮인 산골마을의 순수함으로 나 자신을 다시금 채워오고 싶었다.
그래서 강원도로 갔다.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와 정선의 아우라지 강을 가보고 싶었다. 청령포는 단종 임금의 유배지 였고,
정선의 아우라지는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민요인 정선 아리랑의 발상지가 아닌가. 쉬이 잊혀질 수 없는 역사의 비극과 민족
정서가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 영월과 정선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태백에도 들러오고 싶었다. 혼자 떠나는 조금은 외롭고
쓸쓸한 여행, 그렇기에 자유로운 여행이다. 오직 자연과 역사 그리고 그 속에 하나로 살아온 사람들의 진실을 찾아 나서는 길이다.
♣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남한강을 건너며
집에서 6시 경에 나와서 청량리 역에서 강릉발 열차를 탔다. 증산역에서 정선으로 가는 기차를 중간에 갈아타야 한다. 겨울에 강릉이나 태백으로
가는 열차 좌석을 구하기는 조금 어렵다. 미리 예매를 해두어야 한다.
청량리에서 제천까지밖에 좌석을 확보할 수밖에 없었다. 기차에는 여행객들로 만원이었다. 모두가 조금은 여유있고
들뜬 모습이다. 단체로 여행을 하는 아주머니들이 같은 칸에 많이 탔다. 그분들이 나누는 얘기를 옆에서 듣는 것도 유익했다.
살아가는 얘기들이었다.
강릉으로 가는 기차는 영동․태백선이다. 태백선은 한참을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강은 모두 꽁꽁 얼어있고 주변 산은 눈으로
덮여 있다. 강위로 아침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그 물안개 뒤로 산들이 희뿌옇게 흐려 보인다. 강 밑으로는 물이 흐르고, 아무 것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저 얼음 밑에서도 물고기들은 겨울을 나고 있을 것이다. 기차가 강위로 지나간다. 얼음이 얼어 있는 강 밑이
어질어질해 보인다. 눈덮인 강위로 달리는 기차를 타보라. 기차가 강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기차가 다시금 땅위로
달리면 안도의 마음으로 바뀐다. 그때 약간 느끼는 스릴과 안도감은 자신의 괜한 불안함에 대해 웃음이 나오게 한다. 다시금 마음이 산뜻해져 온다.
♣ 지명 이름 하나에도 역사가 담겨 있음을
증산에서 영월로 가는 기차를 바꿔 타고 영월에 도착했다.
영월역은 한옥으로 만들어졌다. 역사에 충절(忠節)의 고장에
온 것을 환영
한다는 글귀가 써 있다.
영월은 산에서 산으로, 그리고 강으로 둘러 쌓여 있다.
백두대간의 산들에서 흘러나온 맑은 물과 산과 골짜기를 끼고 도는
동강과 서강
이 영월을 감싸고 흐르고 있다.
영월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한 힘 대결을 벌였다고 한다. 고려 때에 이르러 ‘편안히
넘을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영월(寧越:안녕녕, 넘을 월)이란
이름이 붙었으니 삼국의 대결이 자뭇 치열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름 하나
에도 역사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월은 무엇보다
조선 시대 6대 임금인 단종의 유배지로 알려져 있고 곳곳에 단종과
관련된 유적지가 많은 곳이다.
♣ 단종의 슬픔의 깊이만큼 청령포는 아름답다
영월에서 조금 들어가면 청령포다. 청령포는 조선조 6대 임금인 단종의 유배지이다. 나는 청령포로 가는 길 내내 왕이라는
사회적 신분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단종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람들은 왕이라는 극점에서 서인이라는 평민으로
죽임을 당한 그 극적인 삶의 비극성에 주목하지만 한편으로 한 인간으로서 단종을 바라볼 필요도 있는 것이다.
지존(至尊: 존귀함의 끝)에 이른 왕이라 할지라도 그 또한 인간이 아닌가?
♣ 12살 나이에 오른 비운의 왕, 단종
단종은 조선조 4대 임금인 세종의 손자이자 문종의 아들이다. 단종은 태어난지 이틀만에 그 어머니를 여윈 고아가 되어버린다.
그의 비극적 삶의 시작이다. 아버지 문종이 재위 3년만에 죽고나자 단종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 세종은
영민했던 손자인 단종의 나이 어림을 근심하여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등에게 단종을 잘 보살필 것을 부탁한다. 문종도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 등에게 단종을 보필할 것을 유언으로 남긴다. 이른반 왕의 유언을 받드는 대신이라 해서 고명대신이 된
것이다. 그러나 단종의 첫째 작은 아버지로 나중에 세조가 된 수양대군이 한명희 등과 힘을 합쳐 오랑캐를 물리치고 6진을
개척한 장군 김종서와 황보인을 암살한다. 그리고 단종을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여 상왕( 현재 왕의 이전의 살아 있는 왕)으로
앉히고 자신이 왕위에 앉게 된다.
그 이듬해 (1456)년 세종으루부터 단종을 보실필 것을 명 받았던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이
단종의 복위를 계획했으나 김질의 배반으로 사전에 발각되어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들을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이라 한다.
그리고 수양대군 밑에서 한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음)으로 단종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켰던 사람들을 생육신이라 한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노산군( 노산이란 이름을 갖는 단순한 왕손의 한 사람)으로 격하되고
영월 청령포에 유배(서울과 멀리 떨어져 일정 지역에 감금)된다. 그의 나이 15살이었다.
♣ 얼음 언 서강으로 둘러쌓인 청령포
청령포는 한마디로 산과 강위에 떠 있는 섬 같은 곳이다. 동남북 삼면이 서강의 물줄기로 쌓여 있고 서쪽은 66봉의 험한
산줄기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어 유배지로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을 갖춘 곳이다.
청령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청령포를 감싸 안고 흐르는 서강을 건너야 한다. 겨울의 서강은 참으로 쓸쓸했다.
물도 많이 줄고 강은 꽁꽁 얼었다. 사람을 건네주던 나룻배는 강이 얼어붙어 운항을 중단하고 한쪽에 붙들어 매여 있다.
배가 얼음 위에 얹혀 있는 것이다.
관리하는 분에게 물으니 얼음 위로 걸어서 건너야 한다고 한다. 조금 불안했지만 구명보트로 길을 표시해 놓은 곳을
밟아 길을 건넜다. 눈으로 보기보다 긴 거리였다. 얼음 밑으로는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쩍쩍’거리며 났다. 마음이 불안해졌지만 설마하는 마음으로 급히 건넜다.
청령포는 소나무로 둘러쌓여 있다. 키가 훌쩍 큰 노송들이 단종이 기거했던 건물을 애워싸고 있다.
건물은 두 채로 구성되어
있다. 한 채는 단종이 2개월간 있었던 기와 건물이고 한 채는 단종을 시중들었던 시녀와 하인이 살았던 초가 건물이다.
인상적인 것은 단종이 선비를 만나고 있을 때 포졸이 그것을 지키고 있는 모형물이 만들어져 있어 단종의 유배생활을 좀더 실감나게 느껴
볼 수 있다. 실제로 그곳에는 후대 왕인 영조 때 세워진 금표비( 왕이 기거했던 곳으로 백성의 출입을 금하는 표지를 새긴 비)를 보면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인 왕이 계시던 곳이므로 뭇 백성들은 출입을 금한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것으로 보아 단종은 거리 이동에 있
어서도 엄격한 제한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백성들의 충절과 따스한 인정
조선시대가 신분의 구별에 따라 엄격한 차별을 받았던 사회라는 것은 단종의 시중을 들었던 시녀와 하인이 있었던 건물은
초가집이라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단종을 모셨던 시녀들은 단종이 죽임을 당하자 동강의 절벽에서
떨어져 죽음으로써 그 슬픔을 나타냈다고 한다. 초가집에는 침모( 바느질을 하는 시녀)가 옷을 만들고 있는 모형이 있다.
♣ 역사의 진실을 사라지지 않는다
건물을 나서면 관음송(觀音松)이라는 나이가
600년이 넘은 소나무가 있다. 나이가 600년이니
살아 있는 것으로는 유일하게 단종의 유배와 죽음을
지켜본 존재이다. 당시 처절하였던 단종의 생활을
지켜보았으니 관(觀)이요, 하염없이 통곡하던 소리를
들었으니 음(音)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아마 후대
사람들이 부쳤을 것이다. 15살 이라는 어린 나이에
자신의 숙부에 의해 죽은 어린 단종의 억울함을 기억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동정과 연민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리라.
청령포 서쪽 66봉에 높이 80미터가 되는 낭떠러지가 있는데, 이를 노산대라 한다. 단종이 임금의 신분에서 노산군(君 :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의 아들들에 붙여진 칭호)으로 격하되어 불린 이름을 딴 것이다. 노산대에서 절벽 밑을 보면 아득하고 현기증이 느껴진다. 어찌나 아찔하든지 발길이 쉬이 옮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만큼 절벽과 강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단종의 죽음은 더욱 사람들의 마음에 인상깊게 남는가 보다.
단종은 이 노산대에 올라 서울쪽을 바라보며 두고온 왕비 정순 왕후를 그리워하며 망향탑을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 단종의 마음에 왕비에 대한 그리움만 있었겠는가? 왕위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노리던 수양대군을 두려워하여 잠못이루던 어린아이가 이제 첩첩 산중에 유배되었으니 언제 자신이 죽게될지 모를 그 불안함,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그 절망적인 운명에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어린 단종이 느꼈던 죽음의 공포에 비하면 그 아득한 절벽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절벽의 끝에 돌탑을 쌓을 수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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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순왕후와 동정곡(同情哭)
돌탑을 하나하나 쌓으며 두려움을 이기고 다시금 정순왕후를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을 것이다. 그런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정순왕후는 궁에서 서울의 교외로 내쫒겨 초막에서 동냥과 염색업( 옷감에 물을 들이는 일)으로 한 많은 생애를 마친다.
그녀의 통곡이 들려오면 마을의 여인들도 함께 땅을 치며 가슴을 치며 동정곡(同情哭 : 같이 슬퍼하여 소리를 내어 움)을
하였다고 한다. 핏빛보다 더 진한 자줏빛 물감을 들이며 가난한 한 포기 민초로, 여인내로 사라져 갔다.
단종은 청령포에 홍수가 나자 다시 영월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겨 지내게 된다. 그러나 다섯째 숙부인 금성대군이 군사를 모아서 단종 복위 음모를 꾸미자 세조는 단종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한다. 서기 1457년 10월 그의 나이 17살 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혈육의 정보다 더 무서운 권력의 비정함을 목격하게 된다. 집권 과정의 정당성이 약했던 세조는 단종이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단종을 죽이게 된다. 백성이 자신의 대표를 뽑지 못하고 국가권력의 주인이 백성이라는 주권재민( 권력은 백성에게서 나옴)의 민주주의 원칙이 확립되지 못했던 왕조 봉건 사회의 모순과 비정함, 그리고 반민주성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 천만리 머나먼 길 고운님 여의업고
어린 단종의 유배와 사형을 집행했던 금부도사는 왕방연이었다. 그는 문종 때부터 벼슬을 하였다. 세조의 명을 받아 단종에게 먹일 사약을
가지고 왔던 그날 밤, 어명을 받들고 돌아가는 길에 청령포를 마주보는 강 언덕에서 비통한 자신의 심경을 아래와 같이 읊었다.
< 장릉에 있는 단종의 역사관에 있는 모형>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업고
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이 시비는 청령포 앞에 세워져 있다. 자신이 지켰어야 할 선대 왕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고, 세조의 명을 받아 단종의 목숨을
끊어야 했던 신하로서 자신이 얼마나 원망스러웠겠는가? 체제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나약함을 꾸짖을 수도 있겠으나,
그 시조 속에 담겨 있는 비통함을 후세 사람들이 되새길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이 시조는 1617년 병조참의라는 벼슬을
하고 있던 김지남이 영월을 순시하던 중 아이들이 이 시조를 노랫가락으로 부르는 것을 듣고 한시를 지어 후세에 전했다고 한다.
아이들까지 이시조를 노래로 불렀다고 하니 당시 민심이 어디에 가 있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소쩍새의 피울음으로 남은 단종의 시
단종이 죽임을 당한 관풍헌은 예 영월의 동헌(관청)이었다. 동헌 오른쪽에는 ‘자규루(子規樓)’가 있다. 원래는 매죽루(梅竹樓)라고
하였는데 어린 단종이 피를 토하며 운다는 자규(소쩍새)의 한을 담은 시를 읊었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누각이 있다. 단종이 지은
시 2 수가 ‘장릉( 단종의 무덤)’지라는 책에 전한다.
자규시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떠난 뒤로
외로운 몸 짝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 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두견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지새는 달빛만 희고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린가?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지?
어찌하여 수심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았는가?
♣ 동강에 흐른 단종의 시신을 거둔 백성의 충심
단종의 시신은 영월을 감싸 흐르는 동강에 버려졌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어린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이가 없었다. 역적의 시신을 거두는 이는 3족을 멸한다는 세조의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영월의 호장
( 백성들의 집을 몇가구씩 묶어 이를 책임지는 대표라 생각됨)이었던 엄홍도가 한밤중에 몰래 시신을
거두어 산속으로 도망가다가 노루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 단종을 묻었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 단종의 무덤이 있는 장릉이다. 그러나 단종의 무덤은 중종 11년( 1517) 임금의 명으로
그의 무덤을 찾기 전까지 60여년 동안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숙종 때인 1698년 단종이 죽은지
241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왕의 대접을 받고 장릉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 얼음 언 겨울강을 건너, 길은 길로 이어지고
청령포를 뒤로 하고 단종이 묻힌 장릉으로
가려면 얼음 언 서강을 건너야 한다. 날씨도 많이 풀리고 시간도 많이
지나 얼음이 언 강을 건넌다는 것에 마음이 꽤 불편하였다. 몇 시간 전에 건너 올 때도 얼음 밑으로 물 흐르는 소리와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났는데. 그러나 어쩔 것인가. 얼음이 얼어 배는 올 수 없고 그렇다고 그곳에 머물 수도 없는 것이
여행길이 아닌가? 가야할 길이 강 건너 저렇게 펼쳐져 있는데……
마음을 단단히 먹고 얼음 위로 발걸음 옮기는데 불안하기만 하다. 물소리는 건너올 때보다 더 큰 것 같고 얼음 갈라지는
소리도 예사롭지 않다. 발걸음 옮길 때마다 ‘쩍쩍’ 소리도 크다. 다시 돌아가려고 뒤를 돌아보니 돌아가거나 건너거나 거리는
매 한가지다. 그렇다면 건널 수밖에. 강 건너편에서도 여행객들이 건너오지 마라고 한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나는 강 가운데
들어서 있는데…… 그 심정을 누가 알랴. 큰 위험을 몸으로 느끼면서 그 시간을 지나쳐야 한다는 것을.
다행이 얼음이 갈라지지는 않았다. 무사히 건너와서 안도의 숨을 잠시 내쉬고 나룻배를 관리하는 사무소에 들렀다.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나는데 위험하지 않냐고따지듯 물었다. 관리인은 원래 그렇단다. 밑으로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도 깨지지는
않는단다. 못 믿어웠지만 그래도 위험하다는 말만은 남기고 싶었다. 다음에 올 여행객들에게 관리소에서 더 신경을 써주길 바라면서.
나는 다시금 여행길을 재촉할 수밖에.
영월은 참 둘러볼 곳이 많다. 동강의 내린천, 민화 박물관, 곤충 박물관, 국제 현대미술관, 책박물관, 조선 후기 몰락 양반 출신으로
방랑길에 올라 양반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했던 김삿갓의 묘와 골짜기 등이다. 그곳을 다 둘러볼 수는 없었고 교통편이 수월했던
책박물관을 둘러보고자 다시 영월읍내로 들어왔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어디서나 변함없는 매뉴가 김치찌개다.
그 맛이 일품이다. 반찬도 넉넉하고 밥도 푸짐하다. 누구든 붙잡고 길을 물어봐도 친절하고 자세하게 알려준다. 소박하고 인심히
후한 사람들이다.
길은 길로 이어지고 나는 그 길에 서 있다. 그 길에서 역사를 만나고 사람을 만나고 자연을 만날 것이다. 나의 발걸음은
책박물관으로 향해 있었다. 영월이라는 깊은 골짜기에 무슨 책박물관일까? 책을 사랑하는 한 민간인이 세운 박물관이라고 한다.
들꽃누리 친구들도 나와 함께 겨울 여행 길에 동행하는 것이 어떨까? 그렇다면 혼자 떠나 조금은 쓸쓸한 겨울 여행길,
자유로운 여행길이어서 좋지만 그래도 외로움은 조금 덜 수 있어 좋으리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