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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수호,독립운동가 스크랩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선생
李 觀 熙 추천 0 조회 42 07.06.22 10: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동녕' 프로필 
이름 : 
이동녕 (李東寧) 검색인기도

출생 : 
1869년 2월 17일

사망 : 
1940년 3월 13일

출신지 : 
충청남도 천안

직업 : 
독립운동가

경력 : 
1935년 한국국민당 조직, 당수
1929년 의정원 의장, 임시정부 주석

수상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추서

이동녕[李東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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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869(고종 6) 충남 천안~1940. 3. 13.

독립운동가.
[개요]

이동녕
대한제국기에 민권운동·자강운동에 앞장섰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임시정부 지원의 우익단체를 조직해 활동했다. 본관은 연안(延安). 이명은 이량(李亮). 자는 봉소(鳳所), 호는 석오(石吾).


[민권·개화 운동]

아버지는 영해군수 병옥(炳)이고, 어머니는 광주안씨이다. 어려서 향리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고, 10세 때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에 사는 할아버지 이석구(李錫九) 문하에서 수학했다. 1885년 상경하여 서울 봉익동(鳳翼洞)에 거처를 정했고, 곧 아버지를 따라 경상북도 영해읍으로 갔다. 1892년 응제진사시에 합격했다. 1893년 아버지를 따라 원산으로 가서 육영사업에 조력했다.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해 간사원으로 활약하며 개화민권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국가의 비정(秕政)을 규탄, 성토하며 이권침탈에 반대하고 자체개발을 강조했다. 다음해 독립협회 회원들이 다수 가담하면서 각계각층을 포섭하여 민권민생투쟁을 전개했던 만민공동회 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어 부국강병을 위한 각종 상소문을 제작, 주달(奏達)하다가 이승만(李承晩) 등과 옥고를 치렀다. 이승만과는 이때 이후 친숙한 동지가 되었다. 1898년 이종일(李鍾一)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고, 이종일의 권유로 〈제국신문〉의 비상임논객으로 〈민족자강(民族自强)의 방도(方途)〉·〈위국(爲國)의 방도〉 등 수십 편의 논설을 기고했다.


[신민회의 창설과 운영]

1903년 이상재(李商在)·전덕기(全德基) 등과 손잡고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운동을 전개했다. 상동교회에 하와이에 거주하는 강천명(姜天命)이 보낸 5원을 기초로 청년학원을 설립하여 청년을 육성했으며,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총무로서 직접 운영했다. 당시 상동교회·연동교회·묘동교회·숭동교회 등은 모두 양반교회인 동시에 외국선교사의 도움을 받지 않았던 자립교회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방적으로 체결되자 동지들과 손잡고 결사대를 조직한 뒤 매국노의 응징과 일제의 철수를 주장하는 한편, 그들의 야만적인 침략행위를 규탄했다. 다음해 북간도 용정(龍井)에 망명하여 이상설(李相卨) 등과 최초의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 교포교육에 전념했다. 1907년 이상설이 이회영(李會榮)의 건의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특사로 파견되어 가자 그도 여준(呂準) 등에게 이 학교를 맡기고 귀국했다. 1907년 4월 양기탁·이회영·이동휘·이갑·안창호·전덕기·김구·이종일 등 20여 명과 서울에서 비밀항일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했다. 신민회가 결성되기 1년 전에 이회영·이동녕 등은 "지금 국내에서 일고 있는 각종 항일투쟁을 볼 때 곧 그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니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해서 보다 원대한 계획하에 장기적으로 독립운동를 꾀해야 승산이 있겠다"고 해외 독립군기지 건설을 통한 무장독립전쟁론을 폈고, 이에 호응 참여하는 인사가 많았다. 그는 총서기로서 신민회의 실질적인 운영과 정책의 수립과 방략을 실시하는 일을 맡았다.


[동삼성에서의 항일투쟁]

1910년 식민지가 되자 원산에 계신 부모님께 하직서를 띄우고 가산을 정리, 그해 겨울 류허 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로 망명했다. 동지들과 교민의 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다. 이는 뒤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확대 개편되었다. 이를 토대로 독립군 양성에 힘쓰면서 뒷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성장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했다. 신흥강습소는 그곳 토착민의 냉대로 곤경을 겪었으나 이회영이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교섭하여 빈 창고를 빌려 개설할 수 있었다. 그는 신흥강습소장으로 군사교관에다 사환까지 겸하면서 유능한 청년을 육성하여 1920년 8월 폐교될 때까지 3,500명의 인재를 육성, 실전에 배출했다. 경학사 이후 부민단(扶民團)·권업단(勸業團)을 잇달아 조직하고, 1915년 이상설 등과 같이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 최초의 민주정부를 조직했다. 한편 〈대동신문 大東新聞〉·〈해조신문 海潮新聞〉을 발행했으며 대종교도가 되었다. 1918년말 무오독립선언서를 선포한 39명 중의 한 사람이다.


시베리아와 중국 동북방면에서 독립투쟁을 전개하던 그는 국내에서의 3·1운동 소식을 듣고 즉시 비교적 자유롭게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상하이[上海]로 갔다. 신규식이 마련한 상하이 프랑스조계 애인리(愛仁里) 숙소에서 그는 "무엇보다도 3·1혁명 이후에 우리가 할 일은 세계혁명 이후에 상식적으로 나타나는 임시정부의 수립이다. 이 일이 선행되어야 빼앗긴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직접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프랑스조계 내 보창로(寶昌路) 329호에 국립임시사무소를 설치·운영했다. 정부를 수립함에 앞서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을 설립해 4월 10~11일 김신부로(金神父路)의 회의실에서 10개조의 임시헌장을 이시영·조소앙 등과 서로 연구 검토해서 제정하고, 4월 13일 이를 내외에 선포했다. 그는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체제의 순수 민간정부로 수립되었고 국무원·의정원·사법부로 3권을 분립했다. 이동녕은 국무총리에 취임해서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운영했다. 당시 국내외는 상해임시정부 외에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와 서울의 한성임시정부가 있었고, 기호의 대한민간정부, 평양의 신한민국정부·조선민국임시정부 등이 설립될 단계에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할 임시정부는 하나만 있어야 되겠다고 보고 5개월에 걸쳐 상해·노령·한성의 임시정부대표와 타협 끝에 제1차 개헌을 통하여 단일통합정부를 구성한 후 내무총장으로 단일통합정부의 실질적인 운영을 전담했다.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가 부재하거나 알력으로 국무가 원만히 처리되지 않았으므로 그가 국정을 주관하다시피 했다. 이어 대통령직무를 대행했으며 국무령, 국무위원회의 주석 등으로 임정의 위기를 구했으며, 내정교통과 임정의 광복정책을 집행해나갔다. 전후 임시의정원 의장을 3번 역임했고, 행정부의 수반 등 요직을 두루 거쳐 국정을 처리해나갔다. 4차의 개헌을 주도한 그는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이념하에 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을 김구 등과 조직, 이사장이 되었다. 윤봉길 의사의 투탄의거도 김구와 상의, 결행했다. 1935년 한국국민당 당수로 대한광복진선(大韓光復陣線)을 결성했다. 1940년 3월 13일 치장[江]에서 죽었다.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었고, 효창원(孝昌園)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李炫熙 글


  • 민권·개화 운동
  • 신민회의 창설과 운영
  • 동삼성에서의 항일투쟁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

멀티미디어

이동녕

 

 


이동녕(李東寧,鳳所 ,石吾)
1869. 2. 1~1940. 3. 1
충남 천원
임시정부
대통령장(62)
충남 천원(天原) 사람이다
1885년 17세 때 일가가 상경하여 서울 종로 봉익동(鳳翼洞)에 정착하였다. 1892년 24세 때 국가시험인 응제진사(應製進士) 시험에 합격하였다. 25세 때(1893) 아버지를 따라 원산(元山)으로 가 육영사업(광명학교로 개칭)에 조력하였다. 28세 때(1896) 독립협회에 가담, 개화민권의 기수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다음해 독립협회 주최로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官民共同會)가 열렸을 때 나라의 잘못된 정치를 탄핵하고 임금께 상소하는 등 국민운동 일선에 나섰다. 결국 이로 인하여 이 준(李儁)·이승만(李承晩)과 함께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30세 때(1898) 7개월간의 옥중 생활을 끝내고 출옥, 이후 더욱 민권운동과 개화운동에 앞장서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종일(李鍾一)이 창간 경영하는 제국신문에 사설을 집필, 이종일의 가르침을 받고 본격적인 민족의식과 그 사상정립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수련하였다.
34세 때(1902) 이상재(李商在)·전덕기(全德基) 목사 등 종교인과 손잡고 YMCA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 그가 36세 때 한일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그는 서울 상동(尙洞)교회에서 전덕기·양기탁(梁起鐸)·신채호·조성환(曺成煥) 등과 같이 독립운동 단체인 청년회(靑年會)를 조직한 뒤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김 구(金九)·이회영(李會榮) 등 지사와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다음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는 동지들과 결사대(決死隊)를 조직하고 이 조약이 체결된 덕수궁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여 조약의 무효와 파기를 선언하다가 체포되어 2개월간 투옥 생활을 감수하였다.
풀려 나온 그는, 1906년 만주 북간도 용정촌(龍井村)으로 망명, 이상설(李相卨)·여 준(呂準) 등과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사립학교인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 한국 동포와 그 2세의 민족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함으로써 뒷날 독립운동의 기수들을 길러 냈다.
이때 동지 이상설(李相卨)이 2명의 특사와 함께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가자 한때 귀국하여 안창호·전덕기·양기탁·이동휘(李東輝)·이 갑(李甲)·유동열(柳東說) 등 동지들을 모아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그는 안창호·이회영과 협력하고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 공립협회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조직과 발행을 지원하였다. 한편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를 설립함에 있어서도 크게 조력하였고, 상동학교(尙洞學校)의 교사로 재직한 일도 있었다.
1910년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뒤 그는 만주 서간도 요녕성(遼寧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망명하여 이석영(李石榮)·이철영(李哲榮)·이회영·이시영(李始榮)형제 및 이상룡(李相龍) 등과 함께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설립, 운영하고 교포들의 신분보장과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다. 이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학교에서는 군사교육을 통해 독립정신을 고취, 훗일 독립군(獨立軍)의 초석이 되었음은 물론이었다.
그후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겨가 대종교(大倧敎)에 입교 활동하는 등 광복운동에 전념하였다.
또한 그는 이상설의 알선으로 러시아의 시베리아 총독 보스타빈이 약속한 한국군관학교 설립을 추진하다가 발각, 3개월간 투옥 생활로 고초를 겪었다.
1915년 그의 나이 47세 때 이상설·이동휘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의 사업기관으로 권업회(勸業會)를 조직, 대동신문(大東新聞)과 해조신문(海朝新聞)을 발행 보급하였다. 그가 49세 되던 1917년에는 노령 니콜라에프스크에서 나 철(羅喆)이 창시한 대종교 포교 활동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독립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1918년 11월에는 길림성(吉林省)에서 대종교 김교헌(金敎獻) 외에 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김좌진(金佐鎭)·여 준 등과 독립선언서를 내외에 선포하였다.
1919년 2월 블라디보스톡에서 상해(上海)로 건너가 정부조직을 모색하였다. 마침내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4월 10일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동년 4월 13일 동지들과 임정수립을 내외에 선포하고 이승만이 부임치 않자 국무총리로 취임, 임정의 터줏대감이 되었다. 그해 9월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자 그는 내무총장이 되었다.
1920년 이동휘가 사임하자 그는 국무총리 대리를 맡아 임정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국민대표회의 소집 등 임정 불신이 표면에 나타나자 그는 안창호·여운형·조소앙·이시영·차이석(車利錫)·홍 진(洪震)·노백린(盧伯麟)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 대동단결을 호소하였다.
1924년 그는 국무총리로 정식 취임하였고 군무총장도 겸임하였으며, 이승만의 장기 궐석으로 대통령 직권을 대행하였다. 이때 조선총독이 한국인을 시켜 그에게 귀화를 권유하였으나 즉석에서 일축, 이로 인해 그 부친이 투옥된 일도 있었다. 1925년에 두 번째로 의정원의장(11대)이 되었고, 1926년에는 국무령이 되었다. 이때 58세인 그는 법무총장도 겸임 2차 개헌에 따른 국무령 지도체제를 발전시켜 나갔다. 다음해 그는 임정의 주석(主席)이 되어 약화된 임정을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1928년에는 김 구 등과 같이 한국독립당을 조직, 그 이사장에 추대되었으며, 당 기관지 한보(韓報)·한성(韓聲)을 발행하였다.
1929년 10월 세 번째로 의정원의장(13대)이 되어 임정의 존폐 위기를 겨우 극복하고, 두 번째의 임정 주석(1930∼1932)이 됨으로써 중책을 짊어졌다.
1932년에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김 구·이유필 등과 지도, 쾌거를 이루었다. 이로 인해 민필호 등의 주선에 따라 임정 요인과 같이 절강성(浙江省) 가흥(嘉興) 수륜사창(秀綸紗廠)으로 피신하였다.
1935년에 세 번째로 임정의 주석(1935∼1939)이 되었으며, 이때 양우조(楊宇朝)·엄항섭(嚴恒燮)·이시영·조성환·차이석·송병조(宋秉祚)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로 추대되었다. 1937년에는 한국국민당 대표로 대한광복진선(大韓光復陣線)을 구축하고 그 진로를 모색하였다.
1939년 그는 임정의 네 번째 주석(1939∼1940)이 됨으로써 김 구와 합심하여 전시 내각을 구성, 서안(西安)에 대한군사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후 반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어 조국광복의 일념에 투쟁하던 그는 1940년 3월 13일 72세 때 사천성기강(四川省 江)에서 과로로 영면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광복 후인 1948년 9월 22일 김 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註·조선통치사료(한국사료연구소) 471 488면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300면
사상정세시찰보고집 238면
사상정세시찰보고집(기2) 442면
조선민족운동연감 2 3·4·5·8 10·14·65·122·126 136·167·188·189·198·200면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75·91·92·186·254·256·333·344·347·348·349·353 361·366·369 370·371·372·427·442·451·467·470·478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18면
고등경찰요사 15·87·88·89·90·91·92·95·96 105 106면
·무장독립운동비사 24·47·49·123·194면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2·94면
기려수필 116 117·243·247·254면
·벽옹김창숙일대기 109 162 191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3 4·5·7 8·19·31·32·33·34·40·49·51·57·58·64 100·101·105·106 108·109 110 121·143·150·159·177·188 189·191 193 195 227 264 267 274 296 309 316 317 408·419·427·431·436 440·448·452·462·471·477 478·480·493·494·499·501 502 508 511 530 531 532 547 559 561 595 643 644 670 705 816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881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333·617·709·774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242 493 522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457면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24·30·34 36 37 39 41 63·66 85 117 118·143·144 148 149 150·154·209·211·220·225·290·294·299 327·330·339·343·349 352·353·358·359·360 362 376 407·421·502 503 504 509 516 518 519 526·527 528 535 540 542 569·571·574·628·631·634·637 645·667·676·687·712·742·743 744 746 750 751 760·761 766 769 772 777 778 790 793 797 799 801 826 886면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3·39·42·44·74·116·117·219·220·221·222·223·226·237·239·240·241·242·243·249·401·573·621·622·624·629·633·706·708·709·710·725·729·738·739·743·747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217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688·691·694·734·770·800·860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53·61·62·72·100·116·139·157·159·162·171·199·219·220·237·238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89·129·162·166·240·662·692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147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714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349·350·361·754·783·784·786·787·864·927·928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330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323·324·655·659·665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78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43·55·58·82·137·138·139·142·144·148·152·196·203·205·241·247·249·255·277·623·696·904·905·919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550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338·1466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428·810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2권 232·252·254·395·401면


이동녕 [1869∼1940] 대통령장 서훈년도: 1962년
○ 1906 만주 용정에 서선의숙 설립
○ 1911 경학사, 신흥무관학교 설립
○ 1919-1929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3차례 역임
○ 1930 한국독립당 창당
○ 1927-1940 임시정부 주석 4차례 역임

여러 학생들이여 우리의 용기가 좌절하였는가. 아니다. 우리의 정열이 식었는가. 아니다. 우리 민족의 유일한 요구인 독립에 대한 결심은 더욱 견고할 뿐입니다. 오늘에 우리는 우리의 의사를 한번 더 분명히 발표하기 위하여 다시 두 손을 높이 듭시다. 적의 간담이 서늘하도록 천지가 울리는 만세를 합창합시다. 세계의 의혹을 풀기 위하여 삼천리 강산에 무수한 태극기를 높이 달아야 하겠습니다.

- 임정의 내무총장으로 선생이 남녀학생에게 발포한 포고문 중에서 (1919. 10. 15) -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선생

                   (1869~1940. 3. 13)


1. 선정배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81주년을 맞아 임정수반인 주석을


   역임한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선정



2. 주요 공적


   ○ 1906      만주 용정에 서선의숙 설립

   

   ○ 1911      경학사, 신흥무관학교 설립


   ○ 1919-1929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3차례 역임

 

   ○ 1930      한국독립당 창당


   ○ 1927-1940 임시정부 주석 4차례 역임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선생

                     (1869~1940. 3. 13)


여러 학생들이여 우리의 용기가 좌절하였는가. 아니다. 우리의 정열이

식었는가. 아니다. 우리 민족의 유일한 요구인 독립에 대한 결심은

더욱 견고할 뿐입니다. 오늘에 우리는 우리의 의사를 한번 더 분명히

발표하기 위하여 다시 두 손을 높이 듭시다. 적의 간담이 서늘하도록

천지가 울리는 만세를 합창합시다. 세계의 의혹을 풀기 위하여 삼천리

강산에 무수한 태극기를 높이 달아야 하겠습니다.


- 임정의 내무총장으로 선생이 남녀학생에게 발포한 포고문 중에서

   (1919. 10. 15) -


이동녕 선생하면 임시정부를 떠올리게 되고, 또 선생 없는 임정을 생각

하기 어려울 만큼 선생은 임정의 중심 인물이자 영도자였다. 그러나

선생의 민족운동이 단지 임정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20대에

민족운동에 투신한 이후 선생은 평생을 오직 조국  근대화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계몽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였다.


한말 독립협회의 근대화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시작된 선생의 민족운동은

{제국신문}을 통한 언론 계몽운동, 상동청년학원과 서전서숙을 통한

교육 계몽운동, 신민회를 통한 국권회복운동으로 표출되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경학사․신흥무관학교 등의 설립을 통한 독립군 기지 개척,

연해주 일대에서 대한광복군정부의 결성을 통한 국외의 독립운동 기반

구축 등에 힘썼다.


이후 선생은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으로서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

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이 된 이래 1940년 71세의 나이로 기강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내무총장․국무총리․대통령 대리․주석 등을

역임하면서, 항상 임정의 최고 어른이자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리하여 백범 김구는 "선생은 재덕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을 일생의 미덕으로 삼았다"고 선생의을 평가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1869년 충절의 고장인 충남 천안시 목천면 동리에서 이병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석오, 자는 봉소(鳳所),

이명으로는 이량(李亮)  등이 있다. 전통 명문가인 연안 이씨 가문,

그리고 부친이 경북 의성군수와 영해군수를 역임한 양반가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다. 특히 10세 때부터는 충북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조부 이석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

는데, 뛰어난 문재(文才)를 보였다고 한다.


그 뒤 선생은 1885년 서울 봉익동으로 이사하였으나, 곧 부친을 따라

영해로 갔다.여기에서 선생은 군수로 집무하던 부친을 도와 선정을

베풀어 '작은 군수'로까지  불렸다고 한다. 그리고 1892년에는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원산으로 가서 부친을 도와 육영사업에

힘썼다. 

 

양반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고, 진사시험에도

합격한 선비였으나 선생은 전통 유학 사상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을 경험하면서 선생은 근대적 민족의식을

새롭게 형성해 갔던 것이다. 선생이 부친을 도와 원산에서 광성학교를

세워 교육 계몽운동을 펼친 것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아울러

선생은 1896년 7월 서재필․윤치호․이상재 등이 조직한 독립협회 에도

가담하여 간사원으로 활약하며 근대민권운동과 국권수호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선생은 독립협회 동지들과 함께 봉건정부의 실정을 규탄 성토하고,

외국으로 넘어가는 각종 이권의 양여를 반대하였다. 그리고 민중들과

함께 만민공동회운동에 참여하여  개화․개혁운동을 전개하다가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출옥 후 선생은 옥파 이종일을 예방하고 그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뒤에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던 이종일은 이때

{제국신문}을 창간하여 민권운동과 개화 자강운동에 힘쓰고 있었다.

선생은 이종일의 권유로 {제국신문}의 논설 위원이 되어 수십편의 논설을

통해 자신이 갖고 있던 근대화론을 마음껏 펼쳤다. 그 내용은 "각종

이권이 외국에 양여되고 정부의 고위관리가 무능부패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자강을 도모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저 자강을 급히 서둘러 도모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는 강대국에게 침략당할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그것을 면하려면 먼저 세계사발전에 맞추어 개화를 힘써 실시해야 한다"

는 개화 자강론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1900년대에 들어와 선생은 이상재․전덕기 목사 등과 함께 YMCA운동을

전개하면서 기독교의 평등․평화․박애주의를 터득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의 인도로 기독교 감리교 신자되었다.

그리고 상동교회에 청년학원을 설립하여  근대식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그 학생들을 중심으로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청년들을 민족운동의 역군

으로 육성하여 갔다.


그러던 중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선생은 대한문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며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결사대를 조직

하여 매국노에 대한 응징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개월 동안의

옥고를 치루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이후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한 선생은

이상설과 함께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며 국권회복운동

의 역량을 키워갔다. 그러나 1907년 이상설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광무황제의 특사로 파견되어 가자 선생은 여준 등에게 학교를 맡기고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선생은 양기탁․이회영․이동휘․안창호․전덕기등 20여명의

창건위원과 함께 비밀결사로 신민회를 결성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

하여 갔다. 선생은 총서기로서 신민회의 실질적인 운영을 맡았고, 또한

국외 독립군 기지 개척론을 주창하였다. 이는 당시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교육이나 언론을 통한 계몽운동의 방식으로는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무장투쟁으로 전환을 제기한 것이었다.


선생의 이러한 생각은 신민회의 독립전쟁론의 원천이 되었고, 경술국치

직후 실제로 실현되었다. 즉 선생과 이회영 일가 등 신민회 동지들은

1910년 11월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로 망명하여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세워 독립군 기지를 개척한 것이다. 이들은 황무지를 피와 땀으로 개척

하는 한편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으며 앞으로 다가올 독립전쟁을 준비

하였다. 선생이 초대 소장을 맡았던 신흥강습소는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모체로 이곳에서 배출된 독립군들이 후일 청산리대첩등 항일무장투쟁의

주역이 되었다.


이렇듯 독립전쟁을 준비하던 선생은 1914년 이상설 등과 함께 노령

블라디보스톡에서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만주․노령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역량을 결집하여 일제와 일대 결전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었다. 특히 대한광복군정부는 '제2의  러일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만주․노령 지역을 3개 군구로 나누어 통제권을 행사하여 갔다. 그리고

국경지대인 북만주 왕청현 나자구의 한인촌에 광복군 사관양성을 위한

나자구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의 양성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한  광복군정부는 모체가 된 권업회와 함께 러시아의 전시체제

돌입에 따라 탄압을 받아 뜻대로 활동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러시아와 일제가 동맹국이 됨으로써 대한광복군정부의

독립전쟁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일제는 공동 방위

체제를 확립하면서 자국 내에서 한인의 정치, 사회활동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이에 따라 대한광복군 정부의 모체가 된 권업회는 해산되고 {권업신문}도

폐간되었다. 뿐만 아니라 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의 지도자들은 물론

연해주 지역의 대다수 한인들까지 가차없이 투옥되고 추방당했다. 때문에

제1차대전이 종전되기까지 연해주와 만주 일대에서의 독립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선생은 좌절하지 않았다. 대종교에 입교하여

이를 중심으로 민족의식을 고양하면서 연해주와 만주에 흩어진 항일

민족역량을 한데 모으며 결전의 시기에 대비해 갔다. 길림성에서 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조소앙․신규식 등 30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상해로 건너가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을 맡아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통합 임시

정부의 내무총장에 이어 국무총리와 대통령 대리․국무령․주석 등을

역임하면서 20여 년 동안 임시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특히 선생은 통합

임정의 내무총장으로 [남여학생에게]․[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

[천주교동포여]․[재내외 일반 국민에게] 등 여러 차례의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민족 대중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나아가 1921년 1월 국무총리 이동휘, 5월 노동국 총판 안창호가 연달아

사임하자  선생은 국무총리 대리로서 임정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여 갔다. 그리고 국민대표회의 소집 제의 등 임정

불신이 표면화되자 1922년 선생은 안창호․김구․조소앙․홍진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였다. 이를 통해 선생은 독립운동세력의 대동

단결을 위한 국민대표회의의 조속한 개최를 추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23년 초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는 임정에 대한 개조론과

창조론이 제기되고, 심지어 창조파 회의에서는 임정을 부정하고 새로이

'한'정부를 수립하는 일까지 생겼다. 이에 선생은 김구와 함께 국민

대표회의의 해산을 명령하고, 이들을 상해에서 추방함 으로써 임정의

정통성과 법통성을 지켜 나갔다.


이후 1924년에 들어와 선생은 국무총리로 정식 취임하였고, 군무총장도

겸임하였으며, 이승만의 장기 궐석에 따라 대통령의 직권을 대리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임정의 최고 영도자로서 선생은 눈물까지 흘리며 약화

되어 가는 임정의 재건과 독립운동세력의 대동단결을 호소하였다고 하니,

선생의 애국충정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1925년 국무령제 개헌 직후 선생은 잠시 내각 수반인 국무령을 맡기도

하였고, 김구를 지원하여 그 내각을 성립시켰다. 그것은 {백범일지}에

"금일의 오인(吾人)을 있게 한 이면에는 이동녕의 지원이 있어 가능

하였다"고 언급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1927년 국무위원회제 개헌

이후에도 선생은 국무위원회 주석 등을 역임하면서 임정의 권위를 신장

하고, 영향력을 제고하는데 노력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와 선생은 김구․안창호 등과 함께 임정의 정치적

기반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이사장을 맡아 이를 지도하여 갔다.

1920년대 민족유일당운동이 좌절된 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세력

들은 운동 방향을 새롭게 모색하였다. 즉 1930년 민족주의세력들은

"종래의 지방적 파벌투쟁을 청산하여 민족주의운동전선을 통일하고

임시정부의 기초적 정당을 조직"하고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해 민족

운동의 활성화와 임시 정부의 여당적인 성격을 지닌 정당을 조직하고자

하였고, 그 결과물이 바로 한국독립당의 창당이었다.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인물은 선생을 비롯한 김구 등 임시정부의 핵심

세력과 흥사단의 안창호였다.


따라서 선생을 비롯한 한국독립당 창당 세력은 한말 신민회의 활동을

계승하고, 1910년대 상해를 중심으로 조직된 동제사와 신한청년당을

통해 성장한 청장년층과 3․1 운동에 참가한 뒤 국외로 망명한 인물들,

그리고 임시정부의 수립과정에 기여했고, 나아가 1920년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에 참여한 인물들이었다.


한국독립당은 앞선 시기의 독립운동단체와는 달리 '임시정부의 여당'

으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정강․정책을 제시하였다. 선생을 비롯한

안창호․이유필․김두봉․안공근․조완구․조소앙 등 기초위원 7명이

만든 한국독립당의 당강은 다음과 같다. 


1. 국내 민족에 대하여 혁명의식을 환기하고 혁명역량을 집중한다.

2. 엄밀한 조직하에서 민족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 진행한다.

3. 세계 피압박민족의 혁명운동단체와 함께 협진(協進)을 도모한다.

4. 보통선거제도를 실시하여 국민의 참정권을 평등히 하고 국민의 기본

   권리를 보장할 것

5. 토지와 대생산기관을 국유로 하여 국민의 생활권을 평등하게 한다.

6. 생활상 기본지식과 필요기능을 보급함에 충분한 공비(公費)로 의무

   교육을 실시하고 국민의 구학권(求學權)을 평등하게 한다.

7. 민족자결과 국제평등을 실현시킨다

8. 세계일가(世界一家)의 조성에 노력한다. 


이와 같이 선생의 역할은 당․정 어디에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특히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도 백범 김구가 선생과 상의하여

결행한 것이었다. 때문에 선생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임정 요인들과

함께 상해를 떠나 절강성 가흥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각료들은 항주(杭州,1932)․진강(鎭江,1935)․장사(長沙,1937)

광동(廣東, 1938)․유주(柳州, 1938)․기강( 江, 1939)으로 옮겨다니며 

풍찬노숙하며 투쟁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한시도 임시정부의 간판을 놓지 않았고, 피난의 와중에도 1935년

세 번째로 임정의 주석이 되었다.  


주석이 된 직후 선생은 임시정부를 옹호, 유지하기 위하여 그해 11월

김구․이시영․ 조성환․조완구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한국국민당은, "적의 총세력을  박멸하고 완전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

위로는 조선의 광휘를 빛내고, 밑으로는 자손만대의 영예를 발전시킴

으로써 세계 민족과 함께 공존공영을 도모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

정당이었다. 그리고 한국국민당은,


1. 국가주권 광복의 혁명적 의식을 국민에게 고취 환기하여 민족적 혁명

   역량을 총집결할 것

2. 엄밀한 조직하에 민중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적으로 진행할 것

3. 우리의 광복운동을 우호적으로 원조하는 국가 및 민족과 절실히 연락

   할 것

4. 토지와 대생산기관을 국유로 하고 국민의 생활권을 평등하게 할 것

5. 독립운동에 대한 사이비 불순적 이론과 행동을 배격할 것

6. 임시정부를 옹호, 진전시킬 것


등의 행동강령을 천명하였던 독립운동 정당이요 임시정부의 여당이었다.

이같은 한국국민당에서 선생은 송병조․조완구․차리석․김붕준․안공근

엄항섭 등과 함께 이사로 선임되어 임시정부를 수호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는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을 기화로 중일전쟁을

일으켜, '거점과 병참선'으로 이루어지는 대륙 침략작전으로 중국

전역을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독립운동단체

들은 크게 두 갈래로 체제를 정비하여 대일항전을 준비하여 갔다.

하나는 1937년 8월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이 중심이 된

우익 민족운동계열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 결성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같은 해 11월 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

혁명자연맹 등이 중심이 된 좌익 민족운동계열의 조선민족전선연맹(민족

전선) 결성이었다.


이 때 선생은 한국국민당의 대표로 1937년 7월 한국독립당의 홍진,

조선혁명당의  이청천 등과 남경에서 회의를 갖고, 3당 합동의 기초가

된 공동 결의안을 도출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이 3당과 미주 등지에

산재한 대한인국민회․동지회․단합회․한인 애국단 등이 모여 임시

정부를 옹호, 지원하는 외곽단체로 광복진선을 성립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아울러 이 시기 선생을 비롯한 임정 지도자들은

강력한 항일전의 수행을 위해 광복군 편성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 방법

으로는 군사간부의 양성과 함께 한인교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만주

지역으로 가서 병력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 군사특파단 파견이었다.


군사특파단 파견은 임정이 1939년 기강에 도착하여 선생이 네 번째 국무

위원회 주석이 되어, 김구와 합심하여 전시내각을 구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11월 조성환을 단장으로 황학수․나태섭

이준식 등과 청년공작원 노복선․서파 등으로 구성된 군사특파단이

서안으로 출발하였다. 서안은 화북지역을 점령한 일본군과 최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었고, 또한 20여만 한인 동포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생은 일흔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김구와 함께 광복군 창설을

위해 노심초사하다가 지병인 천식이 악화되어 급성폐렴증세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선생은 꿈에도 그리던 조국 광복을 바로 앞두고

낯선 이국 땅 기강에서 1940년 3월 13일, 71세의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그러나 운명하는 그 순간까지 선생의 마음은 조국 광복에 있었던 것 같다.

때문에 선생은 유언으로 민족의 대동단결만이 광복을 단축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 임정 산하의 한국국민당․(재건)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세

정당만이라도 통합을 유언으로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그해 5월 세 정당이

통합하여 (중경)한국독립당을 발족하였으니, 선생의 공적이 참으로 크다고

하겠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4월의 독립운동가] 공적 개요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선생

                 (1869~1940. 3. 13)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이동녕 선생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1869년 충남 천안에서 출생하신 선생은 어려서부터 전통 한학을

익혔고, 1892년에는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거세지는 일제의

침략과 민중들의 사회 개혁 욕구를 목격하면서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1896년 독립협회의 간사직을 맡아 개화․개혁

운동에 참가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될 때에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저항하였으며, 북간도로 넘어가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독립운동가

양성에 힘썼다. 1907년 국내로 돌아와서는 신민회의 결성을 주도

하고, 총서기를 맡아 활동하면서 국외 독립군 기지 개척론을 주창

하며 이를 앞장서 실천하여 갔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11월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에서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아 강습소는 신흥

무관학교로 발전하여 이곳에서 배출된 독립군들이 후일 청산리

대첩 등 항일 무장투쟁의 주역이 되었다. 1914년에는 노령으로

건너가 이상설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에서 대한광복군정부를

결성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연해주와 만주 일대에 흩어진

항일 민족역량을 모아 결전의 시기에 대비해 갔다.


그러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건너가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을 맡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통합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통령직무대리,

주석 등을 역임하면서 20여년 동안 임시정부를 이끌어 나갔다.


상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의 의거 이후 항주

진강․장사․광동․유주․기강 등지로 옮겨 다녔는데, 임시정부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선생이 있었다. 임시정부가 고난과 시련에

처했을 때마다 최고 어른으로서 임정을 사수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조국 광복을 앞둔 1940년 3월 13일 기강에서 71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선생이 마지막까지

외쳤던 것은 독립을 위해 이념과 파벌을 초월한 민족의 대동단결

이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독립공원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관련자료와 사진을 4월 한달간 전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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