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칠부하면 당연히 흥부전의 놀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놀부는 다른 사람과 달리 오장육부에 심술보를 하나 더 달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갖은 심술을 다 피웠다고 합니다.
옛 조상님들의 해학이 깃든 흥부전에 무심코 우스개 소리하나로 들었지만 필자는 오장칠부라는 구절을 통박하고자 합니다.
도대체 심술보가 왜 장부 중에 부에 속합니까?
오장은 물론 간, 심, 비, 폐, 신을 지칭합니다.
육부는 위, 대장, 소장, 방광, 담, 삼초를 지칭합니다.
거기에 심술보는 ‘부’자와 비슷해 육부와 어깨를 나란히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니올시다.
세상에 심술 안 피우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십시오.
놀부만 심술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흥부도 심술보는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놀부의 심술보가 고약했던 것이지 흥부의 심술보가 없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쉽게 아 필자가 심포를 심술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구나하고 눈치 챌 것입니다.
심술이 무엇입니까?
심술은 마음을 내는 기술입니다.
그러니 좋은 심술을 낸다면 당연히 좋은 심술이며, 나쁜 심술을 낸다면 나쁜 심술입니다.
그런데 언어의 사회성을 감안한다면 심술은 나쁜 심술입니다.
한마디로 순응하지 않고 거역한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순응해 편안함을 추구해야 하는데 거역해 남들을 괴롭히고 자신은 남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 좋아하는 심보를 말합니다.
심술피우는 사람들을 보면 즐거운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좋은 모습이 아니라 외롭고, 남이 알아주지 않아서 사실은 관심을 집중시키고자 하는 꿍심이 많을 뿐입니다.
그 참 이상합니다. 이러한 심술은 어린이에게 많습니다.
그래서 심술을 부리면 유치하다고 말합니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는 경우는 그래도 다행입니다.
정말로 놀부와 같은 천성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연히 해는 동쪽에서 뜬다고 말해야 하는데 굳이 해는 동남쪽에서 뜨는 법이라고 우깁니다.
물론 틀린 것은 아니지요. 그런데 동남쪽에서 뜨는 법을 모릅니까?
단지 지구가 서에서 동으로 자전하고 있으므로 동쪽에서 뜬다고 말하는 의미를.
그리고 동쪽에서 뜬다는 말은 지구의 어느 곳에서든지 항상 옳습니다.
단 극지방에서 백야가 있는 경우는 제외합니다.
사실 놀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심술보를 함부로 놀리면 많은 사람을 괴롭게 합니다.
이제 긍정적인 면의 심술보를 살펴봅시다.
심술은 그야말로 고차원의 책략입니다.
가령 우리 속담에 오얏나무 밑에서 갓을 고쳐 쓰지 말고 참외밭에서 신발 고쳐 신지 말라는 지혜로운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을 보면 참으로 우리 선조들은 마음을 쓰는데 있어서 천부적인 감각이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쉽게 말해 남들에 의심받을 짓은 애당초 하려고 하지 말라는 금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 편하고 오해받지 않고 번잡스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쓰는 방법은 정말로 자신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통례를 깨고 보란 듯이 오얏나무 밑에서 갓을 고쳐 쓰는 정도가 아니라 오얏 열매를 따먹습니다.
참외 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참외를 서리합니다.
이러한 것을 심술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여 도발이지요.
마음을 이렇게 도의에 맞지 않도록 씁니다.
그리고 얻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입니다.
이렇게 번잡스러움을 즐기는 것이 심술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술보는 바로 심보입니다. 그러니 오장칠부는 맞지 않습니다. 육장육부입니다.
그래야 이치에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