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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역사는 내일을 위한 스승
배두환(마가) 주교
배두환 주교 약력: 1926년생/ 1950 대구 사범학교 졸업/ 1954 성미가엘 신학원 졸업/
1959 미국 내쇼타신학교 졸업/ 1956 사제 서품/ 1974 주교 서품
1974~ 86 대전 교구장/ 현재 재미 한인교회 시무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으려니 하고 기회가 오면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리라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막상 회고담 원고 청탁을 받고 보니 무엇부터 어떻게 써야 좋을지 몰라, 조용히 앉아 지난날의 일들을 생각나는 대로 메모한 것만 기술해보련다
50년대 초반 내가 구세실 주교님으로부터 사제수칙을 배울 때, “어느 사제가 자기가 시무하던 전도구를 떠났을 때는 적어도 3년 동안은 그 교회 신자들에게 편지도 하지 말아야한다”고 하셨기에 나는 지금까지 이것을 기억하고 되도록 이를 지킨다. 그 이유는 새로 부임한 사제에게 빨리 뿌리를 내리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다. 내가 대한성공회를 육신적으로 떠난지 이제는 만 3년이 경과되었으므로 이제는 그동안 밀렸던 나의 정표(情表)와 인사를 여기에 담는다.
대한성공회 주교의 계보로는 8대요, 대전 교구의 주교로서는 제3대로 착좌한지 7개월 되던 때, 제 101대 켄터베리 대주교의 승좌식이 있었다. 여기에 초청받아 영국을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는데 영국의 한국선교부(Korean Mission) 루이스-와이먼 총무의 주선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150여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였는데 그중에는 수백명의 성직자를 거느리고 있는 주교로부터 나같이 불과 10여명을 갖고 있는 주교가 포함되어 있었다. 어거스틴 초대 켄터베리 대주교의 보좌가 여기 있으니, 바로 이것이 캔터베리 대주교의 대성당이며, 나는 여기서 성공회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영국 방문 중에 가장 뜻있게 보낸 것은 한국 선교부에서 친절하고 빈틈없이 만들어 준 일정표에 따라, 각 지방에 있는 한국선교부 관계 회원들의 교회와 기관을 찾아다니며 한국성공회의 실정을 알리고, 그 동안의 후원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의 계속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었다. 약 3개월간에 걸친 한인주교의 방문이라는 점에서 그 뜻도 컸지만, 어느 교회에서는 교인의 수도 많지 않은 가운데 거의 노인들과 대화의 시간을 갖는 맥 빠진 일도 있었다. 대영제국을 자랑하던 그 옛날의 영국, 힘을 다해 5대주6대양에 선교사를 보내는 등 지칠줄 모르던 그 시대와는 대조적으로 노인들은 마음뿐이지 돕고 싶어도 힘이 없으며, 젊은이들은 교회의 자리를 비우고 있으니 허공을 향하여 아무리 외친들 반응은 뻔한 것이었다. 그래도 용기를 잃지 않고 열정적으로 예정을 마쳤다. “이제 100년을 바라보는 나이에 비하면 손자 나이에 해당하는 주교가 모교회(母敎會)에 찾아왔습니다”하고 할아버지에게 인사하는 격이라 하겠다.
영국이 성공회요, 성공회가 영국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사실 성공회는 영국에 가보아야 ‘이것이로구나’하며 성공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확신을 갖게 한다. 물론 국가교회이니 더 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교회란 신앙과 생활에 대한 일치와 확신을 갖게 해줘야하는데 이 확신이란 교회에 대한 자신감에서 온다. 내가 찾아다니면서 만난 사람은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 할 것 없이 모두가 자신만만해 보였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저런 자신감 있는 태도로 생활할 수 있을까 몇 번이고 자아반성을 해보고 또 하곤 했다. 즉 사회의 제도적 장치,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서, 첫째는 ‘인간 기본적 생활안정이며, 다음에는 영성적 훈련과 믿음의 바탕에 비롯되는 것이라’고 나 혼자 결론지어봤다. 물론 현대적 의미의 교회 형성과 성장의 3요소라면 영력(靈力), 재력, 인력이라고 하지만 이 중의 제일은 영력으로 생각된다. 인간 기본적 정신 교육의 터전위에 세워진 신학교육이 그토록 목회자로서의 자신감을 가지고 살 수 있게 해준 것이 아닌가한다.
상하의 위계질서는 계급적인 억압이 아닌 협의체로서 서로가 신뢰함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이며, 이것이 바로 성공회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라고 보았다. 각자가 맡은 일에 충실하고, 시간을 하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로 귀하게 여겨 아껴 쓰고, 검소한 생활이 바로 사제생활의 기본이며 여기에 하늘이 축복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니 무척이나 행복하게 보였다. 우리들도 늘 내가 바란 것보다 많이 주셨고 후하게 축복하시는 하느님께 감사해야겠다.
나는 어느날 영국의 한 자그마한 항구 도시 포크스톤 켄트에 있는 성베드로 성당을 찾아갔다. 우선 역에 마중 나온 신부님의 첫 인상이 성인같다. 그분의 얼굴을 본 순간 마음이 평안해진다. 옷차림부터가 아주 검소하다. 성당에 먼저 들렀는데 성인 베드로 성당이라 그랬던지 제단 난간에 그물을 걸쳐 놓았고 몇 백년이나 된 건물같이 보이는데 마루가 옛날 우리 대성당 지하성당처럼 유리알같이 번쩍이고, 정돈돼 있는 성당내 기물들이 모두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역사가 오랜 성당에는 어디나 노인 신자가 많은데 이 교회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곳 신부님의 일과는 매일 미사와 병자 심방, 노인 심방, 일반 가정 심방 등이 주요 일과이고, 세상없이 바쁘더라도 조만도와 미사는 연중 쉬는 날이 없다고 한다. 내가 한가지 잊지 못할 일은 이곳 신부님이 매월 한번씩 한국선교부를 위한 다과회를 갖는데, 이 시간에는 교인들에게 꽃도 팔고 꿀도 판다. 이 꿀은 신부님이 그의 누님과 함께 생산한 것으로서, 꿀벌을 쳐서 품평회에 출품하고 우수한 등급을 받으면 이것도 팔아 한국선교부에 보내는 것이었다. 정말 정성어린 이런 푼돈을 모아서 지난 100년 동안 후원해 준 그들에게 나는 개인으로가 아닌 한국 성직자 한 사람으로서 감사했다. 돈 있는 사람들이 돕는 것은 흔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자기 생활도 넉넉지 못한 형편에 이웃을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이런 형편과 비슷한 신부님들을 여러 명 보았다. 우리도 속히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自足) 하기를 배우고 자립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으로 람베스궁으로 켄터베리 대주교님을 만나러 간 것은 2월 21일 이었다. 비가 자주 오는 나라이니 우산을 가지고 갔다. 한국선교부에서 6개월 전에 예약을 해놓았었다. 정문에서 안내자가 나와서 맞이하고, 대주교님이 계신 본관 람베스궁으로 들어서자 비서신부가 대주교님 집무실로 안내하였다. 그 후는 대주교‘코간’박사와 단 둘이다. 약 40분을 예정했는데, 한시간 반 가량 이른바 관심사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미리 ‘코간’ 대주교님에 관하여 듣고 간 터이라 대화는 어렵지 않았다. 내가 그 당시 가지고 갔었던 문제는 대전교구의 보좌주교 사항이었는데, 이미 한국에서는 대전교구와 전국 상임위원회에서 통과했던 것으로서 켄터베리 대주교의 승인만 남아있었다. 나는 당시 호남지방을 생각하고 미국인 보좌주교를 초청하려는 계획 아래 미국의 ‘알랜’ 총재주교와도 협의 중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초청 예정자였던 자신이 사실을 미국에서 신문과 잡지에 발표함으로써 켄터베리 대주교의 인준이 결국은 유산되고 말았다.
어느 날 김요한(John Daly) 주교님을 찾아갔다. 시골 교회에서 여생을 보내고 계셨는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나에게 “Bishop in the Church"라는 책을 주시면서 축복해 주셨다.
이제는 고인이 되셨지만 카테리나 수도원에서 램지 대주교님을 뵙게 되었다. 그는 내가 주교가 될 때에 서품식을 집전하셨던 분인데, “내가 현직에 있다면 여러 가지로 도울 수 있겠는데...” 하시면서 위로의 말씀을 주셨던 일이 생각난다.
한국의 관구 문제는 이미 싹터 있었기 때문에 세계성공회 협의회(ACC)로 당시의 총무 ‘하우’ 주교를 방문, 환담하는 가운데 기회가 있으면 방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여러 나라의 성공회는 교세가 그리 크지 않은 섬나라들까지도 관구를 형성하는데 우리라고 못할 바 없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어났다.
또한 영국 방문 일정대로 예정일에 USPG에 들려 각 부서 16명의 간부급 직원들이 참석한 모임에서 나는 ‘대한 성공회 현황과 전망’이란 제목으로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한국에는 영력(靈力)은 되어가지만 재력(財力)과 인력(人力)이 부족하니, 적극적인 배려가 있어야겠으며, 힘겹게 비탈길을 올라가는 마차를 밀어주려면 끝까지 밀어 주어야지, 만약 중간에서 그만두면 처음부터 밀지 않은 것만 못하다고 말하였다. USPG 측은 나의 여러 가지 이야기에 이해를 하면서도 재정 지원 대상 교구가 많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연구할 문제라고 대답하였다.
장기간의 해외출장에서 귀국하였는데, 성직자들과 신자들은 해외로부터 재정지원에 관한 큰 성과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나를 맞아 주었다. 성직자들에게는 ‘칼라’와 성유병을 선물 하였는데 무전여행을 하다시피한 나로서는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귀국 후 바로 해당 법절차에 따라 임시 교구의회를 소집, 영국성공회의 실정을 설명하고, 각 전도구의 재정 자립을 선언하였다. 물론 당시 형편으로는 각 교회의 재정 자립이 어려운 문제였으나, 교회가 발전 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이 문제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각 교회마다 사정이 달랐기 때문에 우선 천안, 대전, 청주, 진천, 충주, 정읍 등 교회는 완전 자립으로, 나머지 교회들은 절반 혹은 3분의 1 자립으로 정하고 점차 완전자립을 지향한다는 방법으로 자립 방법을 결정, 의회의 결의를 받아 시행에 들어갔다.
교회의 행정이란 의회의 결정만으로는 이루어지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교회란 신앙 단체이므로 어떤 일을 너무 강하게 추진하면 평화롭지 못할 염려가 있다. 각 교회가 불평없이 지내도록 하자면 주교가 힘이 되어주어야 하는데, 이러한 일에 남모르게 힘이 되어준 분이 있는데, 고(고) 현암(玄岩) 선생이다. 나는 그 분의 고마움을 켄터베리 대주교에게 보고하였더니 감사장을 보낸 바 있었다. 주교에게는 후원자가 필요하다. 하느님이 으뜸가는 후원자이지만,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후원자도 또한 바람직한 것이다. 주교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제의 목회 역할이기 때문에 항상 사제의 편에 서서 어떤 처지에서든지 사제를 도와 힘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각 전도구의 재정적 자립 조치 이후에 몇가지의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물론 어느 정도의 후유증은 예상하고 있었다. 재정 자립 시행 후 어떤 교회에서는 사제의 개인 생활이 대단히 어려워져 자급(自給) 사제제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는데, 학교 교사 자격이 있는 사람은 교사 자격을 갖고 주말에는 교회 일을 담당하는 등 자급 사제제도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것 또한 많은 무리가 있었으며, 어느 사람은 사제직을 떠나겠다고 사표를 거듭 제출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면 정말 지탱하기 어려운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신부는 한 교회를 다스리면 되지만, 주교는 한 교구를 치리하자니 크고 작은 일이 되풀이된다.
대단히 추웠던 어느 겨울날, 신부님들이 우리 집에 오신다기에 난로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집을 좀 따뜻하게 해놓았더니, “우리는 추운 집에서 떨고 있는데, 여기는 딴 세상이로구나” 하는 비웃음 소리를 듣고는 정말 마음이 괴로웠다. 그러나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정과 사랑보다 더 귀하고 힘 있는 것은 없다고 믿고 있으며, 또한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예수님 보다는 잘 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교구장 재직시 어려웠던 일중 하나는 해외출장이다. 동아시아 성공회 협의회, 세계 기독교교회 협의회, 람베스 회의 등 공식적인 회의 이외에 일본과 미국 등 여러나라 성공회를 방문하여 협력관계를 협의하는 일들인데, 당시 대전교구는 일본 구주(九州)교구와 자매결연 관계에 있었으며, 미국 성공회에는 재정지원금 신청 문제등 협의 사항들이 있었다. 결국 가난한 교구의 주교들은 해외출장이라는 것이 구걸 나들이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것도 주교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다만 의욕만을 앞세우고 잘 다녔지만, 해가 지날수록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다. 남에게 주는 것은 기쁘고 자랑스런 일이지만, 달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더구나 최소한의 절대치도 되지 않는 출장비를 지니고, 초청도 없는 불청객의 입장에서 해외출장을 떠나야 하는 일은 정말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해외에서 돈을 잘 끌어들이는 주교가 유능한 주교로 인식되던 시대의 이야기이다.
하루는 미국에서 여자 손님 세분이 대전교구 주교관으로 나를 찾아왔다. 미국성공회 어머니 연합회가 운영하는 원조기구인 UTO 관계자들로서 한국 성공회 상황 파악을 위해 왔다는 것이다. 주교 집무실이 어디냐고 묻기에, 여기가 집무실이고, 이 집안에 교구사무실, 주교의 살림집과 또한 기도실이 모두 있다고 대답했더니, 세상에 이런 교구와 이런 주교가 다 있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대전교구가 제출한 교구본부 건물 건축비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지은 건물이 현재의 교구 본부 건물이며, 머릿돌에도 그 내용을 기술해 놓았다. 사실 나의 교구장 재직 시 많은 기관으로부터 후원을 받았는데, 정말 고마운 일이며, 이 빚은 하늘나라에서나 갚아질 것 같다.
1977년 성탄 무렵 미국 성공회 어느 주교님으로부터 장거리 전화가 왔다. 여성 성직을 반대하는 성직자와 신자들이 ‘북미성공회’를 세우고자 하는데 동참해달라는 내용이다. 내가 내쇼타신학교 출신이어서 동창들이 나를 주목한 모양이다. ‘전화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니, 서면으로 설명해 달라’고 말했더니,수일 후에 특별한 설명도 없이 항공권을 보내왔다. 나는 그들이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일방적인 행동을 나타내는데 대하여 당황하였고 또한 몹시 불쾌하여 즉시 항공권을 되돌려 보냈다. 내가 더욱 놀란 것은 여권발급에 편의를 제공하겠다는 청와대의 전화와, 미국에서 사람이 직접 온 것이다. 당시 미국 부통령 험프리씨와 나를 데리러 온 미국인이 옛 친구간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미국에서 온 사람은 열흘 가까이 그 일에 참여해 달라고 졸라댔지만, 나는 ‘성공회를 떠난 사람들과는 동조할 수 없으나 여성 사제 반대에는 뜻을 같이 한다’고 타일러 보냈다.
바로 그날이다. 켄터베리 대주교로부터 전화가 왔다. “북미 성공회에 간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인가, 안갔으면 좋겠다”는 말씀이다. 같은 내용의 전화가 세계성공회 협의회의 하우 주교로 부터도 왔다. “나는 성공회 밖으로 한발짝도 내디디지 않을 것이며 미국 방문도 없겠으니 안심하시오”라는 대답을 했다. 다음 날에는 대주교로부터 ‘북미성공회에 가지 않겠다는 결정에 감사한다’는 전문이 왔다. 사실 켄터베리 대주교 코간박사도 여성 성직을 그렇게 환영하는 편은 아니라고 알고있다.
그 이듬해인 1978년 영국 켄트에서 람베스 주교회의가 개최되었는데, 매일과 같이 여성 성직문제에 대한 찬반의 토론이 계속되고 있을 무렵, 코간 대주교와 그의 방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마침 카나다의 스코트 대주교도 합석하게 되어 김요한 주교의 감사인사를 전했다. 스코트 대주교는 지금의 신학교 부지를 마련할 때 재정적으로 지원했던 분이다.
여하간에 세계성공회 주교회의에서는 상당한 지지를 받는 가운데 여사제직을 가결한 바 있으며, 지금은 여성 주교까지 탄생하게 되었으니 성공회는 참으로 진보적인 교단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신학적인 근거가 있다, 없다 하는 면에서는 계속적인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보여진다.
내가 교구장직을 사임할 무렵, 미국의 어느 신학교에 초청받아 설교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 학교 교장의 말씀이, 이 학교는 상당수가 여학생이므로 설교 내용에 참고해달라는 것이다. 내가 여성 성직자 반대론자라는 소문을 들은 것 같았다. 그 학교를 방문하는 날 비가 몹시 쏟아졌다. 그래서 나는 설교 서두에서 “여성 성직을 반대하는 사람이 여학생이 많은 학교에 오려고 하니까, 하늘이 나의 방문을 막는 것으로 생각되었다”고 말하였더니 폭소가 터져 나왔다. 또한 나는 “나도 그 문제에 대하여 조금씩 변화되어 이제는 여성 성직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첨언하니, 모두가 일어나 박수로 대답해 주었다. 참 여성 성직 문제는 많은 회고담을 낳게 했다.
재정문제로 야기되는 갈등은 어느 사회나 단체, 개인간에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이 종교단체에서 생기는 경우라면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서울과 대전 교구만 있을때는 그렇게 심한 편이 아니었는데, 1974년 대전교구가 분할되어 부산교구가 생겼으며, 세 교구로 된 후에는 대전교구와 부산교구의 재정난이 심해짐에 따라 크고 작은 회의때마다 재정문제 때문에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한국성공회는 선교 초기부터 재정 자립을 위한 신자교육이 다른 개신교와 같이 철저하지 못하였으며, 영국식 신앙교육과 인간 교육이 중심이 되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강요가 아닌 자유의사, 자유선택에서 오는 신앙생활이 어떻게 보면 무기력하게 보이지만 이것이 하느님과 직결되는 신앙이 아닌가 한다. 돈 내라고 하는 말이 별로 없어서 부담스럽지 않아 좋다고 하는 초입 신자들의 이야기고 보면 짐작이 간다. 한때는 ‘조선 전성교회 유지재단’ 소유의 많은 토지로 각 교회의 재정을 운영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이 토지들은 각 교회의 재정 자립을 위하여 영국선교부가 매입한 것들이었는데 8.15 광복 후 농지개혁때 거의 없어짐으로써 교회 수입의 재원이 끊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6.25 동란 이후의 교회의 어려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무렵 한국의 교구장으로 김요한(Daly) 주교가 오셨다. 그는 한국 성공회의 재정 자립을 위하여 자정(自政), 자영(自營), 자전(自傳)의 3원칙을 발표하고, 청지기 운동을 펴나갔다. 이 활동이 그래도 한국 성공회에서의 자립정신 함양에 큰 기틀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대한성공회의 마지막 선교사 주교라고 할 수 있는 김요한 주교는 당시 세명의 사제를 영국, 미국, 호주로 유학을 보내 신학 수업을 하게 했으며, 그후 이들이 서울과 대전, 부산의 교구장 주교가 되었다. 또한 그는 대한성공회를 단일 교구에서 3개 교구로 발전 분할시켰고 관구 형성 단계까지 성장하는 일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가끔 다섯 손가락을 펴보이면서, 길이와 굵기가 서로 다른 이 다섯 손가락은 그 기능과 역할이 다른데, 그중 하나만 없어도 손의 힘을 다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교인은 누구나 하느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며, 각자 맡은 직분을 충실히 이행할 대에만 교회가 발전한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은 역사를 분석하고 반성하는 가운데, 반성의 주체가 되어 사과를 한다든지 아니면 서과를 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그것이 앞날을 위한 것임이 틀림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과거로만 돌리는 태도는 옳지않다. 과거가 있었기에 현재와 미래가 있는 것이다. 좋은 것만 골라서 본을 삼고, 그 위에 터를 세운 것이 성공회라면, 과거의 잘못도 스승이 될 수 있으며, 현재의 우리는 앞날을 위해 과거를 거울삼아 이제 다시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내 탓이로소이다’ 라는 말을 외울 수 있다면 평화와 축복이 있을 것이다.
끝으로 대한성공회의 관구 설립이 어서 속히 이루어지기를 고대한다. 1986년 8월 초순, 런시 켄터베리 대주교의 공식 요청에 의하여 서울 교구장 김성수 주교와 당시 부산 교구장 최철희 주교 그리고 당시 대전교구장이었던 본인, 또한 미국성공회 대표주교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모임을 갖고 대한성공회의 관구 설립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던 이 문제는 이제 결실을 맺어야 할 때이다.
- 선교 백년의 증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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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동구리 신부님도 결혼한 저에게 사목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죱.
그래서 유학가고 제가 다시 친정살이 할 때 광혜원 교우들에게는 성탄카드 한장
전화 한번을 안하고 지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광혜원교회를 다녀와 달라는 국제 전화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광혜원교회 성전꾸미기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게 궁금하셔서
제게 사진좀 찍어서 미국에 보내 달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광혜원 교회에 다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2년이 흐른 뒤 저희는
다시 광혜원교회로 발령을 받아 옛집으로 돌아가듯 돌아가 떠 나는 날까지
함께 했었습니다... 비가오는 --광혜원 교회 마당의 장독대 생각이 나네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