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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감의산 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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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억지 춘양"의 유래
솔거 추천 0 조회 19 10.02.26 10: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춘양! 지역의 생김새부터 영동선의 역사가 예사롭지 않음을 볼 수가 있다. 태평양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른 전쟁물자 개발에 급급한 일본이 춘양지역의 막대한 임산물 수송을 위하여 영주∼춘양간 영춘철도 부설에 착수한 것이 1944년의 일이다.

일본은 보국대라는 이명(異名)으로 경북 북부지방 주민들을 동원하여 철도 부설공사에 투입하였다. 전략물자 수송이 급하여짐에 따라 1945년 초에는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그들의 관동군 1개 대대를 이 지역으로 옮겨 철도부설과 소천면 일대의 중석·망간·형석 채광에 투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춘 철도는 영주∼내성(지금의 봉화)간이 완공되어 시운전(試運轉)을 개시할 무렵, 8·15해방을 맞으면서 공사 중단과 함께 또 한편으로는 그 해의 보기드문 폭우로 인한 홍수로 시운전도 못하고 선로가 유실되는 비운을 맞는다.

그 후 삼척탄전 개발에 따른 무연탄 수송의 급증에 더욱 필요성을 느끼게 된 정부는 영주∼철암간 영암선 부설공사를 1949년에 재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도 1950년 3월 영주∼내성(봉화)간 14.1km를 우리 손으로 착공하여 개통했으나 6·25 동란으로 다시 중단되는 두 번째 시련을 맞게 된다.

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1953년부터 산업선 부설은 다시 계속되어 1954년 2월 1일 내성∼거촌간 5.5km, 55년 2월 1일에는 거촌∼봉성간 5.5㎞, 7월 1일에는 봉성∼춘양간 12.1km가 개통됨으로써 철암의 무연탄을 실은 첫 열차가 이 날 우리 손으로 부설된 철길 위로 서울에 도착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지역 주민들의 변화를 거부한 고집스런 향토색으로 철도를 놓으려고 기초공사를 시작할 때 지방원로들은 반대하고 나섰다. 그것은 산을 파헤치면 명산의 정기(精氣)를 잃는다고 믿는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신봉사상과 침략야욕에 광분하는 일본의 손으로 진행되는 공사인지라 민족적 항의와 거부반응에서 오는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이런 거부반응에 아랑곳없이 철도공사는 강행되었다. 공교롭게도 일본의 패전, 6·25동란 등으로 철도 공사가 여러 차례 중단되는 시련을 겪게되었다. 자유당 시절 이 지역출신 정모 원내총무에 의해 춘양면 소재지를 감싸돌아 현재의 의양4리 운곡에 역사(驛 舍)가 억지로 들어서게 되니 자연 「억지춘양」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지금은 이 철도가 많은 소음과 환경의 오염을 일으키는 주범으로 탈바꿈하고 지역의 개발에 상당한 악 영향을 미치고 있어 철로의 직선화를 요구하는 단계와 있어 아이러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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