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아트의 대가인 앤디워홀의 작품.
팝아트:(한 무리의 미술가들은 광고디자인?대량생산품?사진?텔레비전 영상 등을 주제로 하고 제작방법도 실크스크린 등 매스미디어 방법의 도움을 빌어 대중사회의 우상을 터무니없이 화려하게 표출해 팝아트의 전성기를 구축하였다 )
1928년 8월 6일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하였다. 피츠버그의 카네기공과대학을 졸업하고, 1952년경부터 뉴욕에서 상업디자이너로 활약하다가 화가가 되었다. 1962년 시드니 재니스화랑에서 열린 ‘뉴리얼리스트전(展)’에 출품하여 주목을 끌기 시작하고 그 후 만화의 한 컷, 신문보도 사진의 한 장면, 영화배우의 브로마이드 등 매스미디어의 매체를 실크스크린으로 캔버스에 전사(轉寫) 확대하는 수법으로 현대의 대량소비문화를 찬미하는 동시에 비판하여 이름을 떨쳤다.
1963년부터는 《슬립》 《엠파이어》 등 실험영화 제작에 힘쓰고, 상업영화에 손대는가 하면 소설도 출판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약하여 1960년대 미국 예술계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
캠벨수프 통조림, 브릴로 상자 등과 같은 일성적 사물을 작품에 등장시킨
앤디 워홀의 팝아트트는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와해했다.
팩토리, 즉 공장이라소 이름 붙인 자신의 작업실에서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똑같은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만들어 내므로써 상품이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대량 생산 방식을 예술에 적용 하였다.
작가의 독창성이나 개성, 감정까지도 제거된 대량 생산물로서의 예술,
이것이 팩토리에서 생산 하고자 했던 예술이었으며
워홀은 이러한 맥락에서 '기계가 되고 싶다'고 하였던 것이다.
소비문화 소재로 작품 대량생산한 팝아트 거장
동유럽 이민집안 출신인 미국작가 앤디 워홀은 ‘팝아트의 교황’으로 불린다. 원래 구두 디자이너였던 그는 60년대 순수 미술계에서 안중에도 없던 소비상품을 그림, 판화 등의 핵심 소재로 쓰면서 미술개념의 혁명을 일으켰다. 60년대 초부터 수프 깡통, 상품 상자, 대중스타, 정치인 초상화, 사건 사진 등 예술성, 미학이 없을 것 같은 소재를 써서 미술품들을 모조리 대량 생산하는 ‘붕어빵’ 으로 만들었다. 돈버는 기계를 자처한 뉴욕 작업실 ‘팩토리(공장)’에서 찍어낸 그의 그림들은 비평가들을 절망과 혼돈 속에 빠뜨렸다.
제품을 미술품으로 탈바꿈시키는 개념 뒤집기는 20세기 초 뒤샹이 변기 해프닝 등을 통해 이미 시도했다. 그러나 워홀은 산업화 시대 소비 대중문화의 트렌드를 미리 읽고는, 순수 대중문화의 경계를 앞장서 허물어버렸다. 생전엔 ‘돈 밝히고 스타 행세 급급한’ 속물의 면모를 보였지만, 그의 팝아트는 대중문화의 위력이 극대화하는 요즘 더욱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출처:http://kr.blog.yahoo.com/dambeck05/12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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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워홀[Andy Warhol]' [1928.8.6~1987.2.22]
'미국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이주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워홀은 1949년 피츠버그에 있는 카네기 기술연구소 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뉴욕에서 약 10년간 상업적인 삽화가로 일했다.
내성적이었지만 기민함과 협동심, 그리고 프로정신을 갖추었던 그는 삽화로 명성을 얻어 미술감독가 모임에서 주는 상을 받기도 하였으나 그러한 성공이 상업미술가보다는 순수미술가로 인정받길 원하는 그의 욕망을 꺾진 못했다
1950년대말에 회화를 시작하였고 1960년대 팝 아트 운동의 창시자인 그의 대량생산된 미술품은 미국 상업문화의 진부한 소재들을 이상화시켰다.
그는 자신을 대중 앞에 공공연하게 노출시킴으로써 예술가의 개념을, 성공한 유명인사도 아니고 사업가도 아닌 비개성적이고 무의미한 존재로 제시했다.
1962년에는 캠벨 수프 깡통, 코카콜라 병, 브릴로 비누상자 등을 그린 작품을 그는 이들 작품을 뉴욕의 스테이블 화랑에서 전시하였는데 그 반응은 엄청난 것이었다.
1963년에는 사진을 이용한 실크 스크린을 통해 이러한 소비제품들의 진부한 이미지들을 대량생산해냈으며, 광고 일러스트 및 상업미술 작품 등으로 폭넓은 활동을 보였다. 이 후 화려한 색채로 약간씩 변화를 주어 마릴린 몬로, 재키 케네디, 엘비스 프레슬리 등 인기스타를 중심으로 이미지를 끊임없이 반복시킨 유명한 인물들의 초상을 판화로 제작했다.
1965~ 66년 회고전을 열었을때 관중들의 성화로 옆문으로 빠져나왔어야 할만큼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1970년대는 유일한 미국의 팝화가로 뽑혔고 이외에도 그는 플레이보이지에 작품을 기고하는 르로아 네이만니와 낙서화가(그래피티)을 그리는 장 미셸 바스키아와 함께 전시회를 갖는 등 당대의 움직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영화제작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The Chelsea Girls(1966)·Eat(1963)·My Hustler(1965)·Blue Movie(1969) 등 그의 영화들은 언더그라운드 계열에 속하며 주로 그의 창조적인 에로티시즘과 플롯 없이 장시간(최장 25시간 소요) 이어지는 지루함 등으로 유명하다.
1975년에 그의 〈앤디 워홀의 철학 The Philosophy of Andy Warhol〉이 출판되었으며, 뒤이어 〈1970년대의 조망 Portraits of the Seventies〉(1979)·〈Andy Warhol's Exposures〉(1979) 등이 출간되었다.
팝 아트[Pop art]
1950년대 후반부터 주로 영국과 미국에서 나타난 예술 현상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이 목판 위에 실크 스크린으로 ...
팝 아트라는 명칭은 미술 평론가 로렌스 앨러웨이가 이 경향의 회화와 조각의 서술적인 표현양식에 대하여 언급한 데서 유래했다. 영국 팝 아트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인 리처드 해밀턴에 의하면 팝 아트는 "통속적이고, 일시적이고, 소비적이고, 값싸고, 대량생산적이며, 재치 있고, 관능적이고, 선동적이고, 활기차고, 대기업적인 미술 양식"이다.
특히 미국의 로이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 클레이즈 올덴버그, 톰 웨셀먼, 제임스 로젠퀴스트, 로버트 인디애나, 영국의 데이비드 호크니, 피터 블레이크 같은 팝 미술가들은 작품에서 현대생활에 강한 충격을 주는 대중문화의 모든 현상을 가리지 않고 특징적으로 묘사했다. 그들은 긍정도 부정도 담지 않고 노골적·직접적으로, 또한 그림 자체를 있게 한 매스 미디어에서 사용된 정확한 상업적 기법을 수단으로 도상학적인 측면(텔레비전이나 만화책, 영화, 잡지 및 모든 형태의 광고에서 고안됨)을 뚜렷하게 객관적으로 드러냈다.
미국과 유럽에서 매우 개인적인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의 물결이 가라앉을 무렵 팝 아트는 보다 객관적·보편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미술 양식으로 되돌아가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과거의 순수예술이 주장하는 우월성과 당대의 전위미술에서 볼 수 있는 허식을 모두 거부함으로써 전통을 파괴했다. 팝 아트는 특정한 사회적 상황을 충실하게 반영했으며 매스 미디어에 의해서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이미지를 즉각적으로 받아들이고 이용했기 때문에 문화적인 대사건이 되었다. 통속적·선정적·반미학적인 대사건이 농담으로 평가되어왔지만, 생활에 직접 반응하는 미술, 즉 전문가와 훈련받지 않은 관람자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민주적·비차별적인 미술로서 평가되었다.
팝 아트는 당대의 파리풍 미술에서 볼 수 있는 진지함과 좀더 넓게는 유럽에 전쟁을 몰고온 정치적·문화적 상황을 조롱한 1920년대의 허무주의 운동인 다다이즘의 후예로 볼 수 있다. 당대의 대량생산물을 찬양함으로써 미술과 생활의 간격을 좁히려고 한 미국 다다이즘의 대표자인 마르셀 뒤샹은 팝 아트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팝 아트에 영향을 준 다른 미술가로는 스튜어트 데이비스, 제라드 머피, 페르낭 레제 등이 있는데 이들은 기계공업시대의 정밀하고 대량생산적·상업적인 물건을 그렸다. 직접적인 선조로는 1950년대에 비록 회화적이고 표현적인 기법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깃발과 맥주깡통 등을 그린 미국의 미술가 재스퍼 존스, 래리 리버스, 로버트 로젠버그 등이 있다.
특히 인상적인 작품으로는 상업 인쇄물에서 사용하는 색점에 이르기까지 연속만화를 충실하게 복제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과 수프 깡통의 상표와 비누 상자, 나란히 배열된 청량음료병을 있는 그대로 정밀하게 그리거나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찍어낸 앤디 워홀의 작품, 욕실의 붙박이 설비와 타자기 또는 거대한 햄버거 등을 부드러운 플라스틱재로 제작한 클레이즈 올덴버그의 작품, 얼굴 없는 인물의 섹스 심볼을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그린 톰 웨셀먼의 〈미국의 거대한 누드 Great American Nudes〉, 그리고 폐품처리장에서 주워온 실제의 환경물(간이식당의 식탁과 버스 등)에 실물 크기의 석고 인물을 설치한 조지 시걸의 구조물 등이 있다.
대부분의 팝 미술가들은 작품에서 비개성적·도시적인 태도를 추구했다. 그러나 미묘한 표현으로 사회를 비판한 것도 있는데 예를 들면 올덴버그의 늘어진 오브제와 워홀의 똑같은 평범한 이미지의 단순한 반복은 명백히 혼란스러운 효과를 일으킨다. 시걸 작품의 신비하고 고독한 분위기는 공공연하게 표현주의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미국의 팝 아트는 상징적·익명적·공격적인 반면 영국의 팝 아트는 주관적·직접적이며 그들로서는 비교적 거리감이 있는 팝 문화에 대해 다소 낭만적인 태도를 보인다.
영국의 팝 미술가들은 주로 과학기술과 대중문화를 다루었는데 미국의 몇몇 팝 미술가들은 이러한 생각을 직접 실천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워홀은 "나는 모든 사람이 일종의 기계라고 생각한다"라는 것을 자신의 모토로 삼았으며 실제 작업에 있어서도 기계가 하듯 작품을 제작하려고 노력했다. 팝 아트는 일반대중에게 전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20세기 중반 서양의 산업국가에서 발생한 매스 미디어와 고도의 산업사회에 적합한 대표적인 미술양식으로서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 팝 미술가들이 스스로 내건 목표는 바로 생활과 구별할 수 없는 미술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팝아트(pop art)
1950년대 영국에서 시작돼
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 ‘대중예술’의 한 갈래.
1954년 영국의 미술평론가 로런스 알로웨이가 처음 사용한 말로,
대중적인 이미지를 순수미술 안에서 활용하고자 하는 미술 경향을 가리킨다.
대표적인 작가로 앤디 워홀을 비롯해 로이 리히텐슈타인, 제임스 로젠퀴스트,
클래스 올덴버그, 로버트 인디애나 등이 꼽힌다.
Butterfly
Elvis
Five Deaths Eleven Times in Orange
Jackie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1928~1987)은 1960년대 초반 팝아트, 즉 50년대에 부활한 대중적 이미지를 순수미술 영역으로 적극 수용하는 미술 경향을 시작했다. 이후 그의 작품은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팝아트의 정의대로 워홀은 경계를 허물고 혁명적인 변화를 주도했다. 미술 뿐 아니라 영화, 사진, 디자인, 광고 등 시각 예술 전반에서다.
워홀은 예술의 키워드를 대중문화 특성에서 찾았다. 대량 생산된 오브제, 매스미디어가 보여주는 이미지들을 선택, 복제해내는 대량 생산 방식을 예술에 적용했다.
‘브릴로 상자’, ‘캠벨 수프 통조림’, ‘세 개의 코카콜라병’ 등‘팩토리’(공장)라고 이름 붙인 작업실에서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똑같은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만들어 내며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또 ‘마릴린 먼로’, ‘재키’, ‘실베스타 스탤런’ 혹은 범죄자에 이르기까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인물의 개성을 제거하고 마치 하나의 기호와 같은 상태로 변화시키는 식이다. 미디어가 쏟아내는 과도한 이미지의 생산을 형상화한 것이다.
62년 보도된 ‘129명 탑승 비행기의 사고’를 계기로 교통사고 현장, 사망 사건들을 다룬 신문의 사진을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작업에 나섰다. 이미지의 현실성은 사라지고 기계적으로 찍혀 나오는 무심한 장면들이었다.
죽음과 연관된 끔찍한 이미지들조차 미디어를 통해 일상적인 것이 되거나 소비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참치통조림 참사’, ‘5명의 죽음’, ‘망치와 낫’ 등의 작품이다. 이들은 60년대 팝아트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는 평을 받는다.
‘자화상’, ‘여장한 자화상’, ‘구두 드로잉’등은 스타를 갈망하면서도 자신을 꼭꼭 숨기려 했던 자신을 표현한 작품들이다.
워홀은 60년대 후반부터 장편영화 100여편과 ‘스크린 테스트’500편 이상을 제작했다. 감정이 배제된 정적인 카메라와 결합된 롱 테이크로 장시간 대상을 관찰했다. ‘잠’과 같이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상영시간도 긴 실험적 영화들은 새로운 영화의 출현에 영향을 줬다.
워홀의 다양한 작품 세계는 찬사와 함께 ‘일상을 소재로 한 쉬운 예술’이라는 표면적 이해에 그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예술인가’라는 논란의 정점에서 워홀은 여전히 활발히 논의되고 있으며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삼성미술관 리움은 올해 첫 전시로 ‘앤디 워홀 팩토리(Andy Warhol Factory)’를 개최한다. 작고 2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다. 앤디 워홀 재단에서 기증 받은 실크스크린, 조각 , 사진, 영화, 드로잉 205점이 출품된다.
리움은 워홀이 디자인한 벽지로 도배하고, 그가 촬영한 사진과 포스터 등을 걸어 ‘워홀의 작업실-공장- 분위기’를 재현했다. 전시는 3월 15일부터 6월 10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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