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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 (대마도 對馬島)
한반도와 일본 규슈[九州(구주)] 사이의 바다에 있는 섬.
섬의 전체면적은 706.43㎢, 인구 46,000여명,
거제도 보다 조금 크고 제주도 보다는 작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일본 나가사끼현에 속해 있음
<2010. 2. 20 첫날)
2010.2.20 ~ 2.22까지 2박3일 일정으로
대마도 이즈하라 항구로 떠나는 배에 3명이 몸을 실었다.
(승선인원 300명)
날씨는 흐렸지만 기대와 즐거움 속에 배위에서 마시는 맥주맛은 일품이었다.
저 멀~리 오륙도도 보이고....
오전 9시 40분에 출발하여 약 2시간 30분 만에 이즈하라 항구에 도착.
입국수속 등, 모두 3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평소 강선생이 잘 알고 지내는 하나오꾸하루오(花岡春雄)씨 께서 마중을 나와 있었다
집에 들어서면 환영 네온사인을 벽에 만들어 놓았는 데,
'만나서 반갑습니다. KANG SUNG HWAN ' 이라고 적혀잇는 것을 보면
평소에 두터운 우정을 느낄 수가 있지요
정원에는 꽃들이 피어 있고 (기온이 우리 땅보다 따뜻...)
뒤뜰로 들어서니 노랗게 익은 귤들이... 그냥 따 먹어면 된다
바닥에도 지천으로 귤들이 널려 있고....
탐스럽게 익은 귤들을 보고 있노라면 감상만 해도 너무나 낭만적이다
많은 세월을 간직한 듯한 늙은 고목에는 벌써 매화 꽃이 활짝
담장넘어에 피어있는 이것은 무슨 꽃인지 모르지만 우리 일행을 환영하는 것 같기도.....
일본식 전통 다담이 방에는 음료며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상판 바로 밑에는 이불을 깔고, 전기 곤로가 있어 발을 넣어면 온기가 있어 따뜻했다
花岡春雄 씨 댁에서 점심을 먹고,
이즈하라시내에 위치한 하치만구(팔번궁)신사를 찾았다
일본 사람들의 신앙은 기본적으로 애니미즘,
즉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범신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래서 신화나 전설에 나오는 신, 영웅은 물론 각종 고양이나 말과 같은 동물은 물론,
죽은 자도 살아생전 또는 죽어서 영험을 떨칠것으로 여겨지면
신사를 세워 모신다.
이 하치만구 신사는 우리나라와도 연관이 있는 데,
옛날 삼한을 정벌 하였다는 신화속의 인물 "신공황후"를 모시는 신사로
마한, 진한, 변한을 정벌하였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조선의 고종의 딸 '덕혜옹주"와의 관련이다.
"덕혜옹주"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대마도의 백작에게 강제로 시집을 가게 된다
말이 좋아 시집이지 인질이나 다름 없었겠지요.
어찌됐던 대마도의 원주민은 조선의 옹주가 대마도로 시집을 온 데 대해
대환영을 하였는 데, 그것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이 팔번궁 신사앞에 세워졌다고 한다
(사전 지식이 없어 보지는 못했음)
슬픈 역사의 얘기들..., 마음이 씁쓸하네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절대 질 이가 없다는 이 평범한 진리.
우리는 다시는 이러한 슬픈 역사를 만들지 말아야지요.
- 이곳은 일본 국가지정 사적지 -
대마도를 지배해온 藩主 宗家19代 義智(요시토시)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의 아들인 20대 義成(요시나리)가 1615년에 창건한 松音寺를
1622년 요시토시의 법호를 따서 万松院이라 개칭하였다
절 입구의 백안목(百雁木)이라는 돌계단을 올라가면,
토쿠가와(德川)역대장군들의 위패 및 조선통신사 관련유물이 있고,
조선의 국왕으로 부터 하사받은 삼족정(삼구족:香爐 / 花甁 / 燭台)등이 있다.
역대 장군들의 위패가 있는 사당
조선국왕으로 부터 하사 받았다는 삼족정 (화병, 향로, 촛대)
본건물 우측으로 긴 계단이 있었는 데, 상당히 가파른 길이다
(입구에 노인들을 위한 지팡이를 준비해 놓았다)
이 나무의 수령은 만송원 창건 이전부터 있었으니, 약 400년
초고 높이가 35~40m, 눈높이 직경이 6 ~ 7m인 거목이다
덕혜옹주의 결혼봉축기념비가 있는 곳이다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왕 고종황제와 후궁인 복령당(福寧堂) 梁貴人(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은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金章漢 (김장한)과 약혼하였다.
그러나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갔다
1931년 대마도의 후예인 백작 소다케유키 (宗武志) 강제 결혼을 해서 딸 마사에(正惠)를 낳았다
그 후 병상생활을 하다가 1953년 다께유끼와 이혼,
유일한 혈육 딸마저 결혼에 실패하여 자살하는 비극을 겪는다.
1962년 1월 26일 창덕궁 낙선재로 귀국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서 비극의 일관된 삶을 살았다.
낙선재에 들어설 때에는 눈물을 주르르 흘렸고,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 윤씨에게
황실 예법에 맞게 절을 올렸다고 한다
한국에서의 생활도 순탄치 않았고,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시다가
1989년 4월 21일 세상을 떠낫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金谷洞(금곡동)에 있는 洪裕陵(홍유릉)에 묻혔다
- 여기는 고려문 -
고려문이란 조선 통신사를 성대하게 맞이하기 위한 문이란다
고려문 본래 정문은 소실되었고, 현재 건물은 소화 천황 때 재건축한 것이다
입구 좌측 작은 돌 기둥이 있는 데, 한자로 "高麗門"이라 적혀 있다
1697년 ~ 1811년 (210년간) 12회 조선 통신사가 대마도를 거쳐갔다.
통신사의 방문으로 이루어진 활발했던 교류가 우호적인 관계를
21세기 한일우호의 지향점으로 삼고자 이즈하라에는 조선통신사의 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조선통신사는 에도시대 조선에서 파견한 문화사절단으로 약400~500명으로 구성된 대규모였다.
이들 일행은 서울을 출발, 부산을 경유 하여, 반드시 대마도에 상륙한 뒤,
다시 수로를 따라 세토나이까이를 거쳐 에도, 지금의 동경으로 향하였다.
그 화려한 행렬을 그린 두루마리가 이즈하라에 남아 전해오고 있으며, 길이가 16.58m에 이른다.
통신사 비 앞에서 찰칵 했지요 (카메라 맨이 없어서 셋이서 함께 촬영은 불가)
- 밀물 따라 올라온 바다고기들 -
우리로 말하면 동네 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이라 할까 ?
밀물 때 먹이를 찾아 올라온 고기 들이다
주둥이를 빠끔빠끔 거리며 머리를 드리내고 헤엄을 치는 고기들.
씨알도 제법 굵고 졸복들도 노닐고 있어 제법 신기하고 보거리였는 데,
수선사 구경을 하고 약 40분 후에 와서 보니 쓸물과 함께 모두 바다로 빠저나가고
물도 없고 고기도 한마리도 없었다
이곳은 구한말 대 유학자이자 항일 운동가였던 면암(勉庵)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있는 곳이다
좁은 뜰 한 쪽에 마을 공동묘지가 있고 그 맨 앞 쪽에 선생의 비가 서 있다.
구한말 대 유학자이자 항일 운동가였던 면암(勉庵) 최익현 선생은
대마도에 잡혀온 뒤 일본에서 경작한 식량을 거부하며 단식 투쟁으로 그 기개를 떨쳤다.
결국 대마도에서 돌아가신 선생의 유해는 백제의 비구니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이 절에 나흘 동안 안치된 후 부산항으로 이송되었다.
선생의 넋을 기리는 순국비가 말없이 서있다.
순국비 아래 수평으로 세워진 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은 대한제국의 위대한 유학자 정치가 였다.
한말 어려운 정세에서도 소신을 굴하지 않고 애국항일운동을 일으켜
일본 관헌에 의해 대마도로 호송되어 왔으며 적사(謫舍)에서 순국하셨다.
수선사는 백제 승법묘니(僧法妙尼)와 관계가 있다고 전하여 한국과는 인연이 깊다.
선생이 순국한 후 대마도 유지들이 유체(遺體)를 모시고 충절을 되새겨 제사를 올렸다.
이렇듯 유서 깊은 곳에 순국비를 세워 애국애족의 뜻을 기리고자 한다.”
-최익현선생순국지비 건립위원회-
돈 많은 일본인들은 가족묘를 마을 인근에 이렇게 만든다고 한다
비 1기에 유골이 들어 있고 돈을 따지면 1기에 수천만원이란다
더디어 여행 첫날 저녁시간이다
'하나오까" 부부께서 손님접대하는 모습들이 정말 정성스럽다.
우선 소고기 전골로 준비를 하엿는 데, 술파티를 하기로 작정을 한모양이었다.
양주, 맥주, 일본소주 등등 이름모르는 술들로 몇잔씩 들어 올렸더니 화색이 돌고
기분이 최대로 UP되었다. 모두들 한일 우호증진을 위해서 " 간베이~~!!"
이분이 젊을 때는 술을 엄청 많이도 마셨는 데, 지금은 건강이 안좋아 약간 절제를 하는 편.
그래도 그 꿈을 버리지 못해 온 갖 종류의 술들을 모우며 삶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나라 "안동소주"도 있었고 술을 들고 설명을 하고 있다
방 한켠에 마련된 술 진열장.
여기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는 사랑채에도 온갖 종류의 술병들이 진열되어 잇엇다
夫人은 60후반의 여성인 데,아직도 그 미모가 일색이었고 얼굴에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대감이 정성스럽게 술 한잔을 권했다.
술을 거나하게 먹고 나니 저녁대용으로 김밥, 초밥 등으로 배가 째지도록 먹었다
집 벽에 설치된 네온 싸인.
아저씨께서 전기를 전공하여 솜씨가 훌륭했고,
수십년을 무신통신사로 민간외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단다
<2010. 2. 21>
여행 둘쨋날
소형차 1대를 렌트를 하여 이용하기로 하였다.
운전은 국제면허증이 있는 강선생이 운전을 하기로 하였다
(준비에는 빈틈이 없는 사람)
화다도미 신사를 일본어로 읽기는 와타즈미(和多都美) 신사라고 하는 모양이다.
나는 일본어를 모르므로 한자 소리나는 대로 화다도미 신사라고 읽는다.
내 맘이다. 꼬은 사람은 와타즈미 신사라고 읽어라.
화다도미 신사에는 다섯 개의 천(天)자 모양의 물건들이 서 있다.
세 개는 바다에 서 있고(사진 뒤) 두 개는 바닷물이 범람하지 않으면 들어오질 않을 육지에 서 있다.
이 천자 모양의 물건을 '도리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도리이는 '새가 앉아 있다.'라는 뜻에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도리이는 신이 사는 세계와 속세와의 경계로 신성한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뜻이 있으며,
신사의 상징이기도 하다. 도리이는 보통 나무나 돌로 되어 있다
아직까지 점심을 먹지 못했다. 한적한 곳이라 점심먹을 식당 같은 게 없다
어디로 갈까 ? 궁리 끝에 히타카스항 인근에 좋은 우동집으로 가기로 했다
(전날 술로 인해서 정말 짬뽕국물 생각이 절로 났다)
가는 길에 삼나무로 펼쳐지는 울창한 숲이 장관이었다
이 곳은 길이 전부 2차선이고 중앙선이 없는 길도 많다.
대부분 소형차를 이용하는 데, 이해가 갔다
우동 맛이 좋다는 식당을 찾아 오니 이미 장사를 끝내고 문이 닫혀 있었다.
여기는 여객터미날 손님을 상대로 장사를 하기 때문에 손님이 떠나면 바로 문을 닫는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 여기까지 왔다
(우리로 말하면 대형 슈퍼마켙이라고나 할까)
여기서 김밥도 사고.........
이동차량에 닭고기 꼬지도 사고 하여.........
쉼터 의자에 한상을 차렸다.
쌀쌀한 날씨 인데도 꿀맛 이었다.
여행이란게 다 이런게 안닌가. 편하게 지낼려면 집에 방콕하고 있지....
삼우전해수욕장과 한국 전망소를 가보기로 하였다
해수욕장 가는 이정표
해수욕장이 별 크지는 안했다
멀리 보이는 바위위 소나무를 배경으로 한컷씩....
여기 온천탕에서 약 30분간 칼칼이 샤워를 하고....한국전망소가 있는 데로 출발
전망소 올라가는 길 (입구)
대마도 북쪽에는 한국의 남쪽이 보인다는 2곳이 있는 데, 그 중의 한 곳이 이곳이다
한국에서 자재를 가지고 와서 오직 한국사람을 위라여 한국식 팔각정을 지었다고 하네요
한국식으로 지었다고 하나 시멘트 건축물로 촌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밤에 여기서 보면 부산의 끝자락 불빛이 보인다고 한다.
그 광경을 건물 벽면에 부착해 놓았다
어렴푸시 보이는 저 곳이 부산인가. 저 멀리 수평선만 보일 뿐이다.
두 눈을 부릅떠 보지만 눈만 아프다. 여기서 부산까지는 약 55 km라니 정말 가깝다
눈길을 끈 것은 전망대 뜰에 세워진 "조선역관(통여관) 조난비"였다
1703년 대마도의 3대번주가 사망하고 그 손자가 세습을 받게 된다
조선왕조는 이를 축하하는 사절단을 보내고자, 그에 앞서 역관(통역관) 18명을 먼저 보내는 데
일본인 역관 4명을 포함한 전원이 이 전망대 앞 해역에서 갑작스러운 폭풍을 만나
배가 좌촣는 바람에 모두 사망을 하였다.
1991년,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한국과 대마도간의 선린 우호의 전통을 기리고
그 때 사망한 역관들의 혼령들을 기리고자 이 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 당시 타고 온 배의 모양이 이랬을까 ??
뭘 심각하게 바라보고, 무엇을 생각하노 ? 친구야 !!
한국과 일본은 참 가깝고도 먼 나리일세.
<더디어, 집에 도착하여 즐거운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구마>
가운 데에는 찌게 냄비가 있고, 각자 앞에는 간장, 쏘스, 밥과 야채가 놓여져 있다
우리나라 한정식 처럼 먹고 나면 여러차례의 음식이 나왔다.
손님을 접대하는 그 정성이 정말 대단햇다.
우리는 딘장 찌개, 아니면 돼지두루치기 등등 ,
큰 냄비에 하나 가득 차려 놓고 밥 한그릇 뚝딱하면 " 식사 끝 !!"인 데
여기서는 여러차례의 새로운 음식이 나왔다
(마나님은 준비하느라 같이 식사를 못하는 것이 몹시 안타가웠다)
우선 회를 먹고 나니 덴뿌라(튀김)과 떡이 나왓다
가운데 있는 것이 소고기를 얇게 쓸어 야채에 싸서 먹는 음식인 데
이 소고기 한 잎이 한국돈 약 1,000원이란다 (별 고급스런 음식을 다 먹어 봤다)
이것은 고구마를 말려서 설탕 (?)에 절인 것
별도 보관했다가 돌아오는 배위에서 맥주안주로 먹었다
다음에는 딸기, 사과, 양다래 등 과일
다음에는 꼬지에 낀 떡이 나앗다.
아이고 !! 배불러서 죽을 판이네. 이 사람들아 !!
<2010. 2. 22>
여행 마지막날 오전에는 가까운 곳에 다녀 오길 하였다
렌트카가 빨강에서 노랑으로 바뀌었다. 당초 렌트한 차량이 이상이 있어서...
사실, 어제 빨강차 고장으로 약 1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점심으로 우동을 먹기로 하였는 데
식당에 도착하니 문을 닫아서, 슈퍼에서 김밥을 사서 점심을 때웠다는 것이 아닌가베여.
대강 차량 점검을 한 후,가까운 공원을 다녀 오기로 하엿다
여기는 이키쓰시마국정공원[壹岐對馬國定公園(일기대마국정공원)]이다
올라 가는 길이 꼬불 꼬불....
가미사가 (상견판)공원에는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먼~~산
인물 좋고
여기는 2차대전 중 막사로 사용하던 벙커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포발사요원, 취사요원 등 100명정도가 근무를 했나 보다
구경을 마치고 꼬불 꼬불한 길응 내려 왔다
숲속을 비추는 아침 햇살이 눈이 부시다
아침식사 상 (계란말이 하며, 국, 연근, 생선 등)
길거리에 내 놓은 꽃집의 화분들
점심은 우동과 떡 한조가으로 간단하게...
이즈라하 항을 뒤로하고 부산항을 향해 출발
정박 중인 선박
돌아오는 배에는 1, 2층 모두 정원이 300명인 데, 승객으로 꽉 차 있었다.
이렇게 하여 친구 덕분에 강남 구경을 잘 하게 되었고
정말 고맙다. 또 다음에 갈 데 있으면 나를 데리고 가기 바란다
그리고 우리를 3일동안 기거를 하는 동안 지극 정성으로 신경을 쓰주신
하나오까하루오 (花岡春雄) 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다뉴브강의 잔물결 / Ivanovici (이바노비치)|
이번 여행에서 Mr, Kang의 일본어 실력에 큰 감명을 묵었다.
나도 한번 배워 볼라꼬 준비를 하였는 데, 작심삼일이 되지나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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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Thank you Master !
Three guys of you had great time together.
It was very impressive traveling photos
and very well illustrated historical back ground between Japan and Korea.
I realy enjoyed to look at them.
have good weekend.
방장님, 쉬지 않고 셔트 누르시더니 멋지게 편집, 소개하셨네요. fighting!
장안님 ! 우수회원 등업조치 하였으니, 자주 구경이나 많이 하세요 (글은 안쓰도 환영)
방장님! 힘내세요. 일본어 첫걸음, 초심을 이어 가시면 언젠가 때가 되면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게 말 아닌가요. 귀경 마니 허것슴다.
하나오까상, 나도 그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지요. 누가 일본인을 왜소하다했던가? 서양인들 보다 큰 편이더라. 누가 대마도는 자원이 없다 했던가? 일본의 전통이 살아 있는 집이 바로 그집이더라.
서울 동창들, 지들끼리만 모이고, 모여도 동기회에는 비밀로 살며시 모이고 여기 알리지도 않고 마는 서울 다마내기들은 우리 16회의 우의를 다시 새겨보기 바라고, 양심과 우의를 회복할 필요를 각성해 주기를 바란다. 시골사는 우리는 콩한 조각, 한조각 추억거리도 다 나누며 살고 싶다. 여기 사진들 다 올리는 거 보소. 서울 니들은 가진것 너무 많지만 나눌 생각은 너무안하는 것 같다. 40주년 행사후 한번도 안 모였더냐? 서울 팀들은 서로 원수로들 사는가?
풍백님 ! 너무 뭐라카지 말게나. 제 잘난 맛에 사는 게 인생이라 안카더나.
복잡한 서울 생활이 억수로 바뿌것째, 뭐...
난 조카네 집에 갔다가 사진들을 보고 감탄해 영어로라도 했는데..
서울 친구들 중에 동창모임을 사진 찍고 올릴 정도의 성의를 보일만한 친구가 있을텐데...
난 심히 부족하지만 방장님의 노고에 감사한 마음으로 참여한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