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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칼빈
요아킴 스테드게(Joachim Staedke) : 독일 개혁교회가 배출한 칼빈 전문가
김원배 박사 :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장, 번역
http://www.theology.or.kr/mal/29/29_spacial_%20yoa.html
요한 칼빈
요아킴 스테드게
요아킴 스테드게(Joachim Staedke) : 독일 개혁교회가 배출한 칼빈 전문가 김원배 박사 :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장, 번역
* 이 글은 본 연구소와 스위스 교회가 발간하기로 약속한 개혁신학총서 중 J. 스테드게 (Joachim Staedke)의, {요한 칼빈}(Johannes Calvin)을 번역한 것, 계속 연재할예정이다. 이미 본 연구소는 스위스 교회와의 약속에 따라 M. 하아스의 {H. 츠빙글리}를 번역, 출간한 바 있다.
1. 출신배경과 청년시절
16세기에 서구유럽과 후에 새롭게 탄생한 세계지역에 정신적으로 큰 흔적을 남긴 사람의 역사는 그 역사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전제들을 지시함으로 시작되어야만 한다. 칼빈은 종교개혁의 창시자는 아니었으나 그의 공헌은 종교개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마틴 루터를 통한 독일의 종교개혁 없이 칼빈은 생각할 수 없고 반대로 루터의 종교개혁은 칼빈 없이 역사적인 일화로 머물렀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서구 유럽의 칼빈주의를 통해 반 종교개혁의 반격이 무너져 내렸고 서구에서 이와 같은 뒷 배경이 없었던들 독일의 개신교는 30년 전쟁에서 오늘처럼 살아남을 수 없었을지 모른다.
칼빈의 업적은 프랑스의 정신으로 각인되어 있다. 16세기의 초기에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독일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제국의 통합이 지방 정치 세력들의 득세로 와해되기 시작하는 동안에 프랑스 왕국은 그들이 통치하는 나라에 정치적, 민족적 통일을 주고자 고투하고 있었다. 프랑소아 1세 왕 치하에서 프랑스는 독일에 있어서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종교개혁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더욱이 집요하게 절대적인 권력형태를 추구했고 급기야는 종교개혁의 반대입장에 서기로 결정을 내렸던 프랑스왕정국가는 칼빈주의가 전투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도록 만든 외적, 역사적 전제조건이 되었다. 왕정 국가의 강화와 더불어 우리가 도저히 충분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처럼 경악스럽게 교회와 도덕적인 삶이 서서히 몰락하여갔다.
물론 프랑스 안에서도 갱신의 세력들이 생겨나 활력을 띠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개혁운동의 정신적인 영역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라틴어 이름의 야곱 파버 스타플렌시스(Jacob Faber Stapulensis)라고 불리워졌던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르(Jacque Lef vre d'Etaples, 역자주: 당시 파리 가톨릭 지성의 중심이었던 셍 제르멩 수도원, 현 셍 제르멩 성당의 원장)이였다. 그는 칼빈처럼 가난한 가문 출신이었으며 초라한 모습을 한 피카디르 지방사람이었으나 고상한 성품과 깊은 경건성, 뛰어난 학문적인 재능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파리에서 이 위대한 인문주의자(人文主義者)는 개혁운동의 온상(Keimzelle)이 되었던 제자 모임을 조직하였다. 보수적인 소르본느파들의 의심에 가득찬 눈초리를 피해 이 모임은 감독이 거주하는 시(市) 모(Meaux, 역자주: 파리시 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당시 가톨릭교회의 중요한 중심지)로 모임장소를 옮겼다. 여기에서 그 당시 프랑스의 위대한 정신의 대표자들이 비밀집회를 가졌던 것이다. 이에 앞서 기욤 브리쏘네(Guilliaume Bri onet) 감독이 개혁운동을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희망을 걸었으나 개혁사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첫 번째 화형식 후 다시 개혁운동에서 후퇴하였다. 그에 뒤이어 후에 오를레앙(oloron)의 감독이 되었던 제라드 루셀(G rad Roussel)이 분리(Shisma) 없는 개혁을 하려고 노력하였으나 현존하는 교회의 체제 아래서는 역부족이었다. 프랑스 대학 위대한 히브리어학자였던 프랑소아 바타블(Fran ois Vatable)은 1545년 성서를 펴냄으로 유명하게 되었는데, 그도 개혁운동에 참여하였다. 은퇴한 궁정시인 클레망 마로(Cl ment Marot)는 모(Meux) 비밀 모임과 교류하였다. 프랑스 인문주의의 탁월한 인물들 중의 하나인 마로(Marot)는 복음의 깊이에 심취해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가슴속에 개혁사상을 가진 그리스도인이었다. 물론 그의 신앙은 에피큐러스적인 삶의 철학을 극복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는 타고난 남 프랑스의 유머로 가득찬 낙천성을 지녔고 영적으로 무장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불안했던 삶의 여정을 일컬어 "궁정, 감옥, 믿음이라는 삼각 사이를 맴돌았던 삶"이라고 말하곤 하였지만 그는 프랑스 개혁교회 전통에 소중한 선물을 남겼다. 그것은 그의 유명한 위그노파 시편 기도이다. 바타블(Vatable)은 마로(Marot)에게 히브리어 시편의 학문적인 번역을 넘겨주어 그것을 시적이며 노래로 부를 수 있는 형태로 바꾸도록 허용했던 것이다. 이 모임을 대표하는 사람들 중에서 여기에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은 초기 인문주의의 중요한 대표자인 기욤 부데(Guillaume Bud )이다. 그는 프랑스 대학의 교수였고 국립도서관의 창시자였다. 칼빈은 후에 이 사람과 토론을 벌인 바 있다. {르페브르 데타플르}를 중심으로 한 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人物)은 남 스위스, 프랑스, 발덴져 교회 지역의 개혁자인 기욤 파렐(Guillaume Farel)이다. 파렐없이 칼빈의 업적이 역사적인 성과를 가져올 수 없었으리라. 마지막으로 우리들은 이 개혁자들의 모임에서 천재적인 익살꾼이었던 프랑소아 라브레(Fran ois Rabelais)의 이름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그는 엄청난 지식과 개혁의 이념들, 예리한 날카로움으로 가득찬 희롱과 풍자의 숙련된 문체, 풍부한 익살과 비난에 가까운 조롱, 그리고 동시에 끊일 줄 모르는 낙천주의 때문에 독특한 타입을 형성하는 인물이다. 그와 같은 특이한 성품을 가진 인물은 오로지 프랑스 정신의 풍토에서만 탄생할 수 있다.
그 모임은 왕의 누이인 나바르의 공주 마가렛트(Magarethe)로부터 절대적인 후원을 받았다. 그녀는 프랑스의 남서부에 있는 피레네산맥(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산맥-역자주)에 걸쳐 있는 작은 국가를 통치하며 주재하였던 나바르의 하인리히(Heinrich von Navarra) 공(公)과 재혼하였다. 그녀의 딸 요한나 달베르(Johanna d'Albret)를 통하여 그녀는 하인리히 4세의 할머니가 되었다. 하인리히 공은 낭트의 관용칙령을 통하여 100년경에 프랑스 개신교의 멸절을 면하게 했으나 "파리는 미사를 드릴 가치가 있다" 라는 유명하게 된 말로써 그의 기회주의적 성격을 드러내었다. 그의 할머니는 기회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매우 영리하고 교육받은 경건한 여인이었으며 신비주의적 경향을 연 시인들 중 최상의 경지에 이른 시인이었다. 그 여인은 프랑스에서 초대교회를 회복하고자하는 개혁을 추구하는 그룹의 보호자이기도 하였다. 왕이 몇 년 동안 종교적 개혁운동을 적어도 묵인하게 한 것은 그녀의 영향 덕분이였다. 물론 그녀는 1535년 이래로 궁정에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동시에 그녀는 제라드 루셀(G rard Roussel)의 도움으로 그녀의 영지 안에서는 새로운 교회적 정신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녀의 딸 요한나 달베르(Johanna d'Albret)는 그후에 정규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위에 열거한 이름들이 모(Meaux)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 그룹에서 프랑스 교회의 개혁이 계획되고, 토론되었고 이들을 통해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작들은 칼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는 이 사람들을 그가 정신적인 투쟁길에 나섰을 때 그들의 글들을 통해 이미 만났던 것이다. 루셀(Roussel)은 그가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시작을 "복음의 섬광"(illustratio evangelii)이라 이름하였다. 이 때는 대략 1521년경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프랑스 개신교의 역사는 피로 물들어졌다. 1523년 8월 8일 아우구스티스파 수도사 장 발리에르(Jean Valli re)가 파리에 있는 돼지시장에서 공개적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그는 개혁교회의 최초의 순교자이다. 그 뒤를 이어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순교의 피를 뿌렸던 것이다.
1521년 이래로 이어졌던 사건들의 경과는 이 나라에서의 교회의 개혁은 왕의 권력이 없이 행해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1535년 1월 이래로 늦게나마 프랑소아 1세는 교회개혁을 허락할 의사가 없음이 드러났다. 아직도 개신교 운동은 정치적 영역에 있어서 밖을 향해서 그들의 종교적인 견해를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취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했다. 거기에다 브리코네(Bri onnet)가 그에게 주어진 프랑스 개신교의 지휘권을 거절하였고 진보적인 사상을 소유한 정신적인 지도자들이 인문주의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였으며 무엇보다 왕권이 프랑스 가톨릭적으로 해석된 종교성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게 하여 개혁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본래적인 근거에 천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남아있는 가능성은 단지 순교자의 교회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교회가 되거나 교회이기 위해 이들은 목표설정과 추진력, 복음의 설교, 성만찬의 확실한 규정, 잘 훈련된 설교자, 믿음의 내용에 대한 분명한 규범 등이 필요했다. 이들은 역시 그들의 은밀함과 피난처적 믿음의 우연성으로부터 벗어나 말씀과 십자가 아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백교회로 새롭게 태어나는 엄격한 정신적 지도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칼빈의 시대가 시작되는 징조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 같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사람이 1509년 7월 10일, 피카르디(Picardie) 지방의 조그만 도시 느와용(Noyon)에서 탄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제라드 꼬벵(G rard Cauvin)은 대성당 참사회의 재산과 재정을 관리하는 감독의 서기관이었다. 그는 법률에 조예가 깊었고 사무 행정에 능했으나 동시에 매우 개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잔느 르프랑(Jeanne Lefranc)이라는 이름의 캄프라이 지방의 여관업을 하는 사람의 딸이었던 칼빈의 어머니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그녀가 매우 경건한 여인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재혼할 수밖에 없었다. 요한은 7명의 자녀들 중에 두 번째 아들이었다. 그의 생가는 1차 대전 중 파괴되었다.
칼빈 소년은 첫 번째 수업을 그의 고향 도시에 있는 성당이 운영하는 카페테 중등학교(Coll ge de Capettes)에서 받았다. 이 학교에서 칼빈 소년은 후에 탁월하게 구사했던 라틴어 기초 과정에 접할 수 있었다. 그에게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가 귀족의 가정들과 접촉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교류가 후에 그에게 세계적 안목을 가진 유능함을 형성케 하였다. 12살이 채 되기도 전에 그는 그의 아버지의 중개를 통하여 생활비의 1/4를 느와용 노트르담 성당 재단으로부터 받았다. 1521년 5월 19일에 그는 성직록을 받은 사람(Benefiziat)이 성직자가 된 유일한 표지로서 삭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성직과 관련된 업무는 맡지 않았다. 이와 같은 독특한 경우는 중세 후기의 혼란스러운 성직록의 관계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성직록의 수입이 젊은 칼빈에게 큰 재정적 걱정없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하였다. 14살에 그는 그의 아버지의 주선으로 파리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그 당시의 관례에 따라 라틴어식으로 그의 이름은 장 꼬벵(Jean Cauvin)이라 표기되었다. 그러나 널리 불리운 이름은 요한 칼빈이었다. 꼴레주 드 라마르슈 학교(Coll ge de la Marche, 역자주: 꼴레주는 중등학교 과정 혹은 고등학교 수준 과정)에서 그가 공부한 기간은 길지 않았다. 이 곳에서 그는 그가 매우 존경하였던 교육학자 마루튀렝 꼬르디에(Marthurin Cordier)의 강의들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대한 좋은 기억이 그로 하여금 그가 높이 평가하였던 스승을 제네바로의 초청을 가능하게 하였다. 1550년에 칼빈은 그의 데살로니가 전서 주석을 꼬르디에(Cordieher)에게 헌정하였다. 그 책의 서문에서 그는 그의 스승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스승님께서 저에게 가르쳐 주신 교육과 연구방법은 그 이후로 제가 성장하는데 결정적 도움과 활력소가 되었다는 것을 기꺼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의 상사의 명령에 따라 칼빈은 곧 몽테규 꼴레쥬(Coll ge de Monta- igu)로 옮겨 그 곳에서 5년간을 보낸다. 이 학교는 마르슈 학교보다는 유명한 학교였으나 칼빈이 갔을 때는 형편없는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이 학교에서 공부한 바 있는 에라스무스는 이 학교의 조야한 상태들에 대해 많은 조소를 털어놓았다. 역시 이 학교의 이전 학생이었던 유명한 라브레(Rabelais)는 그의 지도 교사(Gargantua)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그를 사람들이 몽테쥬라고 부르는 꽤재재한 콜레기움으로 데려왔다고 믿지 마십시오. … 왜냐하면 철창안에 갇힌 노예나 타타르인, 감옥에 갇힌 살인자,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집에 있는 개들이 언급한 고급학교에 있는 천덕구러기들보다 훨씬 더 낮게 취급당했을 것입니다. 내가 만약 파리의 왕이라면 악마를 불러다가 기숙사에다 불을 질러 총장과 교사들을 함께 불에 태우고 말았을 것입니다."
에라스무스가 언급한 이 학교에서 칼빈은 신학은 고사하고 감기와 이 떼에 부대꼈고, 엄격한 규율에 시달렸다. 회초리가 난무했고 대화는 오직 귓속말로만 오갔고, 한밤중까지 힘겨운 영적 훈련이 요구되었다. 과장된 금식훈련을 명분으로 음식량이 거의 생존할 정도만 제공되었다. 이와 같은 비인도적인 방법들이 칼빈이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했던 위장병을 가져다주었다. 이 학교는 칼빈이 들어오기 전에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와 성장하는 프랑스 종교개혁에 대한 격력한 반대자로 널리 알려진 나탈리 베다(Natalis B da)의 통치 아래 있었다. 칼빈에게 영향을 준 스승은 스코트란드 출신의 학식 있는 요한 메조(Johan Mejor)였다. 그에게서 칼빈은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hardus)의 초기 중세 신학을 전수 받고 어거스틴의 사상 세계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다른 교수는 스페인 출신 안토니오 코로넬(Antonio Coronel)이었다. 그를 통하여 칼빈은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에피쿠로스, 플라톤의 철학에 입문할 수 있었다. 깊은 철학적 교부 신학적 학식의 기본 줄기를 미래의 개혁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중하였던 탐구를 통하여 축적하여 갔다. 거기에 덧붙여 그가 후에 매우 흥미를 가졌던 스콜라적 토론술을 익혔다.
논쟁하는 가운데 토론하는 기술, 논쟁상대자를 궁지까지 몰아넣고 추적하는 것을 그는 후에 완전히 터득하였다. 이와 같은 능력들은 결코 퇴보한 적이 없는 좋은 기억력에 의해서 뒷받침되었다. 이는 그가 강의에서 들었던 내용들을 매일 아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외웠던 훈련과정에서 터득된 능력이다. 의심할바 없이 천부적으로 타고난 재능이 큰 몫을 차지했음은 틀림없다. 칼빈은 합리성(raison)과 문장과 사고의 명확성을 선호하였다.
이곳 파리에서 칼빈은 그의 전생애동안 계속되었던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그들은 니콜라 콥(Nicollas Cop) 가족과 그의 사촌 로버트 올리베탕(Robert Oliv tan)이었다. 그가 1528년 혹독한 육체적, 정신적 훈련과정을 이수한 후 몽테쥬 꼴레쥬를 떠났을 때 그가 차지했던 자리를 메꾸며 혹독한 훈련과정에 입문한 사람이 후에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von Loyola)였다. 칼빈은 몽테큐 꼴레쥬를 졸업하므로 대학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대학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의 두 번째 아들에게 본래는 신학을 공부시키기로 마음먹었던 아버지는 법률을 공부하도록 하였다. 칼빈은 그의 아버지가 생각을 바꾼 것은 법률가로서 경력을 쌓는 것은 좋은 수입이 보장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설명하였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였다. 파리에는 단지 교회법학과만 있었기 때문에 오를레앙 대학으로 가기로 마음을 바꾼다. 왜냐하면 이 곳에 탁월한 법률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그당시 학문적인 명성이 하늘의 휘황찬란한 별처럼 빛나던 피에르 드 레스트왈르(Pierre de I'Estoile)에게 큰 매력을 느꼈다. 레스트왈르는 개신교 운동의 반대자였고 후에 프랑스의회의 의장을 역임하였던 사람이었다. 이 대학에서는 니꼴라 베루(Nicolas B rauld)와 교육자 가스파르드 꼴리니(Gaspards de Coligny)가 가르쳤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오를레망 대학에서 인문주의적 경향을 띤 교육의 영향을 받았다. 바로 이 시기에 이 대학에서 로트바일(Rottweil)출신 독일계 희랍철학자 멜키오 볼마르(Melchior Vol- mar)라는 인문주의자(人文主義者)가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종교적 사상에 대하여 개방적이었다. 칼빈은 이 교수에게서 희랍어를 배웠고 아마도 볼마르를 통해서 루터의 사상들과 첫 번째 접촉을 가진 듯 하다. 볼마르의 집에서 칼빈은 그 당시 9살이었고 후에 그의 동료였으며, 후계자가 된 데오도르드 베제(Th odore de B ze)를 알게 되었다. 의심할 바 없이 학생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던 이 선생에 대하여 칼빈은 좋은 기억을 간직하였다. 1546년 칼빈은 그가 쓴 고린도후서에 대한 주석을 이 선생에게 헌정하였다.
1530년에 볼마르는 부르쥬(Bourges) 대학으로 갔다. 칼빈도 그를 따라 갔다. 칼빈은 인문주의(人文主義) 정신으로 로마법을 가르치는 교수로 봉직하였던 탁월한 이테리 출신 법학자 안드레아 알치아티(Andreas Alciati)에게서 법률학 자격증을 획득하고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법률학 연구가 칼빈의 필작들 가운데 커다란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그가 손으로 직접 쓴 민사소송 절차법 초안문들과 다른 법률안들에 대한 의견서들(Gutach- ten)은 그가 탁월한 법률가임을 증명하고 있다. 늘 반복되는 칼빈이 보수적인 법률학회의 추종자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그는 후에 현재 효력을 발생하고 있는 법률과 관계가 없고, 시민들의 법적 관심을 고려하지 않고 법률적 효력을 발휘하고자하는 전통적인 로마법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바로 법률가적 입장에서 칼빈은 그의 공부가 끝나갈 무렵에 새로운 조류로 등장한 인문주의(人文主義)를 조우(遭遇)하게 된다. 이를 통해 직접적으로 고대사상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을 높이 평가할 수 있었던 학문적 업적이 그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그가 법률공부를 마지못해 했다는 견해는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다.
1531년 5월 26일 칼빈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아들은 병원으로 서둘러 갔다. 그가 그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보도하고 있는 방식이 그 사이에 자리를 잡은 소외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제 칼빈은 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직업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프랑소아 1세는 부데(Bud )의 권유를 받아 소르본느 대학의 오랜 전통에 맞서는 대안으로 왕립대학을 설립한다. 현재 꼴레쥬 드 프랑스 대학(College de France, 역자주: 개방대학이며 프랑스 학술원 회원이 강의하는 프랑스 최고 지성의 전당)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이 대학에서 인문주의(人文主義)는 호기를 맞게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총장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바타블(Vatable)은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이곳에 와서 칼빈은 근본적인 인문주의교육을 철저히 받을 수 있었다. 의류상이었던 에띠엔느 드 라 포르쥬(Etienne de la Forge)의 집에서 칼빈은 제라드 루셀(G rard Roussel)의 지도 아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다. 르페브르 데타플르의 사상이 여기에서 토론되었고 개혁운동이 이곳에서 움터나게 되었다. 보통 생각하기로는 이 모임이 교회의 개혁운동을 꿈꾸었고 프랑스 개혁운동에 동력을 부여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상은 루셀의 모임은 그 당시 개혁운동을 이끌었던 그룹이라 말할 수 없다. 칼빈 자신이 이에 대한 증거다. 칼빈은 개혁운동을 시도하는 대신에 부데(Bud )와 에라스무스처럼 인문주의적으로 문학적인 저술활동을 하는데 그 생의 목표를 두었다.
이러한 길을 가려고 하는 그는 그의 첫 번째 책 세네카의 논문 "관용론"(De clementia)에 대한 주석에서 좌절을 경험했다. 이 작은 책은 스토아의 윤리를 높이 평가하는 그 당시 프랑스 인문주의 경향을 대변하고 있다. 어느 한 곳에 이와 같은 틀을 벗어나는 신학적 입장을 찾아볼 수가 없다. 자연 종교와 섭리에 대한 스토아적 입장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삶과 국가윤리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들은 개혁자의 후기 신학의 특정한 영역과 관련을 맺고 있다. 훌륭한 라틴어로 이 책을 쓴 저자가 3년 후에 기독교 강요를 쓴 저자로 변신할 것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만약 칼빈이 이 첫 번째 저작을 통해 부데나 르페브르 데파플르 또는 에라스무스 등이 누리던 최고 정상에 오르고자 했다면 좌절을 겪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의 책은 서점지기가 되어 출판비를 상쇄하기에도 어려울 정도였기 때문이다.
1532년, 그의 첫 번째 책 출간으로 마감되는 거의 10년간에 걸친 그의 포괄적인 교육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된다. 어떻게 이 사람이 복고와 반 종교개혁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종교개혁을 성립시키고 전진시키는 종교개혁자가 되었는가?
2. 회심
1534년 5월 4일, 칼빈은 그가 맡고 있던 두 가지 교회가 주는 성직록(Pfr nden)을 포기하였다. 그는 같은 해 4월 10일에 25세가 됨으로 규정에 따라 성직록 수입과 관련된 직책을 스스로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다른 두 교회직분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 둘 중 한 명은 그의 친척이었다) 양보하고 그 권리를 양도하였다. 교회봉록의 포기는 로마교회와의 단절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평가되어져야 한다. 칼빈을 종교개혁의 길로 이끌었던 동기들에 대해서는 물론 봉록포기 선언만을 가지고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다. 물론 내적인 회심의 사건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상정할 수 있다. 이 회심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냐는 우리에게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칼빈이 우리에게 인색한 언급만을 남겨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거기에 대해서 일반적인 설명만을 할 수 있다.
1539년 사도레(Sadoret) 추기경이 보낸 유명한 대답에서 그와 같은 일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칼빈은 이 곳에서 그를 회심으로 이끈 경험들에 대해서 밝히는 종교개혁의 추종자로 자기를 드러내고 있다. 만약 이 보고가 한 전기적인 증언이라고 한다면 그의 회심은 진지하고 어려운 양심의 갈등을 전제하고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옛 카톨릭 교회와의 절교는 루터의 경우에서처럼 갇힌 양심을 해방하는 복음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교회적 속죄수단과 인간적인 회개업적들은 이 해방을 성취할 수 없다. 복음의 선포에 전적으로 개방하는 것은 먼저 칼빈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의미에서 특별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교회에 대한 외경을 방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그는 그 말씀을 인간을 향한 직접적 요구와 위로 받은 양심의 능력 안에서 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죄 용서의 확증으로 경험하고 있다. 칼빈의 회심에 대한 유일하고 믿음직스러운 증언을 읽으면 우리들은 확실한 역사적인 바탕 위에 있는 셈이 된다. 1557년, 그의 시편 주석 서문에서 개혁자 칼빈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내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나의 아버지는 이미 내가 신학을 공부하도록 정해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관련을 맺고 있던 법률학이 더 많은 수입을 보장한다는 것을 보았을 때 이 희망을 빨리 실현하는 방향으로 그의 계획을 변경하였다. 이와 같이 나는 철학공부를 중단하고 법률학 공부로 바꾸었다. 비록 내가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섭리의 감추어진 고삐를 가지고 내 삶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내가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교황적인 미신신앙에 집요하게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미 굳어진 나의 생각을 갑작스런 회심을 통하여 고분고분하도록 강요하셨다. 내가 진실한 경건에 하나의 확실한 맛을 터득한 이후에 그 밖의 공부들을 포기하지 않고 곁들여 공부하면서 전진을 하고자 하는 열망을 불타오르게 하셨다. 순수한 가르침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이 회심하였던 것보다 초보자요 신입생에 불과하였던 내가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1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수줍은 성격을 가진 나는 항상 고독과 고요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 당시 나는 조용히 파묻혀 지내고자 했다. 그러나 그러한 바램은 잘 이루어지지 못했다. 나의 도피처는 공적인 학교였으니까"(CR 59,21).
본래적인 회심의 경험에 관하여 칼빈은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갑작스러운 회심(subita conversione)을 통하여 그를 온순하게(ad docilitatem) 강제로 길들였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칼빈이 사용하는 "온순함"(Gelehrigk- eit)은 그의 언어사용에 있어서 학생이나 청강생 관계를 의미하고 있다. "온순하도록 강요를 받았다"(Zur Gelehrigkeit gezwungen)는 것은 사람이 듣고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에 놓인 것을 뜻한다. 칼빈은 이 경험을 하나님께서 복음을 위해 그 자신을 개방하고 가르침을 받도록 강요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사도렛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 과정을 비슷하게 설명하였다. 하나님께서 회심(Conversio)을 통하여 이 새로운 관계를 만드신다. 그 새로운 관계 속에서 그는 결단하고 순종할 수밖에 없다.
우리들이 이와 같은 칼빈의 자술 증언으로부터 어느 정도 그의 회심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면 그 과정은 우리들의 역사적인 인식으로 거리를 설정하고 있다.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갑작스러운 회심'이 일어났는지 우리들은 모른다. 교회사적인 탐구는 많은 가설들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회심의 시기와 관련하여 확신을 주는 증거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우리는 위의 증언에서부터 회심은 법률학을 공부하는 기간 중에 일어났다는 것을 가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회심은 이미 1530년 전에 일어났을 수 있다. 루터의 저작들에 관한 독서, 그의 사촌 올리베탕과 그의 스승 볼마르의 영향들이 이 시기에 칼빈의 길을 개혁으로 이끌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칼빈이 1532년에 쓴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해 쓴 해설 주석에는 종교개혁사상을 나타내주는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근거가 박약하다. 물론 이 책에는 칼빈의 교회에 대한 관계가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몇 군데가 있다. 젊은 작가들이 외식적인 경건에 저항하고 교묘한 언어들로 순교자들의 유물과 면죄부 판매에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저항은 그 당시 카톨릭 인문주의자들도 할 수 있었다. 우리들이 세네카 주석을 고찰해보면 빨라야 1533년에 회심사건이 일어났음을 가정할 수 있다. 칼빈이 이 해 가을에 회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우리가 곧 다루게 될 같은 해 11월 1일 니콜라콥이 행한 총장 취임 연설이 개혁적인 성격을 담지하고 있으며 특별히 칼빈이 작성한 것이라는 판단을 할 때만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연구가들은 칼빈의 종교개혁에로의 길은 여러 해 동안의 숙성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는 입장에로 기울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칼빈이 유일하게 그의 회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곳에서 점차적인 발전 대신에 갑작스러운 회심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벽에 부딪히고 있다.
우리는 한 날짜 표기에 조심스런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만약 칼빈이 그의 보고의 말미에서 새 믿음에 들어선 많은 추종자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찾아왔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연대기적으로 이 때를 1534년으로 규정하지 않은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해에 비로소 우리들은 칼빈이 종교 개혁 운동이라 이름할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관찰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심으로 들어선 것은 아마도 1534년 봄이든지 아니면 1533년 가을이 아닐까 한다. 다른 모든 시기들은 단지 준비기간이었을 뿐이고, 회심과 관련지을 수 없다. 여하튼 회심의 시기는 칼빈이 그의 교회가 지급하는 은급을 포기하였던 1534년 5월 4일 전에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회심에 대한 개혁자의 모든 보도로부터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그가 회심을 인간을 전체적으로 그의 사역 가운데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고백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칼빈은 그의 삶을 그에게 거의 의무감이 아니라 육박해오는 복음의 진리와 일치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들은 그가 연금을 포기한 것을 회심과 관련이 전혀 없는 것으로 주장할 필요는 없다. 물론 전통과 단절하고 공적인 발걸음을 옮기는데 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으나 수년이 소요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칼빈의 성격과 대치된다. 그가 회심으로 규정하는 일은 1528년이나 1532년에 발생하지 않았었다.
1533년 9월에 칼빈은 파리로 돌아온다. 파리시에는 운동과 소요가 지배하고 있었다. 칼빈은 제라드 루셀(G rhard Roussel)의 추종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루셀의 추종자들은 루셀이 쓴 소 논문들을 시내에 배포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칼빈은 오는날 까지도 그 배경에 대해서 연구가 계속되고 있는 사건에 말려들게 되었다. 에라스무스와 같은 사상을 가졌던 왕실의사의 아들이었던 칼빈의 친구 니콜라 콥(Nicolas Cop)이 의과 교수로서 파리대학의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전통에 따라 그는 만성절날 총장취임연설을 해야만 했다. 콥은 개혁운동에 가까이 서 있었기 때문에 이 용감한 학자는 함께 모인 교수들과 교회 고위 성직자들 앞에서 그의 확신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콥의 총장 연설은 에라스무스가 편찬한 신약성서 3판 서문과 마틴 부쳐가 번역한 루터의 기도집의 두 번째 부분의 인용으로 이루어졌다. 비록 그것이 비록 원문으로부터의 인용은 아니었지만 그 연설은 이같은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개신교적 사고와 행동을 향한 호소로 작용하였다.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한 소요가 일어났다. 총장은 피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때 그는 300리브로 현상수배되었다. 1534년에 그는 무사히 바젤에 도착하였다. 그는 콥총장과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칼빈을 붙잡으려고 하였다. 칼빈은 그의 생명이 위험에 처한 것을 깨닫고 도피하기에 이른다. 그 당시 사람들이 칼빈이 총장 취임 연설을 작성하였다는 것을 추측하였는지의 여부는 증명할 수 없다. 12명 이상의 콥의 친구들이 역시 도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칼빈의 전기를 처음으로 쓴 베자(B za)와 꼴라돈(Colladon)은 후에 제네바의 개혁자가 된 칼빈이 총장 취임 연설의 작성자라는 주장을 하였다. 여기에다 이들은 칼빈의 손으로 직접 쓴 연설의 일부가 제네바에서 발견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그것은 원문이 아니고 사본에 해당된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인용문이 개혁적인 증언을 담고 있고 그 작성자가 칼빈이라고 한다면 그의 회심은 1533년 11월 1일 이전에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총장 연설이 의심할 바 없이 칼빈의 것에 속한다는 생각은 아직도 생각할 많은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의 회심이 일어난 확실한 시점을 확증하는 문제는 남아있는 과제이다.
1534년은 칼빈이 그의 고향에 머물렀던 마지막해였다. 파리대학 사건 이후에 칼빈은 Charler d'Esprille라는 가명을 쓰면서 남 프랑스에 잠적하며 살았다. 그는 그후 앙굴렘(Angoul me)으로 가서 교황으로부터 봉록을 받는 사제였던 그의 친구에게서 도피처를 찾았다. 강요된 한가로운 생활을 그는 집중적으로 연구하는데 활용하였다. 그의 친구 루이 뒤 티에(Louis du Tillet)가 갖춘 훌륭한 장서가 칼빈의 교회 교부들의 연구를 가능하게 했다. 특별히 어거스틴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다. 후기 종교개혁자 저술에 4000번이 훨씬 넘는 인용은 그가 어거스틴에 대한 연구를 얼마나 집중하였는가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곳 연구에서 칼빈은 쯔빙글리의 초기 라틴어로 쓴 글들을 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534년 3월, 오를레앙에 살고 있는 그의 친구 다니엘에게 보낸 편지가 현재까지 보관되어 있는데, 그 편지는 우리들이 그의 연구 성과가 개신교적인 진리에 가까이 접하고 있음을 보도해주고 있다. 뒤 티에(du Tillet)와 함께 그는 헬라어에 대한 그의 실력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밖에 연구하는 일과 함께 칼빈은 이해에 많이 돌아다녔다. 그는 프와티에(Poitiers)와 파리 지역에 있는 개신교 그룹들과 밀접하게 관계을 맺는다. 칼빈은 종교 개혁 운동들의 발단자(Initiator)는 아니었다. 스트라스부룩이나 제네바에서도 아니었다. 그의 위대한 은사는 이미 시작된 종교 개혁 운동을 꾸려가고 정착시키는 것이었다. 4월에 칼빈은 네락(,N rac)으로 여행하였다. 그 곳에는 왕의 누이인 나바드의 마가레드(Margarethes de Navare)의 보호 아래 제라드 루셀(G rard Roussel)이 활동하고 있었고, 르페브르 데타플르가 그곳에서 그의 마지막 도피처를 발견하였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80세의 인문주의자(人文主義者)는 젊은 칼빈이 그를 방문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대는 주님의 도구로 선택을 받았다. 그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나라에 그의 왕국을 건설하실 것이다."
이 말이 약간은 전설적으로 들릴지라도 마가렛트가 팔즈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칼빈은 르페브르 데타플르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운동을 내다볼 수 있는 탁월한 혜안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를 위협하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다시 한번 파리로 갔다. 가명을 쓰면서 파리에서 공부하고 있던 미카엘 세르베트(Michael Servet)가 칼빈에게 상담을 간청하였다. 칼빈은 쎙 안트완느(Saint Antoine) 거리에서 그와 만나기로 약속했으나 세르베트는 나타나지 않았다. 스페인 출신 세르베트는 이 약속을 지키지 않음으로 그의 왜곡되고 과장된 입장들을 칼빈의 입장과 조정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칼빈 스스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파리에서 나는 가능하면 우리 주님을 위해 그를 얻기 위해 내 삶을 모험에 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그에게 제공하는 희생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유용하게 쓰려고 하지 않았다"(CR 36, 481).
칼빈은 비밀리에 오를레앙으로 갔다. 여기에서 그는 그의 첫 번째 신학저술(Psychopannychia)를 썼다. 이 논문은 재세례파들과 그들의 영혼의 잠에 대한 교리를 반박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죽음 후에 잠을 자는 것과 같은 상태에 빠졌다가 그리스도 재림의 날에 다시 깨어난다는 것이었다. 칼빈은 이들의 교리에 반하여 죽음 후에 오는 영생을 보장해주는 종말론을 전개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칼빈은 그의 친구 뒤 티에(du Tillet)를 방문하기 위해서 클레(Claix)로 간다. 그러나 이곳에는 더 이상 그가 안전하게 머물 거처는 없었다. 두 친구는 함께 개신교 신앙을 가진 프와티에(poitiers)에서 은신처를 찾았다. 칼빈은 비밀집회 예배에서 설교했고 이 감추어진 공동체에서 개신교 방식에 따라 성만찬을 거행하였다. 이해 가을에 다시 한 번 박해강풍이 몰아닥친다. 전국 곳곳에서 개신교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화형의 장작더미 위에서 죽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