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 이론과 창작으로 20세기 시조 중흥에 기여하였으며 국문학의 올과 날을 세움. 가람 이병기는 국문학자 또는 시조시인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지칭만으로는 무엇인가 아쉽다는 생각이다. 물론 가람은 우리 국문학 연구의 초창기에 올과 날을 챙겨 세운 학자요, 쇠퇴 일로에 있던 우리 시조시를 부흥·발전시킨 시인이었다. 이 두 가지 면에서의 업적만으로도 가람은 우리 문학사와 더불어 길이 그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학자·시인의 지칭만으로 아쉽다는 것은 워낙 가람에겐 독보적인 분야가 많았기 때문이다. 교육자·한글운동가·애란가·애주가로서의 가람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렇다.
가람은 16세까지 고향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결혼까지 한 후, 학교공부를 생각하여 전주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학을 하였고, 서울의 관립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할 때의 나이는 20세였다. 가람의 학력은 이것이 전부였다. 한가지를 덧붙인다면, 사범학교 재학 중 매주 일요일 2시간씩 '조선어강습원'에 나가 주시경의 조선어 강의를 청강하였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가람은 거의 독학으로 국문학연구와 시조시 창작의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가람의 좌우명은‘후회를 하지말고 실행을 하자’는 것이었다. 가람이 50여년간 꾸준히 《일기》를 쓴 것도, 78세 생애에 언제나 떳떳하여 흠결을 남기지 않은 것도 이 좌우명을 실행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일제 식민지시대에 있어서의 가람의 행적을 보아서도 그렇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루어야 했고, 이른바 '창씨개명'에도 응하지 않았다. 임종국의《친일문학론》에 의하면 가람은 일제시대에 쓴 '시와 수필의 어느 한 편에서도 친일문장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얼굴'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맹자는 백세지사(百世之師)를 말한 바 있다. 백대의 후세까지도 사표가 될 사람을 일컬음이다. 이러한 사람의 학풍이나 풍도를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사람을 본떠 분발하고 감동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도 했다. 가람 이병기의 한 생을 살피는 동안 줄곧 따라온 낱말의 하나가 바로 이 '백세지사(百世之師)'였다. 올해는 가람의 탄생 110주년이자 가람의 서거 33주년이 되는 해로서 21세기에도 가람은 겨레의 스승으로 우러름을 받아 마땅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