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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산 지역의 문화유산(스토리텔링)
(오릉-나정-창림사지-포석정지-배리석불입상-삼릉-목없는석불좌상-마애관세음보살입상-마애선각육존불)
정석준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신라문화전문해설사 정석준입니다. 다들 어디서 오셨는지요? (서울에서 오셨다고요. 서울이란 말은 서라벌 또는 사로가 새벌-서블-서울로 변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서울은 통일신라시대에는 한양(한산부 소속)-양주로 불리웠고, 고려시대에는 양주- 남경-한양으로 불리웠으며, 조선시대에는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서 한양이라 하였고, 조선말기에는 한성, 일제시대에는 경성으로 불리우다가 서울로 명명하게 된것은 해방 이후부터입니다. 한양, 한성을 왜 서울이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신라 1,000년동안 이곳 경주를 서울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서울이라고 하면 임금님이 계시고 나라의 중심되는 곳, 즉 수도의 이미지가 사람들의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까 경주의 옛 지명이 서울인데 지금의 서울에게 그 이름을 빼앗긴 셈이라고 할까요? 이건 여담이고요.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이곳 경주는 신라 천년(B.C 57~A.D 935)의 고도(古都)였던 관계로 흔히 '노천박물관'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유물과 유적이 집중적으로의 분포되어 있는 민족문화의 보고(寶庫)입니다. 그 중에는 2011년 9월 현재, 국보 34점, 보물 83점, 사적 77점 등 273점이 국가 및 도지정문화재이며, 43점이 문화재자료입니다. 유네스코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하여, 불국사ㆍ석굴암(1995년)과 경주역사지구(남산지구, 월성지구, 대릉원지구, 황용사지구, 산성지구/ 2000년), 양동마을(2010년)을 세계역사문화지구로 등재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서남산 지역의 유적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서남산은 남산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서남산을 이해하려면 먼저 남산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남산은 월성의 남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주산인 468m의 금오봉과 수리봉이라 부르기도 하는 494m의 고위봉을 비롯하여 양산과 도당산을 아울러 남산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남북의 길이는 약8Km요 폭은 약 4Km에 이르는 어지간히 큰 산입입니다. 남산을 동서 양편으로 분리하여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크게 나누기도 하는데, 양단 모두 40여개의 크고 작은 계곡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골짜기마다 전설이 있고 불교유적이 있습니다. 남산이야말로 역사와 전설의 보고이며, 민족의 영산(靈山)입니다.
오늘 우리가 답사하려고 하는 서남산 지역은 신라의 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이기도 하며, 천년 사직의 막을 내린 곳이기도 합니다. 시조왕의 탄생처인 나정, 최초의 궁궐터인 창림사지, 망국의 한을 담은 포석정지가 여기에 있으며, 오릉을 위시한 많은 왕릉과 고분이 있고 바위마다 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자! 그럼 답사를 떠나 볼까요?
오릉
보시는 바와 같이 오릉은 삼국통일의 영주인 태종 무열왕의 능역과 함께 신라 왕릉 가운데서 가장 환경이 잘 조성되어 있는 것 중의 하나로 꼽힙니다. 그것은 박혁거세왕이 박씨왕의 시조인 동시에 신라의 국조(國祖)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연륜을 자랑하는 노송이 울창하게 솟아있는 한가운데에 5기의 능이 옹기종기 정답게 모여 있습니다.
오릉의 피장자에 대해서『삼국시기』와『삼국유사』의 기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삼국사기』에는 시조왕인 박혁거세왕,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과 시조왕의 왕비인 알영(閼英), 다섯 분의 능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說話)를 전하고 있습니다.
"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하늘로 승천하고 7일 후에 유해가 흩어져 땅에 떨어졌는데, 왕후도 또한 세상을 떠나는지라, 나라 사람들이 흩어진 유해와 합해서 장사 지내고자 하니 큰 뱀이 나타나서 방해를 하므로 사람들이 이는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머리와 4지(팔, 다리)를 제각기 장사지내 다섯 개의 능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릉을 사능(蛇陵)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내용이 서로 상이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두 기록 모두 공통적으로 박혁거세의 능으로 기록한 것은 특기할 만합니다.
내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오릉은 외관상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분(封土墳)입니다. 5기의 고분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한 고분이 높이 10m로 가장 큰 규모이며, 합장분으로 추정되는 표주박 형태의 고분은 높이 약 7.2m 규모입니다.
이곳은 오릉의 제실인 숭덕전(崇德殿)입니다. 숭덕전은 조선 세종 11년(1429)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선조 33년(1600)에 재건하였고, 숙종 때 수리하였으며, 경종때 사액되었습니다.
〔신도비 앞에서〕이 비는 신도비(神道碑)인데, 혁거세왕과 숭덕전의 내력이 새겨져 있으며, 영조 35년(1759)에 세운 것입니다.
이 우물터는 알영왕비의 탄생지라 일컬어지고 있는 알영정(閼英井) 터입니다. 알영왕비의 탄생설화 또한『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삼국사기』에는 '시조왕이 즉위한 5년(BC 53) 정월, 알영정에 계룡이 나타나서 오른쪽 겨드랑이 갈빗대 밑으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이를 본 한 노파가 이상하게 여겨 거둬 기르며, 우물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알영은 자랄수록 그 인품과 용모가 뛰어나므로 시조께서 그 말을 듣고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알영왕비는 마음이 어질고 행실이 착하여 내조의 공이 컸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시조왕과 아울러 두 성인(二聖)이라고 하였다. 시조왕이 돌아가시자 왕비도 또한 세상을 떠났으므로 같은 영역에 장사지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삼국유사』에는 '혁거세가 탄생하던 날 사량리 알천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갈비에서 계집애를 낳았는데, 모습과 얼굴이 유달리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월성 북쪽의 내에 가서 목욕을 시키자 부리가 떨어졌다. 이 아이가 알영이며 시조왕후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경주김씨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설화 또한 닭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석탈해왕 4년에 왕궁 남쪽에 있는 시림에서 닭우는 소리가 들려 호공이란 신하에게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호공이 닭 우는 소리를 쫒아 시림에 가 보니 나무 가지에서 힌 닭이 울고 있고 그 아래 금괘가 놓여 있었습니다. 금괘를 열어보니 아주 잘 생긴 어린아이가 방긋 웃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왕궁에 데려다 키웠는데, 아이가 금궤에서 나왔다하여 성을 김이라 하고, 이름을 알지(알지는 어린 아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라고 하였으며, 시림에서 닭우는 소리를 듣고 김알지를 얻었다고 하여 이후 시림을 계림으로 고쳐 불렀다고 하며, 나라 이름을 계림이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김알지의 7대 손이 바로 13대 미추왕입니다.
알영왕비와 김알지의 탄생설화는 닭과 관련이 있는데, 초기 신라인들은 닭을 그들의 토탬으로 숭배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닭이 울었다는 것은 새벽을 뜻하는 것입니다. 광명이세(光明理世), 밝게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통치자의 철학이었고 밝음을 동경하는 것은 신라인의 공통된 마음가짐이었습니다.
시조왕 박혁거세(BC 57~AD 4 재위)는 6촌장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후 61년 동안을 알영왕비의 내조와 호공(瓠公)과 같은 훌륭한 신하들의 보필로 어진 정치를 베풀었습니다.
즉위 8년(BC 50)에는 왜인들이 변경을 침입했다가 시조의 어진 덕을 알고는 곧 돌아가 버렸으며, 30년(BC 28)에는 낙랑군이 침입하였는데, 신라 사람들이 밤에도 문을 닫지 아니하고 곡물을 야적해 놓은 것을 보고 "이 나라 사람들은 서로 도적질을 하지 않으니 도의가 있는 나라임을 알겠다. 그런데 우리가 가만히 군사를 이끌고 와서 이를 습격하는 것은 도적들과 다름이 없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하며 곧 군사를 이끌고 가버린 일도 있었습니다. 시조의 덕은 이와 같이 무도한 이웃 침략군도 감화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훌륭한 임금님이 혁거세 왕이었습니다.
지난 해 5월부터 12월까지 드라마 선덕여왕이 인기리에 방영되었는데, 보신 분 있으세요? 저는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드라마는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한다지만 역사를 왜곡한 것이 너무 않았습니다. 예컨대 드라마 가운데 덕만과 천명공주는 쌍둥이로 태어났고, 덕만은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진평왕에게 천명공주가 있었다는 기록 자체가 없고(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천명공주가 맏딸이고 덕만공주가 둘째 딸인데, 용수와 결혼하여 김춘추를 낳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덕만이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었다고 스토리를 전개하였으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덕만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성골의 남자가 없어졌으므로 여왕이 즉위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덕만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가 성골이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남는 것은 진골로서 왕위를 계승한 무열왕 김춘추는 왜 성골이 되지 못하고 진골의 신분이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우선 떠오르는 것은 고대사회에서 신분의 높낮이를 결정짓는 것은 혈통에서 비롯된다는 점입니다. 그럼 김춘추는 어떤 신분이었을까요? 김춘추는 25대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혹은 용춘)을 아버지로, 26대 진평왕의 딸인 천명공주를 어머니로하여 태어났으므로 혈연적으로는 순수한 왕족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성골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대장군으로 전쟁에 나가 혁혁한 공을 세웠고, 대당 외교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황룡사를 건립할 때는 공사를 총지휘한 인물이었음에도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성골이 사라진 뒤에야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골이란 무엇이냐?"하는 의문은 더욱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됩니다. 그것은 혈통만이 성골과 진골을 구별짓는 절대적인 요소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의문을 푸는 한 열쇠는 용수가 왜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을까?하는 문제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용수가 왕위를 계승할 수 없게 된 이유를 찾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성골과 비성골을 구별 짓는 요소가 될 것이며, 만약 그것이 혈통에 있지 않는 것이 명백하다면, 그 구별의 근본요인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용수와 춘추 두 부자가 어떤 이유로, 언제부터 비성골이 되었느냐? 하는 시기와 원인은 전적으로 그의 조부인 진지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지왕이 왕위를 물러난 경위에 대해서『삼국사기』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삼국유사』에는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정치가 어지럽고 기강이 문란해져서 나라 사람들이 왕을 폐했다.'고 했으며, 왕력편에는 '진지왕묘는 애공사 북쪽에 있다.'고 했는데, 능(陵)이라 하지 않고 묘(墓)라고 한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진지왕이 폐위되고 왕의 신분도 박탈된 후, 그 아들 용수와 용춘, 손자인 춘추의 신분도 성골에서 진골로 강등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골이라는 것은 혈연만이 절대적인 요소가 될 수 없고, 지배력을 형성하는 세력 중에서도 왕권을 계승할 수 있는 특정한 집단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좀 길어진 것 같습니다만, 김춘추가 왜 성골이 아니고 진골인지, 평소에 의문을 가지신 분이 없었는가 해서 덧붙여 몇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럼 시조왕의 탄생지인 나정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나정
이곳이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탄강전설이 깃든 나정(蘿井)입니다. 신라 제22대 지증왕 때, 이곳에 신궁을 창립하고 제향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여기 이 비석과 비각은 조선 순조(1802)때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2,000여 년 전, 고조선의 유민들이 경주분지로 남하하여 산곡간에 여섯 마을(六村)을 이루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어느 날 고허촌장인 소벌도리공이 양산 기슭 나정 숲 사이에 말 한 필이 무릎을 끊고 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상하게 여겨 그곳으로 가 보았더니 말은 간곳이 없고, 큰 알 한 개(大卵)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을 갈라 보니 그 속에서 한 어린아이가 나왔습니다. 소벌도리공은 그 아이를 잘 길렀는데 나이가 10여 세가 되자 유달리 숙성했습니다. 육촌 사람들은 그 아이의 출생이 신기하므로 받들어 왕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신라의 건국설화이며, BC 57년의 일이었습니다. 이때 왕의 나이는 13세였습니다. 진한 사람들은 표주박을 박이라고 하였는데, 왕이 박과 같은 알에서 났다고 하여 성을 박(朴)이라고 하고,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 光明理世]는 뜻으로 혁거세(赫居世)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은『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이지만,『삼국유사』에는 왕을 선출하고자 6촌장이 모여 회의를 하던 중 그들에 의해 박혁거세가 발견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시조 탄생설은 신라인이 갖는 치국의 이치와 국민적 신앙을 나타낸 것입니다. 박(朴)은ꡐ밝음ꡑ즉 광명을 뜻하는 것이며, 혁거세(赫居世)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광명이세(光明理世)의 염원에서 온 것입니다.
김씨(金氏) 시조 탄생전설 또한 이런 점에서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닭이 울었다는 것은 새벽을 뜻하는 것이며, 광명을 희구하는 차원에서 이념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즉 광명이세는 통치자의 철학이었고 밝음을 동경하는 것은 신라인의 공통된 마음가짐이었습니다.
나정일대는 신라시대의 양산 지역이며, 나라의 신( 國神)을 모신 나을신궁(奈乙神宮)이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나정에는 시조 아기의 몸을 씻겼다고 하는 우물(보시는 바와 같이 지금은 돌로 덮혀 있습니다)과 시조 탄생의 사실을 적은 비가 있고, 이를 보호하는 작은 비각이 있을 뿐입니다.
경주시에서는 신궁(新宮)으로 추정되는 유적 복원으로 역사현장을 재현하기 위해 지난 2007년부터 오는 2012년까지 사업비 71억원을 들여 경주나정복원정비사업을 추진해오고 있는데, 지난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네 차례의 발굴조사를 거친 결과 팔각건물지(300.27㎡)와 부속 건물지, 복랑형 건물지, 우물지, 담장, 명문기와 등이 확인되어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다음 답사지는 창림사지 입니다.
창림사지(昌林寺址)
보시다시피 이곳 창림사지는 나정의 안쪽 서남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창림사가 창건되기 이전에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께서 이곳에 최초의 궁궐을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창림사지에는 궁궐의 자취는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고, 절터로서도 너무나 흐트러져 버렸습니다. 절터의 석물들은 인근의 민가에서 건축자재로, 또는 분묘의 석물로 사용하기 위해 가져 가 버려, 지금은 일부의 토단과 석단만 남아 근근이 이곳이 절터임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창림사터 윗쪽에 삼층석탑이 서 있습니다. 이 탑은 1824년 사리장엄구를 도굴하려던 자에 의해 도괴되었는데, 이 때 조탑 사실이 기록된 창림사 무구정탑원기(昌林寺 無垢淨塔願記) 동판이 나왔습니다. 이를 추사 김정희가 그대로 묘사해 두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창림사터 삼층석탑은 문성왕 17년(855년)에 세운 탑이라고 합니다. 현재 탑의 높이는 7m로 남산 일대에서는 가장 크고 우람한 탑입니다. 1979년에 이리저리 넘어져 있던 탑의 부재들을 모아 복원하였는데, 2층과 3층 몸돌, 그리고 기단부의 절반 정도를 새로 다듬어 끼워 넣었습니다.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3층 석탑인데, 위층 기단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처럼 팔부신중을 기단에 새긴 예는 남산의 동쪽에 있는 남산동 쌍탑 중 서탑에서도 볼 수 있으니, 남산을 부처님 나라로 여기던 신라 시대에, 남산의 해뜨는 쪽과 해지는 쪽에 같은 의도로 탑을 세운 것으로 추측됩니다.
1층 몸돌에는 사방에 문 모양이 새겨져 있고 문고리도 쌍으로 새김 되어 있어 부처님의 영(靈)이 드나드는 문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탑이 무너져 있던 북쪽 골짜기에서 탑 위 상륜부의 일부인 앙화가 발견되어 지금 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8개의 꽃잎이 벌어져 있는데, 사방에는 부처님 모습을 새겼고, 네 귀퉁이에는 날개를 활짝 편 극락조(極樂鳥)를 새긴 화려하면서 멋들어진 모습입니다.
상층 기단부에 새겨진 팔부신중은 지금 네 개만 남아있습니다. 팔이 여덟인 괴상한 모습을 한 지옥의 왕 아수라, 사자탈을 쓰고 놀이를 주관하는 건달바, 오른손에 금강저라는 무기를 들고 악을 쳐부수는 천(天), 힌두교에 근원을 둔 뱀나라의 왕 마후라가, 이렇게 넷입니다. 모두 구름을 타고 천의(天衣) 자락을 날리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인데, 풍성한 양감과 힘이 느껴지는 뛰어난 조각 솜씨입니다.
탑 아래쪽 소나무 숲 속에 아주 이색적인 쌍두귀부가 있습니다. 비신도 없어지고 거북의 머리도 다 떨어져 나가고 없지만, 살이 통통히 오른 동글동글한 앞발이며 서로 다른 쪽을 향하고 있는 모습들이 무척 귀엽습니다. 이 귀부 위에는 신라의 명필 김생이 쓴 비석이 있었다고 합니다.
원나라의 학사 조명부가 창림사비의 글씨를 평한 글 일부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21권 경주부에 "이 글은 신라의 스님 김생이 쓴 창림사비인데, 자획이 깊고 법도가 있어 비록 당나라의 이름 난 조각가라도 그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옛말에 '어느 곳엔들 재주 있는 사람이 나지 않았으랴'하였더니 진실로 그러하구나."라는 기록이 있는데, 진실로 그러합니다.
동경잡기 권3 오산기승(鰲山奇勝)에는 창림사비문과 관련된 서거정의 시가 소개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닷가에서 금오산을 바라보면 좋기도 하나 풍류와 문물 모두 옛날과 다르다.
웅장했던 저택들 터만 남아 있는데 냉이풀이 우거졌고
이름났던 동산에는 주인도 없이 끊어진 다리만 위태롭구나
누가 쇠피리를 신이 나서 부르는가?
신라 최초의 궁궐터요 창림사가 있던 이곳은 지금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 소나무숲 언덕으로 변해버린 여러 곳에서 건물의 주춧돌로 쓰였을 부재들이 여기저기서 나뒹굴고 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이곳은 이제 완전히 무덤터가 되어 버렸습니다. 쌍두귀부 옆과 법당 터, 그리고 삼층석탑 바로 앞에도 무덤이 들어서 있는데, 궁궐터나 절터나 무덤터가 뭐 별반 다를 바야 있으랴만, 세월의 무상함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바로 옆에 포석정지가 있습니다. 이동하겠습니다.
포석정지
포석정지가 있는 이곳 서남산은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입니다. 아마도 서남 산의 맑은 물과 수려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삼아 이곳에다 정자를 지었지 않았을까요?
포석정지가 있는 이곳 서남산은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입니다. 아마도 서남
산의 맑은 물과 수려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삼아 이곳에다 정자를 지었지 않았을까요?
포석정(혹은 포석사)의 포(鮑)는 전복 포자인데, 포석정의 돌 홈 모양이 마치 전복껍질모양과 같다고 해서 포석정이라고 명명(命名)하였다고 합니다.
포석정하면 정자(亭子) 형식의 건물일 것이라 생각이 들지만, 보시는 바와 같이 건물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으니 아쉽기가 그지없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즐기던 돌 홈(曲水渠)만이 덩그렇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전복형상의 돌에 물이 흐르게 하고 술잔을 띄우면 물의 양이나 잔의 형태, 잔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가다가 멈추고, 멈추었다가 다시 가는데(일종의 회돌이 현상),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곡수거(돌 홈)의 전체 길이는 22m인데 가장 긴 세로축이 10.3m이고, 가로축이 5m이며, 깊이 50Cm 가량의 도랑이 나 있는데, 모두 63개의 석재로 조립되어 있습니다.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은 중국 진나라 때의 명필가인 왕희지(307~365)와 그의 벗 41명이 난정이라는 곳에 정자를 세우고 개울물에 몸을 깨끗이 씻고 결제사를 올린 후,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올 때까지 시를 읊는 놀이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때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 3잔을 마시면서 즐겼다고 한다. 포석정은 이를 본 따서 만든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몸을 깨끗이 씻고 결제사를 올렸다고 하는 것을 보면, 유상곡수연은 단순히 풍류를 즐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제례의식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아집니다.
1975년 3월부터 이듬해 말까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안압지 발굴 조사를 하였는데, 수 천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참나무로 만든 14면체 주사위(주령구)도 있었는데, 이는 귀족들의 놀이기구로 한 면에 씌어진 글의 내용에 따라서 '소리 내지 말고 춤추기', '술 다 마시고 크게 웃기', '술 석잔 연달아 마시기' 등의 놀이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로써 미루어 볼 때 당시 신라 상류사회가 얼마나 풍류를 즐겼는지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 시작한 유상곡수연은 이웃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이곳 경주 포석정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포석정지 바로 윗쪽에는 배상지라고 부르는 못이 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 물을 포석정으로 끌어들여, 큰 돌거북의 입을 통하여 뿜어 나오게 하고, 다시 돌 홈으로 흐르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 돌거북이 조선말엽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조상들이 남겨준 위대한 문화유산을 후손인 우리가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송구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의 포석정은 일제강점기 때 보수되어 원래의 모습과 많이 변형되어 버렸으므로, 하루 빨리 고증을 거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포석정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신라 49대 헌강왕 이전에 지어진 것만은 틀림없습니다.『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헌강왕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항연을 베풀었는데, 산신이 홀연히 나타나 춤을 추고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좌우신하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왕만 홀로 이 춤을 보았다. 신하들의 재촉에 의해서 왕이 다시 춤을 추니 그 춤을 어무상심(御舞祥審)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춤은 고려시대까지 유행하였다고 합니다.
포석정하면 떠오르는 왕이 있습니다. 어느 왕이죠? 예, 바로 신라 55대 경애왕입니다. 경애왕 4년(AD 927) 9월, 후백제 견훤이 고을부(지금의 영천)를 점령하고, 호시탐탐 서라벌을 노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신라는 고려 왕건에게 구원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원병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그해 11월(陰), 견훤이 불시에 서라벌로 쳐들어 왔습니다. 이때 왕은 비빈 종친들과 함께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며 놀고 있다가 갑자기 적병들이 들이 닥치는 바람에 포석정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유상곡수는 핏물로 바뀌었다는 슬픈 이야기를『삼국사기』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견훤의 군사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 앞에서 더구나 엄동설한에, 어떻게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며 유흥을 즐길 수 있었을까요? 최근 발견된『화랑세기』필사본에 의하면 포석정을 포석사(또는 포사)라 이름하였고, 국선 문노의 초상을 포석사에 모셨다는 기록과 함께, 보리(12세 풍월주)와 만룡, 문노(국선)와 윤궁, 김춘추와 문희의 길례(결혼)를 이곳에서 치루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포석정은 단순한 유흥의 장소가 아니라 충의열사를 모신 사당이며, 귀족 자제들의 혼례의 장소로도 이용된 성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견훤의 침략을 받고,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구제할 힘을 상실한 신라는 최후의 수단으로 이곳 포석사에 모신 호국영령(護國英靈)들의 힘을 빌려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제사를 지내다가 참변을 당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경애왕의 뒤를 이은 경순왕은 천년동안 지켜 온 나라를 고려에 바치고 맙니다. 왕건은 "경사가 났다."고 하여, 서라벌의 지명을 경사 경(慶), 고을 주(州)자를 써서 경주로 고치고, 김부(경순왕)에게 식읍으로 하사했다고 합니다. 경주라는 지명이 고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나라를 송두리째 바쳤으니 경사스러운 고을일지 몰라도, 이곳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자랑스러운 이름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경순왕이 한 번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천년 사직을 고스란히 고려에 바친 것을 두고, 말들이 많지만, 포석정의 참극을 겪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나라를 지킬 힘을 상실한 신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천년 사직의 비극을 간직한 포석정지에는 화려했던 이궁(離宮)의 모습도, 낙화처럼 무참하게 떨어진 아릿다운 궁녀들의 모습도 찾을 길이 없으나,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던 포형(鮑形)의 돌 홈만은 그대로 남아 이곳을 찾는 이에게, 그 옛날의 영화와 비극을 동시에 말해주고 있습니다.
옛부터 포석정지에는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천년 사직의 슬픈 전설을 시문(詩文)으로 남기기도 하고, 풍광명미(風光明媚)에 매료되어 화폭에 담기도 하였는데, 그 중 매월당 김시습의 시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가을 바람에 잎지고 풀섶은 어지러운데
일찍이 신라왕이 이곳에 연락(宴樂)하였지
고울(高鬱)이 어찌 승냥이와 호랑이 들어 온 줄 알겠으며
공산(公山)에 그 뉘 육용(六龍)이 지친 줄 알았으랴.
들꽃 피고 지니 나무를 보아도 마음 아프고
산새 지저귀니 숲 속 가지마다 한이 스미는 구나.
돌 틈 작은 시냇물 슬프게 울부짖으니
천고에 들리는 나그네 시름을 더하누나.(매월당집 권12)
배리석불입상
이 불상들은 모두 어린아이처럼 귀엽고 천진한 미소를 띠고 이어 매우 친근한 부처님입니다. 신체 비례도 거의 5등신에 가깝습니다. 아마 불교가 유입된 초창기에 만들어져 부처의 위엄보다는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도록 하기 위해 우리 모습과 같이 조성되었습니다.
중앙의 불상을 본존불 양옆은 협시보살이라 합니다. 본존불의 얼굴은 네모에 가까운 넓고 통통하고 반원형의 눈썹이 커다랗게 표현되었습니다. 천진스럽게 웃는 두 눈과 뭉퉁한 코, 두툽한 입술, 그리고 통통한 뺨에 어린아이와 같은 미소가 있습니다.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옷은 두텁고 굵은 옷주름이 대칭을 이루며 U자형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몸은 거의 굴곡이 없이 일자로 내려옵니다. 이 본존불은 광배부터 대좌까지가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옷주름 아래 나란히 까치발을 하고 있습니다. 고신라 불상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손모양을 수인(手印)이라 하는데, 우리가 문서에 도장을 찍는 것처럼 부처님은 손 모양으로 약속을 표시합니다. 본존불의 오른손은 손바닥을 모두 펴 위로 치켜든 두려움을 없애준다는 시무외인, 왼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해서 편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여권인을 하고 있습니다. 좌우 보살상은 손에 정병을 꽉 움켜잡고 있는 관세음보살입니다. 몸은 뻣뻣하게 뒤로 치켜서 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얼굴은 햇님처럼 방긋 웃는 모습이고, 넓고 둥근 얼굴에 비해 작고 가늘게 표현된 눈과 코앞으로 살짝 내민 입술이 귀엽습니다. 머리에는 관대를 두르고 삼면보관으로 장식했고 광배에는 아무런 무의가 없이 둥글게 되어 있습니다.
상반신에는 천의만을 들고 있고 옷 주름도 거의 생략되어 있으며, 발 모양은 본존불처럼 까치발인데 왼쪽 발이 약간 휘어져 변화를 주었습니다.
좌우의 보살상은 이중의 연화대좌위에 서 있는데, 목에서 다리까지 드리워진 구슬목걸이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있으며 왼손에는 연꽃봉우리를 들고 있습니다. 팔찌 비천를 하고 있으며 관대를 두르고 머리에는 삼면보관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정면에 큰 연꽃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광배는 가장자리에 두 줄의 띠를 두르고 그 안에 화불 다섯 분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광배에 화불은 부처님한테만 나타나는데 유일하게 보살상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본존불에 비해 가늘게 표현된 눈과 통통한 뺨에 앳된 미소가 흐르고 있습니다. 어깨에서부터 발등까지 늘어뜨린 영락은 수슬과 꽃모양으로 장식되었는데, 이것은 6C 말부터 7C 초에 걸쳐 유행된 중국 수나라 양식입니다. 옆에는 옥으로 장식된 대패를 차고 있습니다. 조각 수법으로 보아 양옆의 두 분과 달리 통일신라시대 작품입니다. 뒷모습까지도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채색했던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삼릉
남산에 골짜기 이름이 붙여진 곳이 50여 곳이 있는데, 지금 이곳은 예전에는 한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이 분다고 냉골이라 했는데, 지금은 3분의 왕릉이 있는 골짜기라고 해서 삼릉계라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신라가 천년동안 임금님이 56분이 계시었는데 박씨가 열분, 석씨가 여덟 분 김씨가 서른여덟 분입니다. 박씨 10왕의 무덤은 5릉을 비롯하여 모두 서남산 기슭에 있습니다. 석씨왕릉은 탈해왕릉 외에는 모두 불명인데, 박씨 왕릉은 하나도 빠짐없이 서남산 일대에서 찾았다는 것은 아주 대조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 3분의 왕릉 모두가 박씨왕릉인데, 제일 앞에 있는 것이 54대 경명왕(917~924)릉이고, 가운데가 53대 선덕왕(912~917)릉이며, 맨 뒤의 것이 아달라왕(154~184)릉이라 전하고 있습니다. 왕릉은 원래 무덤 둘레에 돌을 쌓고, 그 위에 큰 돌을 박아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는데, 지금은 호석이 파괴되고, 제일 앞에 있는 경명왕릉에서 그 흔적을 약간이나마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경명왕릉의 둘레는 52.5m이고, 선덕왕릉의 둘레는 63m이며, 아달라왕의 둘레는 41.6m로서, 신라 왕릉으로서는 규모가 작은 편입니다. 가운데 있는 53대 신덕왕릉은 1936년과 1963년, 두 번이나 도굴되었는데, 그때 내부가 석실분이고 오방색이 채색되어 있었습니다.
왕릉을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들은 구불구불 아름답게 보입니다. 아침 안개가 짙게 낀 날 숲을 보면, 용이 꿈틀꿈틀 하늘로 승천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진작가 배병우씨가 이를 촬영하여 뉴욕에서 사진 한 장에 최고의 경매가를 받아 유명해진 곳이 바로 삼릉 소나무 숲입니다.
삼릉 위쪽 계곡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맨 먼저 목 없는 석불좌상를 만나게 되고, 그다음 마애관세음보살입상, 선각육존불을 차례차례로 만나게 되는데, 그럼 만나러 가 볼까요?
목 없는 석불좌상
이 불상은 높이 1.6M, 무릎 너비 1.56M정도의 크기로 목과 손이 잘린 채 몸채만 남아 있음에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의연하게 결가부좌하고 있는 부처님의 모습입니다. 이 불상은 원래 계곡에 묻혀 있던 것을 발굴하여, 지금의 자리에 옮겨 안치한 것입니다.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주름이 자연스럽고, 옷을 여민 매듭과 장식이 무척 정교하고 단아합니다. 이 불상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이렇게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부처님의 얼굴이 어떤 모습이었을까? 무척 궁금해집니다.
이 불상은 매우 사실적이며 기백이 넘치는 조각 기법인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불상은 왜 목이 없는 것일까요?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요? 지난 해 늦은 가을이었는데, 서울에 있는 모대학 교수가 학생들을 데리고 이곳에 들려서 "불상에 목이 없는 것은 임진왜란 때 왜인들이 저지른 일이다."라고 설명하는 것을 우연히 엿들은 일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불국사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소탕하기 불국사에 불을 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석불의 목을 자른 것은 왜인들의 소생이 아닙니다. 일인들도 불교를 숭상하는 나라인데 까닭없이 불상의 목을 자를리는 만무합니다. 그럼 누구의 소행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조선시대 유생들입니다. 조선시대는 유교를 국교로 삼았는데, 유교 중에서도 성리학은 기독교나 이슬람의 근본주의자들처럼 독선적이고 배타적어서 성리학 이외의 여타 사상이나 종교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에 승려들은 8천(八賤)의 하나로 전락되었으며, 수많은 사찰이 불태워졌고, 불상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왕실에서는 원찰(願刹)을 두고, 왕실의 안녕을 빌었습니다. 또한 아녀자들은 여전히 절을 찾고, 부처님 전에 소원을 빌었습니다.
마애관세음보살입상
자연암벽에 154센치미터의 마애관세음보살이 서 있습니다. 손에는 여유있게 정병을 들고 있으며 보살상 뒤의 돌기둥을 자연스런 광배로 삼고 있습니다. 얼굴과 어깨, 팔이 고부조로 새겨진 반면, 몸체의 아랫부분으로 갈수록 얕은 부조로 되어 있습니다. 신라 백성들이 지극정성으로 관세음을 부르니까 극락에서 막 내려오시는 모습입니다. 오른손은 설법인을 하고 있고, 왼손은 정병을 들고 있으며, 수의를 동여맨 끈은 배 앞에서 나비매듭을 지어 그 자락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자연석에 복련을 새긴 대좌위에 서 있습니다.
갸름한 얼굴에 가늘게 뜬 두 눈과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고, 둥근 어깨와 잘록한 허리에 두 다리는 볼륨감 있게 표현하였으며, 입가에는 붉은 입술연지로 미소가 더욱 인상적입니다. 특히 10월 석양 무렵에 이 보살을 보면 환희에 가까운 미소를 볼 수 있습니다.
정확한 조각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지방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마애선각육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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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거대한 바위능선을 이용하여 부처님을 조성한 마애선각육존불입니다. 이 마애선각육존불 중 앞 쪽 바위에 새겨진 삼존불의 본존은 석가여래 부처님이시고, 좌우 협시보살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입니다. 문수보살은 부처님의 지혜를, 보현보살은 부처님의 실천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삼존불의 본존은 입상이고, 좌우 협시보살은 좌상입니다. 본존의 높이는 2.65m, 협시보살의 높이는 1.8m 정도입니다. 본존은 오른손을 올려들고 왼손을 배에 대고 있으며, 협시하는 보살은 무릎을 끊고 본존을 향해 공양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협시보살 두 손에 움켜쥔 것이 꽃인지 다기(茶器)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뒤쪽에 새겨진 삼존불 중 본존은 아미타 부처님이시고, 좌우는 대세지보살님과 관세음보살입니다. 아미타 부처님은 일찍이 48대 서원을 세우시고 극락세계를 건설하여 일체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시는 부처님이며, 좌우의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 또한 아미타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나타내는데, 특히 관세음보살 앞에는 구고구난(救苦救難), 대자대비(大慈大悲), 천수천안(千手千眼) 등의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우리 조상들은 어렵고 힘들 때 마다 관세음보살을 찾고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 삼존불의 본존은 좌상이고 좌우 협시보살은 입상입니다. 본존의 높이는 2.4m이고, 좌우 협시보살은 높이는 2.6m정도입니다. 음각으로 두광과 신광을 나타냈으며, 이래 쪽에 연화대좌를 조각하였습니다.
마치 바위에 그림을 그리듯 조각을 하면서도 바위면을 다듬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멋을 살린 것이 이 불상군의 특징이 아닌가 싶습니다. 얼마 전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 고려불화를 전시한 바 있었는데, 그 중 수월관음도는 관음보살의 자태와 채색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한동안 자리를 뜰 수가 없었습니다. 이곳 마애선각육존불을 보면 고려불화의 모체는 바로 신라선각마애불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을 볼 때마다 부처님을 신앙대상으로 삼은 우리 조상들이 부처님을 비바람을 맞도록 그냥 방치하였을까하는 의심이 들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일부 사학가자와 고미술가들 사이에서 신라시대 조성된 마애불은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것처럼 그냥 바위에 부처님을 음각만 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전각을 세웠으며, 부처님도 아름답게 채색하였다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되었습니다. 실제로 마애선각육존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처님의 입술 부위 등에 희미하게나마 채색한 흔적이 남아있고(동남산 감실부처님상에는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마애선각육존불이 새겨진 바위 위에는 전각의 기둥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홈이 패어져 있습니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고 했으니, 위쪽으로 올라가서 직접 확인해 보도록 하십시다.
이 불상군은 지방 유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돼 있으며, 6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하루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가고 있네요. 우리는 오늘 오전 10시부터 지금까지 서남산 지역에 있는 오릉-나정-창림사지-포석정지-배리석불입상-삼릉-목없는 석불좌상-마애관세음보살입상-마애선각육존불을 둘러보았습니다. 저의 해설을 통하여 서남산의 유적과 유물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는지요? (박수). 고맙습니다. 그럼 오늘 일정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신라문화컬처텔러 시나리오 발표자료집, 경주문화원/200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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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왕릉의 모습 아름다운 곡선릉입니다
매월당 김시습선생님이 궁금하시어
박세당 가문을 찾아 금척지와 징심록을
열람하고 금척에 대하여 연구하셨다
알고 있는데 신라 의 세보물중 하나인 죽을 사라도 살렸고 하는 천부경의 금자 금척
어느왕릉에 숨겻다가
아주 잃어버렸다 하는데 찾을수 있는 묘안이 있는지요?
금타대화상님의 21세기 세계를 LEAD할수 있는
보물 아미타불 정토만다라를 받아 설계하고
미국의 벽촌 로체스터에서 전세계인종들을 상대로
부처님의 보물 삼보불법에 의하여
일체종지를 나타내니 항상 금척 생각을 합니다
잘 공부하엿읍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