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중인데 비가 계속 내린다. 예전같으면 특별히 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휴가 기간 중에 88km 인라인스케이팅을 하려던 계획도 있긴 했으나 계속되는 비로 인하여 이는 포기했다.
어젠 30km 마라톤을 하기로 생각했다.
오늘 아침에 잠을 깬 잠자리에서 이왕이면 무전으로(돈 없이) 30km를 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강 둔치에 10km 지점부터 15km 지점까지 물 마실 곳이 없다는 게 이유였을까?
'집(대림) - 여의나루 - 동호대교' 코스를 왕복하면 30km 정도 될 것이다. 그렇게 계획을 세웠다.
여유있게 10시에 아침을 먹었다.
복장은 마라톤복, 마라톤 양말, 창이 있는 모자, 시계가 전부이다.
만약을 대비해 500원을 가져갈까도 생각했지만 진정한 무전여행을 위해 챙기지 않았다.
2. 출발
12시 20분에 집에서 출발했다.
비는 내리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으리라.
하지만 골목길에서부터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모르는 사람이지만 좀 부끄럽다.
큰 길로 나와 달릴 때는 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된다. 웬지 나를 보는 것같다. 지나가는 차에서도 나를 보는 것같다.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 도심을 지나는 마라톤을 하다니...
부끄러운 마음에 계획했던 것보다 좀 빨리 달리게 되었다.
그래도 별로 힘이 안 들었던 건 찻길을 벗어나 빨리 한강으로 가고픈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차도로 달리고 싶었지만 대부분 인도로 달렸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가 가장 답답했다.
신풍역을 지나고, 보라매역도 지나고, 언덕을 오르고 내리막도 달렸다.
대방역 남쪽에서 지하보도를 지나 대방역 북쪽으로 나가니 새로운 세상에 온 듯 확 트인다.
원효대교 횡단보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 드디어 한강 둔치다.
0km 지점으로 가는 중 화장실에도 잠깐 들르고, 200미터 지점에서 물도 마셨다.
이 때 이후로 물을 마실 때는 항상 수도꼭지를 틀어 흐르는 물을 다섯 번씩 벌컥 벌컥 마셨다.
물이 잘 넘어가지는 않지만 나중에 탈수현상이 오면 감당할 수 없기에 그런 식으로 대비했다.
3. 여의나루
드디어 여의나루역 아래 0km 지점. 여기까지 0:40:44(40분 44초) 걸렸다.
원래는 오래 쉴 생각이었으나 출발한 지 42분이 되는 순간 스톱워치를 누르며 다시 출발했다.
동호대교 근처까지 갔다 와야 한다.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비가 많이 내려 달림이가 한 명도 안 보였다. 혼자 즐겁고 꿋꿋하게 뛰었다.
신발과 양말은 이미 흠뻑 젖어 있고, 미끌거리는 게 물집 잘 생기겠단 생각이 들었다.
물이 많이 고인 구간에서는 바람처럼 달리지 않고 무릎을 높이 들어 껑충껑충 뛰었다.
이런 구간이 많으면 체력소모도 많고 다리에 경련도 날 텐데... 걱정이다.
2km 지점에 못 미쳐 자전거도로가 침수되었다.
이대로 돌아가긴 아깝지 않은가. 침수된 구간은 둑 쪽으로 돌아서 갔다.
다시 2.4km쯤 지점엔 심각하게 침수되었다.
여전히 돌아서 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도 이런 구간이 많을 텐데...
그냥 성산대교 방향으로 뛰어야겠다는 기발한 생각이 들었다.
거리 오차가 심하지만 어차피 기록을 위해 달리는게 아닌데 뭘...
근데, 그쪽도 잠겼으면 어떡하지?
4. 방향 선회
어쨌든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간다.
옆에 보이는 한강 수위가 내가 밟는 바닥과 얼마 차이 안 난다.
강물은 지저분하고 더럽다. 하지만 강 중앙에서 보트를 탄다면 재밌을 거 같았다.
돌아갈 때는 0km 표지판이 있는 한강관리소 쪽으로 꺾지 않고 똑바로 야외음악당 쪽으로 갔다.
야외음악당 지나 0km 표지판과 나란한 위치에 있는 곳에서 물을 마시고 화장실에도 갔다 왔다.
계속해서 성산대교 방향으로 뛴다.
어디까지 갔다 와야 적당한 거리가 될까?
적어도 8km 표지판까지는 갔다 와야 되리라.
달리 달리는 사람은 없었다. 나 이외엔 없었다.
예전보다 많은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낚시하는 사람들이다.
모자가 있으니 바람과 비를 막아주어 좋았다. 모자를 쓰고 달리긴 처음이다.
앞으로는 종종 써야겠다. 비와 바람 뿐 아니라 해도 막아줄 수 있으니까...
5km 좀 덜 된 지점에서 수돗물을 마셨다.
성산대교를 지나면서부터는 물 마실 곳이 없으리라.
5. 성산 대교
성산대교 아래가 침수되었다.
둑으로 지나가면 되는데 둑이 너무 높다.
앞에서 멈춰서 있는 가족(4인)이 있다. 아저씨가 시원해서 좋겠단다.
그러면서, 물 깊이가 무릎보다 얕다고 한다.
이쪽으로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길인가 보다.
그 아저씨가 이쪽으로 올 때는 그랬는지 모른다. 지금 내가 건너가게 하여 깊이를 보려는 것일까?
어쨌든 들어갔다. 발목부터해서 종아리, 무릎까지 빠진다.
계속 지나가니 허벅지까지 물이 찬다. 넘어지면 옷 다 버리는 수가 있다.
바지를 들어 건너는데 바지 가랑이까지 물이 차는 느낌이 온다.
거길 건너다가 재수없는 걸 하나 목격했다.
내 앞을 헤엄치는 엄청나게 큰 쥐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왜 그런 장면은 안 잊혀지는지...
앞으로도 침수된 곳이 많으면 어쩌지?
그건 그 때 생각해 보기로 하고 계속 뛰었다.
시멘트길이지만 비로 인해 충격(발목이나 무릎에)적인 느낌은 못 느꼈다.
6. 반환점
7km 지점을 지나고 8km 지점에서 돌았다. 그 때쯤엔 비바람이 거셌다.
되돌아 가는 길은 강력한 맞바람으로 더 힘들었다.
다시 성산대교 침수된 곳에 왔을 땐 물이 훨씬 불어 있었다.
유속도 상당해 빠지면 헤엄처 나오기도 힘들 것 같았다.
무엇보다 물이 지저분해 헤엄치고 싶은 마음도 안 들었다.
둑으로 올라갔다. 풀이 많다. 미끄러지면 물에 빠진다. 애써 올라간 보람이 없다.
떨어져도 물이 충분하니 다치지는 않을 듯하다.
떨어지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뱀이다. 둑으로 가다 뱀한테 물리면 얼마나 억울한가!
다행히 그곳을 지나면서 뱀한테 물리지도 않았고 발견하지도 않았다.
침수 구간을 지나 다시 뛰었다.
주차장 근처에서 물을 마시고 계속 또 뛰었다.
허벅지 안쪽에 바지와의 마찰에 의해 쓸리는 느낌이 난다.
아직 5km는 더 남았고, 집까지는 10km나 남았는데...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주로 다녔던 선유도공원 근처를 빗속을 달리고 있다.
꽃밭에 꽃들은 싱그러울 것 같지만 얼핏 보고는 앞만 보고 달렸다.
꽃들을 감상한다는 건 그 상황에서 사치일 지 모른다.
빗길을 걷는 남녀가 보인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저것들은 왜 저러고 있담? 우산도 하나 밖에 없이.'
'우산이 하나면 여자가 쓰게 하고 남자는 뛰어야 할 거 아닌가! 어깨를 잡고 걷고 있네.'
4km 지점을 지날 땐 강물이 불어 위험하니 모두들 돌아가라는 방송이 나왔다.
당산철교를 지나 낚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은 바깥쪽 도로는 이미 물이 잠겼다.
완전히 잠기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여의나루역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힘들어진다.
얼마 안 남은 지점에서는 마음이 급해지고, 빨리 끝내려고 하기 때문에 더욱 힘들어지는 듯하다.
속도를 더 내지 않고 그대로 달린다.
한강 수영장을 지날 때 떠들고 노는 소리가 난다. 수영장 열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얼핏 보니까 일꾼들이 수영장에서 놀고 있다.
가서 같이 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설마 돈 받지는 않겠지?
수영하면 몸도 풀리고 참 좋을 텐데...
하지만 난 가야 할 길이 있으니 가던 길을 계속 달렸다.
멋지게 꾸민 화장실 옆에서 물을 마시고 0km 지점으로 갔다.
한강 둔치(약 20km)를 달리는 데만 2:00:17 걸렸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잘 달렸다.
7. 다시 시내
쉬었다 가면 좋겠지만 쉬었다 출발할 때 무릎도 아프고 할 테니까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대신 걸었다. 걷다가 화장실에도 잠깐 들렀다. 집을 나온 이후로 3번째 화장실에 가는 거다.
5분 정도 걷다가 가볍게 뛰었다.
원효대교 옆 횡단보도로 가까이 갈 때, 앞서 걸어가던 부부로 보이는 둘 중 아저씨가 말을 건다.
어디까지 갔다 왔는지부터 시작해서 자기도 마라톤을 한다, 보스톤 마라톤 및 서브3가 목표다 등 5분 정도 계속 걸으면서 같이 애기했다.
대방역 근처를 뛸 때(3시 20분쯤) 엄탱구님과 마주쳤다. 이런 우연이...
당직이라 이제 나가는 중이란다. 점심은 빵으로 먹었단다.
헤어져 뛰어가는데 빵 생각이 난다.
뛰면서 여러 개의 빵집과 음식점 등을 지나며 먹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도 없으면서... 평소같으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지만...
뛰거니 걷거니(길지는 않게) 하면서 집으로 향했다.
8. 완주, 그리고 그 이후
16시 이전에 집에 도착했다.
걸린 시간은 3시간 36분 15초. 달린 거리가 30km라 가정할 때, 평균속력은 8.32km/h.
집에 돌아와 유산균을 먼저 먹었다. 물도 먹었다. 그리고 물은 계속해서 수시로 마셨다.
씻기 전에 라면을 끓였다. 만두 3개와 계란 1개도 넣었다.
밥, 라면, 김치로 맛있게 식사를 했다. 그 다음에 씻었다.
컴퓨터도 만지고 좀 놀다가 19시쯤 잠자리에 들어 두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 신발을 빨았다.
그리고 컴퓨터로 놀다가 밀린 사진 작업도 하고, 밀린 일기도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