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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선비문화 청주포럼
주최 : 성균관 청년유도회 중앙회
주관 : 성균관 청년유도회 충청북도 본부
목 차
1. 제4회 선비문화 청주포럼 일정표 5
2. 제4회 선비문화 청주포럼 기념식 식순 7
3. 청년유도회 헌장 및 목적문 9
4. 중봉 조헌의 경세정신과 의병활동(전주대 오종일 교수) 11
5. 살신성인의 사표 천곡 송상현(충북대 임동철 총장) 33
6. 충북 출신 3.1 운동 민족 대표(청주대 박상일 박물관 학예연구실장) 47
7. 조선초 문집에 나타난 서평과 서예 미학(충북본부 송종관 본부장) 61
8. 예절 의식 문답 자료(충북본부 김동연 전본부장) 87
9. 서원 예절(경북본부 강일호 상임부회장) 103
10. 자석과 건강(성균관여성유도회 전남본부 임영님 상임부회장) 125
11. 동춘당 묘지문(중앙회 김득환 사무총장) 141
12. 제14대 청년유도회 중앙회 주요 임원 명부 175
제4회 선비문화 청주포럼 일정표
▣ 첫째날 4월 25일 (토요일)
13:00 ~ 14:00 (60분) 등록(청주향교 유림회관 앞)
14:00 ~ 15:00 (60분) 기념식, 일정안내
15:00 ~ 15:50 (50분) 중봉 조헌의 경세정신과 의병활동 (전주대 오종일 교수)
15:50 ~ 16:40 (50분) 살신성인의 사표 천곡 송상현 (충북대 임동철 총장)
16:40 ~ 17:30 (50분) 충북출신 3.1운동 민족대표(청주대 박상일 박물관 학예연구실장)
17:30 ~ 18:00 (30분) 휴식 / 시도본부장 및 중앙회 회장단 운영위원회의
18:00 ~ 18:30 (30분) 저녁식사
18:30 ~ 22:00 (90분) 친교시간
22:00 ~ 취 침
▣ 둘째날 4월 26일 (일요일)
07:00 ~ 08:00 (60분) 기상 및 개인 산책
08:00 ~ 08:30 (30분) 아침식사
08:30 ~ 09:30 (60분) 청주 향교 봉심 및 문화 탐방 준비
09:30 ~ 12:00 (150분) 고인쇄 박물관 / 손병희 선생 영당 탐방
12:00 ~ 12:30 (30분) 점 심
12:30 ~ 15:30 (180분) 청남대, 문의 문화재 단지 탐방
15:30 ~ 해산 (2009년 가을철에 만납시다)
* 위 일정은 당일의 사정에 따라 다소 변경될 수도 있음
제4회 선비문화 청주포럼 기념식 식순
◆ 내빈 및 임원소개
◆ 개회식 선언
◆ 국 민 의 례
◆ 문 묘 향 배
◆ 청년유도회 헌장 낭독
◆ 공로 감사패 및 상장 수여
◆ 대회사 및 격려사, 축사, 환영사
① 대회사
(성균관 청년유도회 중앙회장)
② 격려사
(성균관장)
(성균관유도회 총본부 회장)
⑤ 축 사
(충청북도지사)
(국회의원)
(도의회 의장)
(청주향교 전교)
⑥ 환영사
(성균관 청년유도회 충북본부장)
◆ 폐회식 선언
청년유도회 헌장 및 목적문
▣ 헌장(憲章)
우리는 여명의 세계를 본다. 오늘의 시대에 있어서 기필코 우리는 평화와 공영의 세계를 이룩할 것이다. 인류를 문명의 위기로부터 구하고 우리들의 세계에 항구적인 번영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중정의 대도와 총화의 주체를 추구하는 인도적 문화의 건설이 선행 되어야 한다.
이것은 새로운 문화의 창조이며 참된 문명의 건설이다. 진리는 불멸하며 불변하는 것이다.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바는 하늘이 우리를 통하여 구하는 것이니 인도는 진리의 근간이며 이성과 양심은 인류의 통성이다. 진실로 선함을 알 수 있고 이 참된 존재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할 수 있다면 오상의 덕을 천하에 밝히어 영원토록 우리의 길은 그 평화를 함께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사회와 국가는 정의의 실현이 그 기본 과제임을 믿고 있다. 민주․인본의 이상은 인륜의 정립과 도덕의 확립으로 보장되는 것이며 우리들이 가진 모든 것은 평화와 후생의 목적을 지향하는 인도적 정의를 원칙으로 운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폭력과 편견을 배제한다. 평화는 그 자체의 선한 목적으로 선의 실천으로써만 이룩되는 것이다. 모든 개인이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향유하고 생존과 진실을 충족할 수 있을 때 비로서 우리들의 선은 완전한 것이며 모든 문화와 전통이 자유롭게 그 명예와 긍지를 지키고 모든 민족과 국가는 대동의 건설을 위하여 결속함으로써 진실로 우리들의 평화는 영원토록 지켜질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올바른 한국인으로써 스스로 시민이 되고자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곳에서 우리의 형제와 함께 영원히 화평할 것이며 우리를 필요로 하는 모든 곳에서 우리의 이웃을 위하여 참되게 봉사할 것이다.
▣ 목적문(目的文)
청년유도인은 유교의 근본 가르침에 입각하여 바른덕성과 절조있는 행동으로 사회정의를 선도하여 공동의 선을 위해 인권보호와 사회봉사에 앞장서고 민족문화의 창조적 계승사업에 적극 동참하며 함께 모여 배우고 가르치는 가운데 이 땅에 위대한 선현들의 가르침을 바로 세우고자 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 강령(綱領) 및 구호(口號)
▶ 기본강령
-. 참 된 얼
-. 이웃사랑
-. 한 누 리
▶ 기본강령
-. 민족화합과 통일을 위한 대동화평의 실천에 힘쓴다.
-. 진리와 함께하는 선비의 정신을 구현한다.
-.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지향하는 교육에 힘쓴다.
-. 선공후사의 자세로 사회정의의 구현에 힘쓴다.
-.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이웃을 위하여 힘쓴다.
-.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며 어른을 공경한다.
-. 벗에게 믿음이 있으며 어린이를 보호 육성한다.
-. 조국의 번영과 민족의 무궁한 발전에 힘쓴다.
▶ 기본강령
-. 우리는 스스로 떳떳이 행동하자!
-. 우리는 형제와 같이 사랑하자!
-. 우리는 민족문화 창달의 주체가 되자!
-. 우리는 평화의 선구자가 되자!
중봉 조헌의 경세정신과 의병활동
전주대학교 사범대 한문교육과 교수
오 종 일
중봉 조헌의 경세정신과 의병활동
Ⅰ. 서 론
이 글은 중봉 조헌(重峰 趙憲1544∼1592)의 경세정신과 의병활동에 대한 서술이다. 따라서 『중봉집』을 중심으로 그의 사상과 의식적 특징을 살피고 임진 난을 전후한 중봉의 구국활동과 이에 대한 제현들의 서술을 통하여 그 시대 상황과 중봉 정신의 특징을 논하기로 한다.
이 글은 모두 세 단락으로 구성 되어 있다. 그 첫째번의 내용은 중봉의 일생에 대한 개략이다. 이는 어떤 인물에 대한 행의를 살피기 위해서는 그의 일생이 어떠한 궤적을 이루고 있었는가하는 것을 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서술은 『중봉집』의 가장(家狀)과 행장(行狀) 그리고 「연보」등에 나타난 사실들을 중심으로 가족적 배경과 삶의 자취가 어떠하였는가 하는 것을 살피기로 한다. 또한 그와 같은 삶의 과정에 나타난 중봉 자신의 의식적 변화들에 대한 특징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하는 것도 아울러 이해하고자 한다. 두 번째의 단락은 중봉의 경세정신과 학문 세계를 밝히는 글이다. 경세란 경국제세(經國濟世)이니 선생의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은 어떤 의식을 지니고 있었는가 하는 데 대한 서술이다. .
유학은 본래 경세학으로서 수기치인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이는 국가를 경영하는 통치행위에 대한 의지로서 국가가 평화로울 때는 백성들의 평안을 이루는 것이며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구국운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국가의 존립문제와 직결된다. 따라서 중봉의 시대는 왜적의 침략을 받아서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운 시대였기 때문에 중종의 경세사상은 국가의 존립과 직결된다. 전란의 시대에서 국가의 존립을 지키는 것은 의병활동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의병이란 외세의 침략을 받아 국가가 위난에 처하였을 때, 나라를 위하여 일어선 집단이다. 중봉의 경세정신은 이아 같은 의병활동과 직결된다.
의병은 그러나 관군과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관군은 국가를 지켜야 하는 당연한 의무를 지닌 집단이라면 의병은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집단이다. 따라서 의병은 누구보다도 국가 민족의식이 강하고 또한 어떻게 하면 나라를 올바로 이끌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경세정신에 투철한 사람인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 비추어 볼 때 중봉의 경세정신과 의병활동은 국가관 민족관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두 번째의 단락에서는 이와 같은 중봉의 국가의식과 경세정신은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을 서술하고자 한다.
세 번째는 중봉의 의병활동과 구국운동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그 사실적 행의와 그 업적을 살피고 뒷날 그와 같은 행의는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중봉에 대한 평가와 그 학문적 특징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확인하여 중봉의식의 가치와 그 평가적인 측면을 살피고자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글은 전체적으로 중봉의 경세정신과 의병활동의 정신적 특징을 살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Ⅱ. 중봉의 생애와 삶의 역정
중봉은 관향은 황해도 배천(白川)으로, 할아버지는 세우(世佑)인데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할아버지 때 김포로 이거(移居)하였기 때문에 중봉은 김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응지(應祉)이며 나중에 선생의 공로로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가 되었고, 어머니는 용성차씨(龍城車氏)이다.
선생의 이름은 헌(憲)이며, 자(字)는 여식(汝式) 자호(自號)는 후율(後栗)인데 또한 도원(陶原)이라하였다.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진 중봉(重峯)이라는 호는 늦은 나이에 일컫게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1).
일찍이 어머니를 잃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어릴 때부터 기개가 남다르고 또한 개성이 강하였다. 다섯 살 때 하루는 숲 속의 정자에서 다른 아이들과 책을 보고 있었는데 높은 벼슬아치 한 사람이 그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함께 공부하던 다른 아이들은 모두 책을 덮어 버리고 달려가서 구경하였으나 선생은 혼자서 똑바로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지나던 벼슬아치가 이를 보고 기특하게 여기고 말에서 내려 정자로 가서 그 연유를 물었다. 이에 선생은 독서에 전심한 것은 아버지의 명(命)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어려서부터 엄한 가정교육을 받고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고 또한 선생은 이를 잘 받아들여 학문에 열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그 벼슬아치는 선생의 아버지 판서공을 찾아가 칭찬하기를 이제 또한 동방의 참다운 학자가 또 나오게 되었다고 경의를 표하였다2)
선생은 천성이 순수하고 효도하여 오로지 부명(父命)을 받들고 학문을 닦았다. 12살 때 처음으로 어촌(漁村) 김황(金滉)에게 시서(詩書)를 배웠는데 학문을 즐기고 닦는 것이 독실하였다. 비록 엄동설한이 되어서 옷과 짚신이 모두 낡아도 추위를 참고 열심히 다니면서 스승의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가을의 추수 때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서 밤이 늦도록 논밭을 지키니 이웃 아이들도 이를 따랐다. 밤이 되면 더욱 학문을 닦았는데 밤이 깊어지면 다른 아이들은 먼저 잠들었지만 선생은 책 읽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3) 언제나 경사(經史)에 침잠하여 침식도 잊고 진지(眞知)의 실천에 힘쓰면서 옛 성현으로서 스스로를 기대하였다. 항상 격앙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하늘이 남자로서 뜻을 지니게 한 것은 어찌 우연이겠는가 하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사람들과 더불어 대화하는 것은 언제나 위기(爲己)의 학문과 역행(力行)의 실천이 아닌 것이 없었다4)
20세 때는 서울에 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양천강을 건너게 되었다. 배가 강물 한 가운데 이르자 갑자기 큰 풍랑을 만나서 배가 거의 전복되다 시피 하였다. 배에 함께 올랐던 다른 사람들은 실색을 하고 울부짖었으나 선생은 혼자서 꿈적도 아니하고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잡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바람이 잔잔하여 배가 나루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은 선생에게 화를 내면서 같은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죽게 되었는데 어떻게 홀로 그렇게 편안할 수 있겠느냐고 힐난하였다. 선생은 웃으면서 생사는 하늘에 있는 것인데 울부짖는다고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5). 22세 때는 성균관에 유학하였는데, 이때 유생들과 함께 승(僧) 보우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기로 하고 여러 달을 대궐 밖에서 복궐(伏闕)상소를 올리게 되었다. 상소가 올라갔지만 오래도록 비답이 없어서 여러 생도들은 피곤해하고 더러는 밖에 나가 쉬거나 집에서 왕래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아침저녁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혼자서 하루 내 꿇어 앉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다른 생도들은 아무도 그와 같이 하지 못했다6)
23세 때 문과에 합격하고 교서관 부정자(副正字)가되었다. 그리고 27세 때 파주목 교수가 되었는데 이때, 우계 성혼을 찾아가 학문을 배우고자 하였다. 우계는 그 학문을 높이 여기고 제자로 대우하기 보다는 외우(畏友)로 여겼다7) 이듬해에는 홍주목(洪州牧) 교수가 되었는데, 이 때 또한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다. 이 때 토정도 또한 그 학문을 높이여기고 크게 놀라면서 그대와 같은 덕이 높은 인품은 내가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사양하였다. 그리고 나의 주변에는 이율곡 성우계 송운장 같은 사람이 있는데 이들은 학문이 고명하고 행동이 지극하여 세상의 모범적인 인물이라 하면서 이들을 천거 하였다8)
이에 따라 가을에는 파주로 가서 율곡선생을 뵈었다. 그리고 토정과 함께 여러 곳을 다니면서 유람하였다.
31세 때 성절사의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갔다. 이때 그곳의 벼슬아치들과 공자 사당의 위패와 그 봉안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선생의 질문을 받고 그들은 매우 기뻐하고 여러 가지를 논의 하였다.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후에 저작이 되었다. 그 때 명나라에 갔을 때 보았던 일과 그 제도들을 낱낱이 적어서 8조목의 상소를 만들어 올렸다. 그 내용은 성묘(聖廟)의 배향, 내외(內外)의 서관(庶官), 귀천(貴賤)의 의관(衣冠), 연음(宴飮)의 식품, 사부(士夫)의 읍양(揖讓), 사생(師生)의 예접(禮接), 향려(鄕閭)의 습속, 군사의 기율, 등을 논한 것이었다9). 그러나 임금은 “너의 상소는 수 천리 밖의 일이며 풍속 또한 다르기 때문에 갑자기 행하면 이상한 일이 될 뿐”이라 하였다. 이에 16조의 상소를 써놓았으나 다시 시행되지 못할 것을 알고 이 상소는 올리지 않았다10)
35세 때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토정 이지함이 와서 조문하였다. 37세 때 보령으로 가서 서당에서 강학하고 돌아 왔다. 또한 해주 석담에 있는 율곡 선생을 찾아뵙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38세 때 공조좌랑이 되고 전라도사(全羅都事)로 나갔다. 이때 연산군 시대의 공안(貢案)을 혁파하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39세 때는 임기를 마치고 8월에 종묘서 령〔宗廟署令〕이 되고 보은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40세 때 보은에 있었는데 이산보가 경차관으로 호서를 순방하였다. 이산보가 조정으로 돌아가자 왕이 물어 보기를 호서지역의 치적(治積)이 어떠한가 하니 우도(右道)는 잘 다스려 지지 않았지만 좌도(左道)의 보은현감 조헌이 백성을 다스림이 제일이라 하였다10)
44세 때 11월에 일본에서 사신이 왔다. 이때 선생은 일본의 사신을 배척하고 끊어야 한다는 왜사를 거절할 것을 청하는 「청절왜사소(請絶倭使疏)」를 올렸다.
이 때 일본의 수길(秀吉)이 그 임금을 시해하고 중(僧) 현소를 파견하여 우리나라 실정을 엿보면서 화친하려 하였다. 조정에서는 겁을 내고 감히 배척하고 거절하여야 한다는 사람이 없었다. 선생은 이 소식을 듣고 찬시하는 왜적과는 화친할 수 없다는 상소문을 지었다. … 그 내용은 먼저 부득이 서로 통하고자 한다면 먼저 다짐할 것이 있으니, 대명통일(大明統一)은 하늘이 정한 것과 같으니 먼저 저들의 천황이란 말을 쓰지 못하게 하고 둘째는 저들에게 잡혀간 어민들로서 저들에게 빌붙은 자들을 돌려보내도록 하고 셋째는 저들이 제물을 요구하니 그 량(量)을 감하여 정하도록 할 것을 제시하였다. 또한 이산해가 나라를 그르치고 있으니 그를 파직 시키라고 하였다. 선조는 이 상소를 보고 매우 진노하여 불태우도록 하였다10)
47세 때에는 남으로 영외(嶺外)를 유람하였다. 이때 재월당의 포은선생 영전에 절하고 글을 써서 제사하였다. 또한 박팽년의 사당에도 절하고 글로서 조상하였으며, 야은의 거처와 탁영의 사당에 두루 들려 존경의 뜻을 표하지 않음이 없었다11)
49세 때 임진년 2월에 부인(夫人) 신씨(辛氏)가 졸(卒)하였다. 3월에 김포의 조상 묘소를 참배하고 4월에 신씨를 집 뒤에 장사지냈다12).
그 달 신묘일에 가등청정등이 바다를 건너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령을 넘아왔다. 이때 임금은 그들에게 쫓겨서 서울을 버리고 피난하였다. 선생은 이와 같은 변고를 접하고 통곡하였다. 곧 이우(李瑀) 김경백(金敬伯) 김승업(金承業)등과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고 팔도에 격문을 보냈다. 선생이 보낸 격문을 보고 의병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13) 이때 순찰사 윤선각과 그곳을 지키는 군인들이 모두 의병에 합세하니 관군이 불리하게 되자 이를 저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선생은 이에 승업과 더불어 서쪽의 행재소로 가기로 하고 공주에 들러 군신의 대의를 말하니 순찰사는 더욱 경복하고 함께 일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공주에 머물게 되자 의병들은 천명 가까이 모여들었다14)
이 때 안세헌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패악하고 무도하여 왜란이 일어날 처음에 우리나라 사람을 죽여서 왜병처럼 머리를 깎아서 수급을 만들고 이를 바쳐서 공을 세우려하였다. 선생이 그 죄를 성토하자 세헌이 이를 원망하고 순찰사 선각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공이 모든 병권을 잡고 있으면서 조그마한 공로도 없는데 조모(趙某)는 초의(草衣) 선비로서 그대보다 앞서서 의병을 일으켰으니 저 사람이 만약에 자기의 뜻대로 한다면 반드시 그대를 머뭇거린 죄로 다스리고자 할 것이니 그대가 위태롭게 될 것이라 하였다. 순찰사는 이 말을 듣고 과연 그러할 것으로 여겼다15)
선생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윗사람의 경계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따로 싸울 계책을 마련하였다. 이에 충청 우도로 떠나가자 전참봉 이광륜(李光輪) 선비 장덕개(張德盖) 신난수(申蘭秀) 고경우(高擎宇) 노응탁(盧應晫) 등 선생을 흠모하는 무리들이 선생을 따라서 관군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다시 모집하였다. 이에 선생을 따르는 사람들이 1천 6백이었다16)
8월 1일 선생은 승장(僧將) 영규(靈圭)의 군대와 함께 청주성(淸州城) 서문을 공략하였다. 탄환을 무릅쓰고 전투를 직접 독려하니 군사들은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왜적이 모두 크게 패하여 성안으로 들어가 지키자 우리 군사들이 기세를 타서, 성벽을 공격하려할 때 갑자기 서북쪽으로부터 비가 쏟아지고 캄캄해지니 군사들이 두려워서 벌벌 떨었다. 선생은 한탄하면서 성패는 하늘에 달렸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믿을 만한 교훈이라 하였다17).
선생은 왜적을 격퇴한 후 상소문을 지어서 문인 김승업 등을 시켜서 조정으로 보내고 또한 여러 곳에 격문을 띄우면서 근왕(勤王)하려 하였다. 이를 알아차린 안세헌(安世獻)은 또 선각을 부추겨서 말하기를 “조헌이 올린 상소에는 그대를 헐뜯는 내용이 들어 있다고 하는데 이 상소가 임금이 있는 곳에 이르면 그대는 반드시 징계를 받게 될 것이다”하면서 선생을 모략 하였다. 이에 관찰사는 자기 사람 한종(韓從)을 시켜서 뱃사공을 검문한 것처럼 하여 상소문을 가지고 간 사람을 중간에서 막도록 하였다. 이에 승업 등은 그들이 노리는 상황을 알아차리고 상소문을 꺼내서 그들을 모함하는 내용이 없음을 보여주고 마침내 배에 오를 수 있었다18)
8월 16일 선생은 군사를 움직여 금산으로 향했다. 마침내 영규의 군대와 연합하였는데 선생은 일찍이 권율과 더불어 18일에 금산에서 적을 협공하기로 하였었다. 그러나 권율은 그날을 미루자고 했는데 그 연락이 오기 전에 이미 금산의 십리 밖에 도착한 것이다. 왜병은 우리 군대를 후원하는 병력이 없는 것을 알고 세 부대로 나누어 바꾸어 가면서 막으려 하였다. 이에 선생은 오늘 우리는 한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죽고 살고 진격하고 후퇴하는 것은 의(義)라는 한 글자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19)고 하였다. 군사들은 오로지 이 명령에 따라서 용감하게 오래도록 싸웠다. 세 부대의 적들은 거의 패하고 궤멸되었으며 아군 또한 이미 화살이 없어서 더 싸울 수가 없었다. 해가 저물고 서로의 군대가 보이지 않자 군사들은 두려워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의기가 태연자약하면서 군사들을 더욱 독려하였다. 그러나 적들은 모두 날카롭게 공격해 장막까지 쳐들어 왔다. 막하에 있는 부장 몇 사람은 선생을 벗어나게 하려고 억지로 끌었지만 그러나 선생은 웃으면서 말안장을 풀면서 말했다. “이곳이 내가 순절할 땅이다” 장부는 죽음이 있을 뿐 난에 임하여 구차하게 면하려 해서는 안된다“하고 곧 북채를 끌어 당겨서 북을 울려 군사들을 독려하니 군사들은 다투어 죽음에 나아가고 하나도 요행으로 살기를 바라지 않았으며, 끝내 여막을 떠나지 않고 선생과 더불어 장엄한 최우를 마쳤다19).
많은 적군을 당할 수 없어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으나 적병 또한 많이 죽게 되어 그 기세는 크게 꺾였다. 죽은 자가 많아서 기세가 꺾이고 남은 적병들이 그들의 본진으로 돌아간 뒤에도 곡성이 들판에 울렸다. 3일 동안이나 시체를 거두었지만 다 치우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쌓아서 불태웠다. 이를 보고 마침내 무주에 머물렀던 적병들도 도망가 버렸다. 선생의 동생 범(範)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장으로 가보니 선생은 깃발 아래서 죽었고 다른 장수들 또한 그 옆에서 서로를 베개 삼아서 죽어 있었다. 마침내 선생의 시신을 업고 옥천으로 돌아와 염빈하였는데 무릇 4일이 지나도록 안색 하나가 변하지 않았고 눈을 부릅뜨고 수염이 치켜들어 있어서 사람들은 오래전에 죽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19)
Ⅲ. 중봉의 경세 사상과 의리 정신
선생은 오로지 의리를 실천하는 일생을 살았다. 그 의리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명감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구국의 의병활동이었다. 그러므로 이 장(章)에서는 이와 같은 정신이 나올 수 있었던 학문과 그 사상을 이해하기로 한다.
유학은 본래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이는 세상을 올바로 다스리고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 이를 경국제세라 한다. 선생에게는 이와 같은 경세정신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자신과 국가를 하나로 인식하는 정신이다. 선생이 이와 같은 의식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조선조의 의리정신과 절의정신을 그대로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선생의 그 학문 연원과 그 전승과정은 어떠하였으며 이를 선생이 어떻게 수용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확인하여야 할 것이다.
선생의 성장과정과 학문적 배경을 보면서 우리가 주목 하게 되는 것은 그 학통이 조선조의 도통을 계승한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포은 정몽주를 조종(祖宗)으로 하는 절의 실천정신이 선생에게 그대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포은은 고려왕조를 위하여 조선왕조의 건국을 거부하고 죽음을 택하였던 충절정신을 실현한 인물이었다. 이와 같은 의리 정신을 정통으로 여겼던 조선조에서는 그를 이학지종(理學之宗)으로 추앙하였다. 이는 고려와 조선이 왕조는 다르더라도 그 정신의 소중함을 높이는 것은 한결 같았음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포은의 충절은 현실적 자기의 이익보다는 참다운 도(道)를 실현하고자 하는 이상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그를 도학사상의 근원으로 본다.
정몽주의 이와 같은 도(道)를 숭상하는 정신은 중종 조에 이르러, 연산 조에서 사욕을 탐하였던 무리들을 척결하고 새로운 이상 정치를 실현하려 할 때, 그 정신을 요순의 도학지치(道學至治)에서 찾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도(道)를 숭상하는 정신은 지치주의 도학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때 조정에서 지치주의 도학으로서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였던 인물이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였다. 그러나 그 이상은 조정의 훈구파들에 의하여 저지당하고 마침내 사화를 당하여 사사되었지만, 그 정신은 도학사상으로 정립되었고, 또한 그 당시 사림들은 도학지치를 실현하고자 하였으니 중종 조 학문의 특징을 도학사상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여기에서 조정암의 학문은 포은 정몽주의 도통을 계승한 그 정통성을 지닌 것이었고 중봉선생의 학문과 그 실천정신은 조광조의 정신을 그 연원으로 하여, 이를 계승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생의 학문적 연원을 살펴보면 선생의 할아버지는 정암 조광조의 문인이었으며 아버지는 청송당 성수침의 문인이었다. 그런데 선생은 또한 청송의 아들 우계의 문인이었고 토정 이지함의 문인이었다. 이를 보면 선생과 기묘명현과의 인연은 선생의 시대에서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라 선생의 조부 때부터 이어져서 아버지 또한 정암의 문인이었던 청송의 제자였다. 여기에 선생 또한 청송의 아들이었던 우계를 사사하였으니, 기묘사림의 정통성을 계승한 서의(世誼)적 계승은 매우 깊고도 멀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사승관계는 매우 드문 인연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선생은 가족적 배경과 사승(師承)적 계승을 겸한 조선조 도통의 정통성에 서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선생의 정신은 절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기묘 사림의 도학 충절을 계승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조광조는 당시의 시대를 구하고자 하여 오로지 도(道)를 밝히는 것을 스스로의 사명으로 여기고 요순(堯舜)이 이룩하였던 지치(至治)를 이루고자 모든 힘을 기울이다가 권력을 탐하던 훈구대신들의 모함을 받고 사사되었다. 그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이 하여야 하고 나라를 걱정하기를 집안 걱정하듯 하여야 한다”19)고 하였고 또한 “밝은 해가 여기에 내려 나의 진실한 마음을 밝고 밝게 비춘다”20)라는 절명 시를 남겼는데 이는 군부 일체의 정신을 밝히고 또한 자신의 지극한 충절을 나타낸 것이었다.
선생은 이와 같은 정신 그대로 임금을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나라를 걱정하기를 집안 걱정하듯이 그 진실한 마음을 실천하여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순절의 길을 택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선생의 행의는 정암이 남긴 절명시(絶命詩)의 가르침 그대로를 실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선생의 부친은 성수침의 문인이었는데 성수침 역시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청송문집에 따르면 기묘사화 당시에 “조정에서 지치의 기풍이 일어나서 다소의 개혁이 있었고 조광조 또한 중종의 권우가 두터워 교류하는 선비들이 많아 명성이 높아서 이를 걱정하였는데 곧 사화가 일어나서 사림들을 죽이고 조정에서 쫓겨나자 능히 세태와 더불어 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두문불출하였다”21)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생 부친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버지의 가르침과 스승인 성수침 모두가 정암의 기르침을 계승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부친의 학문은 정암의 학통을 계승한 두 사람의 가르침을 함께 이어 받은 것이다. 여기에 선생 또한 이와 같은 부친의 훈육을 받고 성장하였으며 우계를 사사하게 되었으니 이와 같은 도통의 전승은 매우 드문 일로서 선생은 실로 조선조 도통의 정맥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선생은 우계를 사사하면서 토정 이지함의 가르침을 받고 율곡 이이를 존숭하고 그 가르침을 받았으니 이는 절의의 도학과 토정의 경륜과 율곡의 경세정신을 그 가르침으로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선생은 도학과 절의 정신을 그 학문적 바탕으로 하여 경세 정신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니 그 경세정신은 선생이 남긴 8조의 상소와 평소의 생각을 알 수 있는 16조의 상소에 잘 나타나 있다. 선생의 이와 같은 도학과 절의 정신은 가정적 영향에서 얻어진 것이며 경세정신은 토정을 통하여 얻어진 경륜이라 할 것이니, 이와 같은 의식들이 종합되어서 구국운동으로 발현되고 마침내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충절과 대의를 실현하여 전장에서 죽음을 택하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8조의 상소는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의 제도를 보고 이를 시행하고자 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선생의 개혁정신과 새로운 문물에 대한 수용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데, 이 상소를 통하여 우리는 개방성과 실천성을 발견하게 된다. 개방성이란 우리의 전통을 근본으로 하면서 중국의 문물이나 제도에서 본받을 만한 것들이 있으면 이를 수용하여 우리의 발전을 도모하자는 것이며 실천성이란 모든 가치는 실천으로서 나타난다고 여긴 것이다. 선생이 생각하였던 실천의 가치는 올바름을 실현하는 데 있었다. 올바름이란 의리이며 절의였다. 따라서 국가가 위태로울 때는 생명을 바쳐서 의리를 지키는 것이 당연한 임무라고 여긴 것이다. 여기에서 맹자가 말하는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정신을 볼 수 있다.
선생은 선조 7년에 성절사(聖節使)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중국의 제도에서 배워야 할 것들을 다음과 같은 8가지로 정리하여 올리고 이를 시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임금에게 올린 8조의 첫째는 공자 사당에 대한 명분과 그 실제적인 예(例)를 들고 우리나라의 현인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문묘에 배향하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선생은 중국에서는 공자의 위패를 지성선사공자지위(至聖先師孔子之位)라 고쳤고 안자(顔子) 이하는 모두 벼슬을 고쳤다. 그러므로 대성전(大成殿)을 선성묘(先聖廟)라고 한다22)고 전제하고 중국 역대의 배향하는 습관을 열거한 후에 우리나리에서 배향하는 문제를 바로 잡기를 건의하였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이지만 중국의 배향제도를 보고 깊이 느낀바가 있다. 무릇 사습(士習)은 그 추향(趨向)하는 바가 한결같아서 임금이 좋아하는 것을 따르기 마련인데 전하는 지난번 관학유생들이 제현(諸賢)을 종사하자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렸으나, 허락하지 않았고 근신들이 경연에서 건의하여도 따르지를 않았다. 이는 실로 선(善)을 좋아하는 마음을 저지하는 것이다. 김굉필은 도학을 부르짖고 전성(前聖)을 이었으며 후학을 열어준 업적이 있고 조광조는 이 도를 이어받아서 일으켰으며, 세상을 구하고 사람들을 착하게 한 공이 있다. 이언적은 도를 체험하고 또한 순수하고 독신(篤信) 호학하였다. …이황은 동방 선비들의 장점을 모아서 크게 이루고 주자의 학통을 이었다. …전하께서는 속히 네 사람을 포장하여 종사에 참예(參詣)하도록 하여주기 바란다” 고 하였다.23)
둘째는 관직에 나가는 사람들이 잘못된 제도로 말미암아 그 폐단이 많음으로 임용의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벼슬을 추천할 때는 신중하게 하고 또한 중론이 확정된 다음에 올려야 함에도 경솔하게 하고 한번 부임하면 폐단이 많게 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어려움에 고통을 받는 것은 모두 관리를 임용하는데 있음을 헤아려 올바른 직책이 수행되도록 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24).
셋째는 귀천의 제도를 바로 하여 명분과 직책에 맞는 제도를 마련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은 중국제도의 의관과 그 법을 모방하고 또한 우리의 실정에 맞는 제도를 세우고 이를 직접 올리면서 이를 공조로 하여금 보게 하고 공인들에게 자세히 가르쳐서 종이를 재단하여 양식을 만들어 팔도(八道)에 널리 공포하여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자고 하였다25).
넷째는 음식과 잔치에 사용하는 음식을 절약하여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음식을 많이 만들어 놓고 먹고 마시는 것을 지나치게 낭비하고 있으니 이러한 습관은 바로 잡아야 한다. 지방이나 모든 고을에 그 음식의 가지 수를 정하라는 전교가 있었지만 이를 집행하는 관리들이 교활하여 하나도 지켜지지 않고 백성들의 원망이 높으니 음식과 잔치를 절제하고 그 숫자를 정하여 엄하게 하도록 하여야 한다.
다섯째는 사대부들의 읍양(揖讓)하는 예(禮)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
선생은 중국의 예(禮)와 우리나라의 예(禮)가 맞지 않음을 지적하고 중국의 예와 일치하여야 저들과 교류함에 있어서 서로 어긋남이 없게 될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26).
여섯째는 사제 사이에 접견하는 예를 바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국자감을 비롯한 제생들이 삭망(朔望)에 절하는 횟수와 사제(師弟) 간에 접견하는 예가 중국과 다르고 또한 일정하지 않는 것을 바로 잡고 통일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승과 학생이 접하는 예절과 초하루 보름에 임금을 배알하는 예절 또한 한결 같이 중국의 제도와 일치시켜서 읍양하는 예를 강습 하도록 하여 그 품위를 높여야 한다26).
일곱째는 향려(鄕閭)의 습속을 아름답게 하여야 한다. 이는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임금이 임금다워야 하기 위해서는 그 명분에 맞는 예속(禮俗)이 이루어 져야 하는데도 시골이나 변방에서는 그 예속이 무너지고 있으니 그에 맞는 예법을 시행하도록 교화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지방 수령과 관아에서 한결같이 교생과 함께 절도 있는 예가 이루어지도록 교화 하여야 한다26).
여덟 번째는 군대의 규율을 엄하게 하고 그 기상을 높일 것을 말하였다. 중국에서는 군대가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이 없는데 우리나라는 백성들에게 폐단이 되고 있다. 국가의 간성이 된 사람은 근면하고 청렴해야 하며 규율을 엄하게 지키고 백성들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26).
이와 같은 내용을 보면 선생의 경세정신은 의리사상에 근본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 의리는 군주와 국가에 대한 충의로서 실현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의 정신은 그러나 이는 과거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물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나라의 잘못된 폐단은 속히 바로 잡아서 백성들을 교화하는데 그 힘이 현실적으로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선생의 실천정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선생의 의리는 국가에 대한 충절로서 나타난 것이지만 단순한 정신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폐단을 바로 잡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실용성을 지닌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선생에게 충절과 의리는 실천을 떠나서는 무가치 한 것이었다.
선생이 왜적을 맞아서 최후에 임할 때까지 흔들림이 없이 순절 할 수 있었던 힘은 이와 같은 올바른 의리를 실천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신념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Ⅳ. 중봉의 의병활동과 그 충절
선생의 이상은 의리를 실천하는 것이었고 그와 같은 의식의 형성은 선생의 가정적인 교육과 학문적 전수를 받은 스승의 학통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거니와 이제 이와 같은 선생의 학문과 그 정신은 모두 실천적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그 실천 정신이 실학이었다. 실학을 조선조 영조 정조 시대의 학문적 현상으로 보는 학자도 있지만 실제로 그 실천정신은 보다 앞서서 선생이 선도적으로 실천한 정신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실학은 현실을 중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천적 성격이 강하다. 앞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선생이 올린 8조의 상소는 모두 현실에서 보고 느낀 것이었다. 그 내용은 모두 중국에 가서 보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들을 그대로 건의한 것이다. 그 중요한 점은 그와 같은 것들은 그 당시에 현실적으로 당장 실행될 수 있는 실천적이고 당장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는 이상을 추구하는 이론이 아니었다. 이러한 점에서 선생의 학문과 그 행의는 언제나 현실 속에서 실천에 옮기는 정신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충의와 실천은 율곡이나 우계와는 다른 것이었다. 율곡과 우계의 학문이 이론을 탐구하는데 있었다면 선생의 학문은 실천을 이룩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실학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의 학문은 의리를 실천한 것이었으며 그 경륜은 현실 속에서 그 잘못된 것을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언제나 대의명분을 분명히 하고 그 명분과 실제를 일치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는 그 당시의 학자들이 성리학 연구에 탐닉하여 리기(理氣) 심성(心性)을 논하고 천리를 실현하는 것을 논하였던데 반하여 선생은 국가가 위난을 당하였을 때는 몸을 바쳐서 나라를 구하여야 한다는 성현의 도(道)를 실현하는 행의(行義)로 나타났다. 따라서 조선조의 도학은 선생에 의하여 이론의 연구가 아니라 구국의 실천으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하여 담헌 홍대용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중봉의 학문과 율곡 그리고 우계의 학문이 서로 다른 점이 있는가? 중봉의 학문과 그 조예를 어찌 감히 문득 율곡 우계와 같은 것이라 하겠는가. 지극히 공정하고 진심에서 울어난 정성으로서 오륜을 완전하게 갖춘 것은 누구도 없었으니 그 실행이 이와 같았던 것은 그 학문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다. 이제 그 부인이 죽었을 때 그 장례를 난을 피하는 것으로 지정했고 천둥소리를 들어보고 풍신수길이 쳐들어 올 것을 알았으니 앞서 알아낸 것이 어찌 신(神)과 같지 않았는가. 중봉이 어찌 다른 방도가 있었을까 다만 그 지성스러움이 신령스러웠을 뿐이다. 이지함은 우리나라의 인물이었다. 하늘의 별자리를 볼 줄 알았는데 중봉이 일찍이 스승으로 삼았으니 먼저 알았던 것은 모두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성취함이 이와 같았으니 이는 모두가 실심(實心)으로 실학(實學)을 하였기 때문이다”26)
홍대용의 지적은 선생이 앞날을 미리서 예견 할 수 있었던 것은 토정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것이니 임진 난 이전에 이미 이를 예견하였던 것으로서 또한 부인의 장례를 서둘러 치른 것도 모두 전쟁을 대비하고자 하였던 지혜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홍대용은 선생의 학문을 실학으로 정의하였다는 사실이다. 선생의 학문은 실천성을 보여준 실학으로서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는 것이었으니 천고의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홍대용의 지적처럼 선생은 임진 난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아서 왜적을 물리치는데 자신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각오하고 스스로를 희생할 것을 다짐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임진년 2월 18일에 부인 신씨의 상을 당하였을 때 이미 변고가 일어날 것을 예견하여 그 장례 또한 간단히 하고 난에 대비한 것은 모두가 앞날을 짐작한 혜안에서 나온 것이었다.
선생이 금산에서 순절하였기에 조야의 모든 벼슬아치와 선비들은 나라를 구하여야 한다는 사명감을 더욱 다짐할 수 있었고 다투어 전장에 나아가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생의 절의가 사사로운 영예나 욕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학문과 삶 자체에서 나온 것으로서 도학과 절의가 일치된 의식의 실천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훗날 시호를 청하는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선생은 일찍이 이율곡 성우계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학문의 연원을 얻었으니 그 학문은 넓고 큰 것이었다. 돈독하게 실천하고 의리의 정미함에 이르러 스스로 깨닫는 바가 많았다. 그 입지가 굳고 확실하였으며 의연하여 감히 꺾을 수 없는 그 기상이 있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밝히고 그 미형(未形)의 이치를 밝혔으니 가슴 속에 쌓인 깊은 뜻은 또한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당하여서나 감히 말할 수 있었고 그 말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시대의 어려운 환란 속에서도 능히 훗날의 득실을 징험하는 모습은 산통을 들고 거북점을 치는 것과 같이 맞았으니 이는 지극한 도에 능통하고 능히 천기를 볼 수 있는 수준에 이른 자가 아니라면 누가 능히 이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 이와 같이 선생이 나라를 위하여 순절한 것은 역시 학문의 공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27)
이는 선생의 학문적 연원이 깊고 그 실천성이 독실하여 그 기상이 우뚝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근본을 밝힐 수 있었고 그러한 신념에서 나라를 위하여 순절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선생의 학문과 실천 그 실천과 덕행이 일치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선생의 일생에 대하여 그 「행장」에서는 “선생은 효제가 신명에 통하였으며, 그 충성은 금석을 꿰뚫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함은 흑백을 가르듯이 확실하였고 그 움직임은 강하(江河)를 타는 듯하였다. 내외의 분수가 정하여 져서 부귀와 빈천이 이를 넘어서지 못하였고 뜻을 지킴이 확고하여 도거(刀鉅)나 정확(鼎鑊)의 형벌로서도 이를 움직이지 못하였다. 그럼으로 그가 펼쳤던 의논은 한결같이 광명정대하고 분명 성실하고 정밀 세세하여 요순(堯舜) 탕무(湯武)가 아니면 말하지 아니 하였고, 공맹정주(孔孟程朱)가 아니면 배우지 아니하였으니 참으로 독신호학하고 수사(守死) 선도(善道)하는 참다운 군자라고 할 것이다”28) 하였으니 그 학문과 절의가 어떠하였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생이 얻은 성과는 금산전투에서 순절할 때, 3일을 싸우자 적들의 시체가 쌓이고 왜적의 통곡 소리가 3일을 그치지 않았는데 결국 이로 인하여 남은 적들은 무주로 도망가서 숨어버리게 되었으니 선생의 순절로 말미암아 호남으로 넘어 오려던 적을 막을 수 있었고 호남이 보존됨으로서 나라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었으니 선생이 임진 난의 전세를 회복시킨 공로는 실로 큰 것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충절 정신은 이를 기리고 따르려는 많은 선비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은봉 안방준(1573∼1654)은 스스로 포은과 중봉을 흠모하여 은봉이라 자호하고 선생의 행의를 편찬하여 『항의신편』이라 이름 하였으며29) 선생이 살았던 김포의 옛 자취를 보존하고 선생을 기리는 비를 세웠음. 또한 우리의 역사에서 올바름을 숭상하는 선비들은 선생의 행의를 일컫지 않음이 없었다.
선생의 의병활동과 그 순절은 조선의 역사를 올바른 길로 이끌게 되었으니 그 첫째가 전란에서 보여준 충절정신은 만고의 귀감이 되어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의병들이 도처에서 떨쳐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고 둘째는 선생의 행의는 국가를 위한 충절은 실천을 통하여 얻어질 때 그 참된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진지실천의 가치를 심어주어 실학정신을 일깨우고 국가를 구하고자 하는 실용의 학문을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셋째는 선생의 순절로 인하여 왜적의 예봉이 꺾기고 임진 난의 전세가 바뀌어 조선의 국토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니 선생의 정신과 그 의병활동이 조선의 역사에 끼친 공로는 참으로 지대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Ⅴ. 결 론
이상에서 살펴본 중봉선생의 일생에 나타난 그 경세정신과 의병활동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선생이 살았던 시대는 명종 초에서 선조 25년 임진 난 때까지였다. 이 시기는 조선조의 건국 시기를 지나서 새로운 학문과 질서를 정립하였던 때였다. 이때에 발흥한 도학지치의 이상은 그 이론적인 면에서 퇴계나 율곡 그리고 우계와 같은 학자들이 주자학을 새로운 이론으로 발전시키게 되었고 또한 실천 정신은 구국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선생은 도학 지치를 주장하고 새로운 정치를 이룩하고자 하였던 정암 조광조의 영향을 받았던 조부(祖父)와 부(父) 그리고 스승 우계의 영향을 계승하여 진지실천(眞知實踐)을 배우고 토정 이지함을 사사하여 천문과 지리를 배우고 국가의 변란을 예견 할 수 있는 혜안을 익혔다.
이와 같은 지혜로서 나타난 것이 경세론과 그 의병활동이었다. 선생의 경세의식은 현실을 개혁하고 그 잘못을 바로 잡는 실학이었고 그러한 실천정신이 국가의 위기를 당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절의를 지켜 순절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선생의 의병활동은 단순한 행동으로 나타났던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오랜 의식과 사상의 계승과 그 가르침을 이은 것으로서 체와 용을 겸한 것이었다.
선생의 행의는 도학지치의 정신을 구국운동과 의병 활동으로서 발전시킨 것이었다. 선생이 금산에서 순절함으로서 전국에서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의병들이 봉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또한 그 당시에 실제로 호남으로 남진하려 하였던 왜적을 중도에서 막아서 그들은 패퇴 시킬 수 있었으니 이는 선생의 순절로서 호남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호남을 근거로 하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니 결국 왜적으로부터 조선조의 운명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선생의 의리 실천은 조선조의 사상적 특징을 정립하는데 커다란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중종 조 이후 전개된 사상적 특징에 대한 이해와 그 평가이다.
조선조 학문의 발전적 특징을 도학 성리학 실학으로 이해한다면 도학이 성리학으로 발전하는 과정에는, 성리학의 이론적 연구만이 아니라 여기에는 의리실천으로서 나타난 의병활동과 구국 운동이 그 중요한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회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중종 조 도학의 발전은 성리학의 이론적인 측면과 의병활동과 구국운동으로 나타나는 실천적인 측면으로 발전되었고 그 이론적 발전이 퇴계나 율곡과 같은 학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면 국가가 위태로움에 직면 하였을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백성들을 흥기 분발 시켰던 것은 선생의 의병활동과 구국 절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선생이 나라를 위하여 기꺼이 몸을 바치는 순절이 있었음으로 훗날 이를 본받아서 조선조의 선비들이 외세의 침략을 당할 때면 서슴지 않고 전쟁터로 나아 갈 수 있었던 것이니, 정유 난 정묘 병자 난 그리고 조선조 멸망에 이르기까지 많은 선비들이 떨쳐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의 가르침이 그 귀감이 되었음이니 선생의 정신이 조선조의 역사에 남긴 그 교훈은 실로 크고 오랜 것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선생의 행의는 조선조의 역사를 올바로 이끌어가는 중심축을 이룩하고 또한 오늘날 우리들에게 참다운 진리는 이론이 아니라 그 실천을 통하여서만이 그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교훈을 심어준 것이었다.
살신성인의 사표 천곡 송상현
충북대학교 총장
임 동 철
殺身成仁의 師表 泉谷 宋象賢
1. 忠義의 實踐
壬辰倭亂은 일본이 명을 정벌하기 위해 조선에게 길을 제공하라는 명분으로 일어난 전쟁이었지만, 그 결과는 동아시아의 정세에 일대 변혁을 초래한 중대한 事件이었다. 특히 아무런 준비 없이 전쟁터로 변한 조선의 사정은 7년의 전쟁기간 뿐만 아니라, 이후 엄청난 소용돌이를 체험해야만 했다. 당시의 朝廷은 동인과 서인의 분열로, 侵掠에 대한 아무런 防備도 갖추지를 못했다.
결국 20만의 大兵에 신식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의 侵掠에 宣祖가 서울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하는 恥辱을 당하고 만다. 이로 인해 宗廟를 비롯한 宮闕은 파괴되고, 수많은 典籍은 불길에 사라졌다. 倭亂이 일어나자 조선의 관군은 제대로 방어조차 해보지 못하고 무너졌다. 東萊城의 陷落이후, 申砬이 충주 탄금대에서 패하니 倭敵은 아무런 抵抗없이 漢江을 넘어 도성에 들어섰다.
倭敵이 서울에 오기까지 거의 유일한 저항이 東萊城전투였다. 東萊府使 宋象賢의 저항과 殉節은 각지의 士林들이 義兵을 일으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니, 이로 인해 官軍이 전열을 가다듬고 명나라의 원군이 파견되는 시간적 여유를 벌게 하였던 것이다.
전란 중에도 선생에게 관직을 추증하고 정려한 것이 모두 선생의 이러한 공적을 현창함이니, 重峯 趙憲, 忠武公 李舜臣 등과 더불어 임란의 가장 큰 충신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宋象賢은 1551년(명종6) 5월 8일 아버지 復興과 어머니 安東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德求요, 호는 泉谷으로 본관은 礪山이다. 태어나면서 재주가 뛰어난 13세에 經史에 통달하여 세 번을 읽으면 잊지 않았다고 하며 15세에 초시에 장원하니 考試官조차 秀才라고 탄복하였다 한다. 19세에는 星州李氏에게 장가들고, 20세에 進士가 되고, 6년 뒤 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27세에 承文院 正字에 임명되고, 29세에는 承文院 注書 겸 春秋館 記事官이 되었다. 30세에는 成鏡道 判官이 되었다가, 3년 뒤 司憲府持平이 되었다. 이후 戶曹․禮曹․工曹 등의 正郞을 역임하였다. 34세와 35세에는 각각 조정의 정통성을 분별하는 質正官으로 明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36세에는 銀溪 道察訪이 되었는데, 이는 언관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견지하면서 李潑의 미움을 사 좌천된 것이었다. 37세에 持平으로 다시 내직을 들었다가, 이듬해 배천군수에 임명되었다. 40세 임기를 마치고 내직으로 돌아왔다가, 41세인 1591년 正三品 通政大夫로 승차하여 東萊府使가 되었다. 왜적의 동태가 이상하여 문무를 겸비한 선생을 발탁하였다고 하나 선의는 아니었다.
1592년 4월 13일 왜적이 국적을 侵犯하니 14일에 부산첨사 鄭撥이 죽음으로 저항하였으나 釜山鎭은 끝내 함락되었다. 15일 東萊城을 압박해 들어오니 선생이 군민을 이끌고 성에 올라 방어할 때 좌병사 李珏이 함께 지키기 위해 들어왔다가 적의 형세를 보고 도망갔다. 왜적은 이미 군대를 호에 주둔시키고 군사 백여 명으로 하여 “싸울 수 있다면 싸우고, 싸울 수 없으면 우리에게 길을 내주어야 한다(戰則戰矣 不戰則 假我道).”라는 木牌를 가지고 남문 밖에 서 있도록 하였다. 선생은 “싸우다 죽는 것은 쉬우나 길을 내주는 것은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고 木牌에 글을 써서 적에게 던졌다. 마침내 왜적은 세 갈래로 공격하여 성을 세 겹으로 포위하고 성의 뒷산에 올라 아래로 압박하니 순식간에 쫓긴 부민이 모두 성안으로 밀려들어 움직일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선생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朝服을 갑옷위에 걸치고 호상에 앉아 의연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왜적에 平調益이란 자는 여러 차례 동래성을 방문하면서 선생의 인격을 흠모하였기에 피신하도록 눈짓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왜장을 꾸짖어 말하길, “남의 땅을 침범하여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앞으로 天誅를 면하지 못하리라. 내가 너희들에게 지지 않을 것이니, 네 어찌 이 같이 무도방자하단 말이나?” 하고,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걸상에서 내려와 북으로 향하여 절하였다. 죽음에 임하여 그는 아버지 송화공(松禾公) 복흥(福興)에게 피로 부채 면에 글을 써서 올린다.
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포위되었는데, 다른 진영은 단잠에 빠져 있습니다. 군신의 의리가 무거우매, 부자의 은의(恩誼)는 오히려 가볍습니다.
孤城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經30)
송상현의 벗 신흠(申欽 1566~1628)은 위 편지를 두고 그의 『상촌잡록 象村雜錄』에서, 말이 늠연(凜然)했으니 비록 옛날 열사(烈士)라도 이보다 지날 수가 없다고 하였고, 윤봉구(尹鳳九)는 1756년 송상현의 7대손 상휘(尙輝)가 위 글에 대한 발문을 청하자 다음과 같이 써서 송상현이 충효를 실현했음을 말하였다.
오호라, 무릇 사람이 부모가 계신데 나라를 위해 죽는다면 충효를 둘 다 온전히 할 수는 없다고 누구나 말한다. 이 편지 또한 부자의 은혜는 가볍다 했으니 한이 없을 수 없는 것 같다. 마지막 효를 하지 못하고 삶과 죽음이 갈리는 즈음에 또 슬하에서 영결을 받들 수 없으니 효자의 마음이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또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성인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전진에서 용감하지 않은 것은 효가 아니다”라고. 공과 같이 군진에서 순절한 것은 비단 용맹일 뿐만이 아니다. 부모도 반드시 “내가 참으로 아들을 두었구나”라고 말할 것이다. 공이 어찌 충에만 도타웠겠는가, 실로 그 효를 다했음이라.31)
나라와 백성을 위해 효(孝)가 드러날 때 곧 충(忠)이 된다. 난을 당하여 부모보다도 나라를 생각하고, 자신을 버려 백성을 구하는 것이 ‘충’이며 동시에 ‘효’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충을 실현하기 위해 효를 뒤로함은 효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효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송상현에게는 첩이 둘이 있었다. 그 하나는 한씨로 이름은 금섬(金蟾)이다. 송상현이 조복을 가져오게 하니 금섬은 그가 죽으려는 것을 알고 곧 금춘(今春 여종의 이름)과 함께 담을 넘어 송상현의 처소로 가니 적이 이미 모여들어 그를 죽였다. 금섬도 사로잡혔지만 꾸짖는 소리가 입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다가 사흘 만에 드디어 죽임을 당하였다. 왜장인 평의지(平義智)ㆍ현소(玄蘇) 등이 성에 들어와 송상현의 죽음을 듣고 그 충절과 의기에 감복하여 그를 살해한 자를 끌어내어 죽이고, 송상현과 금섬의 시체를 찾아서 동문 밖에 같이 장사지내고 나무를 깎아 표를 해 두었다. 이로부터 동래성 남문 문루에는 밤마다 붉은 기운이 3년 동안이나 사라지지 않아 적이 공경하고 두려워했다고 한다.
송상현의 또 다른 첩 이씨는 그가 ‘적이 장차 이를 것이다.’ 하여, 그녀를 서울로 돌려 보냈더니, 가다가 하루만에 부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며 말하기를, “나는 차라리 남편이 있는 곳에서 죽으리라.” 하고, 동래로 돌아왔다가 성이 함락되자 계집종 만개(萬介)ㆍ금춘(今春) 등과 함께 사로 잡혀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왜적이 다투어 범하려 하였으나 이씨가 죽음을 각오하고 거절하였고, 이씨는 항상 송상현이 쓰던 비단 갓끈을 몸에 지니고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인 신여로(申汝櫓)라는 자도 송상현을 따라 동래에 있었다. 적이 이르자 송상현 은 신여로가 어머니가 있는 몸으로 적에게 죽임을 당할까 염려하여 돌려보내었다. 신여로가 길에서 부산이 함락된 것을 듣고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송공의 은혜를 후하게 받았으니 난리라고 하여 감히 죽음을 아끼겠는가.” 하고, 드디어 돌아와 송상현과 함께 죽었다.
신흠의 손자이자 김집의 문인인 신경(申炅 1613~1653)은 충의를 실현한 송상현에 대해, “홀로 송상현만은 어떤 사람이건대, 일개 부사로서 우뚝하여 죽음 보기를 집에 돌아가듯 하였으니, 옛날의 충신 장순(張巡)ㆍ허원(許遠) 같은 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리오. 송상현의 몸은 나라에 바쳤는데 송상현을 따르는 자들은 송상현을 위하여 죽었으니 이것은 송상현의 절개가 그들을 격양시킴에 있는 것이다. 저 개나 돼지 같은 왜적도 공경할 줄 알았으니 진실로 특이하도다.”라고 하였다.32)
송상현의 충의의 정신은 때로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낳기도 한다. 조경남(趙慶男 1570~1641)의 『난중잡록 亂中雜錄』은 1582년에서 1639년까지 58년간의 사적을 일기체로 기술한 것인데, 여기에 1595년 7월 22일 송상현의 혼이 아들의 꿈에 나타나 지어 보였다는 율시 한 수를 기록하였다.
막힌 운세 다시 돌아 사람들이 죽으리니 否運重回士女殲
병자·정묘년의 화가 쪽빛보다 푸르구나 丙丁之禍碧於藍
서쪽 철옹(鐵瓮)에 가자니 술 없는 것이 걱정이요 西行鐵瓮愁無酒
동쪽 금강(金剛)으로 달리니 소금 있음이 기쁘도다 東走金剛喜有鹽
임금의 일산이 비록 요동 학[遼鶴] 울음에 놀라나 翠蓋雖驚遼鶴唳
황건(黃巾)이 마침내 한(漢) 나라 발끝에 부서지리 黃巾竟碎漢靴尖
훗날 전란이 평정되길 기다려 他年待得干戈息
바다 남쪽에 나의 뼈를 묻어 다오 吾骨須收瘴海南
조경남의 기록에 의하면, 송상현이 “국가의 화란(禍亂)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앞으로의 일이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뜻만 지닌 채 헛되이 죽었으니 어느 때나 눈을 감으랴” 하고 지어 보였다는 것이다. 물론 위 시를 기록한 조경남도 이것은 당시 소문으로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한편 그러면서도 “어찌 반드시 거짓이랴. 슬프다, 생전에는 국가를 위해서 죽었고, 죽어서도 나라를 걱정하니, 장순(張巡)ㆍ허원(許遠)의 뒤로 이러한 사람이 몇이나 될꼬?”라고 하였는데, 1897년 송근수(宋近洙 1818~1902)가 서문을 쓴 家藏 필사본 『천곡선생집』에 기록한 시서(詩序)에는 “그 후 병자․정묘의 난에 그 일이 과연 징험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조경남을 비롯한 당대인들의 시대인식과 정서가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고자 했던 송상현의 충의를 경모의 대상으로 추앙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2. 동시대인과 후인들이 바라본 송상현
송상현의 벗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공사(公事)로서 의령(宜寧)에 갔을 때에 그의 관을 다시 갈아서 염하고 제문을 지어 곡하기를,
슬프다 외로운 성에 달무리 할 적에 嗚呼孤城月暈
담소하며 지휘한 것이 談笑而指揮者
공의 열(烈)이 아닌가 非公之烈耶
흰 칼날이 앞에 덤벼도 白刃交前
단정히 앉아 움직이지 아니한 것이 端拱而不動者
공의 절개(節)가 아닌가 非公之節耶
슬프다 동래산은 푸르고 푸르며 嗚呼萊山蒼蒼
남해는 아득하고 아득하다 南海冥冥
영원히 남아 있어 없어지지 아니한 것이 있으니 却有長存不毁者
천 년 만 년에 이름을 드리웠네 千齡萬祀兮垂空名
남문에 밤마다 南門夜夜
붉은 기운이 紫燁燁燁
위로 두우성 사이를 쏘아 비추는 것이 仰射于斗躔者
공의 정신(精)이 아닌가 非公之精耶
라고 하여 그가 지닌 열사로서의 면모, 굽힐 줄 모르는 절개, 충의의 정신을 드러내었다. 송시열은 <시장 諡狀>에서, 이항복(李恒福)이 위 제문에서 한 말이 세간에 많이 전해 내려오지만 그것만으로 송상현을 다 형용했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성혼(成渾 1535~1598)은 1592년 12월에 편의시무(便宜時務) 아홉 조항을 올렸는데, 그 가운데 한 가지는 국가에서 충신을 표창하는 예전을 급히 거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성을 지키다가 굴복하지 않고 죽은 송상현(宋象賢), 김연광(金鍊光) 등은 모두 충의(忠義)가 뛰어난 자들이니, 진실로 마땅히 수집하고 방문하여 하나하나 표창하고 추증하며 처자들을 구휼해서 저 충성스러운 넋을 위로하고 뛰어난 공렬을 분명히 보답하여 한 시대에 충의의 기개를 드높여야 한다는 것이다.33)
한편 임란 때 활약했던 무장들은 동시대인들의 시에서부터 경모의 대상으로 추앙된다. 추모시에서는 대부분 그들의 기정화된 업적과 그리움을 관습적으로 표현한다.
팔 척 신장의 당당한 남자요 八尺堂堂男子身
재주는 문무를 겸비하여 무리 중에 뛰어났지 才全文武挺千人
큰 장수로서 남방을 떠받칠 듯하더니 擬將鰲柱擎南極
왜적이 도성을 쓸어버릴 줄 누가 알았으리 誰料攙搶掃北辰
충의로운 혼백 칼날에 스러지니 義魄忠魂隨白刃
서릿발 같고 태양 같은 기개 푸른 하늘 비추네 秋霜烈日照蒼旻
해운대 하늘가는 공이 일찍이 노닐던 곳 海雲天外曾遊地
슬피 동남쪽 바라보니 눈물이 수건을 적시네 悵望東南淚滿巾
右哀東萊府使宋象賢34)
이 시는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이 송상현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것으로, 송상현을 비롯하여 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김천일(金千鎰)․최경회(崔慶會)․황진(黃進)․김덕령(金德齡)․이순신(李舜臣) 등 여덟 인물을 차례로 애도하는 시이다.
이정암 역시 1587년 동래부사를 지냈고, 임진왜란 때 임금을 호종했고, 정유재란 때는 황해도 초토사로서 연안(延安)에서 의병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이 시에서 이정암은 송상현 뿐만 아니라 당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전사했거나, 전공을 세우고도 모함에 빠져 죽었거나, 접전 중에 장렬하게 전사한 인물들 여덟 명에 대해 비슷한 방식으로 애도를 표하고 있다. 먼저 그들의 비범한 능력을 서술하고, 이어 전쟁 중 그들이 발휘한 충의와 죽음을 차례로 서술하여 마지막에 가서 애도하는 정서에 안타까움을 최대화시키는 대비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송상현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면에는 방수의 책임을 저버린 자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전제되어 있다.
송시열은 송상현의 증손 문병(文炳)으로부터 청탁을 받은지 4년만인 1655년에 그의 <諡狀>을 쓴다. 송상현의 모습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한 대표적인 글이라 여겨 소개한다.
공은 덕성이 심후하고 도량이 크고 넓어 언제나 말보다 행동이 앞섰고, 희노(喜怒)를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경전을 깊이 공부하였고 제자(諸子)와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병가(兵家)의 서적도 두루 섭렵하였다. 내행(內行)이 순수하고 독실하여 어버이가 있으면 비록 추운 겨울이거나 더운 여름일지라도 예를 갖추어 건(巾)이나 띠[帶]를 벗지 아니하고 오직 명령을 받들어 모셨으며, 아우 상인(象仁)과도 우애가 매우 지극하였다. 큰누이가 정자(正字) 장언오(張彦吾)의 아내가 되었다가 일찍 과부가 되므로 여러 아들을 데리고 와서 공에게 의지하고 살았으나 공이 그를 매우 조심스럽게 섬겨 오래도록 소홀함이 없었으며, 조카들을 자신의 친자식과 다름없이 돌보아 양육(養育)하니 이웃 마을에서 까지도 ‘누구나 따를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집을 다스리는데도 법도가 있어, 평소에 성낸 말이나 얼굴빛을 보이지 아니하고 자애로써 두루 거느리므로 집안사람들이 모두 그 위엄을 두려워하고 그 은혜에 감복(感服)하여 숙옹(肅雝 공경스럽고 화목함)의 덕화(德化)가 있었다.
벼슬길에 올라서는 항상 평온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지키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강직으로 대처하고 아첨하지 않았다. 절개를 지켰으며 죽음에 임하여서는 태도가 자연스럽고 뜻이 안한(安閒)하여 아무 일 없는 듯 평소와 같았다. 이는 그 학문이 바르고 수양이 깊어 사물의 경중(輕重)을 분별함이 본래 속마음에 정해져 있음이니, 하루아침에 강개(慷慨)한 마음으로 목숨을 버리는 것과는 다르다. 이런 까닭에 미천한 잉첩(媵妾)들까지도 한 사람은 적을 꾸짖고 나서 뒤따라 죽고, 또 한 사람은 죽기를 맹세하고 절개를 지켰다. 미천한 종으로서도 의(義)를 지켜 목숨을 버려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덕에 감화되고 의(義)로움에 감동되어 그 이해(利害)의 유혹과 생사(生死)의 두려움마저도 잊게 된 것이다.
또 다스리던 고을의 백성들이 울며 사모하고, 사림(士林)들이 정성을 다해 제사(祭祀)를 모셔 오래도록 잊지 못하며, 포악(暴惡)한 오랑캐들까지도 경복(敬服)할 줄 알아 공의 깨끗함에 감히 무례한 행동을 가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으로 보아 공의, 사람을 깊이 감동시키고 멀리까지 감복시킴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35)
『조선왕조실록』에 송상현과 관련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선조 25(1592) : 우참찬 성혼이 편의시무(便宜時務)를 올려 송상현․김연광처럼 성을 지키다 굴하지 않고 전사한 사람들은 충의가 뛰어난 자들이니 진실로 찾아내어 일일이 포장 추증하고 그들의 처자를 보살펴서 충성스런 영혼을 위로하고 공렬(功烈)을 분명하게 보답하여 한 시대 충의의 기상을 격려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다.
선조 26(1593) : 비변사에서 동래부사 송상현과 회양부사 김연광(金練光)은 모두 순국하여 절의가 칭송할 만한데도 장계(狀啓)에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포장(褒獎)받지 못하고 있어 인정이 매우 답답해 한다고 하다.
선조 27(1594) : 정경세가 병사의 장계에 적힌 적장의 말을 들어 송상현을 각별히 포증(褒贈)하고 그 자손을 채용함으로써 그의 충절을 표명해야 한다고 하다.
광해 14(1622) : 충신 송상현의 처 이씨가 죽자 도승지 이덕형의 청에 따라 해조에 명하여 특별히 휼전(恤典)을 넉넉하게 베풀어 주도록 하다.
인조 5(1627) : 동래부사 송상현과 안주목사 김준을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대신들이 불가하다고 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르다.
인조 21(1643) : 공조판서 윤휘(尹暉)가 국난에 죽은 자로서 송상현과 김천일 같은 자는 마땅히 시호를 추증하는 은전이 있어야 한다고 하자 임금이 그렇게 해야겠다고 하다.
효종 4(1653) :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의 청에 의하여 송상현에게 ‘忠烈’이란 시호를 내리고, 영돈령부사 이경석(李景奭)의 청에 의하여 그의 자손들을 녹용케 하다.
효종 8(1657) : 고부(古阜)의 유학 김양기(金良器) 등이 사당을 건립하고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정충(旌忠)’이라 명하다.
효종 9(1658) : 응교 조복양(趙復陽)이 표석을 만들어 주도록 청하자 송상현의 묘소에 비석을 세우도록 명하다.
현종 6(1665) : 예관을 보내 김장생․조헌․송상현․이순신에게 제사지내게 하다.
숙종 39(1713) : 임진란 때 싸우다 죽은 고 첨사 정발․군수 조영규 등을 모두 충렬사에 배향할 것을 명하다.
영조 11(1735) : 김시민․송상현의 사당에 치제하도록 명하고, 순절한 자의 자손을 등용하게 하다.
영조 39(1763) : 충신 송상현의 봉사손을 등용하게 하다.
영조 42(1766) : 충렬공 송상현을 공신으로 대우하고 부조전을 허락하게 하다.
3. 신항서원과 충렬사
1595년 선조는 두사충(杜師忠)을 보내 청주 가포곡(加布谷)에 장지를 정하고, 왜란 중임에도 불구하고 가마에 관을 실어 청주로 옮겼다. 송상현의 소시적 친구인 태천(苔泉) 민인백(閔仁伯)이 당시 청주목사였는데 그가 재목을 모아 관곽을 만들고 일꾼을 징발하여 가포곡(加包谷)의 언덕에 장사지내고 제사를 지내 편히 모셨다.36)임진왜란이 끝나고 1605년 동래성 안에 송공사(宋公祠)를 세우고 봉사(奉祀)하다가 1652년 부산에 충렬사(忠烈祠)를 세워 그 학행과 충절을 기리었고, 고부의 정충사(旌忠祠), 개성의 숭절사(崇節祠)에도 배향되었다.
1650년(효종 1)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에 추향되었다. ‘천곡(泉谷)’이라는 자호는 그의 고향의 산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37) 고향이 고부인 그가 신항서원에 배향이 된 것은, 그가 순절 후 장지를 청주 ‘加布谷’으로 정하면서 이곳에 묻혔고, 또 그의 자손들이 살고 있어 마을 사람들이 사모해서 의연히 떨치고 일어남이 다른 지방보다 곱절이 되는데도 아직 제사지내는 예를 갖추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송준길이 송상현을 추향하는 통문(通文)을 지을 때는, 1660년 ‘신항(莘巷)’이라는 사액을 받기 전이기 때문에 당시 청주의 ‘유정서원(有定書院)’에 추향된 것이다. 송준길은 통문에서, 송상현이 앞서 이미 유정서원에 배향된 경징군, 박강수, 김충암, 송규암, 한송재와 서로 이룩한 바는 달라도 ‘무릇 학문이란 충효를 배우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결국 한 곳으로 돌아가지 않겠느냐38)고 하여 추향의 의미를 밝혔다.
청주 유생 이인빈(李寅賓) 등이 유정서원의 사액을 청하는 상소에서도 송상현에 관해서는, 순수한 충정과 장렬한 절개로 일월과 그 빛을 다투다가 조용히 의(義)에 나아가면서도 죽음 보기를 마치 귀의하듯 하였으니 그것은 진실로 평소부터 쌓은 공덕이라고 하였다.39) 송상현은 시종 仁을 이루고 義를 취함으로써 사람의 도리에 본보기가 되었다는 것이고, 만주(晩州) 홍석기(洪錫箕 1606~1680)는 그를 두고 ‘백년 만에 나온 유현’이라고 하면서 천곡 송 선생은 詩書를 배운 학자이자 文武를 겸비한 이름난 신하라고 하였다. 그러니 마을에서 그를 제사지냄은 아마도 후인들이 다투어 그의 명성을 흠모해서라는 것이다.40) 김수항 또한 “천곡의 순절은 일월과 빛을 다툴 만하여 군신과 부자 사이에 은의(恩誼)의 경중을 판단했고 혼란과 사생(死生) 사이에 생(生)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였다.”41)고 하였다.
이렇듯 송상현은 고을사람들이 존숭하기에 마땅한 인물임에 분명하지만, 신항서원에 배향된 원인(遠因)으로는, 사계 김장생과 송상현은 일찍이 ‘理學의 벗’이었으며 김집이 송상현을 찾아 수학하고 평생 그를 추앙하고 따랐다는 점과 송상현의 행장을 지은 송시열과 신항서원에 배향하기 위해 유생들에게 보내는 통문을 쓴 송준길이 사계 김장생의 제자라는 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 일찍이 청주 수의동에는 충렬묘(忠烈廟)를 세워 송상현을 봉사하였으나 그 규모가 크지 않아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이에 청주시에서 1996년부터 정비계획을 수립하여 2001년까지 사당, 강당, 전시관, 관리실 등을 신축 정비하여 충렬사(忠烈祠)를 건립하였다. 이로써 송상현의 훌륭한 업적과 고귀한 민족정신을 널리 알리고 산 교훈으로 삼아 계승․발전시켜 후세의 애국교육의 장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충북 출신 3.1운동 민족 대표
청주대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청주문화원 부원장
박 상 일
충북 출신 3·1운동 민족 대표
충청북도는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국시대에는 삼국의 접경지대로서 문물과 인적 교류가 많았던 지역이다. 현존하는 각종 문화유산을 통해서도 복합문화의 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으며, 고집스럽고 우직한 지역적 특색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인물에 있어서도 청주를 인다호걸(人多豪傑)의 고장이라 하였듯이 각 시대마다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외침 등의 국난을 당하였을 때는 누구보다도 충북지역 사람들이 일어나 목숨을 바쳐 나라를 수호하였으니,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에 빼앗겼던 청주성을 조헌(趙憲)과 박춘무(朴春茂)를 비롯한 충북 지역의 선비들로 이루어진 의병군이 탈환하여 첫 승전보를 울렸으며, 장지현(張智賢), 신경행(辛景行), 조웅(趙熊) 등이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송상현(宋象賢), 김시민(金時敏)은 끝까지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밖에 정유재란과 병자호란 때 공을 세운 임경업(林慶業), 이영남(李英男), 이시발(李時發), 박동명(朴東命) 등 많은 인물들이 충북과 인연을 맺고 있다.
이러한 충북사람의 충절은 계속 후대에도 이어져 일제강점이라는 민족역사상 최대 수난을 당하자 역시 충북출신 인물들이 앞장서서 저항하였다. 헤이그 밀사로 유명한 이상설(李相卨)은 진천 출신이고, 역사가이며 언론인이며 독립운동가로 너무나 유명한 신채호(申采浩)는 대전에서 태어나기는 하였으나 본가와 성장한 곳은 모두 충북 청원군이다. 무장항쟁을 주도한 이강년(李康秊)은 경북 문경 출신이고 유인석(柳麟錫)은 강원도 춘천 출신이지만 충북지역에서 활발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국토를 만세소리와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었던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충북출신인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權東鎭), 권병덕(權秉德), 신석구(申錫九), 신홍식(申洪植), 정춘수(鄭春洙) 등 6인에 이른다. 이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며, 특히 손병희, 권병덕, 신석구, 신홍식, 정춘수 등 5인이 청주 출신이어서 주목된다.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주제는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우리 충북출신 인물들이다.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손병희(孫秉熙, 1861~1922)
독립운동가, 동학과 천도교의 지도자, 교육사업가이다. 본관은 밀양이고 초명은 응구(應九) 또는 규동(奎東)이라 하였으며, 일본 망명 때는 가명으로 이상헌(李祥憲)이라 하였다. 호는 소소거사(笑笑居士)이며 도호(道號) 의암(義庵)이다. 동학교도들은 성사(聖師), 천도교 제3세 교주, 교종(敎宗) 의암성사 또는 후천황씨(後天皇氏)라고도 불렀다. 충북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 2구 대주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두흥(斗興), 어머니는 최씨(催氏)이다. 방정환(方定煥)이 사위이다.
22세 때인 1882년 큰조카인 천민(天民)의 노력으로 동학에 입도하였다. 입도 3년만에 제2세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착실한 신도가 되었다. 이 사이에 동학의 교세는 날로 확산, 1892년에는 최시형 등 간부들과 함께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하였고, 동학대표 40여 명은 서울 광화문 앞에서 복합상소(伏閤上疏)를 하며 척왜척양(斥倭斥洋)을 부르짖었다. 그들은 다시 충북 보은군 장내(帳內)에 모여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척양’ 등 정부에 대한 본격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연국의 뒤를 이어 북접통령(北接統領)이 되어 통령기(統領旗)를 받고 공주전투 등 항일구국전선에 나섰다.
최시형에게 생활태도와 역량을 인정받아 의암이라는 도호를 받게 되었고, 1897년 12월 24일 실질적인 제3세 교주로서의 일을 맡게 되었으며, 최시형이 체포되어 서울감옥에서 처형된 뒤 마침내 교주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내의 교도들로 하여금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게 하여 조직체계를 강화하는 한편, 교도의 교양을 위하여 <삼전론 三戰論>을 발표하고 의정대신과 법무대신에게 글을 보내어 정치개혁을 주장하였다. 한편, 진보회는 지방회원이 11만명에 달하는 큰 단체로 발전하는 사이에 태천(泰川)의 관치사건(串侈事件) 등으로 많은 회원이 참살, 익사당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용구의 동학 배반과 친일주구화를 나중에야 알고서 이용구 일파를 동학교에서 축출하는 한편, 동학의 이용을 막기 위하여 정교분리(政敎分離)와 사후대책을 강구하였다. 이때 동학의 본지(本旨)인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을 일깨웠다. 이어서 우리 도(道)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의 도라, 후천개벽은 인심개벽(人心開闢)에서 시작되는 것이요, 인심개벽은 정신개벽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정신개벽은 우리가 지금하고 있는 천도(天道) 그것을 잘 행하는 데 있는 것이라 하였다.
한편, 일본망명 중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정신을 함양시키는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임을 깨닫고, 귀국 후 먼저 보성학교를 비롯하여 합동소학교․광명소학교․석촌동소학교 등에 정기적인 보조와 일시적인 보조를 하여 학교폐쇄를 면하게 하였으며, 문창보통학교에도 관계하였다. 또한 여자교육기관인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을 돕고 보성학원을 인수, 경영하였다. 1914년 말에는 동덕여자의숙의 경영권도 인수하였다. 이밖에도 지방에는 교남학교, 일신보통학교, 청주의 종학학교 등 여러 학교에 관계하였다. 또한 최석창(催錫彰)․민건식(閔建植) 등의 도움을 받아 출판기관으로 주식회사 보문관(普文館)을 설립하였다.
1910년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제는 천도교의 교세확장을 막기 위하여 손병희를 헌병대에 소환하고, 천도교의 재원인 성미법을 폐지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포교에 더욱 힘쓰고 교당 건립에 진력하여 드디어는 대안동(大安東) 중앙교당이 이루어졌다. 그런 가운데 일제의 탄압은 더욱 혹독했으나 상대적으로 우리의 민족의식은 더욱 높아졌다. 1918년 민족자결주의의 영향과 연합국의 승리에 의한 국제정세의 유리한 전망을 포착한 권동진․오세창의 건의와, 1919년 일본 동경의 2.8독립선언에 접한 최린(催麟)․권동진․오세창의 독립운동 허락이 있었다. 이에 찬동, 천도교 측의 대표로 3.1독립만세운동의 주동체로 참가, 그해 1월 20일 경 권동진․오세창․최린 등과 함께 독립운동은 대중화하여야 하고, 일원화하여야 하며, 방법은 비폭력으로 할 것이라는 중대한 합의를 하고, 구체적 방법과 진행은 권동진․오세창․최린․정광조(鄭廣朝)에게 일임하였다. 1919년 2월 27일 밤 천도교 직영의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 2만 1000매를 인쇄, 이튿날 자신의 집에 민족대표 23명이 모여 다음날의 거사를 재확인하고,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할 경우의 불상사를 염려하여 파고다공원 부근 태화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3월 1일 기념식을 거행한 뒤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1920년 10월 징역 3년 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1년 8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상춘원(常春園)에서 치료하였다.
현재 청주시 상당구 수동 3.1공원에 선생의 동상이 있으며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 1979년 충청북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된 선생의 생가와 유허지가 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논저로는『수수명실록(授受明實錄)』․『도결(道訣)』․『명리전(明理傳)』․『천도태원설(天道太元說)』․『대종정의설(大宗正義說)』․『교(敎)의 신인시대(神人時代)』․『무체법경(無體法經)』․『성심신삼단(性心身三端)』․『신통고(神通考)』․『견성해(見性解)』․『삼성과(三性科)』․『삼심관(三心觀)』․『극락설(極樂說)』․『성범설(聖凡說)』․『진심불염(眞心不染)』․『후경(後經)』․『십삼관법(十三觀法)』․『몽중문답가』․『무하사』․『권도문』․『삼전론』등이 있다.
[문헌] 독립운동사, 북이면지, 의암 손병희선생 전기, 청원군지, 청주시지, 충청북도 인물지, 한국인물대사전.
2. 권동진(權東鎭, 1861~1947)
독립운동가로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호는 애당(愛堂)·우당(憂堂)으로, 천도교에 입교한 뒤의 도호는 실암(實庵)이다. 충북 괴산군 소수면 아성리에서 출생하여 8세 때 서울 인현동으로 이사하여 한학을 수학하여 고종조(高宗朝)에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고 김홍집(金弘集) 내각 때 함안첨사에 보임되었으나 조정의 시대적인 폐정을 피하여 부임하지 않고, 조정의 노여움을 사서 거문도로 잠시 유배되었다가, 다시 함안군수 및 첨사로 임명되었고, 이어 육군 참령으로 개화파 인사들과 협력하여 군부의 정화를 도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 때는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손병희와 일본에서 조국 재건 운동을 전개하다가 광무(光武) 10년(1906) 귀국하여 대한협회(大韓協會) 부회장으로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손병희의 영향으로 천도교에 입교, 도사(道師)가 되었으며 전도에도 종사했으며, 한때 충청북도 방장(坊長)을 지내기도 하였다.
1918년 11월 일본 오사카(大阪) 『매일신보(每日新報)』에 소개된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 14개 조항을 읽고, 보다 구체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12월에 천도교측의 오세창(吳世昌)․최린(崔麟) 등과 함께 최초로 독립운동을 발의하여 손병희와 상의하였다. 그들은 첫째, 독립운동의 대중화 둘째, 독립운동의 일원화 셋째, 독립운동의 비폭력화를 결정한 뒤, 이를 거족적으로 펴기 위하여 기독교․불교․유림 등 각종 종교단체를 망라하는 동시에, 당시의 저명인사들로 민족대표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3월 1일 태화관(泰華館)의 독립선언식에 참가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천도교측 15인 중 1인으로 검거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 형을 언도받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 천도교에서 발간하던 잡지 『개벽』의 편집진으로, 또한 「신간회(新幹會)」의 부회장으로 적극적인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3월에는 서울시 종로구 당주동(唐珠洞) 자택에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연합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할 것을 논의하였고, 5월에는 공산당과 급진민족주의자들이 국민당(國民黨)을 조직하여 일대 민족독립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일본경찰의 사전검거로 실패하였다. 당시 공산주의계 인물로 일본경찰의 주목 대상이었다. 그 뒤, 특히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배후세력으로 신간회(新幹會)는 엄중한 경계 속에서 일대 시위운동과 대연설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먼저, 학생만세운동의 정체 폭로, 구금학생의 무조건 탈환, 경찰의 학원유린배격, 포악한 경찰정치 타도 등의 강연을 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연사로 권동진 이외에 허헌․홍명희․조병옥․이관용 등을 내정하였으나, 또다시 사전에 탄로되어 서울 종로경찰서에 검거, 징역 1년형을 언도 받았다. 광복 뒤에는 신한민족당 당수 ․민주의원 등을 역임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大統領章)이 추서되었다.
3. 권병덕(權秉悳, 1867~1944)
독립운동가로서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청암(淸庵)․정암(貞庵)․우운(又雲)이다. 충북 청원군 미원면 종암리에서 태어났다. 18세에 동학에 입교하여 고종 31년(1894) 동학봉기가 일어나자 보은 지역의 대표로 6만의 동학군을 이끌고 손병희와 함께 관군과 싸웠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각지를 배회하였다. 1908년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 재건운동에 참여 전제관장(典制觀長), 이문관장대리(理文觀長代理), 금융관장(金融觀長), 보문관장(普文觀長) 등을 역임하다가 1912년 천도교에서 분리된 시천교(侍天敎)의 종무장(宗務長)을 거쳐 종단학교인 중앙학교장(中央學校長)에 취임, 1918년 다시 천도교로 개종 도사(道師)가 되었다.
1919년 2월 25일경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하여 상경하여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을 만나, 3·1운동 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이달 27일에 최린․오세창․임예환․나인협․홍기조․김완규․나용환․홍병기․박준승․양한묵 등과 함께 김상규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을 열기하고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한 사람 중에서 29인이 모였는데, 이때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만세삼창을 외치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경무통감부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원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출감 뒤 천도교종리원(天道敎宗理院) 서무과 주임을 거쳐 중앙교회 심계원장(審計院長), 감사원장, 선도사(宣道師) 등으로 활약하다가 1944년 사망하였다. 묘소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있으며, 정부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고, 1980년에는 청주 3·1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문헌] 독립운동사, 미원면지, 청원군지, 청주시지, 충청북도인물지, 한국인물대사전.
4. 신석구(申錫九, 1875~1950)
독립운동가. 종교운동가. 본관은 평산이며 호는 은재(殷哉)이다. 충북 청원군 미원면 금관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재기(在器)이다. 어려서는 글방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33세 때 고향을 떠나 개성 남부감리교회(南部監理敎會)에서 미국인 선교사 왕영덕(王永德)의 세례로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자가 되었다. 뜻한 바 있어 기독교에 투신한 그는 서울 서대문 밖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에 입학하여 3년간 신학 공부를 마치고, 졸업한 후 감리교 목사가 되어 서울․개성․춘천․원산․남포 등 각지를 순례하면서 복음 전파와 신앙 부흥에 노력하는 한편, 민족사상과 독립정신 고취에도 진력하였다.
1919년에 들어서면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론(民族自決論)이 국내에 널리 퍼지자, 독립운동 기운이 태동하게 되었는데, 그 중심이 된 것은 천도교․ 기독교․불교계와 학생층으로 모두 조직을 가지고 있는 단체였다.
기독교측의 독립운동 계획은 두 곳에서 발기되었는데, 하나는 이승훈(李昇薰)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 지방의 장로교(長老敎) 계통의 움직임이었고, 하나는 서울의 감리교(監理敎) 계통을 중심으로 한 움직임이었다. 서울의 감리교 계통은 2월 20일 경부터 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인 박희도(朴熙道)를 중심으로 신석구․이필주(李弼株)․ 오화영(吳華英)․김창준(金昌俊) 등 감리교 목사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모의가 이루어 졌는데, 박희도는 기독교 중심의 청년학생단을 조직하여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일으키기로 협의 결정하였다. 그러나 독립만세 운동은 거족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천도교(天道敎)측과 연합해야 한다는 이승훈의 설득으로 감리교 계통에서도 이를 찬성하여 독립운동의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감리교 목사들과 모의를 거듭하였고, 2월 27일 정동교회 이필주의 집에서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하였으며, 28일 밤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민족대표 일동이 모여 최종적으로 독립운동 계획을 재확인하였다.
1919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과 태화관에서는 거의 같은 시각에 대한독립의 만세 소리가 노도(怒濤)와 같이 서울의 온 시내를 휩쓸었다. 그러나 공약삼장(公約三章)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질서는 유지되어, 이 날 서울 거리에는 적어도 50만의 군중이 들끓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적과 같이 한 곳에서도 폭력행위는 발생치 않았다. 가장 평화적이고 또한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표명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민족대표들의 독립운동 계획이 그만큼 치밀하였고 그 지도가 조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그는 체포되어 경무총감부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 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공판과정에서 “조선은 결코 일본을 위하여 이권을 제공하는 나라가 될 수 없으므로 독립하려고 한다. 이 일은 단지 조선을 위해서만이 아니고 한편 일본도 이익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하였다. 또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하겠는가?” 하고 물으니 “그렇다. 나는 한일병합에도 반대하였으니 독립이 될 때까지 할 생각이다.” 라고 하여, 그의 굳은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천안에서 목사로 있으면서 신교도들과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검거되었다가 석방된 뒤에는, 신사(神社)가 없는 평안도 용강군의 신유리교회(新柳里敎會)에서 시무하던 중 1945년 일제가 강요한 소위 ‘전승기원예배’를 거부하여 용강서에 3개월간 구금되었다.
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반공운동을 전개하였는데, 3․1절 기념 방송사건과 기독교 민주당 비밀결사 사건으로 투옥되었고, 1949년 4월 진남포에서 반동비밀 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6․25사변 때인 1950년 북한군에 의해 76세에 별세했다.
정부는 1963년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으며 청주시에서는 1980년 청주시 수동 우암산 기슭의 삼일공원에 그의 동상을 건립했다.
[문헌] 3․1운동비사, 독립운동사, 미원면지, 청원군지, 한국독립운동사, 한국인물대사전.
5. 신홍식(申洪植, 1892~1937)
독립운동가. 본관은 고령이며 호는 동오(東吾)이다. 충북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기우(驥雨)이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때에는 평양 남산현교회(南山峴敎會) 목사로서 3․1운동 기독교측 책임을 분담하여 활동하였다. 독립운동의 거사 계획을 모의하기 위하여 이해 2월 19일 상경하여 20일 밤에 수창동 박희도의 집에서 이승훈과 감리교 목사 정춘수․오화영․오기선 등과 회합하여 독립운동의 전개방법을 협의하였다.
한편 2월 26일 정오경, 기독교측에서는 한강 인도교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측 대표로서 16명을 서명할 사람으로 결정하였는데, 신홍식은 그 중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은 2월 28일 밤에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최종 회합을 갖고 거사에 대한 검토를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을 선언하기로 한 예정을 변경하여 같은 시각 태화관에서 하기로 결정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던 바로 이 시각에, 그가 재직하고 있던 평양 남산현교회에서는 가장 조직적이고 광대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평양의 시위는 3월 5일까지 연일 계속되었는데, 이것은 신홍식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들의 사전계획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1920년 경성 복심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 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 때 일본인 검사가 “피고는 조선독립이 될 줄로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에 “될 줄로 안다. 그 이유는 하늘은 조선을 독립시켜 줄 것이며, 또한 우리는 정의를 주장하고 있으므로 일본은 당연히 조선을 독립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일본은 동양의 평화를 역설하고 있으나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려면 조선의 독립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이번 일을 하는 것은 일본을 배척하자는 것이 아니고, 온화한 수단으로 독립을 청원함으로써 일본은 이것을 양해하고 허락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라고 하였으니, 그의 종교인다운 태도와 독립정신을 이 말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다.
그는 출옥 후 인천․원주 등지에서 계속해서 목사로 교회일을 시무하는 한편, 민족정신 고취에 힘쓰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수차 구금된 바 있으나, 끝내 굽히지 않고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7년 1월 27일 65세로 서거하여 고향 땅에 묻히었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1980년에는 청주시 우암산 삼일공원을 만들고 그의 동상을 건립하였다.
[문헌] 독립운동사, 청원군지, 청주시지, 충청북도인물지, 한국독립운동사, 한국인물대사전.
6. 정춘수(鄭春洙, 1875~1951)
독립운동가로 3·1운동 민족대표이다. 본관은 광주이며 자는 명옥(明玉), 호는 청오(靑吾)이다. 충북 청원군 가덕면 두산리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석준(錫駿)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나고 풍채가 준수하였으며 13세부터 20세 까지는 사숙(私塾)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여 경사(經史)에 박통하였다.
그는 국운이 쇠퇴하여 일제 침략의 마수가 미쳐오니 구국의 뜻을 품고 해외망명 길에 오르던 중, 원산(元山)에서 미국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그 후 경성신학교와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청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함으로써 독립운동과 종교운동에 이바지하였다.
그 후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하에 신음하고 있을 때,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로 독립운동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일부 애국지사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의 기운이 서서히 움트기 시작하였다. 이 때 그는 원산 남촌동교회 목사 신석구 등과 만나 독립운동 전개에 관한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2월 20일경 서울 서대문에 있는 영신학교(永信學校) 사무실에서 이승훈․박희도․오화영 등과 다시 만나 그 계획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 의견을 나누었다. 결국 거사 일정은 다른 동지들과 의논하여 확정되는 대로 오화영이 통치해 주기로 하고 그는 일단 원산으로 돌아갔다. 원산에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은 2월 23일, 서울의 오화영․박희도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거사 일자는 3월 1일로 하기로 정하였으며, 거사의 주동은 기독교․천도교․불교 등 각 종교단체가 함께 맡기로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받아 본 그는 여러모로 생각해 보았으나 서울의 결정대로 쫓아가자니 날짜가 너무 촉박하였으며 또 다른 종교단체와 손을 잡는다는 것이 좀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같은 교회의 일을 보고 있는 전도사 곽명리(郭明理)를 서울로 보내어 좀 더 자세한 사실을 알아 오도록 했다.
2월 27일 곽명리가 서울로 떠난 뒤 원산교회 동지들은 초조하게 서울 소식을 기다렸으나, 아무 소식이 없자 차준승(車準繩)을 다시 서울로 보내어 그곳의 동향을 즉시 알리도록 했다. 알리는 방법은 3월 1일의 거사가 확실하면 ‘청어 상(청어 값이 올랐다)’의 전보를 치고, 예정대로 되지 않을 때는 ‘청어 하’의 전보를 치기로 하였다. 한편 2월 27일에 상경했던 곽명리는 오화영으로부터 독립선언서 300여 장을 받아가지고 28일 원산으로 돌아왔는데, 그날 밤 차진승으로부터 ‘청어 상’의 전보가 날아들었다. 그리하여 그날 밤 정춘수는 이가순(李可順)․이진구(李鎭九)․이순영(李順榮)․차광은(車光恩) 등 14명을 진성여학교(眞聖女學校)에 모아 놓고 의논한 끝에, 다음날 1일에 서울에 호응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결행하기로 하고, 밤을 새워가며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는 3월 1일 아침, 원산에서의 의거를 곽명리 이하 여러 동지들에게 부탁하고, 자신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중앙의 정세를 살피고 선후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서울로 떠났다. 그는 서울에 도착하여 오화영의 집에 들렀으나 그는 이미 일본 경찰에 잡혀가고 없었다. 그는 몸이 불편하여 그곳에서 6일간 쉬었다가 몸이 회복되자 7일 아침 경무총감부에 나아가 자신이 정춘수임을 밝히고 그 자리에서 수감되어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가 계획하고 주도한 원산 독립만세 시위운동은 그가 계획한 대로 동지들에 의해 서울과 같은 시간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며 800여 명의 군중이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그는 출옥 후 계속하여 설교와 강연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는데 진력하다가, 1927년 2월 15일에 중앙기독교 청년회를 중심으로 오화영 등과 조직한 신간회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다가 1934년 흥업구락부사건(興業俱樂部事件)으로 체포되어 오랫동안 혹독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그 후 1950년 6·25 전쟁 때에는 고향으로 내려와 피신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악형으로 인한 병이 회복되지 못하여 1951년 10월 27일 향년 77세로 서거하였다.
고장 유지들은 그를 사회장으로 강내면 궁현리에 장례를 치르고, 1969년 8월 15일 민주공화당 지부에 의하여 묘비가 세워졌다.
한편 1938년 무렵부터 그가 시대의 압력에 굴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 자세히 밝혀지게 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흥업구락부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라는 이유로 일본경찰에 검거되었을 때,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국방헌금을 헌납하여 풀려났으며, 이때부터 변절의 길로 들어서 감리교의 친일화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이러한 친일인사로 훼절 규명은 1996년 2월 급기야는 연대회의와 시민들에 의해 3·1공원의 동상철거로 이어지는 수난을 겪게 했다.
[문헌] 독립운동사, 청원군지, 청주시지, 충청북도인물지, 한국인물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