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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리함 속에서 발견된 금바늘과 은바늘
분황사 석탑은 안산암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특이한 석탑이다.
마주보고 서있던 82m 높이의 황룡사 9층 목탑처럼, 분황사 모전석탑도 9층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석탑의 한쪽면만 7m에 이를 정도로 큰 규모를 지녔다. 1층 탑신의 사방 중심에는 감실을 만들었다. 감실 양옆에는 장방형의 돌을 세워 붙이고, 반나체의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다. 원래 동서남북 4면 감실 입구에 선 8체의 금강역사는 옷의 무늬가 다 다르고, 얼굴은 분노상이며, 머리에는 음각의 광배가 있으나 세월에 닳고 달아서 금강역사가 입을 벌렸는지, 다물었는지 얼핏 봐서는 알아보기 어렵다.
탑 기단 네모서리에는 돌사자가 조각되어 있다. 탑층은 상부로 올라갈수록 알맞게 작아져서 거대하지만 균형감을 지니고 있다. 지성적인 느낌을 주는 잿빛 어두운 안삼암 돌벽돌과 대비되도록 감실 부분은 밝은 화강암으로 짜서 분노하는 모습의 힘찬 금강역사상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1915년 분황사 탑을 수리하자 2층과 3층 사이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사리함 속에는 옥류, 가위, 금바늘, 은바늘과 함께 숭녕통보와 상평오주(고려 숙종 예종 연간의 화폐)가 들어있었다.
이를 보면, 고려시대에 분황사 탑을 해체 수리하면서 창건 당시의 사리함 속에 고려의 동전을 추가하여 넣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위 금바늘 은바늘은 여인의 물건인데, 사리함 속에 들어있는 것으로보아 아마도 선덕여왕이 넣은 것이 아닐까 싶다.
◈ 호국룡이 살고 있는 팔각정 우물
1991년 분황사터를 발굴한 결과, 고구려 사찰과 같이 품자형 금당배치를 하고 있었다. 이 절터에서는 고구려의 연꽃무늬 막새가 출토되었으며, 탑의 건축에 사용한 자도 고구려시대의 것이었다.
분황사에는 3층 모전석탑을 지나면 보광전 가기 전에 팔각정 우물이 있다.
샘에는 호국룡이 살고 있다는 설화가 있어 호국정이라고도 한다. 이 샘의 물은 아직도 정갈하다고 하나, 마시지는 않는다.
1914년 분황사 뒤뜰의 우물 속에서 8세기에서 9세기에 이르는 석불 14체가 발견되어 지금 경주박물관 뜰에 진열되어 있다. 모두 목이 부러진 불상이다.
서쪽을 보고 있는 약사전(보광전)은 조선시대 불전이다. 안에는 원효대사 초상도 있다. 이 불전 뒤 밭 속에는 통일신라시대 석불 1구가 놓여있다. 지금 승방으로 지어놓은 동편 건물 앞에는 통일신라시대 초석들이 묻혀있는 건물터이며, 절 사역이 엄청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승려들이 탑돌이를 하면서 새 짚신을 신고 도량을 돌고나면 너덜너덜해졌을 정도라는 분황사의 사역이 제대로 발굴되고, 재조명되어서 현대인들에게 희망을 줄 그날이 기다려진다.
*************** <매일신문/글·최미화기자 , 사진·정우용기자 200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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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에 얽힌 이야기 한토막>
광덕과 엄장 스님
이야기쟁이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 권 5에 등장하는 얘기 한토막.
문무왕 대에 광덕과 엄장이라는 두 승려가 절친하게 지냈다. 둘은 먼저 극락으로 들어가면 반드시 서로에게 알리자고 약속하였다.
광덕은 분황사 언저리에 숨어 미투리를 삼으며 처를 데리고 살았다.
엄장은 분황사 남악에 암자를 짓고 숲의 나무를 베고, 밭갈기에 힘썼다.
석양이 마음을 선하게 물들이던 어느날, 소나무가 서 있는 창 밖에서 “나는 먼저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따라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엄장이 밖으로 뛰어나가니, 구름 밖에서 음악소리가 들리고 광명이 땅을 비추고 있었다.
이튿날, 광덕이 살던 곳으로 가서 그 처와 함께 유해를 거두어 장사를 지내고 엄장은 광덕의 아내에게 말하였다.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살면 어떠하오?” 광덕의 아내가 그러자고 하였으므로 엄장은 그 집에 머물렀다. 밤에 엄장이 광덕의 처와 관계를 하려 하니, 그 아내는 광덕을 보고 “스님이 서방극락을 구함은 연목구어”라고 쏘아붙였다.
엄장이 “광덕도 이미 그러했는데, 나는 왜 안되오?”라고 하자 광덕의 처는 말했다. “남편은 저와 10년 이상 살았지만, 단 한 번도 잠자리를 같이한 적이 없습니다. 밤마다 단정히 앉아 달빛 아래 가부좌를 틀며 아미타불을 외웠습니다. 정성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서방 극락정토에 이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대개 천 리를 가는 사람은 그 첫걸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인데, 지금 스님의 생각은 동쪽에 있으니 서방정토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낯부끄러워진 엄장은 그길로 분황사 원효대사를 찾아 간곡히 법을 구하고 오로지 한마음으로 관(觀)을 닦아 극락으로 갔다.
광덕의 처는 분황사의 여자종이었지만, 사실은 관음의 19응신 중 하나였다고 전해진다. 향가의 원왕생가는 광덕의 노래라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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