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홍길동전이라고 하는 소설이 있다. 명문가에서 서자로 태어난 홍길동이 신분의 벽 때문에 출세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집을 나가 활빈당을 조직하여 기괴막측한 병법과 신비한 도술로 민중을 괴롭히는 악덕관리들과 싸운다. 그러나 길동의 재주를 영특히 여긴 왕이 길동에게 형조판서의 벼슬을 내리나 길동은 고국을 하직하고 활빈당도들과 함께 배를 타고 율도국이란 곳에 도착하여 그 곳의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다. 여기까지가 소설 홍길동전의 내용이며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전부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홍길동을 소설속의 인물로, 율도국도 소설속의 나라로 생각한다. 그런데, 전라나도 장성군에서는 홍길동을 실제의 인물로, 그가 태어난 곳을 장성이라고 하여 장성의 대표적인 마스코트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홍길동은 정말로 존재한 것일까? 역사적 인물 홍길동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1리 아치실에서 태어났다. 길동은 어릴때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였으나 서자의 관리등용을 금지하는 경국대전의 반포로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집을 떠난다. 그 후 경상도 김천 황악산에 들어가 학조대사에게 병법과 무술을 배운 후 뜻이 맞는 자들을 규합하여 활빈당을 조직하고 전라남도 등지에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양반가에 침입하여 재물을 빼앗아 불쌍한 양민들에게 나눠주는 의적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활빈당은 관군에게 쫓겨 현재의 법성포 근처에서 배를 타고 나주 압해도로 근거지를 옮긴다. 그리고 집요한 관군의 토벌작전을 피하기 위해 가짜 홍길동을 내세워 체포당하게 한 후 생업에 종사하며 평화스럽게 살아가나 전라도 도사 한건이 홍길동 집단을 괴롭히자 불과 15년 만에 생업을 뒤로 한 채 다시 투쟁에 들어간다. 5년 후, 조정은 홍길동을 추포하기 위해 해상 봉쇄작전을 펼쳤으나 홍길동은 상륙작전을 단행하여 빠져나온 후 충청도로 세력을 넓힌다. 길동은 심지어는 공주 무성산에 요새를 쌓아 관군에 대항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결국 홍길동 일당은 체포되는 형식으로 자수하고 충청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갇힌 후, 남해 삼천리로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홍길동이 율도국으로 간 것으로 되어있다.
오키나와 파조간도의 오야케아카하치(赤蜂) 오야케아카하치와 그 일당은 후루수토지역의 집단거주지를 조성하고 인근의 지배권을 장악하여 미야코지마(궁고도)의 민중들을 규합하여 추장인 나카소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 후, 구메지마(久米島)에 상륙하여 추장을 몰아내고 일본, 유구국, 중국을 상대로 중계무역을 하면서 동중국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섬의 요처에 성(城)을 구축한다.
오야케아카하치 추모비
번역
「오야케아카하치(赤蜂)는 별명을 홍가와라(洪家王) 아카하치라고도 칭하였다. 그는 군웅할거 시대에 두각을 나타내어 당시 오호하마촌(大兵村)을 근거지로 집단 생활을 하였으며 민중의 제왕으로 추앙받았다.
문명(文明) 18년(서기 1486년) 오키나와 본도 중산왕조의 상진왕은 사신을 야에야마 지역으로 파견하여 이리키야아마리 축제를 음사사교(陰邪邪敎)로 규정하여 금지하였는데 이 신앙탄압에 대하여 섬주민들은 격분하였다. 그리하여 오야케아카하치는 선두에 서서 중산정부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
그는 중산에 대한 조공을 3년에 걸쳐 중단하여 중산정부의 반응을 기다렸으나, 상진왕은 대리왕자를 대장으로 삼아 구미도의 신녀인 군남풍과 함께 정예부대 3,000여명과 병선 46척을 보내 반란 진압에 나섰다. 아카하치는 방전분투 하였으나 역부족으로 패하고 저원(低原)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명응(明應) 9년(서기 1500년) 지금부터 454년 전의 일이다.
아카하치는 봉건제도에 대해 반항하여 자유민권을 주장하고 섬 주민들을 위해 용감히 싸운 것이다. 싸움에서는 지고 말았으나, 그의 정신과 행동은 길이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여기에 비석을 세움으로써 그의 위업을 기리는 바이다.」
이렇듯 오야케아카하치는 오키나와의 영웅이다.
최근 오키나와 구지천성 발굴 과정에서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그리고 조선의 돌(화강암)로 만든 선박용 닻이 발견되었으며, 세종 때에 주조한 상평통보와 함께 국적 미상의 용봉통보(龍鳳通寶)가 발견되었다. 또한 오키나와의 축제인 나하축제의 종목인 줄다리기가 한국의 줄다리기와 흡사하다는 점과 오야케아카하치가 섬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城)의 양식이 얇은 돌을 기왓장처럼 포개는 오키나와 방식과는 달리 공주시 무성산 정산에 있는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서 쌓은 홍길동 산성과 거의 흡사하다는 점과 오야케아카하치가 자신의 별명을 홍가왕(홍가와라 : 洪家王)으로 하고 있다는 점, 이 외에도 조선말인 소굴(sogool)을 수쿠(sooko)라고 부르는 점과 마실(masil)을 마시쓰(masiss)라고 부르는 점이 오야케 아카하치가 홍길동이 아니냐는 추측을 낳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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