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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끌어온 우리 민족이 낳은
최고유물의 한 부류는 도자기 입니다
상고사의 토기에서 고려가 낳은 청자 고려말기와
이조초기의 과도기에 출현한 분청사기 다음으로 백자
이조중엽 코발트(영구적으로 변색이 되지않는 청색유약)의
출현으로 화려한 청화백자 시대를 이어 태어난 우리 도자기의 명품 목단화 단지!!!
도공의 섬세한 손으로 빚은 백자에 화공의 심미적 혜안과
영혼이 깃든 붓놀림으로 단숨에 그침없이 휘둘려 그린
모란꽃(목단화) 단지가 우리 도자기의 결정판 입니다
이조중엽 코발트 한 돈이 금 한냥으로 거래되던 시절
사대부가의 부(富貴康寧)의 상징으로 소장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때 페러시아 에서 생산된 코발트가 중국의 중계무역으로
헐값에 대량 유입되면서 중산층들이 기호품으로 자리했고
6.25사변때 생산이 주춤하다 자유당말기 1959년까지 생산 되였으나
신상품에 밀려 이젠 자취를 감춘지가 60년이 넘었습니다
목단 단지는 이조중엽 부터 대량 만들기 시작하여
우리 안방의 도자기 사랑방의 꿀단지
부엌의 반찬단지 거실(사랑방)의 간이 화장실인
요강 단지에도 청화로 목단꽃을 피웠습니다
그 시절 청화목단 단지 용도는 다양했습니다
반추화의 개념으로 그렸지만 밤에는 코발트의 야광채가
귀신과 도깨비를 쫒아 잠자리를 편케 했으며
낮에는 부엌 아낙의 한많은 시집살이의 시름을 달랬고
우는 아이의 꿀단지로 사랑방에 찾아든
손님에게 다정감을 주고 정서적으로 불안한 사람에겐 안정감등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용도로 늘 우리곁을 지켜주던
도자기가 모란꽃이 그려진 단지 입니다
최상의 고령토에 장인의 빼어난 솜씨으로 정성껏 빚은
우리조상 단지를 미국과 일본은 수입해 가고 있습니다
외국의 일부병원 정신과 에서는 상담치료를 마친후 환자의 안정을위해
코발트로 그려진 모란꽃을 감상하길 권하기도 한답니다
나도 실험삼아 목단꽃 단지를 10분정도 꼴쳐 보았을 때
푸른 광체에 매료되면서 심신이 안정되고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오늘날 현대사회에 정서불안이나 우울증 공항장해를
겪고있는 사람에게는 더 없는 약이 될수도 있습니다
비싼 고려청자와 이조백자보다 훨 사용도가 높은단지
조상의 숨결을 간직한체 자기력을 뿜어주는 단지,,,
우리가 용이하게 사용해 왔어면서도 귀하게 여기지못한
청화목단 단지를 곁에두고 생활한다면 역사가 증명하듯
누구나 부귀강녕 하게될 것을 믿어마지 않는바 입니다,,,,
***목단화 (牧丹花) 일명 모란꽃으로 불리며
작약과의 낙엽 관목으로 5월에 여러겹의
꽃이 피는데 꽃빛은 품종에 다름.
중국의 원산으로 관상용으로 재배하며
뿌리와 껍질은 약용으로 씀. 또한 부귀화라고 부름.
***시조***
五月의 속삭임에 풍염한 자태로다
百花중 으뜸이니 기품을 지녔네라
온화한 사랑의꿈에 젖어보는 모란화
***모란이 피기까지는-영랑(永郞) 김윤식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1934-
***모란꽃 피는 오월이 오면-김용호詩-김진균曲♣
모란꽃 피는 오월이 오면
모란꽃 피는 오월이 오면
또 한송이의 나의 모란 꽃
추억은 아름다워 밉도록 아름다워
해마다 해마다 유뤌을 안고 피는 꽃
또 한송이의 또 한송이의 나의 모란
추억은 아름다워 밉도록 아름다워
추억은 아름다워 밉도록 아름다워
***작약이 여성스런 꽃이라면 모란은
남성적인 꽃으로 원래는 목단으로 불리다가 다시
모란, 모란화, 모란꽃 등올 부른다.
신라시대에 들어온 모란은 예로부터 이불이나
신부의 예복이나 병풍 등에 수놓아져 있는,
우리와는 친숙한 꽃이다.
모란은 한때 중국의 나라꽃이었으며
당나라 때는 모란에 관계되는 시나 그림이 많았으나
요즘은 매화꽃으로 나라꽃이 바뀌었다.
모란은 중국에서 무단, 무단화로 부르고 있다.
***오월의 여왕이라는 모란꽃이지요
신라시대 진평왕시대부터 설화도 갖고 있지만
향기가 없는 꽃이라고 전해 오기도 하지요^^*
그러나 사실은 향기가 있다고 합니다.
단지 한국에선 벌 나비가 날아드는 때가 아닌
오월에 피어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동의보감에 보면 모란뿌리는 여자의 월경이 없는 것과 피가 몰린 것,
요통을 낫게 하며 몸푼 뒤의 모든 혈병(血病), 기병(氣病), 옹창을 낫게 한다하여
여러 부인병에 쓰였다
모란도(牧丹圖)
모란도는 모란꽃을 그린 그림이다.
모란꽃이 부귀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옛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병풍으로 만들어 혼례 때나 신방을 꾸밀 때 사용하였다.
그런 상징적 의미가 형성된 내력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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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의 이모저모 ∥ 부귀상징으로서의 모란 ∥ 모란도 병풍
모란도의 표현 특징 ∥ 모란도의 미학
모란의 이모저모
모란이라는 이름은 꽃색이 붉기 때문에 단(丹)이라 하였고, 종자를 생산하지만 굵은 뿌리 위에서 새싹이 돋아나므로 수컷의 형상이라고 목(牡)자를 붙였다. 모란은 당나라 때는 낙양에
번성하였다 하여 일명 낙양화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특히 낙양의 위씨(魏氏) 집의 자모란(紫牡丹)과 요씨(姚氏) 집의 황모란(黃牡丹)이 유명하여 위자요황(魏紫姚黃)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모란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난 것은 신라 선덕여왕 때이다. 《삼국유사》의 선덕여왕 조에 당시 당나라 태종이 홍색, 자색, 백색의 모란 그림과 씨앗을 서되 보내 왔
다는 기사가 있다. 왕은 모란 그림을 보고 “이 꽃은 필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이내 씨를 땅에 심으라고 명하였다. 씨가 자라 꽃이 피고 보니 과연 향기가 없었다. 사람
들이 그림만 보고 모란이 향기가 없다는 것을 어찌 알수 있었는가 물으니,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 답하였다.
설총의 〈화왕계 花王戒〉에서는 모란이 ‘꽃들의 왕’으로 등장하고 있다. 강희안은 그의 저서 《양화소록 養花小錄》에서 화목 구등품론(九等品論)이라 하여 꽃을 구품으로 나누고 그 품성을 논할 때 모란은 부귀를 취하여 2품에 두었다.
중국의 경우를 보면, 송나라 주돈이가 애련설(愛蓮說)에서, “당나라 이래 세상 사람들이 모란을 매우 사랑하였다… 모란은 꽃 중에서 부귀한 것이다(自唐以來 世人甚愛牡丹… 牡丹花之
富貴者也)”라고 하였고, 《하황사기 下黃私記》나 《북산집 北山集》에서는 모란을 ‘모든 꽃의 왕(百花王)’이라 하였다.
부귀상징으로서의 모란
이처럼 옛 사람들은 모란을 부귀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의 화가 남계우가 그린 〈화접도 花蝶圖〉의 화제에도, “밤이라 깊은 향기 옷에 물들고, 아침이
라 고운 얼굴 주기(酒氣) 올랐네.”라는 당나라 이정봉의 모란 시를 인용하면서, “저절로 부귀영화의 기상이 있어 당시의 제일이라 칭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상징성에 의하여 신부의 예복인 원삼이나 활옷에는 모란꽃이 수놓아졌고, 선비들의 소박한 소망을 담은 책거리 그림에도 부귀와 공명을 염원하는 모란꽃이 그려졌다. 왕비
나 공주와 같은 귀한 신분의 여인들의 옷에는 모란 무늬가 들어갔으며, 가정집의 수병풍에도 모란은 빠질 수 없었다. 또 미인을 평함에 있어서 활짝 핀 모란꽃과 같다고 평하였다.
옛사람들은 또한 모란꽃의 생장 상태를 보고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는데, 꽃과 잎이 풍성하게 피어나면 복된 미래가 다가오는 조짐으로 생각하였으며, 반면에 꽃이나 잎이 갑자기 시들
거나 좋지 않은 색깔로 변하면 가난이나 재앙이 닥쳐올 징조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민화 화가들은 모란꽃 그림을 그릴 때 될 수 있는 대로 꽃과 잎을 풍성하고 화려하게 그
리려고 애썼으며, 수요자 역시 모란꽃 그림을 구할 때 이점에 유의하여 그림을 골랐던 것이다.
모란도 병풍
조선말에 한양거사라는 사람이 지은 〈한양가〉에 보면, 광통교 아래 잡화전에 진열된 물건들이 낱낱이 소개되어 있는데, 거기에 모란도 병풍도 포함되어 있다. 이보다 오래된 기록인
조선 정조 때 유득공이 지은 《경도잡기 京都雜記》를 보면, 병풍 그림에는 백자도(百子圖),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요지연도(瑤池宴圖) 등과 모란도 병풍이 있는데, 모란도
병풍은 공적인 연회나 혼례식에 사용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부유한 가정에서는 모란도 병풍을 별도로 가지고 있었지만 가난한 서민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마을에 공동으로 병풍 한 점을 마련해 두고 혼례 때마다 빌려서 사용하곤 하였다. 그만큼 모란도 병풍은 혼례식장 치장용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전통 혼례를 치를 때 마당에 차일을 쳐 놓고 대례상(大禮床)을 가운데 둔 채 식을 거행하는 풍습이 남아 있다. 혼례식을 행할 때 신랑·신부의 배경에 둘러치는 것이 바로
이 모란도 병풍이다. 이 모란도 병풍에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신랑 각시의 장래가 모란꽃처럼 부귀롭고 풍족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모란도의 표현 특징
〈모란도〉는 원색의 붉은 색 꽃과 순도 높은 녹색의 잎이 서로 대비되어 매우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정통화가들이 그린 모란도가 수묵 위주로 채색을
극히 제한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른 점이다. 전통적으로 우리의 고급 문화가 감각적 욕구를 천한 것으로 여겨 그것을 억제하거나 초극하는 것을 바람직한 행위로 중시해 왔
는데 비해, 민화에서는 감각적 욕구를 부추기고 중요시한다. 그 이유는 서민들의 가식 없는 원시 심성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모란도〉의 채색은 화려하고 풍성하지만 벌·나비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선덕여왕의 고사에서 유래된 듯하지만, 그것은 모란도의 기본적인 의미에는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각 화폭은 이웃하는 화폭과 합동(合同)에 가까운 대칭을 이루고 있다. 모란과 괴석의 모양은 하나의 본을 사용하여 반복해서 베껴 그린 것처럼 완벽한 닮은꼴이다. 모란도 뿐만 아니
라 민화 중에서 많은 수효를 점유하고 있는 꽃그림 종류나 정물화 계통의 그림을 보면 이런 현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민화가 이처럼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균제형의 구도를 많
이 취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보다 용이하게, 누구나가 그릴 수 있는 가장 쉬운 대칭형이라는 데 있을 것이다.
〈모란도〉의 모란과 괴석은 입체감이나 상호간의 공간감이 무시된 채 평면화되어 그려져 있다. 이런 현상은 민화에서는 실재감 있게 그린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되지 않았을 뿐더러, 되풀이 그려지는 과정에서 평면적인 처리가 보다 묘사하기 쉬웠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모란도의 미학
그러나 생각해 보면 〈모란도〉를 놓고 이런 저런 표현 형식을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모란도〉에서 중요한 것은 회화적 표현 형식이 아니라, 모란
이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미와 이런 그림을 즐겨 애용하는 서민들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모란도〉는 정통 모란도에 비해 강한 느낌의 원색을 대담하게 사용하여 강하고 밝은 장식
적 효과를 보이고 있으나, 그러면서도 야하지 않아 한국인의 점잖은 품위는 별로 잃지 않고 있다. 일본 냄새가 짙게 풍기고 경박한 느낌을 자아내는 현재 우리 나라 한국화 분야의 채색화에 비하면 아주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선덕여왕과 모란꽃의 향기
[삼국유사]에 보면 '선덕여왕이 세 가지 일을 미리 알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서의 세 가지 일이란 모란꽃에 향기가 없다는 사실을 그림만 보고 미리 알았다는 것과 여근곡
(女根谷)에 적병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예언하면서 도리천(利天)에 장사 지내라고 했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에도 죽는 날을 예언 한 것을 빼고 두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중 여근곡에 적병이 숨어 있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는 내용은 당시 신라 사회의 자유로운 성풍습을 암시해 주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영묘사(靈廟寺)의 옥문(玉門)이란 못에서 한겨울
에 뭇 개구리가 모여 3-4일 동안 울었다는 기이한 사건에서 시작된다. 한겨울에 개구리가 모여 울자 나라 사람들이 선덕여왕에게 묻자 선덕여왕은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 등에게
정병 2,000명을 뽑아 교외의 여근이란 계곡을 찾아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그들을 습격하라고 명령했다. 알천 등이 병사를 이끌고 서쪽 교외에 가서 여근곡을 찾었더니 부산
(富山)밑에 과연 여근곡이란 곳이 있었는데 백제 군사 500명이 그곳에 숨어 있으므로 한꺼번에 잡아 죽였다는 내용이다.
신하들이 어떻게 여근곡에 백제 군사가 숨어 있는 것을 알았느냐고 묻자 선덕여왕은 이렇게 대답한다.
"개구리는 성난 꼴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군사의 모습이며, 옥문은 여자의 생식기다. 여자는 음이며 그 빛은 흰색인데 흰색은 곧 서쪽 방위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
다는 사실을 알았다. 남성의 생식기가 여성의 생식기에 들어가면 마침내 죽는 것이니 이렇기 때문에 적병을 쉽게 잡을 줄 안 것이다."
선덕여왕의 말처럼 옥문과 여근은 모두 여성의 음부를 상징하며 개구리는 백제 군사와 남성을 동시에 상징하는 말이다.남성의 생식기가 여성의 생식기에 들어가면 마침내 죽는다는 말
은 성난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성기에 들어가면 마침내 풀이 죽는 다는 음양의 이치를 설명한 것이다. 남녀 사이의 성교의 이치를 당시 백제와 대치하던 국제 상황에 대입해 풀어 낸
지혜는 놀랍다 할 것이다. 이는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근엄함을 제일로 치는 조선 사대부가 들었으면 음란하다 하여 삭제했을 것이 분명할 정도로 성에 대한 표현은 직설적이며
최근 음란하다 하여 일각에서 위서로 주장하는 [화랑세기] 필사본의 진위여부에도 한 시사를 준다 할 것이다.
[화랑세기]의 진위에 대해서는 나중에 보죠.
건강하던 선덕여왕이 어느날,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예언하며 도리천에 장사 지내라고 말
하자 도리천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던 신하들은 도리천이 어디인지를 물었다. 이에 선덕여왕은 "낭산(狼山) 남쪽"이라고 대답했는데, 과연 예언한 그날 선덕여왕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신하들은 낭산 남쪽에 장사 지냈다. 그후 10여년후에 문무왕이 선덕여왕의 무덤 밑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했는데, 바로 이 사실이 선덕여왕의 예지를 잘 말해 주는 것이다. 불경
에 "도리천은 사천왕 하늘 위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선덕여왕은 자신의 사후에 사천왕사라는 절이 생길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모란꽃 그림은 짝 없는 선덕여왕을 조롱한 것일까?
모란꽃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당나라 당태종이 선덕여왕에게 붉은색, 보
라색, 흰색의 모란꽃 그림과 꽃씨 세되를 보냈다. 그리고 선덕여왕은 그 그림을 보고 '이 꽃은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후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다
는 것을 안 것이다. 이것은 바로 당나라 황제가 과인이 짝이 없는 것을 조롱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연은 이를 '세가지의 색의 꽃을 보낸 것은 신라에 여왕 세사람이 날 것을 미리 알아서 그런 것인가?'라면서 당나라 황제가 혜안을 가지고 있다고 칭송하는 재료로 사용한다.
그러나 이는 둘다 잘못된 생각인 것이다. 이는 선덕여왕이나 일연이 '동양화 읽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일어난 에피소드일 뿐이다. 동양화는 단순히 어떤 대상의 아름다움만을 나타내
기 위해 그리는 그림이 아니다. 그 대상물에 대상물나름의 뜻을 담고 있는 그림이다. 동양화에 그려진 대상물에는 대부분 의도적인 뜻이 있으므로 독도법이 중요한 분야이다.
모란에 나비가 없는 이유
모란은 꽃중의 왕으로 일컫을 정도로 존중받는 꽃으로서 부귀화라고도 일컫는다. 주무숙이란 인물이 <애련설>에서 "모란꽃은 부귀다"라고 말했듯이 동양화에 모란꽃이 있으면 일
단 '부귀'를 뜻하는 것으로 읽으면 된다. 모란꽃이 해당화, 목련과 함께 있으면 모란꽃의 부귀, 목련의 옥, 해당화의 당이 함께 읽혀져 '귀댁에 부귀가 깃들이기를 바란다'는 뜻의 부귀옥당(富貴玉堂)의 그림이 된다.
그럼 부귀를 뜻하는 모란꽃과 나비는 왜 함께 그리지 않을까?
나비를 뜻하는 '접(蝶)' 자와 노인을 뜻하는 '질( )'자는 우리말로는 발음 자체가 확연히
다르지만 중국어로는 모두 '디에(die)'로서 같은 발음이다. 동양화에서 나비가 흔히 노인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질은 그중에서도 60세부터 많아야 80세의 노인
을 가리키는 한정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모란과 나비를 함께 그리면 60-80세가지 부귀를 누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부귀를 뜻하는 모란에 60-80세까지의 노년을 가리키는 나비를 함께 그리지 않는 것일까?
이는 60-80세 이상의 더 오랜 인생을 부귀와 장수를 누리려고 하는 옛 중국인들의 과장된 욕심이 담긴 것이다.
모란과 나비는 함께 그리지 않는 반면 고양이가 등장할 경우 모란, 나비가 함께 그려지는 경우가 흔하다. 여기에는 표의문자인 한자의 미묘함이 담겨 있는데 고양이 묘자와 노인 모자
는 중국어로는 모두 발음이 같은 '마오(mao)'이다. 따라서 고양이는 이 경우 묘자가 아니라 장수하는 노인을 뜻하는 모를 뜻하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럼 같은 노인이란 뜻인데 앞의 질, 즉 나비는 왜 기피의 대상이고 고양이는 그렇지 않을까?
여기에는 같은 노인이란 뜻이지만 그 한정적 의미는 각각 다른 데서 온 현상이다. 앞의 질은 60-80세의 노인을 뜻하는 반면 모는 노인 중에서도 80-90세의 고령의 노인을 가리키는 낱
말이다. 따라서 나비만 그리게 되면 이르게는 60세까지만 부귀 장수를 누리라는 뜻이 되므로 더 오래 살고 싶은 마음에 모란과 나비는 함께 그리지 않는 것이다. 반면 모란과 나비,
고양이를 함께 그리면 길게는 90세까지 부귀와 장수를 누리라는 뜻이 되므로 이 정도면 만족할 만한 인생이 된다고 믿는 것이다.
동양화에는 이외에도 음이 같은 것을 은유해 그림의 속뜻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양화에 담긴 이런 뜻을 몰랐기 때문에 선덕여왕은 모란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당태종이 혼자 몸인 자신을 조롱한 것으로 여겨 발끈한 것이다.
한때 서예를 배우겠다고 한 적이 있죠. 비록 배우지는 못했지만 말이지요.
그때 배웠다면 저도 한 그림 하면서 동양화나 그리고 있을 지도 모르는데.
동양화를 보되, 동양화(화투)는 보지 맙시다.
목단 牡丹
(Paeonia suffruticosa)
작약과(芍藥科 Paeoniaceae)에 속하는 낙엽관목.
키는 1~2m 정도 자라며 가지가 굵다. 잎은 잔잎 3장으로 이루어진 겹잎으로, 하나하나의 잔잎은 다시 3~5갈래로 갈라지며 잎 뒤는 흰색을 띠고 있다. 자색의 꽃이 5월에 가지 끝에 피
고 지름이 15~20㎝에 이른다. 꽃잎은 8장, 꽃받침잎은 5장이며 수술은 많고 암술은 2~6개이다. 구형(球形)의 열매는 가을에 익고 검은색 씨가 들어 있다. 뿌리껍질을 말린 목단피(牧丹
皮)는 한방에서 소염·진통·정혈·고혈압 등에 쓰고 있다. 중국이 원산지이며 한국에서는 꽃을 감상하거나 뿌리를 약으로 쓰기 위해 널리 심고 있다. 모란은 또한 목단이라고도 하고
많은 원예품종이 만들어졌다. 양지 바른 곳에서 잘 자라며, 번식은 작약 뿌리나 모란 줄기에 접붙여서 하고 뿌리가 깊지 않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모란을 꽃 중의 제일이라고 하여 꽃의 왕 또는 꽃의 신으로, 또 부귀를 뜻하는 식물로서 부귀화(富貴花)라고도 부른다. 모란꽃에서는 보기와는 달리 향기가 나
지 않는다. 〈삼국유사 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라의 선덕여왕이 공주였을 때 중국 당나라 왕이 모란 그림 1폭과 모란 씨 3되를 보내왔다. 그때 모든 사람들은 모란꽃에서 대단한 향기
가 날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선덕여왕만은 그림에 벌과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보고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모란 씨를 심어 꽃을 피워보니 향기가 나지 않아 모두
선덕여왕의 뛰어난 관찰력에 감탄했다고 한다. 작약과 비슷하나 작약은 목본식물이 아니라 초본식물이다.
(줄탁님의 글 옮겨옴)
첫댓글 에구~다읽는데 한참걸렸네여 힘들어라 좋은것 알았어요
♬죄송합니다,,,너무 길어서,,,
모란에 대한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