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연원부락에 보수원이 있었고 그곳에 큰 정자가 있었다고 하여 보정리라 칭하였다 - 독정 : 옛날에 마을 앞에따로 큰 정자가 있었다. 이씨 성을 갖은 선비가 과거 공부를 하기 위 하여 정자 밑에 움막을 짓고 공부를 하여 과거에 합격한 후 집으로 돌아가보니 노부모님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폐가가 되어 있어 오갈데없는 이씨선비는 과거공부 하던 곳으로 돌아와 거처를 정하고 정착하게 되어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마을 이름도 홀로 서있는 큰 정자(느티나무로 추정됨)나무와 인연이 되어 홀로 독(獨)자와 정자 정(亭)자를 사용하였으나, 일제치하에서 홀로 독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개명되어 행정명칭 으로 두터울 독(篤)자로 고쳐 쓰게 하였다. 또한 마을 상류에 조선시대에 독을 만들던 가마터가 있어 독쟁이라 고하는 설도 있다. - 새터말 : 원래 이곳에는 마을이 없었으나 새로 한집 두집 촌락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에서 새터말이라 불리웠으며 한자 표기로 신촌이 되었다. - 소실 : 부락 뒤편에 소봉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 산 밑에 마을이 있어 그 산 이름을 따서 소실이라하였다. - 연원 : 이 마을에 보수원이 있었고 마을 안에 큰 연꽃이 많아 연원이라고 불리워졌다고 하나 지금은 연못이 메워지고 작은 연못이 하나 있을 뿐이다. - 이현 : 이 마을에서 수지면으로 통하는 뒷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가 황토로 하여 질어서 진고개라 하였으며 이를 한자로 써서 이현리라고 하였다. ·고구려 구성 ( 駒城 ) 에서 유래된 용인시 최초의 행정지명 · 고려시대 동구 · 조선시대 태종 13 년 (1413) 에 처인현과 윤인현을 병합하여 용인현이라 하고 현의 처소를 이곳 (구성) 에 둠. 고종 32 년 (1895) 에 현의 처소였던 용인(구성)을 읍내면으로 명칭 변경 · 1914. 3. 1 읍내와 동변 , 서변 , 수진의 3 개변을 합하여 읍삼면이라 개칭 · 1931. 4. 1 읍삼면의 명칭은 고호 ( 古號 ) 인 구성면으로 명칭변경 · 1973. 7. 1 대통령령 제 6542 호에 의하여 죽전리를 수지읍 편입 · 2000. 9. 1 용인시조례 제 277 호에 의거 구성읍 승격 · 2005. 8. 30 행정자치부로부터 “보정동”을 비롯하여 3 개 일반구 , 11 개 행정동 신설 , 포곡읍 승격 승인 · 2005. 10. 31 용인시조례 제 648 호에 의거 기흥읍과 구성읍을 통합 기흥구청 개청 용인시조례 제 650 호에 의거 구성읍이 4 개동 ( 구성동 , 마북동 ,어정동 , 보정동 ) 으로 분동되어 기존 보정리 일원이 보정동으로 행정구역 변동
마북동 지명유래
옛날 상마곡 부락에 마운사(痲雲寺)라는 사찰이 있었고 이 절의 중이 마의를 입고 다녔으며 면소재지 북면에 위치한다 하여 마북리로 불리웠다 한다. · 고구려 장수왕 63년(475년) 구성현으로 명명 ·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년) 거서현으로 개칭 · 고려 태조 23년(940년) 용구현으로 개칭 현종 9년(1018년) 광주의 임내에 속하게 됨 · 조선 태종 13년(1413)용구와 처인을 합쳐 용인현이라 칭함. 고종 3년(1895)용인현을 용인군으로 개칭 · 1996. 3. 1 용인군이 용인시로 승격 (도농복합시의 형태) · 2000. 9. 1 구성면에서 구성읍으로 승격 · 2005. 10. 31 마북동으로 분동(구성읍이 4개동으로 분동)
구성동 지명유래
고구려가 자국에 편입한 백제영지를 구성으로 명명한 것은 우리말의 고어에 “크다”는 뜻의 “말아”(예:말매미, 말 잠자리)를 한자음 駒(구)로 표기한것으로 풀이된다. “마라” 또는 “말”은 마루의 동의어로서 크다(大) 높 다 (高,上, 예:산마루)의 의미를 포함한다고 할 때, 구성은 큰성(대성) 또는 마 라재(높은 곳)라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풀이되며 본래 고구려의 구성(駒 城)에서 유래된 용인시 최초의 행정지명이다. · 고구려 장수왕 63년(475년) 구성현으로 명명 ·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년) 거서현으로 개칭 · 고려 태조 23년(940년) 용구현으로 개칭 현종 9년(1018년) 광주의 임내에 속하게 됨 ·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용구와 처인을 합쳐 용인현이라 칭하 고 현의 치소(治所)를 구성에 둠 고종 32년(1895년) 용인현을 용인군으로 개칭하고 현의 치 소였던 용인(구성)을 읍내면(邑內面)이라 고치고 북동(北洞), 남동(南洞), 언동(彦洞), 마곡(麻谷) 4개동을 관할 · 1914. 4. 1 읍내면을 동변, 서변, 수진의 3개면을 합하여 읍삼면(邑三 面)이라 개칭하고 상하, 동백, 중리, 청덕,마북, 언남, 보정,죽전 등 8개리를 관할 · 1931. 4 .1 읍삼면의 명칭을 고호(古號)인 구성면(駒城面)으로 변경 · 1973. 7. 1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죽전리를 수지읍으로 이관하 여 7개리(법정)를 관할 · 1996. 3. 1 용인군이 용인시로 승격 (도농복합시의 형태) · 2005. 8. 30 행정자치부로부터 “본청 4국18과, 4직속기관, 6사업소, 3 구, 1읍, 6면, 22동”으로 승인받음 · 2005. 10. 31 용인시조례 제648호에 의거 구성읍과 기흥읍을 통합하여 기흥구로 명명 · 2005. 10. 31 인시조례 제650호에 의거 구성읍이 4개동(구성동, 마북 동, 어정동, 보정동)으로 분할되 어 종래 구성읍의 언남리 및 청덕리 일원이 구성동으로 분리
신갈동 지명유래
신갈동에 딸린 동 중의 하나(행정동명과 일치). 본래 용인현 구흥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할 때 역촌일부, 신촌, 미동, 갈천, 상촌, 상관곡리 등을 합치고 신촌과 갈천의 첫 자를 따서 신갈동이라 하였음. · 1413 태종 13년 용구(龍駒), 처인현(處仁縣)을 합쳐 용인현(龍仁縣)이라 함. · 1895. 5. 26 충주부 용인(龍仁)이 되었다가 경기도로 이속됨. · 1914. 4. 1 양지군(陽智郡)을 통합하고, 죽산군(竹山郡) 일부 편입. (12면으로 개편) · 1963 고삼면(古三面)이 안성군(安城郡)으로 편입되어 11면이 됨. · 1979. 5. 1 용인면(龍仁面)이 용인읍(龍仁邑)으로 승격(昇格)됨. · 1983. 2.15 수지면(水枝面)의 하리(下里)와 이의리(二儀里)가 수원시(水原市)로 편입되고, 남사면 진목리(南西面 眞木里)의 월경(越境) 마을이 평택시 (平澤市)로 편입(編入)되어 현재에 이른다. · 1985. 10. 1 기흥면(器興面)이 기흥읍(器興邑)으로 승격됨 · 1996. 3. 1 용인군(龍仁郡)이 도농복합형태의 시로 설치 용인읍(龍仁邑)을 중앙동(中央洞), 역삼동(驛三洞), 유림동(柳林洞), 동부동(東部洞)으로 분할 수지면(水枝面)이 수지읍(水枝邑)으로 승격, 내사면(內四面)이 양지면(陽枝面)으로, 외사면(外四面)이 백암면(白岩面)으로 개칭(改稱)됨. · 2001. 12. 24 수지읍이 수지출장소로 승격, 6개동사무소가 신설되어 1출장소, 2읍, 7면, 10개 동으로 행정체제 개편 · 2005. 10. 31 도농복합형태의 처인구, 기흥구, 수지구청 설치. 포곡면이 포곡읍으로 승격되고, 11개 동사무소가 새로 신설되어 3개구청, 1읍, 6면, 18개 동의 행정체제로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갈동 지명유래
신갈동에 딸린 동 중의 하나. 본래 용인현의 기곡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하갈천과 행의동, 한의동으로 표기 되기도 하였음. 갈천 아래에 있다하여 하갈동이라 하였다고 전함.
영덕동 지명유래
신갈동에 딸린 동 중의 하나. 본래 용인현의 지내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통리와 덕동 일부를 합치고 영통에서의 영 자와 덕동에서의 덕 자를 합쳐서 영덕동이라 하였음.
구갈동 지명유래
본래 용인현의 구흥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구흥면의 하관곡리와 내기, 갈곡을 합쳐 구갈리라함. - 갈곡 : 갈골, 구갈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 구갈지구 택 지개발단지로 편입 - 관곡 : 구갈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상관곡과 하관곡으로 나뉨 - 내기 : 안말, 안터. 구갈리에 딸린마을. 관골안쭉에 자리잡았으므로 내기라 함 - 아래-관골 : 관골 아래쪽에 있어서 붙혀진 지명 - 위관골(꼴) : 상관곡을 이 르는 말. 구갈리 상단에 있으므로 위관골이라 함
동백동 지명유래
본래 용인현 동변면(洞邊面)에 속했던 지역으로 동막(東幕)과 백현(栢峴)을 합치고 두마을 명칭의 두문자를 합쳐서 동백리라 하였으며2005. 10. 31일 구청개청에 따라 동백동으로 변동 · 고구려시대 구성(駒城)에서 유래된 용인시 최초의 행정지명 · 고려시대 용구 · 조선시대 태종13년(1413)에 처인현과 용인현을 병합하여 용인현이라 하 고 현의 처소를 이곳(구성)에 둠고종32년(1895) 현의 처소였던 용인(구성)을 읍내면 으로 명칭 변경 · 1914. 3. 1 읍내와 동변, 서변, 수진의 3개면을 합하여 읍삼면 이라 개칭 · 1931. 4. 1 읍삼면의 명칭을 고호(古號)인 구성면으로 명칭 변경 · 1973. 7. 1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죽전리를 수지읍 편입 · 2000. 9. 1 용인시조례 제277호에 의거 구성읍 승격 · 2005.10.31 3개구청 개청, 기흥구 어정동사무소 개소 · 2007.7.1 동백동 신설
중동 지명유래
본래 용인현 동변면(洞邊面)에 속했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될시 중동(中洞) 일원을 중리로 고쳤으며 2005. 10. 31일 구청개청에 따라 중동으로 변동
상하동 지명유래
본 래 용인현의 동변면(洞邊面)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될시 상지석(上支石), 하지석(下支石)과 수원동(壽院洞)을 병합하고 상·하지석의 이름을 따서 상하리라 하였으며, 2005. 10. 31일 구청개청에 따라 상하동으로 변동 · 고구려시대 구성(駒城)에서 유래된 용인시 최초의 행정지명 · 고려시대 용구 · 조선시대 태종13년(1413)에 처인현과 용인현을 병합하여 용인현이라 하 고 현의 처소를 이곳(구성)에 둠고종32년(1895) 현의 처소였던 용인(구성)을 읍내면 으로 명칭 변경 · 1914. 3. 1 읍내와 동변, 서변, 수진의 3개면을 합하여 읍삼면 이라 개칭 · 1931. 4. 1 읍삼면의 명칭을 고호(古號)인 구성면으로 명칭 변경 · 1973. 7. 1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죽전리를 수지읍 편입 · 2000. 9. 1 용인시조례 제277호에 의거 구성읍 승격 · 2005.10.31 3개구청 개청, 기흥구 어정동사무소 개소 · 2007.7.1 상하동 신설
상갈동 지명유래
본래 용인현의 기곡면 지역으로서 갈천 위쪽에 위치하므로 윗갈래, 또는 상갈천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을개편할 때 금화, 중갈천, 상갈천을 합쳐서 상갈리 하였음. - 금화: 쇠품리, 이마을에 금반형의 터가 있다고 하여 쇠품리라 칭하였는데 왜정 때 이를 고쳐서 금화라 개칭하였다고 함. - 상갈천: 마을 앞에 흐르는 내가 칡 넝쿨 같은 형상이라 이를 갈천이라하였고 갈천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상갈천이라 하였음. - 쇠품이: 상갈리에서 가장 큰 마을 - 용메(뫼): 산. 상갈리에 위치한 산이름. 용이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본 여인이 낙태하였다고하는 속설이 있음. - 윗갈래: 상갈천의 속지명 - 허장골: 상갈리에 있는 마을의 속지명 상갈동(上葛洞)은 조선시대의 용인현(龍仁縣)에 속해 있던 역참(驛站)지역의 하나로서 중요한 교통거점으로서의 역할이 주어졌던 고장으로 본래 이지역의 명칭은 용흥(龍興)이었으나 조선조에 들어와서 구흥(駒興)으로 고졌던 것으로 풀이된다 상갈동은 기곡면(器谷面)에 속해있었고 고종 32년 1895년 4월에 전국 아문(衙門)의 칭호를 부(府)로 고치는 지방관제(地方官制)의 개혁이 있었는데 이때 용인현을 용인군(龍仁郡)으로 고쳤으며 충주부에 속하게 하였다가 이듬해 충주부에서 경기도로 이속 되었고 이 당시 개편된 용인군의 행정구역은 16면(面), 136동(洞)이었다 이때 개정 되어 기곡면이 되었다. 그러다가 1914년 부(府),군(郡),면(面)의 개편당시 기곡면 일원, 구흥면(駒興面) 일원과 지내면(枝內面)의 덕동(德洞) 영통(靈通) 2개동을 합치고 내읍삼면(구성면) 일부를 합친후 기곡면의 기(器)자와 구흥면에서의 흥(興)자를 따서 기흥면이라 칭하였고 기흥면에는 11개리가 있었다 1985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 11772호에 의하여 기흥면이 기흥읍으로 승격 되었고 2005년 7월 18일 행정자치부로부터 3개구청 11개 행정동, 포곡읍이 승인되어 2005년 10월 31일 3개구청 개청(포곡읍 포함)과 더불어 상갈동도 상갈리,보라리 지곡리 3개리를 합치고 동명은 용인시 지명위원회에서 2005년 2월 23일 확정하여 동명칭을 상갈동이라 칭하였다.
보라동 지명유래
본래 용인현 기곡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보평 통산,라곡,방골을 합치고 보평과 라곡의 첫음을 따서 보라리라 하였음 그러나 마을에 구전되어 오는 속설을 보면 "마을 앞 고목에 보라매가 앉은 후부터 보라리“라 하였다고도 하는데 보라매란 난지 일년이 안되는 어린 새끼를 말하며 들여진 매를 수진이, 길이 않들여진매를 날진이라하는바 “보라리”란 지명은 보라매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라 앞서의 보라와 나곡에서 합성된 지명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 가는골: 세곡. 가는 굴. 등으로 호칭되는 속지명으로 작은 골짜기를 이르는 말 - 궁: 뜰 보라리에 있는 들 - 궁뜰고개: 궁뜰뒤에 있는 고개 - 나곡: 마을 이름. 통산 동쪽에 있음 - 능골:보라리에 있는 골짜기 불당이 있었음 - 방골 보라리에 있는 골짜기 블당이 있었음 - 음지 말 음지 마을의 준말. 음지촌 통뫼마을 동쪽에 있음 - 통메(뫼) 보라리에서 음뜸되는 마을. 마을 앞에 있는 산을 통산이라 한데서 생긴지명 - 차뫼골 보라리에 있는 골짜기
지곡동 지명유래
본래 용인현 기곡면인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때 다래울,기와집 말, 사기막을 합치고 지곡리라 하였음. 일설에는 예전에 지초가 많았으며 골이 깊다고 하여 지초에서의 지자와 골곡자를 합쳐서 지곡리라고 하였다고 함. - 기와집 말: 기와집이 있는 마을, 다래울, 서남쪽으로 자리잡은 마을 기묘사화 때 조광조 일당으로 연루된 음애이자 선생의 생가. 혹은 그의 부친 예견을 모시던 사당이 있었는데 인근 마을에서 유일하게 기와집말이라 하였다함. - 다래울: 중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 월애동이라고 함. - 뒷실: 후곡. 사기막에 있는 골짜기 - 사기막골: 상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 사기막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 백자를 생산를 하였음. - 사은정: 지곡동 하동에 있는 정자, 정암 조광조 음애 이자 회곡 조광보. 방은 조광좌 등 4인의 장수강학지소였다고 하여 4은정이라 하였음 - 상 동: 지곡리 뒷실 위쪽에 있는 마을 - 중 동 지곡리 마을 중 중간에 위치하는 마을이므로 중동이라 함. - 두암산 공세리 하동에 있는 동산
· 1914 행정구역 개편시 농사동과 내서천을 합쳐 농사동의 『農』자 와 내서천의 『書』자를 합쳐서 농서리라 칭함. · 2005. 10. 31 행정구역 변경시 농서동으로 변경함. · 1985. 10. 1 기흥면(器興面)에서 기흥읍(器興邑)으로 승격. · 2005. 10. 31 본래 용인현의 동변면(洞邊面)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될시 상지석(上支石), 하지석(下支石)과 수원동(壽院洞)을 병합하고 상·하지석의 이름을 따서 상하리가 하였으며, 2005. 10. 31일 구청개청에 따라 상하동으로 변동
서천동 지명유래
· 1914 행정구역 개편시 외서천과 내서천을 합쳐 서천리라 칭함. 속설에 의하면 선비들이 동리앞에 흐르는 냇가에 모여 글을 읽었으 므로 글서의『書』와 내천의『川』자를 합쳐서천리라 칭하였다고함. · 2005. 10. 31 행정구역 변경시 서천동으로 변경함.
기흥동 지명유래
· 고려시대 용구현과 조선시대 용인현에 속해있던 역참지역 · 1914. 4. 1 지내면의 영통리 지역과 기곡면의 일원을 합치고 구흥면과 내읍삼면 일부를 합친 지역으로 「기곡(器谷)」 에서의 첫글자와「구흥 (駒興)」에서의 첫글자를 합쳐서 기흥면으로 함 · 1985. 10. 1 기흥면(器興面)이 기흥읍(器興邑)으로 승격(昇格)됨 · 2005. 10. 31 기흥읍(器興邑)에서 기흥동으로 분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