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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원고지800매 논픽션 대상 어머니 그 580일의 기록! -요약 줄거리
2007년 9월 - 사랑과 추억이 남아있는 고향을 떠나 어머니께서 서울에 오시다. 시골에서 농사일만 하시던 어머님이 갑자기 거동을 못하시게 되어 서울 병원으로 오셨다. 저녁 일을 마치고 곧장 찾아 뵈었는데 수척하시고 초라한 모습이 이루 말할 수 없어 무관심으로 인한 죄책감으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형과 동생을 비롯한 가족들은 낮과 밤을 바꿔가며 어머님 곁을 지켰다. 통증도 그렇지만 일단 거동을 못하시니 앞으로 어떻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순리대로 처리해야 하고 어떤 경우라도 최선을 다하여 후회되지 않도록 모셔야 한다. 효는 모든 행실의 근본이 되는 것은 말할 나위없지만 어려움을 함께 극복해 가는 것이 진정한 가족의 의미인 것이다. 9월27일 송도병원 검진 결과 악성종양으로 직장암이라며 원자력병원 방사선 치료를 권장하는데 친절한 의사가 갑자기 야속하다. 평생 병원을 모르고 지내신 어머님께서 직장암이라니 믿기지가 않고 원자력병원에서 재검사를 해보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2007년 10월 - 당신이 가장 좋아하시는 한들거리는 코스모스가 피었습니다. 보름 정도 입원한 정형외과를 떠나 오늘 원자력병원에서 검진을 하고 간병인이 있는 상봉동 자연애요양원으로 가신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던가. 같은 병실에 있는 환자가 퇴원하는 어머니를 위해 간절하게 기도를 올린다. 오전에 미리 가본 요양원에는 중풍 치매 환자등 많은 노인 환자분들이 말없이 누워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데 생명의 삶의 무상함에 오히려 내가 숙연해진다. 곧바로 원자력병원 검진을 하고 10월 말일경 PET촬영을 하기로 했다. 오후에 자연애병원 203호에 들어와 X레이 촬영을 하고 몇일 후 결과를 설명하는 데 허리는 복귀 불가능하고 대소변 기능과 통증 완화 위주로 치료를 하겠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머니의 병명이 드러나니 계속 당황스러운데 옆에 있는 형은 인생 순리라며 애써 담담한 마음을 갖는다. 병원 건너편에는 어머니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코스모스가 피었다. 어린시절 이맘때쯤 막내아들인 나를 도시로 떠나 보내고 한들거리는 코스모스와 함께 슬픔을 억제할 수 없었다는 사연을 나를 볼 때마다 말씀하셨는데 지금 그 어머니와 나와 코스모스가 함께 어울려 있다.
2007년 11월 - 항암의 싸움으로 저승사자가 지키는 1차 사선을 넘었습니다. 원자력병원 검진 결과를 기다리는데 초조함이 극치다. 담당의사가 치료방법이나 예측되는 결과까지 환자 가족의 심정을 헤아려 주었다면 고마웠을텐데 직장암이니 방사선치료 하라며 아무일도 아닌 것처럼 지나가는 말투로 던진다. 방사선 치료는 주 5일 총 30회를 실시하는데 치료시간 몇분보다 매일 자연애병원 출발부터 방사선치료실까지 이동에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어머니의 고통을 함께 하고픈 마음으로 11월10일 중학교 아들과 한강 하프마라톤을 완주했다. 아들이 태어난 날 이른 새벽에 제일 먼저 기쁨의 소식을 어머니께 알렸는데 좋아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11월 하순 병원을 계속 다니며 등과 팔 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대화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어머니의 뒤틀린 허리뼈와 이미 죽어 성장을 멈춘 뭉툭한 발톱등 고생만 하신 지난날의 흔적이 역력하다. 방사선 치료 1주일이 지나면서 효과가 있는건지 어머니께서 통증 호소를 안하시고 지난달보다 기력도 좋아보이신다. 말일이 다 되어 가는데 첫 눈이 내린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그것은 마력의 솜사탕인지 병상의 어머님도 표정이 설레임으로 가득하다.
2007년 12월 - 아버지의 떠남으로 통곡하던 매서운 그 겨울이 가고 있습니다. 밖에는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은 날씨로 요즈음은 기분까지 우울하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려울 때가 있는데 그럴때일수록 긍정적인 마음으로 사건의 본질을 잘 파악해야 한다. 12월10일 병원에 갔는데 나를 보자마자 어머니께서 어린아이처럼 울먹거리신다. 객지에서 생활하다가 어쩌다 고향에라도 가면 말없이 바라만 보셨던 감정 표현이 없으신 어머님이셨다. 이제는 내가 갈 때마다 눈물을 보이는건 물론 덥썩 나를 안으시고 머리를 쓰다듬고 좋아하시니 어머님 자신의 기구함과 자식인 나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의 표현일 것이다. 어학 연수를 가는 딸을 공항에서 태연하게 이별하고 나서는데 딸이 탄 비행기가 머리 위로 날아오른다. 얼굴이라도 부비고 사랑한다고 말이라도 할 걸, 나 역시 무뚝뚝한 사람인가 보다. 12월 28일 아버지 기일이다. 33년의 세월이 흘럿는데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고 그 어린 시절이 어제만 같다. 병원에 갈때마다 간병인들의 사랑이 마음을 훈훈하게 하더니만, 연말에 북한산 정릉 매표소를 지날 무렵 여기서는 모락모락 김을 뿜는 어묵이 나를 따뜻하게 맞이한다.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는데 새해에는 용기를 가지고 열심히 어머님의 사랑으로 살아 가야겠다.
2008년 1월- 고통의 한 해가 저물고 희망찬 새해가 다시 밝았습니다. 체감 온도가 영하 15도가 넘는 이른 새벽에 안산 정상에는 해맞이 인파로 인산인해다. 어머니 병원에 고향 이웃집 할머니가 계시는데 골목길에서 마주친 어린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아무튼 안타까운 현실이다. 병원에 갈 때마다 어머님은 나의 차가운 손을 잡으며 좋아 하시고 나는 사업의 어려움으로 고민에 쌓여 패배한 장수의 심정으로 고개를 떨군 채 어머님을 뵌다. 병원에 다니다 보니 기구한 운명의 사연을 많이 접하게 되는데 아들의 간을 이식 받은 아주머니의 이야기는 가족의 사랑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1월 중순 찬 바람이 불고 부엉이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 올것 같은 긴 밤이 지나간다. 병원에 가서 하루종일 누워 계시는 환자들을 뵈니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병이 생긴 채로 누워서만 10년, 20년을 산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다음날 북한산 칼바위에 올라 따끈한 컵라면과 청하 한 잔을 마시니 어느새 내가 신선이 되어 있다. 1월 하순에 병원에 갔는데 어머니께서 나를 보자 또 눈물을 흘리신다.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말씀하시는데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참으로 위대하고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의 표상인가 보다.
2008년 2월-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는데 어머니 만수무강 하십시오. 새벽에 산에 올라 빌딩마다에서 내뿜는 연기를 보니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넉넉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배려하며 사는 것이 좋은데 우리는 사소한 진리를 망각하고 있다. 병원에 가서 어머니 얼굴을 부비며 사랑의 마음을 전하지만 표정이 없으시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어느덧 구정 명절이 내일로 다가와 미리 용미리에 다녀 왔다. 묘지는 적막하지만 납골함에 서면 아직도 형의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 온다. 명절 아침 어머니 모시고 형집으로 가서 가족 모두 세배를 올렸다. 환자 복을 입고 거동도 못하시면서도 예전처럼 간섭을 자주 하시는데 이제는 그것조차 감사하다. 문득 생각하니 17년전 이맘때 어머니 모시고 사이판에 가서 노래하고 즐거웠던 시간이 있었는데 흘러간 노래를 구성지게 부른 모습이 아련하다. 2월의 중순을 넘어서는데 영하 10도의 추위가 계속된다. 낮이나 밤이나 다니는데 추워서 죽을 맛이지만 병원에서는 모자지간인 어머니와 아들인 내가 휠체어를 밀고 애틋하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어느날 아들을 데리고 병원에 왔는데 손자를 깜짝 반기신다. 어린시절 유머스럽고 퉁실하다는 이유로 손자인 경목이를 어머니는 유독 예뻐하셨다. 그 손자가 지금은 할머니의 휠체어를 잡고 서 있는 인생 역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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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 당신의 한이 어린 눈물처럼 비가 많이 내립니다.
같은 모습으로 계시는 어머니 뵙고 대화하면서 즐거운 마음 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날씨가 변화무쌍하여 3월인데도 눈이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내린다. 개학을 한 아들이 학교에 가고 필린핀에서 어학연수 마친 딸이 훌쩍커서 공항으로 들어온다. 병원에 갈 때마다 어머니에게 봄이 왔음을 알리는데 창 밖의 나뭇가지는 아직도 앙상하기만 하다. 3월 중순경 북한산 문수봉에 올랐다가 딸과 함께 어머니를 뵈었는데 3개월만에 손녀딸을 보는 어머님은 반가움이 클 것이다. 화이트데이 날에 아들이 아내에게 막대사탕을 주는데 아내가 좋아라고 한다. 몇일 전만 해도 원수같더니 모자간의 관계는 사랑의 밧줄이라도 있나 보다. 3월 하순으로 접어 들면서 완연한 봄이 왔는지 가로수 나무들이 촉촉하게 물을 머금고 있다. 산에는 벌써 진달래꽃이 피어 나를 반기고 병원에서는 어머니와 공받기 놀이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데 훗날 나는 지금의 모습을 아름답게 기억할 것이다. 3월 말일에 무역사업으로 부산에 갔는데 자갈치시장의 밤풍경도 아름답거니와 아침을 맞는 감천항에는 활력이 넘친다.
2008년 4월- 외로움으로 5년을 홀로 지새는 큰형을 용미리에서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잔인한 4월이 왔다. 개인택시하는 형이 어려운 가운데도 어머니에 대한 정성이 지극하다. 병원에서 형과 함께 있는데 추억과 회한이 어린 표정으로 어머니께서 바라보신다. 4월 첫 주말에 원숙한 모습으로 매제가 병실에 왔다. 사랑 표현에 인색한 어머님이라 그 동안 아쉬움도 있을건데 그래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고마운 사람이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4월중순 병원에 계시는 어머님을 뵈는데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그득한 모습이시다. 경향신문 마라톤대회에 준비없이 출전하여 통증으로 어머니곁에 가서도 뒹굴며 지냈다. 어머니께서 오늘은 나의 보호자가 되어 하루를 보낸 날이다. 집 근처 안산에는 꽃이 만발하여 산속을 걷는 사람들은 모두가 신선이 되어 있다. 중순경 어머님께서 기면현상에 빠져 의식이 없으시다. 기이한 수면상태로 시간이 오래되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설명인데 가슴이 철렁한다. 다행스럽게도 다음날 깨어나셨고 고비를 넘긴 안도감으로 하루를 맞이했다. 4월 하순이 되니 세상을 떠난 큰형이 생각난다. 용미리에 가서 납골함에 손을 얹으니 형의 체온이 지금까지 따뜻하게 느껴진다.
2008년 5월- 아카시아 향기같은 당신의 존재는 초라한 제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노동절 마라톤을 잠실운동장에서 마치고 아카시아 향기를 몰고 어머니 병실에 들어섰다. 어버이날이 다가왔는데 형수와 여동생이 카네이션 꽃바구니를 가져왔다. 효는 모든 행실의 근본이기 때문에 오늘뿐아니라 부모님을 향한 자식의 봉양은 언제나 계속 되어야한다. 병원에서는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모든 입원 환자에게 영양제 한 병씩을 투여한다는데 그것도 의미있는 선물인것 같다. 부처님 오신날에 북한산 문수사에 올라 불타는 연등 아래 있으니 마음이 편하다. 다음날 병원에 어머니의 유일한 혈육인 외삼촌께서 다녀가셨다고 한다. 이승에서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을건데 외삼촌은 어떤 심정으로 병원을 나섰을까. 병원에 가서 어머님을 뵈었는데 외삼촌께서 젊어 보였다며 좋아하신다. 당신의 사랑하는 남동생을 보는 반가움으로 노안이 오히려 밝아지셨나 보다. 5월 하순 어머님은 거동만 못할뿐 식사는 정상이고 병원에서는 치매초기라고 하는데 나한테는 오히려 충고도 할 만큼 지극히 정상의 모습이시다. 친구 영식이가 병원에 또 왔는데 고마움을 간직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당당한 모습으로 인생의 길에 서 있어야겠다.
2008년 6월- 패배자 그리고 낙오자로 고통의 나락에 있는 저에게 용기를 주십시오.
어머니께서 어떤때는 엉뚱한 말씀을 하시니 내가 웃고 내 웃음이 어이가 없으신지 어머님도 웃으신다. 행복한 시간으로 어머니와 미련없이 보내리라 다시 다짐해 본다. 6월 고등학교 모의고사에 결빙의 아버지라는 시가 출제되었다. 가족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을 내용으로 하는데 문득 지난날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병원입원 9개월이 지나고 바람이 거세게 불어 창문이 춤을 추는 6월12일 어머니 생신에 가족 모두 모여 축하를 하는데 순간순간이 마지막이 되는 것 같아 안타까움이 많다. 어머니와 함께 보는 병원옆 농장에 호박 고추 상추등이 밭에 가득하다. 고향마당에도 어머니의 채취가 남아있는 온갖 채소가 그득할건데 지난 시간을 기억이나 하실까. 하순으로 접어들 무렵 엊그제까지 대화하고 식사도 함께했던 가까운 친구가 갑자기 죽었다. 인명이 재천인가 아니면 삶과 죽음은 하나인가 허망하고 슬픔 마음으로 북한산 문수사에 올라가 그의 명복을 빌었다. 처음에 어머니를 모시기로 하고 재산분배를 했는데 말일경 형은 이제부터 병원비를 분배하자고 제안한다. 울고 있는 형도 나름대로 괴롭겠지만 돌아선 나또한 마음의 고통이 말할 수가 없다.
2008년 7월- 병원앞 통나무 의자에서 국수를 먹는 우리는 가난하지만 행복한 모자입니다.
오늘부터 노인건강보험 제도가 생겨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월곡동 한솔병원으로 부득이 옮겨가게 된다. 이별하는 간병인의 눈이 충혈 되어 있고 나도 아쉬움이 많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중순 병원에 들어서는데 형수께서 힘없이 나오신다. 경제적 어려움도 있고 조카의 대학 문제까지 어려움이 많을텐데 먼 거리를 변함없이 다니는 모습에 코 끝이 찡해온다. 형 생일 무렵에 소공원 옆 칼국수 집에서 가족 식사를 하는데 의식도 없을 것같은 환자복 차림의 어머님께서 이것 저것 참견을 많이 하시니 주인 아저씨가 기력이 대단하시다며 웃는다. 병원에 갈 때마다 덥고 협소하다는 이유로 소공원에 자주 나오다 보니 어느새 주변 사람들과 친근해 졌고 나는 통나무 의자에서 내집처럼 깜박 잠이 들기도 한다. 배가 고플라치면 국수를 인근 분식점에서 배달시켜 먹는다. 집을 나온 가난한 모자의 모습이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다. 병원에 많은 환자분들이 24시간 누워 있는데 가족들의 따뜻한 관심이나 애정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왜냐하면 더 이상 현대판 고려장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2008년 8월-한 여름의 매미소리는 어린 시절 고향에서 듣던 그대로입니다.
휴가 못가는 아들 데리고 병원에 왔는데 지루한지 연신 하품만 하고 있다. 친구는 영덕 풍력발전소에서 바라보는 동해바다가 장관이라며 전화가 온다. 동해의 파도 소리가 귀에 들려 올 것만 같다. 오늘까지 어머님은 이 병원에 계시고 내일 위생병원 유자원으로 다시 이동하신다. 2층 4개 마을 중 어머님은 토방마루 마을에 계시게 되는데 약 15명의 환자가 3명씩 나뉘어 있는 곳이다. 조선후기 박인로선생의 시조 조홍시가에서 나온 유자원은 어머니와 자식의 효도와 관련된 귤과 비슷한 유자 열매에서 따온 명칭이다. 여름이 깊어 가는지 아파트 옆 안산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가 어린시절 고향에서 듣던 그대로다. 요즘 나는 누가 뭐래도 어머니와 함께하는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무 그늘 아래서 도란도란 시간을 보내다 보면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고 하얀 어머님의 머리카락이 날리는 모습은 영원히 기억 될 장면이다. 잠자리가 머리 위를 맴도는 유자원 마당에 어머니를 모시고 밖으로 나왔다. 유자원은 시내에 위치해 있지만 숲이 우거진 산속이라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다. 9월이 오는 내일도 나는 어머니곁을 서성일 것이다
2008년 9월- 어머니의 쾌유를 기원하며 마라톤 풀코스를 눈물로 완주하였습니다.
9월말경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해야 하기에 본격적인 훈련에 접어들었다. 한강을 달리고 유니폼을 마련하고 가슴에 부착할 삼족오 마크도 샀다. 비오는 어느날 친구에게 삶의 답답함을 이야기 하자 내가 지니고 다니는 죽은 큰형의 유품을 이제 치우라고 한다. 나는 유서부터 넥타이 콤비 심지어 구두와 벨트까지 형에 대한 그리움으로 착용했는데 이것이 삶의 걸림돌이란 말인가. 9월7일 도봉산 만장봉에서 5년넘게 지니고 다녔던 유서를 태우니 홀가분함과 아쉬움이 동시에 생긴다. 가족 모두가 병원을 매일 다니다 보니 유자원 간호사가 자제를 부탁한다. 위화감도 있지만 가족만 찿는 어머님때문에 간병인들이 더 힘들다고 한다. 이해는 가지만 쉽지 않을 것 같다. 9월 중순 추석명절에 어머니 모시고 형집으로 가서 차례를 지내는데 식혜와 깨죽을 맛있게 드신다. 다음날 용미리 큰형 납골함도 다녀오고 또 이틀지나 내 생일을 맞이했다. 밤에 잠을 자는데 꿈에 어머니와 금강산에 올랐다. 좋은일인가 싶어 병원에 가니 어머니 눈부위가 멍이들어 있고 피부에 반점이 생겼다. 3층 빈 공간에서 10여분을 깜박 잠들었다가 일어나니 어머님이 지그시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9월 27일 임진각 평화통일 마라톤풀코스를 어머니의 쾌유를 빌면서 완주했다. 그 날의 감동은 영원할 것이다.
2008년 10월-사랑과 추억이 담겨있는 고향집 감나무 아래로 꼭 돌아가셔야 합니다.
소변에서 혈액이 묻어나와 진단을 했는데 약간의 박테리아뿐이라며 3일분의 약을 조제해준다. 직장암으로 생명의 한계가 분명한데 별일 아니라니 답답한 마음이다. 시골집에 13개월만에 갔는데 어머니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있어 눈물부터 흐른다. 감나무는 그대로 주인을 기다리는데 한 번 떠난 어머님은 언제 다시 당신의 터전 이곳에 돌아 올 수 있을까. 10월 중순 어머님을 뵙고 나가는 형한테 장난섞인 손짓을 하고 내일 또 오라며 큰소리 전라도 사투리로 말씀하시는데 형이 껄껄웃는다. 병원 일광욕실에서 어머니 손,발톱을 정리하여 드리는데 고생을 워낙 많이 하셔서 나무토막 같다. 보름 전보다 하혈이 심하여 위생병원에 갔는데 잘 모르겠다며 원자력병원으로 가라고 한다. 당황스러워 예전에 진료한 상봉동 송도외과에 곧바로 갔는데 안쪽의 혹이 자라 직장을 막고 있고 상처까지 있어 하혈이 된다면서 친절하게 설명을 한다. 두 병원을 오가면서 나는 절반의 모순된 현실 속에서 살고 있음을 느꼈다. 결국 원자력병원 진단결과 임시적인 방사선치료를 하거나 치료를 포기하고 인공항문을 만들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둘 다 절망적인 상황이다. 어머니 곁에서 10월 마지막 날 상념에 잠겨 있는데 간병인이 어머님을 욕실로 모시고 간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또 이방인의 신세다.
2008년 11월- 첫 눈이 내린 오늘 텅빈 고향집에도 순백색의 아름다움이 있을 것입니다.
서점에 출간된 마라톤 수기 런링라이프 월간지를 지난 날 나의 고통에 위로라도 받아 볼 양으로 형과 동생에게 한 권씩 주었다. 깊어가는 가을 어머니 병실에서 창문을 통해 바라다 보이는 유자원의 붉은 감나무잎이 그림보다 더 아름답다. 11월 중순 어머니를 그리며 한강 하프마라톤을 아들과 완주했다. 지난 여름 풀코스에 도전하기 위해 수없이 달리고 땀을 흘린 바로 그 코스인데 풀 한포기조차도 나를 응원해 주는 것 같다. 20일 서울에 첫 눈이 내리는데 전북 지방에도 많은 적설량이라니 텅빈 고향집에도 순백색의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다. 22일 어머님이 고열로 위급하여 응급실에 가셨다고 형한테 갑자기 전화가 온다 . 병원에 도착하니 담당의사는 오늘 밤 장례준비를 말한다. 중환자실로 모셔야 하는데 병실이 없어 일반실로 모시고 밤새 상황을 지켜 보았다. 다행히도 복막염으로 판명되어 내일 수술하기로 결정했다. 항생제로 오전까지 견디고 낮 12시 수술실로 이동했다. 동생은 눈물을 흘리고 형은 초조해하고 나는 담담한 표정인 4시간의 수술실 앞의 광경이다. 인공항문을 달고 눈을 부릅뜨고 나오신 어머님은 바로 중환자실로 이동했다. 11월이 다 가는데 중환자 실에서 주렁주렁 의료기기들을 매달고 어머님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신다. 가슴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말없이 서 있는 나는 어느새 고목이 되어 있다.
2008년12월 - 우리 친구는 벌써 열다섯번째 매월 어머니를 뵙고 갑니다.
중환자실에서 오늘 일반병실로 어머님을 옮기신다. 좁은 공간을 6인실로 활용하다 보니 불편함이 많다. 어머니 곁에서 오전에는 나 오후에는 동생 저녁에는 형과 형수께서 교대하며 어머님 곁을 지킨다. 피곤하고 힘들어도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임은 말할나위 없고 그렇다고 이시간이 길지도 않을 것이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추워 밤에는 체감온도가 영하15도는 될 것같고 낮에도 바람까지 불어 어깨가 움츠러드다. 편하시던 어머니께서 갑자기 푸른색 액체와 함께 구토를 하신다. 12일 아침 일찍 병원으로 달려가니 회진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어머니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데 마치 임종 모습같아 깜짝 놀랐다. 결과는 오늘 퇴원하라고 하는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안이 벙벙하다. 추운날 이불을 쓰고 주렁주렁 주사액을 달고 휠체어로 퇴원하는 모습이 애처로와 눈물까지 흐른다. 다시 온 유자원에서 원장은 어머니를 따뜻하게 맞이한다. 이제는 입원실이 3층 맑은 매화방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어머님은 예전 모습을 되찾고 식사는수액이나 영양제로 대신 하기도 한다. 아버님 기일도 어머니의 병환때문에 조용히 보냈다. 12월 20일 동생이 어머니의 추억이 담긴 흰 떡가래를 가지고 병원에 왔는데 역시 맛있게 드신다. 크리스마스캐롤이 울리고 한 해가 저물어 간다.
2009년1월 - 새해 떠오르는 둥근 해를 바라보며 고통없는 어머니의 삶을 기원했습니다.
붉은 해가 떠오르는 북한산 비봉에 올라가 고통없는 어머님의 삶을 기원했고 부끄러움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병원에서 어머니를 뵈니 어느 순간 부쩍 초췌하시고 팔과 다리가 눈에 띄게 가늘어 지셨다. 식사량도 줄고 말씀도 안하시고 내가 누구냐고 물으면 희미하게 종곤이라고만 할뿐이다. 내마음이 바빠지는 가운데 휠체어를 밀며 시간을 보내는데 모든 것이 귀찮은듯 역정을 내시고 투정을 많이 하신다. 1월 중순 어머니 팔과 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나오려는데 오늘은 잠이 잘 오겠다며 흡족해 하신다. 어머니의 식사량이 급격히 줄고 물같은 죽을 드시는데 동생은 걱정이 되는지 고구마와 사골국을 가지고 왔다.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 많아서 일까 잊을만 하면 꿈에 죽은 큰형이 나타난다. 형도 초췌한 모습으로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는데 아침이 될때까지 자국이 선명하다. 병원에서 점심으로 국수가 나와 내가 직접 드렸는데 그나마 맛있게 드신다 . 원래부터 어머님은 분식을 좋아하셔 내가 고향에 갈 때마다 읍내에서 우동이나 자장면을 대접하곤 했었다. 26일 구정에 말씀도 없으신 어머님을 억지로 소파에 앉히고 가족 모두 세배를 했다. 누가 보아도 마지막 명절을 보내실건데 자식된 내마음이 비통하기만 하다. 1월 말에 병원에서 앙상한 어머니를 가슴에 안았다. 슬픔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2009년 2월 - 노래 잘하는 막내 아들은 어느덧 유자원의 가수가 되었습니다.
숨소리만 들려오는 조용한 요양원의 복도에서 노래라도 부르면 마음의 즐거움이 있을까. 올때마다 어머님 좋아하시는 흘러간 노래를 1시간 이상씩 부른다. 눈을 감고 말없이 듣고만 계시는데 어느날은 갑자기 가수가 될거냐고 하시길래 깜짝놀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7일 병원에 갔는데 나를 보자마자 오래 기다린 사람처럼 반기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어머니곁에서 노래하고 있으면 간병인들에게 나를 대단한 존재인양 말씀하시고 으쓱하신다. 중순경 고향무정 노래를 불렀는데 오기택 노래라고 하시며 나보고 전국 노래자랑에 나가 보라고 농담까지 하신다. 아직도 어머님은 생각과 기억이 있으시고 내 노래를 경청하고 계신다. 15일 병원에 가서 주무시는 어머니 얼굴을 부비고 귓속말로 아들 종곤이라고 하니 번쩍 눈을 뜨고 물끄러미 바라 보신다. 어머니의 야윈 팔과 다리가 오른손 손가락에 잡힐 정도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어머니 곁을 어른거린다. 희미하게 눈을 뜨다가 이내 감고 말씀도 없으시고 노래라도 들으면 의식이 돌아올까 해서 나는 열심히 노래를 불러 드렸다. 25일 고향친구가 병문안을 왔는데 보자마자 어머니께서 내 고향 사람이라고 금방 알아보신다. 6년 전에 뵌 어머니와 너무 다르다며 안타까워 하는 친구에게 어쩌면 오늘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일거라고 말하며 병원을 나왔다. 요양원에 실습 나온 간병인들이 많다. 사랑과 희생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을 모두가 열심이다. 구름 한 점 없고 금방이라도 아지랑이가 피어 오를 것같은 쾌청한 날씨에 2월이 가고 있다.
2009년 3월 - 지난온 삶이 한스러워 울고 계십니까? 눈물을 거둬 주십시오.
3월이 왔는데도 어머니는 언제나 그 자리에 누워 계신다. 2시간내내 얼굴을 부비고 노래를 불러도 무표정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만 보신다. 어쩌다가 나를 물으면 종곤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팔과 다리가 너무 앙상하여 30킬로도 안될만큼 야윈 모습이시다. 유자원 개원 1주년이라 난 화분을 사가지고 갔는데 수간호사가 고맙게 받아 병원 입구 로비에 전시해둔다. 맑은매화실 양복순 가족일동이라고 적혀 있다. 3월5일 어머니께 노래를 불러드리다가 멈추었는데 중간 가사를 어머님께서 알려주신다. 놀랍기하고 아직도 노래를 듣고 계시는 어머님이 고맙기도 하다. 한 순간이라도 아들의 애틋한 사랑을 알아 주셨으면 좋겠다. 요즈음은 어머님께서 밤낮으로 울고 지낸다며 간병인들이 고충을 이야기 하는데 당황스럽고 미안함으로 목 뒤가 뻐근하다. 인생은 말년이 중요다던데 지금의 어머님은 우리의 넘치는 사랑이 있기에 충분히 행복하시다. 17일 간병인이 어머니의 위중함을 알린다. 어머니의 생명이 임종실 근처에 와 있는 것같아 초조하고 심난하기만 하다. 친구 영식이가 18번째 병원에 왔다. 빵과 과일을 많이 사와 저녁에 어머니는 생신처럼 진수성찬이다. 침대에 옮기는데 장루의 캡이 빠져 냄새가 심하게 나는데 젊은 남자 간병사가 태연하게 처리한다. 고마움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3월 25일경부터는 어머님께서 휠체어에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손도 흔들지 못하는 위중한 상태가 급격하게 진행된다.
2009년 4월- 학업을 마치고 돌아간 지난날처럼 세월이 흐르면 어머님 곁으로 다시 가겠습니다.
다시 악몽의4월이다. 벚꽃이 만발하여 유자원이 있는 위생병원 경치도 무릉도원을 연상하게 한다. 병원에 들어서는데 젊은 간병인이 휠체어에 모시고 꽃구경을 나왔다. 마지막 외출일텐데 고맙기가 이루 말 할 수 없다. 10일 점심때 병원에 가니 힘겹게 국물을 떠 드시는 데 아직까지 숟가락을 놓지 않으신 어머님이 고맙기도 하지만 국물이 밖으로 바로 흘러 내려 아들인 나를 다시 통곡하게 만든다. 13일 젊은 간병인이 임종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야속하기만 하다. 14일 장루검진을 마치고 저녁식사중 병원에 온 형과 형수 조카들까지 어머님 앞에 빙 둘러있는데 국물을 입에 머금은 채 울고만 계신다. 생명의 끝이 다가옴을 어머님은 아실까 자식인 내 속은 검게 타 들어 가고 있다. 16일 오후에 병원에 간 동생이 어머니하고 전화하라며 바꿔 준다. 혼신을 다해 불렀는데 속삭이듯 어머니의 이승의 마지막 대답이 들려온다. 17일 이제 더 이상 나를 알아 보지도 못하고 아무리 불러도 의식이 없으시다. 19일 고향에 모임으로 다녀 오면서 아버님 산소를 다녀 오는데 눈물이 흐른다. 일주일쯤 후면 어머니의 관을 붙잡고 나는 다시 이길을 들어서야 한다. 20일 식음을 전폐한 어머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종곤이를 외치니 고개를 끄덕끄덕만 하신다. 위생병원으로 가서 영양제라도 투여하자고 요양원 1층을 나서는데 비가 내린다. 간호팀장의 배려로 요양원에서 직접 수액을 놓기로 하고 다음날 다시 병원에 갔는데 조카 윤희가 와있다. 큰형을 본 것처럼 반가웠는데 신내동 형수는 눈길도 주지 않아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22일 친구 영식이가 마지막이 될 병문안을 왔고 동생이 마른 입술에 물을 적시는데 이 순간을 모든 사람들은 아름답게 기억했으면 좋겠다. 23일 어머님은 침묵만 흐르는 임종실로 이동하셨다. 당황한 여동생과 매제, 애처로운 형과 형수의 모습도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아내는 찬송가를 부른다. 잔인한 이 4월을 나는 또 비켜가지 못한다. 저녁에 그리던 큰조카 효정이가 왔다.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는데 광선형은 끝내 조카를 외면해 버린다. 고통과 당혹스러움으로 내가 숨이 멎을 것만 같다. 효정이에게 할머니를 영원히 기억해 달라고 당부하고 밤을 새우는데 어제처럼 의식없는 어머니의 숨소리가 시계초침처럼 계속 들려온다. 30분마다 맥박과 혈압을 체크하며 새벽을 맞는데 형이 들어 온다. 24일 형과 내가 자리를 비우고 여동생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전 9시 운명하셨다. 새벽 5시 잠깐 집에 다녀올 생각으로 임종실을 나갈때 힐끔 돌아보며 숨을 쉬고 계시는 어머님을 뵈었는데 마지막이 되어 버렸다. 유자원 추모관에서 장례를 마치고 고향 선영에 모시고 돌아 왔다. 유난히 푸른 보리밭 사이로 어머니의 580일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