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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불교사상의 전개
(1) 근본불교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입멸하시자 위대한 통치자를 잃은 교단은 부처님께서 남기신 교법만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수밖엔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불멸(佛滅) 직후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부처님의 교법을 정리 편찬하는 작업이었다. 물론 이것은 합송(合誦)이란 형식을 취하긴 하였지만 부처님의 교법을 정리 편찬하는 제일 처음의 작업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제1회 결집(第一回結集)’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해결한 교단은 그 후 100여 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은 실로 아무런 일이 없었다. 사상적으로 볼 때에도 불교 교단은 교법을 정리하고 외도를 파(破)하는 등, 글자 그대로 수유일미(水乳一味)의 정립기였다.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이 시기까지를 원시불교시대 또는 근본불교시대라고 부른다.
이렇게 한동안 조용하던 교단에는 불멸 후 약 백여 년이 지나자 생활의 편의상 계율에 관해 상당히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비구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즉 비사리성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이 금.은 보시, 소금 비축 등 소위 10사(十事)라는 것을 들고 나온 것이다. 지금의 승가생활에 비춰보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당시 부처님께서 설하신 계율을 액면 그대로 고수하려던 보수적인 비구들에겐 그것이 통할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진보파와 보수파간에 계률상 대립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이 문제로 베사리에서 동서의 비구를 대표하는 700명의 장로들이 모여‘제2회 결집’이 열리었다.
이때 장노 보수파들이 10사(事)를 비법(非法)으로 규정하자 진보파들이 이에 반발하여 보수파인 상좌부와 진보파인 대중부로 분열하게 되었다.
(2) 부파불교
근본 분열이 있은 후 100여 년 동안은 그런 대로 조용하였다. 그러던 것이 대중부에서 다시 갈라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된 데에는 대중부에는 인원도 많고 그 구성원은 대개 자유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일괄적인 통제가 어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다음엔 상좌부도 역시 그대로 있지 아니하고 자체 분열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중부 계통에서 8개 말파, 상좌부 계통에서 10개 말파, 총 18개 말파로 분열하여 이를 기말(枝末) 18부파라고 한다. 근본 2개부와 기말 18부를 합하여 보통 소승 20부라고 한다. 이들 부파들은 각자 독특한 교리체계를 세우며 실천방법을 정착화하였는데, 이 시기의 불교를 부파불교라고 한다.
불멸후 약 200년경 아쇼카대왕 때, 대왕의 불교장려로 외도들이 승단에 들어와 화합을 깨뜨리므로 그들을 정리하고 교법을 바로잡기 위하여 제수(帝須)가 왕명을 받들어 1천명의 승려를 선출하여 결집을 행하였다. 이것이‘제3회 결집’인데, 화시성에서 이루어졌다고 해서‘화시성결집’ 또는 1천명이 모여서 이루어졌다고 해서‘1천집법(集法)’이라고도 한다. 제3회 결집 때 구전(口傳)되어 오던 부처님 말씀이 비로소 문자화되었으며, 그 후 법(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내용인 논(論)이 정리되어 경ㆍ율ㆍ논의 3장이 성립되었다. 아쇼카왕은 호법대왕(護法大王)으로서 인도의 남부 지역을 제외한 전 인도를 통일하고 불교를 널리 전파하였다.
부파불교는 300년 동안 이어지면서 실로 복잡하게 분파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부파가 다 끝까지 존속되었던 것은 아니다. 이 부파 중에서 세력이 약한 것은 중도에 없어지고, 세력이 강했던 것은 상당기간 그 교세를 떨쳐왔던 것이다. 비교적 끝까지 그 세력을 지켜왔던 것은 상좌부ㆍ설일체유부ㆍ정량부ㆍ경량부ㆍ대중부 등이다. 그러면 소승이란 어떤 부파를 지칭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일정치 않다. 20개 부파 모두를 가리킨다는 설도 있고 그 중 일부 예컨대 끝까지 세력을 떨쳤던 상좌부ㆍ설일체유부ㆍ대중부ㆍ경량부ㆍ정량부 등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그러므로 소승불교란 엄밀히 말하면 부파불교의 연속이며, 또한 불교 그 자체가 소승이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이 소승화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대승불교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소승이란 말도 없었을 것이다.
기원후 2세기경 쿠산(Kusan)왕조의 카니슈카왕 때 제4회 결집이 이루어졌다. 카니슈카왕은 아쇼카대왕처럼 불교를 외호한 왕이었는데, 불교 내에 여러 부파가 있고, 각 부파의 교의가 동일하지 않음을 알고 각 부파의 이설(異說)을 통일하고자 협존자와 상의하여 경ㆍ율ㆍ논 3장에 통달한 500명의 스님을 선출하여 결집을 간행하였는데, 이것이‘제4회 결집’이다. 이 때 3장을 주석하였는데, 경장주석 10만송.율장주석 10만 송.논장주석 10만 송, 도합 30만 송의 대주석을 만들고 동판에 새겨 석함에 넣고 큰 보탑을 세워 그 속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그 중 논장의 주석이 현재 남아 있다. 대승불교 이전의 불교, 즉 근본불교ㆍ부파불교ㆍ소승불교를 한데 묶어 소승불교라고 하기도 한다.
(3) 대승불교
아쇼카대왕 때부터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자 출가 승려들의 숫자도 굉장히 늘어났다. 그런데 이런 불교발전의 한 측면에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부처님 당시의 승려들은 탁발을 하며 살았다. 그런데 승려들에 대한 사회적 존경이 점점 높아지자 승려 중에서 왕사 또는 대신의 스승이 되는 사람도 있게 되었다. 이들이 자기 스승을 예우하여 승단에 많은 보시를 하였다. 외부로부터 많은 보시가 들어오니까 탁발을 하러 거리로 나가는 경우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길거리에서 공양을 얻었을 때는 승려의 생존기반이 일반 대중이었는데, 이제는 왕이나 대신들로부터 주로 보시를 받아 생활을 하게 되니까 이제는 승려들의 생존기반이 지배자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니 승려들은 매일 거리에서 공양을 받던 고통 받고 있던 대중들과 만나 대화를 하고 가르침을 펴지 않아도 수행을 할 수 있게 되어 수행과 포교가 분리되었다. 그리고 불교는 점점 부파 간 시비를 가리는 이론적이며 개인의 출가수행만을 위주로 하는 이기적ㆍ독선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리하여 기원 후 2세기 경에 인도 불교계에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 새로운 움직임은 재가자와 일부 뜻있는 스님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것인데 이들은 자기들을 대승이라 불렀으며, 반대로 먼저 있던 교단 내지는 그 구성원들을 소승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불교라는 것은 새로 만들어 낸 불교가 아니라 소승불교의 잘못을 반성하고 부처님의 본래의 뜻을 살려 구세의 자비를 이 세상에 그대로 실현하고자 한 근본불교에의 복귀운동인 동시에 신흥불교운동이라 하겠다. 그러나 소승불교의 전통을 이어오는 동남아 불교권에서는, 소승이란 것은 스스로 대승이라 부른 사람들이 깍아내린 일방적인 이름으로, 소승이란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기들을 정통파라 하며, 그들의 불교를 상좌부 불교라고 한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다른 점
소승불교에 대해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 대승불교인데,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 첫째는 개인의 문제와 대중의 문제에서, 그 비중이 뒤바뀌었다는 점이다. 부처님도 대중 구제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었지만, 비구와 신자들에게는 보다 자기 자신의 해탈에 정진할 것을 요구하였다. 자기의 해탈이 이루어지지 않은 자가 남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한 범위 안에서의 구제도 포기한다든가, 대중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다든가 하라는 취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보수파에서는 사회와 민중에 대해 외면하고 자기 수도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도 확실히 큰 폐단이 아닐 수 없는 바, 대승은 대중의 구제야말로 자기 문제의 해결에 우선함을 표방하고 나섰다. 대승경전 중 어느 것도 이 점에서는 일치하는 견해를 보여 주고 있다.
둘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보살’이라는 새로운 이상적 인간상을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이 보살은, 흔히 상구보리(上求普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는 말로 설명된다. 즉 자기의 깨달음(bod -hi)을 추구하는 동시에 대중구제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보살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소위 자리행(自利行)과 이타행(利他行)을 겸한 것으로 이것 없이는 불교인이라 할 수 없다고 하겠으나, 어느 쪽이냐 하면 이타에 중점이 놓여 있는 것이 보살이다. 그리하여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일체를 희생하며 자기의 정각 추구까지도 때로는 포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경전에 무수히 나오는 보살들은, 이런 대중불교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 이상적 인간상이라 할 수 있다.
셋째로는, 새로운 방법론을 들고 나왔다는 점이다. 부처님의 사고방식은, 분명히 분석적이었다. 그러므로 연기(緣起)에 이르는 방법도 분석적일 수밖에 없었고, 무아(無我)가 주장되는 경우에는 인간의 존재를 다섯 가지 요소(五蘊)로 분석하여 생각하도록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어느 정도의 지적 교양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일반 대중과는 인연이 멀었다. 그리하여 대승에서는 분별(분석)을 배척하고 무분별을 존중하며 식(識)에 대해 반야(般若)를 내세웠다. 그들은 연기의 도리조차 직관으로 포착할 것을 주장하였으니,『반야경』이 말하는 슈냐타(sunyata), 즉 공(空)이 그것이었다. 대승불교가 중국인에 의해 환영받은 것도 그 직관적 방법이 그들의 민족성에 맞았기 때문이라 보인다.
진리란 본래가 법조문처럼 규정할 수도 없는 것이고 한자리에 고정시킬 수도 없는 문제다. 그것은 도리어 시대를 따라 발전되어 나감으로써만 자기 생명을 유지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대승불교가 부처님의 직접 설법한 내용과 다소 변모되어 있다 해서 이것을 일률적으로 배척할 수는 없다. 불교 사상사에서 빛나는 창조의 업적을 남긴 것도 소승이 아닌 그들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지나친 점, 왜곡시킨 점, 부처님의 뜻에서 먼 점 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공연히 대승이라는 우월감에 도취해 있을 것이 아니라, 전면적인 재검토가 행해지지 않는 한, 새 시대의 지도 이념이 될 수는 없는 것으로 믿는다.1)
대승불교를 우리는 흔히 만개한 화려한 꽃에 비유한다. 그것은 지금과 같은 풍부한 종교적 실천, 신앙의 제반 내용이 이 시대에 완비된 까닭이다. 특히 불교의 사상적 측면에서 본다면 대승불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지금과 같은 폭넓은 불교적 사상이 바로 대승불교에서 꽃피워졌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의 주요사상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보살(菩薩)사상 : 대승불교라 함은 곧 보살불교라 할 만큼 보살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보살사상이 없는 것은 대승불교가 아니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부처님은 아함경에서 과거 보살도를 닦음으로써 금생에 성불 할 수 있었다고 하셨다 따라서 대승의 보살사상은 원시불교의 위와 같은 보살사상을 깊고도 폭넓게 구현시킨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우리도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자기를 똑같은 아라한이라 한데서 이미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적극적 실천을 서원하여 수행대열에 동참한 자들은 스스로를 보살(bodhisattva)이라 자칭하였다. 그들은 근본서원으로서 이른바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常誓願成)의 네가지큰 서원(四弘誓願)을 맹서하였으며, 중생구원을 위해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4가지 무량한 마음(四無量心)을 근본 마음으로 하였고, 또한 중생을 불법으로 이끌어 들이고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시(布施)ㆍ애어(愛語)ㆍ이행(利行)ㆍ동사(同事)의 4가지 방편(四攝法)을 실천하였으며,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의 6바라밀(六波羅密)을 수행의 덕목으로 삼아 정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대승불교 이념을 중생의 근기에 따라 적극 실천하고 구원에 앞장서는 이상적인 보살을 출현 시켰는데, 이른바 부처님의 보처(補處)로써 등장하는 관음ㆍ문수ㆍ보현ㆍ대세지ㆍ지장보살님들이 바로 그분들이다.
㈁ 다불(多佛)사상 : 오직 유일신에서 절대적 믿음과 신앙을 강조하는 다른 여타의 종교와 달리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한 부처님만이 아닌, 앞에 설명한 중생구원을 위해 앞장서고 있는 많은 보살뿐만 아니라 과거7불을 비롯해서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등 수없이 많은 불보살님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불교의 교리적 특성과 내용을 깊이 있게 모르는 타종교인에게 있어서 잘못 다신교 내지는 우상숭배 종교로 이해될 수 있으나 대승불교의 특성을 이해한다면 쉽게 수긍하고 이해될 수 있는, 불교적 신앙형태의 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승 불교의 특성은 자리(自利)보다 이타(利他)를 강조하는 자비사상에 있다. 따라서 신앙대상인 부처님 역시 시간적ㆍ공간적으로 한계 지워진 석가모니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우리 곁에 진리불로써 상주해 계시다는 생각과, 중생의 근기와 원에 따라 나투어 중생을 구원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대승불교 사상의 특성 속에 많은 불보살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 성불(成佛)사상 : 불타가 일반화되고 다불사상(多佛思想)이 나오고 불타가 불타일 수 있는 근본적인 요인은 법이 있기 때문이요, 불타는 이 법을 깨달아 법과 합일된 존재이기에 꼭 석존만이 불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요 누구든지 그와 같은 수행을 거쳐 정각을 이룬다면 불타가 될 수 있을 것이니, 이를 구현한 것이 대승의 보살사상이라면, 이에 따라서 이의 궁극적인 목적을 성불에 두었다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런 순서라고 하겠다. 부처님께서는 그의 이모인 마하파자파티가 출가하려 할 때 “여인도 만일 여래의 법에 출가하면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 있습니까?”라는 아난의 질문에“증득할 수 있다.”고 대답하셨으며(남전율장 소품 비구니편), 99인을 살해하여 99개의 손가락을 잘랐던 앙굴마라도 출가를 허락하고 계를 설해 주셨으며(앙굴마라경), 또한“여러 강물이 흘러 바다로 들어가매 강의 이름은 없어지고 오직 바다라고만 하는 것처럼 사성계급도 출가하면 오직 석제자라고 할 뿐이다.”(증일아함경 권21) 라고 하신 것처럼, 여인도 죄인도 사성의 어느 누구도 다 도를 얻을 수 있으니, 불타관의 발전에 따라 대승의 일체 중생은 다 불성이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는 사상이 전개된 것도 그 근원은 이미 원시불교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재가주의사상 : 대승불교 시대에 편찬된 경전 가운데 많은 경전에서는 출가수행승이 아닌 세속에서 일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재가불자가 부처님을 대신하거나 또는 부처님과 대등한 위치를 갖고 중생들에게 설교하는 경우가 발견된다. 대표적인 예로는 불이(不二) 법문을 설하고 있는『유마경』에서는 유마힐이라고 하는 재가거사가 경전의 주인공으로서 설법하고 있으며,『승만경』에서는 승만부인이라고 하는 여성불자가 역시 부처님을 대신해 설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예는 대승불교 시대에 있어 재가불자의 교단적 위치와 역할을 짐작케하는 내용으로써, 대승불교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재가불자의 비중과 역할이 결코 출가수행승들과 비교해서 가볍지 않다는 점과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불교이념의 사회적 실천을 위해서 재가불자의 임무와 역할 그리고 수행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중생구제(慈悲)사상 : 대승불교에 있어 수행자가 닦아 나가야 될 수행덕목으로 제시되고 있는 6바라밀 가운데 제일 먼저 강조되고 있는 덕목은 바로 중생들에게 이로움을 줘야 된다고 하는 보시사상이다. 자리(自利)와 이타(利他) 중 특히 이타를 강조하고 사회적 구원을 강조함으로써 대승불교는 종교적으로 풍부한 실천이념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대사회적 중생구원이라는 실천이념을 바탕으로 앞에 언급한 많은 불보살이 등장하고 자비심과 보시가 강조되며, 중생을 위해 봉사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하는 불교적 실천관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 연기․공(緣起․空)사상 : 불교교리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연기사상은 불교에 있어 세계관인 동시에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유형.무형의 존재나 현상은 우연이나 절대적 존재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원인(因)과 조건(緣)에 의해서 이루어진다(果)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원인과 조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모든 존재들은 또한 개별적․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서로 끊임없이 연관되어 의지하고 관련을 맺는 상의상관적 존재로써 전체적 모습(同體一圓)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처럼 연기적 존재, 상의상관적 내용을 갖는 전체적 모습의 존재와 만물은 자연히 독립성ㆍ고정성이 부정된 무아적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또한 무아적 존재인 까닭에 무상하며, 끝내는 공한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불교에 있어 연기(緣起)ㆍ공(空)ㆍ무아(無我)ㆍ무상(無常)이라고 하는 교리는 하나의 일관된 체계를 갖는 불교의 세계관.존재관이며, 가장 중요한 불교적 특성을 나타내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중도(中道)사상 : 연기가 곧 중도이며. 중도의 원리를 모르면 결국 중도행을 할 수 없으므로 열반에 이를 수 없다. 초기에 비유비무 비상비단(非有非無非常非斷) 등으로 간단히 표현했던 것이 그 원리를 더욱 깊게 규명함에 따라 결국은 3론종의 8부중도(八不中道), 화엄종의 법계, 유식종의 3자성ㆍ3무성(三自性三無性), 천태종의 실상(實相)까지 발전된 것이다.
㈇ 반야(般若)사상 : 반야라는 말은 명(明)ㆍ지혜(智慧)ㆍ묘혜(妙慧)ㆍ정혜(淨慧) 등의 말로 번역된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번역으로는 그 원 뜻을 충분히 나타내지 못하는 까닭에 산스크리트어인 프라야나를 음역해 반야라고 하고 있다. 밝음과 지혜를 상징하는 반야는 대승불교 수행자들이 궁극적으로 이루어 내야 될 최고의 깨달음의 내용이며 목적이다. 상대적이고 분별적이며 차별적 알음알이를 극복한 존재의 참모습과 내용성을 깨닫는 절대적 지혜, 참된 정신을 획득할 때 수행은 완성되는 것이며 곧 불보살의 위치에 앉게 되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반야사상이 또한 특히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 유식(唯識)사상 : 불교에서는 다른 종교와 달리 마음에 대해서 많은 것을 가르치고 중요시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되고, 마음에서 창조되며, 마음에 따라 작용한다는 내용이다. 그런 까닭으로 선가에서는“마음이 곧 부처요, 마음이 곧 모든 것의 근본이기 때문에 마음을 깨닫는 것이 곧 진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마음에 대한 불교적 시각은 사실 대승불교의 교리적 특징 가운데 하나로 시작되어 발전한 유식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무튼 대승불교에서 이와 같이 마음에 대한 작용과 특성에 대해 논리적 분석과 연구가 진행된다는 점은 대승불교의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4) 밀교
기원 후 320년경 갠지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굽타 왕국이 일어나 인도를 재통일하였다. 굽타왕국은 인도인에 의한 통일국가로서 자연, 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되살아났고 그 결과 인도 민족종교인 브라만교가 다시 부흥하였다. 그러나 굽타왕조는 불교를 탄압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교도 크게 발전하였다. 기원 후 6~7세기경 브라만교와 인도 민간신앙이 결부하여 힌두교가 성립하였다. 힌두교는 불교의 장점도 흡수하여 민족종교로서의 기반을 굳혔다. 이에 불교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밀교(密敎)가 일어나게 되었다.
대승불교와 밀교의 다른 점
흔히 말하길 밀교(密敎)는 대승불교의 최종 단계라 하고,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종교적 생명력을 잃게 되자 민중의 요구에 응하여 등장한 것이 밀교라고 한다. 밀교는 현교(顯敎)에 반대되는 말이다. 현교란 널리 대중에게 개방되어 있는 가르침으로서 그 세계관이나 종교적 이상에 도달하는 방법을 명료한 언어로써 표현하는 불교이다. 쉽게 이해하자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불교는 대개 이 현교이다. 이에 대해 자신을 비공개적인 교단의 내부에 폐쇄하고 비밀의 교의와 의례를 사자상승(師資相承), 즉 스승과 제자사이의 은밀한 전달을 통해 간직하고자 하는 비밀불교가 밀교이다. 이런 밀교는 상징주의적인 수행법이나 의례를 통해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점에 특징이 있다. 따라서 불교의 실제 신앙형태에 있어서는 밀교가 불교의 독자적인 한 흐름으로서 정립되기 이전부터 밀교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요소들이 대승경전에서 이론적 근거를 찾아 고차적으로 체계화된 이론과 실천으로 발전하면서 정립된 것이 밀교라 하겠다.
밀교의 사상과 실천을 형성하는 요소는 복잡하지만, 그 근원에는 인도본래의 토속적인 신앙형태가 자리잡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도 고래(古來)의 제사적 의례 등 세속적 목적달성을 위한 토속신앙의 요소가 밀교의 사상적 기층을 형성했던 것이라고 간주된다. 그 대표적인 요소가 인도의 고대성전인『아타르바 베다』에 있는 주법(呪法)과 주술적인 구분이다. 이렇게 깊은 뿌리로써 복잡한 요소들을 섭취하면서 성립된 밀교를 간단히 정의하기 어렵지만, 그 특징으로서 다음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즉, 하나는 주술적인 의례를 조직화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비주의이다. 주술은 신이나 운명 혹은 자연현상 등, 우리의 행복과 불행에 대하여 큰 작용을 미친다고 생각되는 대상을 신비적인 수단에 의해 작용시켜 소원을 이루게 하려는 의도나 수단이다. 또 신비주의는 우주의 중심 또는 절대자인 신등으로 불리는 존재와 자기와의 내면적 결합을 감지함으로써 얻는 심리상태이다. 사실 어떠한 종교라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이러한 주술적.신비적 요소를 갖지 않은 것이 없다. 불교에 있어서도 이들 두 요소는 이미 초기경전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시대가 지남에 따라 점차 그 존재가 표면화된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경전 가운데서 밀교는 대승의 근본교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점점 본질화하게 된다. 한편 대승불교의 사상적 경향이 여러 종교적 입장에 대하여 두드러지게 관대했으므로, 각각의 대승경전은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반영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일찍이 불교에 의해 크게 타격을 받았던 바라문교는 민간신앙과 혼합하고, 또 인도의 사회조직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힌두교로 부흥하였는데, 이 힌두교는 일신교적 신앙이면서도 범신론적 경향도 흡수하였다. 이 같은 힌두교의 영향 아래서 7세기 중엽부터 대승불교는 급격히 밀교화되어 갔고, 종래의 부처와 보살 외에 새로운 예배의 대상들이 많이 유입되었다. 대승불교 내에서 밀교의 뿌리를 구체적으로 찾으면, 곧 다라니이다. 불교인들이 어떠한 법회에서나 시작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암송하는『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도‘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는 주문, 즉 다라니로 끝맺고 있다. 밀교는 이런 다라니에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중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