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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독교의 분열과 교의(敎義)의 다른 점
(1) 기독교의 분열
① 아리우스파와 아타니시우스파의 분열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보니 기독교 분파 중에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해 상충하는 이론이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기독교를 로마제국을 통일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삼으려는 황제에게, 이렇게 서로 다른 이론이 싸우는 것은 바람작한 일이 아니었다. 325년 그는 약 300명의 기독교 지도자를 니케아에 모이게 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니케아 공의회'이다.
여기서 두 파로 나뉘어서 논쟁을 벌였다. 한 쪽은 알렉산드리아 출신 아리우스가 이끄는 파로서, 예수가 피조된 존재로서 진정으로 인간도 아니고 진정으로 신도 아닌, 그 중간 제3의 존재라고 보았다. 이 파의 주장이 득세를 하는 것 같았는데, 젊은 신학자 아타나시우스가 나타나 “예수는 독생자로 태어났지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한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이 이론이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정죄하고 아타나시우스파의 이론을 기독교의 정통교리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기본 신조가 몇 번의 수정을 거쳐 381년 교회의 공식 입장을 표명하는 니케아신조로 공표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예수에 대한 교리를 확정하기 위한 공의회가 열렸는데, 451년 소아시아 칼리톤 회의에서 '예수는 진정으로 신이면서 진정으로 인간'이라는 이른바 양성론(兩性論)을 포함한 공식 교리를 확정하였다. 이에 반대하는 파도 있었는데, 이들은 결국 분리되어 나갔다.
한편 이단으로 규정된 아리우스파도 나중에 네스토리아라는 이름으로 동쪽으로 퍼져 나가 페르시아, 인도를 거쳐 중국에까지 전파되었다. 781년 서안에 비석을 세우는 등 8세기 당나라에서 흥했던 경교가 바로 이 파였고, 이 파가 신라에도 들어왔다는 설이 있다. 지금도 인도 남쪽과 이란 북서쪽에 이 파가 남아 있다고 한다.
②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의 분리
4세기말 로마제국이 동ㆍ서로 갈라지고 다시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자 로마교회도 동로마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그 후 게르만족의 침입과 로마의 멸망으로 의지할 곳을 잃은 사람들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를 로마의 주교에게서 찾게 되어 차츰 교황(敎皇)으로서 추앙받게 되었다. 특히 6세기 말 대교황이라 불리는 그레고리 1세(590~604 在位)가 앵글로 색슨을 위주로 해서 게르만 민족에 대한 전도를 활발히 전개하여 이들이 가톨릭교로 개종하게 됨에 로마의 교황은 동로마황제에 대하여 차츰 독립적인 지위를 얻게 되었다. 8세기 말 프랑크 왕국의 찰스(768~814 在位)는 정복사업을 펼쳐 중부유럽 일대에 거대한 왕국을 이룩하였다.
교황 레오3세는 800년 찰스에게 로마황제의 관을 씌워 주었는데, 교황이 찰스의 환심을 사서 그의 지지를 얻어냄으로써 로마교회는 동로마황제의 지배 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교리상의 의견도 동로마제국과 로마교황이 결별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이 무렵 기독교도들, 특히 로마교회의 교도들 사이에서는 그리스도상이나 십자가상들이 존중되고 그밖에 화상(畵像)이나 주상(彫像)들도 널리 퍼져 있었는데, 기독교는 원래 우상을 금지하는 종교인데다, 특히 이 무렵에 신흥한 이슬람교도들이 기독교도들의 이러한 우상숭배를 비난하는 바람에 726년 동로마황제 레오3세(717~741 在位)는 우상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미개한 게르만족을 개정시키는 데 이러한 우상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이 금지령에 반대하고 나섰다. 성령출처문제, 감독선임문제도 큰 의견 차이를 보였다. 서방교회에서는 성령은 성부, 곧 하나님과 예수(십자가)에게서 나왔다고 하는데, 동방교회에서는 성령은 오직 성부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서로마제국 멸망 후 동로마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서로마교회 감독권까지 갖게 되었는데, 서로마 감독은 자기도 똑같은 사도 베드로의 지위를 계승한 감독인데, 정치적인 문제로 동로마 감독의 감독을 받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1054년 동방교회 감독 미카엘 케룰나리우스가 우상숭배 문제와 성령출처 문제ㆍ감독지휘 문제에 대하여 분의(分義)하니, 서로마교회 감독 레오 9세는 사자를 보내어 담판을 청했다. 그러나 케룰나리우스가 이를 거부하자 사자는 미리 가지고 갔던 파문장(破門狀)을 내 놓았다. 케룰나리우스가 이 또한 거부하자 사자는 소피아 성당에 내던지고 말았다. 분개한 케룰나리우스는 반대로 로마감독에게 파문장을 보내니 동서의 교회는 이를 정점으로 1056년 7월 16일 완전 분리되고 말았다.
동방교회(그리스정교)는 서방교회(로마가톨릭)는 앞에서 말한 것 외에 다른 점이 많지만, 중요한 몇 가지를 들면 연옥을 인정하지 않고, 성직자에게 일률적으로 독신생활을 의무화하지 않는다. 평면 위에 그려진 상징적 성화(聖畵)는 사용하지만 조각상은 허용하지 않는다. 세례가 아니라 침례를 준다. 성찬식에 빵만 주는 것이 아니라 빵과 포도주를 준다. 물론 교황의 권위나 교황 무오성(無誤性)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③ 신(개신교)ㆍ구교(로마 가톨릭)의 분열
㈀ 분열의 원인 : 분열의 일차적인 원인은 역시 종교적인 측면에 있었다. 그것은 교황과 가톨릭교회의 권위의 급격한 하락현상이었다. 14세기 초에서 15세기 초가지의 교황의 바빌론 유수와 대분열은 교황의 권위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거기에다 교황의 세속화와 교회의 타락ㆍ부패가 극심하여 이들에 대한 사회의 불신은 더욱 커졌다. 우선 성직자들 중에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가 많았다. 성직자의 독신주의 원칙은 지켜지지 않아 첩을 두는 것은 예사가 되었다. 교황부터가 이러한 타락과 부패의 본보기여서, 가령 교황 알렉산더 6세(Alexan-derⅥ, 1492~1503 在位)는 8명의 서자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성직의 매매가 일반화되고 겸직자와 부재성직자(不在聖職者)가 허다하였다. 이러한 부정한 방법을 통하여 교황이나 고위성직자는 막대한 수입을 올려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는가 하면, 하급성직자 중에는 심지어 술집이나 도박장을 열어 모자라는 교구수입(敎區收入)을 보충하는 수도 있었다.
이와같은 갖가지 교회의 오용(誤用)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이 이른바 인덜전스(indulgence, 免罪符)의 판매였다. 인덜전스란 본래 죄에 따른 일시적 처벌, 즉 현세와 연옥에서의 처벌의 전부 또는 일부의 면제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지옥에서의 영구적 처벌의 면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인덜전스는 처음에는 자선행위자, 십자군 병사 등에게 반포되었다. 이것을 돈을 받고 팔기 시작한 것은 탐욕스런 교황들이 이를 수입증대의 수단으로 삼으면서부터였다. 게다가 이것을 판매하는 방법이 더욱 문제였는데, 그것은 흔히 은행가에게 맡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에 대한 반항운동을 일으키게 한 보다 근원적인 종교적 원인은 이와 같은 교황권의 실추나 교회의 타락보다는 오히려 가톨릭교의 교리 자체 안에 있었다. 개혁가들이 반대한 것은 교회의 오용보다는 가톨릭교 자체, 즉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여 완성된 가톨릭교의 교리 자체였다.
기독교 개혁의 선구자는 영국의 위클리프(1323~1384)였다. 그는 신앙의 표준을 성경에 두어야 하며 가톨릭의 교권정치와 성체의 화체설(化體說)을 반대하였으며 성경을 영역하였다. 위클리프의 사상을 보헤미아에서 요한 훗스(1369~1415)가 계승하여 성경을 장려하다가 1415년 7월6일 콘스탄츠 종교회의의 결의에 의하여 화형 당하였다.
㈁ 기독교의 개혁
㉠ 루터의 개혁 : 16세기 기독교 개혁 운동은 몇몇 특출한 기독교 지도자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그 중 첫째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36)였다. 작센의 작은 광산업자의 아들이었던 루터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종교적 위기를 겪은 그는 아우구스티누스파의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진지한 상태에 들어갔다. 극심한 죄의식에 사로잡힌 그는 갖은 고행과 선행을 통해서 자신의 사악(邪惡)을 보상할 만한 공덕을 쌓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불안과 절망을 더욱 증대시킬 뿐, 좀처럼 정신의 평온을 얻을 수가 없었다. 여러 해 동안 이와 같은 무서운 자기모순과 싸운 끝에 마침내 그는 바울의 로마서 속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냈다. 그것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루터도 이와 같은 그의 새로운 소신을 그가 재직한 비텐베르크(Wittenberg)대학의 강의실이나 지방교회의 설교단 밖으로 퍼뜨리지 않았다. 그런데 1517년 독일에서는 유난히 악명이 높은 인덜전스가 교황 레오10세에 의해 선포되어 뻔뻔스러운 방법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루터는 그해 10월 ‘95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문에 붙여 인덜전스의 판매를 반대하는 그의 견해를 공표하였다. 95조의 반박문은 예상 밖의 반향을 일으켜 곧 독일어로 번역되고 인쇄되어 독일 전국에 배포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루터는 교황이나 교회와 정면 대결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던 것이 1519년 당대의 저명한 신학자 요한 에크(Johan Eck)와의 공개토론에서 곤경에 몰리게 된 후로 그는 자기주장의 근거에 대한 연구를 쌓아 1520년에 이것을「그리스도교의 자유」,「교황의 바빌론 유수(幽囚)」,「독일민족의 그리스도교적 귀족에게」라는 3개의 팜플렛으로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가톨릭과 정면 대결하게 된 것이다.
그는 면죄부로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강조했다. 교회가 믿음과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데 반해, 루터는 이른바 믿음만을 강조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구원 받는다고 보았다. 그는 우리가 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간다는 생각을 버리고 모두가 신에게 직접 나갈 수 있음을 강조하는 만인제사장직을 주장했다. 또한 루터는 신부가 결혼할 것을 권장하고 자신도 결혼을 했다. 교황은 루터의 주장을 이단으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교황의 칙서를 공중 앞에서 불살랐으며, 이에 교황은 그를 파문에 처하고 세속 군주에게 그의 처벌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 명령은 이행되지 않았다. 작센의 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가 그를 비호하여 바르트브르크(Wartbu -rg) 성(城)에 거처케 하였기 때문이다. 루터는 그곳에서『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였는데, 이 독일어 성경은 인쇄되어 전 독일에 퍼지게 되었다. 루터가 1529년 스파이어회의 판결에 저항했음으로 그의 개혁운동을 ‘프로테스탄트(저항자 또는 이단자)운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루터에 의해서 시작된 기독교 개혁운동은 급속도로 독일 전역에 번지게 되어'루터파교회(Lutheran Church)'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그의 주장은 특히 중북부독일 제후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농민들과 도시 서민층 그리고 하급기사계층에서도 많은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루터는 결코 급진적 개혁가는 아니었다. 1524년부터 1525년에 걸쳐 전 독일에 농민반란이 일어났을 때, 농민들은 루터에게 격려와 조언을 기대했으며, 루터 역시 처음에는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농민들의 행동이 과격해져 기존 사회질서를 위협하게 되자 그는 이를 맹렬히 비난ㆍ공격하면서 극단적인 말로 반란의 진압을 촉구하였다. 이리하여 루터는 농민의 지지를 잃게 되고, 이후 그의 종교개혁은 주로 중북부독일의 제후들과 자유도시에 의하여 수행하게 되었다. 그 후 가톨릭세력을 대표하는 황제와 슈말칼덴(Schmalkalden)동맹으로 결속한 루터파 사이의 장기간에 걸친 싸움 끝에, 1566년 아우그스부르크(Augsburg)의 화의로 독일내의 종교적 대립과 분쟁은 일단락되었다. 그 합의의 주된 내용은 세속지배자로 하여금 그 지역의 종교를 선택하게 하되, 선택은 가톨릭교회와 루터파 교회로 한정한다는 것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루터의 기독교 개혁이 제후들의 지지로 이루어졌으며 또 보수적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 칼뱅(Calvin)의 개혁 : 루터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스위스에서도 쯔빙글리(Zwingli, 1484~1531)가 기독교 개혁운동을 일으켰다. 에라스므스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은 그는 쮜리히를 중심으로 북부의 여러 칸톤(can -ton)에서 그의 가르침을 펴 개혁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중부지방의 칸톤들은 가톨릭교를 신봉하여 그의 개혁에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1529년 양 세력 사이에는 전쟁이 일어났는데, 쯔빙글리는 이 전쟁 중 전사하였으며, 이후 개혁교회의 세력은 침체하였다.
쯔빙글리의 뒤를 이어 스위스에서 기독교 개혁을 추진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둔 또 하나의 기독교 지도자는 칼뱅(Calvin, 1509~1564)이다. 프랑스 중산계층 출신인 칼뱅은 신학ㆍ법학ㆍ고전 등 폭 넓은 교육을 받았다. 그 후 루터의 개혁사상에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1533년에는 갑자기 신으로부터 빛을 받았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오랜 절망과 두려움을 경험했던 루터와는 달리 칼뱅은 매우 명석하고 치밀하고 의지적이었다. 프랑스의 이단운동 박해를 피하여 스위스로 도피해 온 그는 1538년 제네바에 정착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설교와 조직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541년까지에는 제네바의 정치와 종교가 완전히 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후 20여 년간 그는 이곳에서 엄격한 신정정치(神政政治)를 실시하였다. 칼뱅의 교리는 그의「그리스도교 강요」에 제시되어 있는데, 그 핵심은 예정설(豫定說)에 있었다.
프랑스의 위그노, 스코틀랜드의 장로파, 잉글랜드의 청교도, 네델란드의 고이센 등이 모두 이 칼비니즘 계통의 개신교도들이었다.
㉢ 영국의 개혁 : 한편 영국에서도 기독교 개혁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종교적인 요인보다는 정치적ㆍ경제적 요인이 더 강하게 작용하였다. 그것은 국왕 헨리8세(1509~1547 在位)의 이혼문제에서 발단되었다. 처음 헨리8세는 가톨릭교의 신봉자로서 루터파의 침투를 막아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궁녀 앤 볼레인(Anne Boleyn)과의 결혼을 위하여 왕비 캐더린(Catherine) 과 이혼코자 하였던 그는 교황이 이 이혼의 승낙을 꺼리자 영국교회의 로마교회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고 크래머(Crammer)를 캔터베리대주교에 임명하여 이로 하여금 이혼을 승인케 하였다(1533). 이어 1534년에 의회는 수장법(首長法)을 공포하여 영국교회를 확립하고 스스로 수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국의 기독교 개혁에는 국왕 개인의 결혼문제 이상의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민 사이에는 반교황주의 감정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특히 타락한 수도원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더욱이 영국의 수도원은 많은 토지를 차지하고 있어 이것이 국왕의 구미를 돋구었다. 그래서 헨리 8세는 1536년과 1539년 두 차례에 걸쳐 수도원을 해산하고 그 토지를 몰수하여 이것으로 왕권강화를 위한 재정에 충당하였다. 그렇지만 헨리 8세는 신앙의 내용, 의식에 대해서는 가톨릭교회의 그것에 별다른 변화를 가하지 않았다.
그의 뒤를 이은 에드웨드 6세(Edward Ⅵ, 1547~1533 在位)의 치하에서 영국교회는 개혁적 요소를 크게 받아들여「공동기도서」를 작성하는가 하면, 다음 매리여왕(Mary, 1553~1588 在位) 때에는 다시 가톨릭교로 복귀하여 개신교를 박해하는 등 종교적 동요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1558년 엘리자베드 1세(ElizabethⅠ, 1588~1603 在位) 여왕이 즉위하자 그녀는 부왕 헨리 8세의 정책을 계승하여 영국교회의 기틀을 다시 바로잡았다. 이리하여 1559년에는 통일법이 공포되고, 다시 1563년에는 39개조(個條)가 채택되어 영국교회의 교리와 의식이 확정되었다. 그것은 교리상으로는 루터나 칼뱅의 설을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의식에서는 가톨릭교와 별로 차이가 없는 영국 특유의 중도적 교회였다. 한국에서는 이 교파를 성공회라 부르고 있다.
㉣ 재세례파 : 재세례파를 근본개혁자라고 하는데, 다른 개혁이 철저하지 못했으므로 자기들만은 ‘뿌리’까지 개혁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릴 때 세례를 받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받은 것이니 무효이므로, 성인이 되어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재세례파라는 말이 나왔다. 재세례파에는 멘노(1496~1561)를 지도자로 한 메노나이트파, 거기서 나온 허터(1561년 사망)를 지도자로 하던 허터라이트파, 암만(1644~1725)을 따르던 아미시파 등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북아메리카로 이민하였는데, 특히 허터라이트파나 아미시파는 자기들대로의 집단 거주지를 이루어 살고, 아직도 마차를 이용하는 등 옛날 생활방식 그대로를 지키며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메노나이트파는 현재 캐나다 매니토바주 위니펙 부근에 많이 살고 있다.
㉤ 가톨릭의 개혁 : 기독교 개혁의 물결이 전체 유럽에 파급됨에 따라 가톨릭교회에서도 스스로 반성과 개혁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적 인문주의자들이 주장한 바에 따라서 프로테스단트와의 타협이나 온건한 개혁을 통하여 추진되었기 보다는 그들과의 싸움과 가톨릭교리의 엄격화를 통해서 추진되었다. 그것은 주로 종교심문소(宗敎審問所)와 예수회, 트렌트의 공의회(公議會), 그리고 개혁 교황청의 네 기구의 활동을 통하여 가톨릭 세력을 방어하고 확장하는 일이었다. 1542년 교황에 의해서 설치된 종교심문소(宗敎審問所)는 이단은 물론 에라스무스의 사상까지도 금압(禁壓)했던 에스파니아의 그것을 본 딴 것이었다. 그 목적은 이단을 압박하고 가톨릭의 교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위험한 사상을 전파하는 도서의 목록이 작성되어 이를 읽는 것이 금지되었다.
예수회는 로마교회가 프로테스탄트와의 싸움에서 필요로 했던 충실하고 유능한 전사들을 마련해 주었다. 에스파니아의 상이군인이었던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에 의하여 창설된 이 교단은 교황에 대한 절대복종을 내걸고 엄격한 군사적 조직과 기율로 가톨릭교세의 방어와 확장에 힘썼다. 이들의 활동에 의하여 이탈리아, 에스파니아 등 남부유럽에서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전파가 저지되고, 서남독일이 다시 가톨릭으로 되돌아왔을 뿐 아니라 유럽 이외의 여러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그들은 또 성속(聖俗)의 교육활동에도 커다란 공헌을 하여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높였다.
한편 가톨릭교회는 북부 이탈리아의 국경 근처인 트렌트에 공의회(1545~1563)를 소집하여 가톨릭교리를 재확인하고 모든 이단과의 타협을 단호히 거절하여 이에 맞설 자체의 교리를 정비하였다. 가령 루터가 성경만이 기독교적 진리의 근원이라 주장한 데 대하여 공의회는 성경만이 아니라 성경과 전승(傳承)이 기독교 진리의 근원이라 주장하였으며, 루터가 신앙에 의해서만 구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 데 대하여, 공의회는 신앙만이 아니라 신앙과 선행에 의해서 사람은 구원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 3기관의 개혁활동과 더불어 교황청도 자체 개혁에 나섰다. 그것은 주로 바울 4세(Paul Ⅳ, 1555~1559)에서 식스투스 5세 (SixtusⅤ, 1585~1590)에 이르는 5명의 교황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그들은 성직매매나 족벌주의를 배척하여 학식과 덕망을 갖춘 사람들을 성직자로 임명하고 교회재판에 있어서의 뇌물수수를 단속하였다.
이와 같은 가톨릭교회 자체의 개혁운동을 통하여 로마교회의 세력이 다시 강력해지자 신ㆍ 구교회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기까지는 유럽 각지에서 종교전쟁이 일어났다. 이러한 종교전쟁은 물론 개신교와 가톨릭교의 대립이라는 종교적 원인에서 일어났으나 그 배후에는 각국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나 경제적 대립이 얽혀 있었다. 그것은 16세기 후반의 프랑스의 위그노전쟁, 네델란드의 독립전쟁을 거쳐 17세기 전반에는 30년전쟁이라는 대규모의 국제전쟁으로까지 확대되었다.1)
④ 개신교의 분열
프로테스탄티즘은 통일성보다는 차별성을 강조하는 경향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티즘은 다양한 교파적 발전을 하나의 특성으로 삼고 있다. 루터와 칼뱅의 기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수많은 교파가 생겨나 다름의 독자성을 확보하면서 다양한 발전을 하였다.
㈀ 청교도 : 영국 메리여왕의 종교 박해로 다른 나라로 나가 살던 영국인들이 1558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즉위와 함께 다시 영국으로 돌아 왔다. 나가 살던 동안 칼뱅파의 영향을 받았던 이들은 영국교회 안에 남은 가톨릭적 요소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들은 여러 가지 예배의식을 간소화할 뿐 아니라 교회도 장로제로 바꾸려 하였다. 이렇게 교회를 청결히 하려 한다고 하여 ‘청교도(淸敎徒)’라는 이름이 붙었다. 결국 이들 중 일부는 영국에 남고, 일부는 분리되어 분리주의자가 되었다. 분리주의자들은 네델란드로 이주해, 거기서 회중교회와 침례교회가 되었다.
교회에 남아 있던 청교도들은 그 후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 -well)장군의 지도로 청교도 혁명을 일으키는 등 우여곡절 끝에 1640년 정권을 잡은 다음, 이후 12년 동안 영국을 청교도 국가로 바꾸고 교회를 청결하게 하기 위해 엄격한 행동강령을 강제하였다. 이 무렵 생긴 것이 이른바 웨스트민스터 고백이다.
그러나 1660년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고 영국교회를 회복시킨 다음 일치법을 제정하여 청교도를 영국교회로부터 추방하게 되었다. 이렇게 추방된 청교도들로부터 조합교ㆍ침례교ㆍ퀘이커교ㆍ장로교ㆍ유니테리언교 등이 나왔다.
㈁ 침례교 : 청교도혁명 전에 네델란드로 간 분리주의 청교도 중 일부는 암스테르담에 정착해 살았는데, 지도자 존 스미스는 옆에 살던 재세례파 메노나이트교인들의 영향을 받고 성서에는 영아세례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여 스스로 성서대로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고, 교인 전원에게 모두 그런 침례를 주었다. 이들은 영국으로 다시 돌아와 1612년 경 영국침례교회를 설립했다. 이후 침례교는 영국 각지로 전파되고 1639년 미국에 로드아일랜드 침례교회를 설립하면서 미국 각처로, 특히 남부로 많이 전파되었다. 현재 미국 남침례교회는 미국 개신교파 중 가장 크다. 유명한 전도사 빌리 그레이엄이 이 교회에 속한다. 미국 전 대통령 카터도 이 교파에 속했으나 몇 년 전 교회가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므로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공식 입장을 채택한 데 반대하여 교회를 떠났다.
㈂ 회중교 : 네델란드로 갔던 분리주의 청교도 중 다른 일부가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므로 감독이나 장로 등 특별한 머리들이 필요 없고, 그리스도와 하나된 모든 회중이 다 참여하여 의사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 중 일부는 영국으로 돌아가고 다른 일부가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 세운 교회가 회중교회이다. 이들을 선두로 영국에 갔던 다른 청교도도 미국으로 건너가 로드아일랜드만 제외하고 전 뉴잉글랜드가 다 회중교회의 영향 아래 들어가 약 200년 동안 미국 동북부 지방에서 실질적인 국교의 역할을 담당했다.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하버드 대학, 예일 대학 등을 세우기도 했다.
㈃ 퀘이커교 : 이들의 공식 명칭은 종교친우회로서, 영국인 조지 폭스(1624~ 1681)에 의해 시작된 종교단체이다. 그는 1646년 자신의 종교적 체험에 입각해, 교회의 형식이나 십일조 제도 등에 반대했다. 종교란 교리체계를 받아드리는 것도 아니고 직업적인 신부가 읽어 주는 설교나 기도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빛’으로 밝아지는 체험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은 이런 체험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가 동등한 친구라 하였다. 이런 가르침과 그에 따르는 행동 때문에 퀘이커교인은 투옥 등 박해를 받다가 윌리엄 펜(William Penn, 1644~1718)이 지도자가 되면서 1681년 찰스 2세로부터 미국의 땅 일부를 하사 받고 대거 이주했다.
펜실베니아는 ‘펜의 숲’이란 뜻이고, 주(州)의 별명이 퀘이커주이며, 펜실베니아(형제, 우애라는 뜻)라는 도시가 생긴 것도 퀘이커교인과의 관계 때문이다. 이들의 모임에서는 목사나 신부가 따로 없이 침묵 중에 앉아 ‘내면의 빛’을 기다리는 예배를 드리다가 영감이 오면 조용히 발언하여 다른 이를 위해 ‘섬기는 자’가 된다. 이들은 노예제도 반대, 평화운동 등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한국에서도 초기 함석헌 선생을 중심으로 모이다가 최근에는 박성준 교수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 감리교 : 영국교회(성공회) 신부의 열 다섯째 아들이었던 요한 웨슬리(1703~1791)는 옥스퍼드대학 재학 시절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1707~1791)와 함께 ‘신성 클럽(Holy Club)’이라는 작은 모임을 만들고 일정한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임하심을 직접 체험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회심(回心)을 통해 사물을 보는 안목과 삶 자체가 바뀌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옥스포드의 동료들은 그들을 ‘절도주의자(節度主義者)’라고 부르며 놀렸다.
1735년 요한 웨슬리는 미국 조지아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 가는 도중 배 위에서 모라비아 형제단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회심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다, 웨슬리는 전도 여행을 마치고 런던에 돌아와서 스스로 이런 회심을 경험하고, 자기의 경험을 주위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물론 영국교회를 떠날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열성적인 전도로 그를 따르는 사람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자연히 하나의 교파로 독립하게 되었다. 그가 죽을 때 그를 따르는 이가 영국에서만 7만 명이나 되었고 더욱이 미국에서의 성장은 그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더 엄청났다. 감리교는 미국에서 침례교단 다음으로 큰 교단으로 발전하였다.
㈅ 안식일교 : 지금까지는 모두 유럽에서 생긴 교파인데 반하여, 지금부터 살펴볼 안식일교ㆍ여호와의 증인ㆍ모르몬교는 모두 미국에서 생겨난 교파이다. 세 교파의 공통점은 모두 종말이 임박했다는 종말관에 기초한 점이다. 그리고 문자주의를 고수하고, 물에 잠기는 침례를 주장한다.
19세기 초반 미국 동북부 지방에는 예수가 곧 재림한다고 믿고 가르치는 ‘재림운동’이 활발했다. 그 대표자가 침례교 평신도 윌리엄 밀러(1782~1849)였다. 그는 종말론자가 대부분 그런 것처럼 히브리어 성서의『다니엘』과 신약의『요한계시록』을 연구하고 거기에 나오는 숫자를 계산하여 예수가 1843년 3월21일에서 1844년 3월 21일 사이에 재림한다고 예언했다. 예언이 빗나가자 다시 1844년 10월22일로 연기하였다. 그 예언도 빗나가자 많은 사람들은 떠났지만 끝까지 남은 사람들이 모여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를 세웠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밀러가 계산한 날짜는 실수가 없었다고 한다. 단 그 날이 예수가 지상으로 재림하는 날이 아니라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 죽은 자와 산 자의 조사ㆍ심판을 시작하는 날이었다는 것이다. 일단 이 조사 심판을 끝내면 곧 이 세상으로 다시 올 것이라고 믿었다. 이 교파는 화이트(Ellen G White, 1826~1915)라는 여자를 말세를 위한 하나님의 예언자로 믿고, 그의 저술은 영감을 받아 쓴 ‘예언의 선물’로서 성서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진 것으로 받든다. 그는 역사를 선악의 대투쟁으로 보고, 앞으로 다른 교파들은 모두 가톨릭을 중심으로 종교연합을 구성하여 결국 하나님의 남은 백성인 자기들을 대적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이것이 말세에 하나님의 백성인가 사탄의 추종자인가를 분별하는 유일한 기준이 된다고 여긴다.『레위기』에 있는 유대인의 음식 규정을 그대로 준수하고, 지금은 채식을 권장한다. 교파 내 학자들 사이에 성소(聖召)ㆍ교리 등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나오고 있다. 한국에도 들어와 위생 병원ㆍ삼육 대학ㆍ시조사 등을 운영하고 있다.
㈆ 여호와의 증인교 : 창시자 러셀(1852~1916)은 윌리엄 밀러의 재림운동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안식일교회에 가담하지 않고 자기대로 성서를 해석하여 예수의 재림 날짜를 1873년이나 1874년으로 다시 계산했다. 그 후 여러 번에 걸쳐 예언이 빗나가자, 1914년에 예수가 보이지 않는 능력으로 재림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했다고 하며, 이미 시작된 하늘나라가 아직 완성이 안 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완성은 조만간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완성되리라는 날짜도 1918년, 1920년, 1925년, 1941년, 1975년 등 여러 번 변경되었다. 아무튼 그날이 오면 악의 세력은 완전히 소멸되고 여호와의 증인들이 증언하는 진리를 받은 사람들만 살아남아 새로 회복된 지상 낙원에서 살게 된다. 특히 특별한 무리 14만 4,000명은 하늘에 가서 하나님과 영원히 사는 특권을 누린다고 한다.
이들은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교리를 거부한다.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피조물, 그의 첫 아들이다. 이들에 의하면 루스벨 사탄은 예수의 동생으로 이 지구의 인간을 담당하였는데,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으므로 큰형인 예수가 이 세상에 올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다른 교파는 삼위일체나 영혼불멸을 비롯하여 성서에 없는 잘못된 진리를 가르치므로 모두 거짓 종교라고 주장한다. 이들은「깨어라」혹은「워치 타워」라는 책자를 들고 집집마다 방문하거나 길모퉁이에 서 있는데, 모든 교인이 자원봉사자로 시무한다. 병역 거부, 수혈 거부, 투표 거부,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 공직 거부, 크리스마스 지키기 거부 등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제2지도자에 의해 채택된 공식 명칭이 ‘여호와의 증인’이다.
㈇ 몰몬교 : 몰몬교는 미국 우다주 솔트레익시에 있는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교(2005년, 교명을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로 개칭)를 말한다. 개조 요셉 스미스(Joseph Smith, 1805~1844)는 1823년 9월 23일 그모라산에서 소위 황금판(黃金板)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아메리카의 예언자 몰몬이 기록한 아메리카의 역사 신앙을 예언한 것이었다. 몰몬교란 ‘몰몬의 예언을 믿는 교’란 뜻이다.
스미스는 하나님의 나라가 곧 미국에 임한다고 선포하였다. 1년 사이에 1,000명 정도의 추종자를 얻었지만 박해 때문에 추종자들을 데리고, 처음에는 오하이오주로 옮겼다가 다시 새예루살렘의 도읍지라고 여긴 미조리주로 옮겼다가 다시 일리노이주로 옮겼는데, 여기서 결국 스미스는 분노한 폭도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스미스가 죽고 교회는 둘로 갈라졌는데, 그중 큰 쪽이 제2지도자 브리검 영(brigham Young, 1801~1877)의 인도 아래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몰몬교는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였지만 1890년 법에 의해 이를 포기했다. 까만 정장을 하고 가슴에 이름표를 단 젊은이들이 둘씩 다니며 전도하는 것을 보면, 거의 예외 없이 몰몬 선교사이다. 이들은 두 명이 한 팀이 되어 2년 동안 북아메리카나 다른 나라로 가서 전도할 의무가 있다. 미국에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에는 오직 몰몬의 침례를 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 죽은 사람도 침례를 받도록 하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잘된 족보도서관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성직자가 없이 모든 남자가 제사장 역할을 한다. 성서 이외의 경전을 받드는 것, 여성의 지위, 종교적 배타성 등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몰몬교는 미국에 현재 350만 가량의 신도가 있으며, 모몬태버너클 합창단이 유명하다.
㈈ 통일교 : 통일교는 1954년 한국에서 창시된 신형 기독교이다. 통일교를 창시한 문선명(본명 龍明)은 북한에서의 종교 박해로 흥남 감옥에서 2년 옥고를 치르고 유엔군의 북진으로 석방되어 부산으로 피난했다. 이어 1952년 부산 범일동(凡一洞)에서 토담집 교회로 시작, 1953년에는 대구에 교회를 설립하는 등 선교활동을 계속하다가 1954년 서울로 올라와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世界基督敎統一神靈協會, 약칭 통일교회)’를 창설했다.
교회를 신령과 진리로 통일하여 한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세계를 만듦으로써, 하느님의 창조이념을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을 지상목표로 삼고 급속한 발전을 거듭하였다. 1957년에는 교리서인「원리강론(原理講論)」을 완성시켜 교리적인 체계를 갖추었다. 그 내용은 전편 7장(창조원리ㆍ타락론ㆍ종말론ㆍ구주론ㆍ부활론ㆍ예정론ㆍ기독론)과 후편 2장(복귀원리ㆍ재림론)으로 되어 있으며, 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신조(信條)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한다. ㉠유일신(唯一神)인 창조주 하느님을 인간의 아버지로 믿는다. ㉡신ㆍ구약성서를 경전으로 받든다. ㉢하느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을 인간의 구주인 동시에 복귀된 선(善)의 조상으로 믿는다. ㉣ 예수께서 한국에 재림할 것을 믿는다. ㉤인류세계는 재림하는 예수를 중심삼고 하나의 대가족사회가 될 것을 믿는다. ㉥하느님의 구원섭리의 최종목표는 지상과 천상에서 악과 지옥을 없애고 선과 천국을 세우는 데 있는 것으로 믿는다.
이 같은 인류 대가족사회에 대한 그들의 염원은 선교활동을 국내에만 국한하지 않고 세계 각국을 향하여 전개시켰다. 1959년 일본에 교회 설립, 1960년 미국에 교회 등록, 1964년에 독일에 교회 설립, 1966년에 오스트리아에 교회 등록, 같은 해 이탈리아에 교회 등록, 1968년 스위스에 개척전도 시작, 1969년에 프랑스에 교회 설립, 같은 해 레바논ㆍ노르웨이ㆍ스웨덴ㆍ벨기에ㆍ덴마크ㆍ룩셈부르크ㆍ시리아ㆍ터키에서 개척전도를 개시하였고, 1975년에는 미국ㆍ일본ㆍ독일 3개국 출신 선교사 3명씩을 1조로 조직, 세계 각국에 파송하여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1972년 이후 세계선교본부를 미국에 두고 전 세계를 향한 폭넓은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1977년에는 방이 2,000개나 되는 43층의 뉴요커빌딩을 매입, 세계선교본부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1961년 36쌍의 합동결혼식을 시작으로 1982년 잠실종합운동장 실내체육관에서 거행한 6,000쌍의 합동결혼식 등을 가져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는가 하면, 리틀엔젤스를 창단하여 세계 각국에서 공연을 하게 한 일 등은 유명하다.
한편, 초교파기독교협회ㆍ국제크리스찬교수협의회ㆍ국제기독학생회 등을 통하여, 기성교회의 목회자ㆍ평신도ㆍ학생 등을 유혹한다고 하여 교계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육영사업으로는 1975년 미국에 통일신학대학원, 1985년에는 국내에 성화신학교(선문대학) 등을 설립하였다.
통일교는 한국에 약 600여개의 교회와 50만여 명의 신도가 있으며, 세계적으로는 한국 신자를 포함하여 약 400만여 명의 신도가 있다.
(2) 교의(敎義)의 다른 점
① 기독교와 유대교의 다른 점
기독교는 유대교에 그 뿌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두 종교는 많은 부분에서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어떤 점이 다른지 알아보자.
첫째, 천당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 유대교에서의 천당은 우리가 죽은 후에 갈 수 있는 초월적인 세계가 아니라 이 땅에서, 이 지구에서의 이상적 삶을 가리키는 데 반하여, 기독교에서의 천당은 이곳에서의 삶이 아닌 또 하나의 삶, 두 번째의 삶이 갈 수 있는 곳으로 지구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가리킨다. 기독교에 말하는 천당은 하나님의 나라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 정신적ㆍ영적 세상을 가리킨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음(福音) 즉 기쁜 소식이란 이 세상 아님 다른 세상, 즉 하나님의 왕국이 있다는 소식이며, 우리도 그곳에 가서 살 수 있다는 소식이다.
둘째, 유대교는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는 신의 구현이 아니며, 신의 아들이 아니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인다. 유대교가『모세오경』의 율법성에 치중한다면 기독교는 그러한 율법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인 사건, 즉 예수의 탄생, 구세주의 나타남에 바탕을 둔다. 예수는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인간을 구원해 주기 위하여 이 지구상에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내려온 신이다. 그래서 그를 신의 아들이라고 한다. 기독교는 예수가 동정녀(童貞女)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과 예수가 살아있는 동안 보여준 기적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여 승천하였음을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사실로서 믿는다.
셋째, 유대교는 오로지 유대인만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받은 특별한 민족임을 전제한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동등하지 않다는 말이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에서는 모든 인간들이 똑같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따라서 그들 사이에는 형제와 같은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에 있어서의 평등사상, 즉 모든 인간이 똑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생각은 기독교의 사랑정신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같이 아버지로 갖고 있는 형제ㆍ자매들의 관계에 있으므로, 남들의 고통과 즐거움을 나의 고통과 즐거움으로 삼아야 하며, 나를 아끼듯이 남을 아껴야 한다. 이와 같은 희생적인 아낌과 위함의 마음 혹은 행위가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이다.
이와 같은 도덕적인 차원이 있고, 그것이 중요하면서도 기독교가 그냥 하나의 윤리규범을 넘어서 종교로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천당에 대한 믿음, 이 세상과는 전적으로 다른 세계가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곳에서의 삶만이 참되고 영원한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 세계 아닌 다른 세계, 영적인 세계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현재 우리의 삶은 죽음을 초월하여 영생할 수 있는 천당에 가기 위한 준비이며, 시련에 불과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사건, 상황, 우리들의 행위는 앞으로 가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천당에 비추어서만 참된 의미를 갖는다.
세계적 종교들 가운데에 타계(他界)의 존재를 확실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에 의해서 뚜렷해진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가르침이다.
② 가톨릭과 개신교의 다른 점
그러면 구교(가톨릭)와 신교(개신교)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물론 거기에는 교의상ㆍ제도상 여러 가지 다른 점이 많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만 몇 가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가톨릭에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최후의 만찬 마지막 기도에서 교회의 신비를 이해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듯이, 교회는 성삼위 사랑의 지속적인 현현이며, 교회의 목적도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성화시키고, 성삼위 사랑의 친교 안에 인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계제도, 즉 교황ㆍ주교ㆍ사제ㆍ평신도를 갖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며, 교회의 존재 이유도 그리스도가 교회에 맡긴 임무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기독교 개혁과 더불어 가톨릭교회에서 이탈하면서 당시의 교회에 있었던 여러 가지의 폐단과 함께 교회와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고, 참된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으로 맺어진 신자들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들에게도 개신교회라는 조직이 있고, 세례와 견진, 성찬과 같은 의식은 인정하지만, 교회조직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에 의해서 인간들의 의지로 만들어진 하나의 조직이나 제도일 뿐이라고 하였다. 개신교에서는 교회의 권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나 성서 해석에 관하여 의문이 생겼을 때, 그 해석은 각자의 양심에만 맡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 가톨릭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여 완성된 교리를 근간으로 삼았는데, 그 핵심은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으로부터 의지의 자유와 함께 선을 택하고 악을 버릴 힘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는 이 선택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사람은 신의 은총을 사람에게 전달하는 불가결의 수단인 성사(聖事)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기독교 개혁가들은 바울의 서간(書簡)에 입각한 성(聖)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에 입각하여, 인간의 본성은 완전히 사악한 것이며, 선행을 할 수가 없고, 사람은 완전히 신에게 예속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죄의 이론, 인간의 완전한 타락, 의지의 예속성 등에 바탕을 둔 보다 원초적인 기독교로의 귀환을 주장하여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교리나 의식을 반대하였다.
셋째, 가톨릭에서는 인간이 죄사함을 받으려면 먼저 사제에게 고해성사(告解聖事)를 하여야 하고, 사제가 하나님께 대신 용서를 빌어야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가 있으며,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에도 응답해 주신다고 주장하였다.
넷째,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가톨릭에서는 하나님을 믿고(영세를 받고) 선행을 하면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루터는 선행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며, 인간은 신의 은총을 통해서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죄 많은 인간은 자신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사랑에 의해서 의로워진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칼뱅은 인간의 구제 여부는 전지전능한 신의 자의에 의하여 미리 예정되어 있으며, 어떠한 인간행위로도 그것을 변경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도들이 현세의 생활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신은 선택받은 자에게 올바르게 살아갈 의욕을 심어 주었다. 왜냐하면 그는 신이 자기의 뜻을 실현시킬 지상에서의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택받은 자는 현세에서 물러나 조용히 신의 은총을 즐길 것이 아니라 신의 뜻을 완수하기 위한 성도로서 자기 자신과 이 세상 안에 있는 죄악과 싸워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성도들은 스스로의 구제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세속적인 직업에 근면하게 종사해야 하며, 동시에 일상생활을 합리적으로 조직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교리는 당시 경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중산계층의 호응을 받게 되어 근대적 직업관과 생활윤리의 형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③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다른 점
기독교교리의 뿌리를 유대교에서 찾을 수 있다면 이슬람교는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그 교리적 근거를 발견한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궁극적으로 다 같은 바탕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슬람교는 유대교와 기독교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유일절대자(唯一絶對者)로서의 인격적 신을 믿음으로써 시작된다. 또한 이슬람교는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왕국이 있음을 믿는다. 이런 점에서 이슬람교는 유대교보다는 기독교에 더 가깝다. 그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는 유대교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개념 속에 내포되어 있는 배타성, 독선성을 배척한다. 하나님 앞에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며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마호메트의 가르침,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상기만 하면 죽어서 하나님의 왕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의 보편성, 모든 인간의 평등함을 강조하는 점에서 이슬람교는 기독교와 같다.
그러나 이슬람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구현, 인류의 구세주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는 여러 예언자 가운데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슬람교가 이번에는 기독교보다 유대교에 가깝다. 이슬람교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한 마디로 말해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같이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고 전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이 위의 두 종교에서는 참된 계시를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짜 계시, 참된 계시는 오로지 예언자 마호메트를 통해서만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호메트는 ‘예언자의 봉인(the seal of prophets)’을 뜻하게 된다. 마호메트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전달하는 예언자들 중의 하나이지만 그 뜻을 결정적으로 전달하는 마지막 예언자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마호메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절대적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슬람교유대교의 기본적 텍스트인『모세오경(모세五經)』이나 기독교의 핵심적 텍스트인『신약성서(新約聖書)』를 정말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가르침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텍스트들이 하나님의 뜻을 다소는 보여주지만 그 뜻이 순수한 상태로 전달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뜻은 마호메트에게 계시된『코란(Koran)』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코란이라는 말은 ‘원래의 참된’ 것임을 뜻한다. 오로지『코란경』만이 하나님의 원래적 뜻을 담고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이슬람교도들은 오로지 그들 자신만이 절대적 진리를 전달받고 있다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