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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삶을 부조한 조각 |
루신묘 앞의 동상, 뒤편 우산 쓴 이가 있는 곳이 높이 4M정도의 노신묘이다. |
의학도에게 주어진 명예와 부귀를 내던지고 문학을 통해 중국인민들의 무지를 바꾸고자 한 루쉰! 혼을 개조하지 않고서는 중국 미래에 희망이 없다고 고뇌했던 루쉰은 오늘날 중국사회의 모순을 보며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빈부의 차가 매우 심한 나라. 상위 1~2%의 인구인 300만 명의 부유함이 한국의 재벌그룹 규모라는 나라. 중화사상을 중심으로 한족의 정체성은 강화하고 있으나, 주변 소수민족은 아직도 오랑캐라고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의심스런 정책을 취하는 나라 아닌가? 동북공정으로 조선족의 문화적 기반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고, 서북공정으로 티벳족의 라마불교 문화와 신장족의 이슬람 문화와 분리 독립의지를 등을 무자비하게 눌러대려는 나라. 그것이 비록 경제적, 영토적인 지배논리가 우선이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노신이 생각하는 민족혼은 자칫 닫힌 민족주의로 변질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 ‘닫힌 민족주의’는 다른 문화를 지닌 소수민족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 시행의 이념적 무기로 돌변할 수 있기에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그래도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만난 중국시민들의 일상은 참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평일 오후인데도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이 모여서 나무그늘 아래서 카드놀이, 장기, 배드민턴, 우슈, 기계체조, 뱃놀이 등을 하며 휴식을 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시민의 일상적인 자유는 자본주의 나라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활기와 여유가 있어 보여 좋았다.
아쉬운 것은 근처에 루쉰이 기거한 옛집이 있다는 것을 카탈로그를 통해 여행 후에야 알았기에 직접 그 집을 찾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들은 나이 45세에 자기 나이보다 14살이나 차이가 나는 북경여자사범대학 여학생 쉬광핑(徐光平?)이라는 학생을 학생운동 지원 때문에 만나 사랑으로까지 이어진 부부였다. 함께 중국의 미래와 혁명을 논의하고 문학을 논하고 불꽃같은 연애를 거쳐 결국에는 둘째 아내이기는 하지만 가정을 꾸려 나간 그들의 삶의 흔적을 살펴보고 싶었다. 장개석에게 휘둘리는 깡패무리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가정을 지켜나가고, 공식적인 자리에도 필요하면 아내를 꼭 참석시키고 사진기록 함께 남기는 동지적인 사랑을 보여준 루쉰. 중국혁명 관련 일에 시달려 글 쓸 시간이 없는 혁명가의 삶이였기에 늦은 밤 칭얼대는 아이를 재워두고 애기가 보채는 사이 사이에 글을 썼다는 성실한 생활인의 모습도 함께 지녔던 인간 루쉰의 삶의 모습을 느껴보고 싶어 아쉬움이 약간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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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이 쓴 글씨 ‘민족혼’, 문학을 통해 평생을 추구한 정신! |
루쉰의 책으로 장식한 2층 홀에서 기념촬영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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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공원 중앙의 호수, 뱃놀이 하는 시민의 모습이 한가롭다 |
공원에서 체력단련을 하는 시민들 |
3.와탄(外灘)의 동방명주탑과 황포나루
-수탈당한 역사의 아픔과 자부심이 드러나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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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탄(外灘) 지구에 있는 동방명주탑(東方明珠塔) |
<그림5> 황포나루 유람선에서 바라본 와탄(外灘)의 고층건물들 |
우리 일행은 와탄(外灘) 지구로 갔다. 이곳은 상하이 항구인 황포강(黃浦江) 동쪽에 있는 땅인데 동방명주탑(東方明珠塔)을 구경하기 위해서이다. 중국이 상하이를 인수한 다음에 개방경제의 시범구역으로 조성한 와탄(外灘)지구에서 이 탑은 가장 높은 층수의 건물이었다고 한다. 이제 그 주변 건물들은 동방명주탑보다 더 높은 건물이 즐비하다. 그런데도 이곳의 모든 건물들은 네모형 위주의 단순한 디자인을 한 곳은 거의 없다. 건물마다 모두 특색을 살려 다양한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건물을 초현대적인 형식의 새건물만 배치하지 않은 점도 이 도시 번화가의 아름다움이었다. 영국 식민지 시절 때에 지어진 듯한 고풍창연한 건물들이 도심 주요교통로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런 곳이 특히 성당이나 인민문화회관 같은 공공건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나는 그들의 식견있는 문화의식과 문화행정에 칭찬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건물들도 경제성과 실용적인 공간이용이라는 명분에 밀려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스카이 라인은 매우 불규칙적이어서 오히려 시각적으로 불편한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그래도 고도성장을 추구하고 있는 중국의 현재 경제상황을 보여주는 건축구조물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는 중국인들의 자긍심을 심어주는 상징물이라는 생각도 들어 이해할 만하였다. 그런 까닭에 중국인들이 동방명주탑에 올라가 상하이 시내를 내려다 보는 행위는 단순히 높은 곳에서 승경을 감상하는 유람 행위에 그치고 않고, 일취월장 성장하는 중국 경제를 온몸으로 느끼고 찬양하는 일종의 성지순례지 참배 의식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저러한 생각에 잠겨 있다보니 동방명주탑 아래 도착하였다. 이 건물은 하도 건물 높이가 높고 내방객들은 많다보니 엘리베이터로 60층까지 오르는데 100위안(1만 6천원)을 내야 한다고 한다. 그 이상 층은 160위안까지 내야 한다고 하여 그냥 포기하고, 그 아래 있는 햄버거집에서 베이컨 햄 빵 하나씩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하지만 그 빵값도 50위안 씩 하고보니 참으로 높은 관광지 물가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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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와탄(外灘)을 향해 가는 중에 본 옛성당과 고층건물의 대비 |
<그림6> 와탄(外灘)의 반대편 강언덕의 고색창연한 건물들과 시계탑위의 오성홍기 |
푸동의 반대편 황포 강언덕에는 영국제국 시절부터 해운과 금융기관의 사무실로 썼을 듯한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이 건물들은 오늘날도 거의 비슷한 용도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번성한 항구도시를 유지하고 있는 까닭은 지난 시절에는 영국의 자본과 상품의 동양침략 전진기지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였지만, 오늘날에도 활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입지조건의 장점이라 할 수 있겠다. 항구와 운하의 기능을 함께 할 수 있는 곳인데다가 운하 안쪽에는 몇 억의 중국 인구들의 삶에 필요한 여러 화물을 안정적으로 실어 나를 수 있는 장강?이 이어지고 있으니 참으로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항구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까닭에 2010년 세계해양 엑스포를 개최하는 장소로 낙점되기에 충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국의 여수가 이런 도시와 상대하여 유치경쟁을 열심히 하였지만 역부족인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도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이처럼 훌륭한 자연조건을 갖춘 도시를 100여년이 넘게 영국에게 할양해주고 경제적인 침탈을 당하면서 살아야 했던 중국인들의 아픔은 얼마나 컸을 것이며, 그런 아픔을 감내하면서도 결국은 이 땅을 되돌려 받아 자신들의 영토로 회복하여 옛명성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는 중국인들의 자부심을 얼마나 클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이 건물들의 꼭대기에서 저녁 무렵의 황금빛 노을에 물들어가며 휘날리고 있는 오성홍기와 붉은 별의 반짝임은 예사로운 깃발과 장식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그 깃발과 별 장식은 아편전쟁 이래 피로 물들여 온 중국인들의 수탈의 역사를 반추시키는 경고의 메시지처럼 읽혀지는 한편,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서 눈부시게 빛나는 존재로 성장해 나가고 있는 중국의 현재와 미래를 상징하는 역동성처럼 느껴지는 깃발이요, 고난의 역사를 이겨낸 그들의 자부심 가득한 가슴에 수여한 훈장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4. 북경오리구이 전문점「全聚德」- 성공의 비결과 교훈을 알려주는 집
유람선에서 내려 상하이 런민광장 근처의 북경오리구이 전문점인「全聚德」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이곳은 상해 최고급 레스토랑인데 입구에 스스로 ‘천하제일루’라고 하는 광고판을 장식해 두었고 내부 꾸밈새도 매우 화려하고 넓고 쾌적한 곳이었다. 중국에서 처음 먹어보는 음식인지라 기대감과 호기심도 많이 있었고, 무엇보다 많이 걷고 움직이다보니 배가 무척 고파서 무엇이든지 다 맛있을 것 같았다. 오리구이와 볶음밥, 칭따오 삐주(청도 맥주)를 시켜서 든든하게 먹었다. 오리구이는 기름에 튀겨서 주로 겉껍질만 벗겨주는데 바싹거리며 씹히는 맛과 양념으로 배어든 오향장이 잘 배어있어서 약간 기름지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이어서 좋았다. 그래도 한국의 오리구이처럼 속살도 먹고 뼈까지 푹 고아 녹두죽까지 먹는 푸짐함이 없어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도 칭따오 삐주와 어우러져 상하이의 정취를 즐기며 정담을 나누다 보니 마음도 푸근하고 즐거웠다.
이때 계산대 뒤편에 족자가 달려 있는 게 보였는데 그것은 바로 이집의 경영방침인 듯하였다. 그 내용에서 배울 바가 많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全聚德」라는 글자를 운자(韻字) 삼아 쓴 삼행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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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7> 북경오리구이 전문점 全聚德의 경영방침 |
중국인들은 표현에는 약간 과장이 심하다는 평을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이것마저도 하나의 ‘뻥’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영 방침을 손님들에게 대서특필하여 알린다는 것은 현재 이 가게의 경영상황을 자랑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앞으로 지향해 나갈 지표로 해석할 수도 있다. 어느 입장에서 풀이해 보든 간에 이 족자 속의 12자에는 철저한 장인정신이 담겨있으니 가히 배울 바가 충분한 글귀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흡족한 마음으로 문을 나섰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든 간에 위와 같은 정신을 자신의 일 속에 반영하고 실천하면 바람직한 성과로 나타나지 않을까 한다. 우리 교사들도 이 말을 학교 근무 지침에 적용하면 학생들이 매우 행복해 하리라. ‘000 교사(학교)는 모든 측면에서 실력과 인격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으니, 학생들에게 부끄럽거나 욕먹을 일이 없다. 000 교사(학교)는 모든 수준의 학생이 명성을 듣고 찾아와 모여 있으니(있으나) 그 명성과 수업의 활기가 흩어지지 아니한다. 000 교사(학교)의 교육 열의와 사랑의 정신은 학생들에게 어떤 상황에도 인자한 마음으로 대하니 가장 최고의 수준이라 평가받을 만하다.’
5.상하이역-자본주의 경제 도입의 빛과 그늘이 공존하는 광장
밤 11시에 황산행 기차를 타기 위해서 상하이역 광장으로 나갔다. 대도시답게 늦은 밤에도 인파가 수천 명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고, 또 한켠에서는 여행짐보따리를 광장바닥에 부려놓고 앉거나 눕거나 한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고층건물 옥상 광고 TV에서는 온갖 영상 광고들이 쏟아져 내려온다. 눈부신 조명등 불빛과 어우러져 이 도시는 서울의 한복판과 구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활기가 넘친다. 나도 광장 바닥에 배낭을 부려놓고 짐에 기대어 광장의 풍경을 음미한다.
구경꾼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는 것은 마음에 여유를 주는 한편 객관화할 수 있는 계기를 주므로 소중하다. 옥상 광고 TV에서는 특히 올림픽을 앞두고 그와 관련된 이미지와 분위기가 배어든 장면들이 연달아 쏟아져 내린다. 특히 세계문화의 중심이라는 이미지가 많이 송출되고 있다. 이번 올림픽을 통해 중화사상의 진가와 자부심을 과시하고 싶은 중국인들의 소망이 잘 읽혀지는 장면들이었다. 예를 들면 중국제 000음료를 전세계 사람들이 먹고 나른한 오후의 일상에서 깨어나 활기차게 일을 하기 시작한다는 내용이 보였다.
하지만 그 광고판 아래에는 노숙자들의 모습도 몇몇 보인다. 비닐포대에 온갖 옷가지와 생필품을 담아 배낭처럼 메고 떠돌아 다니다가 광장바닥에 부려놓고 큰 대자로 뻗어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고단한 삶이 보인다. 땀과 때에 찌들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머리통과 얼굴에 패인 깊고 깊은 주름, 새까맣게 햇볕에 그을려 몸에 걸친 쉰 냄새가 풀풀나는 옷, 그 옷 사이로 삐져나온 팔 다리에는 군데군데 헐거나 찢긴 상흔과 모기에 물려 오돌토돌하게 부어오른 자리도 눈에 띄인다.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인민이 없는 사회를 만들고자 몇 만리 옌안 장정이라는 죽음의 행진을 거쳐 공산화를 성취하였던 마오쩌둥(毛澤東)과 등샤오핑(鄧小平)의 이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 혁명이 될 수 밖에 없단 말인가? 현재 중국은 등샤오핑(鄧小平)이 ‘선부후균’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경제개방을 하여, 중국인 상위 1~2%에 해당하는 이가 우리나라 재벌 그룹 규모의 돈을 벌고 있고, 그 숫자는 3,000만명 정도로 추산한다고 하니 그 경제 규모나 자본주의로 바뀌어 가는 정도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법하다. 하지만 중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의 이면에는 ‘선부후균’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가야 할 것인가 하는 분배정의 정책의 해법이 커다란 숙제로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나는 이런 저런 생각에 깊이 잠겨 누워 있는데 이번 여행의 원정대장격인 이선생님은 광주 주변을 빙빙 돌아다니며 안절부절이다. 왜냐하면 이번 여행에 도움을 준 조선족 동포 화화 공자(和和 公子)를 만나 기차표와 항조우의 서호에서 공연하는 ‘인상서호(인상서호)’ 입장권을 전달받기 위해서이다. 화화 공자(和和 公子)는 정식 여행사를 운영하지는 않고 다음 누리집(사이트)에 방(블로그)을 개설하여 중국여행 정보를 알려주고 자신이 현지 여행가이드도 하는 개인 사업자이다. 매우 정확하고 상세한 여행정보와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양심적이고 성실한 여행 중개업을 통해 많은 배낭 여행자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약속 시간이 5분이 지나도 안 나타나 오만 가지 불길한 생각이 떠돌아 안절부절한 모양이다.
화화 공자(和和 公子)는 잠시 후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약간 거친 숨결인 채로 나타났다. “죄송합니다. 휴가 기간이어서 그런지 택시가 많이 밀리는군요. 걱정하셨지오?” 그는 내 키만한 자그마한 몸매에 갸름한 얼굴꼴에 눈이 좀 작고 기다랗지만 총기와 선한 분위기가 배어나는 청년이었다. 중국 심양에서 태어나 살다가 현재 항조우에 살며 상하이와 황산, 항조우, 소주 등을 주로 오가며 한국인들의 여행 가이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한다. 한국인들의 여행이 잦아지자 그 안내 업무로 제법 고소득을 누리는 상황이라 한다. 한국인들이 잘 살아야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상황이니, 이들이 조선족으로서 긍지를 지니고 살려면 남한과 북한 가릴 것 없이 모두 잘 살아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황산행 기차-다양한 중국인을 만난 인생의 축소판
밤 11시에 기차는 떠났다. 황산 종점까지는 총 8시간을 달려야 한다. 아침 10시경에 도착해야 한다. 중국기차는 너무 먼 거리를 달려야 하므로 아래 <그림9>와 같이 내부에는 거의 침대차 구조였다. 상등석은 객차가 따로 배치되어 있고, 그 안에 들어서면 한 켠에 긴 복도가 있고, 맞은 편에 칸막이 문이 있고 그 안에 2층 침대가 두 개 놓여 있다. 일반석의 경우에는 한 칸에 3층 침대가 두 개 들어가 있고 칸막이 문은 없다. 따라서 밤새 차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내는 소음에 시달려야 하고, 짐을 분실할까 봐 전전긍긍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그런 침대표도 못 구한 사람들은 복도에 배치된 간이의자에 앉거나, 그도 없는 사람은 밤새 서서 가거나 바닥에 앉아서 가야 한다. 한 기차 안에도 표를 구할 돈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등급처럼 삶의 질이 구분되는 현실이 조금은 맘이 편치 않다. 그래도 다행히 우리는 상등석 표를 구해 칸막이 문을 잠가 놓고 에어컨이 춥게 느껴질 정도로 쾌적한 조건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잠결에 느끼는 기차의 진동에 이상이 있었다. 계속 달려야 할 기차가 멈춰 서 있는 간격이 너무 길다는 느낌이었다. 새벽 여섯 시경에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밤새 기차는 1/3지점도 지나지 못했다. 이유도 알려 주지 않고 거의 정차역마다 20분 이상 씩 서 있었고 어떤 곳에서는 한 시간 이상 멈춰 서 있었단다. 기차가 고장났다는 말도 있고, 선로가 하나 뿐인 구간이 많다 보니 베이징 올림픽으로 향해 가는 특급 기차들의 선로 확보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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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9> 중국 침대기차 일반석 내부의 구조 |
<그림10> 난징(南京)역에서 중국아가씨들과 기념촬영. 내 모습은 면도도 못한데다, 옷깃도 구부러지고 꼬질함이 극치를 달린다. |
피해주고 있는 상황이라는 말도 있으나 확실한 정보는 없다. 도착 시간도 확언할 수 없단다. 상황에 따라서는 20시간도 넘게 시간이 걸릴 줄 모른다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 너무도 기가 막힌 것은 중국인들도 마찬 가지인가 보다. 차장과 공안에게 항의를 하느라 열차간이 시끌벅적하다. 특히 우리가 머문 기차 간은 숙면을 위해 공안과 차장이 복도에서 지키고 있는 공간이었는데 오히려 그런 까닭에 항의하는 이들의 거센 4성조음이 높낮이가 분명하게 느껴지게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교통행정이었다. 사회주의국가이므로 인민의 행복을 위해 복무한다는 근본정신을 모든 분야에 적용한다면 약간의 연착은 있을 수 있어도 이처럼 몇 시간 씩 늦어지는 상황은 도저히 발생해서는 안되는 중대한 사고이므로 엄중한 문책이 필요한 사항이라고 느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차장이 사과방송을 하였다. 차에 고장이 있어 수리를 하느라 시간이 늦어졌다는 요지라고 한다. 하지만 그 후에도 차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아침이 되어 8시가 넘어가지만 차내에는 식당칸도 없고, 김밥이나 만두장사가 지나가지도 않는다. 다만 기차 내 소속 상인의 끌차에는 과자나 음료수, 소시지 몇 개가 있을 뿐이 쫄쫄 굶을 밖에 도리가 없다. 할 수 없이 배낭에 넣어둔 비스킷과 초코파이 하나 씩을 꺼내 물 한 모금에 넘길 수 밖에. 조금이라도 먹고 나니 약간 기운이 돈다.
기차가 역마다 오래 머물고 있으니 할 수 없이 시간을 때우는 방법을 찾아 무료함을 달래야 할 것 같았다 10시에 기차는 목적지의 1/2지점에 불과한 난징(南京)에 도착하였다. 정선생님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러 플랫폼에 나갔다. 난징(南京)대조약에 따라 식민지로 전락하는 시발점이 되었던 곳. 일본군의 난징(南京)대학살 때문에 최소 50만명의 양민이 학살을 당했던 곳. 그 잔혹한 외세의 군병들이 흉물스런 무기를 싣고 밀려오고 밀려갔을 곳. 그 슬픔의 역사를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되어야 할 곳이라는 마음을 새기려 기념촬영을 하였다. 그런데 잠시후 중국 아가씨 두 명이 지나가니 옆의 정선생님이 함께 사진촬영하자고 하니 그들이 순순히 응한다. <그림 10>과 같이 의아해 하며 얼떨결에 사진을 찍은 내 모습이 정말 웃기다. 내가 아가씨들의 날씬한 허리에 손을 얹고 가까이 하는 자세를 하려니 매끈하고 탄력있는 허리 느낌이 갑자기 온몸으로 쩌르르 전해와 머리에서 발끝까지 확 퍼진다. 순간 아가씨들이 기분 나쁘게 생각할까 봐서 내가 어색해서 손을 빼자, 아가씨들도 내 마음을 느꼈는지 그들이 먼저 양쪽에서 가슴을 내 어깨에 밀어붙이며 친근한 자세로 사진 자세를 취한다. 정선생님과 번갈아 사진을 찍고 인사를 하자 그들은 총총히 떠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미 기차 안에서 부탁을 해 두었다고 한다. ‘허허허허! 역시 그렇게 사전정지 작업을 해 두었군!’ 하면서도 정선생님의 친화력에 대해서는 참으로 부럽고 존경할 만하다.
기차 안에 돌아와 이제는 다른 열차칸을 구경 다니기로 하였다. 우리는 밤새 쾌적하지만 폐쇄된 공간에서 지냈기에 중국인들의 여행하는 일상을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로 젊은 남녀들은 입석이나 간이의자석에서 이용하고 있었고, 카드놀이를 이곳 저곳에서 많이 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두 아들과 함께 여행하는 양첸과 이안진 부부를 만나 필담과 짧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양첸씨는 미국유학을 다녀와 반도체산업에 기사로 근무하고 있고 우리나라 군산의 삼성전자 공장 시찰도 하고 간 적이 있다며 친근감을 보였다. 이 분야에서 한국에게는 배울 바가 많이 있다고 평가하는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부인 이안진씨는 주부인데 한국의 드라마 <대장금>과 <이산>을 감명깊게 보았다며 말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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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첸과 이안진 부부와 기차 안에서 기념촬영 |
이 두 사람과 헤어지고 난 다음에 다시 우리 방이 있는 객실로 왔다. 옆방 아줌마들이 데리고 온 중국 소년 소년 다섯 살 박이 녀석들이 복도에서 노는 모습이 귀여서 정선생님이 쵸코파이를 쥐어준다. 자연스럽게 친해져 옆방 아줌마 왕린세이(王凌雪), 류세이홍(留雪紅)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남편들은 시안(西安)에서 철강공장에 근무하고 이웃집 친구와 시간을 내어서 황산으로 여행 중이란다. 기차로 이동하는 시간을 따지면 거의 하루 꼬박 움직이는 거리이다 보니 그 여인네들의 용기와 의지가 참으로 대단해 보였다. 정선생님이 한자로 필담을 나누며 의사소통이 약간 더디었지만 호기심있게 서로의 여행 상황을 물었다.
왕린세이(王凌雪)가 묻기를 “왜 부인들과 함께 여행을 하지 않는가? 부인과 사이가 안 좋은 것 아닌가?” 농담처럼 웃으며 묻는 말이지만 속이 조금 뜨끔하였다. 우리는 함께 오지 못한 미안함을 웃음에 담아 답했다. “인연이 안맞아 같이 못온 것 뿐이다.” 그 밖에 한국의 TV사극 대장금에 대한 호감을 나타내어 한류문화의 열풍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밖에 “한국 아가씨가 더 예쁘냐? 중국아가씨가 더 예쁘냐?”라고 묻자, “아가씨들은 모두 예쁘다.”라고 답한 게 기억난다. “두 부인은 아가씨들보다 더 예쁘다.”라고 하자 호호 웃으며 소녀들처럼 활짝 웃으며 좋아 하였다. 사실 두 부인 중 왕린세이(王凌雪)는 눈이 서글서글 크고 새까맣고 초롱초롱하여서 매우 지혜롭게 보였고 미소도 매우 환하여 대면하는 이를 편하게 해주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류세이홍(留雪紅)은 약간 통통한 얼굴형에 피부가 백설처럼 희고 고운 느낌이었으며 약간 내성적인 듯 말수는 적었고 거의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두 부인은 영어를 전혀 못하는 상태여서 필담으로는 한계가 있는지라 조금 미안하고 답답하였다. 그들도 “우리가 조금 중국어를 잘 할 수 있다면 여행을 좀더 즐겁게 할 수 있을터인데...” 라며 아쉬워 하였다. 이국 여인네들의 방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기도 머쓱한 면도 있어서 만남을 기념하는 한자엽서를 써 주고 촬영을 하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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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생님이 중국부인에게 준 메모 한글번역 부분 |
또한 ‘만만디’ 정신이 중국인들의 특징이라 하나, 자신의 이해와 직결되면 중국인들도 화를 무척 많이 내는 모습을 보게 된 점도 좋았다. 기차가 오던 도중, 중간의 어느 작은 역에서 너무 늦은 기차여행으로 울화통이 터진 한 중국 청년이 기차바퀴 앞을 가로막고 철로에 누워버려 공안이 그를 설득시키느라 20여 분 늦어진 사건을 보았기 때문이다. 약속시간보다 8시간이 늦어서 경제적 정신적 손실이 너무 심하다며 항의를 한 것이다.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이용하여 원색적인 항의를 하는 심정을 이해할 듯 하면서도, 그런 손님을 즉시 강제조치를 하지 않고 설득하여 스스로 일어나게 하는 치안행정에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하나라며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7. 중국의 민속촌 거리, 툰시 노제(路街)
툰시역에서 노제(路街)까지는 인력거를 이용하였다. 자전거를 개조하여 만든 3륜차인데, 중국에서는 중소 도시에서 많이 애용하는 교통편이었다. 한 대에 2인이 탈 수 있다. 2명의 성인과 그들이 멘 짐보따리까지 가득 싣고 인력거꾼은 오직 두 다리의 힘만으로 달려 나간다. 달리기 속도보다는 늦고 걷는 속도보다는 매우 빠르다. 30대 중반으로 보이고 키는 나보다 더 작은 인력거꾼. 4위안(팁 포함해 5원=800원)의 수입을 위해 이 사람은 섭씨 33도가 넘는 폭염 속을 온몸에 비오는 듯한 땀을 흘리며 페달을 돌리고 있다. 아무리 돈만 주면 안되는 게 없는 세상이라지만 이국적인 풍경 속에 거드름을 피며 희희낙락하면서 속편하게 타기에는 많이 미안스럽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인력거꾼은 우리를 목적지인 노제(路街)로 안 보내주고 어느 규모가 큰 중국음식점 앞에 데려와 멈춰있다. 먼길 여행하여 기차에서 내리니 알아서 점심을 사먹고 가면 어떻겠냐고 일종의 끼워팔기 상품(패키지)으로 이곳에 오는 이들을 이런 식으로 모셔와 소개해 주고 소개비를 1위안이라도 챙겨받는 것 같았다. 우리가 황당해 하며 거절하자 그들은 태연히 인력거를 돌려 페달을 밟는다. 그 상술도 놀랍거니와 1~2위안을 벌기 위해 2KM 가까운 거리를 다시 돌아가며 다시 비지땀을 흘려야 하는 그들의 직업정신이 참으로 무서울 정도로 존경스러웠고, 한편으로 참 안타까워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 돈 160원(1위안)이라도 더 벌기 위해 땀 흘려 일하고 한국에 나와 일하고 있는 중국인들이나 조선족들의 치열한 삶의 현실도 함께 떠올라 마음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살짝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노제(路街)에 도착하여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1위안을 더 주니 그들은 “쉐쉐”하며 활짝 웃는다.
노제(路街)는 우리나라의 민속촌 같은 곳이니 시가지 중심의 옛 거리를 재개발하지 않고 기와집이 즐비한 상가골목을 그대로 남겨두고 각종 특산물을 판다. 주로 차와 과자, 기념품이 될만한 나무공예품, 올돌조각과 도장, 향토음식, 서화 등을 파는 곳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돌에 대전체(大篆體)와 소전체(小篆體)로 새긴 도장을 하나 씩 새겼다. 평소 책을 사고 나서 도장을 멋들어지게 찍어두고 싶은 욕망이 자꾸 생겼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도장 하나 값이 3-4만원 씩 하고, 돌에다 새길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 새길 기회도 거의 없다. 또한 낭비하는 것은 딱 질색으로 여기는 내 성격이라 쉽게 마음을 못냈는데 40위안(6,400원)에 새기는 기쁨과 호사를 누리게 되어 참 뜻 깊었다. 다른 분은 글씨 짜임새가 조금 더 균형미가 있으면서도 부드럽고 여유가 있어 보였는데 내 도장 서체는 약간 균제미가 부족하여 아쉬운 맛이 있으나 약간 투박하면서도 어여쁨이 배어있는 ‘고졸(古拙)한 멋’도 있는 것 같아 좋았다. 도장의 균제미가 부족한 아쉬움을 채우려면 내가 앞으로 도장을 찍을 때마다 마음가짐을 가지런히 해야 하리라. 책을 사고 도장을 찍고, 중요한 계약에 찍을 때에도 늘 삼가는 마음으로 오히려 이 도장은 의미있고 멋진 쓰임새가 되리라. 무엇보다 이 도장을 새긴 청년이 참으로 눈빛이 맑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이라 마음에 들었다. 아! 진짜 잊어서는 안될 삽화가 하나 있다. 이곳에서 도장 파는데에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다른 곳을 30분 정도 구경하려고 이곳에 가방을 맡기고 나가서 한참 걷다 보니 디지털 카메라를 잊어버린 것을 알았다. 이국에서 비싼 카메라를 잊어버린 것도 당황스럽지만, 무엇보다 그 안에 담긴 추억의 흔적들마저 모두 삭제되어 버린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하였다. 허둥지둥 그 집에 돌아가 말없이 내가 뭔가를 찾고 있자, 그 청년 씩 웃으며 “카메라···”하며 전해 준다. 그 선한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이내 돌아앉아 내 도장에 글자를 새겨넣고 있다. 그러니 이 돌 속에는 그 중국의 젊은이의 참 맑고 착하고 따뜻한 마음까지 담아 새겨져 있는 게 아니겠는가? 미안스런 것은 그 청년의 이름을 확인하지 못한 점이 후회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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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제(路街)의 모습 |
내 도장에 이름을 새기고 있는 중국청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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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편삼절>이란 고사에 나오는 대나무 책을 직접 볼 수 있어 신기했다. |
부채서화가 000씨, 시·서.예를 통합하여 문화상품으로 창출하는 분이다. |
8. 황산의 관문, 탕커우(湯口) 민박촌-성실한 여종업원들과 과시욕에 찬 한국인의 상술
숙박지인 탕커우(湯口)에서는 ‘한국관’이라는 민박집에 묵었다. 이 집은 3층 건물에 1층은 80석 정도의 식당이고, 2·3층은 숙소이다. 숙소는 모텔급으로 깨끗하고 더불침대가 2채 놓여있어 숙박비에 비해 만족스런 수준이다. 이곳에서 저녁을 푸짐히 먹다. 거의 하루 종일 변변히 먹은 게 없었는지라 돼지갈비에 밥을 2공기, 고등어찜, 라면, 칭따오 삐주 등을 먹어대니 이곳 종업원들은 ‘설마 선생님들이 작자들이 저렇게 굶주린 거지처럼 게걸스럽게 먹기야 할라구?’하는 눈빛으로 음식을 연신 날랐다. 그래도 우리는 포만감이 밀려오니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이곳은 도샤오닝이라는 아가씨 지배인 외에 한국어를 전공하는 중국 아르바이트 여대생 푸진(武瑾)을 비롯하여 10여명이 근무하는 중소기업이다. 종업원은 매우 친절하고 매우 성격도 밝다. 자유로운 듯 하면서도 근무기강이 확실해 보인다. 도샤오닝(都小玲)이라는 아가씨가 항상 노래를 흥얼거리며 구석구석 청소하며 솔선수범하였다. 얼굴은 한국의 어느 시골이나 산골 아가씨처럼 얼굴도 거무튀튀하고 눈도 빼꼼하고 몸매도 아담하다 못해 약간 메마른 아가씨인데 온몸에서 활기가 느껴진다. 어느 곳에서나 제 할 일을 스스로 챙겨하면서 기쁘게 일하는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도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한편 푸진(武瑾)이란 아가씨는 지저우 대학에서 한국어를 배우는데 한국어를 좀더 잘 배우기 위해 이곳에서 일한다고 한다. 한국어가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대접을 받고 있기에 한국어를 배우는 열풍이 젊은이들에게 많이 퍼져 있는 것 같았다. 한국어는 높임말 5단계가 매우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착실하게 발음을 따라 하는 모습이 성실한 학교생활의 모습을 상상하게 하는 차분한 아가씨였다.
다만 아쉬운 것은 한국인 사장님 한국의 유명인사와 찍은 사진을 홀벽에 그득히 달아놓은 것이 꼴불견이었다. 너무 과시욕만 앞선 사장이란 생각이 들었다. 음식은 3끼 모두 반찬의 변화가 거의 없었고, 음식도 한국음식의 깊은 맛을 느끼기 힘든 점이 아쉬웠다. 이국 여행자가 입맛이 떨어져 이집에 들렀을 때, 고향 어머니가 끓여주신 된장국처럼 깊고 푸근한 맛이 배어있는 밑반찬이 없는 것이다. 김치맛도 별로고 값도 비싼 편이다. 종류별로 추가할 때마다 20-30위안을 추가해야 하니 말이다. 따라서 이 집은 숙소로 간단히 이용하는 것이 좋은 집으로 스스로 범위를 좁혀나가고 있다는 씁쓸함이 느껴졌다. 한국인 사장은 홀벽에 사진을 가득 전시하는 것보다 여행객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음식을 챙기는 것이 더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한편으로는 그렇게 챙기지 않아도 손님이 많으니까 경영방식으로 그리 할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어쩌면 내가 너무 순진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상념도 지나갔다.
9.황산-중국에도 작은 금강산이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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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산 전도(여행 과정-줄 표시) |
황산 잉쿼송 주변에서 |
우리는 맨 앞자리에 나가 기다릴 것도 없이 표를 받고 옥병점으로 올라간다. 발 아래에는 금새 낭떠러지가 보이고, 그 아래 골짜기는 끝이 안 보인 정도로 깊고도 아득하다. 고소공포증이 심한 나는 잠깐 내려다 보다 현기증이 나서, 눈앞이 어질거리고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한다. 케이블카 안에 동승한 중국인 20대 후반의 청년이 있어 간단히 인사하자, 착한 웃음으로 응대한다. 환영한다고 인사를 하고나서 자신도 애인과 함께 이곳에 휴가를 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본사람들인 줄 알고 처음에는 좀 실어 한다는 얘기와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 하더라는 얘기를 한다. 경제성장만 내세우며 독재정치로 회귀하는 한국의 현실이 외국인들 보기에도 꼴 사나운가 보다. 외국인에게까지 우리나라 대통령 못났다는 소리 듣자 속이 많이 상했다. 귀국해서 골치 아프지만 한국의 정치 현실에 소시민의 처지에서라도 꾸준히 관심갖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뀌어 나가도록 관심을 갖고 살아가야 할 이유를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되었다.
옥병점에 도착한 후에 등등의 코스를 거쳐 하산하였다. 우리나라의 금강산과 분위기는 비슷하다. 그러나 한국의 금강산은 바위의 절벽의 기기묘묘함이 더욱 웅장하고 다양한 반면에 황산은 단일한 봉우리 몇 개가 솟아난 것은 아름다우나, 금강산 만물상처럼 계속 어깨동무하듯 이어지는 장관은 보이지 않았다. 중국인들이 왜 금강산을 천하제일 명산이라 여기며 평생에 한 번이라도 구경하고자 목이 메이게 소원하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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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의 명물 잉쿼송(迎客松) |
광명정상점 앞-뒤의 건물은 천문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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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의 독특한 풍경 <교자> 가마꾼 |
황산의 독특한 풍경 짐꾼- 바지지퍼가 열린 줄도 모르고 짐 옮기는데 몸의 중심을 잡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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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꼭대기에 각종 소원을 비는 자물쇠 뭉치 |
연인의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함께 묶은 자물쇠, 열쇠는 절벽 아래 던져 버린다. |
10.항조우(沆州)-물의 축복을 받은 아름다운 도시
3시 30분, 버스는 항조우를 향해 달려 6시 30분경 도착한다. 항조우는 도처에 물이 가득한 도시이다. 절강상의 성도인 이 도시는 외곽에서부터 아름다운 호수인 천0호가 드넓은 가슴을 열어 우리를 환영하고 있다. 00호는 저녁노을에 물들어 금빛으로 반짝이며 솟아오르는 수 천의 빛의 알갱이들이 세상이 온통의 빛의 축복으로 가득 찬 무릉도원처럼 느껴진다. 이 호수의 부드러움과 유장한 분위기를 이어가려는 듯 다리 모양도 아치모양이어서 매우 황홀한 느낌이다. 이 도시를 처음 찾은 여행자의 눈은 휘둥그레지며 차장에 이마를 맞대고 한참을 넋을 놓고 이 풍경 속으로 빨려든다.
잠시 후 보이기 시작하는 항조우(沆州)에는 드넓은 강물을 경계하여 전망이 시원하고 조경이 아름다운 강변에는 30층도 넘는 고층아파트 숲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게다가 아파트 지붕은 네모 반듯한 모양만 있는 것이 아니고 중국의 고풍스런 전통 전각처럼 처마를 장식으로 단 지붕도 많아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느낌을 준다. 노을을 허리에 걸치고 발갛게 물들어가는 아파트의 모습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기괴한 괴물공룡처럼 낯설게도 느껴진다. ‘저토록 새집처럼 위태롭게 드높은 둥지 속에서도 오늘 하루의 일상을 마무리하며, 어느 중국인 가족들도 쏼라쏼라 높낮이가 음악처럼 아름다운 중국어를 쏟아내며 아름다운 삶을 만끽하며 보람찬 내일을 꿈꾸며 평온한 밤의 안식을 맞이하겠지! 아름다운 자연과 더 높이 더 멀리 떨어져 멀리 풍경으로만 자연을 조망하는 범위가 넓을수록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여기며 사는 현대 도시인의 존재방식이란 얼마나 위태롭고도 쓸쓸한 욕망의 표출방식이란 말인가? 나뭇가지 꼭대기에 둥우리를 짓고 비바람을 피하는 조류들의 거처보다 더 행복하고 아늑하다고 자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국경을 가릴 것 없이 이 지구상에는 이다지도 많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런 반면 강변보다 훨씬 안쪽인 고속도로 왼쪽에 자리잡은 저층 아파트와 단독주택들은 밖에 덧칠한 페인트의 색깔마저도 거무주죽하고 게딲지처럼 크기가 작은 데 그런 집들은 더욱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이 그득그득 차창 밖으로 펼쳐져 있다. 저 곳에 사는 사람들의 소망도 좀더 크고 넓고 높은 층수의 아파트를 꿈꾸는 것은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이러저러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버스는 어느 새 항조우(沆州)종착점에 다다른다. 도착하자 마자 이곳에는 생존을 위한 치열한 전쟁으로 광장근처가 시끌벅적하다.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지도를 펼쳐 보이며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가를 짧은 영어로 연신 묻는 중국인 사내가 우리의 길을 막는다. 설명은 매우 친절하다. 하지만 그가 안내한 봉고차 운임은 두 배 이상의 바가지 요금인 40위안을 달란다. 우리는 다른 택시를 잡아 시호(西湖) 한켠에 자리잡은 악묘(樂墓)로 간다. 악묘(樂墓)는 남송 시대의 천자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우리나라의 종묘 쯤 되는 곳으로 주변은 명승 관광지인지라 낮이나 밤이나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저녁 어스름의 항조우(沆州)시민들은 도시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시호(西湖)를 공원 삼아 하느적거리는 걸음으로 산책을 하고 있다. 항조우(沆州)는 한낮에는 찌는 듯한 무더위와 높은 습도로 힘겨운 날씨이지만, 저물녘부터는 시호(西湖)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온 도시를 식혀주어 산책하는 즐거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게 하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호수 주변에 심어둔 연꽃들이 몇 만평 씩 무리지어 피어있어 환상적이다. 홍련과 백련이 적당히 섞혀있고 가로등의 조명은 은은하게 비취고, 연꽃은 사운대며 불어오는 바람결에 당송시대 미인들처럼 허리를 뒤채이며 향그러운 입김을 연신 토해낸다. 잔잔한 파도에 밀려오는 물결소리 또한 차르르 찰랑 촤르르르 간간히 들려온다. 이곳 출신의 서시라는 미인은 연꽃잎에서 춤을 출 정도로 날씬한 미인이었다 한다. 과연 그런 전설이 생길 만도 하게 연꽃이 참으로 풍성하게 피어있는 아름다운 호수였다. 어느 새 마음이 느긋해지고 하루 종일 몇 백 KM를 시달리며 밀려온 나의 몸은 어느덧 물가에 주저앉아 발이라도 담그며 쉬고 싶은 충동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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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에서 뱃놀이를 하며 |
백락천 시인과 서시미인을 떠올리다 |
하지만 오늘 저녁, 우리는 이곳에「인상서호(印象西湖)」라는 연극을 보러 왔기에 저녁 7시 30분까지 악묘앞 공연장에 들어가야 한다. 저녁도 먹어야 한다. 저녁은 여건이 좋지 않아 할 수 없이 햄버거로 때워야 한다. 미국자본 KFC에서 운영하는 매점이다. 닭고기로 만든 햄버거값이 무려 70위안이다. 중국의 보통 밥값 2배이다. ‘엠×할! 어디에서나 햄버거값은 내용물에 비해 턱없이 비싸다니깐! 알면서도 바쁘니까 꾸겨넣는 이 처량한 만찬이여!’ 그래도「인상서호(印象西湖)」를 본 감동이 하도 대단한 지라 용서할 만 하였다.
11.「인상서호(印象西湖)」- 예술가의 상상력과 국가자본의 환상적인 결합에 감동하다
서호를 배경으로 전해오는 중국의 전통설화인 백사전(白蛇傳)을 현대적으로 녹여 창작한 작품이며 총 5장으로 짜여있다. 내용은 상봉(相逢)-상애(相愛)-이별(離別)-추억(追憶)-인상(印象)의 순서이다. 서호에서 만난 두 연인이 만남의 기쁨과 헤어지는 슬픔을 표현한 작품이다. 관객들은 시작부분에서 서호의 넓고 고요한 호수를 자연스럽게 활용하면서도 물 위를 걸어다니도록 발목까지만 잠기도록 정밀하게 설계한 너비 300m가 넘는 수중무대, 그 무대 주변 200m 주변에서 배 수 십척을 실제 움직이며 그 위에 전각을 지어 조명까지 밝힌 세트의 정교함에 탄성을 지른다. 그러다가 극의 말미에서 20m가 넘는 거대한 크레인을 물속에 숨겼다가 폭포물을 쏟아내면서 하늘로 솟아오르게 하는 기상천외한 장치 등의 규모의 거대함과 상상력의 대담함에 관객들은 기가 질린다. 또한 등장인물만 해도 모두 300명이 넘는 집단춤과 수 천개의 등불을 활용한 춤, 하늘이 무너져내릴 듯 가슴에 쿵쾅거리며 다가오는 300개의 북춤소리와 현란한 조명, 잘 짜인 이야기 서사 구조가 관객의 눈길을 붙잡아 두었다. 여기에다가 배우들이 잘 절제된 춤 동작으로 사랑과 이별의 아픔을 온몸으로 표현하여 언어의 장벽에 갇히지 않고 감상할 수 있는 환상적인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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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여명의 배우가 물고기 모양의 등불을 들고, 물위에서 사랑의 만남을 표현한 장면 |
300여명이 새깃털부채를 들고, 물위에서 학의 비상을 표현한 장면 |
<붉은 수수밭>이란 영화와,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총감독으로 유명한 장리뭐가 연출한 작품이었다. 우리는 그의 명성을 믿었고 한국언론에서 극찬한 정보가 있었기에 한국돈 3만 5천이라는 거금을 들여 보기로 결정하였다. 가장 중국다운 문화상품이면서도, 이번 여름 아니면 쉽게 구경할 수 없는 까닭에, 이 작품을 보려고 올림픽 기간에 북경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엄청나게 몰려온다고 온다. 이날 밤만 해도 1,000여명의 관객이 입장했는데 그중의 절반이 넘는 관객이 서양인들이었다. 하룻밤에 4,000만원 가까이 되는 수입을 3개월 넘게 벌어들이는 국가적인 문화수출 산업장이었다. 상상력 하나로 외화를 다발로 벌어들이는 그들의 문화산업 운영능력과 정책적 지원, 배짱과 뚝심 등이 부러웠고, 상상력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공학적인 기술투자가 매우 부러웠다.
17.중국의 문화-배울 점과 경계할 점이 많은 나라
상하이에서는 이밖에도 풍범중학교라는 곳의 학교 견학, 상하이인민박물관, 예원 등의 관광명소도 살펴 보았으나 여기에서는 소개를 생략하기로 한다.
여행을 마치며 중국문화 가운데서 배울만한 것과 비판해야 할 점을 중심으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먼저 유형적 문물에서 배울 점이다. 첫째, 인간미가 있는 도로 설계를 한다는 점이다. 그 예로는 고속도로 분리대에 모두 사철푸른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중앙분리대 역할을 할 때 시각적으로 편안한 느낌이 들 수 있도록 한 배려라는 점에서 보기 좋았다. 이렇게 설치하려면 땅면적이 약간 늘어나고 도로 수용비도 늘어나겠지만 돈보다는 운전자에게 상쾌한 기운을 더해 주는 것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큰 가치가 있다고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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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 분리대에는 거의 나무를 심었다. 앞쪽 강철판 빔으로 방호판을 만듬 |
집집마다 지붕에 설치한 태양열 온수기 집열판 |
둘째, 환경보전 측면에서 많은 노력을 하는 점이다. 중국은 도시나 시골을 가릴 것 없이 태양열 에너지를 이용한 온수기를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태양전지판은 비싸서 설치를 못하는 것 같았지만 태양열 온수기는 거의 70~80%의 가정이 설치하여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지붕마다 온수기 집열장치가 즐비해 있었는데 이는 참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점 같았다. 한편으로는 중국인들이 이렇게라도 해도 석유에너지 고갈이 조금이라도 덜해지고, 지구온난화도 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여 안도감과 고마움도 느껴졌다.
또 다른 예로는 자전거와 오토바이에 거의 60% 이상이 전기축전지를 달아 운행한다는 점이었다. 소음과 매연이 없어서 출퇴근용으로 많이 쓰고 있었다. 한국의 경우, 자전거 전용도로도 많지 않아서 이용을 안 하는 이들이 많다고 하나, 더 큰 이유는 언덕길이 많아 자전거 이용이 불편해서라고 한다. 이런 한국의 지형에는 전기축전지를 이용한 자전거를 많이 보급시켜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상용화가 아직 안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고정관념이 너무 강해서일까? 예를 들면 자동차 타는 사람은 폼 나지만 자전거 타는 사람은 창피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국 지형에는 안 맞다고 지레 포기한 까닭일까? 내 생각에는 이런 원인과 함께 대기업이나 정유업체 등의 보이지 않는 견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 본다. 자신들의 사업규모가 줄어드는 산업의 발달을 원치 않기에 기술개발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비자들의 선택이 아직은 절박하지 않기에 상용화가 안 되는 것이므로 이제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국립공원의 산불 예방을 위해 매우 체계적인 대비를 하고있다는 점이다. 중국 황산에서 보았는데 케이블카로 2km도 더 높이 오른 고산지대에까지 모두 소화전이 묻혀 있었다. 만약 불이 난다면 산에서 바로 소방 호스를 뿌려대어 진화를 할 것이다. 이곳에 70년대에 큰 산불이 나서 크게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황산의 명물인 잉쿼송(迎客松)을 보호하려고 수만 명을 동원하여 불을 끈 적도 있었다고 하니, 그때 얻은 교훈을 뼈 아프게 새겨 엄청난 재원일지라도 투자하여 재난을 근원적으로 대비하고 는 점은 우리가 정말 제대로 배울만한 점이라고 느꼈다. 그러고 보니 등산로도 대충 흙이나 나무로 계단을 만들지 않고 수 천M 고지에 모두 돌계단과 난간으로 튼튼히 시공한 점도 매우 인상깊은 모습이었다. 한국에서 토목을 전공하는 이도 이 길의 공법을 보고 감탄하며 우리나라에서 꼭 배워야 할 점이라고 감탄했다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셋째, 그들의 자부심 넘치는 ‘중화주의 언어관’이었다. 이들은 영어권에서 넘어온 말들을 거의 자국식 의미와 발음에 어울리게 사물과 상황에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동사무소의 명칭과 간판마저 주민자치센터라고 붙여야 친절행정을 한다고 믿는 듯하는 모습을 보이는 주체성없는 한국의 공무원들의 모습과 외국어가 영어철자 그대로 씌인 간판이 가득 널린 한국의 현실이 떠올라 속이 많이 불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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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터키(컨떠지) 후라이드 치킨집 상호 |
맥도널드(마이땅라오)의 상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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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콜라(커커우커러) 중국식 명칭 |
고속도로 자동차 수리센터(중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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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마켓을 그들은 ‘초시’(차오스)바꿔 부른다. 그 마음이 예뻐서 가게 앞에서 사진을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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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가정이 문명화되고, 생활이 아름다우면,사회가 화합(화목)하고, 천지가 새로워진다. |
반면에 경계해야 할 점이 있었다. 첫째, 아직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사회 시스템이다. 상해에서 황산 오는 길에 탔던 기차 운행의 난맥상(10시간의 연착)은 극복해야 할 제일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측 가능한 신뢰사회를 만드는 데 정확한 교통흐름은 사회운영의 기본조건이기 때문이다. 둘째, 시민들의 공중질서 의식이 매우 희박하다는 점이다. “新四害(침뱉기·쓰레기·투기·새치기 등 만연)추방과 무단횡단 금지”를 지적하는 것이 중국인이나 외국인이나 공통적인 의견이다. 중국인들은 쥐, 바퀴벌레, 파리, 모기를 중국이 4해(四害.네 가지 폐해)로 일컫는데 최근에 이런 악습을 신4해(新四害)로 규정하고 있다고 한다. 베이징 올림픽을 맞아 캠페인·벌금도 매겨 보지만 별무신통하여 당국은 골머리를 앓고 있는 형편이라 한다.
특히 교통법규는 거의 지키지 않는 편이었다. 신호등과 상관없이 행인들과 차들은 서로 눈치보며 알아서 피해가는 상황이라서 매우 위험해 보였다. 우리 일행도 길을 건널 때면 가끔 위험함을 느끼는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인상에 많이 남는다. 또한 남자들 ‘웃통 벗고 거리 활보하기’도 조금은 민망해 보이는 장면이었다. 메리야스 차림으로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은 기본이고, 웃통 벗고 걸어 다니거나 노점상을 하는 이들도 많이 보였다. 너무 덥고 습한 날씨의 영향이라고는 하나 외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많이 낯선 풍경이었다. 이런 행위를 하는 사고의 근저에는 ‘부리타(不理他)’가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부리타는 다른 사람의 일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이라 한다. 그래서 공공 장소는 물론 거리의 담장, 버스 외벽에도 ‘문명 중국’ ‘올림픽으로 문명의 기풍을 수립하자’는 구호가 넘치지만 이를 지키는 사람은 드문 것이 중국의 부정적 현실이었다.
이번 여행을 마치며, 나는 앞으로 중국이란 이웃나라를 우리 한국의 학생들에게 못사는 나라라고 무조건 무시하지 말고, 그들의 장점을 잘 배워 우리나라의 미래 경제와 문화 발전에 적극적으로 적용시키는 자세를 가지게 해야 하겠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중국은 앞으로 경의선 열차를 개통하게 되면, 우리가 기차에 덜렁 올라타면 북경, 상하이, 난징 가릴 것 없이 가야할 매우 가까운 이웃이며, 유럽과 아프리카 등까지 거침없이 교류할 수 있는 문명체험의 교두보이다. 세계를 읽을 수 있는 드넓은 창이므로 늘 주시하며 자신의 고정관념을 교정하여야 할 기회의 대륙이라는 점을 새삼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