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미제사건 영화화 -이놈들을 잡읍시다.
영화 ‘아이들’의 개봉에 맞춰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있다.
바로 많은 경찰병력과 최첨단 장비와 그것을 이용한 수사기법을 동원해도 결코 해결하지 못한 범죄. 대한민국 3대 미제 사건. 대한민국 3대 미제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들은 화성 연쇄 살인사건, 故이형호군 유괴 살인사건,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이다.
그 당시 큰 관심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결하지 못한 이 사건이 영화로 만들어져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이 사건이 도대체 어떤 사건이고 왜 범인을 잡지 못했는지 3대 미제사건에 대해 좀더 알아보자.
살인의 추억(화성 연쇄 살인사건)
봉준호 감독. 송강호, 김상경 주연의 살인의 추억(2003)을 알고 있는가? 연쇄 살인을 일으키고 있는 범인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두 형사의 이야기는 1986년에 발생한 화성 연쇄 살인사건을 재구성한 것이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1986년 9월 15일을 시작으로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일대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4년7개월 동안 약 10여 차례의 부녀자 강간 및 연쇄살인이 일어났는데, 200여명의 경찰병력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범인을 잡지 못했다. 결국 마지막 사건일을 기준으로 공소시효 만료일인 2006년 4월 2일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영화에서처럼 사건의 피해자들은 모두 여성이며, 음부는 크게 훼손되어져 있었다(4,6,7,9차). 그리고 대다수 피해자들은 스타킹, 양말 등 자신의 옷가지로 묶인 체 살해당했는데, 한 피해자 여성은 음부에 복숭아 조각 9개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8차 사건을 제외하고는 범인을 잡지 못해 단독범인지 다수의 범인인지 밝히지 못했으며, 7·9·10차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3명의 용의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의 불상사가 거듭되어 ‘화성괴담’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해결된 8차 사건도 사건현장에 발견된 모발과 범인의 모발과 일치하여 검거된 사건이지만, 다른 사건들과는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범인에 대한 몽타주도 7차 사건(88.09.07.) 때 유일한 목격자가 나타나서 겨우 그려졌다. 당시 버스기사였던 강모씨의 목격에 따르면 범인은 “손목뼈에 문신이 있고, 눈이 날카롭게 찢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 범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정액을 통한 혈액형(B형) 뿐이다. 한때 2008년 안양 초등학생 납치 살해 사건의 범인 정성현이 화성사건의 범인이라는 의혹이 불거지기도 하였으나, 명백한 증거는 물론 가능성 여부 또한 없어 의심으로만 마쳤다.

그놈 목소리(故 이형호군 유괴 살인사건)
박진표 감독. 설경구, 김남주 주연의 그놈 목소리(2007)는 1991년에 일어난 故 이형호군 유괴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살인의 추억’과는 다르게 당시 사건에 대해 충실히 반영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살인의 추억’은 봉준호 감독의 연출력으로 범인을 제시하였다.(어쩌면 감독 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하지만 박진표 감독은 봉준호 감독과는 다르게 범인 보다는 유괴된 아이를 찾으려는 부모의 심정을 묘사하였다. 어쩌면 ‘살인의 추억’보다는 ‘그놈 목소리’가 당시 사건의 특징을 그대로 묘사하여 관객들에게 보여준게 아닐까 싶다.
故 이형호군 유괴 살인사건은 1991년 1월 29일 오후 5시 경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 현대아파트 내에 있는 놀이터에 놀던 이형호군. 그날이 마지막으로 44일이 지난 1991년 3월 13일. 잠실대교 서쪽 한강둔치 배수로(일명 토끼굴)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직접 사인은 코와 입에 붙어 있던 테이프로 의한 질식사. 부검결과 유괴당일 친구 집에서 점심으로 먹은 음식이 위에 남아 있던 걸로 보아 유괴직후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유괴범은 이형호군을 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형호군이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위장하여 몸값 7천만원을 요구하였다. 범인의 협박전화에서 나온 목소리를 분석한 결과 서울 경기 출신의 30대 전후의 남자로 추정되며, 44일 동안 60여 차례의 전화와 10차례의 메모지 등을 이용한 매우 치밀하고 지능적인 수법으로협박을 하였다.
처음에는 이형호군의 아버지 이정진씨에게 카폰을 사용하라고 하고, 김포공항과 대학로 등 서울 시내 곳곳을 약속장소로 알려주며 돈을 준비하여 나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김포공항에서 차를 세워둔 뒤 자택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으나, 차 뒷좌석에 누가 타고 있다는 핑계로 약속을 파기하였다.
두 번째에서는 대학로에서 차를 세워 둔 뒤 건너편 빵집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기다리라고 한 뒤 집에 있는 이형호군의 어머니에게 경찰에 신고하였는지 집요하게 추궁하였다.
세 번째에서는 얼마간의 시간이 흘렸는데, 이번에는 은행계좌로 송금을 요구하였다. 당시에는 금융실명제 시행 전이라 가명 통장개설이 가능했기에 계좌로 범인을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대신 범인이 제시한 통장계좌를 사고신고 계좌로 해놓았지만, 수사미숙으로 잡지를 못했다.
또 범인이 입금된 돈을 찾으려고 했던 은행 2곳은 모두 폐쇄회로TV(CCTV)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곳이었다. 은행계좌로 돈을 받는 것이 어려워진 범인은 마지막으로 양화대교 남단 한강둔치에 옆에 있는 철제박스위에 돈뭉치를 올려놓으라고 지시한 뒤 마지막 기회이니 신경 쓰라고 경고하였다. 당시 철제박스 주변에는 강남경찰서 소속 형사들이 잠복하고 있었고, 이정진씨는 경찰과 의논하여 진짜돈 10만원에 가짜돈뭉치를 섞어 범인을 유인했다. 하지만 경찰들의 수사미숙으로 철제박스의 위치를 혼동하였고, 그 사이에 범인은 돈을 가지고 사라졌다.

돈을 가져간 범인은 전화를 통해 “가짜 돈이 잔뜩 섞여있다. 아들을 되찾고 싶지 않은 것으로 알겠다.”라고 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형호군의 사체가 발견할 때까지 연락을 하지 않았다. 이형호군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경찰은 공개수사로 전환. 범인의 몽타주 전단 28만장과 음성테이프 1천개를 제작해 전국에 배포하였지만 범인을 잡지 못했다.
결국 2006년 1월 29일 공소시효가 만료되면서 영구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2007년 ‘그놈 목소리‘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하면서 당시 범인의 전화 통화 목소리와 몽타주를 공개함으로써 공개수배 형식을 취했지만, 범인을 아직도 잡지 못했다. 범인은 168~170cm의 보통 체격에 서울, 경기도 말씨에 차분하고 냉정한 성격의 30대 초중반(91년 당시)의 남자로 추정된다.
(현재 나이는 40대 초중반)

아이들(개구리소년 실종사건)

2월 17일에 개봉하는 영화 아이들... 이규만 감독. 박용우, 류승룡 주연인 이 영화는 5명의 초등학생이 사라진 성서 초등학생 실종사건(개구리 소년 실종사건)을 토대로 만든 영화이다. 성서 초등학생(당시 성서국민학교)에 다니던 5명의 어린이들은 1991년 3월 26일 대구 달서구 와룡산에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섰고, 그날로 행방불명이 되었다.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는 말이 개구리 잡는 것으로 와전된 것이 초기에 퍼지면서 오늘날의 개구리 소년으로 명칭하게 됨)


다섯 아이들의 이름과 당시의 나이는 다음과 같다. 김영규(11세), 김종식(9세), 박찬인(10세), 우철원(12세), 조호연(12세). 당시 3월 26일은 5·16 군사 정변 이후 중단된 지방자치제가 30년 만에 부활하여 기초의회 의원을 뽑는 시·군·구의회 의원 선거일에 일어난 사건이라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1992년에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이라는 영화가 제작되었으며, 1993년에는 실종 어린이 부모들이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였고, 방송으로는 KBS ‘사건 25시’,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반영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일으켰다. 특히 공중전화, 엽서 등은 물론이며, 비디오테이프까지 대대적인 캠페인을 전개되면서 남녀노소 대부분이 이 사건에 대해 인지할 정도였다.
이에 정부는 경찰을 약 50만 명을 동원하면서 현장 주변을 수색하고, 전국적인 전단을 배포하는 등 이들의 행방을 찾았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1991년 325건, 1992년 97건, 1993년 131건의 제보가 들어왔지만 확인결과 모두 잘못된 제보였다. 아무런 소득이 없이 사건발생 5년이 지나자 1996년 수사본부장이 대구경찰청 청장에서 달서경찰서장으로 바꾸고 각 경찰서에서 차출된 수사요원들을 복귀하였다.
이렇게 차츰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던 중 사건 발생 11년 6개월 만인 2002년 9월 26일 성산고등학교 신축공사장 뒤쪽의 와룡산 중턱에서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되어 전국이 충격에 빠졌다. 발견하게 된 계기도 발견되기 하루 전인 2002년 9월 25일 오후 6시경에 한 모 일간지 편집국에 4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대구시 와룡산에 가면 큰 무덤이 있다. 거기를 파면 개구리소년 5명의 유골이 그대로 나올 것이다.”라는 제보전화를 걸어왔다.
그런데 여기서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먼저 아이들의 유골을 발굴할 때 유골을 분석하여 사인을 밝혀낼 법의학자의 도움 없이 경찰들이 독단적으로 성급하게 작업을 진행하여 현장을 훼손하였다. 그리고 유골 발견 당시 유골들끼리 서로 뒤엉켜 있었고, 옷이 얼굴에 덮어놓은 상태임을 보고 와룡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조난당해 옷으로 온몸을 덮었을 것이라 추측하면서 사인을 저체온증이라 밝히는 등 성급하게 수사를 마무리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피해자 부모들은 ‘와룡산은 마을에서 멀지 않은 야산이기에 조난당할가능성이 없다’며 항의하였다.
그러던 중 유골을 감정한 경북대학교 법의학 팀은 몇 가지 의문점을 제시하였다. 먼저 5구의 유골 중 치아가 온전히 보존된 유골이 단 1구도 없고 치아결손율이 50%이상인 점. 둘째 두개골 관절부분 일부가 골절 현상이 있고 3구의 두개골은 함몰되거나 구멍이 뚫리는 등 심하게 손상된 점 등인데, 이를 통해 법의학팀은 개구리 소년은 타살되었음을 밝혔다.
이에 경찰은 법의학자의 자료를 토대로 범인을 찾기 위해 다시 수사를 시작해지만 범인을 끝끝내 찾지 못했고 결국 2006년 3월 25일 공소시효 만료로 미제사건 처리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공소시효 만료일 하루 뒤인 3월 26일 경북대학교 병원 영안실에서 합동 장례식을 치렀다.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은 다른 미제사건들과는 다르게 범인에 대한 어떠한 정보가 없으며, 아이들이 어떻게 사망하였는지 그 이유는 불분명하다.(군 총기살해설, 한센병 환자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 유괴 살해했다 설 등).
그저 개구리소년의 유골지점을 전화로 알린 익명의 제보자에 대한 몽타주만이 있을 뿐이다.
첫댓글 과학수사도 안되는게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