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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제4분기 문예지게재 우수문학작품 선정평(시)
[예심 총평]
‘문학회생 프로그램’의 목적에 부합하는 작품의 선정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즉, 예술성과 작품성이 탁월하여 순수문학의 저변확충에 기여하는 동시에 시인들의 창작 활성화를 선도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기준을 충족시키는 작품 목록을 1인당 15-20편씩 이미 추천, 제출한 상태에서 예심 최종모임은 11월 4일에 개최되었다. 검토해야 할 대상 작품은 모두 175편으로 집계되었다. 이 가운데 예심위원들 각자가 우선적으로 10편씩 추천한 총 100편의 작품에 대해서는 중복 추천과 재수록의 여부만을 가리는 간단한 확인절차를 거쳤으나, 나머지 예비후보 작품 75편에 대해서는 난상토론을 거치는 철저한 재심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본심에 올리기로 최종 합의된 작품의 숫자는 155편이었다. 회의 시작 전에는 전 세대와 지역에 걸친 고른 안배의 문제가 걱정거리처럼 보였으나, 결과는 예심위원들에게 상당히 만족스러운 것으로 자평되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지난 분기에 이어 젊은 세대 시인들의 괄목할 만한 약진이 다시금 확인된 결과였다. 문예지게재 작품들의 양과 질 모든 측면에서 ‘문학회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게 된 듯하다.
[본심 총평]
각종 문예지를 통하여 이토록 많은 시들이 발표되는 것으로 볼 때, 우리나라는 시의 나라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4/4분기에 각종 문예지에 발표된 작품 중에서 예심위원들의 노고와 심의 끝에,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모두 155편이었다.
본심위원들은 다음과 같은 선정 기준을 정하고 본심에 임했다. 첫째, 무엇보다도 작품의 예술성과 그 수준을 최우선의 기준으로 한다. 둘째, 첫째 기준을 적용하였을 때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경우는 문학회생프로그램 사업의 취지를 살려 골고루 혜택을 받도록 한다. 셋째, 본심위원 4명이 예심에서 올라온 작품들에서 각각 선정하여 작성한 전체 일람표에서 4표, 3표를 받은 순으로 우선권을 주되 전원합의에 의하고, 최종 편수 100편을 선정할 때까지 이러한 사항을 계속 지켜나간다. 넷째, 혹시 본심에 올라오지 못한 작품 중에서 본심에서 거론할 만한 작품은 함께 거론하기로 한다.
이 기준에 의하여 심사숙고한 결과, 최종 100편의 시를 선정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각종 문예지에 발표한 작품에 골고루 배분이 되었지만, 어떤 문예지는 상대적으로 많은 작품들이 선정된 매체가 되었다. 이것은 문예지의 기획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이 사업이 더욱 확대될 전망이라고 하니, 좋은 작품들이 더 많이 쏟아져 나와 한국 시단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길 바랄 뿐이다.
강연호 <건강한 슬픔> 현대문학 9월
그닥 가까웠다고 하기도 어려운 여자로부터 오랜만에 전화가 걸려온다.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그녀는 다짜고짜 울음을 터뜨린다. ‘나’는 그 울음을 받아 안느라 다만 침묵할 뿐이다. 이 울음과 침묵의 대치 상황으로부터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과 외로움, 혹은 어찌할 수 없음과 그럴 수 밖에 없음 따위의 정념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그녀의 울음 소리를 듣고 있다가 문득 창문 밖에서 저들끼리 내밀한 나뭇잎들의 수군거림을 쳐다보는 화자의 눈길은 얼마나 노련한 것이며, 전화를 끊은 뒤 그제서야 “혼자 깊숙이 울”고 있는 화자의 모습은 또 얼마나 읽는 이의 마음에 감겨오는가.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울음 우는 그녀의 슬픔을 ‘건강한 슬픔’이라고 말하는 화자의 목소리가 호소력을 갖게 된 것은 이 때문인데, 건강한 슬픔 운운하는 말들은 자칫 생경한 잠언투가 되기 십상인 것이다.
강정 <봄날의 전장> 현대시 7월
봄날의 풍경을 ‘전장’으로 뒤바꾼 이 시는 소생의 기운으로 가득한 존재들을 작렬하는 죽음으로 뒤끓는 전장의 한복판으로 옮겨놓음으로써 역설적으로 각각의 사물과 대상이 사방에서 엄습하는 죽음의 기운에 힘입어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발현할 수 있는 고유의 힘과 에너지를 획득하게 되는 과정을 강렬한 이미지를 통해 보여 주고 있다.
고명자 <유리벽 속으로> 시와정신 가을
경쾌하고 발랄하면서 여자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도시의 풍경들이 새로운 형태로 직조된다. 하지만 권태로운 일상과 유리벽 너머의 시간은 동의어이다. 작품에 드러난 풍경이 마치 조화(造花)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봄볕의 푸르름과 마네킹의 부조화가 이루어내는 조화(調和)가 재미있다.
고재종 <향기에 대하여> 열린시학 가을호
고재종 시인은 쇠똥 냄새, 더덕 향기, 치자꽃 향기, 라일락 향을 말하고는, 피에서는 먼지 냄새가 난다고 한다. 순간의 애원인 피에서 먼지 냄새를 발견하는 이 차원은 향기의 낭만성 속에 깃들인 생의 무게와 진정성을 말하는 것이리라.
고진하 <계명성 - 투계를 보다> 문학동네 가을
원시적 힘이 넘치는 투계의 현장을 박진감 넘치게 묘사한 시이다. 수탉들의 ‘활활 불타는 볏’이 ‘태양의 혼령들’에 빗대어지는 호방한 상상력이 근래 우리시에서 보기드문 장쾌함을 불러일으킨다. ‘극채색의 짜릿한 영상’같은 닭싸움을 신명나게 재현한 이 시 역시 짜릿하다.
고형렬 <부디 나무뿌리처럼 늙어라> 문장 웹진 9월
「부디 나무뿌리처럼 늙어라」는 사멸하는 것들 속에 나를 위치 시켜 놓은 시인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석양’ ‘컴컴한 문짝 뒤’ ‘늙음’ ‘황혼’ ‘어둠’ ‘늙은 뼈’ ‘마른 빵’ ‘숨죽임’ 이란 단어들이 환기하듯이 ‘나’는 기울어지고 늙고 어둡고 정지된 듯한 시간과 공간 속에 위치한다. 나는 그저 “숨죽여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마치 죽은 듯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 시는 이처럼 부정적 언술들의 마지막에서 “그런 날이 아침 속에 왔음을 눈 밝은 사람 몇이 알고 갈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마지막 구절로 인해 이 시는 돌연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결국 나의 존재 가치는 눈 밝은 현자에 의해서 발견됨으로써 확인되는 것이다. ‘부디 나무뿌리처럼 늙어라’라는 제목이 환기하듯이 시인은 스스로 겸허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의미있는 생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늙음이란 세상에 동요하지 않은 존재의 깊어짐이며, 고요한 침묵과 인내를 배우는 시간임을 시인은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권혁웅 <독수리 오형제> 문학사상 8월
아무리 고단하고 지난한 삶일지라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아름답게 채색된다. 「독수리 오형제」는 아련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비슷한 시기 열중하여 들여다 보았던 만화영화 ‘독수리 오형제’의 인물들 위에 겹쳐서 풀어놓고 있다. 오래된 기억과 환상이 겹쳐지는 자리에서 훈훈함이 피어오른다. 현실의 무게를 따뜻하게 끌어안는 시선이 돋보인다.
길상호 <물의 집을 허물 때> 이스끄라 8월
외로움에 대한 시적 기록이다. 사랑의 기억과 상처의 흔적을 치유하려는 따뜻한 시선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상한 지느러미의 물고기란, 홀로인 자기영혼의 시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물은 화해와 생산이 지속되는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내포한다. 연속성에 대한 동경.
김경미 <약풍으로> 21세기문학
경첩에 새겨진 사슴의 상(像)이 현실의 공간으로 출몰하는 환상을 정제된 어조로 표현한 이 시는 방안의 작은 사물이 보여주는 미세한 움직임이 이 세계를 뛰어넘어 ‘다른 세계’에 이르는 통로로 전환되는 광경을 보여준다. ‘약한(작은)’ 바람이면서 ‘약이 되는’ 바람이기도 한 ‘약풍’은 방안의 경첩에서 살아 있는 자연과 전설의 세계를 엿보게 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약풍’을 감지하는 시인의 섬세한 촉수가 돋보이는 시이다.
김경주 <몽상가> 리토피아 가을
세계에 대한 도저한 저항감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젊은 시인의 삶에 대한 태도는 간명하다. “맥주거품 같은 구름”이 생(生)이며, 그것은 “근원에 홀린 듯 떠있”다. 그러니 홀린 상태로 머무르지 않고 근원 그 자체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랭보의 경우 속물적인 근대의 바깥을 찾아 세계를 떠돌았다. 반면 「몽상가」의 시인은 박물지의 한 구절을 도약대로 삼아 오래된 시간 위를 날아다니고 있다. “날아가는 새가 사람의 머리카락을 물고 가면 그 사람은 밤에 날아다니는 꿈을 꾸게 된다”. 수사(修辭)에 발목이 걸리는 바도 없지 않으나, 환상과 현실의 교차가 흥미롭게 전개되고 있다.
김규동 <길> 현대문학 9월
부산 조선키네마 극장 사장 윤백남과 서울 중동학교 학생 나운규의 첫 만남에 얽힌 에피소드를 4행씩 끊어가면서 가지런히 엮어 나간다. 한 위대한 예술가의 열정과 그 열정을 알아본 자의 흐믓한 회고담이 원로 시인의 ‘무기교의 기교’ 속에서 생생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다.
김근 <입을 다물 수 없는 노래> 현대시 7월
‘노래’가 사라지고 ‘노래의 기억’만 흔적으로 남은 시절을 상상한 이 시는 노래의 소멸이 곧 시와 시인의 소멸이 되고, 자기 존재의 가치마저 상실케 되는 어떤 쓸쓸한 미래로 독자를 이끈다. 그런데 그것은 과거의 전설인 듯, 그 시간대가 역전되어 있는 까닭에 ‘노래’를 잃은 시절을 과거와 미래가 하나로 혼융된, 인간의 숫자로 셈할 수 없는 영원의 시간으로 만든다. 이는 궁극적으로 ‘노래(시)’를 망각하기에 이른 이 세계의 현재가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 영원히 지속되는 상태에 놓여 있음을 암시한다. 시인의 슬픔은 이러한 망각과 상실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예감에서 비롯하며, 다물 수 없는 ‘입’은 이 같은 예감이 육체화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김기택 <갈비집에서> 시선 가을
시인 특유의 치밀한 묘사력이 여전히 강점을 발휘하고 있는 시이다. 갈비를 먹을 때의 입과 혀와 이의 움직임을 이토록 정밀하게 표현한 시는 다시 없을 것이다. 우리들의 육체가 지닌 동물적 본능은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고 자동적이다. 그것을 낯설게, 새롭게 느끼고 생각하게 만드는 참신한 발상이 돋보인다.
김명원 <교보문고行> 시와시학 가을
조류도감은 사지 못하고, 빈손으로 교보문고에 도달한다. 탐조여행은 하지 못하고, 남루하고 가여운 사람들에게 마음을 잃다. 성처와 직면하는 빈손의 지하철 여행. 시적 연민이 돋보인다.
김명인 <밤 장대소나기> 열린시학 가을호
방황과 정주, 질문과 대답을 여러 겹의 문맥으로 중첩시키는 김명인 시인은, 내면 의식의 착란을 동반하는 풍경과 더불어 어둠과 새벽 사이의 문턱에서 통곡하는 빗소리들의 장엄미를 보여준다.
김미령 <장마> 시작 가을
이 시의 매력은 장마철의 지루하고 더딘 시간의 흐름을 깊은 바다 속에서 부유하는 생물들과 거대한 대류의 움직임에 병치시킴으로써 ‘장마’라는 자연 현상이 우리에게 유발하는 감정의 굴곡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데 있다. ‘바다’ 전체가 움직여 땅으로 내리는 듯한 이미지의 연속은 ‘장마’라는 익숙한 일기(日氣)를 새롭게 경험하게끔 만든다.
김상미 <다중 자화상> 시와세계 가을호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지 정의할 수 있을까? 그 어떤 철학적 물음도 이 명제에 대해 흔쾌히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혐오와 연민, 치욕과 사랑, 오만과 관용, 웃음과 눈물, 삶과 죽음, 신과 인간, 이렇듯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것들로 온통 뒤섞여 있는 삶.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경험해야만 하는 이 불가항력의 생, 불완전한 존재임을 거듭 확인함으로써 불완전성과 싸워야 하는 모순된 인간. 김상미의 「다중자화상」은 그리움과 연민, 사랑과 고독, 열망과 번뇌, 고통과 치욕에 신열을 앓는 이 시대 가련하고 불쌍한 영혼들의 절규를 보여준다. 인간 존재의 숙명적 딜레마를 극한으로까지 밀어붙이는 시인의 목소리는 처절하면서도 비장하다. 김상미에게 인간의 고통은 극복의 대상이거나 초월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고통과 한 몸이 되는 ‘고통의 카나발’을 보여준다. 이 소름끼치도록 통렬한 시인의 자화상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금 살아감의 의미가 무엇인지 반추하게 되는 것이다.
김선우 <폐소공포> 창작과비평 가을
여자는 겁이 났네. 겁난 여자가 손목을 잘라 병 밖으로 나오지만, 그녀는 나오지 않는다. 수천 장의 물결이 마음을 때린다. 때리는데, 죽은 장수하늘소는 소리가 없다. 오직 손바닥 속의 성좌로만 남은 장수하늘소. 마음은 병 밖으로도, 손금 밖으로도 나오지 못한다. 몸과 마음에 남은 흔적. 지워지지 않는다. 아름다운 사랑의 비가.
김성덕 <4월 엽서> 풍자문학 가을
때는 바야흐로 봄이다. 계절의 자취가 절간이라고 해서 비껴갈 리는 만무한 일, “봄빛 그윽한 각연사 앞뜰”이다. 화려한 “오색딱따구리”가 하필이면 “늙은 보리수나무”에 굴집을 지으며 “능청스레 암컷을 부르”고 있다. 젊다는 것도 죄일 수 있을까. 바로 그 봄날 “젊은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지만, 그 안에 늙은 보리수나무를 쪼는 ‘오색딱따구리 수컷’(존재)의 번뇌가 끼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그 뒤로는 팽팽한 긴장이 고요하게 펼쳐진다. 긴장을 견디는 것은 젊은 스님의 몫이다. 아니, 우리 모두의 몫인지도 모른다.
김소연 <적막과 햇빛 사이> 시평 가을
시인은 ‘순간’과 연애하는 자들이다. 시간의 흐름을 몸으로 지각할 뿐 아니라 그 흐름의 어느 한 때를 떼어내서 그 시간과 노닥거리며 수작하는 자들이다. 이 시인은 지금 어떤 순간과 연애하고 있는가. 가끔 방 안에 ‘푸르스름한 적막’만이 자욱할 때가 있다. 햇빛이 잠깐 자취를 감추어서 예기치 못한 적막과 고요를 선사하는 그 때다. ‘고요해서 다 들리는 시간’이고 ‘적막해서 다 보이는 시간’이다. 시인은 아예 이 시간과 차 한 잔 하고 있다. “침묵으로만 말해질 수 있는 이 순간들이, 침묵함으로써 돌아앉아 시를 써온 나와 함께, 차숟가락을 입에 물고 마주보며 웃는다.” 아마 이럴 때 김시습도 시를 썼겠지, 홍랑 매창 옥봉 같은 이들도 그랬겠지. 그래서 화자는 말한다. “지금은 시를 쓸 시간.” 글쎄, 왜 아니겠는가.
김언 <바람의 실내악> 현대시학 8월
‘생성’이란 말 그대로 사물이 생겨나는 것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게 되고, 만질 수 없었던 것을 만지게 되고, 들리지 않았던 것을 듣게 되는 것이야말로 다름 아닌 기적이 아닐까. 김언의 「바람의 실내악」은 ‘바람의 포즈’ ‘바람의 윤곽’ ‘바람의 침묵’ ‘바람의 음악’을 듣게 한다. 시인의 온몸은 바람에 집중된다. 시인은 바람을 관찰하다가 바람에 몰입되고 결국 바람에 동화된다. 바람은 ‘방’과 ‘의자’, ‘천장’과 ‘사람’들에게 머물고 지나치고 스며든다. 또 수십 개의 몸과 수십 개의 표정으로 이곳과 저곳을 누비고 다니며, 느리게, 천천히, 시인의 내면 속으로 “파고든다” 김언이 보여주는 ‘바람’은 이처럼 다양하게 변주되는 음악으로 비유된다. ‘바람의 실내악’은 완성된 음악이 아니라,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는 생성의 소리다. 그 생성에 소리에 몸을 열고 있는 시인이야말로 새로운 탄생의 기적을 보여주는 창조자인 것이다.
김언희 <메뉴얼> 현대문학 7월
견고하게 코드화된 일상성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겨있다. 잘 짜여진 삶은 우리의 욕망마저도 통제하려 든다. 자본주의의 메카니즘은 빠른 소비와 망각을 통해 체제순응적인 인간형을 양산한다. 이미지를 내면화하는 이데올로기화를 통해 소비사회는 자신을 각인시키고자 한다.
김영승 <화창> 시와세계 가을호
가장 눈부신 것 속에서 ‘죽음’을 발견하고 또한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있어 최고로 황홀한 유혹이 아닐까. “폭우 쏟아진 뒤/ 이 화창// 그게 죽음이리라// 나의 죽음이리라”라는 전언 속에서 우리는 김영승이 탐닉하는 미적 대상이 무엇인지 확인하게 된다. 폭우가 걷히고 난 자리에 펼쳐진 “찢어질 듯 짓푸른/ 얼음 같은 깊은 하늘” 속에서 시인은 자연과 내가 하나되는 물아일체의 순간을 경험한다. 그것은 영혼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순간이다. 김영승의 「화창」은 무엇보다 절제된 언어, 명징한 이미지로 인해 시적 감동을 배가시킨다. 어떤 것으로도 더럽혀지지 않는 절대 순수를 지향하는 시인의 염결주의를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피폐해진 인간 영혼을 다시금 반성하게 되는 것이다.
김영주 <이민행> 월간문학 8월
한 가족이 이민을 떠나려는 찰나. 그러나 “발 앞에 길이 있건만 / 발이 길을 가지 않는다.” 그만 주저 앉고 싶은 마음, 쓰러져 울고 싶은 마음이 ‘풀’의 이미지를 불러오고, “사는 게 무슨 혁명이라고 그리 아픈지 / 내 안의 혁명 다 너에게 주고 / 나는 벌판에 섰다”로 이어진다. 난데없이 ‘혁명’이라니, 돌연하고 생경하다 싶다가도, 이민 떠나는 이의 허한 가슴에서 울분처럼 터져 나오는 말이니까 발악 같은 과장이 아니겠느냐고 고쳐 생각해 보면, 그제서야 쓸쓸하게 감겨온다. 이제 가족들은 “풀잎 다섯”이 되어 이민선을 탄다. 어딜 가더라도 꿈, 노래, 사랑 따위는 있겠지 자위하면서 이민행에 오른다. 저 돌연하고 생경한 ‘혁명’이 없었더라면 심심했을 뻔했다. 의외로운 한 파격이 시에 에너지를 공급한 사례다.
김왕노 <결핍> 생각과 느낌 가을
김왕노의 「결핍」은 삶의 무료함을 아주 서정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작품이다. 현대적 삶은 물질에 자칫 포박되기 쉬워 무료하고 권태로운 삶이기 십상이다. 이 시의 시적 화자 또한 삶의 진정성을 찾지 못해 정신적 방황을 하고 있는 존재다. 그 존재가 그래도 삶의 형식에서 의미가 있는 것은 ‘자기가 권태롭고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다’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는 ‘나른한 아름다움’의 한 형상을 보여준다. 현대적 삶의 현실에 대응한 현대시의 아름다움의 한 특성일 것이다. “제5의 계절”로 압축된 시적 화자의 이 시대에 대한 통찰 또한 곱씹어 볼 표현이다. 삶의 정처없음과 무의미에 대한 내성을 지니기 위한 현대인의 정신적 몸부림이 느껴지는 시다. 그것대로 현대시의 한 정점이다.
김이듬 <청춘이라는 페허2> 시와세계 가을호
최근 젊은 시인들에게 있어 ‘공장’의 모티브는 새로운 시적 공간으로 대두되고 있다. 80년대 작가들에게 있어 ‘공장’은 철저히 착취와 피착취라는 계급적 모순을 첨예하게 반영하는 현장으로 묘사됨으로써 지배사회를 비판하는 상징이었다. 즉 박노해, 백무산과 같은 시인들의 시는 살벌한 노동현장의 모습을 통해 가난, 사회적 모순, 이데올로기를 공격하고 폭로하려는 뚜렷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비하면 최근 시인들의 관심은 지극히 ‘개인’의 문제에 집중되고 있으며 이를 지극히 환상적인 방식으로 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김이듬의 「청춘이라는 페허2」에서 ‘나’는 이미 기계에 길들여진 존재로 둔갑된다. “기계의 맥박 소리는 달콤했습니다”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포대에 기어들어가”와 같은 표현은 이러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또한 ‘공장’은 인간소외와 착취의 현장이기도 하다. “공장장 아저씨가 나를 발이 닿지 않는 선반에 올려두고 외출증을 끊어갑니다 치마에 피가 묻었습니다”와 같은 구절은 공장이 억압과 폭력이 난무하는 공간임을 보여준다. 즉 공장은 유혹과 안정을 주는 공간인 동시에 공포와 혐오를 일으키는 장소이다. ‘꺼져버린 엔진’, ‘배가 물러져 움직이지 않는 언니’ ‘그을린 기계들에게 인사’를 하는 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로테스크하게 일그러진 현실의 기이한 얼굴을 보게된다. 산업사회에 도구로 전락한 인간, 육체와 정신 모두를 저당 잡힌 오늘의 인간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이 시대의 야만성이 회복 불능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참담하게 인식하게 된다.
김준태 <동화童話> 창작21 가을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고 하면 불교의 연기설(緣起說)로 이어진다. 그리고 유보된 시간이 여유를 갖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동화」의 세계는 그와는 조금 다르다. 사건과 풍경은 동시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아이녀석 둘이 싸우고 있었습니다”라는 사건은 곧장 “그게 보기에도 영 안타깝고 말하기도 영 뭐 했는지/ 강 언덕을 휘감고 놀던 찔레꽃이 하얗게 울었습니다”는 풍경으로 이어진다. “서로의 콧잔등을 때렸습니다”라는 행위에 꽃들은 “마을에서 누군가를 뒤따라 나왔을 채송화, 장미들도/ 두 아이녀석 대신 붉디붉은 코피를 흘려주었습니다”로 호응한다. 한낱 어린아이의 싸움에서도 자연은 함께 아파한다. 이를 확인하는 순간 어른들이 저지르는 저 추악한 전쟁이 떠오른다. 저들의 전쟁으로 자연은 또 얼마나 상처 입고 있는가. 여유롭게 관망하기에는 너무도 서글픈 현실이다.
김해자 <목각 기러기> 리토피아 가을
인간은 한순간 영원을 경험할 수 있다. 일생을 휘감을 그 강렬한 감정은,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퇴색하게 된다. 환멸(幻滅)이 상처일 수 있는 까닭은 여기서 발생한다. 남들 틈에서 적당히 살아나간다면 별다르게 문제될 바 없다. 누구나 한 번쯤 겪는 한 시절의 열병이겠거니 여기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지만, 아직까지도 그 열정을, 그 꿈을 품고 있는 이에게라면 환멸은 여전히 상처로 남아 쿡쿡 찌르게 된다. “지전보다 빨리 구겨지고 동전보다 먼저 쇠 냄새 풍기는/ 일상의 머리맡에 반복도 회귀도 용납치 않겠다는 듯/ 찰나에 멈춰버린 목가 기러기 두 놈/ 날더러 어쩌라고 노려보는 것이냐.” 한밤중에도 깨어있는 그 의식이 또렷하게 다가온다.
김행숙 <비에 대한 감정> 현대시 7월
이 시의 묘미는 교통사고의 현장과 코끼리의 커다란 코를 한데 결합시켜 사고 순간의 충격과 긴장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데 있다. 비 내리는 날의 교통사고를 코끼리의 코가 힘껏 휘둘리는 장면으로 둔갑시키는 시인의 상상력은 비범하기까지 하다. ‘코끼리의 위대한 코’라는 희화화된 반어적 표현은 사고에 내재된 폭력성과 그로 인한 아이들의 희생을 주관적인 감상에 의해 판단하기보다 사건 자체를 우선 즉물적으로 감각하게 함으로써 사태의 심각성을 역으로 환기하는 기능을 한다. 이 시인의 독특한 시적 개성에 또 한 번 놀라게 되는 대목이다.
김형술 <무기와 악기> 생각과 느낌 가을
타자와의 만남에는 비수를 숨긴 날카로운 공격성과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아찔한 매혹이 한데 겹쳐 있기 마련이다. 이 시는 그러한 복합적인 감정의 움직임을 ‘무기’와 ‘악기’라는 두 가지 상징으로 집약하고 있는데,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강렬한 정념이 내포된 어조는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이 죽음을 불사할 만큼 격정에 찬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김혜순 <당신 눈동자 속의 물> 문학과사회 가을
온 몸이 ‘슬픈 노래’로 가득 차 있는 사람, ‘슬픈 노래’가 물처럼 몸 속에 가득 고여 있는 사람이 있다. 예컨대 “창밖으로 날아가는 새들을 보고 날아오른다고 / 하지 마라 그건 내가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 한없이 떨어지고만 있는 것이니”와 같은 슬픈 노래. ‘나’가 슬픈 노래를 부르면 주위의 모든 사물들이 함께 슬퍼지고, 울어댄다. ‘나’의 몸에 가득 고여 있는 이 슬픈 노래들은 어디서 왔는가. 왜 ‘나’의 슬픔들은 흘러가지 못하고 이렇게 내 몸 속에 고여 있는가. ‘나’는 “당신의 눈동 속의 물처럼” 그렇게 흘러가야 하는데, 슬픔이 가득 고인 내 몸은 썪어만 간다. 그대여, ‘나프탈렌’까지 먹지는 마시고, 부디 “열쇠를 찾아 이곳을 나가”는데 성공하시길. . . 췌언(贅言)이 필요없는 유려한 슬픔의 노래.
나석중 <성냥> 신문예 가을호
‘성냥’의 속성을 ‘생명’과 연관시키는 시적 발상은 신선할 것이 없다. 하지만 나석중은 이 사물의 속성을 통해 자신의 무감각해져버린 ‘생명’의 문제를 발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시적 의미가 새롭다. 성냥이 불꽃을 일으키며 환생하듯이 “내 몸 깡마른 성냥개비를 그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인식이야말로 무뎌지고 안일해져버린 삶에 다시금 활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나석중의 ‘성냥’이라는 시적 비유는 이 시의 주제를 드러내는데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나희덕 <욕탕 속의 나무들> 내일을여는작가 가을호
욕탕 속에 4代의 인생들이 잠겨 있다. 시인은 나무에서 사람을 본다. 또는 그 역이다. 나무의 까칠한 표면은 삶이 새긴 주름일 것이다. 더운 김 속에서 자연과 인생이, 과거와 미래가 뒤섞인다. 고요하고 후끈하다.
남진우 <선인장> 현대문학 8월
고독한 인간관계의 상징적 처리가 돋보인다. 메마른 삶의 공간과 바라보는 시선이 휘발된 시간의 갈피 속에 존재하는 사물과 같은 생. 그럼에도 삶은 지속될 수 있다는 믿음은 소중한가. 불러오는 배를 쓰다듬는 여자와 사막에서 피어나는 선인장이 같은 선에 놓이게 한 구도가 흥미롭다.
도종환 <연필깍기> 시로여는세상 가을호
연필은 시인의 몸과 마음이다. 그걸 깎는다. 지조, 신념, 정직, 기도를 꿈꾸었으나, 이를 배반한 것은 삶의 모순일 것이다. 스스로를 깎음으로서, 자기됨을 성찰하고 반성한다는 것. 뼈를 깎는 시인의 정신이 예리하다.
류인서 <이런 책> 유심 가을호
책바위에 얽힌 전설이 알뜰하게 한 편의 시가 된다. 한 덩이 바위에서 ‘누대에 걸쳐 첨삭을 되풀이한 누더기 문장’을 엿보는 것은 역시 문자의 고통을 아는 시인의 예지이리라. ‘돌보다 무거운 문자들의 무덤’을 지나치지 못하고 시인은 그 무덤에 얽힌 무수한 공력과 좌절의 체험들을 시의 공간으로 끌어올린다.
마종하 <배꽃이 피면> 문학예술 가을
마종하의 「배꽃이 피면」은 삶의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배꽃’이란 소재를 통해 밝음과 맑음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면서 임과 자신을 둘러싼 아름다운 한 때의 가버린 사랑과 추억에 대한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그 점에서 이 시는 애상적이고 처연하다. 그러나 그 슬픔이 맑고 향기로와 우리들 무디어진 감수성을 여지없이 헤쳐놓고 있다는 점에서 시적 공감력과 생생력은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공명의 울림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 정제된 형식과 다감한 어조, 짧은 운율적 반복이다. 특히 “오 코를 묻네 눈을 감네 향기로 뜨네”의 표현은 강한 주술적 흡입력을 갖고 있어 시적 울림이 갖는 힘의 위대성을 새삼 실감케 한다.
문인수 <물빛, 그것은 진실입니다> 서정과현실 하반기
시인에게 물은 만상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다. 그러나 그 거울은 스스로를 비추지 않는다. 마음과 자연이 물의 거울을 통과하면, 명랑해진다. 풀잎 끝에서 마음의 정화를 발견하는 정관적 시선이 돋보인다.
문태준 <번져라 번져라 병이여> 창작과비평 가을호
아이의 병에서 만발하는 꽃을, 다시 거기에서 마음의 길을 잃은 여인의 마음의 얼룩을 시인은 본다. 그렇게 자유 연상은 널뛰기 하는데, “환장할 대낮의 아궁이”처럼 시인의 마음은 들끓는다. 마음의 끌통에서 평정을 쉬 찾지 않는다. 늙었으나 젊은 시다.
박권숙 <첫발자국> 신생 가을호
박권숙의 「첫발자국」은 삶의 무상성을 예리한 통찰을 통해 견디어 내는 삶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아름다운 작품이다. 시조 형식을 통해 삶의 가파름과 그것에 대응한 시적 화자의 강인한 정신과 의지를 형상화해 낼 수 있는 점은 매우 놀라운 시적 능력이다. 이 시는 ‘기억’ 속의 삶과 그 기억을 견뎌내는 현재의 삶을 대비시켜 현재적 삶의 의의와 아름다움을 “외롭고 까마득한 빛 그 맑은 발자국”이란 탁월한 이미지로 찾아냄으로써 삶의 무상성과 무료함을 단박에 이겨내고 있다. 시적 응결성과 대응성이 이토록 깊은 경지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절치부심하는 연마가 있었으리란 추측을 해볼 수 있다. 특히 현재적 삶의 고난을 “허공에 빛나고 있는 직립의 비애”란 말로 형상화하였을 때, 그것의 적절성과 전형성을 독자에게 깊은 공감을 주는 바가 있다. 삶의 가파름으로서 ‘벼랑’이란 이미지를 이러한 것으로 드러낼 때 시는 무수한 울림과 파문을 내포한 공명기구가 된다. 시적 포착력이 대단한 한 편의 시조다.
박남희 <중독> 현대시학 9월호
참새는 무게에 중독되어 땅에 내려앉고, 나무는 흙에 중독되어 뿌리를 박고, 태양은 지구에 중독되어 지구를 떠나지 못하고, 인간은 문명에 중독되어 사유를 멈추지 못하고. 박남희의 시적 사유는 이렇듯 ‘중독’이라는 말로 이어진다. 그에게 있어 중독은 생을 가동시키는 근원적 힘이 된다. ‘중독’이라는 말을 통해 존재의 존재성을 증명해 보이고 있는 시인의 상상력이 무엇보다 신선하고 흥미롭다.
박상순 <공구통을 뒤지다가> 문예중앙 가을
지극히 평이한 어휘들을 자유자재로 조립 해체하면서 매력적인 리듬의 장(場)을 열고 ‘내용 없는 아름다움’의 한 진경에 도달하곤 하는 일은 박상순에게는 쉬운 일처럼 보인다. 가장 근작인 Love Adagio의 세계가 그러했고 이번 시 역시 그렇다. 화자는 공구통을 뒤져서 튼튼하고 뾰족한 못들을 골라 나의 ‘당신’에게 보낸다. ‘즐거운 편지’처럼, ‘선물’처럼 보낸다. 왜 편지인가? ‘당신’이 이미 나에게 ‘기나긴 이별의 편지’를 보냈던 터라 이것은 그 답장인 셈이다. 왜 하필 못을? “당신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 구멍을 뚫고, 튼튼한 나사못으로 / 당신이 가는 길을 막아버“리기 위해서다. 화자는 지금 목하 ‘내 인생의 공구통’을 뒤지면서 아프게 답장을 쓰고 있는 셈이다. 당신을 못박고 다시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열 살 때의 일들은 그냥 없었던 걸로 합시다“와 ”껄렁한 이십대는 없던 걸로 합시다“에서 화자는 자신의 삶의 한 굴곡들과 기억들에도 예의 못질을 하고 있는 것인데, 이 ‘껄렁한’ 듯 애잔한 뉘앙스의 문장들이 독자에게도 은근한 못질을 한다.
박정대 <얼음 맥주 공장의 노동자들> 학산문학 가을
이 시의 매력은 독자를 ‘지금 여기’에서 경험할 수 없는 ‘다른’ 생,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는 점이다. 얼음이 곧 맥주가 되는 공장에서 시베리아 호랑이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별들이 가득 한 하늘과 어둠이 내리는 들판을 바라보는 풍광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시의 꿈이 언제나 현실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듯, 이 시인이 보여주는 겨울 시베리아의 풍광은 비록 생활 세계의 논리와 거리가 멀지만, 시를 읽는 이들에게 몽상의 세계를 선사함으로써 일상에 지쳐 삭막해진 마음에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있다.
박정대 <나의 아름다운 세탁선> 황해문화 가을
낡고 퇴락한 삶의 공간을 가을빛이 가득한 음악과 예술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시인의 낭만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시이다. 그런데 가난한 목조 아파트를 이러한 예술적 감흥이 넘치는 곳으로 꿈꾸게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오래된 아파트를 흉물로 여기며 철거하는 현실의 논리이다. 즉 시인이 상상하는 ‘아름다운 세탁선’은 현실에선 불가능한 꿈이다. 그런 까닭에 이 ‘아름다운 세탁선’에는 추억이 없고, 미래가 없다. 추억이 없고 미래가 없다는 이 점은 이 시가 그려 보이는 풍경 속에 깊은 슬픔이 잠재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러한 슬픔 때문에 오히려 이 시의 아름다움은 더욱 빛을 발한다고 할 수 있다.
박제영 <늙은 거미> 생각과 느낌 가을
박제영의 「늙은 거미」는 할머니의 쓸쓸하고 애잔한 삶을 늙은 거미의 신산(辛酸)한 삶에 빗대 삶의 애처러움을 노래하고 있다.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하면서 삶의 한없는 슬픔을 표현하고 있는 이 시는 거미의 일생과 생리를 자세하고도 적절하게 형상화함으로써 늙은 할머니의 생애를 자연스럽게 유추하게 하고 그 생애의 고달픔을 잘 환기시켜주고 있다. 특히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이란 구절을 반복적으로 표현하여 독자로 하여금 가엾고 아픈 삶이 우리들 모두의 숙명이자 본질임을 일깨워 주고 있는데 이는 반복과 강조를 통한 시적 분위기 창출이란 점에서 좋은 표현이다.
박진성 <퇴촌에 가다> 유심 가을호
아픈 육체의 체험이 풍경에 스며들어 있다. ‘몸살 앓는 강’, ‘링거액처럼 내리는 빗방울’, ‘퇴화한 물고기’. ‘알약 같은 새벽 빗방울’ 같은 구절에는 오랜 병력의 고통이 새겨져 있다. 그리하여 병들어가는 자연은 아픈 몸이 무심할 수 없는 ‘나의 고향’이 된다. 병든 몸의 체험이 병든 자연에 대한 연민과 공감으로 확대되고 있는 시이다.
박철 <향수-봐야믿는세상> 애지 가을
박철의 「향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주 소재로 하여 쓰고 있는 작품으로 민중의 스산하고 어려웠던 시절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혼혈아인 ‘조조’라는 아이를 등장시켜 혼혈에 대한 편견과 배척의 현실 속에 그러한 혼혈이 사실은 우리가 껴안아야 할 민족의 역사임을 이 시는 깨우쳐주고 있다. 리얼리즘적 인식의 바탕 위에서 우리 민족의 어두운 역사를 그리고 있는 이 시는 그러나 시적 분위기가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은데, 그 까닭은 어린 시절의 순수성이 또 다른 바탕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둠과 밝음의 미묘한 공존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 시는 우리 민족의 어려웠던 역사가 사실은 그리운 한 때였음을 알게 하는 놀라운 역설이 들어있다.
박형준 <우물> 현대시 8월호
우물은 지하를 향한 통로이다. 아비가 그 길을 갔으니, 죽은 것이다. 화장실에서 본, 똬리를 튼 뱀은 회귀하는 삶과 죽음의 상징일 것이다. 삶과 죽음은 그렇게 연결돼 있다. 슬픔이 극에 달하면, 달조차도 회오리에 휩싸인다. 슬픔의 지극함을 제어하는 인내가 시적 압축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반칠환 <자벌레> 현대시학 9월호
이 시는 보잘것없는 미물에 대한 섬세하고 애정 어린 시선과 통찰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 도입부에서는 미물에 불과한 자벌레의 행태를 확인시켜 주고 이어서는 자벌레를 새롭게 보게 하는 관점의 전이가 두드러진다. 섬세하고 흥미로운 문학적 상상을 통해, 자연과 사물의 꿈과 신비를 증명하는 시이다.
배용제 <부레옥잠> 현대시학 7월호
배용제에게 있어 ‘부레옥잠’은 자신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거울이다. “자줏빛 멍든 꽃잎”은 내의 몸에 가득했던 ‘病’을 연상하게 만들며, “그 멍, 한가운데 점처럼 박힌 달”은 “달 같은 누런 알약들이 손바닥 위에 떠 있었”던 고통의 세월을 떠올리게 한다. 사물의 형상을 통해 인간 존재의 고통을 드러내는 시인의 노련한 시적 기술은 이 시를 소재주의가 아닌 의미로 귀결되는 시적 세계로 안내한다. “제 몸속에 가둔 바람 한 웅큼으로도” 생을 지탱할 수 있는 ‘부레옥잠’처럼 시인은 “눈물의 바탕에 뿌리를 내리고도 한 생을 고요하게 떠돌수 있”는 성숙한 자기내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서화성 <순간> 시와 반시 가을
서화성의 「순간」은 언어의 신선한 사용을 통해 우리들로 하여금 굳어진 인식을 찌르고 삶의 외피를 벗겨내 속살을 보게끔 하는 인식적 싸움이 잘 드러나 있다. 맥주를 마시는 것으로 시작하여 시간을 마시고, 나이를 마시고, 그리고 기억을 마시는 것으로 언어적 상상력이 발산되어 가는 동안 이 시는 우리 인간에게 규율지어진 통념과 제도의 비생명성을 인식케 하고 의식의 자유로움이 갖는 아름다움과 절실함을 환기시켜준다. 이 시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현대의 사회 제도나 경제 체제가 우리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왜곡하고 소외시켜버림으로써 진정한 자아를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데에 있다. 의식의 흐름 수법으로 이러한 주제를 달성하고 있는 이 시는 문체적 새로움과 주제의 건강성으로 당대 삶의 구체성을 적접적으로 보여주는 미덕을 갖고 있다. 특히 ‘부재’와 소외의 심리적 현상을 적절하게 형상화해 냄으로써 “나를 찾아야 한다”의 현대인의 강박관념에 가까운 절박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손택수 <수박> 시와정신 가을
어려운 환경이지만, 삶의 욕망이 아름다운 이유가 잘 제시된 작품이다. 만삭의 아내가 밀어주는 수레를 끌고 길을 가는 가장의 발걸음은, 신체적 장애 따위에 아랑곳 하지 않게 힘차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지나치게 낭만적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접어두고 싶다. 이런 풍경화를 자주 그려보는 일이 때로는 얼마나 소중한가.
송기원 <꽃이 필 때> 실천문학 가을호
정상에 오르려는 것만을 목표로 삼을 때 산은 그 숭고한 위엄을 다 보여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멈추고 뒤돌아볼 때 인생은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송기원의 「꽃이 필 때」는 한편의 잠언을 연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의 잠언은 진부하고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시인이 선택한 ‘꽃’의 비유가 생이 간직한 함축적 의미를 전달하는데 잘 부합되기 때문이다. 또한 생략과 압축, 여운과 공백을 통해 시인은 독자로 하여금 시적 의미를 오래도록 음미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송재학 <숨죽이다> 문학들 가을
산벚나무의 개화 순간을 매우 섬세하고 정성스럽게 묘사한 시이다. 개화의 순간을 위해 산벚나무 자신 뿐 아니라 숲 속의 모든 나무들이 숨을 죽이는 장면의 포착이 인상 깊다. 생명의 신비와 그에 대한 경외감이 놀라운 집중력으로 그려진다.
송찬호 <채송화> 애지 가을
이 시의 묘미는 채송화를 ‘소인국 이야기’를 전하는 ‘책’으로 은유한 데서 비롯한다. 소인국의 나라를 여행하는 걸리버처럼, 작은 꽃 채송화를 음미하려면 자신의 몸을 숙이고 열심히 귀 기울여 한다는 발상은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만든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부분은 이러한 채송화가 시인이 읽고 있는 책이었음이 드러나는 마지막 대목이다. 이 때문에 채송화에 관한 작품인 줄 알았던 독자들은 책에 관한 작품으로 이 시를 다시 읽고 이해해야 한다. 책이 곧 채송화라는 은유는 독서 행위가 꽃을 감상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시의 다의성을 한층 더 부각시킨다. 시인의 재치와 기지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신진 <신발가게에서> 시와시학 가을호
신발은 사람들로 들끓는다. 빈 신발인데 등장인물도 많다. 주인 없는 신발의 허공이, 머지 않아 만날 주인들의 웅성거림을 닮아 빽빽하다. 빈 신발이 사람 내음을 물씬 풍긴다. 시인의 눈과 코는 없는 것도 보게 하고, 냄새 맡게 하는 듯.
심창만 <청진기> 열린시학 가을호
이 시는 젊은 의사가 늙은 어머니 가슴에 청진기를 대는 장면에서 시적 이미지를 포착하고 의미부여를 시도한다. ‘최신식 스테인레스 쇠붙이’와 ‘녹이 슨 맥박’의 대비적 이미지는 하나의 이미지를 시적 발견의 차원으로 비약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유안진 <수면제에 홀리다> 시사사 2005년 9-10월호
이 시는 알약에 취한 비몽사몽의 경험을 추억 속의 마을과 집이라는 공간으로 환치하고, 그 속에 나를 기다려온 내 그림자의 흔적을 탈색된 책의 이미지와 오버랩시킴으로써 무의식의 체험을 적실하게 형상화한다.
유용주 <위대한 표어> 내일을여는작가 가을
그 위대한 표어는 남루하다. 고학생의 고시공부 같은 글쓰기. 종광이 자취방의 무질서함이야말로 청년의 열정일 것이다. 그 문학에 대한 열정은 무모함과 통한다. 무모함과 무질서, “빈소주병과 맥주병”들의 불면. 풍자와 아이러니 사이에서, 시가 돌연 빛을 발한다.
유종인 <토막 잔치> 애지 가을
도시적 일상의 모든 부분이 토막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하는 시이다. 컵라면에서 끊어져 있는 면발이 그러하고, 면발을 뒤적이는 젓가락도 나무토막 시체이며, 거기 부어진 물도 수도로 인해 끊어진 강물이다. 토막에 대한 재치있는 상상과 날카로운 통찰이 돋보이는 시이다.
유형진 <빨간 밭> 현대문학 9월
동화적 신화의 세계에 이끌리게 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동화는 현실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늦은 낮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은 언제든 시간을 착각하기 마련이다. 해가 지려는 오후, 석양의 노을은 신비롭기도 하지만 두려움도 자아낸다. 이야기 책에서나 나오는 단순한 공포였으면 좋겠지만, 부모의 부재가 말해주듯, 그의 현실은 조금 슬프다.
윤지영 <상상1> 계간문예 가을
한 쌍의 연인이 있다. “그의 자꾸 떠나고 싶은 마음과 나의 자꾸 떠나고 싶은 마음이 그늘 좋은 나무 하나 골라 그 아래 벤치를 만든다.”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나 보다. 그들은 이제 다른 곳을 바라본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바람이 불어오고, 각자는 각자의 바람을 들이마신다. 표현들이 은근하게 정곡을 찌르고 있거니와, 마주 잡은 두 손을 벤치 위에 놔둔 채 떠나갈 거라는 ‘상상’, 마주 잡은 두 손 만큼은 두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상상 등도 평이한 듯 매력적이다. 이별을 앞둔 화자는 “인생은 나그네길, 룰루랄라, 나그네길”이라고 짐짓 쿨한 척 하더니 종내에는 눈물 찔끔 흘린다. 이 효과적인 낙차가 없었더라면 자칫 신파가 될 뻔했다. 경제적인 서술, 리드미컬한 문장들, 보편적 호소력을 구비한 상황과 정념들, 이 모든 것들이 정갈하게 어울리고 있는 가편(佳篇)이다.
이규리 <천천 2리> 정신과 표현 9-10월
이 시의 매력은 ‘천천’이라는 지명을 물의 원천으로 독해함으로써 그곳을 향해 뻗친 길을 나무의 뿌리로 은유하고, 다시 그 길에 선 자신을 나무로 상상하면서 자기 온몸을 물이 가득한 발원지로 재차 은유하는 중첩된 수사학에 있다. 흡사 수수께끼를 풀듯 시구의 의미를 하나하나 음미하노라면, ‘천천 2리’에서 나무가 되고, 수원지(水源池)가 되는 시인의 변신에 독자도 동참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이규열 <架沿가는 길1> 신생 가을
이규열의 「架沿 가는 길 1」은 삶의 지난함 속에서 삶의 연대와 용기를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시는 ‘가연(架沿)’이란 장소에 이르기까지 삶의 쓰라림과 슬픔을 적절하게 환기시켜주고 있는 점이 백미다. 삶의 무상함과 고통은 늘 우리들 곁에 삶의 본질처럼 뒤따라오는 것임을 이 시는 가르쳐주고 있다. 그런 가운데 그러한 삶의 본질을 “이내 내 삶의 한 가운데 강물이 되”는 것으로 수용하고 “발을 닦고 다시 신을 신”는 용기를 내는 것, 그러면서 “너의 변두리 삶”과 나의 삶을 서로 가로지르게 하는 연대의식은 시적 건강성을 최고로 높여주고 있다. 삶의 신산함에 지쳐 쓰러지고 싶은 현대인들에게 삶의 그 어찌할 수 없음을 체득케 하여 한 단계 더 깊어진 마음의 상태에서 다시 시작해야 함을 이 시는 깨우쳐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시는 무엇보다 ‘가연’이란 그리운 공간에 끝내 가 닿으려 애쓰는, 아니 어쩌면 끝끝내 어쩔 수 없이 가 닿을 수밖에 없는 삶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것은 삶의 불가피성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우리들 운명을 관조하는 문학의 본질적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이 시는 당대 삶의 현실성에 기반하여 인간 존재의 본질론적 물음을 ‘가연가는 길’이란 구체적 형상 속에 담아 풀어낸 것이라 하겠다.
이문숙 <슬리퍼> 현대문학 8월
산다는 것은 어떤 기억에 대한 반추일 것이고, 시간이 흐른다는 일은 체험이 기억의 공간으로 꽈리를 틀고 자리를 잡는 일이다. 어느 날 문득 꺼내본 기억이 현실화되는 기이한 체험이 자주 일상의 범주를 이룬다. 산다는 일이 원래 그렇지 않을까. 시간의 갈피 속에 쌓였던 슬리퍼의 먼지를 다시 털어내는 동안 조금씩 낡아가는 것.
이문재 <숫매미> 한국문학 가을
매미는 6~7년을 유충으로 지내다가 간신히 울음을 울게 된다. 그 숫매미의 울음 소리를 듣고 암매미가 접근하여 매미의 생식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죽는다. 울음, 생식, 그리고 죽음. 그러니 그 울음은 생명을 잇고자 하는 본능적 몸부림일 뿐 아니라 죽기 전에 이루어야 할 한 사랑을 위한 간절한 상사곡이 아닐 것인가. 시인의 지극한 깨달음 덕분에 이 순간 매미는 암수를 한 몸에 갖고 있지 않아서 슬픈 사랑을 나누어야만 하는 이 세상 모든 동물들의 한 상징으로서 오롯하다. 이제 매미 울음 소리를 허투루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이민하 <카니발> 정신과 표현 7-8월
즐거운 소풍 가운데서 일상에 잠재된 은밀한 폭력과 비루한 인간의 군상을 포착하는 시인의 시선이 매우 날카롭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인간의 즐거움, 여유, 환희 속에 내재된 이기적 측면을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표현해 내는 이 시인의 개성은 이러한 환상적 풍경을 오히려 사실적으로 느껴지게끔 한다는 점에서 빛을 발한다. 소풍을 ‘죽음의 라이브’로 재명명하는 마지막 부분은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표면이 아닌 그 심층에서 파악하는 시인의 통찰력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성희 <계해갯벌에서> 작가와 사회 가을
이성희의 「계해갯벌에서」는 새만금간척을 통해 사라질 운명에 처한 계해갯벌을 대상으로 인간의 자연성과 원초성을 갯벌이란 장소에서 체득할 필요성을 노래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문명이란 이름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발전과 개발이 사실은 얼마나 자연과 그 자연에 깃들어 사는 인간의 본성을 해치는 일임을 은연중 깨우쳐주고자 한다. 이 시는 무엇보다 자연 속에 깃들인 생명의 존재들, 가령 칠게, 방게, 백합조개와 그들이 살고 있는 수억만 심연의 구멍들이 실은 작은 우주요, 생명의 본질이라는 점을 일깨워줌으로써 삶의 권태와 피로에 지친 현대인에게 생명의 소중함과 자연의 청신함을 느끼게 해준다. 그것을 통해 메마른 감수성에 물기가 돌게 하여 최근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는 생태주의적 인식의 필요성을 잘 환기하고 있다. 이러한 주제적 접근을 부드러운 대화체의 어조와 감성 깊은 상상력을 통해 잘 드러내고 있다. 특히 “아, 연한 것이란 얼마나 위험한 것입니까”란 아주 감성적이고도 역설적인 표현을 통해 생명의 본질이 여리지만 사실은 ‘위험’할 정도로 강인한 것이기도 하다는 시인의 통찰을 보여주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깊은 사유에 이르도록 하는 강점도 있다.
이영주 <첫 아이를 낳았는데> 실천문학 가을호
정체성을 잃고 떠도는 몸의 문제는 이영주 시를 이루는 근간이 된다. 이영주에게 있어 몸은 온전한 유기체로서의 형상을 갖추지 못하는 불구화된 신체로 변형되거나, 혹은 감각기관만이 살아 움직이는 그로테스크한 존재로 그려진다. “창문에얼굴을문대는늙은너는일그러진머리통너는길게구부러진것이귀,귀가아니면아무것도아닌가봐너는키우고싶지않은아이야”와 같은 구절이 환기하듯이 생산의 상상력은 곧 혐오와 공포의 심리로 드러난다. 띄어쓰기의 생략은 이렇듯 긴박하고 불길한 자아의 어두운 내면을 반영한다. 이렇듯 잔혹하고 서늘한 시적 이미지를 통해 시인은 부조리와 폭력이 난무하는 현대사회의 일그러진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이원 <꽃의 몸을 찾아서> 현대시학 7월호
시인의 상상력은 보편적 인식에 대한 전환으로 시작된다. ‘꽃’에 대한 시인의 정의는 이렇다. “꽃: 뿌리가 밀어낸 죽음 줄기와 가지가 밀어낸 죽음 죽음들”. 꽃은 죽음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현상이다. 꽃의 생성은 곧 사멸을 의미한다. 이는 다시금 사물과 사물을 규정하는 언어의 문제로 귀결되는데, “꽃이라는 말을 난간에 올려놓았더니 순식간에 사방에 적막을 끼고 창이라는 말이 된다 길에 던졌더니 깨지는 소리는 나지 않고 낯선 그림자를 따라 뛴다 갈기갈기 찢어진 발가락으로 잘도 뛴다”라 표현처럼 말이 지니고 있는 불완전성의 문제로 확장된다. 이원의 사유는 하나의 기표에 수많은 기의를 새롭게 덧입힘으로써 사물의 본질을 궁극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언어의 한계를 보여준다. 언어는 궁극적으로 대상을 온전하게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의 거리를, 대상에 궁극적으로 이를 수 없음을 인식하게 만들뿐이다. “더 이상 밀릴 수 없는” 언어의 ‘벼랑’에 놓였을 때 시인은 어디로 가야만 할까? 그의 내적 고통을 이 시는 무엇보다 잘 보여주고 있다.
이윤학 <억새풀> 시안 가을
암소가 뜯어먹은 억새풀에 착안하여 날카로운 칼과 칼집을 연상하고 있다. 연한 억새풀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칼날처럼 날카롭게 자란다는 상상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억새풀에 맺힌 이슬은 더 이상 순수하고 영롱한 보석으로 비유될 수 없다. 그것은 “이 세상은 투명한 칼집”이라는 긴장된 차가운 상징을 낳는다.
이응인 <용의 눈에 불 밝히고> 경남작가 여름
이응인의 「용의 눈에 불 밝히고」는 우선 안과 밖의 조응에 의한 세계의 중심으로서 자아를 인식하는 행위가 들어있다. 그것은 시를 통해 자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일차적으로 이 시는 인간과 철새, 못물, 물고기, 밤 등이 살아있는 존재들로 격상되어 있고 서로 상호 소통되고 있다는 점에서 물활론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특히 못물에 잠긴 산 그림자가 용이 되고, 수도승이 켜는 절 불이 못물 속의 용의 눈이 되는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연관은 범신론적 자연관의 극치로서 그 상황이 발생하는 극도의 정밀감(靜謐感)을 통해 인간 존재의 무상함을 넘은 영원함과 신성함을 느끼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시의 고처(高處)는 원환적 이미지로 나타나는 못물을 통해 내 안의 ‘앙금’을 비춰보고 그것들에게 빛을 쐬어 ‘은비늘’이라는 승화된 이미지를 얻는 데에 있다. 즉 세계 속의 존재로서 시적 화자는 세계의 질서에 아직 눈뜨지 못해 가슴에 이질적인 탁한 물질을 갖고 있다. 그 물질은 시적 내용으로 볼 때 삶의 근심, 걱정, 욕망 등이다. 그것을 산이 못물에 들어 용이 되고, 수도승이 켜 둔 불빛이 산 그림자에 박혀 용의 눈이 되는 성스러운 장소에서 정화시킨다. 즉 물과 불을 자연의 거울로 삼아 생의 앙금이라는 불순물을 관찰하고 정화해냄으로써, 생명의 성스러움이 살아난 ‘은비늘’이라는 밝은 물질을 획득한다. 이것은 내 안의 속됨을 자연의 신성성와 영원성으로 씻어내림은 물론 자연과 일치된 성스러운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상징적으로 말한다면 비로소 어머니인 세계 품으로 조화되고 조응되어 하나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생활의 실천과 묵상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값싼 깨달음은 아니다. 생활의 전존재를 문명적이고 기계적 삶의 자리에서 벗어나 생명적이고 자연적인 삶의 자리로 옮긴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지혜인 것이다. 그 점에서 이 시는 종교시가 아니면서 삶의 존재성을 깨우치는 신성한 열림이 들어있는 작품이다.
이장욱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세계의문학 가을
‘나’, 그, 그녀, 당신, 이렇게 네 사람이 있다. 이 네 사람은 여러 세계에서 “서로 다른 사랑을 하고 / 서로 다른 가을을 보내고 / 서로 다른 아프리카를 생각했다.” 그들은 “여러 세계에서 모여들었다”가 또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고, 다시 돌아와서는 “여전히 사랑을 했다 / 외롭고 달콤하고 또 긴 사랑을.” 이 시에서 ‘세계’란 사인사색(四人四色)의 내면 세계일 것인데, 이 시는 각자의 내면과 더불어 외로운 이들의 엇비슷하면서도 어긋나는 삶, 흩어졌다가도 다시 모여드는 삶의 무늬를 쿨하게 노래하고 있는 듯 보인다. 시의 내용인즉슨 지금껏 말한 대로인데, 그러나 보시다시피 이런 요약을 늘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이장욱의 시다. 요약 따위는 불필요하다. “당신은 생각나지 않는 음악을 찾아 바다로”나, “무엇이든 생각하지 않으면 물이 돼버려 / 그는 零下의 자세로 정지하고”등에서 무심한 듯 번쩍이는 한 찰나(刹那)의 서정과 시 전체를 부드럽게 통제하고 있는 세련된 리듬 감각을 즐기기만 해도 그만이다.
이재무 <젊은 꽃> 현대시학 9월
시간에 대한 성찰의 자세가 아름답다. 늙어간다는 일은 단순히 살결이 검게 변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늘이 깊어가기 때문이다. 시간이 만들어내는 깊은 음영 아래 삶은 조금 더 넉넉해지고 아름다울 수 있다. 주름 많은 피부 아래 감추어져 있을 사랑의 기억이란 얼마나 혼곤하고 매력적인 것인가. 기억할 무엇을 담고 있는 저 시간의 주름.
이정록 <나무의자> 현대문학 7월
활기 있지만 천박하지 않고, 명랑한 듯하면서도 생의 일부분을 도려낸 듯한 아픔이 짙게 서려있다. 늙어버린 생의 한 귀퉁이를 조용히 지키고 있는 어떤 풍경화.
이종문 <선풍> 시선 가을
이 시에서는 7박 8일 동안 혼자서 방안을 지키며 돌아간 선풍기에서 ‘무시무시한 고독’을 견뎌낸 참선의 경지를 발견하고 있다. 이는 나아가 우리네 인간들도 누군가가 켜놓고 우주 일주를 떠나버려 긴긴 해를 미친 듯이 돌아가야 하는 가여운 선풍기는 아닌가하는 재미난 발상으로 이어진다. 쾌활한 선풍의 시이다.
이창수 <돌담> 시를사랑하는사람들 7-8월호
전통적인 서정시다. 돌담에 깃든 것은 추억일 것이다. 나비는 돌담을 간신히 넘어오는데, 죽은 할머니는 넘어오지 않는다. 무엇인가 저 너울너울 돌담을 넘어오기를, 시인은 기다린다. 그런데 기다림조차도 따뜻하고 부드럽다. 돌담인 것이다.
이하석 <국화> 현대문학 8월
살아있음이란 죽음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국화 한 송이 놓고 죽음을 애도하는 일조차 살아가는 시간의 일부이다. 죽음은 삶을 이어주는 또 다른 시간의 질서. 무심히 부러진 국화 한 송이에 마음 아파하는 이가 있다는 표현 속에 담긴 극도로 절제된 슬픔이 오히려 아름답다.
이향지 <나의 피로 나의 해를> 시를사랑하는사람들 7-8월호
절벽 위 바위 틈에서도 천년을 견딘다는 소나무, 그 곧추세우는 푸른 독설은 피 솟는 자리마다 해 한 덩이씩 새로 띄울 수 있다고 말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작고 가르다란 몸에서 울려퍼지는 야성의 목소리이다. 이 외로운 야성이 시에 강한 울림을 만든다.
장경린 <회전문> 문학판 가을호
이 시는 ‘회전문’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그물 같은 조직’으로 대표되는 현대사회로부터의 탈주가 사실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그 공간으로의 재진입으로 귀결되는 상황을 냉소과 무표정과 아이러니를 섞으며 형상화하고 있다.
장석남 <싸리꽃들 모여 핀 까닭 하나를> 문학사상 9월
가볍게 비상하여 신비화된 자연의 영역으로 이월하지도 않았고, 갑갑한 인간의 질서에 갇혀 절망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시인의 품이 넉넉하게 다가온다. “어느 절에서 보내는 저녁 종소리” 속에서 “처마 끝의 별도 생계를 잇는 일로 나온 듯 거룩해지고”라는 대목에서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는 형이상학적 물음은 어디 끼어들 자리가 없다. 일원적인 삶의 본질에 그대로 육박해 들어갔기 때문이다. 또한, 모여 삶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들이 “싸리꽃들 모여서 핀 까닭의 다른 하나”와 겹쳐지는 순간 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우리의 존재 근거가 문득 확인되는 바도 있다.
전동균 <첫 눈> 현대문학 7월
오랫동안 시를 쓰지 못한 시인에게 산 이마에 살짝 내린 첫눈은 삶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알게 하는 계기가 된다. 마치 생의 첫 시작인 것처럼.
정민나 <판정> 작가들 가을
삶이 문득 낯설게 다가올 때가 있다. 생활과 시는 그 순간에 만난다. 한 쪽 “구두굽이 떨어져 나갔다”. 그래서 세상은 3㎝ 기울어져 보인다. 그 3㎝가 세상을 얼마나 낯설게 펼쳐 놓는가. “한평 남짓 수선소가 법정이다”라는 착상이 재미있다. “땅땅땅” 울리는 소리를 통해 법정과 구두 수선소가 만나는 것이다. “만인을 평등하게/ 억울함 없이 공평하게/ 기울어짐 없이 반듯하게/ 땅땅땅 3㎝ 달아난 세상을 불러 세운다”. 판정을 받고 나니 세상이 문득 새롭게 다가온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새로 돋아난 길 위에 흑장미들이 줄 다투어 피어나는 것을/ 길 위의 집들이 3㎝ 자라난 주춧돌 위에/ 새로 지어졌다는 것을”.
정서영 <지구의> 리토피아 가을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고 했다. 산에서 내려다 본 세상은 얼마나 좁은가. 그 좁은 세계에서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겠다고 아귀다툼 벌이는 게 우리 인간이다. 어진 이는 마치 산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자그마한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오히려 건너편의 입장을 이해하기까지 한다. 시인은 지구의를 들여다 보며 인간을 생각한다. “저 속에 사람의 집들이 퍼즐처럼 이어져 있고?/ 어느 집에 아이가 태어나고?/ 어느 집인가 문득 弔燈이 걸리고?/ 깨알 같은 아이들이 학교로 가고?/ 깨알 같은 어른들이 공장으로 가고?” 시인인 ‘내’가 그 안에서 살고 있다. 4연이 이를 보여 준다. 특히 “여전히”라는 단어가 눈길을 끈다. 시인은 “여전히” 서 있던 자리에 존재한다. 그렇지만, 아마도 그는 이전의 그가 아닐 것이다. 지구의 바깥을 한바퀴 돌고 다시 그 자리에 섰기 때문이다.
정영 <붉은 찬미들 안녕> 문예중앙 가을
시키지도 않은 피자가 배달되어 온다. 그러나 이것도 인연일 터, 애초 나란 존재도 누가 시켜서 이 세상에 배달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잘못 배달된 피자로부터 촉발된 화자의 상상은 자신의 기원을 향해 거침없이 거슬러 올라간다. 출생의 현장, 혹은 이 시의 표현대로라면 ‘배달’의 현장을 묘사하고 있는 시인의 수사는 모호하면서도 매혹적이다. 예컨대 “아버지가 처음 나를 내려다보았을 때 / 흰 모래 구름이 내려와 봉분 같은 심장을 만들어주었”고, “태어난 이후로 내가 가장 빨개지자 / 바람의 영혼들이 (…) 붉은 상자야, 안녕”이라고 나에게 인사하는 식이다. 태초의 나는 ‘붉은 상자’ 혹은 ‘붉은 운명’으로 명명되어 있거니와 ‘바람의 영혼들’ 혹은 ‘바람의 눈동자들’이 동화의 한 장면에서처럼 나의 출생을 ‘찬미’한다(“우우- 바람에게 불려나오는 내 붉은 찬미들!”). 태어난 나는 세상에 안녕, 안녕, 안녕하고 인사를 건네지만 이 동화적 천진함은 “오, 이 생에 잘못 배달된 나여!”에 이르러 아이러니하게 전복된다. 더러 까칠까칠한 대목들이 없지 않지만, 이즈음 정영의 시들은 동화적인 발상과 활달한 언어들로 삶의 페이소스까지를 상쾌하게 끌어 안고 있다. 근작들 중 이 시가 특히 빛난다.
정원숙 <투 헬(to hell> 시작 가을
현대 문명의 결정체인 대도시의 어두운 밤풍경을 지옥으로 형상화한 이 시는 록 음악의 구절을 절묘하게 절취(cutting) ․ 배합한 까닭에 산문시임에도 불구하고 리듬감이 살아 있다. 동일 어구의 반복과 나열은, 비록 외국어임에도 불구하고, 기호의 촉지성을 최대한 살린 시인의 의도에 따라 소리의 읊조림 자체만으로도 독자를 ‘여기’ 아닌 이국적인 ‘다른’ 장소로 이끈다. 이 시만의 고유한 리듬은 ‘hell’이라는 비유와 달리, 음습하고 우울한 도시의 뒷골목과 그곳에 번져 나오는 절망과 고통, 다른 삶에의 희망과 좌절을 아름다운 노래로 만든다.
정원숙 <은박 접시> 시를사랑하는사람들 7-8월호
소풍을 가고 있는 화자의 독백은 ‘소풍 간다’와 ‘너무 좋아’의 반복으로 경쾌함을 형성하지만, ‘제기랄’의 반복이 보여주는 냉소와 환멸을 동반한다. 트럭에 실려가고 있는 상황이 추락과 사고와 아픔과 풍장의 상황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독특한 어조의 실험을 통해 제시하는 점에서 참신성을 보여준다.
정진규 <장마> 작가세계 가을
정진규의 「장마」는 전체적으로 비오는 배경을 바탕으로 늙은 몸에 대한 단상을 펼치고 있어 어둡고 우울하다. 그렇지만 그러한 시적 배경이 삶의 비애로 흐르지 않고 삶의 체득과 수용으로 한 단계 심화되면서 삶의 본질을 직시는 건강성을 담고 있다. 특히 이 시는 삶의 늙음에 대한 탄식과 몸의 부실함에 대한 슬픔을 “푸른 곰팡이”로 포착해내고 있어, 노시인의 번득이는 감각이 아직 살아있음을 알게 한다. 늙음을 통한 몸의 약화와 소멸의 이미지에 대립한 “슬픔이 살찐다”란 확대의 이미지는 놀라운 인식적 역설을 가져오는 부분도 빠뜨릴 수 없는 시적 통찰이다. 그러면서 ‘새’라는 단어를 언어유희 기법을 통해 다양한 의미로 쓰면서 삶의 그 어찌할 수 없음을 담담하게 표현해내고 있는 것은 익살스러움이 오히려 애잔함이 되는 놀라운 시적 경지라 하겠다. “다친 몸은 정직하시다”란 언명은 장난스러움이 있으나 삶의 무상함을 수용하고 극복하려는 시인의 내적 긴장성을 여실히 느끼게 하는 표현으로서 시인의 몸에 대한 화두의 한 끝을 보는 듯하다.
조동범 <주유소> 세계의문학 가을호
이 시는 현대문명의 상징인 자동차를 통해 속도에 대한 비극적 상상을 행한다. 이 시에서는 현대의 자동차와 백악기의 공룡을 연결하는 상상력이 독특하다. 주유원을 매개로 과거 속도와 힘을 상징하던 공룡과 현대에 그것과 등가를 이루는 자동차가 이어진다. 이 시의 냉담한 어조와 시선은 멈추어선 채 속도를 바라보는 자의 거리감에서 온다.
조용미 <불도> 창작과비평 가을
학은 잡으려고 산에서 날아올랐다가 바다로 떨어진 한 스님이 있었다. 그 스님의 심장이 떨어진 곳이 ‘불도(佛島)’가 된다. 그 섬에는 물이 없어서 사람이 살 수가 없다. 묵언수행의 공간일 뿐. 학을 간절히 그리워하다 목숨까지 내던져버린 한 스님의 심장이 떨어져 생긴 섬이니까, 이 섬은 그야말로 (물이 없어) 목마른 사랑의 섬, (묵언수행의) 침묵으로만 말할 수 있는 그리움의 섬일 터다. 이 섬에서 화자는 “옛 스님처럼 바다로 뛰어들어 제 심장을 바다 저 멀리 떨어뜨리게 될 사람을 볼까” 두렵다. 누가 또 제 심장을 기꺼이 바닷 속으로 떨어뜨리고 말 것인가. ‘나’인가, ‘그’인가. 화자의 두려움은 무연히 현실화된다. 그리고 ‘나’는 붉은 심장 하나를 줍고 내 곁의 ‘그’를 향해 마치 “처음인 양” 말을 건다. 그렇다면 이 붉은 심장은 ‘나’의 것인가, ‘그’의 것인가? 모호한 대로, 붉은 심장을 주워드는 마지막 한 순간이 이 시의 발화(發火) 지점이다.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능란하게 유린하고 있는 연애시.
조은 <아침골목 1> 열린시학 가을호
사과를 먹으며 빠져나가는 여자, 토마토를 손에 든 청년, 어젯밤 울부짖으며 사랑을 호소하며 귀가하던 여자, 책가방을 멘 아이 등 아침 골목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사람들의 맨 얼굴을 제시함으로써, 시인은 우리 삶의 일상을 사로잡고 있는 배후의 그림자를 보이지 않게 드러낸다.
조창환 <달 없는 밤> 시안 가을호
시적 화자는 달 없는 밤에 힘세고 검은 청년이 굵은 오줌을 뿌리는 장면을 보고 핏속의 묻어둔 다른 생을 살고 싶어한다. 다른 생은 균형의 줄을 끊어버리고 폭발하고 싶은 생의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다. ‘달 없는 밤’은 이 응축된 에로티즘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이다.
천양희 <울음> 시안 가을호
이 시는 ‘혁지’ ‘시크리트’ ‘황새’ 등의 이름을 가진 가상의 새를 등장시켜 울음의 여러 차원을 형상화한다. 사람을 보면 눈물로 변해버리는 새와 간절할 때 우는 사람을 병치함으로써 시인은 울음의 신성한 경지를 시적으로 환기시킨다.
최문자 <새> 시사사 2005년 9-10월호
화자가 히말라야에서 들은 수백 마리의 까마귀 울음소리는 주검을 먹는 극단의 순간에 터져나온다. 이 험한 허공의 식사를 마치고 까마귀는 쏜살 같이 사라지며 해체된다. 이 새의 모습은 중력과 높이와 날개를 거부하는 불길하고 고고한 운명의 힘을 상징한다.
한우진 <물고기 한 마리를 기다린다> 시인세계 가을
자연과 어우러진 육체의 관능성을 예리하게 포착해낸 시이다. 여성으로서 성숙해가는 누이에 대한 농밀한 암시와 비유가 두드러진다. “살 오른 물고기 한 마리를 기다린다”는 화자의 건강한 성숙 과정도 자연 본래의 생명력을 연상시킨다.
함민복 <나마자기> 작가세계 가을
이 시에서는 청산별곡 풍의 애조 띤 가락으로 소멸의 징후를 노래한다. “너는 왜 해질녘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냐”라는 시인의 탄식은 모든 소멸하는 빛의 아름다움에 바치는 안타까운 헌사로 읽힌다. 시인은 망국보다도 더 큰 비극이 될 문명의 위기와 그 경쾌한 속도를 구성진 가락에 얹어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홍은택 <모나크나비> 리토피아 가을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생의 비의(秘意)’가 있다. 가령 기어코 제가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여 산란하는 은어의 삶이 그러하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우리 인간들도 자신이 기원으로 조금씩 회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점점 더 강하게 덧입히면서 말이다. 이 순간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확고한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여기 모나크나비가 날아간다. “한목숨이 알을 슬어놓고 숨진 자리에서 새 목숨이 태어나 길과 길을 잇는다”. 그렇게 그들은 “몇 대에 걸쳐 최초의 입사귀로 정확히 귀환”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비의에 세계가 함께 한다. “나비알 크기의 태양이” 모나크나비과 함께 뜨고, 매일매일 새롭게 거듭난다. 아,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날아가는 것일까. 우리를 이끄는 힘은 전생의 그 무엇이었을까.
황동규 <시여 터져라> 시안 가을호
황동규 시인은 제대로 담아가기 힘든 이 세상 구석구석을 쥐똥나무 울타리, 긴 여름 저녁, 적막한 새소리, 귀싸기 때리는 싸락눈에서 발견하고는 ‘시여 터져라’라고 외친다. 시는 이처럼 세상 구석구석의 아름다움과 슬픔에서 기적처럼 터져나오는 은총과 같은 것이다.
황병승 <첨에 관한 아홉소ihopeso씨氏의 에세이> 세계의문학 가을
‘아홉소’는 황병승이 자신의 첫 번째 시집에서 이미 등장시킨 바 있는 익숙한 캐릭터다. ‘나는 그러기를 바란다(I hope so)'라는 뜻의 이름을 갖고 있는 그는 이번에는 사촌 동생 ‘첨’을 대동하고 있다(“첨, 내 동생 / 나는 그러기를 바란다, 는 너의 사촌 형, 아홉소”). 사촌형인 아홉소가 첨을 회상한다. 첨은 인생을 낙관하는 그 어떤 것들에도 마음을 주지 않는 불온한 동생, 그런 그에게 아홉소는 연민 혹은 연정을 느낀다(“내가 없으면 첨, 너도 없다, 그런 생각”). 첨 덕분에 아홉소는 “생각이라는 것을 처음 하기 시작”한다. 시를 통해 짐작컨대 그것은 아마도 성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일 터, ‘첨’이라는 이름은 그 고민을 처음(‘첨’) 시작하게 한 어떤 대상의 이름으로 선택된 것이겠다. 고다르의 누벨바그 따위를 섭렵하면서 ‘나’의 생각은 깊어져 가고, “서서히 아주 서서히 몸속의 세균이 고름으로 흘러내리는 시간들처럼 서서히 그리고 나는 완전히 그 어떤 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생각해도 더 이상 그게 서지 않”는다. 아홉소는 이제 예전의 그가 아니다. “첨, 나는 너의 사람이 되고 싶어 진심으로”라고 말하고 있으니 아홉소는 이제 사촌 동생인 첨을 사랑하게 된 것인가. 그래서 “나는 네가 ‘형’ 혹은 ‘아저씨’라고 불러주기보단 머뭇거리는 두 팔을 뻗어 포옹을 청해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던 것인데, 첨은 아홉소의 그런 바람과는 달리 “병신, 난쟁이 주제에”라고 말하고는 부리나케 달아난다. 왜 ‘달라진’ 아홉소는 난쟁이(명백히 성적 함축을 담고 있는 비난으로 보이는)라고 비난 받아야 하는가? 우리 시대는 이제 누벨바그의 시대 만큼은 된 것인가? 나 역시 그러기를 바라지만(I hope so), 그렇지가 않아서 이 시는 슬프다. 「여장남장 시코쿠」에 이어져 있는, 그만큼 애잔한 어떤 비가(悲歌).
황학주 <쇠귀나물> 시안 가을
‘쇠귀나물’이라는 이름에 착안하여 그럴 법한 사연을 엮어낸 시이다. 소귀 모양의 연약한 풀잎과 나이 많은 남자를 만나 사느라 학교도 마치지 못한 누이의 안타까운 삶이 이어진다. 쇠귀나물처럼 소리없이 잊혀져온 누이의 삶은, 그러나 “쇠귀나물 잎 떨어진 자리가 구드러지고 있다”라는 마지막 구절에서처럼 단단하게 아물어갔을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