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사람
엄마는 내가 11살 때 돌아가셨다. 홑이불로 덮여진 채 엄마의 옆에 두 무릎을 치켜세우고 “엄마가 죽었다.”라고 흐느끼던 모습, 그 당시는 아무 것도 몰랐었다. 장례 치르던 날 “동네 어른들이 마지막 가는 길이니 울어야 된다.”고 하였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는 철부지였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라야 엄마가 보고 싶어졌고, 그리워지기 시작하였다.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었지만 엄마는 나타나질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공부 끝나고 집에 오면 엄마는 언제나 따뜻한 죽을 주었다. “배고플 테니 어서 먹어라.”하시며 내 앞에 놓아 주셨다. 항상 내 손을 잡고 병원 다니시며 “엄마가 병 다 나으면 서울 친척집에 데리고 갈께.”라고 약속하신 엄마. 이 생활도 잠시 엄마는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처음에는 엄마가 밉고 또 미워 원망하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좋은 약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가신 엄마가 말할 수 없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를 위하여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생각하기를,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주는 따뜻한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랑도 받아 본 자가 줄 수 있다고 하듯 나 역시 아이들을 사랑할 줄 몰랐던 것이다. 엄마로서의 자격 없음은 물론,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라고 엄마라는 이유 하나로 아이들을 다스렸다. 아들 녀석이 소변을 늦게까지 못 가린다고 너그럽게 대해 주지 못하여, 밤이고 낮이고 혼을 내주던, 엄마였다. 유치원 가기 싫다고 하면 때려서라도 억지로 보냈고, 친구들하고 놀러와서 좀 실수를 하면 그 자리에서 꾸짖고 나면 어느 사이 아이들은 다 가버리고 말았던 일. 무엇이나 내 기준이었고 내 기분대로였다. 거기에다 억지까지 부리던 한심한 엄마였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들의 눈에 맞추어 이해를 해주고 따듯하게 해주었으련만 엄마로서 아이들한테 창피하기만 하다. 잔소리 시작했다 하면 끝이 없었고, 오히려 아이들은 큰집에 가는 것이 편안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자신이 싫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이해하며 변했다는 말을 들으면서 조금이나마 아이들에게 위안이 되었다. 한편으로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어린 가슴에 상처만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는 못난 엄마였었다. 그래서인지 아들 녀석은 말이 없다. 나에게 곁을 안 준다. 때로는 서운한 마음이 들면서 내가 저희들한테 준 상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를 한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에게 큰소리 친다. “너희들은 엄마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며 감사해야 한다.”고 “엄마는 엄마 소리를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 없으니까.” 지금도 엄마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아마 지금까지 엄마가 살아계셨더라면 이렇게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지는 않겠지. 있을 때는 모르고 없으면 아쉬워지는 우리 인간의 미숙함. “엄마 나도 엄마가 되었지만, 너무 부족한 점이 많은 엄마에요. 엄마도 그러셨을 거예요. 제가 엄마를 그리워하듯 저희 아이들도 언젠가는 저를 그리워하며 보고 싶어하겠지요?” 저는 그것으로 만족하렵니다. “엄마, 사랑해요”
아버지
동서의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불현듯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나에게 엄마나 마찬가지셨다. 기억으로 남은 엄마의 죽음보다도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하면 무섭고 두렵기까지 하다. 그리고 애닯음도 더 크게 남아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어린딸 넷을 남겨두고 먼저 저 세상으로 가셨다.아버지는 지금 내 나이보다도 훨씬 젊으신 38세에 어린 딸 셋을 두고 살 길이 얼마나 막막하셨을까? 그렇다고 경제적인 여유도 없으셨으니 말이다. 측은한 생각이 온 몸을 파고든다. 제일 맏이인 나는 11살, 동생은 7살, 막내 동생은 3살이었다. 동네 어른들은 제일 큰 나는 남의 집 주고, 동생 둘은 고아원에 맡기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차마 그럴 수가 없으셨던지 함께 살았고 현재 우리들은 다 출가하여 나름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 TV에서 사람 찾는 프로를 볼 때마다 아버지께 고마움을 느낀다. 그때 그 당시 동네분들의 말을 따랐더라면, 우리는 이산가족이 되었을 것이며 아버지 역시 아픈 마음을 어떻게 달랠 수 있었겠는가? 새삼스러이 부모의 사랑을 느낀다. 중학교 입학하던 날 아버지는 자장면을 사 주셨다. 그것도 한 그릇을 시켜 나만 주고 바라만 보고 계시던 아버지. 내가 기쁨이며 희망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께 얼마나 잘해드렸는지……. 결혼생활 이후로 생활비 보내 드리는 것을 큰 효인양 당당했었고, 아버지는 늘 미안해만 하셨다. 한창 사춘기 시절, 집에 있기 싫어 동네분이 취직시켜 준다는 말을 듣고 도시락 속에 메모 쪽지로 “찾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훌쩍 떠나버렸던 나, 그때는 내 생각이 옳은 줄 알았었는데, 자식을 키우고 보니 이제야 뒷북치며 알게 된 부모의 마음. 아버지는 얼마나 허전해하셨을까 생각한다. 맏이인 나는 아버지께 불효만 해드린 것 같다. 언젠가 아버지는 서울 동생 집에 다녀가셨는데 동생 남편이 10만원짜리 수표를 드렸다고 한다. 그것이 신기한 듯 여러 번이나 쳐다보고 만지셨다는 얘기를 동생으로부터 듣는 순간, 어찌나 목이 메이던지 울고 또 울었었다. 자식들은 부모에게 왜 그리도 인색하게 되는지……. 자기 자식이나 가족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쓰건만, 부모에게 들어가는 모든 일들은 생각을 하고 또 하곤 한다. 나 역시 아버지가 올라오신다고 하면, 좋으면서도 가계를 생각하는 속물근성이 나타나곤 한다. 불교에서 부모의 은혜는 ?갰柰堧? 써서 부처님께 보시하며, 부모를 어깨에 태우고 뼈가 드러나도록 돌아도 그 효를 다 못함.”이라고 한다. 성서에는 “부모에게 효하는 자는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이며, 자기의 죄가 감해지는 행위”라고 한다. 이런 “효”를 몰라서 못하는 이는 없다. 다만 실행으로 옮길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끔씩 술 잡수시고 사후의 문제를 얘기할 때 아버지는 은근히 매장을 원하시는 마음이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말대로 “아버지 걱정 마세요. 땅에 편히 모셔드리겠습니다.”라는 시원한 답을 지금까지 못해 드리고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원하는 답을 해드렸으면 좋으련만 나는 못하고 있다. 왜 그런지 자신이 없다. 욕심과 불편함 때문일까? 우선 전화를 걸어야겠다. 이런 자식의 마음도 모른 채 기뻐하시겠지. “아버지 여기 춘천인데요.” “응 다들 잘 있냐?” 아버지와 나는 길게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고마울 뿐이다. 역시 자식이 부모의 속마음을 어찌 알 수 있으랴!
시 간
시간은 모든 것을 성장시키고 열매를 맺게 한다. 우선 나 자신을 보아도 그렇다. 철부지였던 내가 지금은 나의 삶을 뒤돌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갓 시집온 나는 시집에서 넷째 며느리였다. 위로 동서가 세분이나 계셨으며, 시집 형제들은 팔남매나 되었다. 누구나 다 그러한 마음을 가졌겠지만, 나 역시 시집가면 고부간의 갈등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늘 생각을 하였었다. “자기 할 나름이 아니겠느냐”라고 하면서. 그러나 그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같은 동네에서 살던 셋째 형님은 본인을 언니처럼 생각하라며 푸근함을 주었다. 친정에서 맏이였던 나는 그 말이 고마워 솔직하게 나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하루도 안되어 뻥튀기가 되어 내 귀에 들려오는 어처구니없는 말의 홍수는 나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남편의 잦은 해외생활 때에도 친정으로 돈을 빼돌린다는 이야기로 어머니는 방식구들과 이야기를 하셨다. 또한 위의 며느리들 같지 않고 고분하지 않으며, 바른 말 잘하는 나를 성질이 못되었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우습고 나의 잘못이 많은 듯하다. 철이 없었음이 분명한 사실이다.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홀로 8남매를 키우신 어머님. 훌륭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어머님한테 갓 시집온 20대 초반의 며느리가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졌을까? 아들이 중동으로 나갔을 때 그 돈의 출처가 궁금해 가끔 물으셨다. “걱정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요?” 어머니는 무심히 내뱉던 그 소리가 얼마나 서운 하셨을까? 그렇다고 해서 자상하지도 못한 나는 늘 쌀쌀맞기만 했었다. 지금은 그것이 부모가 자식에 대한 노파심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때에는 사사건건 참견하시는 어머니가 무조건 싫었던 것이다. 1년이란 짧은 시간을 어머니와 함께 살 때의 일이다. 앞뒤로 밭이 있었으므로 어머니는 늘 밭에서 사셨다. 농사라고 전혀 모르던 나는 김도 맬 줄을 몰랐다. 아이들 키운다는 이유로 밭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점심 때가 되어도 “어머님, 점심 잡수세요.”라고 부르러 나간 적도 없었다. 당신께서 배고프시면 늦게서야 들어오시어 점심을 드시곤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스스로의 방어였을까? 친정이 어려웠던 나는 시집가서 흔히 기죽어 살지 않겠다는 몸부림 이었을까? 아니면 성격이 우유부단하지 못하고 흑과 백을 가려야 직성이 풀리는 때문이었을까? 아마 성격 탓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더 든다. 30대에는 살아간다는 것이 자신만만하고, 의기양양하고, 나만이 모든 걸 잘 아는양 늘 당당했었다. 무엇이나 다 잘해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지금 생각하니 얼마나 어리석고 교만하였던가를 생각하게 된다. 어떤 책에서 보았는데 이런 글이 마음에 와 닿았다. “내가 젊었을 때 나는 똑똑한 사람들을 훌륭한 인간으로 알았다. 이제 나이가 들어 나는 친절한 사람들이야말로 훌륭한 인간임을 안다.” 이 내용을 여러 번에 걸쳐 반복 읽으며 깊이 생각했었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주었던가. 바른말한다는 명목으로 상처만 주었으리라 생각하니 자신에게 미안함으로 다가서며 고개가 수그러졌다. 이제부터라도 넉넉하고 따듯한 마음을 가지자며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누구보다도 어머니에게 잘 해드려야 하는데, 어머니를 보면 몸과 마음이 움츠려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못난 며느리를 인정해 주시며, 들리는 말에 의하면 좋은 평으로 이야기하실 때 송구스런 마음이다. 역시 자식이 부모의 속뜻을 어찌 알 수 있으랴! 장마진 후의 물이 처음에는 흙탕물로 흐르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맑은 물로 변하듯 우리는 서두르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어린아이가 갑자기 어른이 될 수 없듯이 시기가 있다. 그래서 “세월은 약”이라 하지 않던가!
눈 물
유난히도 눈물이 많았다. 초등학교 시절에 옆에서 누군가가 놀리느라고 “운다, 운다.”고 말하면 그대로 울어버리고 마는 울보였었다. 남편의 잦은 해외생활로 어린아이들을 키우며 살았을 때에도 무척이나 외로웠고 정이 그리웠었다. 남편이면 내 행복을 책임져 줄 것으로 알았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커져 갔을 때, 나는 나의 삶에 심한 열등감을 느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리 서러울 것도 없었을 텐데……. 커다란 방에 아이들이 양쪽에서 쌔근쌔근 잠들고 나면 허전함으로 다가오는 방안의 공기는 늘 무거워졌고, “이것이 아닌데.”라는 생각으로, 먼 곳에 있는 남편에게 화가나기 시작했었다. 그러할 때면 온갖 상상을 초월하여 비극의 주인공인 나를 등?壤쳐? 스스로 처량한 신세가 되어 울고 또 울곤 하였다. 나름대로 풀 수 있는 방법이라곤 울음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한바탕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해지고 마음 또한 가벼워졌다. 그렇지만 마음은 늘 허전함으로 남았고, 무엇인가를 찾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채워지지는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젊은 나이에 집 장만하여 알뜰히 산다고 말을 하였지만 “알뜰이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했었다. 갈등은 위기의 변화라고 했던가. 다시 찾게된 신앙과 뒤늦게 시작한 배움으로 나의 삶은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공부는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으며, 행복함과 기쁨으로 나는 삶의 의미를 찾게 되었다. 남편은 늘 오토바이로 나를 학교에 태워다 주어 동생들에게 부러움을 받기도 하였다. 이 생활도 잠시 갑작스런 남편의 교통 사고로 나는 시집 식구들에게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는 공부였었다. 그날은 남편을 병원에 혼자 두고 학교를 갔었다. 담임 선생님의 부르심에 가보았더니, 시누이 둘이 와 있었다. 웬일이냐는 표정을 지었더니 부근에 사는 형님네 집으로 가자고 한다. 가는 도중 혹시 남편의 증세가 더 심한 건 아닐까 하는 불길한 마음과, 내 공부에 못마땅하게 여기던 시집 식구들의 모습이 스쳐갔다. 그 와중에도 빼먹는 수업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었다. 대문으로 들어서고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시누이는 핀으로 묶고 있던 내 머리를 낚아챘다. 안경은 동강이를 내고 한쪽 구석으로 떨어져 나갔다. 그럴수록 나는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한참 후에서야 형님에게 말을 걸었다. “나 때문에 미안해요.” 하고 피식 웃으며 대문을 나섰다. 수업은 이미 끝났지만 챙겨야 할 소지품 등으로 발길을 학교로 옮겼다. 내리쬐는 뜨거운 7월의 햇볕은 잘 참았어. 지는게 이기는 거라잖아 하는 속삭임으로 위로를 해 주었다. 평상시 같으면 분해서 울고 울었을 나였지만 그때는 울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 당시 시누이들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본인들의 오빠는 의식이 없는 혼수상태인데도 부인이라는 자는 공부한답시고 가방 챙겨들고 나서니 그 모습이 좋게 보였겠는가. 내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승자는 나중에 웃는 것이라며 두고 보자 라는 오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결국은 남편의 축하를 받으며 졸업의 기쁨과 눈물도 흘렸다. 지금도 눈물은 여전하다.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열등감의 눈물은 더 이상 흘리지 않는다. 내적인 풍요로움에서 넘치는 감사의 눈물로 이제는 바뀌었다. 신혼 초의 눈물의 맛은 짠맛이었을 것이고, 지금 흘리는 눈물은 단맛이 나리라 생각한다. 눈물을 “영혼의 눈물”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는데 아마 “눈물은 마음의 혼을 나타내는 엑기스”같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없어도 넘쳐도 안 되는 눈물, 마음을 잘 다스려 흘리는 눈물은 오히려 “인간의 냄새”를 풍기는 것이 아닐까 하며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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