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지명유래
중앙(中央)
조동시장과 안경다리 사이에 있었던 함백광업소 종업원들의 집단 거주지를 말한다. 광업소가 들어서고 전국에서 흑진주의 꿈을 쫓아 사람들이 몰려들자 풀밭이었던 곳에 사택을 지으면서 생겨난 지명이다.
1972년 수해 전까지 현재 오미아코리아공장이 들어선 곳엔 큰 연못과 예비군훈련장이 있었고 그 아래로는 벽돌로 지은 신사택이, 신사택 아래로는 기름먹인 나무로 지은 구사택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또 구사택 아래로 지금의 정선균이연구소 남쪽 교회 위에 큰 종합병원이 건립되어 조동리 중심마을이 되기도 했다.
1972년 수해로 구사택과 병원 등이 떠내려가거나 훼손되어 구사택자리와 연못이 있던 예비군 훈련장 자리에 한 동에 다섯가구가 사는 사택 백여동을 다시짓고 '중앙사택'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3년 10월1일 함백광업소가 문을 닫자 이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뿔뿔이 떠나게 되었고 빈집으로 남아있던 사택은 모두 헐려버리고 지금은 석회석 가공업체로 다국적 기업인 오미아코리아주식회사와 유진철망, 정선균이연구소가 들어섰다.
옹기점터
새골 이씨 묘 앞 구릉에 있었다. 석영 장석 따위의 암석이 풍화작용에 의해 분해된 점토(粘土)가 많았던 곳으로 옛날부터 물동이, 소래기 등을 만들던 옹기점이 있었으므로 '옹기점터'라고 불렀다.
옹기는 진흙만을 초벌구이해 만든 윤이나지 않는 질그릇과 유약인 오짓물을 발라서구운 오지그릇을 통틀어 말하며 그 종류와 기능도 다양하였다. 간장을 담는 큰대독, 된장 막장을 담가놓는 중두리독, 장아찌 등을 담아놓는 작은 항아리 등이 있으며, 그외에도 뚝배기, 시루, 소줏고리, 물동이, 술독, 화로, 장군, 굴뚝, 소래기 등 사용 용도에 따라 다양했다.
이곳에 있던 옹기점에서는 주로 장독과 물동이, 시루 등을 많이 만들었는데 1960년대 후반 함백광업소 사택과 훈련장이 들어서면서 문을 닫게 되었다. 그후 옹기점터 위에서는 함백광업소가 폐광될때까지 광원 월급이 나올 때마다 큰 장이 서곤 했다.
옹기점터가 사라진지 30년이 지난 지금 그 자리엔 석회석을 가공해 탄산칼슘을 만드는 공장인 한국오미아 주식회사가 들어서 옛지명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물땅고
함백여중고 위에서 구 복지회관 건물에 이르는 곳에 있었다. 길운 정수장이 세워지기 전까지 땅에서 물을 뽑아 올려 중앙사택 주민들의 식수를 공급해주던 곳이다.
땅속에서 솟은 물을 저장할 수 있게 콘크리트 물탱크를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이 '물탱크'를 '물땅꼬'라고 불렀다. 물땅꼬 둘레로는 높이가 30m가 넘는 아름드리 미류나무가 빽빽하게 서 있었다. 1972년 조동리 일대를 휩쓴 수해로 매몰된데다 길운 정수장이 세워져 덕천리에서 끌어들인 동강물을 정수해 식수를 공급하면서 완전히 폐쇄되었고, 지금은 그 자리에서 나오던 물을 이용해 송어양식장이 들어서있다.
상여골
함백여중고 바로 뒷산 철길 너머에 있는 골짜기다. 1980년대 중반까지 조동리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던 상여를 둔 집이 산자락 아래에 있어 생긴 이름이다.
십여년 전까지만해도 산에 올라 병정놀이를 하는 어린애들이 많았지만 음산한 기분 때문인지 상여집이 있는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골짜기 위쪽으로는 1970년대 함백초등학교 통일동산으로 무궁화를 심고 가꾸었으며 하루종일 해가 들고 봄이면 산벚꽃과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는 아름다운 골짜기다.
솔밭길
함백중앙교회 뒤쪽에서 산넘어 솔밭에 이르는 길이다. 함백광업소가 한창일 무렵 산마루 위 큰밭 주변과 산넘어 절골에 살던 십여가구의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던 길이었으며 함백초, 중학교 등에서 솔밭으로 소풍을 갈때 오르내리던 길이었다. 길 옆 작은 골짜기로는 물이 흐르고 산마루부터는 큰 밭과 낙엽송 밭이 있었으나 아름드리 낙엽송밭은 잘려나간 밑둥 흔적만 남아 있다. 지금은 오가는 사람이 드물어 길 중간쯤 부터는 잡초가 우거져 있다.
물레방아터
오미아코리아 공장 남쪽 함백선 철도변에 있었다. 예전에 큰 물레방아를 설치하여 곡식을 찧었으므로 '물레방아터'라고 한다. 1972년 수해때 20여가구의 초가집과 함께 마을 대부분이 떠내려가면서 사라졌고 지금은 철도변에 흔적만 남아 있다.
철도변촌
함백광업소와 함께 함백선 철도가 개설 되면서 철도변에 형성된 마을로 한국오미아 공장 옆 함백선 철도너머에 있었다. 1970년대 후반 까지만 해도 10여가호가 살았으나 광업소사택으로 이주하면서 마을이 없어지고 지금은 우물터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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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용선, 『정선 신동읍 지명유래』, 1996, 정선아리랑연구소
첫댓글 ㅋㅋㅋ...추억이 새롭군여...그당시 나의 놀이터였는데...친구랑 뒷집 형이랑 예비군 훈련장서 세줄타기랑 빨간 십자가가 그려진, 케이블카 라구 해야하나 도르레 라구 해야하나...하여튼, 고추를 내놓구 그것을 타구 연못위를 지날때 뛰어 내려 수영 하던때가 엊그제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