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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心法要 제 4 강]
非大非小
비대비소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며,
超過一切限量名言縱跡對待하야
초과일체한량명언종적대대
일체한량과 이름과 말과 종적과 상대적인 것을 뛰어넘어서
초과일체한량명언종적대대-초과했다 뛰어넘었다 지나가버렸다. 무엇을, 일체한량- 한계와 한량, 한과 량이 얼마만치 또는 어느 정도로, 이런 것을 다 넘어버렸어. 마음이 빨갛다하려니까 파랗고. 파랗다하려니까 노랗고. 일체 이름과 말 설명을 다 초과해 버렸어. 그리고 일체 종적의 자취가 다 지나가버렸어. 옛날생각하고 가서 이야기를 해 보니까 그새 영 사람이 달라져 있거든. 마음이라고 하는 게 어떤 한 궤도에 딱 이렇게 정해진 대로 가는 게 아니에요.
늘 우리가 그러지요. 사람 변했다고 변하게 돼 있는 게 마음이고 사람이야. 조금 늦게 변하고 빨리 변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야. 또 변해야 돼 그게 발전이거든요. 잘못 변할 수도 있지만 대게는 발전적인 좋은 방향으로 변해야 되는 거야. 어차피 변하게 될 것이 마음이라면 좋은 방향으로 변해가야지.
종적은 정해져 있는 것이 없어요. 종적을 뛰어 넘고 자취를 뛰어넘어야 되요.대대라고 하는 것은 상대를 뜻하며, 여기 이 조건에는 이래야 된다는 그것이 상대거든요. 예를 들면 커피엔 설탕을 넣어먹어야 된다고 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넣지 않고도 얼마든지 먹고 또 다른 것도 얼마든지 넣어도 되거든요.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이런 마음을 쓸 때는 상대는 이래야 되고 또 어떤 현상에는 푸른 하늘을 보고 산에 가야 되겠다고 용기 내는 사람. 꼭 가야 되겠다고 혼자서만 고집해도 맞지 않는 말이야. 이런 날 앉아서 공부하지 뭘 산에 쫓아 따니냐. 이 말도 맞는 말이잖아요. 산에 가야 된다고 하는 사람도 맞는 말이고, 앉아서 공부해야 된다는 사람도 맞는 말이고, 이럴 땐 놀기 좋다고 전화해서 친구 불러 내 만나서 노는 것도 맞는 말이기에, 전부 뛰어 넘어 대대가 없어. 우리 마음은 내가 마음 쓰기에 달렸지.
날씨 좋다고 꼭 이래야 된다는 세상의 법이 어디 있습니까. 부슬비 오면 부지런한 사람 일하기 좋고 게으른 사람은 놀기 좋고. 다 맞잖아요. 우리 마음이 이런 상황에선 꼭 이래야 된다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입니다. 그건 그 사람 생각이고 나는 내 생각이고. 그럼 알겠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알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집안평화죠.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데, 왜 당신은 그런 생각을 하지 참 이상도 하다. 고 이렇게 되기 시작하면 그만 엇나고 서로 빗나가는 거지. 또한 그렇게 되게끔 돼 있어 사람이라는 게 이것 봐요. 대대라고 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꼭 고정된 생각으로 해야 되는 것은 절대 없다는 거죠. 그걸 다 초월해 있는 게 사람이고 사람의 마음이다.
當體便是라
당체편시
그 당체가 곧 마음이다
당체편시라. 그러면 뭐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네. 바로 현재 지금 이 순간 이렇게 말하고 말소리 듣고 보고 메모하고 하는 이 작용하는 일. 그 당체가 곧 그것이다 그겁니다. 그게 사람이고 마음이라 제일 또 간단해. 지금까지는 아주 종적을 잡을 수가 없었고 도대체가 뭔지 모르겠고 혼란스럽고 무슨 말장난 같고 또 가만히 설명을 들어보면 그럴 뜻하나. 정작 이게 허무맹랑하고 허황하고 어째 종잡을 수가 없는 거지.
초과일체한량명언종적- 종적이 없다 했으니까. 종잡을 수 없는 게 사실이야. 그럼 뭐 붕 떠 가지고 사람 공중에 띄워놓고 마느냐. 그게 아니야. 너무 가까이 있고 너무 쉽고 간단해. 지금 이렇게 말하고 듣는 이것이 그것이야. 어디 멀리 가서 찾으면 안 된다 이거야. 당체편시- 당체라고 하는 것은 지금 말하고 듣고 작용하는 그 당체가 곧 마음이다는 말이에요. 그것이 마음이고 지금 우리 메모하고 귀로 듣고 이 엄연한 사실 이게 그겁니다. 너무 쉽고 간단해.
動念即乖니라
동념즉괴
마음을 움직이면 곧 어긋남이니
동념즉괴니라. 달리 다른데서 이 마음 확인해 보려고 어떤 물건 찾듯이 확인해 찾아보면 곧 어긋나. 생각을 움직이면 곧 어긋나니라. 마음 찾아보려고 고개를 돌린다든지 속을 이렇게 한번 찾아본다든지 그러면 벌써 어긋나 버렸어. 아니야, 그땐 십만팔천리나 도망가 버렸어요.
猶如虛空하야 無有邊際하며
유여허공 무유변제
마치 허공과 같아서 변재(끝)가 없으며
"유여허공하야 무유변제하며- 마치 다른 표현으로 빌리자면 마치 허공과 같아. 저 더 넓은 허공과 같아가지고 변제가 없다." 가히 없다. 허공이 끝이 있습니까. 동쪽이면 동쪽으로만 수억만 광년을 가도 끝이 닿지가 않는 거지. 어느 쪽으로 가도 마찬가지야. 수억만 광년을 계속 한쪽으로만 달려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계속 동쪽으로 수억만 광년을 가도 가도 끝까지 가고 있을 뿐, 어디 닿는 데가 있나요. 무유변제라 가가 없다. 우리 마음이 그래요. 끝없이 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측량하고 헤아리려니까. 도저히 측량하고 헤아릴 수가 없더라.
不可測度니라
불가측탁
가히 헤아릴 수가 없더라.
불가측탁니라. 도라 하지 않고 이럴 땐 헤아릴 탁 헤아릴 측. 가히 헤아릴 수가 없더라. 이 마음이 어디까지며 무엇이 마음인지 도대체가 요량이 안 간다 이 말이야.
唯此一心이 即是佛이니
유차일심 즉시불
오직 이 한마음이 곧 부처이니
"유차일심이 즉시불이니- 이 한 마음이 곧 부처요." 참 좋네요. 우리 이 한 마음가지고 보고 듣고 쓰고 덥다 춥다 시원하다. 다 분별 하잖아요. 이게 부처야. 부처면 됐지 부처면 최고 대 성공이잖아요.아닙니까. 그 보다 더 큰 무엇을 노리고 있나요. 그런데 그 외에 것을 가지고 우리가 작구 소소한 작은 일에 그만 매어가지고 거기에 목을 매는 거예요. 부처라고 하는 큰 대의 명분이 있는데 그건 그만 뒷전이고 아주 몇 푼어치 안 되는 것에 목을 매고 죽느니 사느니 네가 옳고 내가 그러니. 이러다가도 이런 소리 공부 좀 한 사람들은 부처끼리 너무 그러지 말자고. 이 한마디 해 버리면 끝나잖아요.
그때 한번 돌이켜보면 좋은 방편이 되는 거라. 싹 마음이 사그라지는 거야. 유시일심이 즉시불이라. 이런 마음 쓰는 이 보물 능력 이대로 바로 부처다 말이야. 달리 다른 곳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쉽고 간단한 것을 가지고 딴 곳에 가서 불공한다고 애를 먹고 말이야. 부처도 아닌데 가서 부처라고 예배를 해 싸며 껌뻑 넘어지고, 불교 이제 바로 좀 알았으면 좋겠어요. 제일 안타까운 게 이것이야. 정말 제대로 깨달으신 분의 법문을 듣고 마음에 푹 새겨서 이게 정법인 줄 바로 알았으면 해요.
佛與眾生이 更無別異어늘
불여중생 갱무별이
부처와 중생이 다시 다른 것이 아니거늘
"불여중생이 갱무별이어늘-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다른 것이 없다"고 그랬잖아요. 예를 들어서 금을 가지고 부처상 지어 놓으면 불상이고,코끼리상을 만들어 놓으면 코끼리상이지. 불상이나 코끼리상이니 하는 형상은 다를지 몰라도 똑같이 금이라. 예를 들어 1톤짜리 불상을 만들고, 2톤짜리 코끼리상을 만들어 놓으면, 코끼리상이 불상보다 더 비싸 . 왜냐 금이 2톤 이니까. 불상이고 코끼리상이 뭐 중요해요. 금이라는 게 중요한거지, 한 예를 들자면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외형보고 부처다 중생이다 하지 말자는 거예요. 제발 그러지 말자고요.
배휴라고 하는 이 사람은 제상을 지낸 대단한 분이고, 그 당시 선비로써 뛰어난 머리를 지닌 불교에서도 이 분은 황벽스님만 만나서 단순하게 법문만 들은 게 아니에요. 이 당시 또 규봉 큰스님이라고 하는 분이 얼마나 화엄학에 뛰어난 분이라고요. 그런 분의 책 서문도 쓰고 그분하고 화엄경 공부를 많이 해가지고, 일체 경학에 박통한 분이셨기에 이런 법문을 들으니까. 그럴 수 없이 시원하고 좋았지요. 불여중생이 갱무별이라- 부처와 중생이 절대 다른 게 아니다.
내가 궁극적으로 "사람이 부처님이다." 불교의 결론이야. "법화경이 경중의 왕이라고 했는데 결국은 사람이 부처님이다." 가 불교의 결론이고, 그 한마디 전하기 위해서 법화경이 있는 거야. 화엄경도 물론 마찬가지고, 화엄경도 부처님이 깨달으시고, 일체중생을 복안 일체중생하니! 일체중생을 널리 관찰해 보니, 여래의 지혜와 득상을 전부 갖추고 있더라. 그대로 갖추고 있는 게 뭐야. 마음의 능력이거든. "사람이 부처님이다." 라는 소리야.
但是眾生이 著相外求하야
단시중생 착상외구
다만 중생이 상에 집착해서 밖으로 구해서
"단시중생이 착상외구하야- 다만 사람들이 상에 외상에 겉으로 드러나는 형상에 집착해서 밖으로 구해." 이 기도처가 영험이 있을까. 저 기도처가 영험이 있을까. 관음기도가 좋을까. 지장기도가 좋을까. 산신기도가 좋을까. 독성기도가 좋을까. 작꾸 밖을 향해서 구하는 거야. 이 법당 저 법당 쫓아다니는 그놈이 부처인데, 딴 영험 있는 부처 찾아서 이 법당 저 법당 산신각 독성각 왔다갔다 또 근기 맞춘다고 절에는 쭉 나열해 놨다.
그물을 많이 펼쳐 놓아야 그 중에 고기가 한 마리 딱 걸려 들지. 이것도 좋은 방편이거든요. 너무 방편방편 하다가 치우쳐서 방편에 놀아나면 본질을 잃어버리니까. 그게 문제지. 눈 있는 사람이 볼 때 너무 안타깝다 이거야. 괜히 정력낭비하고 시간낭비하고 인생낭비하고, 그 낭비하는 인생이 또 얼맙니까. 이왕 그럴 바에는 정법으로 직선으로 바른 법으로 가라는 뜻이지요.
求之轉失이로다
구지전실
구할수록 더욱 멀어짐이로다
상에 착해서 밖으로 상해서 구지전실이로다. 그쪽으로 쫓아가고 쫓아가고 하면 내 그쪽으로만 헤매지 않습니까. 2~3십년 절에 쫓아다닌 사람들 내 그 짓만 합니다. 내 그 짓이라고 해요. 까짓것 그 짓만 해요. 구지전실-구할수록 더욱 멀어짐으로, 그런 것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그게 업이 된다고요. 어디가 좋더라. 어디 기도처가 영험 있더라. 영험 있으면 지 부처가 제일 영험 있지. 남해 보리암에 기도가 영험 있고, 낙산사 홍련암이 영험 있다.
나는 홍련암에 기도 처로 소문나지 않았을 때 한때 거기서 해수욕하고 한철씩 지냈고 그랬거든요. 이동선원이라 명색이 수좌들이 공부하다가 화딱지 나면 뛰어나와가지고 모이는 거야. 이 선방 저 선방에서 여름에 북쪽 동해바다에 모여. 모이면 우리가 선방에서 중간에 나온터라 채면도 없고 해서 이동선원이라고 이름을 붙여 놓으면 근사하지. 그래서 해수욕도 하고 큰 절에 가서 방하나 얻어서 실컷 쉬고 해수욕하고 완전히 여름은 낙산사 신흥사 설악산……. 완전히 우리판이었어. 휩쓸고 다녔지 그냥. 그게 영험인가..ㅋㅋ..
그때 설악산 상봉에 올라가는 길도 없었지만 고무신 신고 올라갔어. 하얀 고무신 물 잘못 들어가면 휙 벗어지고 휙 벗어지는 그런 신을 신고 대청봉까지 막 올라갔어. 한 두 번이 아니야. 그때는 신흥사에서 대청봉까지 올라가는 계곡이 얼마나 좋습니까. 하루종일가도 사람 만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오지 않았어요. 걸망에다 간단하게 옷 넣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가다가, 땀나면 옥녀탕으로 쑥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또 올라가고 참 좋았어요. 그때는, 지나가는 사람이 도대체가 없었어. 우리 어릴 때 20대(1960년 중반)이니까. 이거 전심법요 어디 가버렸네. 구지전실- 구할수록 더욱 멀어진다.
使佛覓佛하며 將心捉心하면
사불멱불 장심착심
부처를 사용해서 부처를 찾으며 마음을 가져서 마음을 찾으면
"사불멱불하며- 부처를 사용해서 부처를 찾는다." 기가 막히네. 이 법당 저 법당 해매고 찾아 쫓아다는 이 기도처 저 기도처 찾아다니는 그 놈이 부처인데, 부처를 사용해서 부처를 찾는다. 그랬네요. 그래도 사용하는 재료가 좋네. "장심착심-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잡으려고 한다." 결국 성불이라고 하는 게 마음 깨치는 거라고 하니까.
우리마음이 그냥 그대로 인데 그걸 가지고 다시 조작을 해가지고 마음을 잡으려고 한다 이거야. 이런 문제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밝고 소상하게 잘 법문하신 분이 범어사 조실스님 지유스님입니다. 천하에 지유스님처럼 이런 문제에 대해 밝은 안목으로 뛰어나게 법문하신 분이 없어요. 다른 법문하는 형식이 좀 갖추어지면 아주 대단한 선지식입니다. "장심착심-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찾는다."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할 것 같으면
窮劫盡形하여도 終不能得이라
궁겁진형 종불능득
세월이 다하고 이 몸이 다하도록 마침내 얻을 수 없느니라.
"궁겁진형하여도-세월이 다하고 겁이 다하도록" 이런 말이거든요. 이 형상이 다하고 이 몸이 다하도록, 궁겁진형하여도- 세월이 다하도록 한다하더라도 "종불능득이니라- 마침내 얻지를 못한다." 찾는 그 놈이 마음이고, 활용하고 있는 그 놈의 부처를 가지고 달리 딴 부처 찾고 딴 마음을 찾으려고 하니까. 마음은 이미 딴 곳에 있다는 뜻이 돼 버리잖아요. 달리 멀리 있다는 뜻이 돼 버리니까 거기서부터 틀린 거야. 참 어수선하고 복잡한 불교가 간단명료하게 돼 버렸잖아요. 요게 진짜 불교예요.
나는 법화경할 때는 이것이 진짜 불교다. 임제록 할 때는 요것이 더 진짜 불교다. 전심법요를 보니 이것이 더 진짜 불교네. 전부 맥이 통하며 다른 얘기가 아니거든요. 알고 보면 다른 표현이 아니고 표현방법이 조금씩 다른 것뿐이에요. 여러분들이 이런 불교의 인연의 지름길로 가는 가르침을 만났을 때, 이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세요. 밥 한 끼 대접하는 것보다 천만억배 낳습니다.
식구들이라도 앉혀놓고 지금부터 수수께끼로. 부처가 뭐게. 내는 겁니다. 별로 할 이야기도 없으니, 가족들에게 부처가 뭔지 퀴즈내서 이야기하면 좀 좋아요. 소신을 가지고 확실하게 이야기하라고요. 자신 없이 듣기는 들었는 데, 들을 때는 들었지만 정작 내가 말을 하려니 영 겁도 나고 두렵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맞는 것 같기도하고 그래요. 소신과 확신을 가져요 내가 책임질 테니까.
우리 임제록 공부했지요. 문수보살 찾아간다. 찾아가는 그가 문수지 오대산에 문수 없다. 제목이 이랬잖아요. 아무리 찾아 봐야 찾아가는 그 보다 더 영험 있나요. 사실 오대산에 문수 있다 합시다. 그런데 찾아가는 그 문수보다는 영험이 훨씬 없어. 찾아가는 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영험 있는 문수고 부처라고요. 꼬집으면 아픈 줄 알고 부르면 대답 착하고 한 끼만 굶어도 배고픈 줄 알고 얼마나 영험 있고 신통 묘용하며 대단해요.
不知息念忘慮하면 佛自現前이로다
부지식념망려 불자현전
생각을 쉬고 생각을 잊으면 부처가 저절로 앞에 나타남을 알지 못함이로다.
"부지식념망려하면 불자현전이로다. 부지 커라 알지 못 커라. 식념망려하면 불이 저절로 현전하는 도다." 이렇게 해도 좋고, "식념망려할 것 같으면 부처가 저절로 현전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옛날식으로 새기면 부지 커라. 알지 못 커라. '식념망려하면- 생각을 쉬면' 밖으로 구하는 생각입니다. 딴 데 있다는 생각을 쉬고 그런 걱정을 잊어버릴 것 같으면 저절로 그 마음만 사라지면 부처가 저절로 앞에 나타나.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도다. 찾아 해맨다는 것을 쉬면 그러니까.
금강경에서 마음 비우고 걸식해라. 마음 안 비우면 걸식 안 되는 거죠. 세족- 마음의 때 다 씻어라 . 그리고 착 앉아 있어 봐라. 좌선이 좋은 게, 마음 쉬는 좋은 방편이라. 좌선 좌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필요한 거죠. 그렇다고 좌선이 꼭 좋은 것만도 아니다. 금강경에도 "부좌이좌- 자리를 펴고 앉았다." 고 했지요. 그러면 거기에 '불자현전이라- 부처가 저절로 앞에 나타남을 알지 못함이로다.' 앉았다고 하는 그 자리에는 '식념망려하면- 생각을 쉬고 생각을 잊으면' '온갖 생각 밖으로 구하겠다고 하는 생각- 내가 부처니 아니니 하는 그런 갈등 사량분별 이런 생각들이 다 쉬어버린다' 이 말입니다. 앉았다는 것이 바로 그 뜻이에요.
내가 그 설명할 때 몸만 앉고 마음은 천리만리 쫓아다닌 것을 앉았다고 하는 것이 아니야. 몸은 앉았는데 마음은 천리만리 떠나 다니면 그것을 어떻게 앉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경전이나 어록에서 앉았다고 하는 말은 몸도 마음도 다 앉아 있는 거예요. 앉아 있으면 뭡니까. '아무 생각 없이 몸도 마음도 다 쉬었다'는 겁니다. 밖을 향해 부처를 찾으려고 한 것을 다 쉬었다. 이게 불자현전하면- 부처가 저절로 드러난다.
此心이 即是佛이며 佛即是眾生이니
차심 즉시불 불즉시중생
이 마음이 곧 부처며 부처가 곧 중생이니
"차심이 즉시불이며- 마음이 곧 부처며, 불즉시중생이니- 부처가 곧 중생이야." 내가 중생이다 하면 내가 부처구나. 이렇게 알면 되지. 화엄경에도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나 또한 부처와 동일한데 이 마음을 드러내야겠다고 광대한 서원을 내기만 하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라고 하는 이 세 가지 결코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거든요. 각양각색의 근기를 가진 중생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편의상 나눠놓고 이야기하다보니 작구 헷갈리는데 사실은 그것이 차별이 없고 하나다. 여기서처럼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중생이다.
為眾生時에 此心이 不減하며
위중생시 차심 불멸
중생이 됐을 때 이 마음이 감하지도 않으며
"위중생시에 차심이 불멸이며- '중생이라고 아무리 중생 중생해도 중생이 아니야." 설사 중생이라 합시다. 중생이라 해도 이 마음은 불감이야. 조금도 석가모니부처님 보다 0.0001mm도 작은 것도 아니야. 먼지 털 하나마치도 적은 것도 없어. 불감이야.
為諸佛時에
위제불시
부처가 됐을 때도
"위제불시에- 부처가 됐을 때" 그럼 부처님 부처님 합시다. 문수보살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석가모니부처님 좋다 말이야. 다 부처라고 합시다. 그래도 그들의 그 마음이 '불첨이야- 첨가하지도 않아' 조금도 우리보다 보태지거나 불어나거나 더 낳거나 그런 것 아니다 말이야.
此心이 不添하며
차심 불첨
이 마음은 첨가하지도 않으며
"차심이 불첨하며- 이 마음은 첨가하지도 않으며" 물결이 어디로 불었든지 얼마나 올라갔던지 그냥 똑같은 물일뿐이다. 금을 가지고 부처 불상을 만들었든 코끼리 상을 만들었든 금일뿐이다. 전단나무를 가지고 불상을 깎았던 보살상을 깎았던 코끼리상 개모양을 깎았던 간에 전단나무 가지고 깎아놓으면 전부 전단향기가 나는 거야. 외형을 가지고 우리 그렇게 속지 말자 이거지. 진짜를 봐야지 포장가지고 물건 속은 보지 않고 생각도 않으면서, 이래 따지고 저래 따지지. 차심이 불첨하며
乃至六度萬行과 河沙功德이
내지육도만행 하사공덕
내지육도만행과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은 공덕이
本自具足하야
본자구족
본래 저절로 구족해서
내지육도만행과 하사공덕이 본자구족하야 참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육도만행하고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은 공덕이 본래 저절로 구족해 있어." 이것 기도 많이 해서 생긴 것도 아니고, 참선 많이 해서 생긴 것도 아니고 어디 가서 뼈 빠지게 노력봉사해서 생긴 것도 아니야. 그렇게 해서 생긴다면 아, 참 답답한 일이죠. 그런 것 안하고 본래 있다 이거야. 얼마나 좋습니까. 본래 그런 것이 내 자신 속에 다 갖쳐져 있다.
그 표현을 경전마다 곳곳에서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법화경 같은 경우 신해품에서 주머니에다가 친구가 넣어준 여의보주 무진장 값이 나가는 보배 구슬이야기를 가지고 표현하기도 하고 별별 이야기를 다 하죠. 본래 저절로 구족해서
不假修添이라
불가수첨
닦거나 첨가함을 빌리지 아니함 이니라
"불가수첨이니라- 수修 닦고 첨가하는 것을 빌리지 않느니라." 가자하지 않는다. 본래 다 구족되어 있어 더 필요치 안 해요. 육바라밀이고 보시 지계 인욕 선정 지혜니 그 외 공덕을 지어가지고 닦느니. 자기 안에 있는 것 다 활용하면 되는 것을 그것을 활용할 생각은 않아. 사람이라고 하는 이 위대한 존재의 가치성의 이치를 몰라서 그러는 거야.
집에다 최신형 녹음기 두고 밖에 나가서 또 새로 사는 거야. 사오고 보니 집에 있는 것보다 훨씬 못해요. 그런 예들 많죠. 옷사오고 보니 집에 있는 게 더 좋아요. 괜히 돈만 썼지. 그건 이것하고 얼토당토한 비유지만 본래 내 자신속의 온갖 필요한 모든 것. 세상에 필요한 모든 행복이 되었든 평화가 되었든 성공이 되었든 간에 내 자신 속에 전부 갖쳐져 있어. 결국 우리가 행복이니 평화니 우리가 바라는 온갖 것이 해결되고 성취됐다 하더라도 그것은 밖에서 성취되고 밖에서 해결된 것이 아니야. 결국은 내 자신 속에 성취되는데 밖을 향해서 작꾸 찾는 거지. 내 자신 속에서 해결됩니다. 결국은 그렇게 돼요.
육도만행과 하사공덕이 본자구족이라 그랬지 않습니까. 본래 저절로 구족되어 있어 노력해서 생긴 게 아니다 이거야. 부처가 됐다 하자. 부처가 됐더라도 마음이라고 하는 법에는 눈곱만큼도 첨가되는 것이 아니고, 못난 중생이라고 하자. 못난 중생이라고 해도 이 마음에는 조금도 석가 달마보다도 부족점이 있는 게 아니야. "부증불감이라-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다." "육도만행과 하사공덕이 본자구족해서- 내지육도만행과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은 공덕이 본래 저절로 구족해서 닦거나 첨가함을 빌리지 아니함이니라."
우리가 부족해서 작꾸 닦으려고 하고 첨가하려고 해서 작꾸 쌓죠. 꼭 그렇게 닦으며 쌓고 첨가하려고 하거든 이런 도리를 좀 펴. 닦고 첨가할 것이 없다고 하는 이 기가 막힌 이런 가르침을 좀 널리 펴는 것이 제일 복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복이 된다고 한 이 소리도 벌써 딴소리인데, 복이 되는 걸 좋아하니까. 그런데 맞혀서 하는 소리지.
사실은 자기에게 필요한 복이 다 갖쳐져 있어. 밖에서 오는 것 같지마는 이미 자기에게 있어. 자기에게 없으면 밖에서 오질 않습니다. 절대 그래요. 그것을 알아야 해요. 다른 외형 눈에 보이는 복도 그 얘기는 여기선 좀 아니지만, 눈에 보이는 유루복도 자기에게 있을 때 오는 거라. 자기에게 없으면 오지 안아요. 한번 쭉 살펴볼까요.
1. 한마음 깨치면 부처
師謂休曰 諸佛與一切眾生이
황벽선사가 배휴에게 일러 가로되 모든 부처님과 일체중생이
唯是一心이오 更無別法이니라
오직 한 마음이요 다시 다른 법이 없음이니라.
此心이 無始已來로 不曾生不曾滅하며
이 마음이 무시이래로 일찍이 생하지도 않고 일찍이 멸하지도 아니했으며
不青不黃하며 無形無相하며
푸른 것도 아니고 누른 것도 아니며 형도 없고 상도 없으며,
不屬有無하며 不計新舊하며
유와 무에도 속해 있지 아니하며 새로운 것과 옛것에도 계교되지 아니하며
非長非短하며 非大非小하며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니며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며
超過一切限量名言縱跡對待하야
일체한량과 이름과 말과 종적과 상대적인 것을 뛰어넘어서
當體便是라 動念即乖니
당체가 곧 이것이라 마음을 움직이면 곧 어긋남이니
猶如虛空하야 無有邊際하며 不可測度니라
마치 허공과 같아서 변재가 없으며 헤아릴 수 없느니라.
唯此一心이 即是佛이니
오직 이 한마음이 부처이니
佛與眾生이 更無別異어늘
부처와 중생이 다시 다른 것이 아니거늘
但是眾生이 著相外求하야
다만 중생이 상에 집착해서 밖으로 구해서
求之轉失이로다
구할수록 더욱 멀어짐이로다
使佛覓佛하며 將心捉心하면
부처를 사용해서 부처를 찾으며 마음을 가져서 마음을 찾으면
窮劫盡形하야도 終不能得이라
세월이 다하고 이 몸이 다하도록 마침내 얻을 수 없느니라.
不知息念忘慮하면 佛自現前이로다
생각을 쉬고 생각을 잊으면 부처가 저절로 앞에 나타남을 알지 못함이로다.
此心이 即是佛이며 佛即是眾生이니
이 마음이 곧 부처며 부처가 곧 중생이니
為眾生時에 此心이 不減하며
중생이 됐을 때 이 마음이 감하지도 않으며
為諸佛時에 此心이 不添하며
부처가 됐을 때도 이 마음은 첨가하지도 않으며
乃至六度萬行과 河沙功德이
내지육도만행과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은 공덕이
本自具足하야 不假修添이라
본래 저절로 구족해서 닦거나 첨가함을 빌리지 아니함 이니라.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첫댓글 使佛覓佛하며 將心捉心하면 窮劫盡形하야도 終不能得이라... 부처를 사용해서 부처를 찾으며 마음을 가져서 마음을 찾으면 세월이 다하고 이 몸이 다하도록 마침내 얻을 수 없느니라... 찾는 그 놈이 마음이고 활용하고 있는 그 놈의 부처를 가지고 달리 딴 부처 찾고 딴 마음을 찾으려고 하니까. 마음은 달리 멀리 있다는 뜻이 돼 버리니까 거기서부터 틀린 거야. 참 어수선하고 복잡한 불교가 간단명료하게 돼 버렸잖아요. 이것이 진짜 불교예요... 청비님! 감사드립니다... _()()()_
唯此一心이 卽是佛이니...오직 이 한마음이 곧 부처이니...고맙습니다. _()()()_
乃至六度萬行 과 河沙功德 이 本自具足 하야 不假修添 이라 해설 이마음에는 육도만행과 인도의 갠지스강의 모래수같이 많은 공덕이 본래부터 다 갖추어저 있으므로 더보탤 필요가 없다,,,,,청비님,,,,,,수고하였읍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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唯此一心이 卽是佛이니, ??生時에 此心이 不減하며 ?諸佛時에 此心이 不添하며 乃至六度萬行과 河沙功德이 本自具足하야 不假修添이라...고맙습니다._()()()_
이 기도처가 영험이 있을까. 저 기도처가 영험이 있을까. 관음기도가 좋을까. 지장기도가 좋을까. 산신기도가 좋을까. 독성기도가 좋을까. 자꾸 밖을 향해서 구하는 거야. 이 법당 저 법당 쫓아다니는 그놈이 부처인데, 딴 영험 있는 부처 찾아서 이 법당 저 법당 산신각 독성각 왔다갔다 또 근기 맞춘다고 절에는 쭉 나열해 놨다.....청비님,_()()()_
六度萬行과 河沙功德이 本自具足하야 不假修添이라..육도 만행과 항하사 모래와 같은 공덕이 본래 구족해서 닦거나 첨가함을 빌리지 않느니라...청비님 수고하셨습니다..._()()()_
많은 도반들이 같이 공부 했으면 참 좋겠습니다._()()()_
不知息念忘慮하면 佛自現前이로다...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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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心이 即是佛이며 佛即是眾生이니 為眾生時에 此心이 不減하며 為諸佛時에 此心이 不添이라. 此心이 本自具足하야 不假修添이니라!^^^^^
모셔 갑니다
마하반야바라밀()()()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이라.ㅡ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에는 차별이 없다._()()()_
삼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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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중생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자기에게 없으면 밖에서 오질 않습니다. ... _()_
무비스님께 질문드립니다. 위의 "불가수첨이니라- 수修 닦고 첨가하는 것을 빌리지 않느니라. 가자하지 않는다." 라는 문장에서 "가자"의 뜻과 한자어라면 한자를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상담원에게 몇 번 전화를 걸었는데 모른다고 하더군요. _()_
다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마음에 쏙쏙 닥아옵니다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_()_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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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