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인력으로 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돈이 부족해서 할 수 없거나 돈이 있어도 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내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내가 하고 싶지 않는데도 해야 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계획은 내가 세우지만 그 일을 마무리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고 말씀하시는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 때문에 때때로 하느님을 부인하는 상황까지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렇게 힘들었던 일들이나 사람이 시간이 지나고 보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내 가족이 뜻하지 않는 사고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사고들을 보면 대부분 하느님의 어떤 계획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기다리실 때까지 기다리시다가 어떤 실수나 사고를 통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그런 실수들 대부분은 자기 잘못으로 일어납니다. 그리고 가끔은 하느님을 멀리 했을 때 그런 사고가 닥칩니다. 그런 사고를 당하고도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더 큰 매를 드실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스스로 고백하는 세례를 받지 않을 때, 하느님께 항복할 수밖에 없는 사고나 실수를 통해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의 십자가를 부활로 역전시켜주는 커다란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큰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통해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고나 실수가 하느님이 부르시는 때입니다. 그 때를 놓치면 세례 받지 못한 채, 어느 날 갑자기 도둑처럼 죽음이 닥칠 수 있습니다.
때때로 하느님께도 내 속을 보여 드리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우리 속마음, 개인적인 고민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개인적인 고백이 이런저런 화살이 되어 날아올 때가 있기에, 더욱 다른 사람들에게 털어놓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고백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작은 누나가 지난주일 오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나누는 마음으로 지난주일 밤에 쓴 일기를 읽어드리는 것으로 오늘 강론을 대신하겠습니다.
작은 누나는 6개월 전 4톤 트럭이 빗길에 전복이 되는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누나는 목뼈가 꺾여 목이 퉁퉁 부었었습니다. 신경다발인 척수가 너무 부어 호흡을 관장하는 신경을 누르게 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더 이상 붙지 않고 부기가 빠지기를 기다리는, 일주일은 참으로 긴 고통의 터널 같았습니다. 부기가 빠지고 수술을 기다리는 일주일 기간 동안 두 차례 방문을 했습니다. 월요일 오전에 병원에 가서 동료 사제관에서 하룻밤 묵는 신세를 지면서까지 누나 곁에 있어 주었습니다.
일주일이 고비라고 할 때, 사제인 제가 언제든지 세례를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생이 사제라는 이유 때문에 특별히 세례를 준다는 것이 마음에서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누나와 같은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대세를 받기에, 누나처럼 다정한 수녀님께 대세를 부탁했습니다. 4개월 전 전남대병원에서 여수 집과 가까운,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순천 가롤로 병원으로 병실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원목 수녀님에게 교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작은 누나 보충 세례를 주는 날입니다. 옆본당에서 빌린 봉고에 빈첸시오회원들과 여러 신자들과 누나 고등공민학교 동기동창 3명의 누나와 순천으로 향합니다. 황금빛 들판을 병풍처럼 둘러선 산들, 그 산들 위에 살이 훤히 비치는 하얀 비난을 펼쳐놓은 듯한 구름, 파란 호수 같은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파란 물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아름다운 가을입니다.
병원 매점에 들려 누나에게 안겨 줄 꽃바구니 선물을 준비합니다. 함께 간 대모님 친구 자매님은 묵주를, 순천의 형님은 모자상을 선물로 준비합니다. 4층 소성당을 가득 매운 신자들과 고등공민학교 동창들, 매형과 조카와 수녀님들.
세례식이 시작되자마자 휠체어에 앉아 있는 누나가 울기 시작합니다. 제대 앞에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흐느낌에 제 가슴도 울기 시작합니다. 몇 차례 아랫배에 힘을 주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작은 누나를 가능한 보지 않고 세례 예식서를 읽어갑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마리아에게 세례를 줍니다." 빨갛게 충혈된 누나의 두 눈 속에 보이는, 비개인 하늘같은 맑은 영혼의 눈동자. 이마를 타고 흐르는 세례수처럼 누나의 눈동자에서 감사의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육신이 가난한 영혼의 기도처럼 영롱하게 흐르는 눈물을 차마 닦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제 두 눈에서도 감사의 눈물이 폭포처럼 무너져 내릴 것 같아서.....,
"작은 누나의 세례식에 함께 해 주신 신자분들,(고마움에 그만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합니다. 한참 동안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킵니다.) 누나 고등공민학교 동창과 선배님들, 병원근무로 쉬셔야 하는데 세례를 준비해 주시고 함께 해 주시는 수녀님들. 작은 매형과 조카,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세례식 때 어떤 말을 할까' 차 안에서 오래 생각했습니다. 문득 이런 성서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손이나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던져 버려라.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구의 몸이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 또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불붙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한 눈을 잃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
"제가 89년도에 신학교에 갔습니다. 17년 동안 하느님께서 기다리셨는데, 누나는 내일 성당에 간다 모래 간다 미루었습니다. 작은 매형의 실수로 누나가 척수를 다치는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사고로 6개월 전에 '마리아' 본명으로 대세를 받았습니다. 작은 누나는 그 사고가 아니었으면 죽기 직전에나 세례를 받았을 줄도 모릅니다. 매형의 실수를 통해 작은 누나를 당신의 자녀로 구원을 주시려고 대세를 받게 했습니다."
"이제 사제생활 10년이 되어갑니다. 이제 요령도 생기고 관성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본능적인 욕구를 참는다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사제로 무덤에 가는 날까지 이렇게 참아야 한다면 다른 길을 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세상을 구원하려 오신 예수님. 민족의 통일과 평화,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는 세상, 전쟁이 없고 자연과 함께 사는 평화로운 세상에 무관심한 교회와 신자들에게서 희망을 찾기 어려울 때가 저를 가장 힘들게 했습니다. 이런 저를 매형의 실수를 통해 한 눈 팔지 못하게, 누나의 교통사고에 저를 붙들어 놓으시더군요. 가족 누군가의 봉헌이 필요했던가 봅니다. 평생을 누워서만 지낼 수도 있는 그 희생을 통한 누나의 기도가 필요했던가 봅니다.(사제직을 떠나려고 고민하는 나를 붙잡기 위해 매형의 작은 실수를 이용하신 것은 아닌가? 반성하는 내 설움에 눈물이 쏟아집니다. 고개를 숙이고 한 참 입을 다물며 마음을 진정시킵니다.)"
"그동안 저희 가족들이 너무도 힘들어했습니다. 평소에 전화 한 통 없으셨던 큰형님이 술을 드시고 새벽 3시에 전화를 하셨습니다. '종수야 미안하다. 내가 인생을 헛산 것 같다. 종순이 어떡하면 좋냐.'(다시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합니다. 천장을 한참 동안 봅니다.) '신부 삼춘하고 전화통화를 하고 나서, 주연이 아빠가 어디 가서 실컷 울고 오겠다며 집을 나갔는데 무슨 일이냐'고 작은 형수님도 전화를 하셨습니다. 물론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작은 누나가 제일 힘들겠지요. 작은 매형과 조카들, 한 동네에 사는 큰 누나와 매형이 더 힘들겠지만, 그동안 가족 모두가 힘들어했습니다. 그런 가족들의 고통의 무게가 저에게 오더군요."
"작은 누나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한 가지만 당부하고 싶습니다. 작은 누나가 ‘왜 하느님이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가?’ 홀시어머니 잘 모시고 남편 잘 보필하며 아이들 잘 키우는데,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이런 고통을 주는가. 이런 하느님은 없다. 믿지 않겠다고 해도 투병생활은 해야 합니다."
"매형의 작은 실수를 통해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기 위해 이런 시련을 주시는구나.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는 태도, 하느님께 끊임없이 기도하고 간구하며, 하느님께서 날 예전처럼 걷게 하실 거라는 희망 하나만으로 투병생활을 하는, 하느님이 계신다는 희망적인 태도와 하느님은 안 계신다 부정적인 태도.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밝은 얼굴로 병문안 오는 사람들을 맞이해 오히려 위로를 받고 갔던 것처럼, 앞으로도 긍정적으로 투병생활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과 캐나다에서까지 많은 신자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계속해서 희망적으로 투병생활을 할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작은 매형과 조카들도 하루 빨리 세례를 받고 누나의 쾌유를 위해서 함께 미사드리고 기도하며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누나와 매형이 좀더 일찍 세례를 받았으면 누나가 다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돈만 벌기 위해서 바빴지, 하느님을 위해서는 시간을 내지 않았잖아요. 세례를 받고 하느님을 알았다면 밤 10시경에 여수에서 광양까지 50만원을 수금하기 위해 빗길 운전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작은 매형도 두 눈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중 3인 사내 조카도 두 손으로 눈물을 훔칩니다. 신자들도 누나 동창들도 수녀님들도 이슬방울이 맺힙니다. 눈물의 바다가 희망의 바다가 됩니다.)
누나에게 영성체를 해 드리고 기념촬영을 합니다. 작은 누나의 충혈된 두 눈가에 미소가 번져 옵니다. 벅찬 기쁨은 깊은 슬픔에서 시작되고, 그 깊은 슬픔은 금세 벅찬 기쁨으로 변화되는가 봅니다.
수녀님들과 소성당에서 작별인사를 합니다. 원장수녀님을 한쪽으로 불러 수녀님들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사 드시라고 봉투를 드립니다. 병실로 올라가기에는 방문객이 너무 많아 휠체어를 밀고 등나무 아래로 갑니다.
작은 누나 고등공민학교 동창들의 수다가 금세 웃음꽃으로 피어납니다. "우리 5기는 보리 질리게 배었다. 어디 손 좀 보자, 너희 7기들은 그렇게 보리 많이 배지 않았그만, 모도 그렇게 많이 심지 않았지. 근데 거머리가 또 얼마나 많이 물었니." "언니 뭔 소리야, 우리도 보리 하면 질리게 배었지."
"마리아 자매님이 하느님의 포도나무에 잘 붙어서 좋은 영양분을 많이 섭취해서 빨리 쾌유할 수 있도록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를 부르겠습니다."
등나무에 아래 사랑의 노래가 보랏빛 등꽃으로 주렁주렁 우리들 마음속에서 피어납니다. 등나무 늘어진 가지도 실바람에 미동으로 흔들리며 성가에 맞추어 어깨춤을 춥니다. 두 곡의 성가를 들은 누나의 얼굴에 환한 평화의 꽃이 활짝 피어납니다.
"신부님 가기 전에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네요. 우리 팔복성당의 자랑, 거시기 해야지요." "그래요.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등나무 아래 가장 행복한 꽃무리. '사랑합니다.' 사랑의 꽃이 활짝 피어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선물이 어디 또 있을까요? 작은 누나 일생동안 가장 행복한 오후.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서 영원한 하늘나라를 향해 첫 비행을 시작한 날입니다.
작은 매형이 한 쪽으로 부르더니 가다가 저녁식사 하라며 급구 호주머니에 봉투를 넣어줍니다. 병원 현관에서 손을 흔드는 매형, 휠체어에서 그저 미소로만 밝게 인사하는 누나. ‘저 손을 언제 흔들 수 있을까?’ 손을 흔들던 봉고차 안에 잠시 침묵이 흐릅니다. 다시 전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신자들과 묵주기도를 마칩니다.
순천 병원에 꼭 병문안 가고 싶다는 독거노인 할머니. 봉고에 자리가 없어서 출발했는데, 남원쯤에서 총무님께 전화를 하셨습니다. 오늘 계획이 취소되었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습니다. 나이 드시면 작은 것 하나도 서운해 하시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돌아오는 봉고 차 안에서 마음에 걸려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제육볶음에 저녁식사를 합니다. 성당 밭에서 솎아 뽑은, 방금 담은 길다란 열무김치 한 가닥을 들고 베어 먹는 맛, 작은 누나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기쁨처럼 행복합니다. 하느님 사랑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멘!
첫댓글 애절하군요. 쾌유를 빕니다. 꼭 건강히 쾌유 하실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