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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포교사 강좌(2) 녹취 / (2006년 8월 15일)-1
오늘 금강경 두 번째 시간, 우선 오늘 나눠 드린 유인물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구체적으로 하면 經 이름이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인데 우리가 흔히 금강경(金剛經) 이렇게 부릅니다. 또 불교의 경전은 오랜 세월동안 많은 분들의 신앙의 대상이고 따라서 또 연구를 많이 했기 때문에 대개 그 경전을 요약해서 이름도 그렇게 부르죠.
대방광불화엄경 이것을 화엄경 한다든지, 묘법연화경을 법화경 이렇게 부른다든지, 그렇습니다. 우리가 쉽게 금강경 이렇게 부르는데 구체적으로는 금강반야바라밀경인데,
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은 정말 “불교의 교과서, 법적으로 지정된 유일한 교과서다” 이렇게 내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중요한 경전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우리 불자들은 특히 포교에 뜻이 있는 우리 포교사분들로서는 이 금강경은 환하게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좀더 깊이 좀더 확대해서 옛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 옛사람들이 설명하지 못한 것까지 오늘날 이 시대의 현실에 맞게 해석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정법자들, 법사들의 의무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金剛은 아시는대로 다이아몬드를 한문으로 金剛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비유예요. 불교에 비유가 아주 많습니다. 왜냐하면 모양이 있는 물건을 설명하는 가르침 같으면 물건을 구체적으로 내놓고 설명을 할텐데 그런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아니한 진리(眞理)의 세계, 이치(理致)의 세계 이러한 것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불교이기 때문에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을 이해시키려면 비유를 많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金剛하는 하는 것도 역시 비유죠. 다이아몬드.
반야(般若)는 인도말인데 지혜(知慧)를, 깨달음의 지혜입니다. 보통 우리가 그 사람은 지혜가 있다, 없다 하는 그런 차원의 지혜가 아니고 깨달음의 지혜를 여기서는 반야(般若)다. 그래 반야지(般若智), 智字까지 붙여서 반야지(般若智) 이런 표현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法에 해당되는 것이고,
바라밀(波羅蜜)은 도피안 그러죠. 피안에 이르다. 저언덕에 이르다. 이런 뜻이고,
경(經)은 가르침을 뜻하는 것인데 성인의 가르침을 경이다. 단순하게 정확하게 이렇게 일단하고,
이것을 전체적으로 연결시켜서 해석하면은 “금강과 같은 지혜로 번뇌의 이 언덕에서 열반의 저언덕에 도달하게 하는 가르침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번뇌의 이 언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보통 인간들이 머리를 앓고 있는 모든 문제, 일체 병들, 육신의 병이든, 마음의 병이든 관계없이 모든 문제와 모든 병들을 이 언덕이라 그럽니다.
또 저언덕에 건너간다 흔히 그렇게 표현하는데, 뭐 따로 산이나 강변이나 언덕처럼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상태를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고, 그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 소소한 인간관계 뿐만아니라, 정치적인 문제 뿐만아니라, 경제적인 문제 뿐만아니라 나아가서는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生死大事, 삶과 죽음의 큰 문제까지도 다 해결된 그 경지를 그 자리를 저언덕이라 그럽니다. 피안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는 크든 작든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경제적 능력이 어떻든간에 누구든지 수많은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수많은 병이 있어요. 그런 병들을 반야의 지혜로, 다이아몬드와 같은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그런 모든 문제들을 다 해결하는 그래서 참으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위대한 행복과 평화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그게 이제 저언덕이죠. 그런 가르침이다. 그게 경(經)이란 뜻이죠. 아무의 가르침이 아니라 성인의 가르침이다. 성인의 말씀을 경이라 그래요.
우리는 경전을 해설하면 강의 또는 해설, 설명, 또 주해를 달아놓으면 주해, 번역 이정도지만, 우리말은 경이라 할 수 없죠. 성인의 가르침을 경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이런데서 정의를 제대로 하고 넘어가야 하겠기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金剛, 다이아몬드에 세가지 뜻이 있어요. 첫째는 견고하고, 둘째는 날카롭고, 셋째는 밝다는 뜻입니다. 이게 다 비유죠.
그렇습니다. 다이아몬드는 견고해서, 다른 어떤 물질을 가지고도 이것을 다듬을 수 없습니다. 오직 다이아몬드만이 다이아몬드를 다듬을 수 있죠.
그리고 이것은 그 날카로움이 정말 어떤 것도 이 다이아몬드보다 더 날카로운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인조다이아몬드도요 난 그전에 유리를 이렇게 짜르는 칼이 있기에 그것은 도대체 무슨 물질이기에 유리를 쓱쓱 짜르느냐 그랬더니, 다이아몬드라 그래요. 그게 진짜 다이아몬드냐 하니까, 아니래 인조다이아몬드인데도 유리를 그냥 사정없이 쓱쓱 잘라요. 그만큼 견고하고 날카로운 것이 다이아몬드다. 금강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금강은 다이아몬드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이게 밝다는 뜻입니다. 아주 투명하죠. 아주 영롱한 빛이 잘 발휘하고 있는 것이 또한 다이아몬드의 특징입니다. 다른 특징도 있지만, 불교에서는 견고하다, 날카롭다, 투명하고 밝다 하는 것을 여기서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반야에 대해서도 지혜에 대해서도 세가지의 반야를 이야기 하는데, 이것은 실상반야(實相般若), 관조반야(觀照般若), 문자반야(文字般若)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전통적으로 우리가 금강경을 공부할 때 으레히 집고 넘어가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금강경을 전통적으로 공부했다 하면은 어디가서 금강경을 강의하실 때 꼭 이런거 집어줘야 됩니다.
실상반야(實相般若)라고 하는 것은 금강으로 따지면 견고하다는 뜻인데, 그야말로 이것은 모든 존재의 근원, 뭐 가장 쉬운 표현으로 우리 마음자리라고나 할까요. 그게 실다운 모습, 그게 반야의 참 모습이죠.
그 다음에 이제 그것을 마음은 누구라든지 마음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마음은 있는데 그 마음이 어떤 능력을 발휘해야 됩니다. 능력 발휘하지 못하는 그 마음은 그야말로 광석과 같은 것이죠. 광석은 손을 잘봐야 그게 날카로운, 다이아몬드를 바로 캐냈을 때는 날카롭지도 않고, 밝지도 않고 그래요. 견고할지는 몰라도. 날카로운 맛은 없습니다. 또 밝은 맛도 없어요. 그런데 잘 다듬으면 아주 날카롭습니다.
우리 마음이 그대로 두면 사실은 동물이나 다를바 없어요 우리 사람도, 그런데 이것을 그 좋은 재료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것을 잘 손질을 하면 아주 날카로워요. 그래 그걸 관조(觀照)라고 해요. 비춰본다 그래요.
우리 照字는 금강경 공부와 연관시켜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란 말을 떠올리면 됩니다. 몸도 마음도, 온(蘊) 몸도 마음도 텅비었다고 하는 것으로 조견(照見) 비춰본다 이거예요. 그 照字입니다. 그게 비춰보는 거예요. 관조(觀照)나 조견(照見)이나 같은 뜻입니다. 보통 마음 가지고 그게 어려워요.
지금 멀쩡하게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고, 내 명예가 있고, 내 재산이 있고, 내 가족이 있고, 나아가서 내가 이룩한 사회적인 지위가 있고, 내가 그동안 공부했으면 공부한 그 我相이 얼마나 많이 쌓여 있는지 모릅니다. 자기도 몰라요.
그런데 아주 뛰어난 지혜로써 잘 비춰보면 텅비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오온개공(五蘊皆空)이예요. 몸도 마음도 텅비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눈으로는 그렇게 않보여요. 온갖 사랑의 감정, 미움의 감정, 그게 얼마나 진합니까? 사랑과 미움의 감정이, 어쩌면 우리 육신의 무게보다도 더 큽니다. 사랑의 감정, 미움의 감정이 그외 온갖 희노애락의 감정이, 감정의 무게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짓눌러 오는 그런 큰 우리의 마음작용이 있는데 이것을 아주 날카로운 지혜의 눈으로 비춰보면 텅비어서 아무것도 없다. 이게 관조반야(觀照般若)예요. 이런 마음을 중개하고 갈고 닦으려고 반야경 공부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가지고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이 여러 가지 있겠죠? 여가 가지가 있겠지만은 금강경만 가지고 우리가 세상에 기여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바로 이런 지혜(知慧)의 가르침, 지혜의 가르침을 통해서 정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금강경 시작이니까 이쯤 반야(般若)를 이야기 하고, 그런게 지혜(知慧)거든요. 그렇게 비춰볼 줄 아는게 지혜(知慧)입니다.
지금 예를 들어서 여기 전기불정도 가지고는 여기 먼지가 있는지 없는지 전혀 않보입니다. 그런데 아침햇살이 좍 들어오면은 먼지가 꽉차 있습니다. 저렇게 많은 먼지속에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다닐 수있는가 싶을 정도로 그렇게 먼지가 꽉 차있습니다. 그게 눈에 들어와요.
비유하자면은 우리의 지혜도 물질의 세계나, 정신세계나 그렇게 투명하게 비춰진다는 것입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으로, 없는 것은 없는 것으로 그렇게 비춰진다는 것이죠.
이것이 반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은 우리가 시간이 걸려서 갈고 닦아서 되는 것이 아니고 이치를 알면은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통해서 한순간 아 그런 것이구나 라고 마음이 돌아서면 그때부터 그렇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우리가 대하고 있는 종이로 되고, 먹으로 된 이것을 문자반야(文字般若)라 그래요. 이것도 우리가 무시할 수 없잖아요.
종이로 되고, 먹으로 된 것. 사실은 우리가 이것을 가지고 금강경, 금강경 하지, 현재로서 이것외 달리 우리 마음에 금강경, 마음의 경전, 마음의 반야 아무리 이야기 해봐야 크게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다. 당장 손에 있는 이 경전이 진짜 經으로 지금 우리 수준은 그래요. 그래서 이 반야도 무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문자반야라 이렇게 말합니다.
중요하지요. 이 경전 참 중요합니다. 우리들 수준으로는요 내 마음이 어쩌니 저쩌니해도 이 종이와 먹으로 된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어요? 현재 우리 수준에, 그래서 이것도 반야경이니까 역시 반야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전통적으로 실상반야(實相般若), 관조반야(觀照般若), 문자반야(文字般若)는 法이고,
굳다, 날카롭다, 밝다는 금강의 세가지 뜻은 비유고, 이것을 비유와 법을 합하면 법합이라 그래요, 비유, 법, 법과 비유를 합한 것, 이걸 법합이라 경전 공부할 때 아주 자주 이야기되는, 이런 형식은 법화경에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법이 있고, 비유가 있고, 법과 비유를 합해서 쭉 설명을 해요.
예를 들어서 지난 시간에 우리가 공부한 궁자(窮子) 비유, 못난 아들의 비유가 있잖습니다. 못난 아들을 비유하기 전에 우리는 이렇게 이렇게 소승과 대승의 과정을 거쳐왔다. 비유하자면 옛날에 못난 아들이 있었다. 아들이 아버지 떠나서 이렇게 이렇게 객지생활하다가 나중에 아버지 집에 당도해서 아버지 집에 품팔이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버지 재산을 다 물려받게 되는 과정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도 또한 그러하여 이렇게 나온다고, 부처님도 또한 그러해서 장자는 부처님이요. 장자의 아들은 못난 아들은 바로 우리들 중생이다. 이런식으로 비유를 하고, 실제 법하고 맞춰가면서 이야기 하는 그 과정을 법합이라 그래요. 법과 비유를 합해서 그래요.
견고한 것은 실상반야(實相般若)고, 날카로운은 것은 관조반야(觀照般若)고, 밝은 것은 문자반야(文字般若)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반야경에 대한 고인의 게송. 재미있는 게송이 있어서 하나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금곡반야경(?).
그대가 반야경을 읽으나, 우리가 지금 반야경을 읽죠.
반야부대경이라(?).
진짜 반야는 진짜 지혜는 경에 있는 것이 아니죠. 반야는 경전에 있지 않다. 경전에 있지 않는 거예요 사실은, 반야는 우리 마음이 밝아졌을 때 그걸 반야라 하지. 경에 이 종이와 먹으로 된 경에 있는 것은 아니죠. 그런데 이 경은 우리가 지금 대하고 있는 이 경은 우리 마음의 지혜로부터 나왔어. 경전이 반야에서 나왔어요. 우리 마음의 지혜. 그게 반야거든. 경이 반야에서 나왔잖아요. 부처님의 반야에서 나왔든지, 수보리의 반야에서 나왔든지간에 지혜에서 나왔어요. 경전이라는 것은. 반야가 반야를 읽는다. 그러면 지혜는 뭐예요? 우리 마음이예요. 우리 마음의 지혜로운 면을 반야라. 그럼 이 경전도 역시 반야경이야. 내가 나를 읽는 거예요. 반야가 반야를 읽는다.
자세히 뜯어보면 재미있는 시예요. 글자 같은말 계속 반복하면서 이렇게 쉬엄쉬엄 끊어서 표현을 했는데 이게 무슨뜻인가 하면은,
신불반조명관경이익이라고 하는(?)
천여스님(?)의 말씀이 있죠.
불교는 근본 취지가 마음에서 출발해서 마음을 설명하고, 그 마음 설명을 통해서 우리 마음을 밝혀내는 그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가르침이든지 마음에 관조하지 않는, 마음에 비춰보지 않고 경을 읽는다면, 관경이익이다. 경을 아무리 공부해야 이익이 하나도 없다. 그런 말이죠.
천고의 명언이죠. 우리나라 천여스님이 십장유익이라고 해서 열가지 유익한 일에 대해서 밝혔는데 명언입니다.
불교 경전이 전부 마음 밝히는 이야기라. 마음에서 나온거라. 마음에서 나와서 다시 마음으로 돌아가는 그런 가르침이 불교의 경전이기 때문에 마음에다 비춰보지 않으면 경전봐야 이익이 없다 그래요. 그래서 항상 마음에 근거를 두고 불교 경전을 봐야 되고, 불교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것도 없으면 마음 놓아버리고 달리 바깥으로 헤멘다고 할 것 같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이번에 내가 낸 책이 “소를 타고 소를 찾는구나” 하는 책을 여름에 냈는데 바로 그런 말이죠. 우리 절에 가면 실무도 있죠. 소를 타고 소를 찾는구나. 소를 찾는데 소를 타고 소를 찾는다.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서울을 찾는다. 바깥 마음두고 다른 바깥에 눈을 돌리는 일을 그렇게 표현합니다. 종로 네거리에서 서울을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것과 똑같다. 내 보고 듣고 웃고 하는 일이 전부 마음인데 이걸 두고 또 다른 마음을 찾는거죠. 그게 이제 소를 타고 소를 찾는구나. 하고 의미심장하게 한마디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은 “반야가 반야를 읽는다” 라고 하는 이 말은 바로 우리 마음의 범주에서 벗어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불교공부는 거기에 있어요.
그 다음에 경전은
"경전은 법신사리다." 꼭 기억해 두세요.
우리가 사리, 사리, 사리만 많이 있죠. 큰스님 사리가 나왔느니, 사리에서 광야를 했느니, 어디 절에는 사리가 100만과가 있다느니 그래서 광고를 야단법석을 떨고 많이 하잖습니까?. 경전보다 더 좋은 사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법신사리라고 그래요. 여기서 한가지 간단한 얘기를 소개해 드리면,
아쇼카대왕이라고 부처님 열반하시고 2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 인도를 통일한 아주 대단한 왕이죠. 이 분이 부처님 하고, 부처님 제자들 죽 사리탑이 있는데 이건 누구 사리탑이냐, 이건 누구 사리탑이냐 죽가서 안내를 받아서 예배를 하게 되었는데 아난존자 사리탑 앞에 가서 다른 가섭존자, 목련존자고, 사리불이고 전혀 예배 않드리고 아난존자가 있는 모셔진 사리탑 앞에 가서 계속 예불을 하는 거예요.
부처님 제자 중에도 사리불이니, 목련이니, 가섭존자니 이런 분들이 많이 있은데. 왜? 그래서 신하가 물었어요. 왜 대왕은 저 훌륭한 다른 제자들 탑도 많은데 왜 어째서 아난존자 탑에만 예배를 합니까? 하니까? 아난존자가 아니었다면 내가 불교를 몰랐을 것이다. 왜냐 아난존자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경전을 편찬을 했거든. 결집을 해서 경전이 오늘날 나왔거든. 아난존자의 공덕이 제일 크다. 아난존자가 없었더라면 목련불이 있었는지, 사리불이 있었는지 모른다. 목련, 사리불은 없어도 아난존자가 있어야 된다.
아난존자가 있으므로해서 부처님이 있는 것도 알았고, 목련존자니, 사리불이니, 가섭존자니 있는 것도 알았다. 아난존자가 경전을 만들어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오늘날 내가 불교를 만날 수 있었겠는가? 이 좋은 가르침을 어떻게 내가 접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말씀을 했어요. 대왕이 그런 말씀을 했어요.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경전은 법신사리다. 법신사리를 아난존자가 만들어냈다." 아난존자보다 불교 역사에 공덕이 제일 많은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느냐? 사실 그렇죠. 우리가 경전을 결집한 아난존자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경전을 만날 볼 수도 없고 불교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건 우리가 경전을 대하면서 원래 관심없이 있는가보다. 이런 생각만하고 넘어가죠. 그런데 마치 안목이 있는 아쇼카대왕은 경전이 있음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함, 그리고 경전이 이세상에 있기까지의 아난존자의 공덕에 대해서 한마디로 잘 드러냈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전을 대할 때 이러한 것도 염두에 둠으로 해서 더욱더 우리 마음에 경전이 깊이와 닿고 그러므로 해서 우리에게 소득도 크다 하는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댓글 나무 마하반야 바라밀 _ 나무마하반야 바라밀_ 나무 마하반야 바라밀 _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조견오온게공..._()()()_
君讀般若經(군독반야경) 般若不在經( 반야부재경) 經從般若出(경종반야출) 般若讀般若(반야독반야) : 그대가 반야경을 읽으나 반야는 경전에 있지 않고 경전이 반야에서 나왔으니 반야가 반야를 읽는다 .... - 청매 선사 의 心不返照 看經無益 (심불반조)(간경무익) .... 큰스님 감사드립니다._()()()_ 사바하님 감사드립니다. _()()()_
觀照_()()()_
큰 스님의 금강경 설법을 만나게 해 주신 사바하님. ()()().좋은 안내 해 주신 명성화님.()()().
金 剛 般 若...사바하님 수고하셨습니다..._()()()_
_()()()_
마하반야바라밀()()()
實相般若 觀照般若 文字般若
般若智....._()()()_
삼배 올립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나무 아미타불 나무 관세음보살
열심히 배워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