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齋食時에 飮啜을 不得作聲하고 執放에 要須安詳하며 不得擧顔顧視하고 不得欣厭精麤하며 須黙無言說하고 須防護雜念하며 須知受食이 但療形枯하야 爲成道業하며 須念般若心經호대 觀三輪淸淨하야 不違道用이어다. 赴焚須호대 須朝暮勤行하야 自責懈怠하며 知衆行次하야 不得雜亂하며 讚唄祝願호대 須誦文觀義언정 不得但隨音聲하고 不得韻曲不調하며 瞻敬尊顔하야 不得攀緣異境이어다. 須知自身罪障이 猶如山海하고 須知理懺事懺으로 可以消除하며 深觀能禮所禮가 皆從眞性緣起하고 深信感應이 不虛하야 影響相從이니라.
반갑습니다 오늘 1월 25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 법문 시작하겠습니다.
계초심학인문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은 사찰에서 공양할 때의 주의 사항을 일러줍니다.
처음 막 들어 와서 공양 하는 문제를 대중과 함께 하면서 대단히 조심스럽죠,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 지 어렵기도 하고요,
우리 신도님들이 사찰에 와서 여법하게 발우공양을 하는경우가 있는데, 그때는 참 어려움이 많다는 호소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처음 접하는 일이기도 하고 여러 사람들이 앉아서 여법하게 염불도 해 가면서 하기 때문에 그래서 어려움이 많지요.
그래서 조심하다 보면 언제 밥을 다 먹은지도 모르고 수련 대회에 와서 발우 공양을 하면서 에피소드가 많지요. 밥을 남겨서 그 밥을 처리하는 문제하며, 또 발우를 씻다가 물이 흐려져 가지고 그 물을 다 마시게 된 그런 사정하며, 도저히 대중 공양 하는데 감당하기 어려워서 그냥 빈 발우때만 펴 놓고 앉았었다는 이야기들 하며, 수련대회를 마치고 나면 발우 공양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구구합니다.
그건 물론 일반 신도님들이 수련 대회에 가서의 이야기고, 전문적으로 사찰 생활을 발원한 그런 행자나 사미들에게는 초기에 아주 단단히 익힙니다.
저는 가던 날부터 발우 공양을 했었어요, 절에 들어 가는 날부터 발우 공양을 했는데, 가자마자 발우 공양하는 법부터 가르치더라고요, 그래서 몇 번 반복을 해 가면서 배우고 나서 일단 식사를 해야하니까, 그래서 여러 번 반복해서 잘못된 점이 많았겠지만, 그래도 반복을 해서 훈련을 해 가지고 발우 공양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절하는 법 가르쳐 주고, 그 다음에 염불하는 거 가르쳐 주고, 이렇게 순서를 정해서 가르치더라고요. 대중과 함께 법칙, 여법하게 대중 공양을 하기란 그리 쉬운게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서 초심학인문에서 이렇게 청규淸規도 되고, 또 하나의 어떤 생활 지침도 되고, 주의 사항도 되도록 명문화 하고 있습니다.
재식시齋食時에 음철飮啜을 부득작성不得作聲하고, 그랬어요.
재식, 재자가 재계 재齋자입니다, 가지런할 제齊자, 하고는 좀 다르죠. 재계 재잔데, 가지런할 제齊자로 된 것은 오자입니다. 이건 아주 수행으로 공양을 하는 그런 그 마음 자세, 그것을 재식이라 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보통 세끼를 공양을 하면 세끼가 다 수행자에게는 재식이 됩니다. 수행하는 마음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되는데, 그렇다고 다 법복을 입고 또 염불을 해 가면서 세끼를 다 하지는 않아요.
옛날에는 그렇게 했는데 근래에는 아주 결제 때만 그렇게 하고, 또 그것도 생략이 돼서 반결제까지만 하고, 반결제만 지나면 그만 염불을 하는 거라든지, 법복을 입는 거라든지, 이런 것이 또 생략이 되고 갈수록 편리하고 간편해지는 그런 경향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도 낮에만 하지요, 사시 공양은 또 그렇게 합니다. 삼시 세끼에서 사시 공양으로, 사시 공양에서 결제 때만, 결제에서도 반결제만, 이렇게 생략이 됐습니다.
사찰에서 공양하는 것은 모두가 재식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왜냐... 사찰은 선불장이고, 선불장이란, 곧 부처를 만들어내는 그런 장소이기 때문에 수행 도량이고, 수행 도량에서 식사란 모두가 다 재식이 된다, 그렇게 말씀 드릴수가 있습니다.
재식을 할 때에 음철飮啜을 부득작성不得作聲하라, 그랬어요, 마시고 씹는 것을 소리를 짓지 말라, 그러니까 마실 때도 후루룩 후루룩 소리내서 마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하고, 무우김치를 씹을 때도 그 무우가 부셔지는 소리가 입밖에 나가지 않도록 입을 다물고 씹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세속적인 가치관으로써 ' 아 그거 먹는 재미, 우두둑 우두둑 씹는 재미가 상당한데, 그런 것도 없으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런 것 없습니다. 절에서는 그런 것을 바람직한 일로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법당에 이렇게 수십 명이 들어 와도 들어오는 소리가 전혀 소리가 나지를 않습니다. 수십 명이 큰 방에 앉아서 공양을 해도 그 공양 소리가 전혀 나지를 않습니다. 마시고 씹는 소리가 전혀 나지 않고, 그 다음에
집방執放에 요수안상要須安詳하며
이렇게 했잖습니까. 숫가락이나 발우때를 잡고 놓을 때, 모름지기 요컨대 모름지기 안상히 하라, 편안하고 자세하게 하라, 그렇게 했습니다.
이게 행동거지에 대한 요체예요, 공양을 할 때도 그렇고, 법당을 출입 할 때도 그렇고, 수행자로서의 그런 온갖 행동거지는 반드시 모름지기 안상히 해야 한다, 이런 말입니다.
이건 이제 법화경에 보며는 부처님이 삼매로부터 안상이기라...편안하고 아주 자세히 일어났다, 여기 자세 상詳자가 돼서 자세히로 말하지만, 이건 우리말로 자세히라고 하는 표현 가지고는 부족하지요.
부처님이 삼매에서 깨어나는 그런 어떤 모습, 상태, 그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연꽃이 피는 모습, 연꽃이 필 때의 그 연꽃의 자세, 그렇게도 말할 수가 있어요.
부처님이 삼매에 들었다가 삼매에서 깨어났지마는 그 삼매에서 깨어났는지, 아직도 삼매에 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깨어나서도 전혀 어떤 소리가 있다든지, 무슨 작용이 있다든지, 움직임이 있다든지, 그렇지가 않습니다.
또 연꽃이 틀림없이 피기는 피지만, 피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니요, 무슨 한 순간에 바람을 일으키면서 확 꽃잎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요, 그렇습니다. 발우공양을 위시해서 사찰에서의 모든 행동거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안상하게 하라' 이렇게 하면 끝이예요.
이건 삼매에서 일어 나는 그런 마음으로, 마찬가지로 기도를 할 때, 또 참선할 때 특히 , 특히 참선할 때, 참선에 들고 나고 하는 그런 때, 그 행동과 몸가짐을 이렇게 안상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보면 됩니다 .
소리를 내면서, 바람을 일으키면서, 옆에 사람에게 옆에 사람이 의식할 수 있도록 후닥닥 일어나고, 풀석 주저 앉고, 이건 수행자의 몸가짐이 아니죠. 언제 일어나는지, 언제 앉았는지, 옆에 사람이 전혀 눈치챌 수 없도록 그렇게, 조용하고 아주 미세하게, 아주 편안하고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라는 그런 뜻이죠.
숫가락을 잡고 놓고, 또 발우때를 잡고 놓고 이렇게 할 때, 그 발우와 발우가 부딪치게 해서도 안 되고, 수저를 발우때에 놓을 때, 털거덕 소리가 나도록 놔서도 안 되고, 그런 아주 주의 사항입니다.
거기에 마음이 깃들어 있지 않으면 소리가 나게 돼 있습니다. 한 동작 한 동작에 예의 주시하면서, 조심하면서, 그렇게 하라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특히 초심학인이 돼 가지고서, 이제 막 출가한 사람이 돼 가지고, 저기 탁자밑에 앉아서 음식을 마시고 씹을 때 소리를 낸다든지, 발우때를 잡고 놓고 할 때, 무슨 수저 소리를 철거덕 철거덕 낸다든지, 발우와 발우가 부딪쳐서 소리가 난다든지, 하면 그게 모양이 아니죠.
그리고 공양을 하는 시간에도 항상 염불을 하는 사람은 염불을 하고, 경을 외우는 사람은 경을 외우고 하고, 또 화두를 드는 사람은 항상 화두를 들고 하기 때문에, 소리를 내면 옆사람 공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부득거안고시不得擧顔顧視하고, 그랬습니다.
얼굴을 들어서 여기저기 뚤래뚤래 살피면서 하지말라, 이거예요. 절대 못 살피게 돼 있습니다, 눈은 자기 발우때 주변을 벗어나면 안돼요, 절대 옆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 볼 필요가 없습니다.
또 동작하는데 순서는 죽비소리로써 다 지휘하게 돼 있거든요, 죽비소리를 듣고 죽비소리에 맞춰서 하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옆에 사람이 얼마나 먹었는지, 뭘 하는지, 그것 굳이 살필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특히 큰스님들 상추쌈을 자시는데, '큰스님은 어떻게 자시는가' 궁금해 가지고 탁자앞에 앉은 어린 사미가 빤히 큰스님 얼굴을 쳐다 본다든지, 하는 그런 행동은 사미로서 할 일이 아니죠. 간혹 그런 철 없는 사미들이 많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거안고시擧顔顧視, 얼굴을 들어서 쳐다 보지 말라, 뚤래뚤래 살피지 말라, 그렇게 했습니다. 또 한가지 주의는
부득흔염정추 不得欣厭精麤 하라, 그랬습니다.
여기 흔欣은 좋아하고, 염厭은 싫어한다, 그랬는데, 음식이 마음에 드는 것도 있고 안 드는 것도 있고, 음식 그 자체가 맛있는 것도 있고 혹 맛이 없는 것도 있을 수가 있잖습니까.
정精은 좀 좋은 음식에 해당되고, 추는 거칠 추麄자인데, 좀 맛이 없다든지 그런 음식을 추라고 그럽니다.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거나, 거친 음식이라고 해서 특별히 싫어 하거나, 하지를 말라 이거예요,
골고루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먹어라, 그리고 윗자리에 먼저 반찬상을 받은 사람이 맛있다고 해서 지 반찬 그릇에 다 덜어 버리면, 그리고 안 좋은 반찬만 남겨 두면 밑에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게 네 사람, 다섯 사람 심한, 경우에는 열 사람까지도 전해 내려 가면서 덜게 돼 있는데, 그런 남을 배려하는 그런 자세도 아니고요, 그러니까 이런 말 속에는 그런 남을 배려하는 정신까지 다 깃들어 있습니다. 또
수묵무언설 須黙無言說
당연하지요, 묵묵히 언설이 없어야 된다, 세속에서는 말할 때 그저 웃고 떠들고 하면서 식사를 하며는, 소화도 잘 되고 즐겁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마는, 사찰에서는 절대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어린 사미가 말을 한다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식사를 한다고 하는 것은 이건 상상을 할 수가 없는 일이지요. 그러니까 어떤 세속의 가치관이라고 할까, 그것과는 전부 반대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밥을 운반한다든지, 국을 운반한다든지, 볼 일이 있어서 오고 가야 할 그럴 경우도 사람들 뒤로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세속에서는 앞으로 다니는 것이 실례지만, 절에서는 뒤로 다니는 것이 실례예요.
안보이는 뒤로 남이 못보는 뒤로 가서 어쩌자는 말입니까 .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 가야죠. 그런데 바람을 휙휙 일으키면서 걸어 가서야 안 되겠죠. 아주 공손하고 엄숙한 태도로써 사뿐사뿐히 앞으로 걸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수방호잡념 須防護雜念이라
식사한다고 해서 이생각 저생각 아무 생각이나 하고 먹도록 되어 있는 게 아니예요. 모름지기 잡념을 방호, 막아서 지키라, 보호하라, 이랬습니다. 절대 잡념을 일으키지 말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수지수식須知受食이 단료형고但療形枯하야
잡념이라는게 많이 있을 수 있죠, 특히 음식에 대해서 잡념은 '아 이거 어떻게 반찬이 이러냐', '무슨 밥은 왜 이렇게 했느냐', ' 삼층밥을 지었느냐 ', 별별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속에서 먹던 무슨 맛있는 음식도 떠올릴 수가 있고요.
그런데 사찰에서 수행자가 출가한 수행자로서의 식사라고 하는 것은, 須知受食이 단료형고但療形枯라 했습니다. 모름지기 알아야 한다, 꼭 알아야 할 것은 수식, 우리가 밥을 받아 먹는 것이 단료형고야, 이 형상 마르는 것을 다만 치료하기 위해서 한다 이거야. 그리고
위성도업 爲成道業이야
도업을 이루기 위해서, 도 닦기 위해서 하고, 깨닫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중생제도를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무슨 영양섭취하고, 살찔려고 하고, 맛있어서 식사하고, 그게 아니라는거죠, 그러면서
수념반야심경須念般若心經호대 觀三輪淸淨하야 不違道用이어다
모름지기 반야심경을 외우되, 여기 반야심경이라고 초심에는 그렇게 되어 있는데, 아마 그 당시 고려 때 보조스님께서 송광사의 수선사를 개설을 해서 공양을 할 때, 그 당시 불교 사회에서는 모두 반야심경을 외우고 공양했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근래에 외우는 염불은 반야심경은 아니예요, 십념이라 해서 불보살의 명호도 부르고, 또 '이 밥이 어디서 왔는가' 하는 그런거, 그런 내용이 요즘 번역돼서도 많이 나오고 있죠, 그런 염불인데 반야심경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반야심경을 외웠다, 생각하게 하라.
관삼륜청정 觀三輪淸淨하야 그랬습니다. 삼륜이 청정함을 관하라, 삼륜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가 시주의 음식이기 때문에 시주한 사람과, 시주를 받는 우리와, 그리고 그 물건과, 그게 돈이 됐든지, 곡식이 됐든지, 채소가 됐든지, 그것을 세가지를 삼륜, 그럽니다. 사물과 수자, 받는 사람, 주는 사람, 이렇게 해서.
청정이란게 여기서 공한 줄을 알아라, 그래서 반야심경을 외우는 이유가 연관이 돼 있습니다. 주는 사람도 공하고, 받는 나도 공하고, 물건까지도 공하다라고 하는 것을 관해야, 그게 이제 도 닦는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는 것이죠 . 실제적으로 있다, 나도 있고 , 주는 사람도 있고, 일체 것이 다 있다라고 이렇게 생각하면 그건 도 닦는 정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반야심경이 뭡니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내지 무의식계, 일체가 다 공하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그렇죠, 몸도 마음도 텅 빈 것으로 보아서, 공한 줄로 보아서, 그게 관삼륜청정이죠, 삼륜이 청정한 것으로 관한다, 텅 비어 없는 것으로 관한다.
그래서 도의 용도에, 도 닦는 용도에, 어기지 말지어다, 그랬습니다. 불위도용不違道用 도 닦는 용도에 어기지 말지어다, 오로지 식사는 도 닦기 위해서 하는거지, 그 외의 다른 의미는 없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 공양할 때의 규칙과 어떤 주의사항, 이런 것을 여기서 하나의 지침서로써 내렸습니다. 그 다음, 공양 문제와 아울러서 예불의 문제가 또 중요하죠, 그 다음 이야기는 예불 문제입니다.
부분수赴焚須호대
부분수赴焚須 할 때, 수자가 닦을 수修자라야 돼요. 분수에 나아가되, 향사를 분焚, 닦을 수修 그래요, 이건 법당에서 기도하고 예불하고 정근하고 하는 이런 일들을 분수焚修라 그럽니다.
향사르는 수행, 수자가 닦을 수修자라야 됩니다, 모름지기 수須자가 아니예요, 분수에 나아가되, 이런 말입니다. 법당에 가서 하는 수행이죠.
수조모근행 須朝暮勤行하야
모름지기 아침과 저녁으로 부지런히 행해서
자책해태 自責懈怠하며
스스로 해태함을 꾸짖으며, 그렇습니다, 하다가 보며는 참 싫증도 나고 꾀도 나고 하기 싫을 때도 있고 그렇지요. 저도 어릴 때는 그랬습니다, 일년에 내가 예불을 몇 번 빠졌다,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빠진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쩌다 보니까 예불한 것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바뀌었네요, 참말로.
일년이 지나면 그래요, '아 나는 금년에 무슨 일이 있어서 그렇게 한 번 아침 예불 빠졌고, 그 때는 몸살이 지독하게 나고 감기가 지독하게 걸려서, 그 때 내가 예불을 두 세 번 빠졌고...', 이렇게 해서 열 손가락 안에 일년 중에, 아침 저녁 예불 빠진 것을 꼽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합니다, 초기에는 다 그래요, 그렇게 했습니다.
일년에 한 번도 안 빠지는 경우도 있지요, 어떨때는. 365일 한 번도 안 빠지고 할 수 있다며는 대단한거죠. 근데 좀 제대로 수행하는 분들은 다 그렇게 합니다. 어디 가서든지 하니까요. 스스로 해태함을 꾸짖으며,
지중행차 知衆行次하야
대중이 행하는 순서를 알아서, 그러니까 예불 하려 법당에 들어가고 나가고, 또 법당에 들어가서 앉는 것도 순서가 다 있어요, 그 대중이 행하는 순서를 알아야죠. 알아서
부득잡란 不得雜亂하며
잡란, 뒤 섞이고 어지럽게 하지말며, 그랬습니다. 행자가 행자 앉을 자리에 앉고, 또 행자들끼리도 순서가 있고, 사미는 사미가 앉을 자리에 앉고, 사미도 앉아야 할 순서가 있고, 그렇습니다.
그 순서는 앞에서 이야기가 있었듯이, 먼저 입사한 사람이 앞에 앉고, 뒤에 입사한 사람이 그 다음에 앉도록 그렇게 돼 있습니다, 승납으로 순서를 잡는거죠.
보살계의 원본(?)인 범망경에 보면, 먼저 온 사람은 먼저 앉고, 뒤에 들어 온 사람은 그 다음에 뒤에 앉아라, 만약에 그 순서를 어기며는 속인과 같고 외도들과 같다 그랬어요. 반드시 절에 들어 온 순서대로 앉아야 합니다, 나이도 관계없고 소임도 관계 없어요.
강원에서 상반 하반도, 그것도 그 순서대로 앉는 것도 틀린 것입니다, 강원에서 상반이지 선방에 가서도 상반일 수 없는 것이고요, 또 그 사찰에서 소임을 보다 보니까 원주고, 별좌고, 주지고, 총무고, 재무고, 이렇게 있지,
그거는 종무소에서 앉을 때 그렇게 앉든지 말든지 할 일이고, 큰 방에서는 절대 소임 순서대로 앉거나, 상반 하반 순서대로 앉거나, 그렇게 앉으며는 외도들이 하는 짓이라고 범망경에서 분명히 못 박아 놨습니다.
그런데 참 그 법을 어기고 전부 주지만 되며는 늦게 중 되고 나이가 젊어도 제일 윗 자리에 앉거던요, 그래서 노스님들도 그 다음에 앉고 꼭 외도들이 하고 사도들이 하는 그런 짓을 지금 합니다.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이 그저 그것만 보고 살지요.
그래서 사미 때부터 그저 꿈꾸는 것이 그저 주지나 할려고 하고, 소임이나 맡아 갖고 권세나 부리고 윗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그런 것을 본보게 됩니다.
이것 참 누구든지 이건 또 주지하는 사람이 그 순서를 정해야지, 무슨 조실이라고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른이라고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습니다. 나라에는 대통령이 하나 있고 사찰에는 주지가 하나 있을 뿐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그런 체제는 어떻게 보면 좋은 체제이기도 하지...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돌아만 가며는, 그런데 그게 정법이 아닌 것을 가지고 행할 때, 정법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렇게, 말하자면 일방적으로 그렇게 시행을 한다 하면, 그 때는 참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여기서 대중이 행할 차례를 알아서 잡란하지 말라,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지금 각 사찰에서 전부 뜯어 고쳐야 하고 바로 잡아야 할 그런 일이죠.
찬패축원 讚唄祝願호대
찬패하고 축원호대, 찬탄하고 찬탄하는데 범패로써 찬탄한다, 이거죠.
아~앙仰~고告 축원할 때 그렇게 한다든지, 또 계~향 정~향 한다든지, 이렇게 그 사찰마다 큰 차이는 없습니다마는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차이가 있어도 예불은 예불하는 그 어떤 격식에 의해서 예불을 하거던요. 그리고 축원한다든지 발원문 읽는다든지 하는거, 이런 것들이 찬패고 축원인데 그런 일에 있어서는
수송문관의 須誦文觀義언정
모름지기 글을 외우고 뜻을 관할지언정, 그 글속에 담겨져 있는 뜻을 관하라, 그랬습니다. 聞我名者免三途 見我形者得解脫 문아명자면삼도 견아형자득해탈 하며는 그 글 따라서 그 뜻을 가만히 생각해야지
부득단수음성不得但隨音聲하고
그냥 말만 따라가는거예요, 다만 음성만 따르고 음성만 따르지 말라 이거죠, 또 不得韻曲不調하며 그 음성만 따라가고 마음이 안 담기면 그건 염불이 아니죠. 그래서 49재 때 예를 들어서 경전을 읽어 주는 것도 그렇습니다.
마음이 안 담기고 말만 그렇게 소리만 그렇게 쫓아가면, 그건 염불이 되는 것이 아니죠, 영가는 귀가 있어서 소리를 듣는 게 아니예요, 그 사람 읽는 그 마음을 보는거죠.
그래서 어떤 스님이 돌아가셨는데 그 도반이 정성스럽게 49재 때 염불을 해 준다고 금강경을 읽었는데, 금강경을 한참 읽다가 잠깐 딴 생각을 했던 모양이예요.
그래서 꿈에 그 도반이, 죽은 도반이 나타나 가지고, '아 자넨말이야, 금강경을 읽다가 잠깐동안 어디 갔다 왔느냐'고, 그리고 '왜 그렇게 띄워 읽느냐'고 그렇게 하더래요.
그런데 도반의 죽음에 대해서 얼마나 정성을 들여서 했겠습니까. 도저히 내가 자리를 뜰 일도 아니고 자리를 뜨지도 않았고, 딴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다,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까, 어떤 사람이 목 마르다고 물 마시라고 물을 한 컵 가지고 온 것을, 이렇게 눈여겨 보고 마시지는 않았는데, 거기에 잠깐 마음을 빼앗겨서 그냥 소리만 내고 넘어갔다는 거예요. 그런데 바로 그 대목을 못 들었다는거지, 소리는 냈지마는 마음이 없으니까...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不得但隨音聲이라는게 다만 음성만 따르지 말라 그랬어요. 소리만 내고 염불한다든지 경을 읽는 것은 무효죠, 영가인데는 최소한 무효입니다, 영가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닙니다, 귀가 벌써 썩었거나 타서 재가 됐거나 그런 경우일테니까,
그래서 須誦文觀義언정 글을 외우고 뜻을 관하라 그랬어요, 관할지언정 음성만 따라 가지 말라 그랬어요. 그리고
부득운곡부조 不得韻曲不調하며
운곡을, 운과 곡조를 고르지 아니 하게도 하지 말라, 고르게 하라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이 염불하는 그 곡에 가능하면 맞춰서 하지, 언바란스로 틀리게 그렇게 하지 말라 이거죠, 염불은 염불대로의 곡조가 있습니다.
지 혼자 소리를 크게 지른다든지, 소리를 안 낸다든지, 또 곡이 너무 틀린다든지, 이렇게 하며는 그건 옆에 사람 신경 쓰이죠. 그리고 대중 생활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특히 초발심 수행자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죠. 또
첨경존안 瞻敬尊顔하야 부득반연이경 不得攀緣異境이어다, 그랬습니다.
첨경존안, 존안을 우러러 공경해서, 존안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상호입니다. 불상을 말하는 거고 또 그림이라도, 탱화라도 그려 놓으면 탱화의 모습을 보라는 거예요.
이걸 마음 속에 부처님을 그릴수도 있습니다마는, 법당에서 하니까 당연히 불상을 쳐다 보면서 어떤 공경하는 마음과 참 귀의하는 마음, 이런 것들을 쳐다 보며는 성스러운 모습을 쳐다보며는, 저절로 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존안을 우러러 보고 공경하라, 이 말이야.
그렇게 했을 때 다른 경계에 반연하지 않죠, 반연이라고 하는 것은 이건 칡넝쿨이 옆에 있는 다른 나무쪽으로 가 가지고 휘어 감고, 그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거, 그거를 반연이라 하지요, 더위 잡을 반攀자입니다
다른 경계에 얽혀가지고 그 경계에 그만 떠 내려 간다든지, 그 경계에 팔린다든지, 그 경계에 그만 정신을 잃는다든지, 그렇게 하며는 그만 그게 예불하는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부처님을 딱 바라보고 또 외우고 있는 그 지심귀명례 하며, 아주 정말 지극한 마음이 턱 우러나도록,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 이렇게 하면 정말 시방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을 이렇게 마음으로 그리고, 부처님 얼굴을 쳐다보고 그렇게 함으로 해서, 다른 경계에 우리가 팔리지가 않지요.
그래서 예불하는 데는 반드시 부처님을 모셔야 돼요. 불상을 모셔야 됩니다.
내가 어느 절에 법당은 저 멀리 떨어져 있고, 예불하는 데는 한참 또 떨어져 있어요, 그래서 거기에 부처님을 모시자고 그렇게 그렇게 했었어도, 뒷방 노당 이야기야 어디 통합니까.
그래서 지금도 시행이 안 되는데 예불을 하다보면 공간이 너무 넓어 가지고, 그저 여름에는 저녁 예불을 할 때는 아직 해가 지지 않아 가지고, 관광객들이 그냥 왔다갔다 사진 찍고 소리 지르고 온갖 볼 일 다 보고 하는 것을 , 그걸 보며 예불 한다고요.
그리고 낮에도 마찬가지고, 거기 신도들이 와서 49재도 지내고 그러는데, 무슨 거기에 마음이 모아지겠습니까.
그래서 첨경존안이라고 이렇게 못 박아 놨어요. 부처님 얼굴을 보면서 해야 되는거지요, 사바 세계 중생은 상견 중생이다...그래요.
상을, 형상을 봐야 마음이 나는 중생이다, 우리 중생들의 그 한계입니다, 그게 견물생심이라는 말 있잖습니까, 사물을 보면 마음이 난다. 또 상견중생이다, 형상을 보며는 마음이 나는 그런 중생이다, 그랬어요.
석굴암 불상같은데 가면 저절로 숙연해지고, 뭔지 모르지만 존경심을 가지고 그런 것이 왜 그렇습니까, 그 형상을 봄으로 해서 우리가 거기에 자연스럽게 그런 마음이 나거던요, 그래서 예불을 할 때는 꼭 탱화를 걸고 하든지 불상을 모셔 놓고 하든지 그랬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염주를 스님들이 차고 다니다가 행각을 할 때, 절에서 자지 못할 경우는 객실에다가 말하자면 불상을 모셔야 되는데 불상이 갑자기 없잖아요, 그러면 염주를 이렇게 꼬아 가지고 그 불상을 만드는 형식이 있습니다.
머리쪽은 또 머리대로 딱 이렇게 서고요, 그리고 양쪽 발쪽으로 이렇게 딱 하면, 딱 좌정하고 앉은 그런 모습을 만들 수가 있어요. 백팔 염주는 반드시 그런 모습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 염주를 가지고 불상을 딱 만들어 놓고 거기서 절을 하라... 이렇게까지 가르칩니다.
그런데 예불하는 법당에 불상이 없거나 탱화가 없다면 그건 말도 아니예요, 사실은, 그래서 이런 것들을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그런 내용이기도 합니다.
수지자신죄장 須知自身罪障이 유여산해 猶如山海하고
모름지기 알아야 한다, 자신의 죄의 장해가 마치 산과 바다와 같다, 이렇게 세세생생 내가 중생으로 살아 오면서 얼마나 많은 알게 모르게 죄를 지었겠는가... 알면 알고도 지은 죄가 있을 것이고 모르고 지은 죄도 많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수지이참사참 須知理懺事懺으로
수지 이참 사참으로, 모름지기 이참과 사참으로써 가이 소제할 줄 알아야 한다. 이참은 천수경에서 우리 배웠듯이 죄무자성종심기, 죄라고 하는 것은 자성이 없다, 아무리 큰 죄도 고정불변하는 어떤 자성이 있는 게 아니다, 오로지 우리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심약멸시죄역망이라 그랬죠. 마음이 만약에 소멸한다면 죄도 또한 없어진다.
죄망심멸양구공 시즉명위진참회라, 죄도 없어지고 마음도 소멸했을 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참회다, 이렇게 아는 게 이참이예요. 본래 죄란 공해서 없다, 이렇게 아는 것입니다, 근본은 공하다, 죄의 성품은 공하다, 이게 이치로서 참회하는거에요.
한편 그렇게 알고, 그러면서도 또 열심히 부처님 앞에 예배하고, 염불 외우고, 절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또 사참입니다, 사적으로 참회하는거예요. 이적으로 참회하고 사적으로 참회하고, 그래 사적으로 참회하고,
앞에서 설명한 죄무자성종심기의 이치를 몰라도 안 되고, 또 그런 이치만 알고 부처님께 가서 예배하고 실질적으로 절하는 그런 참회가 없어서도 안되는거죠. 그 두 가지가 조화를 이뤘을 때 제대로 소멸된다,
가이 소제 可以消除
녹여서 제거된다, 그런 말입니다, 그렇게 할 줄 알아야 한다.
심관능례소례 深觀能禮所禮가 개종진성연기 皆從眞性緣起하고
자꾸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네요. 깊이 관찰하라. 능례와 소례가 다 진성으로부터 연기하는 줄을 관찰하라, 깊이 관찰하라, 그랬습니다, 참 이거 의미심장한 말인데요.
능례라고 하는 것은 능히 예배하는 우리들 자신, 소례는 예배될 바 부처님입니다. 예배하는 우리나 예배받는 부처님이 모두가 참 진眞자, 성품 성性자, 나의 참 성품, 저 깊은 본래의 마음자리에서부터 인연해서 일어난 것이다.
저 법당에 있는 부처님도, 아니 삼천년 전의 석가모니 부처님도, 아미타불도, 비로자나불도, 관세음보살도, 지장보살도, 문수보살도, 보현보살도, 모두가 나의 참성품으로부터 인연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없이 뭐가 있겠어요. 이 세상에, 그걸 깊이 관찰하라고 했습니다 .
이게 막 사찰에 들어와서 불교에 입문한 그런 사람에게 가르치는 이치, 어떤 생활 규범이지마는 생활 규범치고는 너무 깊이 있고, 참 불교의 어떤 본연이 잘 드러난 그런 가르침이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심신감응 深信感應이 불허 不虛하야 영향상종 影響相從이니라
감응... 감동하고 응한다, 이거예요. 감동하고 응하는 거, 부처님이 감동해서, 응應은 중생에게 응해 주는거지요, 그것이 결코 헛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을 깊이 믿어서, 헛되지 아니 해 가지고서, 그림자와 메아리가 서로 다른 것과 같이 한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믿어라... 그랬습니다.
이게 부처님과 내가 둘이면서 하나고, 하나이면서 둘이라 ... 그래서 감응이 아주 재깍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감응은 부처님이 감동하는 것이고, 응은 중생에게 응해준다... 하는 그런 뜻이예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감동하고 우리들의 어떤 중생에게 그것이 그 효과, 영향이 돌아오는 것이 결코 헛되지 아니해서 몸이 있으면 그림자 있죠, 또 소리가 있으면 메아리가 있잖습니까.
소리에 메아리가 따르듯이, 몸에 그림자가 따르듯이, 그와같이 우리가 공을 들이면 공을 들인만치 그 효과가 있게 마련이고, 선행을 하면 선행을 하는 그만치 거기에 결과가 오게 마련이고, 물론 악한 일도 마찬가지, 악한 일을 하면 악한 그만치 반드시 좋지 아니한 과보가 따르는거죠, 일체가 다 그렇게 헛 것이 없습니다.
불교는 공짜가 없다는 그 이치를 가르치는 종교다...간단하게 그렇게 표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불교는 이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이치를 가르치는 종교다, 전부 인연 도리고 연기 도리다, 이거요.
우리가 인을 심고 조건을 만들었을 때, 거기에 상응하는 결과가 따라 오게 돼 있는 것이다. 내가 오늘날 이런 어떤 인생을 사는 것은 또 내가 이러한 원인과 이러한 조건을 심었기 때문에, 내가 오늘날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 아는거.
그냥 우연히 어쩌다가 보니, 재수 없어서, 누구때문에, 그런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하는 그런 이치를 배우고, 또 스스로 깨닫는 그런 종교가 바로 불교입니다.
얼마나 이게 참 초심자에게 가르치는 가르침입니다마는 얼마나 아주 뜻이 깊고 또 진리입니까, 참 이치죠.
우리가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종교를 공부하는 것은, 세상 이치보다도 정말 깨달은 사람이 알고 계시는 참다운 이치, 인생과 세상의 당연한 그런 그 참다운 이치를 배우자고 하는 것이고,
또 그것을 우리가 마음에 새겨서, 참다운 이치대로 살되 무리없이 정말 진정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하는 거, 이것을 공부하는 것이 불교 공부의 그 요체다, 이렇게 말씀 드릴 수가 있습니다.
오늘 계초심학인문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금요일이고요, 다음 주 한 주는 개인 사정으로 쉬게 됩니다.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2월 5일날 아마 월요일, 다시 공부가 시작 되겠습니다.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 이렇게 많은 분들이 동참하셔서 법석을 빛내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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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深觀能禮所禮 影響相從 감사합니다 _()()()_
큰스님 법문 감사 합니다~~ 미륵골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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齋食할때 마시고 씹는 것을 소리내지 말라(사찰=선불장=부처를 만들어 내는 수행도량 이므로 사찰에서 공양하는 것이 제식이다).숟가락이나 바루떼를 잡고 놓을때 모름지기 편안하고 자세하게 하라(부처님이 삼매에서 깨어나는 모습,연꽃이 필때의 모습처럼).얼굴을 들어 살피지 말며,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거나 거친 음식을 싫어하지 말라.모름지기 묵묵히 언설이 없어야 하며 잡념을 막아서 보호하고 지켜야한다.모름지기 밥을 받아 먹는 것은 이 형상이 마르는 것을 치료하기 위함이요,道를 이루기 위함임을 꼭 알아야 한다. 반야심경을 외우며 삼륜(시주한 사람,받는사람,시주物)이 청정함(空한다는것)을 관해서 道를 닦는 용도(원칙)에
어기지 말지니라.분수(기도,예불,정근,향을 사르는것)에 나아가되 모름지기 아침과 저녁으로 부지런히 행해서 스스로 해태함을 꾸짖으며 대중이 행하는 순서를 알아서 뒤섞이고 어지럽게 하지 말라. 범패로서 축원하되 모름지기 글을 외우고 뜻을 관할지언정(ex-聞我名者免三途 見我形者得解脫) 다만 음성만 따르지 말며 韻과 곡조를 고르게 하라.존안을 우러러 공경해서 다른 경계에 반연하지 않는다.자신의 죄의 장애가 마치 산과 바다와 같아 모름지기 이참(본래 죄란 空해서 없다는 것을 아는 것)과 사참(염불,예배,절을 하면서 참회하는 것)으로서 가히 소제할 줄 알아야 한다.
능례(능히 예배하는 자신) 와 소례(부처님)가 모두 나의 마음 자리에서 부터 인연해서 일어난 것이고 (부처님이) 감동하고 응하는 것이(중생에게 응해주는 것) 결코 헛되지 아니해서 그림자(몸에 그림자가 따르듯이)와 메아리가 따르는 것과 같이 한다는 사실을 깊이 믿어라.!! 아~살아가면서 이렇게만 살수 있다면~~^^* 聞我名者免三途 見我形者得解脫_()()()_
감사 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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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빼먹고 저날 뭐했나 모르겠습니다.잘 듣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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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놓쳐는데 잘듣겠습니다.감사합니다
큰스님()()() ,, 늦어도 언제든지와서 법문을듣게해주심에 늘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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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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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공짜가없다. 전부 인연도리이고, 연기도리이다. 가슴속에 새겨놓겠습니다,
고맙습니다.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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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_()_()_()_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편안히 앉아서 공부를 할수 있게 해주신 큰스님과 녹취록까지 세세히 기록해주신 도반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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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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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방(執放)에 요수안상(要須安詳)하며. 安詳而起, 安詳而坐... 대중생활에 있어서 꼭 지켜야 할 규범인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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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요.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각합장()()()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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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법문 듣고 깨우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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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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