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1976년 대마초 사건후 재배농가들의 기피로 이젠 추억속으로 잊혀져 가고 있다.
우리선조들의 삶의 멋과 애환이 담긴 한민족의 숨결과 손떼등 문명의 뒤안길에서 그 맥락을 쫓아 숱한 사연과 지혜로운 삼 삼기를 보면…
삼(麻)은 목화와 함께 우리나라 중요한 피복(被服)농산물이었다,
삼째기, 삼삼기, 베매기 등은 오랫동안 우리조상들의 맥을 이어왔는데 매년 6월말쯤이면 삼 수확기를 맞아 그 멋진 솜씨들로 의(衣)생활을 해 왔다는 것이다.
삼베는 삼이라는 식물의 줄기를 가늘게 찢어서 베틀에 짠 그 천을 말하는데 ‘마(麻)’ 또는 ‘베’라기도 한다.(삼 삼기는 삼을 가늘게 째서 만들어 놓은 삼 올을 일일이 손으로 연결시켜 올로 만드는 과정)
삼은 주로 온대지방과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삼과의 1년초 식물.
삼베가 생산되기까지는 삼 씨앗을 뿌려서 베를 짜기까지 여려 과정의 노동이 뒤따라야 하는데 이러한 어려운 과정을 길쌈이라고 전한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삼베 모시 중 남해산은 한산모시와는 다르게 삼베마냥 투박 하다는게 특징. 옷감이 피부에 달라붙지 않고 무척이나 시원하다 하여 한때 불티가 나게 대인기 상품이었으나 우리나라에선 지난 1976년에 발효된 대마초관리법으로 인해서 삼의 재배가 규제되는 바람에 그 재배면적도 줄어들어 이젠 점차적으로 추억속으로만 잊혀져가고 있다.
대마초 사건후로는 신고 재배마저 기피, 생산농가가 점차 없어져 갔다는 것이다.
삼 삼기를 하려면 주로 농촌의 농한기를 이용해 어두운 밤 등잔불빛아래서도 동네 이웃 아낙네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각자 하얀 무릎을 들어내 놓고 그 무릎 위에서 한 올 한 올씩 비벼서 이어가는 고달픈 시련을 겪으며 온갖 고통 속에 시집살이를 하면서 이러한 어려운 길쌈 일들을 해야 했다.
이 삼 삼기와 베틀짜기, 베읽히기 등 그 과정의 노동일이 너무 많아 그 옛날 시집살이의 恨이 서려 있기도 하지만 남존여비의 유교적 사상과 봉건적인 가부장제의 사회적 배경으로 보아서는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장님 3년이라는 속담과 격언 속에 인내하며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남성중심의 대가족제도 아래선 참을 수 없어도 여자이기 때문에 참아야하는 눈물어린 삶과 여자가 겪어야 하는 시집살이의 외로움과 고독 등 고달프게 살아왔던 그 옛날 지난시절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젖어든다는 할머니들은 삼베길쌈으로 청춘을 다 보냈다는 뒷 애기가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 부녀자들이 길쌈할 때 부르는 노동요(勞動謠), 물레노랠베틀갇삼 삼기노래 등이 있었다. 오랜 시간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불렀으며 가사도 길다.
내용은 아낙네들의 희노애락을 담고 있고 넋두리하듯 흥얼거리며 부른다.
이 가운데 삼 삼기노래는 삼 삼기를 여럿이 모여 하면서 밤새는줄 모르게 고된 신세타령으로 일상사를 엿볼 수가 있는 길쌈노래로 한국민요에도 등장했다는 것.
7월 중순부터 시작되는 길쌈은 부녀자들의 가장 큰 일이였다.
이로써 모시적삼만큼이나 고와 부잣집 어른들이 중의적삼을 해 입고 부채든 손을 자랑스럽게 흔들며 나들이를 다니기도 했다. 삼의 역사는 상고시대때(신라)부터 내려온 것이라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이젠 삼의 재배가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지만 한때 잎과 열매가 환각제인 대마초로 판명 되고부터 재배가 규제되고 경제성이 없어 신고재배마저 기피되고 말았다.
한때 가수며 배우들이 질탕하게 피워대는데다 출연 금지를 당한 후 5년만에 풀려났다는 애기와 함께 삼의 재배는 아직도 묶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베는 상주들이 입는 상복과 수의 또는 부잣집 전용물이 되기도 했는데 잠자리의 요위에 삼베 홑이불을 까는가 하면 베 잠뱅이(반바지)를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다
그 당시 삼베1마에 4만원, 기껏 베 잠뱅이 하나와 소매 짧은 셔츠하나 만드는 베 값이 이만큼이고 보면 가히 양복 값보다 비싸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삼베옷은 기계문명의 발달로 이젠 화학 섬유에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삼베는 기호적인 복고물로 동경 하고 있을 뿐 삼 삼기는 이젠 그 아련한 옛 모습을 송두리째 감춰버렸다.
글 ; 남해읍 봉전 ;장 대 우(전 남해문화원장)
(신문방송 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