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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녕군(敬寧君) 묘
경녕군 신도비(神道碑)
경녕군 묘역 및 사당(明德祠) 전경
明德祠 전경1
明德祠 전경2
敬寧君 墓所沿革
正一品大匡輔國崇祿大夫 敬寧君의 諱는 裶이시고 字는 正叔이시며 諡號는 齊簡公이시
다. 太祖四年 (1395) 12月 松京 靖安君 (太宗大王) 私邸에서 母妣孝嬪金氏의 獨子로
誕生하시었으며 孕胎時에 橡上에 白龍의 瑞兆는 正史에 記錄된 바와 같이 後日의 燦爛
한 功績은 그 때의 世人들의 嘱望에 어긋남이 없으시었다.
太宗十四年(1414) 正尹이 되시고, 同年 10月 癸卯日에 元尹으로 陞差하시어 宗簿寺
(시)提調 太宗17年(1417) 9月 正二品正憲大夫로 陞爵하시어 國祿은 二百結(一結은
約二百坪) 世宗元年(1419) 8月 25日 父王(當時에 上王) 太宗大王의 正使로 明國에
入國하시어 그 나라의 不遜한 待遇를 받으시면서도 英特하신 天質과 博識하신 卓見으로
明國朝廷을 震感시키시었다. 그 當時 明國은 李朝創業을 旣定事實로 여기고 있으면서도
한구석 釋然치 않게 生覺하며 創業以來 王統繼承問題에도 많은 疑訝感을 품고 있어
自己들 內心에는 이 機會에 藩國 (高麗朝부터 이 나라는 中國의 從主國)에 警醒心을
喚起시키겠다는 心算으로 敬寧君을 人質로 抑留하려고 內定한 後 蛟蝎이 들끓는 山間에
幽閉시켰으나 毒虫의 害를 입지 않는 敬寧君의 偉容과 文筆에 感動되어 前例가 없는
厚待를 받으시고 明國皇帝 自身의 直接序製인 여러 가지 文献과 白金 五百兩과 錦帛外에
羊 五百頭는 우리 나라 羊 繁殖에 많은 도움이 되었고 獅子, 麒麟, 福祿等의 動物을
下賜받으시었지만 運搬이 困難하여 画工을 시켜 措寫케 하여 가지고 오신 후 처음으로
國內에서 이러한 動物을 알게 되었다.
還國하신 後 世宗大王의 善政을 隨時輔弼하시고 諮問에 應하시어 特히 國防의 對備策과
佛敎文化의 振興策을 献議하시어 國家로서 實踐에 옮기게 하였으며 讓寧, 孝寧,
兩大君과 友愛尤篤하시어 3王子분의 友愛는 國史에 紀錄되어 있는 바이며 그後 明國
勅使 接待에 敬寧君께서 恒時 國家를 代表하시어 應待하시어서 그 때의 對話가 오늘까지
많은 逸話로 傳해 온다.
世宗七年(1425) 崇祿大夫(從一品)
世宗十二年(1430) 正月 庚午日 大匡輔國(正一品)
聖君 世宗大王께서 三十二年間의 燦爛한 治績을 남기시고 崩御하실 적에 遺嘱하시기를
敬寧君墓所는 王陵과 同等한 墓所를 갖추어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果然 實踐되었을
는지 모른다.
世宗께서 崩御하신 後에는 文宗 端宗兩朝에 宗簿寺를 統察하시다가, 端宗 悲禍를 當
하시매 人生無常의 幻滅을 느끼시었지만 宗親의 將來와 國家의 前程을 어찌하리오.
悲㥽과 痛歎함을 참으시며 世祖大王의 諮問에 本意아닌 應諮도 하시어 紀綱을 바로
잡으시려고 盡力하시었지만 世祖四年에 이르도록 正鋼의 軌道를 바로잡힐 길이 漸漸
멀어짐이 甚하였으므로 忠則盡命의 大義를 아시면서도 世祖四年五月 錄䧔이 짙어가는
黃昏을 틈타시어 京洛을 떠나신 후 先逝하신 元妣 淸風金氏 墓所가 계시는 忠州땅으로
발길을 옮기신 후 漁樵野叟와 江山風月을 벗을 삼아 悠然自若하시다가 正命을 어찌
하시리오.
世祖四年 (1458) 9月 9日 春秋 64歲로 永逝하시니 國家에서는 3日間 朝市를 撤廢하고
齊簡公 (註執心克莊曰, 齊, 恭敬行善曰, 簡)으로 賜諡하시고 先王遺嘱에 末及하지만
禮葬으로서의 모든 儀式과 米穀, 棺槨, 石物等을 賜賻하시어서 京鄉의 數萬의 泣送을
받으시며 지금 이 墓所에 고요히 잠드시었다.
그 後 이곳은 壬辰倭亂의 激戰地인 彈琴台와 가까운 距離라 이 墓所도 甚한 戰禍를
當하여 神道碑와 石物의 失傳이 많았으며 墓下子孫들의 被禍도 極度에 達하여 不祧廟의
奉享도 闕香됨이 幾年에 이르렀다.
英祖三年(1727) 九大孫 都正 漢譧으로 別立 宗孫 奉嗣
高宗壬申(1872) 高宗께서는 敬寧君께 領宗正卿을 追封하시고 承旨 李承宇를 墓所에
差遣하시어 法樂을 베풀어 隆盛한 祭禮를 올렸다.
1920年 湖南의 喜燮과 宗孫 健永의 周旋으로 齋室이 重建되고 1932年宗孫 健永과
14世孫 容珪의 誠心으로 神道碑가 再竪되었으며 忠州의 鍾球 誠金으로 齋室修理와
草家를 瓦葺으로 改修하였고, 1959年 5月 湖南의 秉文 發意로 諸宗親이 呼應하여
現廟宇(明德祠)가 建立되었다.
1966年 4月 大宗會가 建立되어 그 後 敬寧君史蹟을 發刊하여 遺德을 啓蒙시켰고 幾百
年間을 두고 墓所石物破落과 境內의 荒廢함을 悚懼히 여기고 慨歎함을 禁치 못하던中
俱獻石物과 改封莎草를 發議한즉 京鄉의 諸宗들의 欣然呼應하여 床石, 羊馬石, 屏風石,
望柱石, 堤礎石을 献石하고 改莎草도 並行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元妣 淸原府夫人淸風金氏墓所는 忠北陰城郡甘谷面嶺山里에 禮葬으로 모시었으며, 後妣
의 開城府馬氏墓所는 戰禍로 失傳되어 近年鍾建의 誠力으로 敬寧君墓所西便丘陵에
設壇으로 모시었고, 後妣 全州崔氏墓所는 京畿道華城郡南陽面新南里에 계시다.
十男二女를 두시어서 後裔中에서 政治, 文化, 宗敎의 先驅者, 文武顯職의 多功等 李朝
五百年史에 赫世한 功績이 許多하게 記錄되어 있으며 今後도 坊坊曲曲에 繁衍散居하는
子孫들이 先祖의 遺訓과 蔭德下에 爲先心과 宗族敦睦, 後孫育英하는 마음이 連綿히
繼承될 것을 確信하는 바이다.
1969年 4月 日
敬寧君派 大宗會
敬寧君 墓碑銘
부군(府君) 휘(諱: 죽은 사람의 이름을 일컬음)는 비(裶)이시고 자(字)는 정숙(正叔)이
시다.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아드님으로 경녕군(敬寧君)으로 봉(封)하였다.
효순궁주(孝順宮主) 김씨(金氏)께서 경녕군을 낳으실 때 저택(邸宅) 용마루 위에 흰 용
(龍)이 나타남을 보고 상하 모든 사람들이 놀라 이르기를 현인(賢人)이 세상에 태어나실
길조(吉兆)라 일컬었다. 때는 바로 태조(太祖) 四年 을해년(乙亥年 : 1395)이었다.
間
)에 우애있어 학문을 배우매 의리(義理)에 밝으시니 조정(朝廷)에서나 세간(世間)에서 다 같이 칭송이 자자하였다. 양녕대군(讓寧大君)과 효녕대군(孝寧大君)을
차례로 가르치시고 또한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스승이 되시어 옛날의 요(堯) 임금이나
순(舜) 임과 같이 어진 정치를 베푸시도록 지극히 보찬하셨고, 다섯 대(五代)의 임금님
을 섬기시면서 항상 변함없는 충성(忠誠)을 다하셨다. 국정(國政)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도 중론(中論)은 자문(諮問)하시어 결정을 내리시니
춘추(春秋)가 많으시며 덕망(德望) 또한 넓으신 까닭이었다. 일찍이 군명(君命)을 받들고
중국(中國)에 사신으로 가시어 그 맡으신 바를 다 하시니 삼한공(三韓公)을 제수(除授)
받으시고 대광보국(大匡輔國)의 높은 작위를 더하시고 또 그 공적(功績)을 포상(褒賞)
하시어 은총(恩寵)이 지극하셨다.
슬프다! 세조(世祖)가 왕위(王位)를 선위(禪位) 받으실 때 닥쳐오는 역수(歷數)를 어이
하랴! 표연(飄然)히 어지러운 세상을 잊으려 중주(中州 : 지금의 忠州) 숭선(崇善) 땅에
내려가 상양(徜徉)하시며, 산과 물을 찾으시고 늙은 농부와 나뭇꾼으로 더불어 벗을
하시며 청렴(淸廉)하신 마음티끌 만큼도 백성에게 누(累) 끼치심 없이 여생(餘生)을
보내시다가 세상을 마치시니 때는 세조(世祖)四年 무인(戊寅 : 1458) 九월 九일이다.
도비(都鄙)의 온 천하가 슬픔에 잠기고 공경(公卿)에서 사림(士林)에 이르기까지 수만을
헤아리는 인사(人士)가 다투어 집불(執紼 : 상여를 어깨에 메는 큰 밧줄)하고 슬퍼하며
치상(致喪)을 받들었다.
제간(齊簡)이라 시호(諡號)를 받으시고 부조지위(不祧之位)의 전(典)을 베풀어 받으셨
으니 군은(君恩)이 이렇듯 하시매 무슨 유한이 있으랴. 예장(禮葬)으로 받들되 충주(忠州)
황금산(黃金山) 은골 계좌(癸坐 : 북쪽의 방향) 언덕에 안장(安葬)하였다.
배위(配位) 안산군부인(案山郡夫人) 청풍 金씨(淸風金氏)는 찬성(贊成) 김관(金灌)의
따님이시다. 다시 삼한부부인(三韓府夫人)으로 봉하시고 곤덕순비(梱德純備 : 순수한
덕을 갖추었다는 뜻)의 덕이 각 궁에서 첫째 였다. 묘소(墓所)는 충주(忠州) 가미곡
(加味谷)으로 지금의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잔작동(陰城郡甘谷面嶺山里盞酌洞) 축좌
(丑坐 : 북동쪽 방향)이며 나라에서 예장으로 모시었다.
자손은 十남 二녀를 두셨으니 고양군 질(高陽君 秩), 은천군 찬(銀川君 穳), 오성군 치 (梧城君 緻) 영선도정 이(永善都正利)는 적출이시고, 월성수 거(月城守 秬), 가흥수 적(嘉興守積), 복성군 정(福城君 楨), 모양군 직(牟陽君 稙), 가림군 추(嘉林君 秋), 단산
도정 수(丹山都正 穗), 여섯분과 참봉(參奉) 초계정씨 석구(草溪鄭氏 石勾)와 현감(縣監)
여산송씨 계흥(礪山宋氏繼興의 배위(配位)는 서출(庶出이시다). 손(孫)과 증손(曾孫)
이하 봉작(封爵)을 받으신 분이 六十분이시고 후손 중 문학과 절조 로 이름난 분이 별과
같이 많으시며 직손(直孫) 외손(外孫)들의 후손이 번창하고 뻗혀 있음은 능히 기록하기
어렵다
.슬프다! 부군(府君)의 극진하신 덕망과 착실한 행적(行蹟)이 이미 세상에 떨쳤으니 감(敢)
히 더 기록하랴. 글로 색이어 일컷노니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성명(聖明)에 태어나시어,
다섯 대(代) 임금을 섬기시고,
언행(言行)이 청덕(淸德)하시어,
언제나 왕실에 온갖 정성을 기우리어
충성을 마음에 새기시고
빛나는 공적 많으시되
세상에 이름나는 일 겸손하시어 피하시니
어천만사(於千萬祀)①라도
어지신 명성 사람의 입에 끊이리오.
은퇴(隱退)하시는 넓으신 마음과 그 뜻
불영(不盈)②의 도(道)를 택하신
명덕을 흠모(欽慕)하지 않을손가.
명공 거경(名公 鉅卿)③이시고
부모에 효행하시고
덕이 지극하사
후손이 번성해 내려오며,
충주(忠州) 황금곡(黃金谷)에
영원히 잠드시다.
資憲大夫 知中樞府事
玄孫 希得④이 삼가 지었노라.
註譯 : ① 천만년을 두고 제사를 이어가는 일
② 중용(中庸)의 뜻과 같음
③ 벼슬하여, 이름이 세상에 떨림
④ 希得 : 號는 靑潭. 牟陽君曾孫. 河東君의 六男. 北伯 贈 贊成(1525~1604)
附記 : 이 墓碑銘은 神道碑에 刻字되어 있지 않음.
경녕군(敬寧君) 약사
경녕군의 휘는 비(裶)이고 자는 정숙(正叔), 시호는 제간(齊簡)이다. 1395년(태조 4) 12월
13일 개성의 정안군(후의 태종)의 사저에서 효빈 김씨의 소생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관후하며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 양녕·효령대군과 같이 수학하고 세종대왕의 사부가
되었다.
다섯 임금을 섬기면서 충성을 다하여 국정의 어려움이 있을 때는 필히 자문에 응하였다.
1414년(태종 14)에 정윤이 되고 그 해 10월에 원윤으로 승차하여 종부시 제조가 되었으며,
1417년(태종 17) 9월에 정헌대부 경녕군으로 봉작되었다. 1419년(세종 1) 8월 중국 명나라
와의 마찰이 있자 상왕 태종대왕의 정사로 명나라에 사은사로 파견되어 국교를 정상화시키는
동시에 파격적인 후대를 받았다. 특히 황제의 친필로 된 어제서(御製序)를 비롯한 많은 선물을
받았다.
그 해 11월 18일 환국하였는데 상왕 태종대왕이 크게 기뻐하여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지금의
무악재까지 나와 환영하고 연회를 베푼 일은 매우 유명하다. 이때 공의 나이 24세였다.
공은 그 후에도 세종대왕을 수시로 보필하고 자문에 응하는 등 국방의 대비책과 불교문화의
정화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는 조정을 대표하여 국교를 돈독히
하였다. 이런 공로로 1425년(세종 7) 11월 숭록대부로 승차하고 1430년(세종 12) 정월에는
대광보국(大匡輔國)으로 승계되었다. 세종대왕은 승하할 때 “후일 경녕군 묘소는 왕릉에
못지 않게 예우를 갖추어 드리라.”고 했을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다.
그 후 문종대왕·단종대왕 때에는 종부시 도제조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1458년(세조 4) 배위인
청풍김씨의 묘소가 있는 충주 숭선 땅으로 낙향하여 그 해 9월 9일 64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3일간 철조(撤朝)하고 `제간(齊簡)'으로 시호를 내리고 충북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언곡 계좌에 예장하였다.
1727년(영조 3) 9대손 도정 한겸(漢謙)으로 하여금 별립종손(別立宗孫)으로 봉사할 것을
명하여 오늘에 이른다. 1872년(고종 9) 영종정경으로 추봉하고 승지 이승우를 묘소에 보내어
제악으로 치제(致祭)하였다.
어머니 효빈 김씨의 묘소는 경기도 구리시 교문3동 한다리 아차산 남록 자좌이다. 배위인
부부인 청풍김씨는 참의 김관(金灌)의 딸로 1416년(태종 16)에 혼인하여 군부인에 올라 1450
년(세종 32) 4월에 별세하였다. 묘소는 충북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잔작동 축좌이다. 1872년
(고종 9) 청원부부인으로 추봉되었으며, 1994년 충북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되었다.
군부인 개성부 마씨의 묘소는 부군 묘소 백호등에 설단하였는데 이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화리 모양군 묘역으로 옮겼으며, 군부인 전주최씨의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신남리
함봉산 손좌이다. 공은 슬하에 10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4남 · 5남 · 6남은 후사가 없다.
장녀는 참봉 정석내(鄭石쨴)에게, 차녀는 현감 송계흥(宋繼興)에게 출가했다.
조선시대 경녕군의 후예로서 문과 급제자는 27인이고, 무과 급제자는 4인이다. 공의 증손
하동군계출이 4인인데 좌랑(佐郞) 희온(希溫) · 전적(典籍) 희량(希良) · 찬성(贊成) 희득
(希得) ·교리(校理) 용호(容鎬)이다. 신당군 계출은 병조판서 희검(希儉) · 이조판서 수광
(睟光) · 영의정성구(聖求) · 이참(吏參) 민구(敏求) · 이참(吏參) 당규(堂揆) · 예조판서
현석(玄錫) · 사검대(舍檢大) 현기(玄紀) · 이조참의 현조(玄祚) · 이참(吏參) 희원(喜元)
· 정언(正言) 한종(漢宗) · 좌승지(左承旨) 형하(瀅夏) · 승지(承旨) 유하(游夏) · 헌납
(獻納) 유성(游誠) 등 12인이다.
파릉군 계출은 승지(承旨) 유신(惟信)이고, 서원군 계출은 함남절도사(咸南節度使) 용순(用淳) ·
도사(都事) 시민(時敏) · 지평(持平) 시우(時雨) · 선전관(宣傳官) 명(銘)이다.
함평도정 계출은 도승지 유인(裕仁) · 대사성(大司成) 홍인(弘仁)이고, 익흥군 계출은 대사헌
형욱(馨郁) · 정언 숙(琡 ) · 좌승지 서조(瑞朝)이다. 이상과 같이 문과에 급제하여 국가를
위해 헌신하였고, 특히 지봉(芝峰) 일가는 3대를 정승으로 활약하고 그 후손들 13명이 대과에
급제하였다. 지금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에는 3대 정승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순국열사로는 일문칠절(一門七節)이 있다. 병자호란 때의 3충신으로 성구(聖求)의 아들 상규
(尙揆)와 민구(敏求)의 두 아들 원규(元揆)와 중규(重揆)가 있다. 4열녀로 성구의 처 안동
권씨, 상규의 처 능성구씨, 이일상의 처와 한오상의 처는 성구의 두 딸이다. 이들은 강화도가
함락되자 순절함으로써 7절이 되었다. 이때 오성군의 현손 중명(重溟)과 그 둘째 아들 증(增)
부자도 함께 순절하였다.
임진왜란 시에는 복성군의 5대손 환(丸)이 중봉(重峰) 조헌(趙憲)과 정읍 사현에서 역전하여
장열히 순사하니 임금은 그곳 이름을 `의분동(義墳洞)'이라 이름하였고 지금까지 전해진다.
정유재란 때에는 은천군의 6대손 시수(始秀)와 시화(始華)가 만정 임세무 김경덕·경탁상
등과500여 명을 이끌고 호치(胡峙)에서 적과 분전하다가 순국하니 시신도 못찾아 치발장으로
선영에 장사지냈다. 그 싸움에서 순국한 애국열사가 92인으로 유림에서는 고창군 흥덕면
남당에 모충사(慕忠祠)를 짓고 위패를 각각 모시고 매년 음력 10월 10일 그분들의 충절을
기리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끝으로 곽(廓)은 가림군의 5대손으로 1615년(광해군 7) 무과에 장원하고, 1636년(인조 14)
회답사로 심양(瀋陽)에 갔다. 때마침 국호를 청(淸), 왕을 황제, 연호를 숭덕이라고 하고
들에서 제사지내려는 마당에 사신으로 참여시키려고 위협하였으나 결사항거 불참하고 본국에
돌아왔다. 조정에서는 승복하고 돌아왔다 하여 선천(宣川)에 귀향보냈다가 곽의 충절을 알게
되어 석방되었다. 후에 삼도통제사에까지 올라 충성을 다하였다.
이밖에도 종정(宗貞)·섬(暹)·원남(元男)·제송(齊松)·영식(永植)·용준(用濬)용침(用沈)·
시욱(時旭)·굉(肱)·익용(翼龍)·경(璥)·희강(希剛)·형광(絅光)·사의(士義)·동규(同揆)·
석규(碩揆)·하(廈)·홍적(弘勣)·종(悰)경욱(慶郁)·광욱(光郁) 등은 경녕군의 후예로서
나라를위해 일한 인물이다.
아래 종원분포상황 도표는 전주이씨 경녕군파 각 파별 세대수와 인구수를 나타낸다.
파별 |
세대수 |
인구수 |
은천군파 |
1,622 |
7,852 |
오성군파 |
1,369 |
6,541 |
복성군파 |
2,620 |
10,798 |
모양군파 |
3,299 |
11,914 |
가림군파 |
1,054 |
4,959 |
단산도정파 |
2,799 |
14,968 |
합 계 |
12,763 |
57,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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