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씨는 진(晋)나라 안제(安帝) 때 사람인 아부간(阿簿干)의 후손으로 전하며,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의 역사서에 아비지(阿非知), 아직기(阿直岐) 등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성씨가 아(阿)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
2 竹山安氏 죽산안씨 당 대 |
이전부터 안씨의 도시조(都始祖)는 당(唐)나라 출신으로 신라 애장왕(哀莊王:신라 40대왕, 재위 기간;800∼809) 때 우리나라로 들어온 안원(安瑗)이며, 여기서 각 주요 본관이 분파했다는 설이 있었다.
그러나 확인된 바는없다기록에 의하면 광주안씨의 시조는 고려 태조 때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고, 이후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진 안방걸(安邦傑)이다.... 안방걸은 고려태조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는 시기에 광주지방의 鄕吏로광주지방의 안정에 공적이 있어 大將軍의 軍職을 가지고, 土姓分定에 의한 성씨를 安씨로 스스로 가지고 廣州를 생활 근거로 거주하였으므로 후손이 本貫으로 삼아 왔다. |
3 太原安氏 태원안씨 원 대 |
시조 = 안 만대 는 원나라 태원사람으로 노국공주와 같이와서 귀화하여 공민왕때 예부상서를 하니 본관을 중국 고향 태원을 했다, |
4 淸州楊氏 청주양씨 당 대 |
양씨는 중국 홍농(弘農) 사람인 당숙우(唐叔虞)의 후손 백교(伯僑)가 주나라로 가서 양후(楊候)에 봉해져 그것을 性으로 삼았다.
시조 楊 起는 그후손으로 원나라 도첨의 시중을 하다 노국공주를 따라와 정착했다, 그후 공을 세워 삼한창국공신으로 (상당백)청주 봉해지고 후손이 청주를 본관으로 했다, |
5 通州楊氏 통주양씨 명 대 |
시조 = 양 복길 중국 통주인으로 명나라 9의사의 한분으로 나라가 망하자 소현세자와 같이와 귀화 했다 후손이 고향 통주 본관으로 했다 |
6 慶興魚氏 경흥어씨 명 대 |
어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함종(咸從) 충주(忠州)를 비롯하여 20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전하는 어씨는 함종(咸從)·충주(忠州)·경흥(慶興) 등이며, 대다수의 어씨가 함종 어씨로 알려져 있다.
충주 어씨는 본래 성이 지씨(池氏)인 어중익(魚重翊)이 고려 태조에게 성을 받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있다. |
7 咸從魚氏 함종어씨 송 대 |
함종 어씨는 중국 풍익부(馮翊府) 사람으로 남송 때 난을 피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어화인(魚化仁)을시조로 하고 있다. |
8 寧越嚴氏 영월엄씨 당 대 |
엄씨의 시조 임의(林義)는 중국 한나라 부양(富陽)의 후예이다. 그는 고려말 사신으로 들어왔다가내성군(柰城郡;지금의 영월)에 정착하여 살게 되면서 후손들이 영월(寧越)을 본관으로 삼았다.
문헌에 엄씨의 본관을 영월 이외에도 상주(尙州)· 하음(河陰)· 광주(廣州)· 파주(坡州) 등 60여 본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모두 영월 엄씨에서 갈라진 성씨이다. |
9 곡산여씨 성주여씨 함양여씨 당 대 |
여씨는 주나라의 무왕이 전설적 현인인 망(望:강태공)을 여(呂)에 봉하고 호를 여상(呂尙)이라 하여 시작되었다. 그의 후손인 불위(不韋)의 아들 영(榮)이 춘추전국을 통일한 진시황제이다.
우리나라 여씨의 시조는 증손 몽(夢)의 후손인 당나라 희종 때의 어매(御梅)인데, 그는 877년(신라 헌강왕 3년) 신라에 건너와 경북 성주군(星州郡) 벽면(碧面)에 정착하였다.
《함양여씨족보(咸陽呂氏族譜)》와 《성산여씨족보(星山呂氏族譜)》에 의하면 어매에서 부터 함양과 성산을 각각의 본으로 삼았으나,
모두 하나의 조상에서 시작한 같은 혈족이다 |
10 宜寧余氏 의령여씨 송 대 |
여씨는 본래 중국의 성씨였는데, 조·송나라 때 선재(善才)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고려에서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지고 의령(宜寧)에 살게 되면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의령으로 하게하였다, |
11 谷山延氏 곡산연씨 원 대 |
연씨는 본래 중국 남양에서 시작한 성씨로 중국 홍농에서 고려에 들어온 계령(繼芩)이 곡산에 정착하여 살게 됨에 따라 우리나라 연씨의 시초가 되었다.그리하여 후손들이 계령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곡산(谷山)으로 하였다.문헌에는 연씨의 본관이 곡산 외에도 36본이 전하나, 현재의 연씨는 곡산 하나인 것으로 전한다 |
12 全州連氏 전주연씨 미 상 |
시조는 고려 태조 때 인물인 연주(連珠)로 전한다. 이보다 앞서 신라 제10대 내해왕(奈解王) 때 이벌찬(伊伐飡) 진(珍) 장군이 백제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기록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전하는데, 오늘날의 연씨와 연관이 있는지는 상세히 알 수가 없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나 호적상으로는 나주(羅州)로 쓰기도 한다. |
13 파주염씨 서원염씨 봉성염씨 당 대 |
염씨는 중국 교목세가(喬木世家:여러 대를 현달한 지위에 있어 자기 집안의 운영을 그 나라의 운영과 함께 하는 집안)의 후손 형명이 당나라 후기에 신라에 들어와 봉성(峰城:파주의 옛 지명)에 자리잡은 것이 우리나라의 처음이 되었다.그 후 후손들이 고려 후기의 인물인 제신(悌臣)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을 처음에 봉성으로 하였다가 곡성(曲城)으로 바꾸었다. 곡성현이 서원(瑞原)으로 바뀌면서 다시 서원을 본관으로 삼았는데, 조선 연산군 때 와서 서원이 다시 파주(坡州)로 바뀜에 따라 현재의 파주염씨가
되었다. |
14 海州吳氏 해주오씨 송 대 |
오씨는 본래 중국 연릉(延陵:지금의 강소성 금릉도 단도현) 사람인 태백(泰伯)이 세운 오나라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기록하는 문헌이 전한다.
우리나라 오씨의 근원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기록이 달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오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210본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에는 해주(海州)·동복(同福) 함양(咸陽· 고창(高敞)· 나주(羅州)·보성(寶城) 등을 비롯하여 20여 본이 전한다. |
15 宜寧玉氏 의령옥씨 당 대 |
옥씨는 중국에 들어온 성씨로, 당나라에서 파견된 8재사(八才士)중의 한사람인 진서(眞瑞)가 신라에서 의춘(宜春:의령의 별칭) 군(君)에 봉해져 의령(宜寧)에 정착하면서부터 우리나라의 시초가 되었다고한다. |
16 慶州溫씨 경주온씨 주 대 |
온씨는 중국 주나라 성왕(成王)의 아우로 당에 봉해진 숙우(叔虞)의 12세손 소후(昭侯)가 그의 아우 사(師)를 온(溫)에 봉하고 평원(平原)에 도읍을 정하게 하였다. 온씨의 성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온씨는 삼국시대 때 한 국가인 고구려의 평강공주와 혼인하여 평원왕의 부마가 된 온달(溫達)로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온씨의 본관은 서원(西原:청주의 별호)·온양(溫陽전주(全州)·나주(羅州)·금구(金溝)·경주(慶州) 등 11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정확하게 고증할 문헌이 전하지 않는다 |
17 金溝溫氏 금구온씨 주 대 |
온씨는 중국 주나라 성왕(成王)의 아우로 당에 봉해진 숙우(叔虞)의 12세손 소후(昭侯)가 그의 아우 사(師)를 온(溫)에 봉하고 평원(平原)에 도읍을 정하게 하였다. 온씨의 성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
18 開成王氏 개성왕씨 기 자 |
우리나라 왕씨는 중국 태원왕씨(太原王氏)에서 갈라진 성씨라고 보며 그러나 오늘날 전해지는 본관은, 고려왕조를 주도해 온 개성 왕씨와 본래의 성이 박씨였으나 태조 왕건에게 왕씨의 성을 받은 제남 왕씨가 있다
중국 황제 헌원씨의 17세손 조 명이 유 누와 함께 와서 평양 일토산 아래 정착한 조명의 후손 수 긍이 기자가 왕일때 왕씨로 하사 바닽았다,
一土草家爲王 하여 화가두려워 왕 몽이 아들 7형제를 데리고 지리산에 은거하며 田, 申, 車, 로 성을 바꾸고 車 無一이라 했으며 무일의 3째아들 왕 식시의 아들이 왕건이다 |
19 濟南王氏 제남왕씨 기 자 |
오늘날 전해지는 본관은 본래의 성이 박씨였으나 태조 왕건에게 왕씨의 성을 받은 제남 왕씨가있다.
처음엔 궁예를 도왔으나 궁예의 횡포가 도를다하자 왕건이 건국하자 등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치며 공을 세웠다, |
20 徽州姚氏 휘주요씨 명 대 |
요씨는 중국의 성이지만 고려 태조 때 인휘(仁暉)라는 인물이 《전고대방(典古大方)에는 수원요씨(水原姚氏)로 나온다.
1930년 국세조사 때 성진군(城津郡)에 살던 요재룡(姚在龍)에 의하면, 휘주요씨(徽州姚氏)는 그 당시로 해서 290여년 전에 난을 피해 명나라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온 사람들의 후손인것으로 밝히고 있다 |
21 丹陽禹氏 단양우씨 하 대 |
우씨는 중국에서 생긴 성씨로, 하나라 우왕(禹王)의 후손이라 하는데 문헌이 전하지 않아 그 선대는 자세히 살필 수 없다.후손 현(玄)이 고려 초 중국에서 건너와 단양(丹陽)에 정착하였으며, 그후 현의
l0세손 현보(玄寶)가 단양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현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단양으로 하였다.
문헌에는 단양 외에도 예안(禮安)· 영천(榮川)· 강주(剛州) 등 40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단양 우씨만이 전해진다. |
22 原州元氏 원주원씨 당 대 |
원씨의 본관은 문헌에 의하면 40여 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원주(原州) 하나만 전한다.
그러나 문헌이 자세하게 되어 있지 않아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원 극유를 시조로 원성백파(原城伯派),원 경을 시조로 운곡파(耘谷派), 원 익겸을 시조로 시중공파(侍中公派) 등 3파가 전한다. |
23 江華韋氏 강화위씨 미 상 |
위씨는 본래 중국에서 시작된 성으로 시조 수여(壽餘)가 중국에서 고려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후 문헌이 전하지 않아 자세히 살필 수가 없어서 후손들이 조(組)를 1세조(一世祖)로 하고,수여가 살았던 강화(江華)를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
24 長興魏氏 장흥위씨 주 대 |
위씨는 중국 주나라 혜왕(惠王) 때 진헌공에 봉해진 필만(畢萬)의 후손으로 당나라 관서 홍농 사람인 경(鏡)이 신라 태종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착한 것이 우리나라 위씨의 시초가 되었다.
그는 신라에서 회주(懷州:장흥의 옛 지명)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장흥(長興)으로 하였다.
그러나 문헌이 전하지 않아 신라말의 창주(菖珠)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있다. 이와는 다르게 신라 왕이 도예지사(道藝之士)를 청했을 때 당나라 태종이 파견한 8학사(八學士:위· 방· 홍· 기· 목·은· 갈· 봉)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도 한다, |
25 江陵劉氏 강릉유씨 당 대 |
유씨는 중국 고대 도당(陶唐) 때 누(累)라는 사람이 유(劉)의 땅에 봉해져 성을 유씨로 하였다. 그런데 한 때는 유씨를 어룡(御龍)씨·시위(豕韋)씨·당두(唐杜)씨·사(士)씨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나, 초·한 시대에 와서 방(邦:한나라 고조)이 중국을 통일하고 한나라를 세우면서부터 다시 유씨라 하였다.
우리나라 유씨는한나라 고조 방의 41세손인 전(筌:호는 죽간, 시호는 문양)이 송나라로부터 l082년(문종 36) 8윌에 고려에 들어와 지금의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후 유씨는 거창(居昌)시조 유 견, 강릉(江陵) 시조 유 창, 배천(白川) 시조 유 국추 등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
26 居昌劉氏 거창유씨 당 대 |
유씨는 중국 고대 도당(陶唐) 때 누(累)라는 사람이 유(劉)의 땅에 봉해져 성을 유씨로 하였다,
초한시대에 (한고조)유 방이 중원을 통일하고 한제국을 세우면서 유씨는 한시대를 풍미 하였다, 도시조 = 유전(시호 문양)
한고조의 41대손이다, 송나라의 병부상서였으며 1082(고려 문종 36)고려로와 영일에 정착 하고 거창유씨는 유견의 큰아들 거창군에 봉해져 본관으로 했다 |
27 茂松庾氏 무송유씨 진 대 |
유씨는 본래 중국에서 나타난 성씨로, 한나라 말에서 진나라 초기에 살았던 유순유(庾荀悠)가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건너와 정착하여 살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의 후손인 검필(黔弼)이 황해도 평주(平州:평산의 옛 지명)에서 살았기 때문에 후손들이 검필(黔弼)을 시조로 하고 그가 살았던 평산(平山)을 본관으로 하였다.검필의 5세손 녹숭(祿崇)이 고려 문종 때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에 봉해지면서,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무송을 본관으로
하여 평산에서 갈라지게 되었다. |
28 沃川陸氏 옥천육씨 당 대 |
육씨는 중국 하남성 평원반군(平原般郡) 육향(陸鄕:육종)의 지명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육씨는 《옥천육씨대동보(沃川陸氏大同譜)》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시조 육보(陸普)는 중국 절강성 사람으로 서기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 고려 태조 10) 당나라 명종 때 우리나라로 들어와 관성(管城:옥천의 옛 지명) 군(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이에 후손들이 육보를 시조로하고 옥천을 본관으로 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를 밝혀 줄 문헌이 없어 고려 충렬왕 때 인물인 인단(仁端)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왔다. |
29 茂松尹氏 무송윤씨 미 상 |
윤씨는 문헌에 182본이 전하고 있으나 해평(海平)무송(茂松)칠원(漆原)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파평(坡平) 윤씨에서 갈라진 성씨이다.
파평 윤씨는 고려 태조 때 인물인 신달(莘達)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해평 윤씨는 고려 원종 때 인물인 군정(君正)이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지면서 그를 시조로 하고 있다. 한편 무송 윤씨는 보승랑장(保勝郞將) 양비(良庇)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런데 칠원 윤씨는 신라 무열왕 때의 시영(始榮)을 시조로 하고 있으나, 그 뒤는 문헌이 전하지 않아 고려시대 칠원호장(漆原戶長) 거부(鉅富)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있다 |
30 幸州殷氏 행주은씨 당 대 |
은씨는 중국 당나라에서 서기 850년(신라 문성왕 12) 우리나라에 들어온 은홍열(殷洪悅)이 시초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덕양(德陽:행주의 옛 지명)에 정착하였으므로, 후손들이 홍열을 시조로 하고 행주(幸州)를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태인(泰仁)· 명곡(椧谷:성주)· 행주 등 9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행주 은씨 하나만 전한다. |
31 槐山陰氏 괴산음씨 원 대 |
음씨는 본래 중국 시평(始平:지금의 협서성 관중도 홍평현)에서 시작된 성씨이다. 음씨의 본관은《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죽산(竹山) 괴산(槐山) 경주(慶州) 여주(驪州)충주(忠州)음성(陰城) 등을 비롯하여 24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죽산 음씨인 것으로 알려졌다.
《죽산음씨족보(竹山陰氏族譜)》에 의하면, 원나라 사람인 시조 음준(陰俊)이 고려에 들어와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지면서 음씨의 처음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후 후손들이 죽산에 살면서 그곳을 관향으로 삼았다. |
32 竹山陰氏 죽산음씨 원 대 |
음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죽산(竹山)· 괴산(槐山)· 경주(慶州)· 여주(驪州)·충주(忠州)· 음성(陰城) 등을 비롯하여 24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죽산 음씨인것으로 알려졌다.《죽산음씨족보(竹山陰氏族譜)》에 의하면, 원나라 사람인 시조 음준(陰俊)이 고려에 들어와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지면서 음씨의 처음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후 후손들이 죽산에 살면서 그곳을 관향으로 삼았다. |
33 固城李氏 고성이씨 송 대 |
한나라 문제 시대 시중 이 반의 24세손 이 황을 시조로 한다, 이 황은 고려 덕종때 문과급제하고 밀직부사가되고 거란침입때 공을세워 철령군에 봉해졌다, 후손 이 우의 손자 이 인이 문하평리를 지내고 고성군에 봉해져 본관으로하였다, |
34 星山李氏 성산이씨 원 대 |
선대는 京山(星山)지방의 토착세거한 사족이며 고려 태조로부터 삼한통일에 기여한 공으로 개국좌명벽상공신에 녹훈되고 성산현백에 봉하여 성산을 본관으로 했다 |
35 延安李氏 연안이씨 당 대 |
시조는 당나라 장군 李 茂이다, 소정방이 동맹군으로 백제 침공시 중랑장으로 왔다가신라에 귀화하여 연안백에 봉해지므로 연안을 본관으로 하였다 |
36 林川李氏 임천이씨 원 대 |
고려말 공양왕때 (通事=통역)회골사람으로 공을 세워 임천을 하사 받아 본관으로 삼았다, |
37 靑海李氏 청해이씨 원 대 = 여진계 |
본명은 퉁두란으로 그의 아버지 아부라카는 여진족의 금패천호이다, 시조 이 지란은 원나라말 고려 공민왕 때 부하를 데리고 귀화 하며고 이 성계의 휘하에 들어가 공을 세워 조선개국 1등공신으로 청해군에 봉해져 후손은
본관으로 한다, |
38 密陽異氏 밀양이씨 당 대 |
이씨는 중국 당나라 덕종 때 운남왕 이모심(異牟尋)의 후손으로 전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이씨의 본관은 밀양(密陽)을 비롯하여 동성(童城)· 청양(靑陽)· 남원(南原) 등 4본이 있는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자세하지는 않다. |
39 花山李氏 화산이씨 베트남 |
안남국왕 李 天祚의 아들로 고려때 망명하여 화산군에 봉해지면서 화산에 정착세거 하게된 龍祥이 화산이씨의 시조이다, |
40 太原李氏 태원이씨 송 대 |
태원이씨는 중국 송대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 한후 사재판서와 한성부윤을 역임한 貴芝를 시조로 한다 3세손 방무는이 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창업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에 올라 벼슬이 사정에 이르었다, |
41 平山李氏 평산이씨 당 대 |
평산이씨의 시조= 당나라 명신 설 인귀의 문하생 8명이 고려로 귀화한 1명중 부명의 후손으로 傳來되고 있다,
후대에 이르러 子龍을 1세조로 삼아 평산을 본관으로 한다, |
42 喬桐印氏 교동인씨 晉 代 |
인씨는 문헌에 의하면 중국 정나라 자장의 아들 段(단)이 조부의 함자의 끝자 印자를 성으로 삼았다,
우리나라의 인씨는 단의 후손 서(瑞)가 진나라에서 297년(신라 유례왕 14)에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정착하면서 그 시초를 이룬다.
그 후 33세손 빈이 고려 인종 때 교수(喬樹:교동의 옛 지명)부원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교동(喬洞)으로 하였다 |
43 平澤林氏 평택임씨 당 대 |
임씨의 시조로 알려진 임팔급(林八及)이 당나라 문종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팽성(彭城:평택의 옛 지명) 용주방(龍珠坊)에 살면서부터 평택 임씨가 시작되었고, 고려 때의 사람 임비(林庇)로부터 나주 임씨가 시작되었다.
평택임씨의 도시조 八及은 당나라 문종때 한림학사로 모함을 받자 귀화후 팽성에 정착하였다 |
44 長興任氏 장흥임씨 원 대 |
장흥 임씨는 중국 절강성 소흥부 자계현 사람인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 정종 때 우리나라에 건너와 정안현(定安縣:지금의 장흥군 관산읍 당동리)에 정착한 호(顥)를 시조로 한다
그의 아들 懿(의)가 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형부사,상주국 좌리공신으로 정안군에, 손자 元厚는 시중(수상)묘청의 난을 토벌하여 좌리공신에 책록되고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거쳐 수태위 상주국으로 정안군에 봉해져 본관을 정안(장흥)으로 하였다, |
45 豊川任氏 풍천임씨 원 대 |
풍천 임씨는 중국 절강성 소흥부 자계현 사람인 온(溫)을 시조로 하고, 그는 고려시대 은자광록대부에 올랐다 제국대장공주를 배종하고 들어와 풍천에 賜籍(사적)된것으로 전하는데 이로 인해 후손이 풍천을 풍천을 본관으로하고 세계를 이었다, |
46 延安印氏 연안인씨 몽골계 |
1575년 고려 충열왕의 비 이며 원나라의 황여인 따라와서 귀화한후 1309년(충선왕 1)평양군에 봉해지고 자의도 의첨의사사 가 되었으며 검교정승을 지낸 몽골사람 을 원 이름은 후라타이 이다
아들 인 승단이 충목왕때 좌정승으로 연안부원군에 봉해짐으로 후손이 연안을 본관으로 했다 |
자 열 |
1 遙陽慈氏 요양자씨 미 상 |
자씨는 중국 형주현 동주 사람인 자호상(慈好祥)을 시조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 자씨는 홍선(弘善)의 아들 경보(慶輔)· 순직(順直)·순희(順熙)· 경조(慶祖)가 1625년 우리나라로 들어와 길주(吉州) 남쪽 설봉산(雪峯山) 밑에 살면서 예전에 살던 요양(遼陽)을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
2 安東張氏 안동장씨 아랍계 |
장씨의 본관은 문헌에 40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30본 미만으로 추정된다. 그중에서 덕수장씨(德水張氏)와 절강장씨(浙江張氏)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장씨는 도시조(都始祖)인 장정필(張貞弼)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안동장씨세보(安東張氏世譜)》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등에 의하면 장정필은 중국 절강성 출신으로 고려 태조 때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전한다. |
2-1 德水張氏 덕수장씨 원 대 |
덕수장씨는 뿌리를 회회계(回回系)에 두고 있으며,《덕수장씨족보(德水張氏族譜)》와《고려사(高麗史)》등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태조때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지고 덕수현(德水縣)에 살게된 원나라 사람 장경(張卿:일명 장백창)을 시조로 한다, |
3 居昌章氏 거창장씨 송 대 |
중국 하간에서 계출된 희귀 성으로서 시조는 송나라 건주인 으로서 고려 충열왕때 봉익대부,판도판서 등을 역임한후예문관대제학에 오른 宗行이다, |
4 牙山藏氏 아산장씨 원 대 |
중국의 옛지명에 장씨의 연원을 두고 있으며 周公의 아들 伯齡(백령)이 영지를 하사받아 장씨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장씨 시조는 송나라 대장군 서(壻)로서 정란을 피하여 고려에 귀화해 예종의 특별배려로 아산부원군에 책봉되자 아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
5 衿川莊氏 금천장씨 초 나라 대 |
장씨는 중국 초나라 장왕(莊王)의 후예로 전하며, 장자(莊子)로 불리는 장수(莊周)는 훌륭한 사상가였다. 본관은 금천(衿川)· 장연(長連) 2본이 전하며, 금천장씨의 시조는 숙(澁)이다 |
6 聞慶澱氏 문경전씨 명 대 |
전씨는 중국 팽성 전욱(중국 고대 전설상의 임금)의 후예라고 전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는 진나라 효제 때 사람인 전단(錢端)과 민제 때 사람인 전봉(錢鳳)의 후손 전류가 오월국의 왕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후 원나라 순제때 전유겸(錢惟謙)이 노국공주
를 배행하고 고려에 들어와 문장과 덕행으로 명성이 풍부함으로 평장사를 제수하고 최영장군의 누이와 혼인을 하고 개성에 정착한 것이 우리나라 전씨의 시초를 된다 그의 자손이 문경에 세거하여 본관으로 했다 |
7 琅揶鄭씨 낭야정씨 명 대 |
시조 = 정선갑은 죽국 산동성 낭야 사람으로 명나라 말 진사이다 1644년(인조 22)명이 청에 망하자 나라를 구하고저의거 하다 발각되어 청나라 심양에 억류중 풍삼사, 황공등 8명을 만나 뜻을 같이하고 그 시절 병자호란의 인질로 심양에 억유중인 조선 왕자 (봉림대군, 효종)을 만나 상호협력하다 이듬해 같이 귀국하는 왕자를 배행하였다, 북벌계획이효종이 죽자 귀국을 포기하고 귀화하여 살았고 후손이 고향 낭야를 본관으로 했다, |
8 瑞山鄭氏 서산정씨 송 대 |
중국 절강인 응충(應沖)이 송나라 판장직감사를, 아들 의(儀)가 상서좌복야, 손자 수거(秀据)는 원외랑을 지냈으나 송의 멸망으로 응충의 증손 신보(臣保)가 고려로 망명하여 서산에 정착하므로 신보를 시조로 본관을 삼았다, |
9 羅州丁氏 나주정씨 당 대 |
우리나라 丁氏는, 본래 중국 당나라 사람인 정덕성(丁德盛)이 853년(신라 문성왕 15)에 우리나라 압해도(押海島)에 유배되어 살면서부터 그 시초가 되었다 (押解丁氏=압해정씨 로도 한다,) |
10 韓山程氏 한산정씨 미 상 |
정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으로,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는 문헌에 전하지 않아 정확하게 살필수 없다. 여러본이 있으나 모두 한산 정씨에 불과하고 중국 하남정씨로 한산군의 시조로 귀화 족이다, |
11 義城諸氏 의성제씨 당 대 |
제씨는 본래 제갈씨(諸葛氏)에서 나뉘어진 성씨이다. 시조 = 형은 漆原諸氏 (제갈 홍) 《칠원제씨세보(漆原諸氏世譜)》에 의하면, 원조(遠祖)인 제갈 영(諸葛孀)의 33세손 제갈 홍(諸葛泓)과 제갈 형(諸葛瀅) 형제 대에서 성을 각각 한 자씩 나누어 쓰기로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
12 南陽諸葛 남양제갈 당 대 |
제갈씨는 중국 낭야 갈백의 후손으로 전한다.
시조 = 동생은 남양제갈 (갈 형) 《남양제갈씨세보(南陽諸葛氏世譜)》에 의하면, 도시조 제갈규(諸葛珪)는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하는 유명한 제갈량(諸葛亮:제갈공명)의 아버지다. 제갈규의 20대손 제갈공순(諸葛公巡)이 신라 흥덕왕 때 우리나라에 건너왔는데, 이가 바로 우리나라 제갈씨의 시초가 된다 |
13 白川趙氏 백천조씨 송 대 |
백천조씨 세보에 의하면 중국 송나라 태조 3세손으로 고려 현종때 좌복야를 역임한 지인(之隣)이 시조이다
송나라 정란을 피해 귀화후 황해도 은천현 도대리(백천) 정착세거후 금자광록대부에 이르자 후손은 백천을 본관으로 하였다, |
14 林川趙氏 임천조씨 송 대 |
임천조씨는 송나라 태조의 차남 덕방의 3세손으로 고려 현종때 평장사를 역임한 天赫(가천백)을 시조로 한다 |
15 平陽趙氏 평양조씨 송 대 |
평양조씨 시조는 본래 중국 은나라 사람으로 箕子와 함께 東來한후 고려시대 상장군, 추밀부사에오른 춘(春)이라 한다
춘의 현손 인규가 고려 충열왕때 문하시중으로 평양부원군에 봉해져 후손이 평양을 본관으로 했다, |
16 臨津宗氏 임진종씨 주 대 |
종씨는 중국 주나라 종백(宗伯)의 후예로 전한다. 본관으로 임진(臨律)·통진(通津) 외에 모압(毛押)니파(泥彼)· 인의(仁義)· 황원(黃原) 등이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전하지만, 현존하는 본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
17 通津宗氏 통진종씨 주 대 |
종씨는 중국 주나라 종백(宗伯)의 후예로 전한다, 신라 문무왕때 아찬으로 대야성 도독 宗 貞,고려태조때후백제를 친 대장군 宗 熙 등 (본관으로 임진(臨律)·통진(通津) 외에 모압(毛押)니파(泥彼)·인의(仁義)·황원(黃原) 등이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전하지만, 현존하는 본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
18 河陰鐘氏 하음종씨 송 대 |
종씨는 중국 영천에서 시작한 성씨로서 송나라 환공(桓公)이 아들을 종(鍾)에 봉하여 이루어진 성으로 전한다. 언제 우리나라. 본관은 하음(河陰) 외에 풍덕(豊德)· 통진(通津)· 천안(天安)· 영암(靈岩)· 두원(荳原)· 정의(旌義) 등이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다 |
19 濟州左氏 제주좌씨 원 대 |
시조 = 左 亨蘇 좌씨는 중국 노나라때 태사 좌 구명이 득성시조이다, 우리나라 좌씨는 원나라 때 중국변경에 살았던 좌형소(左亨蘇)가 고려말 탐라 목마장의 관리로 건너와 정착한 것이 그 시초이다.
제주도가 발상지인 좌씨는 중국 산동성의 청주(靑州)를 본관으로 썼으나, 1922년 조선 호적령에 따라 한국의 지명 중에서 음이 같은 청주(淸州)를 본관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
20 新安朱氏 신안주씨 송 대 |
중국 송나라 신안현 사람인 주잠(朱潛)이 고려 고종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나주(羅州)에 정착하여 살면서 우리나라 주씨가 시작되었다, 성리학의 대성 子의 증손으로 송나라가 망하자 아들 여경과 금성(나주)에 정착하였다, 2세 여경이 고려 고종때 벼슬을 하고, 3세손 悅이 원종때 판도판서를 거쳐 충열왕때 첨의부사를 역임하였다 |
21 尙州周氏 상주주씨 당 대 |
시조 = 불사이군의 절신 瑜(유)를 삼고 있는 주씨는 고대 중국 헌원(軒轅)의 후예인 무왕이 기원전 1134년 주나라를 세워 다스렸고, 그의 37대손 난왕 때 진나라에 멸망하였다. 이에 후손들은 나라이름인 주(周)를 성으로 삼았는데이것이 주씨의 시초이다, 당나라 사신 주 이가정착세거한후 주씨의 시초이다, |
22 草溪周氏 초계주씨 당 대 |
시조 주 황은 중국 고대 주 나라의 37대 난 왕의 후예 이다, 그 는 당 나라의 한림학사로 907년 (신라 효공 왕 11년) 오 계의 난을 당해 신라에 들어와서 귀화, 교남의 초계부에 정착 하였다. 인 구 = 2000년 = 6665명 |
23 忠州池氏 충주지씨 송 대 |
충주지씨세보에의 하면 중국 홍농 사람 경(鏡)이다,960년 (광종 11) 홍농 태학사로 고려에 사신으로 입국하여종2품금자광록대부 를 거쳐 태보 평장사에 으름으로 후손이 그를 시조로 충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
24 廣東陳氏 광동진씨 명 대 |
진씨의 본관은《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131본까지 기록되어 있다. 현재 전하는 본관은 10본 미만이며, 그 중에서도 양산(梁山)· 광동(廣東)을 제외한 관향은 모두가 여양(驪陽)에서 나뉜 계통으로알려져 있다.
여양 진씨의 시조는 중국 송나라의 진수(陳琇)로 알려져 있으며, 광동 진씨의 시조는 정유재란 때의 명나라의 장수였던 진린(陳璘)이며, 양산 진씨의 시조는 명나라 때 승상으로 추증된 진보재(陳普才)이다. |
25 驪陽陳氏 여양진씨 송 대 |
시조=고려 인종때 대장군 준(俊)의 덕행은 만세의 귀감이 되고 當代(당대)에서는 陳無惡人(진무악인)의 칭송을 받았다
중국성씨로 송나라 복주 출신 수의 후손 종후가 고려 예종때대장궁을 역임후 여양부원군에 책봉되자 후손이 종후를 1세조로하고 선조의 여양을 본관으로 삼았다, 1억이 넘는 진씨는 중국 대북에 세계 종친회 가 설립되어 있다, |
26 豊基秦氏 풍기진씨 진주진씨 원 대 |
신라 무열왕 7년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후 귀화한 필명(弼明)이 우리나라 진씨의 시조가 되고 진씨는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譜)》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등의 문헌에 54본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풍기(豊基)와 진주(晋州)를 제외한 나머지 본관은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진주진씨의 시조는 고려 때의 진욱(秦郁)이다 |
27 槐山占氏 괴산점씨 |
점씨의 유래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 따르면, 점씨는 전국에 40가구 1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