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듣는 귀를 가진 선생님 (중등부 교사 간증 원고)
안녕하세요.
보조교사인 최일섭입니다. 제 간증은 박경욱 셈과는 대조적인 간증이 될 것 같은데, 박경욱 셈의 중학시절이 ‘놀만큼 놀아봤어’라면, 저는 그 때를
제 인생의 암흑기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 또래 대부분의 친구들과는 달리 대가족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시골에서 부산으로 상경할 때 삼촌들과 고모가 따라왔기 때문이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모가 시집을 가고 삼촌들이 장가를 가면서 조촐해져 갔지만, 제가 여러분 나이 때까지는 삼촌과 살았습니다. 특히 우리 중등부 친구인
준섭이의 아빠와 오랜 시간 같이 방을 쓰고 지냈습니다.
대가족이긴
했지만 부모님은 장사를 하셨고, 고모와 삼촌들은 일과 학업을 병행했기 때문에 저와 특별히 무언가를 했던 기억은 많이 없습니다. 대신 하나 있던
여동생과 서로 의지하며 유년기를 보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박경욱 셈이 저와 친구 사이로 있었는데, 사실 친구라고 말하기 민망한
사이였습니다. 박경욱 선생님은 어릴 때부터 굉장히 개구쟁이였는데다가 위로 누나가 셋이나 있는 귀한 집 아들이라 막나갔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싸움에는 단연 질 자신이 많았던 어벙이였습니다. 저를 때리는 것이 삶의 낙인 마냥 박경욱 셈은 허구언날 저를 때렸고, 저는 복수를 위해 태권도도
배워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원래 싸움은 기술보다는 깡다구의 문제니까요. 어쨌든 그렇게 되다보니 저는 대연6동의 동네북이 되고
말았습니다.
보통
지역의 동네북 출신들이 중학교에 들어가면 빵셔틀이 되는데, 저는 그런 테크를 타진 않았습니다. 공놀이 덕분이었죠. 어렸을 적 기억을 하면 두
가지가 생각나는데, 하나는 박경욱 셈한테 맞고 장난감을 빼앗긴 기억이고, 또 하나는 축구부를 했던 기억입니다. 지금은 목사님이 되신 신성철
선생님이 당시 유년부 축구팀을 운영하셨는데, 그 때가 정말 즐겁고 좋았습니다. 어디를 가나 사고를 치던 박경욱 셈 때문에 축구부를 하면서도 자주
단체기합을 받곤 했는데, 그래도 함께 고난을 겪었던 많은 친구들 덕분에 고통을 견디고 즐겁게 지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 때 열심히 공을
찬 덕에 중학시절 때도 쉽게 친구들과 공놀이를 하며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학시절의 공놀이가 암울했던 것은 유년 시절에 비해
재밌지도 즐겁지도 않았기 때문이죠.
우리
중등부 친구들 중에도 연포초등학교 출신들이 있겠지만, 저도 연포초를 나왔습니다. 연포초는 도시에서 보기 드문 작은 학교로 6학년 정도가 되면
거의 전교생을 다 알게 됩니다. 반이 몇 개 없기 때문에 6학년 정도가 되면 서로서로 같은 반이 한번쯤은 되기 때문이죠. 그렇게 옹기종기
지내다가 중학교를 가니, 신세계였습니다.
저는
성동중학교라는 남중에 진학했고, 암흑기를 보내게 됩니다. 지난 간증 때 박경욱 셈은 중학생이 얼마나 잘 놀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면, 저는 유약한
한 소년이 중학시절을 얼마나 암담하게 보낼 수 있는지를 보여 줄 수 있을 듯합니다.
작은
학교를 다니다, 중학교라는 큰 학교로, 게다가 남중으로 가다보니 세계의 룰이 판이하게 달라졌습니다. 남학교의 특성상 세계의 서열은 힘에 의해
좌우되는데, 중1의 시기는 각 초등학교의 짱들이 각축전을 벌이게 됩니다. 그래서 맨날 싸움이 벌어지고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선생님의 체벌이
등장합니다. 제게 중학교의 시작은 정글로의 입장이었습니다.
특히
제가 배정된 반이 그 정도가 심했고 짓궂은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학생 번호는 키순으로 정해졌는데, 저는 9번이었습니다. 그리고 짓궂은
아이들의 놀이감이 된 것은 1번과 2번이었죠. 그들이 놀이감이 된 이유는 그저 가장 키가 작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조금만 더 작았다면 제가 그
놀이감이 되었겠죠. 어쨌든 싸움을 잘하고 거칠었던 몇 몇 친구들은 자신들의 재미를 위해 1번과 2번을 싸움 붙입니다. 싸우지 않으면 그 친구들을
무자비하게 때렸죠. 그래서 서로 아무런 감정이 없는 상태임에도, 맞기 싫어서 둘은 싸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짓궂은 친구들은 승리자에 배팅을
걸고 응원을 하고 구경을 하죠. 자기가 돈을 건 친구가 싸움에서 밀리면 그 껄렁한 친구 놈들은 게임에 개입해 더 잘 싸우라며 열심히 발길질을
해줍니다. 저는 우리 학급에서 일어나는 그런 괴롭힘을 봐야하는 것이 너무 괴로웠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모든
싸움에서 질 자신이 많았고, 겨우 박경욱 셈 정도에게도 얻어맞고 살았던 저는 무력할 따름이었죠.
한
번은 초등학교 동창인 친구의 물통에 한 녀석이 자신의 오줌을 넣는 것을 봤습니다. 저만 본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친구들이 봤죠. 물통의 임자가
왔고 그 물을 먹으려 했습니다. 저는 이를 알려줄까, 말까를 심히 고민하다가 알려주려고 제스처를 취했습니다. 그 때 그것을 주동했던 녀석이 제
멱살을 잡았죠. 겁이 났던 저는 침묵했고, 친구는 그 오줌을 마셨습니다. 이를 벌인 녀석들은 너무나 즐거워했고 저는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저도
이러한 괴롭힘의 직접적 대상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던 이유는 앞서 말했던 공놀이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반에서 축구를 하던
친구들은 대부분 그런 나쁜 녀석들이었고 저는 그들의 만행을 싫어하면서도 어울렸습니다. 전혀 다른 학교생활을 했지만 공놀이를 할 때만큼은 함께
했죠. 그렇게 일정 시간이 지나고 조금은 친해졌다고 여겨져, 한 번은 친구들을 괴롭히는 짓을 그만 하는게 어떻겠냐고 설득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녀석들은 정색을 하며 제게 온갖 욕설을 퍼붓고는 경고를 하더군요. 너도 언제 그렇게 될지 모르니깐 조심하라고. 이후 저는 더
무기력해졌습니다.
학교의
선생님들은 큰 사고가 터지지 않는 이상 학생들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고, 폭력이 일상화된 교실에서 학생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괴롭힘을 당하던 친구들은 열심히 빵셔틀 일에 충실했고, 다른 타켓이 생겨나기를 기원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어 교체된 경우도 있곤
했죠. 그리고 많은 경우는 저와 같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비겁한 안전을 유지했습니다. 1년 전, 그러니까 초등학교 6학년 때만 해도 여자애들과는
살구를 하며 아웅다웅하고, 남자애들과는 축구를 하고 같이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고 하며 사이좋게 지내다가, 이런 세상에 오게 되니
멘붕이었습니다.
박경욱
셈이 지난번 간증 때 제 성적을 공개했었는데, 명백히 과장입니다. 어렸을 적에 저를 하도 괴롭혀서 미안함이 있겠지만, 구라는 안 됩니다. 어쨌든
당시 저는 그렇게 성적이 우수하진 않았습니다. 아주 나쁜 건 아니었지만 전교에서 놀고 그렇진 않았죠. 중학시절 제가 얻은 최고의 성적은 중1 첫
시험이었습니다. 하지만 학교 생활 자체에 잘 적응을 하지 못하다 보니 성적은 계속 떨어졌습니다. 당시 부모님은 장사하랴, 삼촌들 보랴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삶을 디테일하게 케어하지 못하셨죠. 저도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기에 대단히 서툴던 사춘기 소년이었고요. 그러다 보니 학교
생활 자체는 공유하지 못하고, 떨어진 성적에 맞추어 학원과 학습지만 늘어갔습니다. 저는 늘어가는 학원과 학습지를 감당하지 못했고, 부모님의
실망은 커져갔습니다. 학교 생활은 적응이 안 되고 공부도 안 되는 상황에, 떨어지는 성적에 대해 부모님께 혼이 나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암울했습니다. 유일한 낙이 컴퓨터 게임이었죠. 게임을 하다 부모님께 발각되면 한바탕 화가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는 이유가
다 너를 위한 건데 너는 왜 이렇게 하냐”고 하셨고, 저는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짜증이 났습니다. 지금은 왜 그랬을까 싶지만, 그 때는
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힘들게 일하시는 부모님을 향했던 짜증들은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왔고, 죄책감이 되어
쌓여갔습니다.
저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항상 교회 문화권에 있었고, 성경과 기도가 일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학교에서 겪은 어려움들을
해소하지는 못했습니다. 믿음의 문제였을 수도 있고, 용기의 문제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만 돌이켜보면 그때 제 곁에서 저의 고충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물론 당시 저에게도 교회 셈들이 있었고, 친구들이 있었고, 부모님과 삼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잘 이야기 해보지 못했죠. 그런 문제들을 나의 문제로만 생각했고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이
커질까봐 두려웠던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요.
박경욱
셈도 여기 있지만, 사실 당시를 함께 지내온 친구들과 그 때를 회상하면 제가 그런 고충이 있었다는 것을 거의 모릅니다. 친구들이 보기에 제가
학교폭력의 직접적인 대상이지도 않았고, 교회에서도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남달리 많이 받으며 지냈습니다. 저를 어릴 적부터 알던 누나들이
중학생이 된 제게 뭔가 소극적이고 어두워졌다는 말을 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편지도 써주고 했죠. 그래도 저는 마음 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중학시절의 암울을 부모님께 처음 이야기 한 것이 고3때였는데, 부모님도 이에 대해 전혀 모르고 계셨고요. 깜짝 놀라셨습니다.
중학생이라는
시기는 사춘기가 본격화되고 여러모로 애매해지는 시절입니다. 이제 더는 애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른도 아니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어른의 문제에
가까운 고민들을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우리 선생님들은 이미 그 시간들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 때에 대한 노스텔지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미련과 후회가 있죠. 그래서 말이 많아집니다. 인생은 일직선이고 지나가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그런 심정을 이해한다면
그건 중학생답지 않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타인의 이야기에 휘둘리며 살다가 이제는 자신의 자아에 대해, 욕망에 대해 진지하게 대면하는 시기가
사춘기이기 때문이죠. 저는 그저 우리 친구들의, 그 고민들에 예수님의 사랑이 함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교사로
섬기게 되면서 제 중학시절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해봤습니다. 중학생 때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고충을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신뢰를 주는 사람인가하고. 그리고 또 만약 그렇게 이야기 해준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지요. 솔직히 말해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딱히 없을지 모릅니다. 학교폭력의 문제가, 사춘기라는 시절의 문제가 간단히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래도
가만히 들어주고, 기억해주고, 기도해줄 수는 있지 않을까 합니다. 가끔 같이 게임을 해주고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것들이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가끔은 옳은 말이 마냥 잔소리로만 들리는 시기가 있는 법이고, 그럴 때는 많은 좋은 말들이 오히려 상처를 주기도 하지요.
저도
중학 시절, 어른들의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들의 후회를 들었으며, 그들이 설계하는 제 삶에 대한 욕망들을 들었습니다.
그러한 말들 속에서 저는 딱히 할 말이 없었죠. 그들은 제게 미래가 있다고 하셨고, 저는 당장 겪어가던 현재의 나날 속에서 문제들과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좋은 분들이 제 곁에 많았음에도 저는 제 고충을 감히 털어 놓지 못했습니다. 제가 그런 중학 시절을 보내다 보니,
중등부 교사가 되면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교사가 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이야기는 다른 많은 선생님들이 해주시니깐, 가끔은 듣는
귀도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떻게 예수님의 사랑을 공유할 수 있을지가 저의 화두입니다.
제가
중3C반을 맡고 있는데, 이제 우리 애들이 선생님의 컨셉을 알게 됐으니 늦게 마친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제목도 잘 이야기해주고 말이지요. 그럼 이만 간증을 마치겠습니다.
첫댓글 좋은선생님이라 아니...되어가는중이라 믿어의심치 않아요. 힘들어도 끝까지그자리에 있잖아요
네. 포부는 거창하지만, 실은 자리를 지키는 것도 어려워 하고 있는 그렇고 그런 선생님입니다. 저의 자리 채움이 중등부 친구들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