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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열 제4시집
세월의 끝
http://cafe.daum.net/_c21_/home?grpid=1Bdo2
자서
나의 시적 관심은 사물의 세계다.
존재론적 의미에서 사물의 세계는 무한한 개방성과 공개 된 비밀이라는 신비함과 내면적
잠재성 때문에 많은 관심을 가져 왔다. 시적 추구 대상의 무한성과 그 가능성은
내가 언제 부터인지도 모르게 깊이 매료 되어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승화, 절제, 여과의 과정도 없이 거칠게 토로된 개인적인 언어(시작품)에 식상한 탓도
있겠지만 변화무쌍한 시대상황이나 폭포처럼 쏟아지는 정보에 노출 된 우리 시대에
정제 되지 않는 사사로운 개인적 감정에 누가 관심 써 주겠는가 싶다.
제4시집을 전자책으로 엮었다.
제1장은 그동안 발표 되었던 시를 섞어 삶에 대한 나의 의식을 다룬 것들이고,
제2장은 물물(物物) 시편들로 모았다. “물물”이란, 물물전진(物物全眞)이라는 선가의
말에서 차용하였다. 모든 사물은 그 자체가 진리라는 뜻이다. 시적 사물에 접근하는
나의 생각을 잘 대변해 준다는 점에서 좋은 것이다.
제3장은 이미지(心像) 성향이 강한 시편과 시조 4편을 함께 묶었다
책 뒤에 “나의 시 나의 시 쓰기”를 첨부하여 후기에 대신하였다.
사물에 관한 나의 시적 시선이 보다 첨예하게 심화되길 스스로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13. 9. 12
산우산방에서 김성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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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세월의 끝
시비 앞에서
아직도 못다 세운 나의 시비 앞에서
그대여, 한 장 사진도 남기지 마라요
차갑게, 홀로 서 있는 저 빗돌로
안에서 끓어오른 외론 영혼을
다시, 또 울리지 않도록
쓸쓸히 가야 할 스스로 택한 외길임에…
더 큰 고독을, 무겁게 끌어안고
하늘 끝까지 호올로 가게 해주세요
배꽃 향기
꽃은 !
무슨 꽃 ?
아무도 상관 마라요
그대 홀로 가는 거기
깊은 세월 끝내 못 채우고
터지는 빛살로 눈을 찔러
저리고,
아파요…
돌
돌이
산에 들에
무엇으로 제 모습을 갖추든
성 안에 스스로 감옥을 지어
허공의 자유를 끌어안고
한겨울 어름 같은 빛으로
부서질수록 더 집중되는
유년의 꿈도
정 맞아 깎여지는 아픔도
안으로 굳혀진 돌
떨어져 굴러 온 슬픔은
억겁의 비바람 쓸어안고
천 근 무게,
별빛 넋으로 채웠다
바위가 되려는 욕망도
더 작은 보석으로 갈아
제 홀로 넉넉한 큰 돌이 되어
속에서 펄펄 끓는
주먹만 한, 저
돌-.
정오의 그림자
중앙공원 나무 아래로
세 사람이 걸어가네.
큰 나무 그림자는 어둡고
다른 나무의 그림자는 묻히는데
한 사람의 발걸음은 환하게 드러나고
두 사람의 어깨는 그늘져 어둡네
모두의 간격은 제 각각인데
앞 사람은 뒷 사람을 당기고
뒤엣 사람은 앞 사람을 밀고 가네
세 사람의 그림자를 신창에 우선 깔아두고
다시는 되돌아서지 않을 듯이
팽팽한 긴장감이 동작을 이끄네
어느 틈에 햇빛이 정수리를 짓눌러
압축된 그림자가 정오를 세 점 찍네.
낮달
달이다
석양이다
3할은 갉아 먹힌 달
오른 쪽으로 기울어진
구르지 못한 달
장마 끝 훤한 하늘 거침없는 석양
높아서 관심 못 끄는 자존의 달
저 혼자 가만히 떠서
나를 보느냐 너를 보느냐
달이다
새삼스런 낮달이다
아파트
흑갈색 아파트 지붕들이
앞뒤로 겹겹
사각형 창문들이
수직으로 층층
굳어버린 시멘트 용마루가
수평으로 마디를 짓고
둥글게 덮씌운 하늘 구름
떼거지로 흘러 흐른다
백조 한 쌍 허리께를
혁띠 둘러 날고
멜빵 없이도 바지가 서는
키 높은 아파트
빗줄기
유리창 가까이 서른 개의 빗줄기 토막 난 짧은 줄기
뜰 앞의 소나무에 백 개의 빗줄기 대창 같은 푸른 줄기
공원 수풀에 천 개의 빗줄기 연실같이 가는 줄기
앞 산 중턱에 삼대 같은 빗줄기 무성영화 속 여린 줄기
들판에 내리는 가늘고 잔잔한 빗줄기
먼 세월 애잔한 그리운 은혜
강물에 떨어지는 빗방울 부초 같은 민초
깨어지고 흩어지는 부질없는 빗물
창유리에 부딪치는 빗물 피 흘리는 낙화암
환생의 꿈을 키워 땅 밑 뿌리에 닿으란다.
약천사 대불
앞산 심학산
약천사
대불
처마 끝
풍경 소리
머언 일렁임
고요론
여름 한낮
세월 묵히고
눈 감고
밤에 서는
맑은 눈동자
호리병
호리병 꼭지는 입술을 향하고
꺾인 손잡이는 주모 배꼽을 차고
허리에 휘감긴 욕망은 취객을 노리고
안에서 끓는 술 빛이 초저녁을 달군다.
달빛이 술맛을 죽이고 남아
저 혼자 마지못해 취하고 있다.
핸드폰
진동으로 전환 된 살색 핸드폰이 책상 위에 누워서
부르르 한 번 떨다가 다시 또 떤다.
나 죽었다 말마라 이순신처럼 의연하던 삭신이
뒤틀린 몸뚱이로 눈을 희번덕 세 번째 떨어댄다
말문을 열까 말까 응시하는 눈빛을 제가 먼저 맞추고
할 말 있는 듯 껌벅 껌벅 온 몸을 비틀어 시늉한다
입을 열면 환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줄 당신도
귀를 맞대고 속삭일 주인도 지금 보고만 있다
십자가
멀리 보이는 교회의 첨탑 십자가 머리꼭지에
숲을 배경으로 한 개 물방울이 이울다 부풀고
흑갈색 원추형 몸통으로 두 발 모아 딛고 선
하얀 십자가 형상이 시답잖게 높아진다
교회의 겉 빛깔은 설원의 언덕처럼 희고
안에서 끓어오른 신앙심은 나의 무지(無知)
밤을 기다려 십자가를 다시 보자
백주 대낮에 배꼽의 때가 부끄럽다
비행기
소리보다 먼저 눈에 밟히고
구름보다 늦게 점을 찍는 비행기
소리보다 앞서 멀어지다가
구름보다 빨리 사라지는
두 귀는 허공으로 세우고
별빛 눈동자는 구름 속을 뚫는다
상패
상자 안의 상패는 관 속의 시신처럼 침묵 한다
제 색깔과 이념을 운명인 양 뒤집어쓰고 요지부동 놓아 둔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단추 하나로 열리고 닫힐 단순함으로 내부를 꽉 다물고 지켜내면서
언젠가 땅속 깊이 묻힐 날을 고대하는 제왕의 보물처럼 어두운 품위를 지킨다
뚜껑이 열려 제 모습이 들어나면 찬란하던 순간이 직관적으로 보여 지고
어지러운 삶의 과정이 집약된 순간으로 감전 시키듯 화려했던 당시의
상황을 알린다. 처음과 끝은 빨간 인주로 찍어 놓고 피의 결정체임을 누누이
강조하듯 인간의 삶을 피의 역사로 규정짓는 결연한 표정이다.
이마와 발끝의 낙인은 늘 붉게 젖어 있고, 때로는 피땀 흘리듯 뚝뚝 방울로
떨어뜨리고, 때로는 참았던 울음을 복받치듯 피눈물 죽죽 흘리기도 한다.
발 저립 던 그 때의 소속도, 고매한 성함도 맨 윗자리
에 새겨 두고 생의 마지막까지
함께 가겠다는 결심으로 상이라는 이름 속에 영원한 순간을 지켜간다
술잔
술잔은 술로만 채워지길 원치 않고
독한 술로만 채워지지도 않는다.
물로 채워진 술잔은 물잔이 되고
탕약으로 채워진 술잔도 잔이다
술로 채워지는 물잔은 술잔이 되고
물로 채워지는 술잔도 잔이다
술잔이 술로 채워지길 원할 때
물로 채워지길 거부하지도 않는다.
맑은 물로 채워진 술잔이 잔으로 넘칠 때
스스로 일러 진정한 술잔이 된다
세월의 끝
만조 때 높이 쌓인 짠물이 허물어지듯 간조 될 때
어머니의 임종을 울던 눈물에 얼비친 만유만상(萬有萬象)
촛농도 다 녹아 가물가물 삭정이로 폭삭 삭아 내릴 때
큰애를 낳을 때, 빛나게 솟아오르던 태양의 눈부심
객지의 관사 방에서 세모의 찬바람 무더기로 끌어안고
떼굴떼굴 구르면서 추락하지 못한 아픔으로…
한평생의 깊이로 하늘을 재던, 더는 끌어낼 눈금도 없이
아버지 운명하시어 죽음 옷 갈아입힐 때
가랑이 사이로 늘어진 시신의 음낭(陰囊)을 쓸어 올리는
순간, 진저리치게 물컹 집히던
…세월의 끝
벽
시계추가 좌우로 왔다갔다 시계바늘은 상하좌우로 뱅글뱅글
시계가 걸린 벽은 수직으로 섰다가 수평으로 눕다가
벽이 일어설 때마다 시계는 제자리를 찾아 움직이고
벽으로 연결된 천정은 방바닥과 얼굴을 맞보고
세월도 생각도 깊어지면 서로서로 멀어 젓다가 가까워지고
방바닥은 하늘과 배를 비벼대고 천정은 땅에 맞붙어 버린다
하늘도 땅도 하나의 형체가 되면 사람의 뱃속 같은 시계 속에서
좌우상하로 움직여 돌고 있을 뿐이다
투명한 눈발
투명하게 내리는 쌀가루가
헐떡거린 들녘에
병목 현상을 이루고
백가지 색깔을 다 물리치고도
더 많은 것을 품을 수 있는 하얀,
바다에 떨어지는 거…
오라고,
오라고,
오라고…
기진해서,
거꾸러지면서,
처박히는 눈발
눈
눈을 밟고 가자
흙 묻은 발로 꾹꾹 눌러 밟고 가자
선혈이 낭자한 눈을 으깨어 짓밟고
산 넘어 동굴까지 밟고 가자
어제의 눈이 오늘의
하얀 눈이 아니듯이
누가 나의 눈을 밟아다오
즈믄 날들을 빛 바랜 백색 공허는
한천(寒天)의 별빛 냉기로 이마가 시려
투명한 가슴 열어 뵈는 얼음 하늘
하얀 나의 눈을 밟아다오
오늘의 내가
까만 내일의 나를 모르듯이
눈을 밟아보자
텅 빈 들녘, 하얀 눈을 다시 보면서
뽀드득 뽀드득
지옥문 번쩍 열릴 큰 소리로
지금까지, 밤에도 하이얀
눈을 밟아보자.
세월은 바람을 타고
잠자리는 바람을 타고
허공을 휘졌고
세월은 바람을 타고
독두노인 대머리에 미끄러지고
참나무는 땅 속을 찌르고
나뭇잎은 하늘을 핧고
아내는 머리 염색하고
턱에 수염이 없고
나는 코 밑 수염을 깎고
하얀 털이 깊으다.
강물에 뜬 배
땅에 뿌리 내린 나무
위에 아파트 지붕
위에 비둘기
위에 구름
위에 무한 창공
위에 머리
속에 여름 한나절
강물에 뜬 배
위에 이층 난간
위에 한 여자의 어깨
위에 갈매기 날개
위에 검은 반점
위에 허공
위에 구름
위에 머리
속에 여름 한나절
나무와 그림자
높은 아파트와 낮은 아파트 사이에
나무들이 왼쪽으로 구부러지고 있다
상수리나무와 나도밤나무는 중심 잡기에 안달이다
소나무는 한낮에 쏟아낸 제 그림자를
즈믄 가시 잎잎에 흑진주로 치렁치렁 꿰달고
높은 아파트와 낮은 아파트의 옆꾸리에서
여러 나무의 그림자가 까마귀 떼로 부딛쳐
분수처럼 쏟아졌다가 송알송알 튕겨나간다
나무들이 오른쪽으로 꺾이다가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다시 왼쪽으로 허리 굽혀 떼거지로 쏠린다
높은 아파트와 낮은 아파트가 좌우로 흔들거리고
검은 도포자락이 휘파람 소릴 내지르며
훌쩍 훌쩍 담을 넘어가고 있다
승강기
알림 층 점선의 빨간 숫자가 순서대로 바뀌어 솟치고
알림 표시 화살표가 아래로 찍어 내리는 추락의 함정에서
↑1...2...3...4...5...6...7...8...9...10 땡-
(하나둘셋넷다섯여섯일곱여덟아홉열 땡-)
↓10...9...8...7...6...5...4......3...2...1 땡-
(열아홉여덟일곱여섯다섯넷셋둘하나 땡-)
오를 때 ↑ 표시가 없다면
내릴 때 ↓ 표시가 없다면
오르고 내리고 땡-땡- 알림 표시가 없다면
멈추든 움직이든 아무 말도 안한다면
혼자 갇히어 빛을 잃었다면
여럿이 갇히어 ↑↓ 화살표를 놓친다면
숨도 멈추고 서서 죽는다고
승강기도 사람도 제 각각 중얼거리겠네
이 고장 저 고장 오도 가도 못하고
이대로 숨 막혀 죽고 말겠네
여름 햇살
온유월 여름 햇살은 현란하게 내려 쌓이고
노출된 빨래는 열기를 모아 화살로 튕긴다.
살갗에 붙는 햇볕은 날카로운 빛살로 파고들어
물집을 내고 흑인 피부로 그을림을 남긴다
햇볕은 제 몸을 태워 지상의 모든 것을 사르고
꽂힌 햇살은 불꽃을 달고 빛살로 솟친다
햇볕의 눈부신 빛살은 뜨겁게 날카롭고
아파트 옆구릴 뚫고 참나무 숲을 달군다
밤에 우는 매미
매미가 밤에 또 우네
하늘 캄캄 귀 먹었네
공원의 가로등 불빛 내려 쏟고
지나는 사람 슬리퍼 질질 끌리네
매미 소리 어둠을 쿡쿡 문구멍 내고
뚫린 구멍으로 이어달리기 경주를 펼치네
매미가 울기를 뚝 끝쳐
가로등 불빛 눈을 내려 까네.
빨간 꽃
빨간 꽃은 빨간 꽃으로 피고
하얀 꽃은 하얀 꽃으로 피고
빨간 꽃은 깜깜한 밤에 꽃으로 있고
하얀 꽃은 그냥 꽃으로 남는다
빨간 꽃이 뚝뚝 지고나면
하얀 꽃이 뚝뚝 지고나면
빨간 꽃은 빨간 색이 되고
하얀 꽃은 하얀 색으로 남는다
기다리는 자존
채워진 술병은 자족의 입석상(立石像)
비워진 유리잔은 언제나 기다리는 자존
이제라도 마음 비울 수 있다면
갈구하는 죽음으로 빈 넋에 담을 수 있을까
눈 덮인 들녘에서 평온을 느낄 수 있음은
채울 수 있는 내일이 일렁이기 때문이리
꼿꼿한 빈병처럼 가볍게 설 수 있다면
언제나 빈 잔처럼 죽음을 채울 수 있다면
순간의 무계
평지를 달리는 자동차 휙휙 순간적 스침
고개 넘는 화물차 헉헉 숨 가쁜 거친 호흡
굽이도는 오토바이 도는 쪽으로 넘어질 듯
기어코 살아나서 제 자세로 대닫네
휙휙 순간적인 소리 백지장 무계
헉헉 숨 가쁜 소리 무거운 돌덩이
너와 나의 한생 백지의 중량
오천년 역사는 큰 산의 뿌리
목욕탕
익명의 한 남자를 탈의실에서 보고, 익명의 여러 남자를 탕 안에서 본다
온탕38℃ 황금열탕44℃ 정력급냉탕16℃ 이벤트탕40℃ 파도냉탕24℃, 안마탕42℃
익명의 여러 남자들은 양말 하나까지도 옷장에 잠궈 두고 온전한 제 살빛을 유감없이 내보이고 인간의 수컷 됨을 후회 없이 자랑하고 있다 한 남자가 깔판에 앉아 가슴께를 문질러 대고 곁에 남자가 샤워기를 틀어놓고 배꼽과 허벅지를 쓸어 올린다. 각자는 제 할 일이 바뿐 듯 남의 몸뚱이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키 큰 남자는 6척 장신이고 한 남자는 150근은 넘겠다 곁의 남자는 여탕 출입을 갓 면한 듯 보송보송 앳된 모습이다 저쪽의 한 인간은 자기의 온 몸을 과시하며 보란 듯이 팔을 젓고 걸어오고 이쪽의 한 인간은 비뇨기과 수술 흔적이 우둘 투둘 돋보이고 온 몸에 혐오스런
문신으로 철갑한 덩치 큰 남자는 샅으로 파고드는 새끼손까락 만한 성기가 걱정스럽다
익명의 여러 남자들은 모든 신체 부위가 대소의 차이를 불문하고 모두 닮은꼴이지만 색깔과 표정으로 각자의 차별성을 드러낸다. 머리의 모발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있어야 할 털이 없다든지 검어야 할 색깔이 희다든지 하는 각 부위의 여건과 환경의 다름에 따라 서로의 연세와 인상을 묵시적으로 교환 한다 익명의 여러 남자들은 지금 오장육부만 감추고 모두 들어내 놓고 에덴동산인 양 만 가지 수치심도 잊고 자유롭게 꿈틀거리고 있다
제2장 물물(物物)
텔레비전
꺼져 있는 티브이는 깜깜한 먹빛 밤이다
앉아 있는 티브이는 숯이 된 소신공양의 선승(禪僧)
서 있는 티브이는 작전 참모실의 무전병
다리 짧은 티브이는 버려진 절단의 토막을 아파하고
다리 없는 티브이는 천형의 앉은뱅이로 후회도 없다
꺼져 있는 티브이 제 상표를 낙인처럼 못 지우고
감은 눈이 빠알간 리모콘을 응시한다
식탁
부황 든 안색으로 서서 기다리는 식탁
딸린 의자는 황달병 아랫도리 다리가 휘청
황토 흙 치대 바른 돌집은 멀고
배 골려 울던 눈물이 흙탕물로 짜다
앉아볼까 턱 받쳐볼까 배부른 지금
흑갈색 커피향이 울컥 쓰리다
베란다의 안시리움
베란다의 안시리움
오늘 꽃 피워 반기네
빨간 꽃잎 피를 참아
화분 속 뿌리로 흘려
이슬도 못 내린 별유천지(別有天地)에
유리벽만 치받아
철철 흘린 피를 모아
붉은 그리움으로 흘리네.
안경은 눈을 뜨고
안경은 눈을 뜨고
밤은 흑막을 치고
안경알은 흑막을 두 줄로 뚫고
치렁치렁 어둠은 안경을 덮씌우네
두 눈은 감겼다
깊어진 밤이다.
벽시계 소리
벽시계 소리는 시간 속을 가고
빨간 초침은 시계 낯짝에서 돌고
시계 소리는 허공을 떠돌아
초침 분침은 내장을 휘졌다
소리는 귀를 울리고
침은 속 깊이 찌른다.
직인
상패 안의 사진은
빨간 직인을 보고
직인은 날자를 누르고
눌린 날자는 멀리 있다.
멈춰 선 선풍기
선풍기는 멈춰서 키가 크고
창문에 비바람은 우두둑 소리 낸다
이어진 코드 줄은 벽을 뚫고
수직으로 높아 진 벽이 옆집을 가린다
자동차 소리는 빗줄기에 실려
돌지 않는 선풍기 날개에 와서 부딛다.
지구본
지구본을 바라보면 생각이 멀리 멀다
장난스레 돌려보면 땅덩이가 빙글 뱅글
아시아가 돌아가면 황색 인종 우리 같은 사람들
아메리카가 지나가면 미국사람 키 큰 코쟁이
태평양 망망한 깊이로 천만 년을 세우고
대서양 안개 속에 로마가 그립다
지구본 위에서 시계추가 왔다 갔다
시계침은 저 혼자 둥글게 돌고 돌아
흥부네 박 타는 날 함박웃음 실려 온다면
지구본을 굴리고 돌려서 함께 실려 갔으면
사전 (辭典)
손에서 멀리 놓인 사전 그림자가 없다
빛은 멀리서 오는 것도 아니다
가까이 놓인 사전 제 그림자를 안으로 끌어안고
손에 대이는 빛으로 제 발자취를 찍어 남긴다
사전의 책장을 넘겨 벌레 같은 글자를 읽으면
스멀스멀 그림자가 생겨 미아리로 길어진다
사전의 긴 그림자는 흑색 표지에 가려지고
손끝의 섬광을 받아 비로소 명암이 갈린다
인삼주
인삼으로 담근 소주가 노랗게 익어가네
몸통도 실뿌리도 제 피를 뽑아 우려내고
창백한 기운이 강태공 밋낙시로 섯네
휘생인가 침탈인가 세월로 삭히는 화두
십 년 세월 황색 빛깔로 오장육부를 돌겠네
선비상
향나무 선비상 유리깔판에 눌린 두개의 옹이 흔적
가느다란 실눈을 내려 깔거나 치켜뜨거나 흘겨보거나
빗겨 서서 보면 질책하는 낯빛으로 흘긴 눈빛으로
도도한 다릿발을 세워 황토빛깔 살색으로 섯다가
휘어진 다리를 꼬아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가
비바람 모진 세월 견뎌 낸 생목시절 그리다가
마주 앉은 깡마른 선비의 얼굴로 일렁이다가
아파트 거실에 도인 같은 표정으로 티브이 앞에 놓였다
뇌성벽력 요란하던 장마철도, 햇볕 따가운 여름날의 무덥던
하루하루도 지나고 무쇠 조각 설합 장식을 유두처럼 양 켠에
추슬이고 각진 장식장에 맞서 능청스런 다릿발도 휘어 세우고
신문도 과일 접시도 찻잔도 할 수 없다 놓여 진 그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도, 고려도 조선조도 가고 선비상도 가고 있다
앗 차, 눈이 번쩍 날벼락 친다 전류가 흘러 손발이 저리다
누런 낯짝에 두 개의 옹이눈이 번갯불 타고 하늘 멀리 날아간다.
천벌을 내릴 듯 부릅뜬 눈이 날아간다. 벼락 치듯 큰 소리 친다.
울리는 핸드폰
핸드폰이 울다가 뚝 끝인다.
끝난 울음은 다시 또 못 우네
몇 번을 울었는가 미아리도 사라지고
놓인 자리 그대로 죽은 듯이 자빠졌네
눈을 까고 입술을 열어 벌리면
울었던 시간을 지문으로 찍어 남겼네
미안 미안 네 죄가 아니라서 내가 미안
끝난 울음을 긁어모아 그대에게 보내네
각진 구멍
여러 채의 아파트에 창문들이 네모로 뻥뻥 뚫려
여러 개의 각진 모서리가 경쟁의식도 잃고
지붕들이 내려 밀린 멈춤 끝에서
멍멍멍, 그늘 진 구멍들을 덮고 있다
음산한 구멍은 비 오는 날을 반기고
반짝이는 구멍은 햇빛 환한 날을 즐긴다.
빨래
목매 단 것도
물구나무 선 것도 아닌
나의 살갗 너의 가죽처럼
바람 타고 떠나지도 못하고
어깨 붙잡혀 두 어깨가 걸려
얼굴을 잃고 소매 깃으로 한들이네.
칠월의 숲
여러 겹의 녹색 홑이불 자락이
틈새를 접어가면서 너울거리고
박음새 실밥을 한 겹이 접고 가면
또 다른 폭이 다시 덮곤 한다
바람이 숨결인지 바람인지 훌렁훌렁
멀리 가까이 넘실대는 7월의 숲
일렁이는 초록 숲을 관여치 않는 아파트 군단이
깝치지 말라고 창문 밖을 일제히 내다본다.
여름 하늘
여름 하늘 뜬 구름은 태평양의 솜틀 공장
틈새의 푸른 여백이 드높은 바다로 떠서
끊어진 파도 한조각 구름 띠로 이어지고
거기 하늘 바다는 더 높이 떠오르고 싶다
먹구름 거대용이 한 쪽으로 머리를 맞대고
몸을 비틀어 온 하늘을 좁아라 휘젓고 간다
천 개의 빗줄기
천개의 빗줄기로
가려진 시야
하늘 땅의 경계로
가로등 불빛이 흐리다
유리창에 와서 붙는
뒷동 아파트의 거실 불빛
찬찬이 다시 봐도
거리감이 없다
빗소리 낙숫물 소리
짐차에 실려 달리고
베란다의 군자란은
귀를 막고 도도하다.
다람쥐
풀밭에선 풀냄새 짙은 향기
나무에선 무질서한 매미 소리
굴참나무 거치른 껍질 두텁고
휘어진 가지 겹 싸인 잎은 푸르다
다람쥐 꼬리 나부껴
도토리 까는 앞발로
설익은 풋 도토리
떨떠름 파랗게 떨어진다.
칠월 매미
문득, 칠월 말에 듣는 매미소리
귀가 번쩍, 생각이 멀다
맴-맴- 매앰-, 맴맴 매애앰-
소리가 길고 의식은 깊다
어리고 천진하여 벗고 뛰던 논틀밭틀
미루나무 가지에 매미로 울어 온 세월
바람 불어 멀리 퍼지는 소리
백발 날리어 더 뻔한 무덤 속 내일
멀리 보이는 아파트
멀리 보이는 아파트에 사람이 살고
가까이 보이는 아파트 지붕이 하늘로 솟고
창살 없는 창문에서 햇살은 기웃거려
흐르는 구름이 그림자를 드리우네
아파트 그늘은 사람의 그림자를 지우고
그림자를 잃은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네
아파트는 높이 솟아 땅 냄새를 잃고
사람은 눌려 갇히어 하늘을 잊는다
가까운 아파트는 키 높이 솟아
먼데 아파트를 꿀려 앉히네.
도는 선풍기
세 개의 날개를 가진 선풍기가
여러 개의 날개로 돌기 시작하여
하나의 날개가 강풍으로 돌아간다
약풍으로 전환 된 다섯 개의 날개
두 개의 날개로 더 천천히 돌다가
세 개의 날개로 멈춰 선다.
안개
안개 침침
희뿌연 산허리
녹차 맛 무덤덤 혀끝에 감치고
아득한 운무 속, 향이 스미네
문득, 제비 한 마리 멀리 날아
한 점 쉼표로 삼삼히 찍히고
자신을 스스로 지워 허공의
백지장을 문질러 간다
안개 으슥 눈이 흐려
신선으로 띄워 눕히네
사전 위의 안경
사전 위의 안경은 먼 곳으로 뚫리고
안경 아래 사전은 안으로 응축 되어
머 언 곳은 발밑을 떠난 향수
갇힌 말들은 죽기 살기로 문짝을 미네
안경은 가벼워서 흰색으로 반짝이고
말들은 무거워서 사전의 표지가 검다
여러 겹 층층 천년 세월의 무계
검은 표지 사전 위에 맑은 돋보기 안경.
세탁기
서서 도는 세탁기는 10년 식솔(食率)
양말도 속옷도 군소리 없이 궁굴리고
철떡 철퍼덕 좌우로 치대어 굴리고
밤잠 못 잔 의무병 같은 일꾼
다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이
고물상으로 실려 간 형체가 삼삼하다
누워서 뒹굴고 돌아가는 세탁기는 오늘의 가솔(家率)
한판승 레슬러의 기백으로 마음껏 굴려대는
내장을 훤히 들춰 보이고 우로 좌로 돌려 굴리고
창자를 비틀고 간을 씻어 헹구고
투명한 속내를 내시경으로 비추어 굴리면서
한 자리 지켜 묵은 때를 빤다
자동차
반대편 차선에서 다가오는 자동차는 우악스럽게 눈을 빤히 뜨고 금방이라도 덮칠 듯이 대들고 뒤에서 바짝 따라붙는
자동차는 큰 소리 뻥뻥 처 놓고 뒷심 무르게 슬쩍 물러난
사람처럼 미련도 후회도 없는 듯 실의에 차서 속도 늦춰 뒤로 물러난다.
뒤차의 앞 유리로 훤히 보이는 운전자는 너무도 빤히 보여서 그날의 기분이나 순간적인
표정도 읽을 수 있음으로 방호운전의 참작사유로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뒤편에서 앞지르기 하는 자동차는 언제나 엉뚱한 데가 있어서 저돌적이고 돌발적이다
간다 온다 말 한마디 없이 으슥한 밤중에 대문 두드리고 불쑥 나타난 오랜 술친구의
무단방문처럼 사람을 의아하게 해놓고 자책감도 미안한 마음도 없이 뒤꽁무니를
치켜들고 제 갈 길을 보란 듯이 내닫는 것이다.
앞쪽에서 비켜가는 자동차는 제 미아리를 안고 가지만 뒤에서 앞질러 가는 자동차는
제 소리를 바퀴에 채워 굴리면서 안고 간다.
어찌 소리뿐이랴. 지나온 삶은 그립고 아파서 지울 수 없고 닥쳐 올 내일은 아는 바
없어 궁금하지만 신비스럽고 아름답다.
시계추
시계추는 벽을 등지고, 흔들 흔들이고
시계침은 지구본 위에서 제 낯짝을 맴돈다.
소리는 퍼져서 숲 속 그늘에 쌓이고
쿠쿠-쿠루루 비둘기로 울어 길게 이어간다
시계침은 날아서 나무줄기에 꽂혔다가
덩그런 까치집에 침살로 얽힌다.
벽을 울리는 소리는 하늘에 이어 닿고
도는 시계침은 먼 추억을 찔러 울리네
바람 뒤에
나무의 꼭짓점을 지나는 바람 뒤에 힘센 바람이 따라 붙어 크게 흔들리는
나무줄기에 잠깐 멈춰선 찰라, 뒤따른 바람의 뒤를 슬며시 밀고 있는 바람결이
머리를 부딛쳐 멈칫하는 사이에, 지나갔던 바람이 제 속력을 늦추지 못하고 나무의
가지를 끌어당기는 쪽으로 휘어진 나뭇가지가 제자리 잡을 동안, 또 따른
바람이 이어서 밀어가고 있다
나무에서 매미 소리
나무에서 씰룩씰룩씰룩씰룩 쉼표 없이 우는 매미
저쪽 나무에서 찔룩- 찔룩- 찔룩-
곁에 나무에서 쩌얼룩 쩌얼룩 쩔룩-
멀리 나무에서 시일-룩 시일-룩 시일-룩
키 높은 나무에서 맴맴맴-- 매애앰--매애애-앰
낮은 나무에서 맴맴맴 맴맴맴 맴맴맴맴맴
여러 나무에서 씰룩 씰룩 찔룩 찔룩 매애맴 씨일룩
멀리 숲 속에서 맴맴씰룩 찔룩 매애앰 눕힐 씰 찔릴 찔
온 숲에서 씹힐 찔룩 짤릴 맴맴 지미 씰룩 매애-앰
하늘 그늘
나무는 지쳐 취객처럼 흐느적 한들
바람은 깡말라 딱딱하게 땡글땡글
대지는 목이타서 이글이글 애태우고
하늘은 그늘 찾아 멀리서 막막하네
아파트 지붕에선 열꽃이 피고
먼 산 능선에 초록 불꽃이 타네
뙤약볕을 울어 온 매미 더위 먹고 목이 쇠어
나무 가랑이를 붙잡고 흘린 땀을 말리네
더운 바람
한여름 습습 훈훈한 바람, 눈 감고 걸어오네
온 몸에 열기 가득 품고 슬금슬금 지나가네
뒤따른 바람이 안대까지 두르고 더듬더듬
창문으로 햇볕 후끈 딸아 들어오네.
어기적 아기작 방안을 맴돌다
흐느적 비틀 뒷걸음치고 물러나네.
말도 못한 놈이 후덥찌근 약을 올려
열 받고 치대는 몸이 뒤틀리게 무덥네
세면장
비누는 손바닥 둘을 지나 미끄럼을 타고
때밀이 긴 수건은 등짝을 밀고 당겨 살을 할퀸다
좌변기 고인물이 소용돌이치며 쏴아-쿨 쿠루룩
건빵 같은 타일 바닥 무늬가 미끌 조심 미끌 조심
덜미를 붙잡힌 샤워기 낯짝에 콧구멍 귓구멍이 조밀하고
전복 껍질 같은 비누곽, 송이버섯 같은 수도꼭지가
거울 앞에서 호텔방 요부처럼 예쁘다.
서서 기다리는 핑크빛 칫솔은 침묵하는 면도기를 시샘하고
구르다 멈춰버린 두루마리 휴지통에 노란 생각이 감긴다
고양이 발톱
고양이 발톱이 화분에서 솟아
몸짓은 뿌리로 사려 숨도 막힌 채
발톱은 잎으로 돋아 생명처럼 푸르고
잎잎은 물을 기다려 오라오라 흔들거리네
꽃을 잃고 발톱으로 피어나서
사나움도 잎으로 가려 웅크림을 덮었다.
불효의 앙성
구름 없는 회색 하늘에 불효의 앙성 소리
치솟는 아파트
바람 없이 꼿꼿 나무 지친 모성애
손에 손잡고
발끝 머리끝 푸르른 희망
한철 버티어 뿌리로 깊네
뒤에서 오는 자동차
밤중에 자동차가 소리와 함께 굴러 가네
제 소리로 거리를 재고 크기를 보여주는
차 안의 사람은 보이질 않고
꽁무니에 미등도 보이지 않고
제 소리만 안고 뒤에서만 굴러가는
눈을 크게 떠도 보이지 않는 자동차는
제3장 이미지(心像)
꽃을 본다면
노란 꽃을 본다면
빨간 꽃을 본다면
하얀 꽃을 볼 때는
하얀 꽃은 피지 마라
하얀 나빌 볼 때는
먼 산 바래 하늘 본다
우리 오매 죽는다고
흰 옷 상주 된다고
하얀 나비 훨훨 봄날
눈물 살짝 그냥 보네
바람의 행방
하늘은 구름을 띄워 아파트 지붕을 덮고
수직으로 쌓인 아파트 창문이 하늘을 궤고
바람이 아파트 몸통을 흔들 흔들어 보다가
역부족 역부족 모서리로 비켜간다
안시리움
안시리움 밑 대궁에 물을 뿌려 쏴아 싸악 쉬이익-
녹색 줄기는 땅 밑을 밧줄 내린 듯 보일 듯
꽃 빨강 노란 꽃술 어울려 아롱다롱
사선으로 매달린 잎새 뚝뚝 물방울 대롱대롱
여러 꽃 대궁 이고 피는 면류관
하나같은 호소문 검붉은 피로 서네
못 가진 아내
아내는 길게 못 가젓지만 내공이 알차고
남편은 늘어지게 가졌지만 허허실실
안으로 궁을 지어 성 안에 가둔 아내,
밖에서 기둥을 세워 지아비로 선 남편
아내는 집안 가슴에 자식을 거두어 살고,
남편은 집 밖에서 길을 파면서 간다
지하 차고
지하 차고에서 여러 종의 자동차를 보네
차 한 대 외롭게 저 혼자 섰네
차 두 대 정다운 척 나란히 섰네
차 세 대 예의 바르게 줄 맞춰 섰네
차 네 대 비뚤게 거만한 자세로 섰네
차 다섯 번째 벽을 보라며 뒤돌아섰다
차 여섯 번째 앞을 막아 사이를 넓혀 섰다
차 일곱 번째 세로 줄로 당당하게 섰다
차 여덟 번째 우로 나란히 좁은 간격으로 섰다
차 아홉 번째 앞으로 나란히 넓은 간격으로 섰다
차 열 번째 반장처럼 홀로 떨어져 섰다
차 열 한 번째 갈 곳 없어 오랜 동안 제자리 지켜 섰다
차 열 두 번째 먼 길 돌아와서 따끈따끈 엔진 식히고 섰다
차 열 세 번째 시동 걸고 떠날 차비 출발선에 섰다
차 열 네 번째 시끌 벅쩍 아이들 내려 문도 못 닫고 섰다
차 열 다섯 번째 외제차 마크 달고 검은 색으로 섰다
차 열 여섯 번째 빛이 바랜 중고차 은색 현대차로 섰다
차 열 일곱 번째 비 맞고 숨 돌려 뚝뚝 물방울 흘려 섰다
차 열 여덟 번째 심한 선팅으로 음흉하게 섰다
차 열 아홉 번째 나는 길다 경고하며 화물차로 섰다
차 수무 번째 값비싼 낮은 차를 키 높은 차가 내려 보고 섰다
작아지는 소리
작아지는 소리에 자동차가 멀어지고
털털거린 오토바이가 사라지고
커지는 소리로 비행기가 덩실 떠오르고
반대편 차선에서 자동차가 맞대들고
작아지는 소리로 보였다가 사라지고
가물거린 소리로 형체가 멀다
된장 냄새
독 안의 된장 누런 빛깔
색깔 냄새 된장 맛
고춧가루 빨간 빛깔 눈에 따끔
혀끝에 얼얼 매운 맛
자동차 소리 매캐한 검은 냄새
사이다는 부글부글 뻥 뚫린 목젖
당신의 속 풀이
까맣게 노란 구린내.
(8. 10)
거리에 흰 눈이 없다
소한 무렵 한겨울에 흰 눈이 없다
맞은편 16층 아파트 벽은 갈색이고
화단의 낙엽수는 듬성듬성 보초병처럼 묵묵하다
소나무와 향나무는 각각 여섯 그루, 주목 세 그루
지금 청청 푸르다
유치원 아이 다섯이 차에서 내려
병아리 종종 걸음으로 엄마 따라 승강기 쪽으로 들어가고
노란 봉고차는 슬금슬금 뒷걸음치다가
살짝 빠져나간 뒷자리가 냉혹하다
문득 고개 드니, 낮달이 찬바람으로 드높아
보리죽 떠먹은 자리에 은수깔이 놓인다
겨울 빛을 잃은 허공이 망향 휴게소 가을 하늘로 앵토라저
동천(冬天)의 의욕을 얼리지도 못한다
팔층의 발 아래 아스팔트 포장마당은
검은 빛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고
날마다 응얼대는 시장바닥의 양극화(兩極化)처럼
부조리한 빛깔로 겨울의 흰 눈을 기다린다.
호접란
난초는 힘이 뻗쳐
옆 위로 검푸르다
난초는 시간이 많아
애터지는 세월도 그냥 흘려
겹쌓인 침묵을
용쏘(龍沼) 깊이로 묻고
푸르다 지쳐 멍 든 상처
제 살로 돋아 다시 섰네.
숲 그늘
나무는 숲을 이루어 여름 한낮을 일렁이고 그늘에서 얼쩡거리던 낮귀신이 긴 팔을 너울거려
허청허청 나무 사이를 엿보다가 지나는 처녀 아일 하나 잡아먹고 영감탱이 둘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지나친다.
쭈그러든 젖을 그대로 내보이는 할망구가 눈 흘겨가며 머리채를 날려
달겨드니 여름의 숲 속이 다시 한 번 크게 출렁거린다.
비오는 날
종일속이아파서헤매도는천장만뱅그르빗님은가증스럽다도깨비야뚝딱여우토굴속에들고
꼬리짤려종일청하님과놀다쓰러젔다뚝딱도깨비가울었다빗님요란여우화났다
(7. 16)
여름 한낮
검은 구름이 눈 부릅뜨고 흐를 때
하얀 하늘은 참아서 버팅긴다
손을 내뻗쳐 휘젓고 나오고 싶은데
구름은 제 본색 못 감추고 제멋대로 흐른다
더 먼 곳에 이글거린 태양은 세월을 불태우고
어둑한 땅 위를 눈 흘겨 내려다본다.
숲을 일렁이며 날갯짓 하는 비의 천사가
때를 기다려 하늘을 휘졌고 노닌다
천 개의 빗줄기
천개의 빗줄기로
가려진 시야
하늘 땅의 경계로
가로등 불빛이 흐리다
유리창에 와서 붙는
뒷동 아파트의 거실 불빛
찬찬이 다시 봐도
거리감이 없다
빗소리 낙숫물 소리
짐차에 실려 달리고
베란다의 군자란은
귀를 막고 도도하다. (7.16)
까치는 날아
까치는 날아 희뜩 버뜩, 희뜩…
수풀서리 한들 뒤집히는 손바닥
안 보이는 산비둘기 꾸꾸 쿠루루
저 쪽 산은 반갑다고 꾸꾸 쿠루루
보송보송 꼬리 한들 나무 타는 청솔모
한 점 콤마로 찍히는 수직 종서의 외줄기
팔 굽혀 옆으로 젓는 노익장 할매
무겁다 엉덩이 휘었다 가랑이
중복
개 패듯 쏟아지는 빗줄기 또드락 또또드락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는 양계장의 닭대가리
짐차에 한가득 실려 가는 영계는 빗속을 상관없다 한다
후두둑 장맛비 들이치는 중복 날
교회의 첨탑을 쓰러져라 두들겨 꽂힌다
힘겨운 자동차는 개 짖듯 울부짓고
끙끙 앓는 소리로 좁은 길을 비 맞고 가는데
반쯤 그을린 개코 원숭이 형상으로
중복의 날씨는 음습하게 떨린다
푸른 들판
어린 볏모가 자라는 칠월의 들판은 낮은 푸르름으로 잔잔하게 넓다 분주하던 모내기철도
없었던 일처럼 씻어가고 지금 막 땅내를 맡고 질척거린 논흙에 뿌리를 뻗고 거침없이
커나는 무논의 벼 포기들이 줄 선 유치원 아이들같이 제 간격을 타의적으로 잘 지키면서
스스로 잘 자라고 있다 자기의 몸통을 불리면서 온 들녘을 살찌우는 집단적 결속력을
다지면서 아리랑 집단공연을 연출하는 예행 연습인양 무관심한 표정이다 논길을 걷는
사람도 둘이서 타고 가는 자전거도 허수아비인양 멀다 세멘트로 포장 된 농노는 주지적
낭만 시처럼 길바닥은 딱딱하고 각지고 똑바르다
11층 아파트에서 훌쩍 날고 싶은 들녘은 여리고 푸른 기운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때 묻은 누더기를 다 벋고 온 몸을 풍덩 담그고 싶다 새가 되어도 좋을 칠월의 들녘은 어제같이 말이 없고 색채로 몸짓으로 전설처럼 쏟아내는 집단적 함성은 누가 통역해 줄 것인가 천사의 음성은 아름답고 오묘하다 삶의 과정은 어린 벼가 자라는 논길 같은 것일까 누런 송장 빛 가을은 오고 있다 하늘이 높아서 갈 수없는 푸른 들판에 바람 불고 칠월이 드넓다
바람 뒤에
나무의 꼭짓점을 지나는 바람 뒤에 힘센 바람이 따라 붙어 크게 흔들리는
나무줄기에 잠깐 멈춰선 찰라 뒤따른 바람의 뒤를 슬며시 밀고 있는 바람결이
머리를 부딛쳐 멈칫하는 사이에 지나갔던 바람이 제 속력을 늦추지 못하고 나무의
가지를 끌어당기는 쪽으로 휘어진 나뭇가지가 제자리 잡을 동안 또 따른
바람이 이어서 밀어가고 있다 (8.8)
숨 막힌 물
물뿌리개는 속엣 물을 눌러 가두고
숨 막힌 물은 물통을 치받네.
거실은 배가 불러 둥글게 부풀고
압축된 허공이 유리창을 힘껏 미네
밖의 숲은 물통을 건드릴 수도 없고
가지 끝 잎들만 흔들이고 있네.
(7. 11)
봄과 나비
호접란 넓은 꽃잎은
나비를 기다리고
나비는 봄을 업고 멀리 날아
난 잎은 내일 또 기다리고
세 송이 난 꽃은 남아 파르르
떠는 잎이 한종일 바랜다.
(7. 11)
더덕 술
술병 속 더덕은 마실 수가 없어
술을 제 몸에 감고 10년을 왔다
숨이 막혀도 뚜껑을 열 수가 없고
투명한 밖의 세상은 훤히 보이지만
사람 눈빛 천 번을 스쳐도
내 살갗 더덕 껍질은 술 빛을 가리네.
(7. 12)
리모컨
한 개의 눈으로 여러 개의 촉각을 지닌 채 보통은 누워서 제 일을 처리하는
이상한 놈, 배와 가슴에 사마귀 같은 돌기가 돋아 매끄럽지 못하고 도무지 말이 없고
알아듣지도 못한 짐승 같은 놈이다
제 돌기를 색으로 구별지우기도 하지만 속내는 들어 낸 법이 없고 외부 자극에만 벼락같이
반응하면서 타협과 부정을 용납하지 않는 놈
건드리거나 살짝만 눌러도 정직하게 반응하고 절대로 한눈을 팔지 않는다 제 할 일만은
몸 바쳐 죽을 각오로 나서는 철처한 옹고집쟁이라 타의 모범이 되지 못한다
금 나와라 뚝딱, 연속극 나와라 뚝딱 제대로만 시키면 절대복종 필사적이다 평생을
외길로만 살아가는 놈 오직 한 길로만 가야 되는 일편단심 외골수라 이웃도 모르고
상부상조의 정신은 아예 배우지 못한 기계적인 놈이다
하는 짓을 보면 오장육부나 오관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숨 쉬거나 배설의 흔적을
내보이는 법 없고 시키는 일에만 민첩하게 명령복종 할 뿐이다 언제나 전면을 향한
눈길로만 갈 줄 알지 옆으로 뒤로는 처음부터 길이 없다 저와 인연 닿는 놈 하고는
눈 맞춰 내통하면서 죽을 때까지 함께 간다 가끔 융통성 있는 놈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런 놈은 태어날 때부터 같은 유전자를 공유 했을 때 가능하다 정말 어리석은 놈이다.
착하고, 솔직하고, 배반을 몰라 그런 점으로 치자면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
요즘 같은 백 세 시대에 유독 독거노인의 손 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각별한 총애를
받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7. 29)
선풍기
약풍이든 미풍이든 한 번 작동된 선풍기는 고집스럽게 잘 돌아간다
강풍으로 전환하라고 말해도 제 고집을 꺾지 않고 돌아간다
저녁이 되어 기온도 낮아 졌으니 그만 정지하라고 말해도
거실의 한 가운데 걸리적거리지 말고 구석으로 밀려나라고 말해도
키 높게 서 있지 말고 자세를 낮추었으면 좋겠다고 말해도
선풍기는 굽히지 않고 양심범처럼 자신 있게 돌아간다.
고집을 꺾어 보겠다고 무관심과 방관의 태도를 취하거나
접촉의 친밀도를 낮추기 위해 스위치 하나 건드리지 않아도
상관마라 나대로 돈다는 식으로 어떠한 반응도 없다
돌고 있는 선풍기와 얼굴 맞대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집념이라든지 아집이라든지 악착스럽게 한 우물 파는
사람을 생각하며 멈추지 않고 돌고 있는 선풍기의 계속성은 집착인가 신념인가 물었다
거실 한 가운데서 아침까지 약풍으로 돌고 있는 선풍기는
무관심으로 방치한 집안 사람을 원망하는 내색도 없이
털 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 사람을 존경이라도 하듯이
잘 만들어져서 결함 없이 출고 된 전자제품답게 혼자서 열심히 돌고 있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제 자신을 남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자신감으로
선풍기는 밤을 새워 가면서 쉬지 않고 기계적으로 돌고 있다
(8. 4)
(시조 4편)
열매열전 (1)
- 풋대추
형과 아우가 땡볕에서 함께 익어가면서
제 잘난 총각 모습 더더욱 잘 보이려고
바지를 홀랑 내리고 달랑 딸랑 매달렸다.
풋대추가 익어가는 내 어린 시절의 여름날은 천진했다.
우리 형제가 앞 냇물 보(洑)안에서 그물을 치고 고기잡이 하던 때는
멀리 있어 더욱 그립다. 해 질녘에 그물을 치고 새벽같이 거둬들였는데
갈대가 무성한 보안의 가장자리엔 붕어, 피라미가, 보안에서는 모래무지가
많이 걸렸다. 형은 그 때 열일곱이었고, 네 살 아래인 나는 형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대리 만족으로나마 마냥 즐거웠다. 새벽 일찍 날이 채 밝기 전에는 보는 사람도
간섭하는 이도 없었던 보아구지는 우리 땅인 냥 자연스럽고 친근하였다. 삼베잠방이
쯤은 홀랑 벗어 던지고 그물을 거둬들였다. 그물에 걸린 은빛 고기들이 치렁치렁
퍼득일 때 그냥, 그냥 좋았고, 냇가 풀밭에서 고기를 따 담을 때 아랫도리 맨살의
형의 샅에 달랑 매달린 남자가 흘깃 눈에 들어올 때 나는 마냥 무참(無慚)하여 눈길을
돌렸다. 산골 여름의 밤기운에 시원하게 맑아진 물에 적당히 오그라든 형의 자지는
수술 없이도 잘 다듬어진 풋대추마냥 매끄럽게 반들거렸다.
그때, 그 시절, 다시 보지 못할 형의, 나의 샅의 남자도
이제는 무참함도, 수줍음 없이도 그리워서 보고 싶다.
열매열전 (2)
- 잣송이
겹겹, 층층 옥개석 쌓은 벼랑 끝 칼끝도
아무나 범접 못할 철옹성 이룬 넋마저
몸 안에 틈새로 박힌 내공의 뜻을 알겠네.
아랫돌 빼서 웃돌 괴던 우리 집 형편은
고대광실 솟을대문 그런 집이 아니었고
155미리 직사포에도 견뎌 낼 견고한 돌집이었다. 때깔 좋은 부잣집 마님 똥 빛깔의
황토 흙을 치덕치덕 잘도 이겨 바른 돌집의 안쪽은 여름에도 시원해서 좋았지만
밖에서 보면 거칠거칠 엉성한 석성(石城) 같아서 우둘투둘 숭숭 돌들의 틈새가 어둡게
그늘져 있었다. 웃돌 괴일 아랫돌도 뺄 수 없이 우리의 허기 같은 너와 지붕은 무겁게
짓눌러 있었지만 달빛이 새어들고 햇볕도 받아들인 돌집의 틈새는 우리 칠 남매를
잣송이 같이 겹겹 층층 어두운 틈새를 안으로 다져주었다. 가난도, 배고픔도, 전쟁도,
희망도, 절망도 그 사이 사이를 용케도 잘 비집고 나와서 마른 잣송이 틈새로
비어져 나온 잣 알갱이 같은 삶의 사리 구슬을 옹골지게 꿰고 있음이네.
삶이여, 송진같이 끈적이는 한 평생의 틈새여…
그래서, 그래도 한참은 틈새 메워 살아보겠네.
큰 소리 작은 소리
작은 소리는 바람결에
스스로 묻히지만
풀밭에 겹으로 쌓여
역사로 불려지면
큰 소리 바람을 일어 다시 불어 오느니
작은 소리는
큰 소리로 되불려 가지만
큰 소리는
작은 소리를 짓밟고 가지만
역사는 굴러 뭉쳐서 크게 울어 흐른다
궁 안의 큰 소리는
작은 소리를 묻지 못하고
작은 소리는 바람 타고
크게 울려 오느니
세월을 궁굴리면서 줄기 곧게 뻗는다
너와 나의 작은 소리
황토 땅에 묻지 못해
너와 내가 큰 소리로
궁 안에 던진다면
봉분의 잡초 뿌리로 질긴 소리 남으리
여기로 이어진 저기
오두산 전망대는 집에서 삼십리 길
자유로 뻗은 길은 강물 따라 거침없고
가다가 막힐 땅인데 사차선도 비좁다.
실향민 망배단(望拜壇)엔 놓인 꽃도 시들어
무심한 세월실어 끝도 몰라 기다려 있고
벽안(碧眼)의 외국인 부부 이색 표정 못 푼다.
강변의 철조망은 활시위로 팽팽하여
당겨진 손목은 굳어 공이처럼 뻗치고
초병은 말도 잊은 채, 조국이여 사랑이여.
병사들 눈독으로 강물은 멍들었다
시퍼런 유속(流速)인들 그냥 못 가는 길목에서
육십년 울음도 지쳐 목울대도 저립다.
지척의 거리에 인공기는 펄럭이고
합수터 넓은 강폭, 하늘 바랜 자유를
양켠의 땀도 눈물도 마저 품고 잠긴다.
통일로 끝자락, 임진각 휘돌아온 물
세월도 말 없음을 흘러흘러 알리고
자유의 다리목께서 핏물 녹물 실어 오네.
멀고도 깊어진 460미터 저쪽에
반도의 허리쯤에 배꼽 같은 옹골진 흙밭
여기로 이어진 저기, 아득히도 가깝네.
우리는 살아요, 우리식으로, 동무들...
그대로 보고말고, 아무 말도 마라요
역사를 죽일 놈으로 풀밭 밟고 살아요.
전망대의 태극기는 휘날림도 목이 꺾여
바람도 귀찮은가 처진 어깨 짓눌리어
이래야 쓰겄느냐고 눈 흘겨 꼿꼿 섯다.
(2011. 8. 월간문학)
후기
나의 시 나의 시 쓰기
1
높은 아파트와 낮은 아파트 사이에
나무들이 왼쪽으로 구부러지고 있다.
상수리나무와 나도밤나무는 중심 잡기에 안달이다.
소나무는 한낮에 쏟아낸 제 그림자를
즈믄 가시 잎잎에 흑진주로 치렁치렁 꿰달고
높은 아파트와 낮은 아파트의 옆구리에서
여러 나무의 그림자가 까마귀 떼로 부딛쳐
분수처럼 쏟아졌다가 송알송알 튕겨나간다.
나무들이 오른쪽으로 꺾이다가 제자리를 잡지못하고
다시 왼쪽으로 허리굽혀 떼거지로 쏠린다.
높은 아파트와 낮은 아파트가 좌우로 흔들거리고
검은 도포자락이 휘파람 소릴 내지르며
훌쩍훌쩍 담을 넘어가고 있다.
- 졸작 <나무와 그림자> 전문
2
소한 무렵 한겨울에 흰 눈이 없다.
맞은편 16층 아파트 벽은 갈색이고
화단의 낙엽수는 듬성듬성 보초병처럼 묵묵하다.
소나무와 향나무는 각각 여섯 그루, 주목 세 그루
지금, 청청 푸르다.
유치원 아이 다섯이 차에서 내려 병아리 종종 걸음으로
엄마따라 승강기 쪽으로 들어가고
노란 봉고차는 슬금슬금 뒷걸음치다가
살짝 빠져나간 뒷자리가 냉혹하다.
문득 고개 드니, 낮달이 찬바람으로 드높아
보리죽 떠먹은 자리에 은수깔이 놓인다.
겨울 빛을 잃은 허공이 망향 휴게소 가을 하늘로 앵 토라져
동천(冬天)의 의욕을 얼리지도 못한다.
팔층의 발아래 아스팔트 포장 마당은
검은 빛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고,
날마다 응얼대는 시장 거리의 양극화(兩極化)처럼
부조리한 빛깔로 겨울의 흰 눈을 기다린다.
- 졸작 < 겨울에 흰 눈이 없다> 전문
** <詩는 감각(感覺)을 요소(要素)로 하는 心的 複合體다> 이것이 나의 시 쓰기 교본 1장 1절이다. 위 두 편의 시는 이러한 창작의지로 쓰여 졌다.
(1)은 비오고 바람 부는 여름 밤,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서 이쪽저쪽으로 나무들이 쏠리고 있을 때의 스산한 기분을 감각적으로 통합되도록 언어의 그림을 그렸고,
(2)는 눈이 오지 않는 겨울 날씨가 어색하고 부조화스런 감정을 낳고, 그 부조리의 감정이 사회의 양극화로까지 비약한 정황을 감각적으로 감지될 수 있도록 형상화시킨 것이다.
나의 시에서 의미를 설명하거나 강요하려고 않는다. 그렇다고 김춘수 식의 무의미 시에 동조하는 것도 아니며, 릴케 방법의 사물시만 고집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의도된 시의 주제를 감각적인 표현을 통하여 형상화하려고 집중한다.
시적 형상화 작업은 논리적 설명이나 내용 전달 의지를 극도로 억제하고, 아무런 의미도 주장도 없는 것처럼 그냥 표현하려는 것이다. 특히 의미나 감정이나 정서를 강요하거나 설득시키려는 생각은 금기(禁忌) 사항이다. 어디에 두든 어떤 방향에서 보든 상관없이 아름다운 조각상처럼 어디서 누가 읽든 간에 변함없이 감동을 주고, 감각적인 상(이미지)으로 남는 "시 그 자체"이길 기대하는 것이다.
표현 기법의 핵심은 "감각적 요소"이다. 시의 문맥은 오관(五官)을 통하여 감지될 수 있어야하고 감지된 객관적 상관물 (매개체)에 시적 정서가 자연스럽게 통합되도록 시도한다. 감각적 요소가 결핍된 추상적 관념은 흔적도, 像(상)도 없이 공허할 뿐이다.
우리의 시문학사는 시의 문맥에서 볼 때 감각적 요소가 결여되었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정이나 윤리 같은 내면의식이 강조된 관계로 관념 지향적 이었다. 이러한 우리의 시문들은 감각적 요소를 가볍게 소도구로 처리하고 있다는 점이 나는 불만이다.
세계 철학사와 문예사조에서는 일찍부터 감각적 문제가 중요하게 탐색되어 왔다.
진리의 문제를 다루는 인식론에서 대응설의 대표적 견해로 알려진 "감각적 모사설"이라든지, 경험론의 대명제"모든 지식은 감각적 경험으로 부터"라든지, "일찍이 감각 속에 없는 것은 지성 속에도 없다"라든지, "마음의 모든 작용(기억, 사고, 판단 등)은 변용된 감각이다"
‘E.콩디’라든지 "사상도 장미의 향기처럼 감각을 통하여 파악될 수 있다(T.S. Eliot의 '감수성의 통일') 등의 명제들은 감각적 요소를 경시해 온 나에게 많은 걸 시사해 주고 있다.
감각을 통하여 습득된 심적 내용을 표출할 때, 그 또한 감각적인 요소로 구성인자를 삼아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행동과학(심리학)의 S-O-R 이론이 더욱 확실하게 말해준다.(외부의 감각적 자극-유기체-행동으로 표출) 이러한 시론에 기초한 나의 창작의지는 지속적으로 탐색되고 보완될 것이며, 내 詩精神의 이론적 바탕이 되고, 시적 사고의 화두로 남아서 늘 내 정신적 공간에 높이 떠 있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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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같은 애송이에겐 선망이며 교사이십니다. 더욱 열심히 따라가며 다른 각도로 흉내라도 내 보겠습니다.
열심이 공부하면서 삶과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는 진지한
마음으로 시를 찾아 나가면 서로 좋지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