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낙안읍성(樂安邑城) 민속마을
우리나라에는 지금까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전통마을이 여러군데 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전통 민속마을 여섯 군데를 이름하여 6대 민속마을이라 부르는데, 강원도 고성군의 왕곡마을, 충남 아산의 외암마을, 경북 안동의 하회마을, 경북 경주시의 양동마을, 제주도의 성읍민속마을과 낙안읍성이 그 곳이다. 오늘은 순천에 있는 낙안읍성을 돌아보고 풍수관산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낙안읍성 둘러보기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에 있는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여타 마을들과 달리 마을 전체가 높은 돌성곽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총 둘레가 약 1.4km에 달하는 이 성곽은 처음에는 토성(土城)으로 쌓아졌다. 조선 태조 6년(1397년)에 왜구가 침입하자 이 마을 출신이었던 양혜공(襄惠公) 김빈길(金贇吉) 장군이 의병을 일으키고 마을을 방어하기 위해 최초로 쌓은 것이다. 그러다 300년 후인 인조 4년(1626년) 충민공(忠愍公) 고송(孤松) 임경업(林慶業, 1594∼1646) 장군이 낙안군수로 부임하면서 현재의 석성(石城)으로 중수하였다. 높이 4m에 달하는 성곽은 성안의 동내리와 남내리, 그리고 서내리의 3개 마을의 생활 근거지를 만들어 주었는데, 4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조금도 끊어진 곳 없이 견고하고 웅장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을의 모습도 전통양식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어 드라마 용의 눈물과 태조왕건 등이 촬영되기도 하였으며, 1983년 6월 14일 사적 제 302호로 지정되었다.
성곽내의 면적은 41,018평에 달하며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북문은 호환(虎患)이 잦아 폐쇄하였다. 동문은 낙풍루(樂豊樓), 남문은 쌍청루(雙淸樓) 또는 진남루(鎭南樓)라고 하고, 서문은 낙추문(樂秋門)이라 하였는데 성문의 이름에서 이미 낙안의 풍요로움과 삶의 운치가 배어난다. 낙안읍성 홈페이지에는 임경업 장군이 석성을 쌓을 당시 있었던 아름다운 전설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임경업 장군(당시에는 군수)에게는 누나가 한 분 계셨는데 성곽 쌓는 것을 누나가 돕기 위해 내기를 하였다. 임경업 군수가 성곽을 쌓는 동안에 누나는 병사들이 입을 옷을 만들기로 하였는데 누가 더 빨리 하는가의 내기였다고 한다. 누나는 봄에 목화를 심고 가꾸어 수확을 하여 당시 2,000 여명이나 되는 군사들의 군복을 만들고, 장군은 병사와 주민들을 동원하여 성곽을 쌓는 내기였는데, 누나가 옷을 다지어 놓고 나서 성곽을 보니 아직도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러자 누나가 생각하기를 일개 아녀자가 일국의 장수를 이긴다는 것도 그렇고 특히 수많은 병사들의 사기가 내려갈까 염려가 되는지라 다 지어 놓은 군복 중에 한 벌의 옷고름을 짤라 놓고서 성곽이 다 쌓아 지기를 기다렸다가 동생이 성곽을 모두 쌓은 후에 옷고름을 다시 달아 일부러 져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모르는 병사들은 기뻐 환호하고 사기는 충천하였으며 이런 모습을 지켜보며 누나는 흐뭇하게 여겼다고 한다. 동생과 군사들의 사기를 위해서 동생에게 승리를 안겨준 아름다운 누나의 모습 이야말로 전통적인 우리 여인상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예나 제나 누나는 언제나 동생을 지극히 아끼고 보호하는 존재인가 보다. 불현듯 누나 생각에 한 번 언급해 보았다.
임경업 장군은 낙안군수 시절에 선정을 베풀었는데 이를 기념하는 선정비가 비각과 함께 성안에 세워져 있다.
낙안읍성의 형태는 북쪽에 낮은 구릉을 끼고 평지에 자리 잡았으며 동서 방향으로 긴 장방형이다. 서북쪽에 대나무 숲을 조성하여 계절풍을 막았으며 동문에서 남문까지 걸치는 해자(垓字)를 설치했다. 해자는 적군이 성을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성벽의 바깥에 깊게 파 놓은 도랑을 말한다. 이것은 성을 방어하는 시설이기도 하지만 물줄기를 인위적으로 둥글게 조성한 것은 풍수적으로 명당수를 만들기 위함이다. 물줄기가 곧바로 흘러나가는 직류수는 터에 흉하게 작용하므로 이를 완만히 흐르도록 하기 위해 동문에서 남문까지 성을 감싸듯 돌아서 이어지도록 한 것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널따란 분지형에 뒤로는 진산인 금전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앞으로는 옥산을 비롯하여 낙안벌을 좌우로 감싸는 산줄기로 인해 낙안읍성은 평지에 위치하면서도 자연이 만들어 낸 천연의 요새가 되었다. 더욱이 해안에서 불과 8km 정도 거리에 있으면서도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 온 순천만의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바다로 침입해 들어오는 외적을 방어하고 공격하기에도 좋은 천혜의 조건을 지녔다.
낙안은 남해안을 동서로 잇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바다와도 가까이 있어 해상운송에도 유리했으며 평상시에는 사람이 살기 좋은 삶의 터전이 되었고, 유사시에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전투를 위한 군량미를 축적하고 군사를 배치하여 적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하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동문에서 가까운 동헌의 동쪽에 손님을 접대하는 객사가 배치되어 있다. 이곳은 낙안읍성의 가장 중앙상단에 위치하며 마을의 으뜸 되는 건물로 왕명으로 또는 고을을 찾아오는 사신들을 영접하고 머물게 하던 곳이다. 객사 좌우의 방은 조정에서 파견된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는데, 동쪽 방은 문인(文人)이 서쪽 방은 무인(武人)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이는 좌양우음(左陽右陰)이라는 음양(陰陽) 법칙에 따른 것으로 건물을 중심하여 보면 동쪽은 좌(左)가되고 서쪽은 우(右)가된다. 따라서 좌상우하(左上右下)하여 문인이 무인보다 높은 서열이기 때문에 그리 배치하는 것이다.
또한 객사에서는 고을 수령이 새로 부임하거나 또는 삭망(매월 초하루 보름날)과 국경일, 그리고 고을에 좋은 일이 있거나 궂은일이 있을 때 군수 이하 관속들이 나와 향궐망배(向闕望拜, 임금이 계시는 대궐을 향하여 절을 하는 것) 하던 곳이다. 즉, 임금님을 가까이 모신 듯 충성하고, 목민관으로서 소임을 다할 것을 약속하던 곳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마을의 북쪽 객사의 서쪽에는 마을을 다스리는 동헌건물이 있다.
동헌 뜰에는 죄인을 벌하는 형틀이 있어 으스스함을 자아낸다. 하나요, 둘이요 하며 곤장으로 볼기치는 소리가 메아리치는 것 같다.
게다가 낙안읍성에는 죄인을 가두는 감옥도 있다. 그런데 대개 감옥은 동헌건물 가까이에 두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에는 동헌과 멀리 떨어진 남문근처에 두었다. 까닭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이곳에 연못(늪)이 있어 죄수들의 탈주를 막기가 용이해서 그랬다는 주장이 많다.
낙안읍성의 각 성문으로 통하는 길이 한 곳에서 만나는 마을의 중앙에 시장이 있다. 양쪽으로 배치한 두 개의 시장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장날이면 왁자지껄 뭇사람들의 떠드는 소리와 함께 진귀한 물건들을 사고파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의 장터도 꼭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낙안읍성의 또 하나 특징은 성곽 내의 가옥들 중 부잣집은 거의 없고 서민들의 집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낙안읍 성루에 올라 마을 전체를 굽어보면 대부분의 가옥들이 작은 규모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점에 대해 소위 권문세도가들이나 부자인 지주들은 관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성 밖에 떨어져 살았으며, 성내에는 주로 관원이나 일반평민들이 살았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낙안읍성의 풍수
낙안(樂安)의 명칭은 ‘즐겁고 편안하다’는 뜻이다. 이는 낙토민안(樂土民安), 관악민안(官樂民安)을 줄인 말이라고 하는데,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이면 이같이 복받은 이름을 얻었을까. 낙안읍성 남문루에 올라 낙안벌을 바라본다.
호남정맥의 우뚝한 봉우리 조계산(조계산, 884m)에서 동남으로 뻗어내린 금전산(金錢山, 667.9m) 높은 봉우리가 마을을 진호(鎭護)하고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두 개의 물줄기는 성곽의 동서 양쪽 바깥으로 돌아 흐르다 남쪽의 낙안벌을 적신 다음 합쳐져 순천만으로 흘러든다.
이토록 풍부한 물로 인해 넓고 기름진 낙안벌은 풍요를 일구어 넉넉한 양식을 제공하고 튼튼하기가 철옹성 같은 돌성곽은 어떤 외침에도 마을을 보호하여 주기에 성안의 백성들은 배부르고 편안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백성들의 삶이 이러하니 마을에는 자연 송사가 없어지고 관리들도 정치를 잘하여 관(官)과 백성모두가 더불어 즐겁고 편안하다고 하였으니 지상의 낙원이 있다면 예가 아니고 그 어디겠는가.
동헌 앞에 지어놓은 누각의 이름 또한 낙민루(樂民樓)이다. 이것은 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누린다는 뜻으로 예로부터 관(官)과 민(民)이 격 없이 하나 되어 두루 즐거웠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호남가(瑚南歌, 신재효 정리)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 낙안(樂安)이요 부자형제(父子兄弟) 동복(同腹)이라......”하여 낙안은 직업에 따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차별이 없고 모든 백성이 똑 같은 대접을 받는 고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낙안읍성에는 예로부터 울고 왔다가 울고 간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 말은 낙안에 새로운 고을 사또가 부임해 올 때에는 교통이 불편하여 험난한 산길에 고생하여 울고 임지를 떠나갈 때에는 너무도 좋은 낙안의 인심에 정들어 그만 울고 간다는 것이다. 후덕한 인심에 살기 좋은 낙안이었기에 그 옛날 도선국사까지도 낙안땅을 둘러보고는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겨놓은 천장지비(天藏地秘)의 길지로 이름난 인물이 많이 날 것이며 사방에 버릴 것 없는 명혈(名穴)이 많이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천혜의 자연혜택을 누리는 명당길지 낙안읍성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왜적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적 원리와 자연조건을 이용한 풍수지리의 원리에 따라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건설한 계획도시였다.
먼저 마을이 전략적인 원리로 배치되었다는 것은 마을이 평지에 자리잡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동헌 뒤쪽의 성곽에 올라 진산인 금전산을 바라보면 마을의 배치가 진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대개의 마을은 입지선정에 있어서 산자락 바로 밑에 또는 산의 능선이 끝나는 지점에 자리잡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낙안읍성은 진산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벌판의 한 가운데 입지하였다. 이는 산 위에서 적이 공격을 할 경우 마을의 방비가 위태로워지기에 이를 피하기 위함이다.
조선 초 남해안에 왜구가 자주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는데 이를 대비하여 나라에서는 진관(鎭管)을 설치하고 해안가의 마을을 모두 내륙 깊숙이 험한 산자락 아래로 대피시켜 놓았다. 낙안읍성도 그 중 하나인데 북쪽으로 산이 첩첩이 감싸는 험준한 지형의 금전산 아래 마을을 배치한 것이다. 금전산을 뒤로하고 순천만 앞바다를 가까이 바라보기에 전형적인 배산임수 배치인 낙안은 이로써 외적을 방어하기에도 좋고 또한 달아나는 적을 공격하기에도 좋은 남해안의 전략적 요충지가 된 것이다.
낙안읍성의 진짜 두드러진 특징은 절묘한 풍수형국이다. 따라서 낙안읍성이야말로 인간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자연을 어떻게 이용하고 또한 자연과 동화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풍수지리의 전형적인 명당형국이라 하겠다.
진산인 금전산(金錢山)의 옛 이름은 ‘쇠산’이다. 금전(金錢)이란 돈을 뜻하는데 산중에 금은보화가 많아 금전산이라 했을까. 낙안 땅의 풍족한 생리가 금전산이란 이름에서 발복한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실제 산 이름은 불교에서 유래된 것으로 부처님의 제자 오백나한 중에 금전비구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고 전해진다.
오봉산이라고도 불리는 동쪽 멸악산(滅惡山, 592m)의 굽이치는 산세는 청룡완연(靑龍蜿蜒)의 기세를 넘어 지나치게 험악하다. 멸악산의 기세가 너무도 험하여 이를 방비하고자 이름조차 악을 없앤다는 뜻으로 멸악이라 지었다 한다. 이 산의 산세가 얼마나 험상궂었던지 마을에서는 흉한 기운을 받게 된다고 하여 산을 쳐다보지도 못하게 하였고 실제로 옛날에는 백주 대낮에도 산적이 나타나 지나가는 나그네의 보따리를 뺏어갔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멸악산을 넘어가는 불재에 천년묵은 여우가 나타나서 사람을 헤쳤는데 이를 막고자 멸악사라는 절을 세우니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설일 뿐 실제로 천년묵은 여우는 산적이 아니었나 싶다. 고갯마루에 절을 세우고 길을 넓히면 사람의 왕래가 잦아지게 되고 이로써 자연히 산적도 사라지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서쪽의 백호인 백이산(伯夷山, 584m)은 토형에 가까운 산이다. 그 형상이 얌전하게 엎드린 호랑이마냥 백호준거한 모습이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지킴이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백이산에서 흘러내린 낮은 구릉형의 작은 산이 마을의 안산(案山)인 옥산(玉山, 97m)이다. 안산의 모양은 이름답게 구슬처럼 둥근형상으로 금체형을 이루었다. 풍수에서 금형산은 재물발복을 뜻하는데 낙안의 풍부한 재리가 안산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안산 넘어 멀리 뾰족산이라는 첨산(尖山)이 있어 조산(朝山)을 이루었다는데 안개가 짙게 깔려 보이지 않아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관산 하기전에 천기부터 살펴보기는 하지만 이곳이 바다에서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구름이 조금 낀 날씨임에도 짙은 안개로 인해 조산이 전혀 관찰되지 않는다. 뾰족산은 산봉우리가 붓끝모양처럼 생긴 산으로 문필봉(文筆峰)이라고 하는데 문필봉이 있는 곳에서는 문인(文人)이 많이 난다. 예로부터 낙안에서는 동쪽의 험한 멸악산보다 남쪽의 문필봉을 많이 쳐다보게 하였다 한다.
낙안읍성의 물줄기는 모두 세갈래로 나뉘어 흐른다. 진산인 금전산의 동남방에서 흘러들어오는 동내와 서남방에서 흘러나오는 서내가 낙안의 명당수가 되어 성곽의 바깥으로 흐르고 멀리 백이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외당수가 되어 세 물줄기 모두 낙안벌을 적신다음 옥산 앞에서 합수한 다음 수구(水口)로 빠져 바다로 이어진다.
형국으로 보는 낙안읍성의 군기(郡基)는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이 된다. 옥녀가 머리를 풀고 거울 앞에 앉아 빗으로 머리를 빗는 형국이란 뜻이다. 옥녀가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에게 투구와 떡을 드리기 위해 먼저 곱게 단장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옥녀는 장군의 부인이 된다.
먼저 옥녀봉은 금전산 동편 뒷자락 오공재 너머에 있다. 금전산에서 낙안읍성의 동쪽으로 길게 내리뻗은 얕은 산줄기는 옥녀가 머리를 빗기 위해 풀어놓은 댕기에 해당한다. 안산인 옥산은 머리빗 모양으로 월소형(月梳形)이며, 마을앞 들판 가운데 있는 평촌리의 평촌못은 면경형(面鏡形)으로 거울이다. 얼굴에 바를 분 그릇은 빈계등 모퉁이의 커다란 바위로 사발처럼 생긴 것이 분갑을 뜻한다. 장군의 투구는 오공재 너머의 똥메라 불리우는 작은 동산이고, 예전에 옥산들 옆에 시루떡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 이를 떡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이로써 옥녀가 곱게 단장하고 장군에게 투구와 떡을 전하는데 투구는 전투장비요, 떡은 군량미에 해당하니 전쟁에서 승리할 조건을 모두 갖춘 대명당이 되는 형국이다.
옥녀산발형이 낙안고을 전체의 형국이라면 낙안읍성의 형국은 행주형(行舟形)이 된다. 두 개의 물줄기가 흘러와서 하나로 합쳐지는 부분을 두물머리 또는 합수지점이라 하는데 이 두물머리의 안쪽 땅은 언제나 행주형(行舟形) 명당이 된다. 두 물줄기가 합쳐지면서 만들어지는 뾰죽한 모양은 배의 머리부분을 나타내고 이는 물을 향해 나아가게 되므로 형국론에서는 이런 지역을 모두 행주형으로 보는 것이다.
부산의 금정산 범어사가 행주형국인데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형국이 행주형에 속한다. 그 이유는 사찰의 택지시에 반드시 물을 끼고 선정을 하는데 이 때 또 하나의 물줄기가 있어 합쳐진다면 이는 무조건 행주형이 되기 때문이다. 깊은 산속에는 여러개의 물줄기가 산자락을 타고 흐르게 마련이므로 거의 모든 산중사찰들은 이래저래 행주형국을 갖출 수 밖에 없다고 보면 된다. 이 밖에도 마을이나 집터가 행주형국인 곳이 많은데 공통점은 배 밑창에 구멍이 뚫려 배가 가라앉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주형의 마을이나 집터에는 우물 파는 것을 가장 금기시 한다.
낙안읍성의 바깥쪽으로 흐르는 동내와 서내가 옥산벌에서 합수하여 행주형국을 이루었다. 행주형은 배에 재화가 가득 실려야 떠나가게 되므로 이런 땅에서는 인물발복과 재물발복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따라서 행주형국에서는 배가 바람을 타고 잘 나아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돛대와 노(櫓)가 반드시 필요하다.
행주형국의 또 하나 특징은 배에 재화가 가득 실리게 되면 배는 항구를 떠나게 된다. 이는 명당의 발복이 끝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배를 떠나지 못하게 항구에 정박시켜 붙잡아 두는 닻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 만약 이러한 조건들을 갖추지 못한 행주형국이라면 흉지가 되어 발복이 일어나지 않는다. 낙안읍성의 닻은 교촌리에 있는 북산이다. 이로써 낙안의 발복은 영원토록 이어지게 된다. 돛대는 성안의 중앙에 있는 수령 약 400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이다. 이 나무가 돛대가 되어 순풍을 타고 배가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행주형국에서 돛대는 있어야 하지만 돛을 달아서는 안된다. 돛을 달면 배가 떠나게 되기 때문이다. 금정산 범어사의 당간지주에는 당간은 있었지만 한 번도 깃발이 내걸린 적이 없다. 풍수발복을 염두에 둔 까닭이다. 낙안읍성의 성곽 위에 수없이 많은 깃발들이 걸려 있다. 믿고 안믿고는 나름이지만 풍수적인 이유 한가지로만 본다면 깃발을 걸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군사들이 주둔하는 성곽에 어찌 깃발을 걸지 않을 수 있을손가.
동헌건물의 뒤쪽인 성곽의 북쪽벽을 타고 길게 심어진 나무들은 배를 젓는 노(櫓)가 된다. 수령 약 3백년에서 6백년 정도 된 32그루의 노거수(老巨樹)들은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낙안읍성의 보물로 여겨지고 있다.
지금은 수돗물이 있어 물을 풍부하게 이용하지만 옛날의 낙안읍성에는 우물이 없었다고 한다. 대신에 식수와 생활용수는 성안의 자연샘에서 솟아나 낮게 고인 샘물을 이용하였는데 이 물을 퍼내는 것은 배안에 고인 물을 퍼내어 배의 침몰을 막는 것과 같은 원리가 된다.
낙안읍성의 성곽모양은 도끼를 닮았다고 하여 금부형(金釜形)이라 부른다. 동쪽으로 난 성곽은 도끼날에 해당하고 서쪽 성곽은 도끼머리이며 남쪽 중앙으로 옥산까지 길게 이어진 도로는 도끼자루에 해당한다. 이로써 낙안은 바다에서 침략하는 왜구들을 도끼로 사정없이 내리쳐 물리치는 형국이라고도 풀이한다.
낙안읍성 동문 앞에는 석구상(石狗像) 한 쌍이 성문의 좌우를 지키며 서 있다. 석구상은 돌로 만든 개 모양이다. 이 한 쌍의 석구상이 바라보는 방향은 청룡자락인 멸악산이다. 이것을 설치한 이유는 멸악산의 기세가 너무 험하여 마을에 끼치는 살기를 막기 위한 풍수적 비보물이다. 왜 하필이면 개인가? 그것은 멸악산의 방향이 동쪽이기 때문이다.
개는 십이지지(十二地支)의 열두 띠 동물중 하나이다. 오행(五行)으로 보면 동쪽은 용을 뜻하는 진(辰)방향이다. 동쪽은 색깔로 볼 때 떠오르는 태양처럼 만물이 싹트는 생명의 색깔인 푸른색을 나타낸다. 그래서 혈장의 동쪽을 진호하는 산맥을 푸른 용이란 뜻으로 청룡(靑龍)이라 하며 또한 이는 혈장을 기준으로 볼 때 좌측에 해당하므로 좌청룡(左靑龍)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십이지지에서 진(辰)은 개를 뜻하는 술(戌)과 서로 충(沖)이된다. 따라서 개와 용은 서로 부딪치는 원수지간이 되기에 동쪽을 방어하고 용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개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또한 개는 도둑을 지키는 동물이니 동쪽인 진(辰)방을 향해 개를 설치하면 동쪽으로부터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모두 막을 수가 있는 것이다. 도선국사가 고려도읍지 개성 땅을 넘보는 동쪽 삼각산의 기운을 막기 위해 철로 만든 개를 진방에 설치한 것도 같은 원리이다.
여기서 풍수인테리어 지식하나 알아보자. 혹시 집에서 개를 키운다면 개집은 어느 방향에 놓아두는 것이 좋을까. 답은 뻔하다. 풍수인테리어의 원리란 모두 이러한 것이다.
각설하고 이와 같이 전략적인 운용목적아래 풍수적으로도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낙안읍성은 조그만 자연의 흠결까지 비보처리 하였기에 사람살기에 완벽한 명당길지임이 틀림없다. 삼천리 강토 모두를 살펴도 이보다 더 살기 좋은 지리조건의 고을은 흔치 않을 것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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