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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성씨(昌寧成氏) 시조(始祖) 성인보(成仁輔) 묘소
경남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창녕읍에서 우포늪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면 화왕산에서 발원하여 창녕읍을 가로질러 우포늪으로 흘러드는 물슬천 줄기를 만난다. 물슬천을 건너 다리를 넘으면 꽤나 잘 다듬어진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다.

마을 뒷산의 이름은 부리산(浮鯉山)이라 하는데 산의 동쪽 머리위에 창녕성씨(昌寧成氏)의 시조(始祖) 성인보(成仁輔)의 묘소가 있다. 고려 명종 때의 사람으로 호장 중윤을 역임하였고 고종 때에 이르러 창성(創姓)한 이래 창녕성씨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이 묘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어느 해 연초에 성인보는 개경에서 지방관리의 하례(賀禮)모임이 있어 그 곳에 임금을 알현하러 갔다가 병을 얻어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동행했던 문하시중인 아들 송국(松國)이 자신의 효성이 부족해 아버지가 객지에서 돌아가셨다고 자책하며, 나라에서 제공한 우마차와 장례비를 마다하고 몸소 지게에 아버지의 시신을 지고 천 리 고향 길을 내려왔다. 고향 땅이 가까워지는 현풍현에 이르러 해가 기울었다. 지친몸으로 깜박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아침이 되었고 밤사이 많은 눈이 내렸는데 시신의 주위에 호랑이 발자국이 찍혀져 있어 발자국을 따라 쫓아가 보니 지금의 묘자리에 이르러 그쳐 있었다. 신통한 것은 온천지가 하얗게 눈에 덮혀 있었는데도 묘자리 넓이 만큼은 눈이 녹아있어 그 자리에 아버지를 안장했는데 그런 연유로 호랑이가 잡아준 명당이라 불렀다 한다.
그 후 창녕성씨는 시조의 손자 공필(公弼), 한필(漢弼) 대에서 크게 두계통으로 갈라져서 6세에 내려와 기(紀)를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를 포함하여 13파로 분파되어 계보를 이어왔으며 사육신 성삼문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한 우리나라 명문가중의 하나가 되었다.
창녕의 진산 화왕산에서 발원한 용맥이 동북을 몸을 틀어 달리다가 관룡산, 열왕산의 웅장한 봉우리를 기맥하고 다시 서북으로 달려 왕령산을 세우고는 남으로 방향을 바꾸어 몸을 낮추다가 이곳 모산리에 이르러 물슬천을 만나 행룡을 멈추었다.
묘소가 있는 산을 부리산(浮鯉山)이라고 하는데 이는 산의 형상이 마치 잉어모양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물슬천의 물줄기와 맞닿은 산의 동쪽을 어두산이라고 하는데 잉어의 머리인 셈이다. 곧 잉어가 물슬천을 만나 물 속으로 풍덩 뛰어드는 형국이니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모습인가? 물고기형에서 혈처는 물을 마시는 잉어의 입이 있는 머리부분인데 시조묘는 정확히 머리부분에 위치하여 명당을 차지하고 있다.

이곳이 잉어의 머리부분에 해당한다는 것을 들판의 지명이 입증하고 있다. 물슬천 양쪽으로 넓게 펼쳐진 들판의 이름이 ‘어물리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어머리, 즉 ‘물고기의 머리에 있는 들(魚頭)’이라는 뜻으로 ‘어머리들’에서 그 어원을 찾는다. 이 어머리들 이름의 유래가 바로 시조묘가 있는 부리산의 동쪽 기슭을 부르는 어두산(魚頭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길지(吉地)에 자리한 시조묘의 발복으로 창녕성씨 가문은 대를 이어 번창하였으며 집성촌이 있는 모산리(牟山里)의 어물리들판도 풍년을 이루어온 셈이다.

묘소의 좌향은 정남으로 앉혔는데 금체의 안산에 멀리 조산이 배향하여 재물발복의 수려한 안대를 향했다. 화왕산에서 흘러오던 물슬천이 좌선수로 명당앞을 둥글게 금성수로 휘감아 돌아서 성씨 고가앞을 지나 우포늪까지 흘러가는데 명당을 향하여 들어오는 물줄기는 멀리서부터 굽이쳐 오는데 빠져나가는 부분은 보이지 않게 별안간에 그 모습을 감춘다.

잉어가 물을 만나 뛰어드는 형국에 금체형의 안대, 그리고 금성수의 득수까지 완벽하게 갖춘 명당이다. 아쉬움이 있다면 청룡과 백호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장풍이 허한 점이다.
묘소를 나와 우포늪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길가에 여러 채의 기와집이 한 곳에 모여있는 석동마을이 나타나는데 마을 입구에 있는 맨 첫집이 경상남도 지정문화재 제355호로 지정된 창녕석리 성씨고가(昌寧石里 成氏古家)이다.

창녕성씨 가문의 전통가옥으로 ‘성부자집’으로 통하는 이 집은 지난 53년 일본에서 양파씨를 가져와 창녕에서 처음 재배한 것으로 알려진 성재경의 생가도 포함돼 있다. 고가입구 주차장 옆에는 양파시배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우리나라최초로 양파가 재배되었으며, 창녕을 양파의 본향으로 만든 발산지이다.

성씨 고가는 1850년경 이곳에 터를 잡은 입향조 성규호(成圭鎬)가 지은 집인데 최근들어 이 집이 유명세를 타게 된 동기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처 성혜림이 어린시절을 이 집에서 보낸 것이 알려지면서부터다. 투철한 반공정신의 냉전논리가 지배하던 시절에 이 지역 사람들은 성혜림이 이곳에서 자랐다는 것을 알리기 싫어하였다. 그러다가 90년대 김일성 사망 이후에 본격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여 세인들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성혜림의 부친 성유경은 남로당 재정국장을 역임하다 월북하였는데 6. 25전쟁 이후부터 70년대까지는 사람들은 “전쟁이 나서 김일성이가 쳐들어오면 모두 창녕으로 가라 설마 김일성이가 며느리의 고향에 원자탄을 쏘겠느냐”고 했다 한다. 그러다 그 후 성혜림이 러시아로 망명하자 “이제는 창녕을 떠나야 한다. 김정일이가 전쟁나면 도망간 자기 처의 고향에 제일 먼저 원자탄을 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성인보 시조 묘에서 멀지않은 곳에 국내 유일의 창녕성씨 문중서원인 물계서원(勿溪書院)이 있다.

물계서원은 고려 문하시중 성송국선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712년(숙종38)에 사우를 건립하여 창효사(彰孝祠)라 명명한 것인데, 그 후 1719년(숙종45)에 세덕사(世德詞)라 개칭하면서 서원의 규모로 확장하게 되었다. 고종3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폐하게 되어 물계정으로 개편하였다가, 1995년 복원하여 지금은 1성(창녕성씨)21위의 위패를 봉향하고 있는데, 동방 18현의 한 사람인 우계 성혼(成渾), 고려말 충신 성여완(成汝完),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성사제(成思齊), 조선 개국공신 성석린(成石璘), 사육신 성삼문(成三問) 등 모두 창녕성씨 문중의 조상들이다.

특히 시조 성인보(成仁輔)의 6세손인 성사제는 고려가 망하자 “차라리 왕씨의 귀신이 될지언정 이가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寧爲王氏鬼不作李家臣)”고 말하고 두문동으로 들어갔으며, 부인에게 “나는 고려의 신하라 신조(新朝·조선)에 벼슬해서 조상을 욕보이지 않을 것이고, 이제 곧 죽을 것”이라며 “아들을 데리고 고향(창녕)으로 돌아가서 선영을 지키라”고 하여 나라와 운명을 같이했던 인물이다.
조선중기 좌의정까지 지낸 이복원(李福源, 1719~ 1792)은 물계서원에서 조상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것을 두고 “고금에 창녕성씨 일가뿐이며, 천하에 물계서원 하나뿐이다. 아, 거룩하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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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정선생님 스크랩 해 갑니다. 보고 열심히 공부 할께요. 감사합니다.
창녕성씨 30세손입니다.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또한 자랑스럽습니다. 후손으로서 모르던것을 많이 알게 되어 정말고맙게 생각하고 감사 말씀 드립니다.07.02.24
아하 메뚜기님 그러셨군요, 사실 저희 모친이 창녕성씨랍니다. 그래서 저도 더욱 좋아했는데, 암튼 반갑습니다.
작년에 종친모임에서 창녕에 다녀왔는데 시조님의 묘소와 물계서원의 모습을 담아오질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여기서 보니 그때의 모습들이 생생히 떠오르는군요 감사드립니다!
전 28대입니다 반갑습니다 ^^
저는 27세손입니다. 온몸에서 전율이 느껴 집니다., 저도 저 화왕산의 기를 받고 태어나 자라서 요기까지 성장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릴때 화왕산을 바라보면서 꿈을 기웠을가요 , 화왕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 개울에서 발가벗고 물놀이 하던 시절이 그립네요, 꼭 한번 시간 내어 할아버지 산소에 참배하고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