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리 말
히브리서 13장에서는 믿음의 고향을 사모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잠시 거쳐 가는 이 세상에서 어떤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지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권면하고 있습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1~2절)“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4절)“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5절)"그들이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를 살펴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십시오."(7절)
마땅하고 옳은 윤리입니다. 그런데 굳이 믿음이나 신앙이라는 이름을 내걸지 않아도 우리는 손님을 환대할 수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가 지켜야 할 윤리 규범입니다. 돈의 문제도 비슷합니다. 이런 행위는 ‘믿음’이나 ‘신앙’의 이름을 빼놓고 강조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열매만 놓고 보면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 가운데 사는 것이겠습니까?
몸 말
마태복음 7장 하반 절에 보면 ‘반석 위에 세운 집과 모래 위에 세운 집’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는 열매에 관한 비유가 아닙니다. 그 앞에 나오는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에 관한 비유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17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비유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좋은 나무가 아니라도 주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님 이름으로 권능도 행하고 선지자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말씀으로 돌아와서 생각할 때, 믿음이 없이도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문제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반석 위에 세운 집과 모래 위에 세운 집 비유의 핵심은 ‘우리의 신앙 고백의 근거’에 관한 문제입니다. 제 아무리 능력을 행하고 병자를 고쳐도 그 사람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믿음의 초석을 두지 아니하면 나중에 주님께서 ‘모른다’고 하신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래서 7-8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행실을 강조하기 전에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말합니다. 행실을 본 받으라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지도자들이 어떤 신앙 고백 위에서 삶을 살았는지 그 믿음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어떤 신앙 고백 위에서 생활하였기에 그들이 행실의 결말이 어떠한지를 주의 깊게 관찰해 보라고 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께 일관된 믿음의 본을 보였습니다. 일관된 신앙 고백 위에서 살았기에 그들이 믿음 위에서 행한 것들은 결실을 맺어 교회를 든든하게 하였으며 영적 파워를 발휘하여 박해의 상황 속에서도 성도들이 흔들림 없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관된 신앙 고백 위에서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제를 사랑하였으며, 손님을 귀하게 대접하였으며, 학대받는 자, 갇힌 자를 위로하였으며, 가정을 중히 여기고 돈으로 대표되는 물질에 초연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믿음을 본받으라는 겁니다.
초대 교회에 기독교를 세계화한 탁월한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바울입니다. 그는 어떻게 하여 그토록 심각한 논쟁과 도전 핍박 속에서도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주를 전하며 원시 기독교를 세계화하였습니까? 그는 사랑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고후 1:24) 이것이 탁월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줄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다른 이를 조정하거나, 다른 이를 지배하려 해서는 결코 좋은 영향력을 주면서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지배하고 주장하려고 하지 말고 상대의 삶의 기쁨을 고양시키도록 돕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산마루 서신)
어떤 일을 잘하려면 그 일을 좋아하고 즐기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 앞에 놓여진 문제도 그렇습니다. 어차피 마주쳐 해결해야 할 문제라면 미루고 불평하는 것보다 바로 손끝에 잡히는 일부터 차근차근 즐거운 마음으로 해 나가는 것이 현명합니다. 먼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있음을 기뻐하고 이 일을 통해 더 큰 은혜와 축복을 주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또한 지금의 고통이 단지 고통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성공의 기회와 더 큰 일의 밑거름이 될 것임을 확신하며 최선을 다해 문제와 부딪히십시오. ‘어떤 일을 할 때 기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능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뻐하는 것이 힘이다. 생명이 넘치면 넘치는 기상이 우리로 하여금 기쁨으로 사명을 감당하게 만듭니다.’ (전병욱 목사의 ‘생명력’ 중에서)그것이 기쁨의 능력입니다.
자녀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심어줄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선물은 없을 것입니다. 감사의 말과 기쁨의 표정, 섬김과 나눔의 손길을 자녀에게 전하십시오.율법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활 속에서 함께 경험하십시오. 말씀을 가르치려하기보다 말씀이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 느낄 수 있도록 먼저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리고 진정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를 사랑하시며, 그것은 자녀 양육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을 전할 때 따분한데다 ‘종교’로 엄격히 구분되는 전달이어서는 안 됩니다.자연스러워야 합니다. 감히 말하자면, 재미있어야 합니다.-샤론 제이너스의 ‘엄마 미션 스쿨’ 중에서-
그래서 빌리 선데이는 “당신에게 기쁨이 없다면 당신의 기독교는 어딘가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이다.” 했습니다. 또 프레드릭 뷔히너는 “주님의 은혜는 이런 것입니다. 당신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당신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삶은 당신이 꼭 있어야만 완성되는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과 예배는 기쁨의 잔치입니다.
우리가 본 받아야 할 것 중에서 가장 먼저 본 받아야 할 것이 있다면 믿음의 선진들이 지켰던 이 ‘믿음’ '한결같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 이것을 먼저 본 받아야 합니다. 그 마음, 그 중심성에서 행하는 우리의 모습들은 자연스럽게 형제를 사랑하게 되고, 손님을 마음으로 귀하게 대하며, 약한 자를 위로할 것이며, 물질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주님을 우리도 일관되게 신뢰하고 믿는 굳건한 믿음 생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9-16절 말씀은 ‘삶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는 표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새 언약의 성취로 구약적인 예배 방식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고 제물로 돌아가셨습니다. ‘성문 밖’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는 곳으로 성문 밖에 있다는 것은 이방인들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며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것으로 이해되곤 하였습니다만, 예수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성문 밖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며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함을 말합니다.
‘성문 밖’이라는 표현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종교적인 예배 의식에서 벗어나 삶의 현장으로 나가서 드리는 산 제사(산 예배)가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산 제사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야 함을 말합니다. 둘째, 성문 밖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장소입니다. 세상의 핍박과 고난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의롭게 사는 것이 성문 밖에서 드리는 산 제사입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솔로몬 성전처럼 크고 모든 것을 갖춘 곳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닌 보잘 것 없는 곳에서 드리는 예배, 그러기에 죄송스럽고 진정한 믿음만이 유일한 제물인 그런 초라하지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성문 밖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목적은 한 가지입니다. 사람들을 거루하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자기 만족이나, 자기 의가 아닌 사람들을 성결케 하시려는 것이 예수님이 성문 밖에서 ‘어린 양’으로서 제물이 되신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 앞의 교훈처럼 바로 그것을 본 받아야 합니다.
13절을 보면 ‘그런즉 우리는 그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하십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기 십자가’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기 십자가는 과연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이 확실하다면 그것을 짊어지고 그 길을 가고 있습니까? 교회에서 적당히 봉사하면서 장로, 권사 되려고는 기를 쓰면서 막상 안 되면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떠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바로 그 치욕을 짊어지고 성문 밖으로 나아가는 삶이 아니라 장로, 권사 되려고 무늬만 십자가를 진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이곳의 것들이 영원할 것이라 믿지만 사실은 14절 말씀처럼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는 인생이어야만 합니다. 남들이 볼 때 힘겹고 미련한 듯 보이나 사실은 십자가의 길이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한 길이고‘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복된 삶입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않을 때 이런 삶과 그런 사람의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무 힘겹고 캄캄하면 때로는 하나님을 느끼기도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몸은 예배당에 나가도 마음은 세상이나 걱정 가운데에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음 속 깊이 느껴질 때 예배의 기쁨이 있습니다. 마음에서 진정으로 예배가 드려지지 않을 때보다 가슴 답답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성도들이 예배의 기쁨에 빠져있을 동안에는 그 개인과 가정과 사업의 모든 일들이 풍성해지는 것을 봅니다.
큰 산을 등산하시는 분들에게 중요한 것은 베이스 캠프입니다. 히말라야 같은 산을 오를 때면, 베이스 캠프를 어디다가 어떻게 치느냐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베이스 캠프에서 준비해서 산을 오릅니다. 그게 끝이 아닙니다. 나갔다가 지치면 베이스 캠프로 와서 쉬고, 정상에 올라가도 꼭 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베이스 캠프와 연락입니다. 연락이 안 되면 큰 일 납니다. 실종 처리되지요.캠프 철수해 버리면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고생합니다.죽을 수도 있습니다. 예배가 여러분의 베이스 캠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것에 예배가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예배 없이는 뭐라도 하실 생각을 마십시오. 항상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저 안녕히 잘 있습니다." 연락을 하셔야지요. 예배는 내 삶의 기본입니다. 우리의 집은 하늘 나라에 있기에 우리는 이 곳에서 베이스 캠프인 교회가 중요합니다. 물론 산행을 하다 보면 자기 텐트를 치고 자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물도 음식도 많지 않습니다. 베이스 캠프에 와야 그것을 공급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꼬리 말
자 그럼 이 시대 하나님의 기쁨이 될 만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돈도 안 되고 수익성도 없지만 지금 꼭 필요한 사역. 저는 그것이 ‘이다’ 사역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이주 노동자, 이주 혼인자, 다문화 가정의 앞 글자를 따서 그렇게 부르고 싶습니다. 송탄은 6.25 전쟁 때부터 다문화 가정이 많은 곳이고 앞으로 평택항이 커지고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해 질수록 이 지역, 나아가 우리 나라의 큰 비중이 될 것이기에 기도하며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얼마나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것이 보이기 때문이요, 누군가는 반드시 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쁨, 그것을 위해 준비하는 솔숲 공동체가 되시길 축원합니다.